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은 관광명소/영남권

(경남 창녕)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와 만옥정공원내 문화재들(창녕객사,퇴천 삼층석탑,창녕 척화비)

왕마구리 2016. 1. 25. 18:08

◀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昌寧 新羅 眞興王 拓境碑)와

만옥정공원내 문화재들(창녕객사,퇴천 삼층석탑,창녕 척화비) ▶

신라 진흥왕이 순시하여 세운 기념비!

 

「 경남 창녕(慶南 昌寧) 소개 」

창녕군은 경상남도 중앙 북단에 위치하며 북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경상북도 고령군과 인접하고, 동쪽은 산악을 경계로 경상북도 청도군과 경상남도의 밀양시가 접해 있으며, 서남은 낙동강을 사이로 합천군, 의령군, 함안군, 창원시에 접하고 있습니다.

동단은 부곡면 동경 128도 39분, 서단은 이방면 동경 128도 21분으로 동서의 길이는 약 27.36km이며, 남단은 부곡면 북위 35도 22분이며 북단은 성산면 북위 35도 40분으로 남북 길이는 약 34.39km 이다.

기후는 비교적 온화하나 평균기온이 여름에는 23.9℃이고, 겨울에는 영하1.2℃정도로서 한서의 차이가 심하며, 하기에는 한발과 수해가 자주있는 지역이다.

창녕군의 군 소재지인 창녕읍은 창녕군의 동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으로 밀양시 무안면과 북으로 고암면, 서부에는 대지, 유어면과 남부는 계성면과 접하고 있다. 동부산악은 화왕산을 위시한 산악지대이고 서부는 평야 지대로 고온다습한 기후로 수도작을 위주로 양파, 마늘, 고추를 많이 생산하고 있다

당일 등산코스로 최적의 주변환경이 조성되어 있는 화왕산은 봄, 가을 주말과 화왕산 갈대제가 개최되는 10월에 전국에서 많은 등산객이 찾고 있으며 정상의 분지 지형의 억새 군락지와 가야시대때 축조한 화왕산성이 있으며 최근에는 MBC에서 방영되는 창사특집드라마 허준의 촬영세트장이 있어 추후로 좋은 관광자원이 될것으로 보인다

창녕읍의 특산물은 마늘과 양파가 유명하며, 옥천리 일대에서 채취되는 자연송이는 그 맛과 향이 특이하여 전량 일본으로 수출되고 있다

비사벌의 얼이 숨쉬는 문화의 고장인 창녕읍의 화왕산성은 임진왜란때 의병을 일으켜 왜군을 물리친 곽재우 장군의 승전지로 유명하며 교동 고분군에 위치한 창녕박물관에는 많은 문화유물들이 전시되어있다. 현재 창녕읍에 문화재 현황은 국보2점 보물8점 사적4점 중요민속자료2점 경상남도유형문화재 5점등 총 27점의 문화재가 있다.

 

                      ▲ 만옥정공원

 

대표적인 남방식 지석묘인 장마면 유리의 지석묘, 부곡면 온정리의 고인돌과 고분, 도천면 일리와 영산면 신제리의 지석묘, 계성면 사리의 사은암 등으로 보아 선사시대부터 우리군에 인류가 취락한 것으로 보고 있다.

기록으로는 1세기 전후, 「삼국지」 변진 24국의 소개에 나타나있는 불사국이 창녕군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가야시대에는 불사국(不斯國) 또는 비화가야(非火伽倻)로 존립하여 오다가 일찍이 신라에 병합되어 비자화군(比自火郡) 또는 비사벌(比斯伐), 비자벌(比子伐)이라 하였다.  영남의 중추인 낙동강을 자양으로 번성하여온 창녕군은 초기국가이던 옛 가야를 거쳐 신라에 이르러서부터 나뉘어져 있던 여러 현이 합하여져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신라진흥왕 16년(555) 에 하주(下州)의 치소(治所)를 두고 군대 주둔지인 정(停)을 두었다가 同王 26년(565)에 폐지하고, 경덕왕 16년(757)에 화왕군(火王郡)으로 이름을 고쳤다. 이때 영산현은 본래 서화현(西火縣)이라 불렀으나 상약(尙藥)으로 고쳐서 밀양군의 현(縣)으로 되었다.

