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은 관광명소/호남권

(전남 화순)기묘사화에 연루된 선비들의 삶! 조광조선생 유배지와 학포선생부조묘

왕마구리 2015. 8. 30. 22:20

◀ 화순 조광조선생 유배지와 학포선생부조묘 ▶

기묘사화에 연루된 선비들의 삶!!!

 

「 전남 화순(全南 和順) 소개 」

화순군(和順郡)은 대한민국 전라남도 중앙부에 있는 군이다. 동쪽은 순천시·곡성군, 서쪽은 나주시, 남쪽은 보성군·장흥군, 북쪽은 광주광역시·담양군·곡성군과 접한다. 도곡면, 춘양면 일대의 화순 고인돌 유적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군청 소재지는 화순읍이고, 행정구역은 1읍 12면이다.

면적은 787㎢ (전남의 6.6%)로 전라남도내 3번째(해남, 순천)로 넓고, 임야는 도내 2번째(순천) 규모이다.

동단 화순군 북면 송단리 127′12′12″ 35′10′58″ ,서단 화순군 도암면 행산리 126′49′34″ 34′52′04″로 동서간 길이는 32㎞이며, 남단 화순군 청풍면 이만리 126′56′48″ 34′49′18″, 북단 화순군 북면 방리 127′11′10″ 35′12′40″로 남북간 길이는 43㎞이다.

 

마한시대에는 능주, 화순방면에는 평지를 바탕으로 한 여래비리국(如來卑里國), 동복방면에는 벽비리국(辟卑里國)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백제시대에 화순, 능주, 동복의 세개 현(縣)이 독자적인 행정편제를 유지하였는데 넓은 평야를 끼고 있는 이릉부리군(爾陵夫里郡:능주방면), 냇가변에 자리잡은 잉리아현(仍利阿縣:화순방면), 항아리 같은 바위가 있는 두부지현(豆夫只縣:동복방면)으로 나뉘어 있었다.

통일신라시대(757년) 경덕왕이 전국의 지명을 한자화 및 두자로 줄이는 작업을 하면서 이릉부리군(爾陵夫里郡)은 능성군(陵城郡)으로, 잉리아현은 여미현(汝湄縣)으로, 두부지현은 동복현으로 변경되면서 곡성군으로 속하게 되었다. 고려시대인 940년에 이르러 능성현은 한자를 바꾸어 능성현(綾城縣)으로 하고, 여미현은 오늘날의 지명인 화순현(和順縣)으로 개칭하였으며 1018년에는 동복현(同福縣)을 곡성에서 보성군 소속으로 변경하였다. 1143년에 처음으로 중앙에서 능성현에 감무(監務:현재의 군수)라는 행정관이 파견되었으며 이어 충열왕 때인 1280년경 동복오씨 조영(祖英) 혹은 조염(祖琰)국사의 고향이라 하여 동복에도 처음으로 감무가 파견되고 고려말 1390년에 화순에도 감무가 파견되면서 남평현을 겸임하였으니 이때에 이르러 중앙행정이 직접적으로 이곳까지 미치게 되었다.감무관이 파견되기 이전에 이곳은 모두 자치고을로서 토호들에 의한 간접지배를 받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동복현이 있었던 자치고을로는 보령현(保寧縣:현 이서면지역), 대곡현(大谷縣:현 남면지역), 수촌현(水村縣:현 북면 수리부근), 압곡현(鴨谷縣:현 북면 옥리부근) 등으로 나뉘어 있었다.

조선시대에 들어 불과 몇 년 만에 세 현이 폐치분합을 거듭하게 되는데 처음 1396년에는 화순현을 없애고 능성현과 동복감무(화순현 겸임)만을 두었다가 1405년에 능성현, 화순감무(동복겸임), 1407년에 능성현, 복순현(福順縣.동복과 화순 합함), 1413년에 능성현, 화순현(동복겸임), 1416년에는 순성현(順城縣.화순과 능성 합함), 동복현으로 하였다가 다시 1418년에 이르러 세 지역의 통합이 불가하여 능성현, 화순현, 동복현으로 두었다. 1597년 정유재란의 피해가 너무 심하여 화순현의 백성들은 스스로 폐현을 자청 능성현에 합하였고 1611년에 이르러서야 화순현이 복현되기도 하였다. 이 복현을 기념하여 당시 객관앞에 심은 것이 바로 화순군청에 서 있는 은행나무이다. 1632년 인조반정이 있은지 10년후 인조의 모친인 인헌왕후의 관향이라 하여 능성현은 일약 능주목으로 한 등급 올라서게 되었다. 이로서 화순지역에는 능주목, 화순현, 동복현의 세 고을로 이어져 왔는데 1655년 동복현의 객사와 전패가 화재로 불에 타자 잠시 화순현에 합하였다가 다시 1664년 세 현으로 있었고 이 체제는 대한민국시대까지 유지되었다. 1895년 5월 1일 행정구역개편으로 능주군, 화순군, 동복군이 되었으며 대한제국 시대인 1908년 10월 15일에는 화순군을 폐지하여 능주군에 흡수시킴으로써 능주군, 동복군으로 있었다.

