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북 남원 광한루원(南原 廣寒樓苑) ▶
우리나라 제일의 누원!!!
「 전북 남원(全北 南原) 소개 」
한반도의 서남부 내륙, 전라북도의 동남부 소백산맥 서사면의 넓은 분지에 위치하며, 시의 동남쪽은 지리산의 주 능선을 경계로 경남 하동군 및 전남 구례군과 북동부는 경남 함양군과 접하고, 서쪽은 임실군·순창군, 그리고 북쪽은 장수군과 인접하고 남쪽의 일부는 섬진강을 경계로 전남곡성과 접하고 있다.
지리적으로 전라남도·경상남도와 접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는 남원시는 88고속도로, 순천-완주 고속도로 와 전라선 철도, 그리고 3개 국도노선(17, 19, 24호)이 통과하며 호남과 영남을 연결하는 내륙의 관문이자 문화적·경제적 접촉지대이다.
노령산맥과 소백산맥 사이의 중산지인 남원시 지형은 크게 산지, 고원, 구릉, 평야로 구분된다. 산지는 남동부의 지리산지, 천황산(909m) 중심이 북부의 보절산지, 교룡산(518m) 중심의 대강산지로 구분되며, 고원은 보절산지의 서사면, 대강산지의 동사면 및 운봉읍을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고 평야는 섬진강 지류인 요천을 끼고 좁고 길다랗게 분포된 남원평야와 운봉 · 아영 · 인월에 분포된 운봉평야, 율천 주변의 충적지인 보절평야로 구분되며, 구릉지는 산지주변 및 남원 · 운봉평야 주변에 분포하고 있으며, 밭, 과수원 등으로 이용되고 있으나 토지이용도는 낮은 편이다.
동서간 거리 44.7km, 남북간 거리 28.6km의 남원시는 동남단 산간 대분지에 위치하여 내륙성 기후대에 속하므로 대체적으로 온화한 기후를 보이고 있으며, 동계에는 대륙성 고기압의 영향으로 추운날이 많고 하계에는 아열대 저기압 및 지리산의 영향으로 다우지역에 속하며 고원에 위치한 인월(아영) 지역은 산간지역으로 아한대성 기후 성향을 보인다.
최근 10년간(2003~2012) 평균기온은 12.3℃, 평균최고기온 19.0℃, 평균최저기온은 6.7℃이었으며, 기간 중 최고로 기온이 높았던 날은 37.0℃('05.07.23), 최저로 기온이 낮았던 날은 –19.3℃('05.12.18) 이었다. 또한, 연 강수량은 1,432.6mm, 강수일수는 117.7일 이었다.
▲ 왕버드나무 아래에서 바라본 광한루
「남원의역사」
지금까지의 자료를 보면 남원에 인간이 살기 시작한 것은 청동기 이후로 추측된다. 구석기와 신석기 유적은 확인된 바 없지만 앞으로 발견될 가능성이 크다. 남원의 대표적인 청동기 유적에는 지석묘가 있다. 한반도에서 지석묘는 청동기-철기시대에 사용되던 것이어서 이러한 지석묘들이 철기시대의 것일 수도 있지만 지석묘 이외에도 청동기 시대에 속할 것으로 보이는 유물 산포지가 자리 하고 있어 지석묘 중에는 청동기시대에 속하는 것도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원지역에서는 지석묘의 하부조사가 이루어진 예가 없어 그 구조와 시기를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분포와 입지, 외부관찰사항을 중심으로 다음과 같은 점을 파악할 수 있다.
상석의 방향이 주변의 강이나 개천의 흐름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지석묘 축조인들은 주변의 자연환경에 대하여 이전 단계 사람들보다 많은 관심과 관찰을 하였다.