계성은 본래 신라 때 읍을 설치하였는데 옛이름은 알 수 없고, 경덕왕 16년에 계성으로 고쳐 화왕군(火王郡)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고려때에 이르러 태조 23년(940) 3월 화왕군(火王郡)을 지금의 이름인 창녕(昌寧)으로 고쳤다. 그후 현종이 밀성군에 소속시켰으며, 明宗2年(1172年) 감무(監務)를 두었다. 역시 영산도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밀성군에 소속시켰는데. 원종 15년(1274)에 감무를 두었다.

또 계성은 현종 9년(1018)에 밀성군에 속했다가 공민왕 15년(1366)에 영산현에 속하였으나 곧 공양왕 2년(1390)에 다시 밀성에 속하게 되는 등 변화가 많았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태조 3년(1394) 창녕과 영산에 현감을 두게 되었다. 그러나 인조 9년(1631)에 창녕현은 지도(至道)의 역변(逆變)으로 인하여 현이 혁파되고 강등되어 영산현에 합하여 소속되는 수난을 당하였다. 그로부터 6년후 어영군(御營軍)의 상언(上言)에 의하여 인조 15년(1637)에 복현(復縣)되어 다시 창녕과 영산 양현으로 나누어 졌다.

고종 32년(1895) 5월 8도제를 폐지하고 23부제의 실시로 본 군은 밀양과 함께 대구부(大邱府)에 속하게 되었고, 이듬해(1896) 8월 4일 13도제(道制)가 실시되자 창녕·영산군은 대구부에서 경상남도에 속하게 되었다. 고종 34년(1897) 행정의 말단조직인 방(坊)이 면(面)으로 개칭되었으며, 순종 융희원년(隆熙元年)에 통폐합을 거쳐 1910년 9월 면제(面制)가 시행되었다.

1914년 4월 1일 부군폐치분합(府郡廢置分合)에 따라 함안군에 편입된 길곡면의 사촌(射村)·금곡리 일부(지금의 함안군 칠북면 봉촌리 일대)를 제외한 영산군은 창녕군에 합병, 오늘에 이르고 있다. 2개군의 합병으로 창녕, 고암, 성산, 대합, 이방, 대지, 유어, 창락, 영산, 계성, 남곡, 길곡, 부곡, 도천, 장마 등 15개 면으로 개편되었다.

1955년 7월 1일 창락면이 창녕면에 편입되어 14개 면으로 되었다.

1960년 1월 1일 창녕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이어 3년후인 1963년 1월 1일에는 남지면이 읍으로 승격하게 되어 본군은 2읍 12면이 되었다.

1971년 2월 13일 창녕군조례 제175호로 남지읍 고곡출장소를 설치함으로써 2읍 12면 1출장소가 되었다.

1998년 9월 10일 행정조직 개편으로 고곡출장소가 폐지되었고, 현재 139개 법정리에 285개의 행정리가 있다.

 

                      ▲ 만옥정공원 안내도

 

『 탐방한 창녕군의 문화재들 』

●창녕읍내 문화재들

국보 제33호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昌寧 新羅 眞興王 拓境碑)

국보 제34호 창녕 술정리 동 삼층석탑(昌寧 述亭里 東 三層石塔)

보물 제75호 창녕 송현동 마애여래좌상(昌寧 松峴洞 磨崖如來坐像)

보물 제227호 창녕 인양사 조성비(昌寧 仁陽寺 造成碑)

보물 제310호 창녕 석빙고(昌寧 石氷庫)

보물 제520호 창녕 술정리 서 삼층석탑(昌寧 述亭里 西 三層石塔)

중요민속문화재 제10호 창녕 술정리 하씨초가(昌寧 述亭里 河氏 草家)

사적 제514호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昌寧 校洞과 松峴洞 古墳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0호 퇴천 삼층석탑(兎川 三層石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31호 창녕객사(昌寧客舍)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12호 창녕향교(昌寧鄕校)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18호 창녕척화비(昌寧斥和碑)

●관룡사(觀龍寺) 

보물 제146호 창녕 관룡사 약사전(昌寧 觀龍寺 藥師殿)

보물 제212호 창녕 관룡사 대웅전(昌寧 觀龍寺 大雄殿)

보물 제519호 창녕 관룡사 석조여래좌상(昌寧 觀龍寺 石造如來坐像)