일제 강점기인 1913년 능주군을 화순군으로 개칭하고 동복군과 병존하다가 1914년 3월 1일 동복군 마저 폐지하고 화순군에 편입시킴으로써 오늘날의 골격을 갖추게 되었다.

현재 1읍 12면 1출장소 342행정리로 운영하고 있다.

 

능주면 일대에는 역사적 유적지가 비교적 많은데, 특히 조선 중종 때 개혁 정치를 폈던 조광조가 귀양 와서 죽음을 당한 터와 적려유허추모비가 있다. 동복면에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맑은 물로 유명한 화순적벽이 있다. 그 밖에 남면 벽송리에 고인돌군, 북면 백아산에 천연 동굴이 있다. 천태산에는 비자나무 숲과 수령이 500년이 넘는 나무들이 있다. 관광자원으로는 도암면에 있는 운주사를 비롯해 만연사·쌍봉사·유마사·개천사가 있다.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알려진 운주사에는 석불과 석탑이 많다. 그 밖에 오성산성·예산산성·철옹산성·물염정·화순적벽이 관광지로 알려져 있다. 1995년에는 화순온천과 도곡온천이 개장되었다.

 

【 일 정 표 】2015년 6월 29일(월)-30일(화) 1박2일

                             ◈ 첫째날(6/29) : 운주사-조광조선생 유배지

                             ◈ 둘째날(6/30) : 쌍봉사-전통민속마을(양동호&양승수가옥)-학포선생부조묘

 

이번 전남 화순군 방문의 주 목적은 천불천탑의 운주사와 국보 제 57호 철감선사탑이 있는 쌍봉사 탐방이었다. 먼 거리의 이동이라 많은 곳을 둘러 보기에 어려움이 있을 뿐만 아니라, 운주사의 탐방은 단순한 사찰 탐방이 아니라 주변 산중턱에 위치한 석탑과 석불들을 탐방하게 되므로 많은 시간이 소요되어 첫째날은 운주사의 문화재들을 탐방하고, 숙소로 정한 화순읍내로 이동하는 길목에 위치한 조광조선생 유배지를 둘러보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둘째날은 아침부터 비가 내려 우산을 받쳐들고 화순군내 유일의 국보인 철감선사탑이 있는 쌍봉사를 첫번째 목적지로 정하였고, 인근의 양동호와 양승수가옥, 그리고 학포선생부조묘를 방문하는 것으로화순 탐방의 일정을 마무리하였다.

 

화순에서 탐방하였던 관광명소들 중 운주사와 쌍봉사는 내가 찾은 관광명소 '명찰을 찾아서'에, 조광조선생 유배지, 전통민속마을(양동호&양승수가옥), 그리고 학포선생부조묘는 '호남권'에 아래와 같이 문화유적이 많은 운주사를 제1,2부로 나누는 등 총 5편으로 나누어 소개를 하기로 한다.

 

- 불가사의한 신비를 간직한 천불천탑의 고찰! 운주사(雲住寺) 제1부

- 불가사의한 신비를 간직한 천불천탑의 고찰! 운주사(雲住寺) 제2부

- 통일신라시대 창건된 천년고찰! 쌍봉사(雙峯寺)

- 전통민속마을! 양동호&양승수가옥(梁東浩&梁承壽家屋)

- 기묘사화에 연루된 선비들의 삶! 조광조선생 유배지와 학포선생부조묘

 

『 조광조선생 유배지 』

*소재지: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

조광조(趙光祖, 1482~1519)는 너무나 곧은 사람이었기에 일찍 부러진 표본이었다. 선비는 물에 빠져도 개헤엄을 치지 않는다는 속담이 있다. 그의 기질이 꼭 그랬다. 사람들은 그를 곧은 선비의 상징으로 여겼다.

