◀ 북한산 둘레길 '마실길' ▶
▲ 은평뉴타운 개발지역에서 바라본 응봉능선과 비봉능선
【 걷기일자 】 2010년 9월 23일(목)
【 걷기코스 】'삼천사입구'버스정류장-(접근)→진관생태다리(에코브리지)/마실길 들머리-(은평뉴타운 개발지역 미완성도로)→┬자삼거리/'느티나무'보호수→진관사입구/┤자갈림길↔진관사→소공원→삼천사입구/┬자갈림길→'창릉천'다리/4차선포장도로-(도로따라 진행)→'창릉천'다리/├자갈림길→→전차부대(방패교육대)앞 ┤자갈림길/마실길 날머리 & 내시묘역길 들머리(나무아치)
▲ '마실길' 고도표
【 코스거리 】 약 1.50km
*이정표 기준 각 구간별 거리(1.5km) : 진관생태다리-(0.6km)-진관사입구-(0.5km)-삼천사입구-(0.2km)-창릉천 다리/4차선포장도로-(0.2km)-방패교육대앞 ┤자갈림길/내시묘역길 들머리
【 소요시간 】 총 1시간 18분 소요(접근, 진관사 탐방 & 휴식 : 46분 포함)/실제 둘레길 걷기 시간 : 32분 소요
【 날 씨 】 맑 음
【 교 통 편 】대중교통 이용
*하늘길 날머리 & 마실길 들머리 : 진관생태다리앞(진관사)
-구파발역/3호선 1번출구에서 #7211번 시내버스 이용하여 '삼천사입구' 하차=>길 건너 도보 8분
※ 참고 : 북한산국립공원 홈페이제에서 안내한 구파발역 3번출구의 #7724번 시내버스는 노선이 폐쇄되어 운행이 중단.
*마실길 날머리 & 내시묘역길 들머리 : 전차부대앞
-구파발역/3호선 1번출구에서 #704번, #34번 시내버스 이용하여 효자동마을금고 하차=>도보 5분
【 코스탐방 】
추석 연휴 마지막 날!
추석 연휴 첫날, 집중호우가 내려 대기중의 모든 먼지와 오염 물질들을 싹 쓸어내린 때문인지 맑게 갠 청명한 가을 날씨가 집을 나서게 만든다. 귀경차량으로 모든 고속도로가 정체와 지체의 몸살을 앓고 있어 감히 장거리의 산행이나 여행을 꿈꾸지도 못하게 하는 상황이라 가까운 북한산 둘레길 트레킹을 하기로 한다.
10시가 넘은 시간 집을 나서 시간이 허락하는데 까지 2~3개 구간 탐방을 목표로 북한산 둘레길 9번째 구간인 마실길 들머리에 접근하기 위해 구파발역에 도착한 시간이 정오를 넘긴 12시 6분경.
북한산국립공원 홈페이지에 공지된 3번출구에서 진관외동 종점행 7724번 시내버스를 타기 위해 버스정류장에 도착을 하니 버스 노선안내도에는 7724번 시내버스의 노선표는 없고 노선이 폐쇄되었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하는 수 없이 길 건너 구파발역 1번출구 앞의 버스정류장에서 지난 번 구름정원길(하늘길) 탐방 후 탈출을 할 때 이용하였던 7211번 시내버스를 이용하기로 한다. 다양한 접근로를 이용해 보고, 지난 번 구름정원길 탐방 때 늦은 시간대에 도착을 하여 주위가 어두워져 제대로 둘러보지 못하였던 '화의군 이영묘역'을 다시 방문해 볼 계획이었지만 노선이 폐쇄되어 계획대로 진행을 하지 못하여 아쉽기만 하다.
추석 연휴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마실길 들머리인 '진관생태공원' 앞에 이르니, 가족 단위의 탐방객들이 많은 때문인지 제1구간 '소나무숲길'부터 제8구간 '구름정원(하늘길)'까지 탐방할 때보다 오가는 엄청 난 탐방객들로 붐비어 예전보다 활기는 넘치지만 주위가 어수선하고 시끄러워 호젓하게 주변의 경치를 둘러보며 쉬엄쉬엄 즐기며 걷기가 어려웠다.
또한 이전의 구간에서 느꼈던 산길과 숲길, 그리고 계곡 속의 트레킹이 아니라 마을길과 도로 등이 주를 이루는 코스가 이어져 많은 인파로 인한 어수선함과 분잡함까지 더해지고, 둘레길과 도로변에 길을 막고 주차해 놓은 등산객과 둘레길 탐방객들의 차량들로 더 한층 짜증이 가중된 탐방길이 되었었다.
마실길은 이번에 개장한 북한산 둘레길 13개 구간 중 가장 짧은 구간으로 '마실'이란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이웃에 놀러 가다'란 지방사투리의 원 뜻을 살리는 마실나온 기분으로 천천히 걸어가며 산책을 하듯 즐길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한 코스 분위기가 아니었다. 들머리인 진관생태다리부터 진관사입구까지 전체 구간의 1/3이 넘는 0.6km 구간이 은평뉴타운 개발지역으로 아직 도로와 택지 조성공사가 진행중인 현장을 통과해야 하고, 진관사 입구와 소공원 사이의 계곡에는 둘레길 계단과 다리공사가 진행 중이라 완전한 둘레길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또한 소공원을 벗어나 창릉천에 이르면 4차선 포장도로 인도를 따라 다음 구간인 내시묘역길로 연결되게 되어 있어 북한산 자락을 진행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코스였다.
그러나 진관사 입구 갈림길에서 0.5km 떨어져 있는 진관사를 방문하여 경내를 둘러보고 진관사 앞을 흐르는 진관사계곡의 시원한 물소리에 온갖 잡념을 잊고 잠시나마 휴식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된 코스였다.
▲ 진관생태다리앞에서 '구름정원길(하늘길)'가는 입구
▲ 진관생태다리앞의 사라진 둘레길 안내도('하늘길' 탐방 때 촬영한 사진)
▲ '마실길' 들머리의 이정표와 진관생태다리
12:44=>진관생태다리앞/마실길 들머리
구파발역 1번출구에서 버스를 타고 지난 번 '구름정원길(하늘길)' 탐방을 마치고 탈출을 하였던 '삼천사입구' 버스정류장(7211번 시내버스 운행)에 도착(12:32)하여 오늘 북한산 둘레길 탐방 첫번째 구간인 '마실길'의 들머리인 진관생태다리 앞에 도착을 한다.