상석의 크기로 당시 집단의 500-800명의 인구를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청동기의 유물로 추정되는 암각화가 1991년 6월에 발견되었으며 이것은 선사시대인에게 보편적인 태양숭배사상과 관련되는 원시신앙의 존재를 입증한다. 청동기 이후시대는 여러 주장이 있으나 삼한시대로 파악하고자 한다.삼한에는 마한, 진한, 변한이 있었고 각각에 다시 작은 나라들이 있었으며 남원 지역에도 마한 54소국 중 하나 이상의 국가가 존재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입증할 수 있는 문헌자료는 남아있지 않고 유적과 유물을 중심으로 추론만 하고 있는 실정이다.
삼국시대보다 앞서 만주와 한반도 북쪽에 고(古)조선(朝鮮)이 존속할때에 한반도 남쪽에는 진국(辰國)이 있었고 그 뒤를 이어 삼한(三韓)이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진국이나 삼한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것이 거의 없으며 겨우 마한(馬韓), 변한(弁韓) 진한(辰韓) 등 삼한의 이름과 그 삼한에 각각 54국 또는 12국씩 속하였다는 80여 소국들의 이름이 전해 올 뿐이다. 삼한 각각의 위치도 분명치가 않아서 학자들마다 주장이 다르며 그 소국의 위치에 대해서는 더욱 많은 주장들이 있다. 그 중 마한은 대체로 지금의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이런 의견이 분분해서 남원과 마한의 관계나 마한의 실체조차도 현재로서는 잘 알 수가 없다.
▲ 삼신산 봉래섬과 방장산을 연결하는 나무다리 위에서 바라본 광한루
지리산 기슭, 산내면 달궁리(덕동리)에는 옛성터 하나가 거의 다 망가진 채 남아 있는 바 이 것은 마한 왕이 전란을 피해 와서 쌓은 달궁터라는 전설이 있고 <용성지(龍城誌), 조선 숙종 28년, 서기 1702년>와 <여지도서(輿地圖書), 영조 41년, 1765>에도 그에 관한 기록이 있다.
『황령과 정령은 둘 다 지리산 기슭에 입세에 있으며 몹시 가파르고 험하여 소나 말이 다닐 수 없는 곳인데 거기서 서쪽으로 남원부까지는 50리쯤 된다. 옛 승려 청허당의 황령기 에는 "옛날 한 소제 즉위 3년에 마한의 임금이 진한의 난을 피하여 이 곳에 와서 도성을 쌓았는데 그 때 황, 정 두 장수로 하여금 그 일을 감독하고 고개를 지키게 하였으므로 마침내 두 사람의 성으로 고개 이름을 삼게 되었다. 그 도성을 유지한 것이 71년이었다." 하여 무너진 성과 허물어진 벽이 지금도 남아 있으며 그 도성이었다는 곳을 세상에서는 달궁터라 전한다. 두 고개 안에 있는 긴 골짜기는 중고에는 남원땅이었으나 지금은 운봉에 속한다.』
『달궁은 지리산 향로봉 아래 있으며 무너진 주춧돌과 허물어진 담이 지금껏 남아 있다. 승휴정의 황령기에는 "한 소제 3년에 마한이 진한의 난을 피하여 이 곳에 와서 도성을 쌓았다. 그 때, 황, 정 두 장수로 하여금 그 일을 감독하고 고개를 지키게 하였는데 황령은 황장 이 지킨 곳이요 정령은 정장이 지킨 곳이다. ···"하였으나 어디에 근거를 둔 말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 뒤 달궁에 사람들이 와서 살기 시작하여 촌락이 수십여촌이 형성 되었으나 신해년(영조 7년, 1731)에 한물이 지고 사태가 반야봉에서 무너져 내려와 마을 전체를 덮어 묻어버림으로써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위로부터 향과 축문을 내려 보내여 제사를 지냈다.』
위의 두글에 인용된 <황령기>의 저자는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이름으로 휴정은 그의 법명이요 청허는 서산과 함께 호이다. 위의 <황령기>는 서산대사가 지리산에 공부할 때 들은 달궁 전설을 글로 써서 남긴 것임을 짐작할 수 있는데 다른 뚜렷한 증거가 없는한 달궁 전설은 아직은 전설로만 취급될 수밖에 없다. 다만 전설 속에도 역사의 자취가 깃들어 있기 마련이므로 터무니없이 꾸며낸 것이라고 단정하고 매도할 일은 아니다.