조광조는 조선조의 학자요 정치가로, 호는 정암(靜庵)이다. 감찰 조원강(趙元綱)의 둘째 아들로 한성에서 태어났다. 그의 고조 조온(趙溫)은 개국공신으로 ‘제2차 왕자의 난’에 공을 세웠으며 좌찬성에 오른 명신이었지만, 특별히 유학자를 배출한 집안은 아니었다.

17세 때 어천찰방(魚川察訪)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가, 무오사화로 희천에 유배중인 김굉필(金宏弼)에게 학문을 배웠다. 이때부터 시문은 물론 성리학의 연구에 힘을 쏟았고, 〈소학 小學〉·〈근사록 近思錄〉 등을 토대로 하여 이를 경전에 응용하는 등, 20세 때 김종직(金宗直)의 학통을 이은 김굉필의 문하에서 가장 촉망받는 청년학자로서 사림파의 영수가 되었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김굉필이 연산군의 생모 윤씨의 폐위에 찬성했다 하여 윤필상(尹弼商)·이극균(李克均) 등과 함께 처형되면서 가족과 제자들까지도 처벌당하게 되자, 조광조도 유배당하는 몸이 되었다.

정계의 현실을 몸소 겪은 그는 유배지에서 학업에만 전념했다. 1510년(중종 5)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공부했는데, 이때는 연산군 시절의 폐해에 느낀 바 있어 '정군심'(正君心)·'치군지'(致君知)를 급선무로 삼아 〈대학〉의 도를 역설하는 한편, 도학정치·철인정치를 주장한 대자성 유숭조(柳崇祖)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1515년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라는 관직에 초임되었고, 이어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전적·사헌부감찰 등을 역임하면서 왕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해에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죽고 중종의 계비 책봉문제가 논의될 때, 박상(朴祥), ·김정(金淨) 등이 폐위된 신씨(愼氏)의 복위를 상소하다 반정공신(反正功臣)인 대사간 이행(李荇)의 탄핵으로 유배되자, 정언으로 있던 조광조는 대사간으로서 상소자를 벌함은 언로(言路)를 막는 결과가 되어 국가의 존망과 관계된다고 주장하여 오히려 이행 등을 파직하게 했다.

그뒤 수찬을 거쳐 호조·예조의 정랑을 역임했다. 그는 왕의 신임을 바탕으로 입시(入侍)할 때마다 도학정치를 역설했다. 당시는 연산군이 정치와 사회를 혼란에 빠뜨린 직후로 정치적 분위기를 새롭게 하고자 하는 것이 시대적 추세였고, 중종은 조광조의 정치사상을 바탕으로 이상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다.

조광조의 정치관은 유교를 정치와 교화의 근본으로 삼아 왕도정치를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왕도정치(王道政治)의 구체적 실현방법으로 왕이나 관직에 있는 자들이 몸소 도학을 실천궁행(實踐躬行)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을 지치주의(至治主義)·도학정치라고 했다. 그는 지치(이상정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다스림의 근본인 군주의 마음을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되며, 군주의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정체(政體)가 의지하여 설 수 없고 교화가 행해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또 뜻을 세움이 크고 높아 시류(時流)에 구애되지 않아야 함을 논하고, '조종(祖宗)의 옛 법을 갑자기 고칠 수는 없지만 만일 현실에 맞지 않는 것이 있으면 역시 변통(變通)이 있어야 한다'라고 하는 변법주의(變法主義)를 주장했다.

한편 지난날의 사림의 참화를 거울 삼아, 임금이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의 공을 이룸으로써 마음을 밝혀 군자와 소인을 분별해야 이상정치를 실현할 수 있다고 했다.

 

1517년 교리로 경연시독관·춘추관기주관을 겸임했으며, 〈여씨향약 呂氏鄕約〉을 반포·간행하여 8도에 시행하도록 함으로써 향촌의 상호부조와 서민의 복리증진을 꾀했다.

1518년 부제학이 된 후 미신타파를 내세워 당시 폐해가 많아 지식층 사이에 비난이 많았던 소격서(昭格署)의 폐지를 강력히 주장해 이를 혁파했다. 그해 11월에는 대사헌에 승진하고 세자부빈객(世子副賓客)을 겸했다. 이때에 당시의 과거가 사장(詞章)에만 치중하고 있음을 비판하고, 내외의 요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각각 재(才)·행(行)이 있는 선비들을 천거하여 왕이 선택하게 하는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할 것을 주장하여 이듬해에 이를 실시했다.