지난 번 '구름정원길(하늘길)' 날머리로 이곳에 내려섰을 때 설치되어 있었던 둘레길 안내도는 어떻게 된 일인지 철거가 되어 보이지 않고 이정표(↓북한산둘레길<구기동>, 불광중학교 2.8km/→북한산둘레길<진관동>, 진관사입구 0.6km)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난 번 탐방 때는 나홀로 탐방을 한 것처럼 이곳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인적조차 찾을 수 없었는데, 오늘은 추석 연휴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그렇지 않으면 북한산 둘레길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서 그런지 양 방향으로 탐방객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활기가 돈다기보다는 어수선하고 분잡스럽기까지 하다.
아직도 진행중인 은평뉴타운 택지 및 도로 공사가 많은 탐방객들이 붐비니 더욱 더 주변의 분위기를 어수선하게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 택지조성공사가 진행중인 은평뉴타운 개발지의 미완성도로를 따라서...
미완성의 비포장도로를 따라 진관사입구쪽으로 내려가면 좌측으로 조성중인 소공원에 2개의 푯말이 있어 수령이 130년인지 200년인지 알 수가 없는 느티나무가 있는 ┬자 삼거리(12:53)에 이르게 된다.
▲ ┬자갈림길 직전의 보후수와 이정표
정면 길 건너 이정표(마실길, ↓북한산둘레길<불광동>/→북한산둘레길<효자동>)가 '마실길' 구간임을 알려주고 있다.
우측으로 길 따라 100여m를 올라가면 대형 둘레길 안내도와 이정표(↓북한산둘레길<불광동>, 불광중학교 3.3km/←북한산둘레길<효자동>, 삼천사입구 0.5km/↑진관사 0.5km)가 있는 ┤자 갈림길이 나타난다.
▲ 진관사입구 갈림길의 둘레길 안내도와 이정표
12:54~12:56=>진관사입구
직진의 길 따르면 0.5km 떨어진 곳에 진관사가 위치해 있고, 진관사 앞을 흐르는 진관사계곡을 따라 북한산 비봉능선의 비봉으로 오르는 등산로와 진관사 일주문 직전 우측으로는 비봉능선의 향로봉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연결이 된다.
다음 기회에 이곳에서 '진관공원지킴터-진관사 일주문-향로봉-비봉-진관사계곡-진관사-진관공원지킴터' 코스로 원점회귀 산행을 실시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이번 구간은 짧은 코스라 진관사를 다녀오기로 한다.
▲ 진관공원지킴터와 진관사 입구의 극락교와 일주문
직진의 길을 따라 올라가면 우측에 대형 주차장이 있고, 진관공원지킴터를 지나 잠시 더 오르면 진관사계곡을 가로 지르는 극락교 다리에 이르게 된다. 극락교 입구 우측으로 계곡을 끼고 나무데크 등산로가 이어지는데 이 길이 비봉능선의 향로봉으로 향하는 등산로 이다.
▲ 극락교에서 바라본 진관사계곡
▲ 극락교에서 바라본 진관사계곡 옆으로 설치된 향로봉으로 이어지는 나무데크 등산로
극락교를 건너면 진관사 일주문이 있고 이를 지나면 진관사 건물과 담장이 나타난다.
13:02~13:20=>진관사
누각 건물인 '홍제루'를 통해 경내로 들어서면 정면으로 대웅전, 그 우측으로 명부전, 독성전, 삼신각이 차례로 자리를 하고 있으며 칠성각 앞으로는 나한전이 절 마당을 바라보며 위치해 있다.
또한 경내로 들어서면 좌측에는 범종각이 있고, 경내 앞 마당 좌측으로 나가원, 동정각, 요사채 등 여러 동의 건물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오늘 마실길 탐방로는 거리가 짧고 주변에 특별히 소개할 문화재나 볼거리가 없으므로 이곳 탐방기에서는 진관사의 창건 및 역사, 그리고 진관사의 불전들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12종 36점의 성보유물들 중 일부를 소개하기로 한다.(아래 내용과 일부 사진들은 '진관사' 홈페이지에서 발췌하여 작성하였음)
♧ 진관사(津寬寺)
대한불교조계종 직할사찰로 동쪽의 불암사, 남쪽의 삼막사, 북쪽의 승가사와 함께 예로부터 서울 근교의 4대 명찰로 손꼽히는 이름난 사찰이며, 수륙도량으로 유명하다. 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 등의 혼령들에게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풀어 그들을 구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수륙재(水陸齋)가 매 윤년 윤달에 크게 열리는 수륙도량 진관사는 비구니스님의 단아한 수행처로 북한산 국립공원내의 아름다운 자연 환경과 더불어 현대를 살아가는 서울 시민들에게 마음의 평안과 일상에 찌든 때를 말끔히 씻어주는 청량제 역할을 하고 있는 사찰이다.
거란의 침입을 막아내고 국력을 수호한 고려 제8대 현종2년(1011년) 진관대사를 위해 창건했으며, 6.25전란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중창된 고찰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신라시대 고찰이라는 설과 조선 후기 승려 성능이 편찬한 '북한지'에서는 원효대사가 진관대사와 더불어 삼천사와 함께 창건했다는 설도 있다.
전해 내려오는 연기설화에 의하면 고려 제5대 경종(975~981재위) 때로 거슬러 올라가 981년 경종이 서거하자 성종을 거쳐 경종의 왕비인 헌애왕후(964~1029)는 그의 아들 송이 왕위에 올라 목종이 되었을 때 천추태후가 되어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고, 성종년간에 김치양과 정을 통해 몰래 사생아를 낳게 되었는데 마침네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을 왕위에 앉히려고 하였다.
이런 정쟁 가운데 목종에게 아들이 없어 헌애왕후의 동생 헌정왕후와 태도의 아들인 욱의 사이에서 태어난 대량원군 순이 왕위 계승자로 봉해진다.