보물 제295호 창녕 관룡사 용선대 석조여래좌상(昌寧 觀龍寺 龍船臺 石造如來坐像)

보물 제1730호 창녕 관룡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대좌(昌寧 觀龍寺 木造釋迦如來三佛坐像 및 臺座)

보물 제1816호 창녕 관룡사 대웅전 관음보살 벽화(昌寧 觀龍寺 大雄殿 觀音菩薩壁畵)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1호 관룡사 약사전 삼층석탑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83호 관룡사사적기(觀龍寺事蹟記)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76호 창녕 관룡사 명부전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昌寧 觀龍寺 冥府殿 木造地藏菩薩三尊像 및 十王像 一括)

경상남도 민속문화재 제6호 관룡사석장승(觀龍寺石長丞)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9호 관룡사부도(觀龍寺浮屠)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40호 관룡사 원음각(觀龍寺 圓音閣)

●창녕 영산면 문화재

보물 제564호 창녕 영산 만년교(昌寧 靈山 萬年橋)

보물 제1739호 창녕 영산 석빙고(昌寧 靈山 石氷庫)

●창녕 우포늪 천연보호구역 천연기념물 제524호

 

【 일 정 표 】2015년 12월 30일(수)-2016년 01월 01일(금) 2박3일

                             ◈ 첫째날(12/30) : 우포늪 천연보호구역-창녕 석빙고-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와 만옥정공원 내 문화재들(창녕객사,퇴천 삼층석탑 및 창녕 척화비)

                             ◈ 둘째날(12/31) : 관룡산&구룡산 산행-관룡사

                             ◈ 세째날(01/01) : 창녕읍내 문화재들(술정리 서 삼층석탑-술정리 동 삼층석탑-하씨초가-인양사 조성비-창녕향교-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송현동 마애여래좌상)-영산 만년교-영산 석빙고

 

경남 창녕군은 2007년04월29일(일) 부천마구리산악회 회원 35명을 인솔하여 관룡산~화왕산 연계 산행을 위해 방문한지 약 8년8개월여 만에  창녕지역의 문화재 탐방을 위해 2박3일 일정으로 다시 방문을 하게 되었다.

2015년을 마무리하는 12월31일 송년산행을 2007년04월29일 산행하였던 관룡산을 택하여, 당시 산행코스였던 '관룡사~청룡암~구룡삼거리~관룡산~화왕산' 코스에서 산행들머리는 같지만 산행코스를 '관룡사~노단이마을 능선갈림길~병풍바위 암릉길~구룡산~구룡삼거리~관룡산~용선대~관룡사'로 달리하여 실시하고 관룡사 문화재를 탐방하는 일정과 우포늪 쳔연보호구역 '우포생태길' 탐방 일정이 추가되어 다른 지역과는 달리 2박3일로 실시가 되었다.

창녕에서의 탐방 명소 소개는 관룡산&구룡산 산행은 일반산행 '영남&호남권'에 산행기를,

내가 찾은 관광명소 '명찰을 찾아서'에 관룡사의 문화재들을,

그리고 내가 찾은 관광명소 '영남권'에 창녕 석빙고와 창녕 영산 석빙고,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와 만옥정공원 내 문화재들(창녕객사, 퇴천 삼층석탑, 척화비), 창녕읍내 두 기의 통일신라 석탑(창녕 술정리 동 삼층석탑&서 삼층석탑), 창녕읍내의 문화재들(인왕사 조성비, 창녕향교, 하씨초가, 송현동 마애여래좌상), 5~6세기 대형 고분군인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국내 최대의 자연늪이며 람사르협약 등록습지인 우포 늪 천연보호구역, 그리고 무지개 모양의 돌다리 창녕 영산 만년교 등 총 9편으로 나누어 소개를 하기로 한다.

그리고 창녕 석빙고와 창녕 영산 석빙고를 소개할 때 현재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된 나머지 석빙고(4개소:2008년6월과 2013년5월 방문한 경주 석빙고, 2013년7월 방문한 안동 석빙고, 2013년11월 방문한 청도 석빙고, 그리고 달성 현풍 석빙고)들도 간략하게 함께 소개를 하기로 한다.