현량과의 실시로 김식(金湜)·기준(奇遵)·한충(韓忠)·김구(金絿)·김정(金淨) 등 소장학자들이 발탁되어 정계에 진출했다(사림파). 이후 조광조와 그의 동지들인 소장학자들은 조정의 내외요직에 포진하여 당시를 이상정치 실현의 가장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새로운 제도의 실시와 전래 제도의 개혁, 교화의 보급 등을 통해 이상적인 정치를 시행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이들은 훈구파를 외직으로 몰아내는 한편, 1519년 반정공신 중 지나치게 공을 인정받은 사람의 훈작을 삭탈할 것을 요청했다.

이러한 신진사류의 위훈삭제(僞勳削除) 요청은 이미 기성 귀족이 되어 있는 훈구파의 강력한 반발을 샀고, 왕도 급격한 개혁주장을 꺼리고 있어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조광조 등의 요청이 강력했기 때문에 마침내 전(全) 공신의 3/4에 해당되는 76명의 훈작을 삭제하게 되었으며, 이는 기묘사화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훈구파 중에 조광조 등 신진사류에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던 예조판서 남곤(南袞)과 도총관 심정(沈貞)은 홍경주(洪景舟)와 모의하여, 대궐 후원의 나뭇잎에 과일즙으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자를 써 벌레가 갉아먹게 한 다음에 궁녀로 하여금 이것을 왕에게 바쳐서 의심을 조장시켰다.

또한 홍경주를 시켜 조광조 등이 붕당을 짓고, 사리(私利)를 취하며, 젊은 사람으로 하여금 나이 든 사람을 능멸하고, 낮은 이가 귀한 이를 업신여겨 국세를 기울게 하여, 조정을 날로 그르친다고 탄핵하게 했다. 신진사류를 비롯한 조광조의 도학정치와 급진적 개혁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중종은 훈구파의 탄핵을 받아들여 1519년 조광조·김식·김구·김정 등을 투옥하고 이어 사사(賜死)의 명을 내렸다.

그러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변호로 일단 사형이 면제되어 능성(綾城, 오늘날의 화순 능주)에 위리안치되었다. 그후 훈구파의 김전(金詮)·남곤·이유청(李惟淸)이 3정승에 임명되자 현량과가 폐지되고, 신진사류들의 상소가 연일 이어져 조정 안팎이 시끄러웠다. 조광조는 유배지에 있으면서 다가올 운명을 알아차렸는지 불평 한마디 없이 조용히 지냈다. 훈구파의 끈질긴 공격으로 마침내 조광조에게 사약이 내려졌다. 의금부 도사가 사약을 들고 오자, 조광조가 조용히 물었다.

“주상께서 신에게 죽음을 내리신다면 합당한 죄명이 있을 것 아니요? 삼가 그 죄명을 듣고 싶소.”

도사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조광조는 뜰에 내려와서 북쪽을 향해 두 번 절을 하고 무릎을 꿇고 사약의 교지를 받았다. 그리고 허락을 받고 집에 편지를 써서 조상의 무덤 옆에 자신을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어 목욕을 하고 옷깃을 가다듬고 자리를 펴고 앉아 시 한 수를 지었다.

임금 사랑하기를 어버이 사랑하는 것처럼

나라 걱정하기를 집을 걱정하듯 하라

청천백일이 아래 땅에 내리쪼여서

밝고 밝게 충성스런 마음을 비치네

- 《정암집》 연보

 

                      ▲ 정암 조광조선생 유배지 전경

 

조광조는 사약을 들이켰으나 죽지 않았다. 포졸들이 목을 묶으려 하자 “성상이 미신(微臣)의 머리를 보호하려 약을 내렸는데 너희들이 어찌 감히 이 따위 짓을 하려 하느냐?”고 질책하면서 독약을 탄 소주를 마시고 누워서 피를 쏟으며 죽었다. 38세를 일기로 100년 만에 얻기 어려운 혁신정치가는 이렇게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묘소는 용인 심곡에 자리를 잡았고, 그 언저리에 그를 기리는 심곡서원이 후에 세워졌다.