이를 기회로 태후는 자신의 사생아를 옹립하기 위해 목종에게 참소하여 대량원군을 승경사에 가두고 죽임을 꾀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대량원군을 다시 진관대사가 혼자서 수도하는 삼각산의 한 암자로 축출하게 된다.
대량원군의 신변이 위험함을 느낀 진관대사는 산문 밖에 망보는 사람을 배치하는가 하면 본존불을 안치한 수미단 밑에 굴을 파서 그 안에 12세인 대량원군을 피신시켜 자객으로부터 화를 면하게 하였다. 대량원군은 이곳에서 3년을 보내게 되었고, 1009년 강조가 군사를 일으켜 목종을 폐위하고 왕순을 왕위에 옹립하니 대량원군 순이 제9대 현종으로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대량원군은 재생의 은덕에 고개 숙여 감사하고, 진관대사와 눈물로 작별하면서 자신이 거처했던 굴을 신혈이라 하고 절 이름을 신혈사로 바꾸기를 청했다.
그 후 왕위에 오른 현종은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신혈사 인근의 평탄한 터에 진관대사의 말년을 위해 크게 절을 세우게 하고, 진관대사의 이름을 따서 진관사라 명하였으며, 그 후 마을 이름도 진관동이라 부르게 됐다.
진관사의 창건 불사는 1011년 가을에 시작하여 만 1년 동안 공사하여 1012년 가을에 준공하였다. 당시 대웅전이 사방 10칸, 동.서 승당이 각 30칸, 청풍당과 명월요가 각 10칸, 제운루, 정재소, 일주문, 해탈문, 종각, 창고 등 상당한 규모로 건립되었으며, 불상과 장엄구, 일상도구 등 사찰에 필요한 일체의 모든 것을 현종이 지원하였다.
현종은 이 진관사에 최고의 정성을 모아 불사를 일으켰고, 완공 그해 10월에 낙경볍회를 연 후 진관대사를 국사로 책봉하였다. 이후 진관사는 임금을 보살핀 은혜로운 곳이라 하여 고려시대 여러 왕이 왕래하면서 왕실의 각별한 보호와 지원을 지속적으로 받게 되었다. 선종7년(1090년) 10월에 왕이 직접 행차하여 오백나한재를 성대하게 봉행하였고, 숙종4년(1099년) 10월에는 숙종이 천관사에 친행하였으며, 그 후 예종5년(1110년) 10월에는 예종이 순행하는 등 역대 왕들의 참바\ㅐ하고 각종 물품을 보시하는 국찰로서 자리를 잡게 된다.
고려시대 이래로 역대 왕들의 왕래가 빈번했던 진관사는 조선시대에 수도를 서울로 옮기면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어는데, 특히 수륙재의 근본도량으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 권근이 저술한 '수륙사조성기'에 의하면 조선 태조6년(1397년) 정월에 태조는 내신 이득분과 조선스님에게 조상의 명복을 빌고 나라일로 죽어 제사조차 받지 못하는 굶주린 영혼을 위해 수륙사를 설치할 것을 명하게 되었고, 이에 이득분과 상충달, 지상스님은 북한산과 도봉산을 답사한 결과 수륙재를 열기에 가장 적합한 곳으로 진관사를 선정하게 되었다.
수륙사 건립은 조선을 건국하면서 전쟁에서 죽어간 고려왕실의 영혼을 기리는 목적에서였으며, 내면으로는 불안정한 국민정서의 동요를 막고 조선왕실의 안정을 꾀할 목적을 겸하고 있었다. 이후 태조는 진관사에 수륙재를 개설하도록 공사를 지시하고 직접 행차도 하였으며, 1397년 9월 낙성식에도 참여하였다. 이에 고려시대 역대 왕들의 지원을 받던 진관사는 조선왕조의 국가적 수륙재가 개설되는 사찰로서 다시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당시 진관사에 조영된 시설물들은 모두 59칸으로 상.중.하단의 삼단을 기본구조로, 중.하단에 행랑이 연이어 들어서 있는 왕실사찰로서의 위엄을 갖추게 된다. 이후 불교를 배척하던 태종 역시 태종13년(1413년)에 진관사에서 성녕대군을 위한 수륙재를 열고 향과 제교서를 내렸으며, 수륙재위전 100결을 하사하여 재를 계속하게 하였다. 따라서 매년 1월 또는 2월 15일에 수륙재가 열려 조선왕실의 명실상부한 수륙도량으로서 인정받게 되었으며, 국찰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세종3년(1421년)에는 태종 내외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재를 올린 이후부터 왕실의 각종 재를 봉행하는 사찰로 국가에서 정례화시켰다. 그리고 세종24년(1442년)에 진관사에 집현전 학사들을 위한 독서당을 세우고 성삼문, 신숙주, 박팽년 등과 같은 선비들을 학업에 몰두하도록 하였다. 독서당 건립 후 진관사에서는 학사들과의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왕실과 사대부, 그리고 서민들까지 애용하는 전 국민의 사찰로 확대되었다.
문종2년(1452년) 대대적인 중창불사가 이루어지는데, 세조9년(1463년)의 화재로 일부가람이 소실되었으며, 성종원년(1470년) 벽운스님이 다시 중건하고, 철종5년(1854년)과 철종9년(1858년)에 중수, 고종16년(1879년)에는 당두화상 경운대선사가 큰방 34칸을 지어 국찰로서의 대가람을 형성하게 되었다.
근대에는 1908년 송암선사가 경내에 오층석탑을 조성하였으며, 1910년에는 경운선사에 의해 대웅전 삼존불을 개금하고, 명부전의 지장보살상과 시왕상, 시왕탱화 등을 개금, 보수하는 등 대대적인 중창불사가 이루어졌다. 또한 독성전과 칠성각을 신축하고 자신이 소유했던 토지를 사찰에 무상으로 돌려 '백련결사염불회'의 자금으로 사용하게 함으로써 근대 진관사 중창주로서 족적을 남겼다. 그러나 6.25 전란으로 나한전 등 3동만을 남기고 모두 소실되었다.
