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편- 해남 달마산 미황사와 두륜산 대흥사 ▶
우리나라 불교 해로유입설의 근거를 제공하는 통일신라시대 창건된 고찰 미황사와
우리나라 31본산의 하나며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본사인 삼국시대(신라)에 창건된 고찰 대흥사를 찾아서...
▲ 둘째날! 관광에 나서기 전 완도 숙소 앞에서 바다를 배경으로...
【 여행일자 】2009년 5월 21일(금)~22일(토) 1박2일
【 여행코스 】전라남도 목포시, 해남군 그리고 전라북도 남원
((첫째날)) 서울 잠실역출발-목포 유달산-갓바위-해남 땅끝마을-완도 숙소
((둘째날)) 숙소-해남 달마산 미황사-해남 두륜산 대흥사-남원 광한루-서울 잠실역도착
【 참 석 자 】총 25명(11가족)
기세명+장종녀, 김경암+김경선+김가연, 백운석+이명숙, 서영호+박미연, 신명호+김경숙, 윤창희+이미옥, 이성규+김종구, 이수형+김당주, 이종익+송미란, 이현동+이경희+이준규+이소연, 천영면+천세령
【 교 통 편 】40인승 관광버스
▲ 완도 숙소 앞 바닷가 전경
남도여행 둘째날 일정이 비가 내리는 가운데 시작이 되었다.
청산도행은 폭주한 여객들로 선편 예약이 불가능하여 취소되었고, 전날 교통체증으로 이동시간이 길어 실시하지 못하였던 달마산 미황사를 탐방하는 것으로 둘때날 여정이 시작되었다.
미황사 경내를 둘러보고 남도의 아름다운 사계를 배경으로 소리꾼 일가의 애달픈 삶과 득음에 대한 집념을 그려내어 우리나라 영화 사상 200백만명 관객동원이라는는 금자탑을 이룩한 영화 '서편제'의 촬영지였던 청산도는 비록 방문하지 못하였지만 영화의 가장 많은 부분을 촬영하엿던 대흥사 주변을 방문하였다.
대가집 잔치에서 유봉(김명곤 역)이 '춘향가'의 어사출도 대목을 부르는 장면과 북치는 법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 KBS '1박2일'의 베이스캠프로 활용되었던 유선관과 대흥사 경내를 관광하였다.
그러나 두륜산케이블카는 에약을 하였지만 출발시간 전에 강풍으로 운행이 중단되는 바람에 다도해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오르지 못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 ♧ 달마산 미황사(達摩山 美黃寺)
【 위 치 】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서정리 달마산(達摩山 489m) 자락에 자리잡은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의 말사로 위도상 우리나라의 가장 끝에 자리잡고 있으며 달마산의 끝자락(땅끝기맥)이 땅끝으로 이어진다.
전라북도 장수군의 백두대간 영취산에서 분기한 금남호남정맥이 3정맥분기봉인 주화산에서 북쪽으로 금남정맥을 분기시키고, 또 다른 남쪽 방향인 호남지방으로 우리나라(남한)에서 백두대간을 제외하고 가장 긴 산줄기인 호남정맥을 분기시키는데 이 호남정맥이 전라남도 화순군의 바람재에서 다른 산줄기 하나를 가지치니 이 산줄기가 땅끝기맥으로 월출산, 두륜산을 거쳐 달마산을 마지막으로 솟구치고 해남 땅끝마을로 이어지는 123㎞의 산줄기로 바다를 통해 한라산까지 연결된다고 하며, 달마산은 암릉(바위능선)구간이 많아 산악인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미황사는 병풍처럼 펼쳐진 수려한 달마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석양 무렵의 낙조 등 산경을 배경으로 한 경관이 매우 뛰어나다. 달마산은 멀리서 보면 미치 긴 공룡의 등릉 연산시키는 산등성이에 온갖 기암이 장관을 이루어 미황사를 뒤로 한 산이 수십폭의 병풍을 펼치고 있는 듯 그 자연의 모습이 수려하다.
▲ 달마산 등산로 입구와 등산코스 안내
【 창건과 역사 】
숙종18년(1692)에 병조판서를 지낸 민암(1634~1692)이 지은 미황사사적지(미황사 부도전 옆에 위치)에 따르면 신라 경덕왕8년(749)에 의조화상이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미황사는 고려시대 지원년간(1264~1294)에 남송의 달관, 군자 등이 미황사에 내왕하기도 하여 부흥기를 맞았으며, 조선전기에도 그 사세가 꾸준히 유지되어 왔다.
미황사의 조선시대 연혁은 영조30년(1754)에 기록된 '미황사법당중수상량문'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이 상량문은 1982년 북원공사 때 발견된 것으로 내용을 보면 임진왜란 이후 3차례의 중건이 있었다고 한다.