 

조광조 등 신진사류들의 도학정치사상을 바탕으로 한 급진적 개혁정책은 연산군 이후의 혼란을 극복하고, 요순시대(堯舜時代)와 같은 이상정치를 실현함으로써 국가의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실행방법이 급진적인 것이어서 왕권을 배경으로 한 훈구세력의 반발을 샀고, 결국 개혁정책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의 도학정신은 후세에 계승되어 이황(李滉)·이이(李珥) 등의 유학자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사림에게는 정신적인 표상이 되었으며, 한국 유학의 기본적인 성격을 형성했다(성리학). 선조초에 신원(伸寃)되어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문묘에 배향되었다.

능주 죽수서원(竹樹書院), 양주 도봉서원(道峰書院), 희천 양현사(兩賢司)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정암집 靜庵集〉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 정암 조광조 선생 유배지의 영정각(사진 左)과 유배와 기거했던 복원된 집(사진 右)

♧ ♧ 정암 조광조 선생 적려유허비

*기념물 제41호

조광조 선생이 기묘사화로 인하여 유배 왔던 이곳에서 사사당한 것을 기록한 것이다.

선생은 조선 중기 성리학자로서 중종을 왕위에 오르게 한 공신들의 공을 삭제하는 '위훈삭제' 등 개혁을 단행하다가 중종14년(1519) 훈구파의 모함으로 이곳 능주면 남전리에 유배되어 1개월만에 사약을 받고 죽음을 당하였다.

그 후 현종6년(1667) 당시 능주목사 민여로가 우암 송시열의 글을 받아 이 비를 세워 선생의 넋을 위로 하고 그 뜻을 되새기게 하였다.

 

 

                      ▲ 정암 조광조 선생 유허비가 보관된 비각(사진 上)

                         유허비 전면(사진 下左)과 후면(사진 下右)

                      ▲ 정암 조광조 선생 적려유허비 후면에 기록된 내용

 

 

『 학포선생 부조묘 』

*소재지: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 월곡리 달아실마을

 

 

학포 선생 부조묘는 양팽손(梁彭孫)[1488~1545]을 추모하기 위해 1631년(인조 9)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는 학포선생부조묘는, 학포 양팽손을 모시는 사당으로 신실구역과 강학구역으로 구분되어져 전형적인 전학후묘의 사당배치를 보이고 있습니다. 신실구역 건물은 1631년경(인조 9)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며,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에 의해 철거되었다가 1947년 복원되었습니다. 강학구역인 경장각은 1892년(고종29)에 인근 월곡리 513번지에 있던 건물을 1961년 현 위치로 이축하였습니다. 과거 이곳에서 학포문집과 정암문집을 만들었으나 6.25때 소실되었다고 합니다.

 

                      ▲ 학포 선생 부조묘 신실구역(사진 上)

                         학포 선생 사당(사진 下左)과 사당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사진 下右)

 

학포 선생 부조묘의 전체 구성은 맨 위쪽 상단의 장방형 담장 내에 학포 선생의 사당이 있고 이와 단을 달리한 아래 마당에 강당과 경모재가 나란히 병렬로 자리하고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전후 반 칸 퇴 포함]의 단층 맞배집이다. 구조는 두리기둥을 세우고 굴도리로 결구된 5량가이며 공포는 이익공식(二翼工式)으로 되어 있다. 강당과 경장각은 모두 정면 5칸 규모의 팔작집으로 내부는 대청과 온돌방으로 꾸며져 있다.

 

 

                      ▲ 학포 선생 부조묘의 강당(사진 上)과 경모재(사진 下)

 

학포 선생 부조묘는 현재 문중의 지속적인 관심과 관리로 현존 상태는 매우 양호한 편이며, 제주 양씨 후손들이 음력 8월 18일 이곳에 모여 매년 제사를 올리고 있다.

학포 선생 부조묘는 화순 지역의 제주 양씨 입향조인 양팽손의 후손들이 자발적으로 조성한 문중의 성역 공간이다. 제향은 물론 각종 문중 모임이 이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건축적 구성과 정비도 잘 되어 있다.

 

                      ▲ 학포 선생 부조묘 강학구역에서 뒤돌아본 외삼문

◈ 양팽손(1488~1545)

조선 중종 때 정계에 진출하여 사간원 정언 등 벼슬을 지내다 용담현령을 마지막으로 관직에서 불러났다. 그는 기묘사화로 관직이 삭탈된 후 낙향하여 후학을 양성하였다.

선생은 특히 선비로써 갖추어야 할 시서화에 능했으며, 개인 문집인 '학포문집'이 전하며, 10여점의 남종화를 남겨 남종화의 태두로도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