이에 폐허만 있던 진관사는 1963년 현 회주이신 비구니 최진관스님이 발원하여 건물을 차례로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는데, 1965년 현재의 대웅전을 신축하고, 1966년에 삼존불을 조성하였으며, 1967년에는 후불탱 및 신중탱을 조성하여 진관사 주법당을 여법하게 일신하였다. 1968년에는 명부전을 비롯하여 1969년 지장보살과 시왕상을 조성하였으며, 1970년에는 일주문과 동별당을 신축, 1972년에는 나가원 신축, 1974년에는 범종 조성, 1975년에 동정각 신축 등 진관스님의 불사로 옛 가람의 자취를 찾는 여법한 가람이 복원되었다.
또한 진관스님은 부처님의 자비사상과 중생구제의 원력을 사회복지와 포교 활동을 통하여 실현하고자 1996년에 진관사 부설 포교당인 보현정사와 코끼리유치원을 신축하였으며, 2007년 9월에 사회복지법인 진관무위원을 설립하여 지역사회 복지증진을 위한 또 다른 장을 열었다.
♧ 진관사의 불전과 문화재들
▲ 경내로 들어서는 홍제루와 절 앞의 보호수
- 진관사 홍제루 진관사 경내로 들어가기 전 초입에 있는 누각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형식의 건물로서1층은 석주기둥으로 구성되었고 2층은 팔작지붕의 목조건물로 1977년에 진관스님이 신축한 건물이다. 절에 진입하는 출입구로 경내에 들어서려면 누각아래의 중앙 계단통로를 이용해야 하는데, 건물 1층은 석주를 세워 하부구조가 드러나 있으며, 석주에는「대종대시주비」가 새겨져 있어 조선후기 진관사의 역사를 짐작할 수 있다. 이외 석주 좌우로는 목조로 만든 출입구가 있으며, 출입구에는 사천왕문을 대신한 듯 인왕상이 단청되어 있다.
이 외 2층은 현재 강당으로 사용되는데, 내부는 우물마루를 깔아 사찰을 참배하고 집회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였으며, 외부는 계자난간을 둘러 진관사를 찾는 참배객들의 휴식처로도 사용되고 있다.
- 진관사 대웅전 주법당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다포계 단층건물로 정면 13.6m, 측면 8m의 크기이다.
기단의 초석만 원래의 것이고 건물은 1965년 중창주 진관스님이 신축한 것으로, 장방형의 기단 위로 원형초석을 두고 그 위로 두리기둥을 세워 다포를 받친 모습이다.
다포는 용두와 어우러져 한껏 주법당의 위엄을 보이며, 팔작지붕 위에 깔린 청기와는 뒤의 삼각산을 배경으로 한껏 조화를 이룬다.
대웅전의 외부는 삼면에 외벽화를 장엄한 모습으로, 외벽은 삼우도와 비천으로 단청되어 있으며, 어간에는 편액과 주련 6기가 걸려있다. 건축창호의 살 짜임새는 앞면 양칸은 빗살이며 중앙에만 솟을빗살꽃살로 짜여져 있고 용머리를 중앙문 양쪽에 조각하여 대웅전을 수호하고 있다.
건물 내부는 중앙 감실형 불단위에 1966년 조성된 석가모니불, 미륵보살, 제화갈라보살의 수기삼존불을 모시고, 그 뒤로 1967년에 금어 일섭스님이 조성한 삼신불후불탱화를 봉안하였는데 중아에 비로자나불을 주존으로 그 왼쪽에 노사나불, 오른쪽에 석가여래를 배치하였다.
삼존불 우측 벽에는 1990년 금어 수산 임석환이 조성한 오여래탱화, 좌측 벽에는 1967년에 조성한 신중탱화와 1934년 화경스님이 그린 현왕탱화를 봉안하였다.
불구로는 1966년 조성된 높이 93cm, 구경 57cm의 범종이 있으며, 후불벽 뒤로 괘불궤와 괘불이 있다.
▲ 나란히 자리잡은 대웅전(左)과 명부전(右)
- 진관사 명부전은 대웅전 좌측에 있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건물에 다포계 단층 목조건물인데, 정면 9.6m, 측면 8m의 크기로 1968년에 진관스님이 세운 것이다. 현재의 건물은 1996년에 다시 신축한 것으로, 낮은 기단 위에 원형초석을 두고, 그 위로 두리기둥을 세워 다포를 얹은 모습이다.
건물 외부는 3ㆍ4분합의 교살문을 두고 삼면에 지장보살과 연관된 반야용선도와 지장보살 영험도를 단청하였으며, 어간에는 탄허(呑虛)스님이 쓴 편액과 주련 4기를 걸었다. 건물 내부는 후벽에 맞붙여 삼면의 벽에 ㄷ자형의 불단을 가설하였는데, 그 위로 1969년에 조성한 지장보살상과 도명존자상, 무독귀왕상, 그리고 저승계의 심판관인 시왕상(十王像)과 시왕을 시봉드는 동자상(童子像), 사자(死者)를 심판하는 판관(判官)과 기록을 담당하는 녹사(錄事) 그리고 문 입구를 지키는 장군상 1쌍을 봉안하였다. 이외 후불벽에는 1997년에 금어(金魚) 임석환이 그린 지장시왕탱화(地藏十王幀畵)과 시왕탱화(十王幀畵), 사자탱화(使者幀畵)를 두었으며, 높이 43㎝, 구경 28㎝의 범종(梵鐘)이 있다.
▲ 명부전 우측에 자리를 잡고 있는 독성전, 삼신각 그리고 앞쪽에 위치한 나한전
- 진관사 나한전은 대웅전 좌측 축대 위에 있는 정면 3칸(8m), 측면 1(4m)칸의 맞배지붕의 익공계 목조 단층 건물로 근래에 새로 중창하였다.
건물은 화강암으로 만든 낮은 기단 위에 원형초석을 두고 그 위로 두리기둥을 세워 평방 위로 익공을 얹은 모습으로, 건물 전면에 2ㆍ3분합의 교살문이 빗살창무늬로 짜여져 단장되어 있으며, 삼면의 벽에는 나한도가 단청되어 있다. 예서체로 쓴 나한전 현판은 광서10년(光緖10年; 고종21년, 1884년)에 노천(老泉)이 썼다는 기록이 있으며, 기둥마다 4기의 주련이 있다.