 

- 신라 8대 사찰 중의 하나! 창녕 관룡사(昌寧 觀龍寺)

- 조선시대 얼음창고! 창녕 석빙고(昌寧 石氷庫)와 창녕 영산 석빙고(昌寧 靈山 石氷庫)

- 신라 진흥왕이 순시하여 세운 기념비!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昌寧 新羅 眞興王 拓境碑)와 만옥정공원내 문화재들(창녕객사,퇴천 삼층석탑,창녕 척화비)

- 창녕읍내 두 기의 통일신라 석탑!  창녕 술정리 동 삼층석탑(昌寧 述亭里 東 三層石塔)과 술정리 서 삼층석탑(述亭里 西 三層石塔)

- 창녕읍내의 문화재들! 창녕 송현동 마애여래좌상(昌寧 松峴洞 磨崖如來坐像),창녕 인양사 조성비(昌寧 仁陽寺 造成碑),술정리 하씨초가(述亭里 河氏 草家),창녕향교(昌寧鄕校)

- 5~6세기 대형 고분군!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昌寧 校洞과 松峴洞 古墳群)

- 국내 최대의 자연늪! 창녕 우포늪 자연보호구역

- 무지개 모양의 돌다리! 창녕 영산 만년교(昌寧 靈山 萬年橋)

 

                      ▲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가 보관된 전각

 

♧ ♧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昌寧 新羅 眞興王 拓境碑)

*국보 제33호(1962년12월20일 지정)

*소재지: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 28-1번지 

빛벌가야(지금의 창녕군)를 신라 영토로 편입한 진흥왕이 이곳을 순시하면서 민심을 살핀 후 그 기념으로 세운 비이다. 당시 창녕군은 신라가 서쪽으로 진출하는데 있어 마치 부채살의 꼭지와 같은 중요한 길목이었는데, 진흥왕 16년(555) 신라에 병합되었고, 565년에는 대야주(지금의 합천군)와 합쳐져 비사벌군(比斯伐郡) 또는 비자화군(比自化郡)으로 불리워지게 되었다.

 

 

                      ▲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전면(사진 上)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후면(사진 下)

 

비는 목마산성 기슭에 있던 것을 1924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비각안에 모셔 둔 것으로, 자연석의 앞면을 평평하게 다듬어 비문을 새기고, 그 둘레에 선으로 윤곽을 돌려놓은 모습이다. 다른 순수비와 달리 ‘순수관경(巡狩管境)’이라는 제목이 보이지 않아 척경비(영토 편입을 기념하여 세운 비)라 일컫고 있으나, 임금을 수행한 신하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순수비에 속한다 할 수 있다.

 

                      ▲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비문

 

비문은 심하게 닳아 있어 판독하기가 힘든 상태이나, 후반부는 명확히 읽어낼 수 있을 만큼 선명하다. 다른 순수비의 내용을 참고할 때 대략 진흥왕이 빛벌가야를 점령하여 영토를 확장한 사실과 왕의 통치이념, 포부 등이 실려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후반부에 당시 왕을 수행하던 신하들의 명단이 직관, 직위, 소속의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어 당시 지방행정조직, 신분제 및 사회조직을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비를 세운 시기는 대가야가 멸망하기 1년 전인 신라 진흥왕 22년(561)으로, 이 지역을 가야진출의 발판으로 삼고자 한 왕의 정치적인 의도가 엿보인다. 또한 진흥왕 당시의 사실을 기록해 놓아『삼국사기』의 내용을 보완해줌으로써, 이 시대의 역사적 사실을 밝히고 이해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창녕읍사무소 위에 자리한 만옥정공원에는 국보 제33호인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가 공원 상부에 자리를 하고 있으며, 척경비 좌측으로 한국전쟁 창녕지구 전승비, 그 앞으로 창녕 척화비가 자리를 하고 있다.

창녕읍사무소에서 공원으로 들어서면 좌측에 창녕객사가 보이고, 그 뒷편으로 퇴천 삼층석탑, 창녕객사 옆에는 창녕현감, 군수를 지냈던 분들의 공덕비와 선정비들이 세워져 있다.