2010년 고고학계는 일제히 남원의 운봉에 주목하였다. 백두대간 동쪽 운봉고원에 속한 남원 월산리 가야계 고총에서 백제왕의 주요 하사품으로 알려진 중국제 청자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또한 신라의 왕릉인 천마총 출토품과 습사한 철제 자루솥, 금제귀걸이, 갑옷 등 당시 가야의 힘을 가늠할 수 있는 다양한 위세품이 출토되었다. 이는 운봉고원이 백제와 가야의 문물교류의 창구 역할을 하며 가야계 소국으로 번성하였음을 반증하는 것인데 이처럼 운봉고원에 지역적인 기반을 둔 토착세력집단을 '운봉가야'라 한다.
운봉가야의 존재가 처음 알려진 것은 1982년의 일이다. 88고속도로공사 구역 내에 위치한 남원월산리 대형무덤에 대한 구제발굴이 실시되었는데 백제의 대형무덤일 것이라는 고고학자들의 예상과는 달리 그 조영주체가 가야로 밝혀지면서 비상한 관심을 끌게 되었다.
경상남도 함양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남원시 아영면과 인월면 일대, 즉 가야계 대형무덤이 자리한 월산리에서 1.7km 떨어진 남원 두락리에도 봉분의 직경이 20m 내외인 40여기의 가야계 고총이 무리지어 있다. 여기에는 직경이 30m 이상 되는 초대형급 무덤도 포함되어 있으며 현재가지 운봉고원 일대에서 발견된 가야계 중대형 고총과 말무덤은 100여기에 달한다. 이처럼 두락리 고분은 대가야의 대표 유적인 고령 지산동 고분군(고분 200여기)이나, 사적512호 경주 대릉원(고분 23기)에 비해 손색없는 규모로서 금관가야나 신라에 버금가는 운봉가야의 막강한 위세를 입증하고 있다.
운봉가야가 가야계 소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교통의 중심지요 전략적 요충지라는 천혜의 지리적 위치와 대규모 철광석 개발에 힘입은 바 크다. 운봉고원은 백두대간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예로부터 신라와 백제의 경계였고 현제에는 전라도와 경상도의 경계가 되고 있는 것이 바로 백두대간이다. 또한 운봉고원에는 대규모 철생산 유적이 밀집되어 있었기 때문에 운봉일대가 철 생산지로 급부상하면서 철을 수출하는 가야의 소국으로 성장한 것으로 추측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地理志)>에는 지금의 남원시,군이 마치 삼국시대 초부터 본래 백제와 신라 두 나라 땅으로 나뉘어 있었던 것처럼 되어 있어 곧 한쪽은 신라 땅으로 모산현(母山縣)이 설치되어 있었고 다른 한쪽은 백제의 고룡군(古龍郡)과 거사물현(居斯勿縣)이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한다.그러한 내용은 그 뒤에 <고려사(考慮史)> 지리지부터 <대동지지(大東地志) >에 이르기까지 조선시대의 모든 지리지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어서 틀림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위의 내용은 정확한 사실이 아니고 삼국시대 말기의 한때의 사실일 뿐이다. 다만 운봉 지역 특히 인월면, 아영면 일대의 고분군에서 가야계로 알려진 유물이 많이 나왔다고 하므로 이 지역이 어떤 식으로든, 단순히 교역을 가졌거나 아니면 그 영역의 일부였거나 간에, 변한 또는 가야와 관계가 있었을 것임은 인정되지만 신라가 삼국시대 초부터 이 곳에 진출했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신라 즉 경주(慶州)와 남원 사이에 가로 놓인 경상남도와 경상북도 일부 지역이 신라 영토로 편입되는 것은 삼국시대 말기의 일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신라는 이 곳을 차지한 뒤에야 소백산맥을 넘어 남원의 운봉 지역에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라 문무왕 때 남원 지역이 신라에 완전 합병되었으며, 신문왕 5년(685) 봄 3월에는 처음으로 남원에다 소경을 설치하고 여러 주와 군의 민가를 옮기어 나누어 살게 하였으며, 신문왕 11년(691) 3월 13일에는 남원성을 쌓았다. 