건물 내부에는 후불벽과 맞닿은 ㄷ자형의 불단 위로 조선후기에 조성된 소조석가삼존상을 비롯하여 소조16나한상, 사자상, 제석상, 인왕상 등 완전한 16나한상 일체가 봉안되어있으며, 후불벽에는 1884년에 진철(震徹)스님이 그린 영산전의 후불탱화로 조성되었던 영산회상도와 16나한도가 걸려 있다. 화기(畵記)에 의하면, 16나한상과 나한도(羅漢圖) 4축, 관음도(觀音圖) 2축 등이 함께 조성되었다고 하며 진철(震徹)스님이 그리고, 시주자는 왕실 상궁들이라고 한다.
석가삼존상은 현재 진관사 나한전의 주존(主尊)으로 소조불(塑造佛)이다. 중앙의 석가여래좌상(釋迦如來坐像)을 중심으로 좌우에 협시보살상(脇侍菩薩像)이 배치된 구도로, 정확한 조성연대는 알 수 없지만 삼존불의 머리 표현과 얼굴 형태, 법의의 주름 등 전체적인 양식적 특징으로 볼 때,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전반 경에 조성된 것으로 보여 진다. 본존은 상체가 약간 긴 세장(細長)한 체구이지만 직사각형에 가까운 양감 있는 얼굴과 좁지 않은 어깨로 인하여 다소 건장한 느낌을 준다.
이목구비가 단정하게 표현된 미소 띈 얼굴, 활 형의 눈썹과 이와 연결된 우뚝한 콧등 등에서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반 불상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 진관사 나한전 내부의 문화재들 ))
*진관사 나한전 석가삼존상(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143호)
머리는 나발(螺髮)로서 육계(肉)가 아주 낮게 표현되었고, 법의는 통견(通肩)으로 굵은 주름의 옷자락이 유려하게 흘러내리고 있다.
좌우의 협시보살(脇侍菩薩) 역시 본존과 유사한 양식을 보여주고 있는데 수기 삼존인 좌 미륵ㆍ우 제화갈라보살로서 좌우 수인(手印)을 서로 대칭적으로 표현하여 균형을 맞추고 있다. 이 삼존상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으나 서울 인근지역에 있는 조선 후기 불상 중에서 비교적 연대가 빠르고 삼존상(三尊像)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진관사 나한전 소조 16나한상(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144호)
현재 진관사 나한전에는 본존상(本尊像)인 석가삼존상(釋迦三尊像) 좌우로 각각 8구(軀)씩 16구의 나한상(羅漢像)과 제석상(帝釋像) 1구, 사자상(使者像) 1구, 인왕상(仁王像) 2구 등 모두 20구(軀)의 상이 봉안되어 있다. 재료는 모두 소조로 화려하게 채색되어 있으며, 각 상은 크지 않은 아담한 크기로 높이 47~53㎝의 소형상(小形像)이다. 이들 나한들은 여러 가지 지물(持物)을 들고 각각 특징적인 자세를 취하는 등 자유롭게 표현되었으며, 각 나한들의 얼굴표정과 자세는 매우 사실적일 뿐만 아니라 해학적으로 묘사되어서 불교 조각이 갖는 엄격하고 규격적인 모습을 탈피하고 초상 조각과 같은 개성적이고 활달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조선후기 서울, 경기지역의 나한신앙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로서 주목받고 있다.
*진관사 나한전 영산회상 후불탱화(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145호)
진관사 나한전의 본존불인 석가삼존상의 후불탱화는 영취산에서 설법하는 석가모니를 그린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로서 1884년에 제작되었다. 구도는 중앙에 본존인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법하는 모습을 표현하고, 그 옆에 네 명의 보살과 사천왕, 여섯 명의 제자를 배치하였는데 화면의 빈 공간에 채운(彩雲)을 가득 그려 넣어 전체적으로 여백 없이 빽빽한 화면 구성을 보여준다. 본존인 서가모니불은 얼굴이 양감(量感) 있게 표현되었으며, 당당한 신체는 건장한 느낌을 준다. 또 법의는 통견(通肩)으로 두 손은 왼손을 가슴 위로 올리고 오른손을 배에 댄 채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어 마치 아미타수인(阿彌陀手印)과 같은 손 모습을 보여주나 이러한 수인은 조선 후기에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서가모니의 수인(手印)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본존의 좌우에는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이 두 손으로 커다란 연꽃을 들고 본존을 향해 시립(侍立)하고 있으며, 그 옆으로는 사천왕이 각각 칼과 비파, 용과 여의주 및 탑을 들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옆과 위로는 두 보살과 상체만 드러난 채 합장을 하고 있는 제자가 좌우에 각각 3명씩 묘사되었다.
이 불화는 횡축의 화면과 단아한 형태, 밝은 주조색 등 19세기 말의 불화(佛畵)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로서 당대 불화 중 대표작에 속한다.
*진관사 나한전 16나한도(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146호)
진관사 나한전에 모셔진 영산회상도 좌우에 봉안된 16나한도로서, 나한도(羅漢圖) 4폭과 제석신중도(帝釋神衆圖) 1폭, 사자신중도(使者神衆圖) 1폭 등 총 6폭으로 구성되어 있다.
4폭의 나한도에는 각각 4명의 나한이 산수를 배경으로 시자(侍者)와 시동(侍童)을 거느리고 다양한 자세로 앉아 있는 모습이다.
또한 제석신중도와 사자신중도는 나한도의 좌우에 봉안되었던 것으로, 화면을 둘로 나누어 구름 속에서 있는 제석과 신중, 사자와 신중을 각각 그렸는데 근대적인 음영법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는 점이 특히 주목된다.
조성연대는 1884년으로, 왕실 상궁의 발원으로 조성되었다. 당대의 유명한 화승인 진철(震徹), 축연(竺衍)들에 의해 제작된 작품으로서 특히 세밀한 필선(筆線)과 정교한 문양 표현 및 금니(金泥)의 사용 등이 돋보이며, 나한도의 배경에 묘사되어 있는 경물(景物)은 당시에 유행하던 민화풍으로 그려졌기 때문에 19세기 회화연구의 비교자료로도 주목되고 있다. 현재는 공개되지 않고 있다.
