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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팬틱 원정보고 2(월간 산 443호/2006년 9월호 기사)

왕마구리 2008. 1. 28. 00:49
아래 기사는 2006년 경희대학교산악부 브로드 피크봉 10주기 추모원정대 '스팬틱봉(7,027m)' 등정 내용이 실린 '월간 산' 2006년 9월호 내용을 옮긴 것임.
 
[원정보고] 파키스탄 카라코룸 스판틱
이제 후회 없이 산을 내려선다
경희대팀 ’96 브로드피크 추모등반 성공리에 마쳐
한국 초등 이룩한 충주팀 배려에 감사

▲ 삶과 죽음이 뒤섞인 음울한 분위기의 퇴석빙하와 반짝이는 설산(초고룽마 빙하).
7월18일 캐러밴 셋째 날, 약간 흐린 새벽 하늘이다. 오전 6시30분 볼루초 캠프를 출발해서 25분 정도 빙하를 가로지르자 초고룽마 빙하 위로 걷기 좋은 길이 나타난다. 빙하 중앙의 걷기 좋은 평평한 곳을 골라 디뎌가며 걷다보니 BC가 어느새 시야에 들어온다.
급경사를 헐떡거리며 땀까지 뻘뻘 흘리며 겨우 올라서자 꽃이 만발한 초원지대가 펼쳐져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쉰다. 차갑고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두 곳을 지나치자 경사면에 계단식으로 텐트들이 자리 잡은 스판틱 BC와 그 중심에 서 있는 라마제단과 펄럭이는 오색 깃발이 대원들을 반긴다(12:25).

충주시연맹팀의 정동벽 단장이 달려나와 반갑게 맞아주신다. 오늘 등정조인 김영식 대장을 비롯한 대원 4명과 셰르파, 하이포터 등 6명이 나쁜 날씨 속에서도 정상공격을 감행, 마지막 캠프를 떠난 지 약 7시간만인 오전 7시40분 경 정상에 선 후 하산 중이라고 한다. 충주팀은 이번 원정을 통해 한국 초등을 기록했다.

저녁 교신에서 김영식 대장은 모든 고소캠프에 텐트 1동씩과 C2에 침낭, 매트, 가스, 일부 식량, 코펠, 무전기 등을 남겨두었고, C3에는 안자일렌용 로프와 버너, 코펠 등을 남겨두고 내일 전 대원이 BC로 철수할 것이라고 한다. 아직 6,000m대 고소에 적응이 덜 된 우리로서는 짐을 그만큼 덜 수 있어서 짧은 기간으로 등정을 노려볼 절호의 기회가 마련된 셈이다.

▲ K2 메모리얼에서 추모식을 끝마친 후 콩코르디아로 이동하는 대원들. 뒤로 가셔브룸2봉과 4봉이 솟아 있다. 왼쪽에서부터 최성호, 이치상, 천우용 대원.
이렇게 충주팀의 배려를 받은 상황에서도 등정에 성공하지 못 한다면 고소적응이 덜 되었거나 능력부족이거나 둘 중 하나인 셈이다. 날씨가 어떻게 작용할지 모르나 아무튼 내일부터 등반이고 등반을 시작하고 나서는 최선을 다하리라 다짐한다. 그래야 후회 없이 산을 내려갈 수 있으므로.

20일. 이른 새벽 충주팀의 네팔 쿡 두르바가 따뜻하고 맛있는 밥과 국을 준비해 놓고 등반 도중 먹을 김밥까지 준비하고 있다. 정동벽 단장과 충주시연맹 대원, 현지인들의 배웅을 받으며 라마 제단에 향을 피우고 안전등반을 의미하며 한 줌의 쌀을 하늘에 뿌리고 제단을 우측에 끼고 돌아 출발한다(06:00).

C1까지는 돌밭길의 연속이라서 트레킹화로도 갈 수 있었다. 등반로는 확실하게 나 있었다. 사면을 다 오른 후부터는 칼날능선 위로 길이 이어져 있어 조심스럽게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 2시간30분 후 능선 위로 올라서자 눈 덮인 능선이 정상쪽으로 이어진 등반루트가 한눈에 들어온다.

오전 8시25분, C1(5,088m, GPS 측정)에 도착해서 이중화를 갈아 신은 후 본격적인 등반준비를 마치고 눈 덮인 능선으로 출발한다. 흐리던 날씨가 가끔씩 눈발을 날리는 가운데 나이프리지 위로 난 앞 팀의 발자국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얼마 가지 않은 능선 위에서 C2에서 내려오는 김영식 대장 등 충주팀을 만나 안부를 묻고 무전기를 받으며 루트 상태와 등반에 필요한 정보를 들은 후 굳게 악수를 나누고 다시 등반을 이어간다.