그 뒤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남원소경을 설치하여 전주의 관할 밑에 두었다가 고려 태조 23년(940)에 이르러 남원부로 격하되었다. 이 때에 구례현도 남원부로 편입하게 되었다. 그후 제6대 성종 14년(995)에 전국을 10도로 재개편 하였을 때 남원부는 강남도에 소속되었으며 제8대 현종 9년(1018)에 이루어진 새로운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전국이 8목 15부로 분류하게 될 때에도 남원은 15부 가운데 하나로 남게 되었다. 제26대 충선왕 2년(1310)에 이르러 무슨 이유였는지 모르지만 대방군으로 격하 되었다가 남원군으로 고친 바 있다. 제31대 공민왕 9년(1360)에 다시 남원부로 승격시켰다. 이때부터 남원부의 별호를 용성(龍城)이라 불렀다.
제8대 현종 9년에 강남도와 해양도를 합하여 전라도라 명칭을 붙이고 2목 2부 18군 32현을 두었는데 이들 2목 2부 가운데에는 남원부가 포함되어 있어 전라도의 4대 도시 가운데 하나로 부상하게 되었다.
▲ 오작교 위에서 바라본 광한루
조선시대에 1413년 태종13년 남원도호부로 승격하였으며, 남원도호부는 1부 1군 9현(담양·곡성·창평·구례·순창·임실·무주·진안·장수 등)을 관할하였다.
1457년 남원진영이 설치되어 인근6현(곡성·옥과·구례·창평·장수·운봉)을 관할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시 남원 전투로 12000명의 인명손실을 입고 남원성이 함락되어 직산 전투까지 일본군이 삼남지방을 유린하였다.
▷ 남원성 전투
정유재란시 남원성의 수비는 구원군으로 왔던 양원의 군대에 의해서 전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양원은 5월 21일 서울을 떠나 전주를 거쳐서 6월 13일 남원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양원은 남원성 내에 있는 용성관에 남원성을 지키기 위한 작전 본부를 설치하였다. 이보다 앞서 전주에 도착한 양원은 순찰사에게 모든 읍에 있던 군졸과 군마를 남원성으로 모이게 하라는 지시를 하였다. 이것이 남원성 수비를 위한 양원의 첫 조치였다. 양원이 남원에 도착한 뒤에는 지금까지의 남원성을 지키려는 계획과는 상당히 달라지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명나라 구원군이 오기 전에 조선측에서는 남원성을 방치하면서까지 산성의 방어 계획에만 전념하였다. 그러나 명나라 구원군이 도착한 후 양원이 조선군과 명나라 군대의 지휘권을 장악하게 되면서부터 산성의 수호계획을 파기하고 남원부성의 수호 계획만을 일방적으로 결정 해버린 것이다.
남원성 싸움에 참여한 왜군의 병력은 육군의 좌군 수군으로 총 56,800명이 된다. 이러한 숫자는 조선관군과 명나라 군대의 4,300 - 4,400여명과 비교하면 너무나도 엄청난 차이가 있음 을 알 수 있다. 무기면에서 왜군이 남원성 싸움에 사용한 종류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조총이 주목할만한 것이었다. 이에 비하여 조선 관군과 명나라 군대는 곤봉·활·칼·창으로 무장하였기 때문에 개인 장비면에서 왜군이 훨씬 앞선 당시로는 최신예무기를 소유하였다.
남원성의 함락으로 충청도와 전라도가 붕괴되었고 서울까지 민심이 동요되어 세자와 중전이 피난길에 오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와 같이 남원성 싸움은 남원 지방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조선 전체가 붕괴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던 매우 중요한 싸움이었다.