- 진관사 칠성각(서울시 문화재자료 제 33호)
칠성각은 가람의 서쪽 끝에 있는 정면 3칸(4.8m), 측면 1(4m)칸의 맞배지붕을 한 민도리집 형식으로 조선조 말에 중창한 건물이다. 화강암으로 조성된 낮은 기단 위에 마름모꼴의 초석을 두고 그 위로 사각기둥을 올린 모습으로 독성전과 같이 공포 없이 서까래를 이용하여 지붕을 올린 모습이다.
건물 외부는 전면에 2·4분합의 띠살문을 두고, 측후면 벽체는 아래가 방화장, 위가 심벽으로 구성되었다.
칠성각은 바로 옆의 독성전과 함께 1907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또한 전서체로 쓴 현판도 건립 당시의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 내부는 후불벽에 맞닿은 불단(佛壇) 위에 조선후기에 조성된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과 1910년에 조성된 칠성도(七星圖), 그리고 영정(影幀)을 봉안하였다.
진관사 칠성각과 독성전은 신중단(神衆壇=사찰에서 호법신중을 모셔두는 단)에 속하는 건축물로서는 서울 시내에 현존하는 건물 중 현재까지 알려진 것으로는 건립연대가 가장 오래됐다.
또한 19세기 후반~20세기 초 서울 ·경기 지역 사찰 건물들에게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건축방식으로 좌.우.후면 등 3면의 벽을 벽돌로 마감하는 화방벽(火防壁)이 설치되는 등 건물들이 창건될 당시의 시대적, 지역적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 진관사 칠성각 내부의 문화재들 ))
*진관사 칠성각 석조여래좌상(서울시 문화재자료 제 10호)
진관사 칠성각의 석조여래좌상은 옥석(玉石)으로 만들어진 석조여래좌상으로, 상호는 둥글면서도 앳된 얼굴이 특징적인 동형불상(童形佛像)으로 신체에 비하여 두부(頭部)가 유난히 크게 표현되어 있다.
머리는 나발(螺髮)로써 육계(肉)가 낮고 정상계주(頂上珠)와 중간계주(中間珠)가 모두 표현되었으며, 크고 넓적한 얼굴에 이목구비가 작게 묘사되어 있다.
특히 작은 입가에는 미소를 머금고 있어 아기 같은 신체와 더불어 친근하면서도 온화한 인상을 준다.
몸에는 통견(通肩)의 법의를 걸치고 있는데 양 어깨를 덮은 옷자락은 가슴 한가운데에 평행으로 표현되어있는 군의(裙衣) 아래로 끼워 놓았으며, 두 손은 신체에 비해 유난히 크게 묘사되어 양 무릎 위에 가지런히 얹어 놓은 모습이다. 이 불상은 천불상(千佛像) 중의 하나로 생각되는데, 이 상과 같은 형식의 불상은 강원도와 서울ㆍ경기 북부 지역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 신체에 비해 얼굴이 큰 편이지만 삼각형을 이루는 안정감 있는 자세와 조형성에서 조선후기 불상의 특징을 보여준다. 1969년에 진관스님에 의해 개금되었다.
*진관사 칠성각 영정(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148호)
이 불화는 칠성각 칠성도 향우측에 봉안된 영정(影幀)으로 높이 106.2㎝, 폭 83㎝의 소형 불화이다. 화면의 왼쪽 상단에는 세로로“영입산수도 수주간경(影入山水圖 數珠看經)”으로 시작되는 4줄의 찬시(讚詩)가 적혀있고, 오른쪽 상단에는 한글로 '인사졀명호불영뎡'이라는 명문이 있어 ‘인수사’의 명호스님의 영정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그림의 중앙에는 경상(經床)을 앞에 두고 정면을 향한 채 바닥에 결가부좌한 스님의 모습을 화면 가득 그렸는데, 스님의 옆으로 불자(拂子)와 두루마리를 든 시자(侍者)를 배치하여 삼존형식을 구성하였다. 이러한 삼존형식의 영정은 다른 예에서 거의 볼 수 없는 희귀한 작품으로 크게 주목된다.
제작연대와 화가의 기록이 없어 시기와 화사(畵史)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전체적인 구도와 채색 등으로 볼 때 조선 후반기 19세기 말~20세기 초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삼존(三尊) 배치는 물론 찬시(讚詩)와 한글제목이 적혀 있어 다른 영탱(影幀)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특징을 지니고 있어서 조선조 말의 영정 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 주목된다.
칠성각의 후불탱화(後佛幀畵)로, 1910년에 금어 춘담(春潭), 범천(梵天)이 제작한 것이다. 구성은 장방형의 화면에 치성광여래(熾星光如來)를 중심으로 칠성(七星)과 성군(星君) 등이 묘사되어있다.
중앙의 청련화(靑蓮花) 위에 결가부좌한 치성광여래는 붉은 법의를 걸치고 오른손은 가슴 부위에, 왼손은 무릎위에서 금륜을 얹은 채 결가부좌 자세로 앉아 있으며, 머리는 유난히 뾰족한 육계(肉) 위에 원형(圓形)의 정상계주(頂上珠)가 표현되어 있다. 치성광여래의 좌우에는 향우측에 넷, 향좌측에 셋 등 모두 7구의 칠성여래가 치성광여래를 향하여 합장하고 서 있는데 7구 모두 붉은 법의를 입고 있으며 치성광여래와 같이 뾰족한 육계가 돋보인다.
치성광여래의 아래쪽에는 협시인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이 각각 금빛으로 칠해진 여의(如意)를 들고 있는데 일광보살은 붉은 해, 월광보살은 흰 달이 그려진 보관(寶冠)을 쓰고 본존(本尊)을 시립(侍立)하고 있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도교식으로 표현된 칠원성군이 홀(笏)을 들고 서 있다.
이 불화는 두터운 설채법(設彩法), 붉은 적색의 주조색(主調色)에 감색과 녹색이 약간 섞인 채색, 주위의 성중(星衆) 얼굴에 칠해진 두터운 호분(胡粉) 등의 표현에서 20세기 초반의 불화양식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정확한 조성 연대와 화승(畵僧) 등이 밝혀져 있을 뿐 아니라 서울 인근 지역에서는 드문 칠성도(七星圖)의 작례(作例)이다.
진관사 칠성각 칠성도
칠성각의 후불탱화(後佛幀畵)로, 1910년에 금어 춘담(春潭), 범천(梵天)이 제작한 것이다. 구성은 장방형의 화면에 치성광여래(熾星光如來)를 중심으로 칠성(七星)과 성군(星君) 등이 묘사되어있다.