첫번째 중건은 선조30년(1597) 정유재란 때 건물이 일부 소실되어 다음해부터 공사를 시작 1601년에 마무리되었다. 이때의 불사는 만선스님이 담당하였다. 그 뒤 효종9년(1658)에서 현종1년(1660)까지 두번째 중창이 이루어졌으며, 성간, 수신 스님이 담당했다.
그리고 세번째는 영조27년(1751)에 덕수 스님에 의해 시작되어 상량문이 쓰여진 1754년에 마무리하였다. 이때의 불사내용은 영조27년(1751)에 동서 양쪽에 금고각을 세우고 이듬해 기와를 바꾸었으며, 보길도에서 목재를 실어 왔고, 대흥사와 마을에서 공사를 도왔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듬해 대웅전과 나한전을 완공했다.
영조30년(1754)에 여고가 네번째 중창을 하였으며 당시 대웅전 대들보에서 묵서명이 나왔는데 그 기록에 의하면 나한전(응진당)은 1761년 3월 26일에 대웅전은 같은 해 4월 11일에 각각 상양된 것으로 나타나있다. 이로 보아 대웅전과 응진당은 18세기에 건립된 전각임을 알 수 있다.
한편 18세기에는 고승 연담유일 스님이 이곳에 머무르며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스님은 이곳 절이 바닷가에 위치하는 지역적 특성에 따라 물에 빠진 사람들의 영혼을 구제하기 위한 수륙제를 지내기도 했다. 그래서 연담 스님의 문집인 '임하록'을 절에서 정조23년(1799)에 펴냈으며, 입적 후 부도가 세워지는 등 스님괴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19세기 후반인 철종9년(1858)에는 영허의현스님이 만일회를 개설하였으며, 이때의 만일회는 아미타신앙의 법회였다고 하며 이같은 내용은 초의선사가 지은 '미황사만일회기'를 통해 알 수 있다.
현재 경내에는 보물 제947호 대웅전, 보물 제1183호 응진당, 그리고 명부전, 요사채 등이 남아 있으나 옛날에는 통교사를 비롯하여 도솔암, 문수암, 보현암, 남암 등 12암자를 비롯하여 전각이 20여동이 있었던 대 사찰이었다.
미황사에는 현재 미황사와 관련된 28기의 고승들의 부도, 6기의 탑비가 경내에 있어 조선후기에 활발한 전법도장이었으며 사격이나 사게가 매우 융성하였음을 보여준다. 미황사는 이러한 융성을 거듭하다 이 고장 북평면 출신 주지인 혼허가 절의 중창을 위해 모금차 군고단을 이끌고 완도 청산도로 가다 배가 조난 당하여 젊은 승려들이 몰살당한 후 군고단 준비에 진 빚 땨문에 쇠퇴하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청산도 사람들은 미황사 스님들이 빠져 죽은 그 바다에서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는 날이면 궁고 치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미황사 스님들의 12채 군고(진법군고)는 송지면 산정리 마을 사람들에 의해 전승되어 오고있어, 진법군고의 깃발에는 바다거북 등에 올라탄 삿갓 쓴 스님이 그려져 있다.
▲ 미황사 본전 앞 마당으로 들어가는 문인 자하루와 경내 마당 좌측에 있는 범종각
【 창건설화 】
자연석 기단위에 세워 특이한 형태를 띄고 있는 '미황사 사적비'에는 창건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신라 경덕왕8년(749)에 홀연히 한 석선이 달마산 아래 사자포구(송지면 갈두리 땅끝)에 와 닿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 배 안에서는 하늘의 음악과 범패소리가 들려나와 한 어부가 이를 살피려하자 이때마다 번번히 배가 멀어져 갔다.
마침 이곳 달마산에서 수도를 하던 의조화상이 이를 듣고 장운, 장선 두 사미와 더불어 촌주 우감, 향도 일백인과 함께 가서 목욕재계하고 정성껏 기도를 올렸다. 그러자 석선이 해안에 닿았는데 그곳에는 주조한 금인이 노를 잡고 서 있었다.
배안에는 금자 화엄경 80묶음, 법화경 7묶음, 비로자나, 문수보혈 40성중, 6나한, 탱화 등이 있고, 금환과 흑선이 각 한개씩 있었다. 향도들이 경을 싣고 해안에 내려놓아 봉안할 장소를 의논할 때 흑석이 저절로 벌어지며 검은 소 한마리가 나타나더니 문득 커졌다.
이날 밤 의조화상이 꿈을 꾸었는데 금인이 말하기를 "나는 본래 우전국(인도) 왕으로 여러 나라를 편력하면서 경상 모실 곳을 구하였는데 산 정상을 바라보니 일만불이 나타나므로 여기에 온 것이다. 마땅히 경을 싣고 소가 누워 일어나지 않는 곳에 경을 봉안하여라" 하고 일렀다.