1654년 전라좌영이 설치되었다.
1895년 6월 23일(음력 윤 5월 1일) 전국의 행정체계가 23부로 개편되면서 이전 전라도 서부지역을 관할하는 남원부가 설치되어 그 치소가 되었다. 본래의 남원부는 군(郡)이 되었고 남원군을 포함해 16군을 관할하였다.
1896년 8월 4일 13도제로 환원되어 남원부가 전라남,북도로 분할 편입되었다. 남원군은 전라북도에 편입되었다.
1906년 지사면·둔남면 등이 임실군으로 편입되었다.
1910년 관할의 48방(坊)을 22개 면으로 통폐합하였다.
1911년 일부지역이 순창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4월 1일 남원군, 운봉군을 남원군으로 통폐합하였다.
1935년 3월 1일 대산면 일부를 순창군에, 남원읍 금성리를 대산면에, 주천면 노암리를 남원읍에 편입하고, 흑송면·두동면을 송동면으로 합면하였다.(1읍 17면)
1956년 7월 8일 왕치면(王峙面)을 남원읍에 합면하였다.(1읍 16면)
1981년 7월 1일 남원읍 일원을 관할로 남원시가 설치되었다.(16면)
1983년 2월 15일 주천면 신촌리·어현리를 남원시에 편입하고, 덕과면 금암리를 임실군 둔남면(현 오수면)에 편입하였다.
1995년 1월 1일 남원시 일원과 남원군 일원을 관할로 도농복합형태의 남원시가 설치되었다.(16면 9행정동)
1995년 3월 2일 운봉면을 운봉읍으로 승격하였다.(1읍 15면 9행정동)
1998년 5월 1일 동면을 인월면으로 개칭하였다.
1998년 9월 22일 쌍교동을 폐지하고, 용정동을 향교동에 합동하였다.(1읍 15면 7행정동)
▲ 광한루 앞 삼신산(봉래,방장,영주섬)이 조성된 연지
▲ 광한루 앞 연지 전경들
『 탐방한 남원군의 문화재들 』
● 실상사 백장암
국보 제10호 남원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南原 實相寺 百丈庵 三層石塔)
보물 제40호 남원 실상사 백장암 석등(南原 實相寺 百丈庵 石燈)
보물 제420호 백장암 청동은입사향로(百丈庵 靑銅銀入絲香爐)
전라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66호 백장암 보살좌상
전라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211호 백장암 소장 범종(百丈庵 所藏 梵鍾)
● 실상사
사적 제309호 남원 실상사(南原 實相寺)
보물 제33호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南原 實相寺 秀澈和尙塔)
보물 제34호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비(南原 實相寺 秀澈和尙塔碑)
보물 제35호 남원 실상사 석등(南原 實相寺 石燈)
보물 제36호 남원 실상사 승탑(南原 實相寺 僧塔)
보물 제37호 남원 실상사 동ㆍ서 삼층석탑(南原 實相寺 東ㆍ西 三層石塔)
보물 제38호 남원 실상사 증각대사탑(南原 實相寺 證覺大師塔)
보물 제39호 남원 실상사 증각대사탑비(南原 實相寺 證覺大師塔碑)
보물 제41호 남원 실상사 철조여래좌상(南原 實相寺 鐵造如來坐像)
중요민속문화재 제15호 남원 실상사 석장승(南原 實相寺 石長栍)
전라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45호 실상사 극락전(實相寺 極樂殿)
전라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88호 실상사 위토개량성책(實相寺 位土改量成冊)
전라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37호 실상사 동종(實相寺 銅鐘)
●용담사
보물 제42호 남원 용담사지 석조여래입상(南原 龍潭寺址 石造如來立像)
전라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1호 용담사 칠층석탑(龍潭寺七層石塔)
●광한루원
명승 제33호 광한루원(廣寒樓苑)
보물 제281호 남원 광한루(南原 廣寒樓)
●만복사지
사적 제349호 남원 만복사지(南原 萬福寺址)
보물 제30호 남원 만복사지 오층석탑(南原 萬福寺址 五層石塔)
보물 제31호 남원 만복사지 석조대좌(南原 萬福寺址 石造臺座)
보물 제32호 남원 만복사지 당간지주(南原 萬福寺址 幢竿支柱)
보물 제43호 남원 만복사지 석조여래입상(南原 萬福寺址 石造如來立像)
【 일 정 표 】2015년 8월 6일(목)-7일(금) 1박2일
◈ 첫째날(8/6) : 실상사 백장암-실상사-정령치-용담사
◈ 둘째날(8/7) : 광한루원-만복사지
여름 휴가를 대신하여 찾은 이번 남원 여행의 원 계획은 '지리산둘레길' 남원 구간을 탐방하는 것이었으나, 너무나 무더운 날씨 탓에 계획을 변경하여 국가지정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남원지역의 관광명소를 찾게 되었다.