중앙의 청련화(靑蓮花) 위에 결가부좌한 치성광여래는 붉은 법의를 걸치고 오른손은 가슴 부위에, 왼손은 무릎위에서 금륜을 얹은 채 결가부좌 자세로 앉아 있으며, 머리는 유난히 뾰족한 육계(肉) 위에 원형(圓形)의 정상계주(頂上珠)가 표현되어 있다.
치성광여래의 좌우에는 향우측에 넷, 향좌측에 셋 등 모두 7구의 칠성여래가 치성광여래를 향하여 합장하고 서 있는데 7구 모두 붉은 법의를 입고 있으며 치성광여래와 같이 뾰족한 육계가 돋보인다. 치성광여래의 아래쪽에는 협시인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이 각각 금빛으로 칠해진 여의(如意)를 들고 있는데 일광보살은 붉은 해, 월광보살은 흰 달이 그려진 보관(寶冠)을 쓰고 본존(本尊)을 시립(侍立)하고 있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도교식으로 표현된 칠원성군이 홀(笏)을 들고 서 있다.
이 불화는 두터운 설채법(設彩法), 붉은 적색의 주조색(主調色)에 감색과 녹색이 약간 섞인 채색, 주위의 성중(星衆) 얼굴에 칠해진 두터운 호분(胡粉) 등의 표현에서 20세기 초반의 불화양식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정확한 조성 연대와 화승(畵僧) 등이 밝혀져 있을 뿐 아니라 서울 인근 지역에서는 드문 칠성도(七星圖)의 작례(作例)로서 현재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147호로 지정되어 있다.
- 진관사 독성전(獨聖殿, 서울시 문화재자료 제 34호)은
홀로 천태산(天台山)에서 수도하면서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 모든 중생들을 제도하고자 하는 아라한 나반존자(那畔尊者)를 모시고 있는 전각(殿閣)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후기에 산신(山神) 및 칠성(七星)과 함께 삼성각(三聖閣)에 봉안하거나 따로 독성각(獨聖閣)에 봉안하여 신앙하였다. 나반존자를 모신 전각은 독성각(獨聖閣)으로 일반화되어 있으나 진관사에서는 ‘독성전(獨聖殿)’으로 격상되어 있다.
진관사 독성전은 명부전 좌측에 있는 정면 1칸(3.2m), 측면 1칸(2.4m)의 맞배지붕을 한 민도리집의 형식으로 조성된 조선조 말의 건물로 1969년에 진관스님이 중수한 건물이다. 건물은 장방형의 화강암을 기단 삼아 마름모꼴의 초석을 두고 그 위로 사각기둥을 세운 모습으로, 평방 위로 공포 없이 서까래를 올린 모습이다.
건물 전면은 4분합의 띠살 창호로 단장되어 있으며, 좌우와 후면의 벽 전체를 벽돌로 마감한 ‘방화장’ 형식이다.
건물 내부는 불단(佛壇) 위로 조선후기에 조성된 소조독성상(塑造獨聖像)과 독성탱화(獨聖幀畵), 산신탱화(山神幀畵)를 봉안하였다.
진관사 독성전에는"삼각산 진관사 독성전 창건급단확 화탱불사공덕기(三角山 津寬寺 獨聖殿 創建及丹 畵幀佛事功德記)"라는 이 건물의 건축 관련 기록을 적은 작은 목조 현판이 전해져 그 내력을 알 수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광무(光武)11년 즉 1907년 3월에 독성전을 짓는데, 상궁 4인과 민간인 부부 2쌍이 참여한 것이 기록되어 있으며, 공사 참여자 명단도 부기되어 있는데 모두 승려장인들이다.
(( 진관사 독성전 내부의 문화재들 ))
*진관사 독성전 독성상(서울시 문화재자료 제 11호)
진관사 독성상은 높이 37cm의 소조(塑造) 불상에 채색을 하여 봉안하고 있는데, 신체에 비하여 얼굴이 크고 두 손을 무릎 위에 댄 모습 등이 칠성각의석불좌상과 닮았다. 얼굴은 거의 사각형에 가까울 정도로 각이 졌는데 눈과 눈 사이가 멀고, 코가 우뚝 솟아 있으며, 입을 꼭 다물고 있는 등 의지가 강한 나한(羅漢)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몸에 걸친 가사(袈裟)는 좌임(左)으로, 왼쪽 어깨에는 가사를 고정한 금구장식(金具裝飾)이 표현되었다.
다 소 긴 상체에 비하여 무릎이 낮아서 신체가 길어 보이며 낮게 표현된 무릎 위에 두 손을 단정히 대고 있다. 대부분 독성은 불화에서는 나이 든 나한(羅漢)의 모습으로 표현되는 것이 보편적이지만 진관사 독성상은 젊은 나한의 모습으로 표현한 것이 특이하다. 이 독성상(獨聖像)은 소조(塑造)로 만든 독성상으로서 서울 , 경기 일원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독성조각 (獨聖彫刻)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 또한 당시 독성상의 특징과 조각 양식을 알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진관사 독성전 산신도(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149호)
독성전에 봉안된 산신탱화는 세로로 긴 화면에 일반적인 산신도와는 달리 산수배경이 생략된 채 온화한 산신이 호랑이에 기대 앉아 있는 모습을 화면 가득 묘사하고 있다. 세밀하게 수염이 묘사된 산신의 얼굴은 마치 인자한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듯하며 산신을 휘감고 있는 호랑이는 해학적이며 익살스러워 민화(民畵)의 호랑이를 연상시킨다. 밝은 진홍색의 채색과 녹색이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여기에 호랑이의 황색과 흰색 등이 어우러져 밝은 색감을 나타내고 있다.
이 산신도는 화기(畵記)가 없어 제작연대와 화가 등을 알 수 없지만 진홍색의 채색과 호랑이의 표현 등으로 볼 때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반적으로 산신도(山神圖)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산수배경이 생략되고 산신과 호랑이만을 부각시켜 그려 대담하면서도 단순한 구도가 돋보인다.