 

『 만옥정공원의 기타 문화재들 』

 

퇴천 삼층석탑(兎川 三層石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0호(1972년02월12일 지정)

*소재지: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 28-1번지 

 

 

 

민가 안에 무너져 있던 것을 1969년 10월에 해체, 보수하여 창녕의 만옥정 공원으로 옮겨 세웠다. 탑이 있던 마을 주변에서 기와조각과 자기조각들이 발견되어 사찰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나, 절 이름이나 역사를 전하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 퇴천 삼층석탑 기단부

 

탑은 2층 기단(基壇)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위 ·아래층 기단과 탑신의 몸돌에는 기둥모양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수평을 이루던 처마의 네 귀퉁이가 살짝 들려 있으며, 밑면에는 4단의 받침을 두었다.

통일신라 후기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며, 기단의 일부가 약가 파손되기는 했지만 통일신라의 석탑 변천 과정을 밝히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 창녕객사와 퇴천 삼층석탑

 

창녕객사(昌寧客舍)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31호(1983년08월12일 지정)

*소재지: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 28-22번지   

객사는 조선시대의 지방 관아건물로 고을 수령이 임금의 위패를 모시고 예를 올리는 정당과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머물렀던 좌·우헌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어진 시기는 알 수 없고 1924년 군수 이장희가 시장용 건물로 쓰기 위해 창녕읍 술정리로 옮겼다가 1988년 이곳 만옥정에 옮기고 보수했다.

앞면 3칸·옆면 3칸의 1층 건물로, 지붕 옆모습이 사람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되어있다. 바닥은 따로 마련하지 않고 기단 위에 곧바로 세웠으며 기둥 사이에는 벽을 쌓지 않아 주위의 경관을 볼 수 있게 했다.

 

 

앞면을 제외한 나머지 면들의 기둥 사이에 나무 2개를 가로로 설치해 행사 때 발이나 병풍을 치기 쉽게 했으며, 건물 전체에 쇠못을 사용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지어진 건물양식으로 보아 조선 후기의 건물로 추측된다.

 

 

                      ▲ 창녕객사 옆 공덕비들
 

창녕 척화비(昌寧 斥和碑)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18호(1995년05월02일 지정)

*소재지: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 28번지   

척화비란 쇄국정책을 실시하던 흥선대원군이 고종3년(1866) 병인양요에서 프랑스군을, 고종8년(1871) 신미양요에서 미군을 물리치면서 그러한 의지를 더욱 굳혀 국민들에게 서양세력의 침략을 더욱 강력히 경고하고자 서울 및 전국 중요 도로변에 세우도록 한 비이다.

 

 

만옥정 공원 안에 자리하고 있는 이 비는 땅위로 드러난 얇은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운 모습으로, 그 앞면에 대원군의 쇄국의지가 담긴 강한 어투의 비문을 적어 놓았다.

비 앞면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음은 곧 화친하자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일이다"라는 내용이 큰 글씨로, "만년에 걸친 자손들에게 경계하노니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운다"라는 내용이 작은 글씨로 새겨져 있다. 높이 1.23m, 폭 0.46m, 두께 0.2m이다.

고종 8년(1871) 신미양요를 치른 후 같은 해 일제히 세운 것으로, 한일합방이 되면서 대부분 철거되거나 훼손되었는데, 이처럼 몇 기의 비들이 곳곳에 남아 그 역사적인 의미를 말해주고 있다.

원래 창녕읍 교하리에 있던 것을 광복 후 만옥정공원으로 옮겨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만옥정공원 창녕지구 전승비(UN전적비) ]

 

 

동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중이던 1950년8월7일 함양과 거창을 점령한 북한군은 이 곳 창녕과 현풍을 탈취한 후 대구를 포위 공격하려는 계획으로 낙동강 돌출부인 남지읍 박진나루, 오항나루 유어면 부곡리를 건너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하여 계속적인 공격을 가하여 왔으나, 미군 제24사단, 2사단의 치열한 역습으로 적의 기도를 좌절시켰다.

특히 8월13일 6회에 걸친 적의 발악적인 공격을 저지하고 9월15일까지 일진일퇴의 혈투를 한 달이상 계속하여 북한군 3개 사단의 병력을 섬멸하였다.

조국수호의 마지막 보루였던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고 UN군의 인천상륙작전과 아군의 총 반격으로 북진의 기틀을 마련한 이 불후의 공훈을 길이 빛내는 동시에 그 영령을 위로하고자 1959년3월31일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