남원은 이미 서너 차례 방문을 하였으나 지리산둘레길 탐방, 바래봉 철쭉산행, 그리고 대표적인 명소인 광한루원을 탐방하는 것으로 이루어졌었기 때문에 갑자기 변경한 계획이지만 제대로 문화재를 탐방해 보는 기회로 삼아 실시를 하였다.
이번 남원 여행에서 탐방하였던 관광명소들 중 광한루원을 내가 찾은 관광명소 '호남권'에 소개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내가 찾은 관광명소 '명찰을 찾아서'에 아래와 같이 소개를 하며, 단 실상사는 문화유적이 많은 관계로 제1,2부로 나누는 등 총 6편으로 나누어 소개를 하기로 한다.
- 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이 전해지는 천년고찰! 실상사 백장암(實相寺 百丈庵)
- 천 년의 세월을 버티며 들판 한 가운데 자리한 사찰! 실상사(實相寺) 제1부
- 천 년의 세월을 버티며 들판 한 가운데 자리한 사찰! 실상사(實相寺) 제2부
- 천년의 향기를 느끼는 사찰! 용담사(龍潭寺)
- 조선시대 지방관아의 대표적인 관아정원! 광한루원(廣寒樓苑)
-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 '만복사저포기'의 무대! 만복사지(萬福寺址)
◈ 조선시대 지방관아의 대표적인 관아정원! 광한루원(廣寒樓苑) ◈
『 남원 광한루원(廣寒樓苑) 소개 』
*명승 제33호(2008년01월08일 지정)
*수량/면적 69,795㎡(지정구역), 8,371㎡(보호구역)
*소재지:전북 남원시 요천로 1447, 등 (천거동)
신선의 세계관과 천상의 우주관을 표현한 우리나라 제일의 누원이다.
원래 이곳은 조선 세종 원년(1419)에 황희가 광통루라는 누각을 짓고, 산수를 즐기던 곳이었다. 1444년 전라도 관찰사 정인지가 광통루를 거닐다가 아름다운 경치에 취하여 이곳을 달나라 미인 항아가 사는 월궁속의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라 칭한 후 ‘광한루’라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 1461년 부사 장의국은 광한루를 보수하고, 요천의 맑은 물을 끌어다가 하늘나라 은하수를 상징하는 연못을 만들었다.
호수에는 지상의 낙원을 상징하는 연꽃을 심고, 견우와 직녀가 은하수에 가로막혀 만나지 못하다가 칠월칠석날 단 한번 만난다는 사랑의 다리 ‘오작교’를 연못 위에 설치하였다. 이 돌다리는 4개의 무지개 모양의 구멍이 있어 양쪽의 물이 통하게 되어 있으며, 한국 정원의 가장 대표적인 다리이다.