*진관사 독성전 독성도(서울시 문화재자료 제 12호)
이 독성도는 가로로 긴 화면에 민화풍(民畵風)의 산수를 배경으로 독성(獨聖)과 시자(侍者), 동자(童子) 등을 그린 것으로 가로가 2m가 넘는 대작에 속한다. 이 불화는 19세기말~20세기 초 경기도 일원에서 활약하던 화승(畵僧) 경선당(慶船堂) 응석(應釋)이 그린 불화(佛畵)로서 홍순모(洪淳謨)와 상궁 이씨(李氏)의 시주에 의해 1907년에 제작된 것이다. 이 그림은 전체적으로 채색이 탁하게 되어 있으며, 화면의 중앙에는 늙은 비구가 정면을 향해 앉아 있고 그 좌우에 시자(侍者)와 동자(童子)가 시립하고 있는 구도로, 늙은 비구는 부처님의 제자로 16나한 중의 한 분인 나반존자(=빈두로존자)이다. 또한 나한의 좌우에 노소의 시자가 합장하고 서 있는 삼존(三尊)형식의 구도는 칠성각의 삼존영정(三尊影幀)과 유사한 형식으로 주목받는다.
그림의 배경은 나반존자가 거주하던 남인도의 천태산(天台山)으로 생각되는데 특히 화면의 향 좌측 가장자리에 그려진 청록색의 소나무와 산악 등은 민화에서 자주 묘사되던 주제이다. 1907년에 제작된 작품이지만, 전체적으로 필선이 유려하며 작품성이 있고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진관사 탐방을 마치고 왓던 길을 되돌아 나가 진관사입구 갈림길에서 둘레길 탐방을 이어간다.
13:29=>진관사입구/┤자갈림길
좌측 계곡쪽으로 내려가면 둘레길 계단과 계곡들 건너는 다리공사가 진행중이다. 계류를 건너면 노거수인 느티나무 쉼터가 있는 소공원이 나타난다.
▲ 진관사입구와 삼천사입구 사이의 소공원
▲ 진관사입구와 삼천사입구 사이 소공원내의 이정표
15:35~15:36=>소공원
깨끗하고 아담하게 조성된 소공원 끝에 이정표(↓북한산둘레길<불광동>, 진관사입구 0.3km/←북한산둘레길<효자동>, 삼천사입구 0.2km)가 있고, 우측으로 철망팬스에 철문이 보이는데 이를 통해 나가면 '사슴집' 묵밥집을 지나 다리를 건너 잠시 길 따라 가면 삼천사입구 ┬자 갈림길 시멘트 포장길에 이르게 된다.
▲ 뒤돌아본 삼천사입구/직진방향:삼천사, 우측방향:소공원에서 나오는 길
▲ 삼천사입구의 이정표
13:38=>삼천사입구
우측의 삼천사가는 길이 북한산 등산로이다. 이 길을 따르면 삼천탐방지원센터를 지나 크게 두 갈래의 등산로로 갈라지게 되는데 응봉능선으로 비봉능선에서 사모바위로 오르는 등산로(약 1시간30분 소요)와 삼천사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등산로이다.
삼천사계곡을 따라 오르는 등산로는 다시 세방향으로 나뉘어지는데 의상능선 증취봉과 나월봉 사이의 북한산성 부왕동암문으로 오르는 길(약 1시간30분 소요), 의상능선과 비봉능선이 만나는 문수봉으로 직접 오르는 길(약 1시간40분 소요), 그리고 비봉능선 사모바위로 오르는 길(약 1시간30분 소요)이 있다.
삼천사입구를 산행들머리와 날머리로 하여 원점회귀 산행을 하여도 2~3개 코스로 계획을 세워 산행을 할 수가 있는 곳이다.
▲ 마실길 주변의 북한산 등산안내도
삼천사까지 이곳 입구 갈림길에서 1.5km 떨어진 거리라 다음 기회에 산행 계획을 잡아 삼천사는 탐방하기로 한다.
이정표(↓북한산둘레길<불광동>, 진관사입구 0.5km/←북한산둘레길<효자동>, 여기소마을경로당 1.2km/→삼천사 1.5km)가 있는 삼거리로 좌측의 길 따라 내려가면 ┤자 갈림길 우측에 대형 둘레길 안내도가 보인다.
▲ 삼천교갈림길의 둘레길 안내도
직진의 길을 따르면 '창릉천' 하천이 앞을 가로 막는데, '구삼천교' 다리를 건너 4차선 포장도로 인도로 나간다.
▲ 창릉천을 건너는 '구삼천교'
▲ 다리 건너에 있는 이정표와 뒤돌아본 '구삼천교'
13:43~13:45=>창릉천/4차선포장도로
다리를 건너면 이정표(↓북한산둘레길<불광동>, 삼천사입구 0.2km/→북한산둘레길<효자동>, 여기소마을경로당 1.0km)가 있다. 우측으로 창릉천, 좌측으로 4차선 포장도로를 두고 북한산성 입구 방향으로 인도를 따라 내려간다.
▲ 창릉천과 포장도로 사이의 둘레길인 인도
▲ '내시묘역길' 들머리가 있는 방패교육대 방향으로 들어가는 ├자갈림길
약 3분여를 내려가면 우측으로 창릉천을 건너는 다리가 있는 ├자 갈림길(13:48). 다리를 건너 약 50여m를 진행하면 좌측으로 나무아치가 있는 ┤자 갈림길에 이르게 되는데, 이곳이 '마실길'과 '내시묘역길'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 '마실길'이 끝나는 '내시묘역길' 입구
▲ '마실길' 날머리와 '내시묘역길'이 시작되는 들머리의 이정표와 둘레길 안내도
13:50=>나무아치/방패교육대(전차부대)앞 '마실길' 날머리
둘레길 안내도와 이정표(↓북한산둘레길<불광동>, 삼천사입구 0.4km/←북한산둘레길<효자동>, 여기소마을경로당 0.8km)가 있는 '내시묘역길' 입구이다. 좌측의 나무아치를 들어서면 내시묘역길이 시작된다.
둘레길에서 가장 짧은 구간이었지만 진관사를 다녀오느라 30분이 넘는 시간을 투자하게 되어 총 1시간 18분간의 '마실길' 나들이를 마치고, 내시묘역길 탐방을 계속 이어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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