캠프 전의 급경사 오르막 설릉을 헉헉거리며 올라서자 C2가 가까운 곳에 있다고 앞장선 최성호 대원 알려온다. 12시20분 C2(5,483m, GPS 측정)에 도착해 텐트 문을 열어보니 코펠 가득 물이 담겨 있다. 충주팀이 우리를 위해서 아침 동안 물을 만들어 놓고 내려간 것이다.

21일.  출발이 너무 늦으면 눈에 빠져 힘들다 하기에 오전 7시 예정대로 C2를 출발했는데 생각보다 늦었나 보다. 발이 푹푹 빠지고 빙벽용 아이젠을 준비한 최성호, 천우용 대원은 스노볼(snow ball)이 생겨 부담스러운가 보다. 경사가 점점 가팔라지더니 곧 고정로프에 다다랐다. 충주팀이 설치해 놓은 튼튼한 고정로프 덕분에 첫 급사면을 어렵지 않게 올라섰다.

두 번째 사면은 경사가 더 급했다. 경사는 위로 올라갈수록 더 심해졌다. 맨 윗부분을 왼쪽으로 트래버스하는 곳에서는 아찔하게 내려다보이는 빙하가 가슴을 쓸어내리게 한다. 트래버스를 마치고 완만해진 설사면을 천천히 올라서자 안부 아래 움푹 패인 곳에 덩그러니 놓인 한 동의 텐트가 우리를 맞아준다. 오후 2시10분 C3(6,287m, GPS 측정)에 도착한다. 정상공격 전날이라서 일찍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든다.

22일. 어제 만들어둔 물을 끓여 누룽지와 알파미로 아침을 준비했으나 밥맛이 없어 먹는 둥 마는 둥 식사를 마무리한다. 새벽 1시30분 C3를 출발했다. 바람도 거의 없는 한밤중이지만 총총한 별들을 보니 날씨가 좋을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놓인다. 오전 4시경. 앞쪽 멀리 설원 위에 표지기가 보이고 능선 위에도 표지기가 보여 그것을 목표로 등반루트를 잡고 올라갔다. 본격적인 설벽으로 접어들기 전 오버행 아래에서 잠시 쉰다.

휴식 후 최성호 대원은 표지기가 꽂혀있는 설벽으로 나서서 정상을 향하여 오르기 시작했다. 바람의 영향 때문인지 눈이 쌓이지 않은 곳에서는 충주팀 발자국을 따라 오르기도 하지만 다져진 눈이 아니라서 발이 무릎까지 빠지고 곳곳에서 크레바스가 나타나 힘든 가운데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정상 설원에 세 악우 사진 묻어

그리 급하지 않은 설사면을 거의 다 올라설 즈음 한눈에 급경사임을 알 수 있는 곳에 고정로프가 보였다. 두 피치의 고정로프 구간을 올라서니 정상이 가깝게 와닿는다. 좌측은 골든필라(Golden Pillar)라 불리는 거대한 수직 암벽이다. 골든필라가 끝나는 부분이 정상으로 이어지면서 돌무더기들이 왼쪽 가장자리에서 정상까지 이어져 있다. 바위 사이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다가 한 번은 푹 꺼져내려 간담이 서늘해졌다. 유심히 보니 돌이 널린 쪽과 설사면의 경계 부분은 크고 작은 크레바스가 계속 보인다. 대원들은 많이 지쳐 있는 상태다.

▲ K2 메모리얼에서 96년 브로드피크 등반을 마친 후 실종된 경희대 산악부 고 한동근, 양재모, 임순택 대원의 10주기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정상으로 올라서서 배낭을 벗고 다시 숨을 헐떡인다. 오전 10시20분, C3를 떠난 지 거의 9시간만에 힘들게 선 정상(7,039m, GPS 측정. 공식 높이는 7,027m)이다. 배낭을 벗어둔 곳에서 잠시 쉬고 중앙부의 큰 바위를 지나 운동장처럼 넓은 설원의 정점으로 갔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아래 펼쳐진 정상에서의 파노라마는 환상적이었다. 멀리 K2와 브로드피크는 물론이고 훈자의 맹주 라카포시, 펀잡 히말라야의 낭가파르밧을 포함해서 높고 낮은 봉우리들이 저마다의 위치에서 나름대로의 자태를 뽐내며 솟아 있는 모습을 마음껏 바라다본다.

최성호 대원은 품에서 브로드피크에서 10년 전 실종된 세 명의 선배들 사진을 꺼내들고 한참을 서 있다가 맑은 하늘 저편 멀리로 보이는 K2와 브로드피크를 바라보기 좋은 곳에 묻었다. 한국을 출발하기 전에 ‘스판틱 정상에 묻으마’ 했던 사진 속의 고 한동근, 양재모, 임순택 대원과의 무언의 약속을 지키게 되어 홀가분해짐을 느낀다. 이내 고글 속으로 눈물이 흘러내린다. 후회 없이 산을 내려 갈 수 있게 되어 터덜터덜 산 아래로 향하는 발걸음만은 조금 가벼워진 듯했다.

글 이치상 대원
사진 경희대 원정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