▲ 광한루 앞 연지 전경
▲ 광한루 앞 연지의 영주섬과 봉래섬을 연결하는 목교(사진 左)와 봉래섬과 방장섬을 연결하는 목교(사진 右)
1582년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한 정철은 광한루를 크게 고쳐 짓고, 은하수 연못 가운데에 신선이 살고 있다는 전설의 삼신산을 상징하는 봉래·방장·영주섬을 만들어 봉래섬에는 백일홍, 방장섬에는 대나무를 심고, 영주섬에는 ‘영주각’이란 정자를 세웠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 왜구들의 방화로 모두 불타버렸다.
현재의 광한루는 1639년 남원부사 신감이 복원하였다. 1794년에는 영주각이 복원되고 1964년에 방장섬에 방장정이 세워졌다. 이 광한루원은 소설 『춘향전』에서 이도령과 춘향이 인연을 맺은 장소로도 유명하여, 1920년대에 경내에 춘향사를 건립하고 김은호 화백이 그린 춘향의 영정을 모셔 놓았다. 해마다 음력 5월 5일 단오절에는 춘향제가 열린다.
「 광한루원의 누각과 정자들 」
▲ 완월정
▲ 영주각
▲ 팔각정인 방장정
♧ ♧ 남원 광한루(南原 廣寒樓)
*보물 제281호(1963년01월21일)
*소재지:전북 남원시 천거동 75번지
누(樓)란 사방을 트고 마루를 한층 높여 자연과 어우러져 쉴 수 있도록 경치 좋은 곳에 지은 건물을 말한다.
이 건물은 조선시대 이름난 황희정승이 남원에 유배되었을 때 지은 것으로 처음엔 광통루(廣通樓)라 불렀다고 한다. 광한루(廣寒樓)라는 이름은 세종 16년(1434) 정인지가 고쳐 세운 뒤 바꾼 이름이다. 지금 있는 건물은 정유재란 때 불에 탄 것을 인조 16년(1638) 다시 지은 것으로 부속건물은 정조 때 세운 것이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4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누마루 주변에는 난간을 둘렀고 기둥 사이에는 4면 모두 문을 달아 놓았는데, 여름에는 사방이 트이게끔 안쪽으로 걸 수 있도록 해 놓았다.
▲ 광한루 목조승강계단(사진 上)
광한루 추녀부(사진 下左)와 목조승강계단 내부(사진 下右)
▲ 광한루를 지지하고 있는 하부 기둥 중 바깥쪽의 돌기둥들(사진 上)
광한루 하부 안쪽의 나무 기둥(사진 下)
또한 누의 동쪽에 있는 앞면 2칸·옆면 1칸의 부속건물은 주위로 툇마루와 난간을 둘렀고 안쪽은 온돌방으로 만들어 놓았다. 뒷면 가운데 칸에 있는 계단은 조선 후기에 만든 것이다.
춘향전의 무대로도 널리 알려진 곳으로 넓은 인공 정원이 주변 경치를 한층 돋구고 있어 한국 누정의 대표가 되는 문화재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 다양한 방향에서 바라본 광한루
♧ 오작교
칠월 칠석 날(음 7월 7일) 견우와 직녀, 두 별이 만날 수 있도록 까마귀와 까치들이 은하수에 모여, 몸을 이어 만들었다는 전설의 다리이다.
지리산 계곡물이 모여 강이 된 요천수를 유입시켜 만든 수는 은하수르 상징한다. 전설과 함께 이몽룡과 성춘향의 사랑 이야기가 담겨 있는 오자교를 건너면, 사랑이 이루어지고 복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 자라돌
♧ 비석군
▲ 광한루 우측 뒷편에 자리한 비석군
▲ 광한루에서 춘향사당가는 길목 우측에 자리한 뽕나무
♧ 춘향사당
열녀 춘향의 굳은 절개를 기리기 위해서 건립한 사당이다.
사당의 대문을 '단심문'이라 하는데, 이는 「임 향한 일편단심」이란 의미이다. 사당이 중앙에는 「열녀춘향사」라는 현판이 있고 사당 안에는 춘향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이 사당에서 축원을 빌면 백년가약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많은 참배객이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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