이에 의조화상이 소에 경을 싣고 가는데 소가 가다 지쳐 처음에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 산골짜기에 이르러 다시 눕더니 미(美)하고 크게 울며 죽어 버렸다.
소가 처음 누웠던 곳에 사찰을 창건한 것이 통교사요, 마지막으로 누워 죽은 골짜기에 사찰을 지어 성경과 신상을 봉안하고 미황사라 했다. 이 때 미(美)는 소의 아름다운 울음소리를 취하고, 황(黃)은 금인의 황홀한 색을 취해 미황이라 했다고 한다.
이러한 창건설화는 보편적인 불교의 북방 전래설과는 달리 바다를 통한 해로유입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 미황사 경내의 전각과 풍경들 】
♧ 대웅전(大雄殿)
*보물 제947호(1988년 4월 1일 지정)
*소재지: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서정리 1
▲ 달마사의 괘불과 대웅보전의 처마
달마산을 배경으로 한 대웅전은 단청이 거의 벗겨져 있어 화려함 대신에 자연에 가까운 단아한 느낌이 훨씬 더 절을 고풍스럽게 한다.
석가모니 불상을 모시고 있는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단층 팔작지붕이다. 기단은 막돌허튼층 쌓기를 하고 이 위에 연화문 초석을 놓았으며 기둥은 가운데가 볼록한 배흘림 기둥이다. 무거운 지붕을 받쳐주는 배흘림 기둥은 전형적인 조선초기의 건축양식으로 팔작지붕과 아름다운 대칭을 이루고 있다.
주춧돌은 앞면에 4개와 옆면에 2개를 특이하게 연꽃무늬에 물고기, 문어, 자라, 게 따위를 양각한 돌을 사용하였으며 나머지는 자연석을 사용하였는데 이러한 조각된 동물문형은 토속적인 민간신앙이 불교와 만나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고, 바다와 관련된 조각들이 해양문화의 영향을 짐작케 한다. 이러한 문양은 이곳의 부도에도 나타나 미황사의 독특한 사찰양식을 알 수 있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천장 속을 가리고 있는 형식인데 가운데에 불교어인 '범(梵)'을 선명하게 새겨 놓았다.
미황사 뒷산에는 '토말(土末)'이라고 쓰여진 비석이 있는데 우리나라 육지 끝을 표시한 것이다.
통일신라 경덕왕8년(749)에 처음 지었다고 하며 임진왜란으로 모두 불에 타 버려, 조선 선조31년(1598)에 다시 지었고, 영조30년(1754)에 수리하였다고 한다.
♧ 응진당(應眞堂)
*보물 제1183호(1993년 11월 19일 지정)
*소재지: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서정리 1
▲ 응진당의 현판과 법당내 16나한상
통일신라 경덕왕8년(749)에 처음 지었다고 하며 임진왜란으로 모두 불에 타 버려, 지금 남아 있는 응진당은 영조27년(1751)에 지은 것이다.
응진은 부처의 또 다른 이름이며, 아라한, 나한은 수행을 거쳐 깨달은 성자를 말한다. 미황사 응진당은 안쪽은 나한전이라고도 하는데 보통 16나한이나 오백나한을 모신다. 응진당 안쪽 벽면에 그림으로 16나한을 모시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기둥 윗부분에는 장식이 조각되어 있는 등 조선 후기의 양식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 기타 부속 전각 및 전경
▲ 만하당 ▲ 세검정과 부속 건물들
▲ 명부전 ▲삼성각
▲ 염화실 ▲ 향적당
▲ 대흥사 입구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기다리며...
▲ 두륜산 케이블카승강장에서...
♧ ♧ 두륜산 대흥사(頭輪山 大興寺)
【 두륜산 도립공원 】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산8-1에 위치한 산으로 해남의 영봉이며 여덟개의 높고 낮은 연봉으로 이루어진 규모있는 산이다. 북서쪽으로 경사가 완만하고 빼어난 경관을 이루며 산행코스가 험하지 않아 2~3시간 정도면 가련봉(700m) 정상에 오를 수 있다.
8개의 암봉이 이룬 연꽃형 산세를 이루며, 가련봉을 비롯하여 두륜봉(630m), 고계봉(638m), 노승봉(능허대 685m), 도솔봉(672m), 혈망봉(379m), 향로봉(469m), 연화봉(613m)의 봉우리로 능선을 이루고 있다. 이 여덟 봉우리는 둥근 원형으로 마치 거인이 남해를 향해 오른손을 모아 든 듯한 형상이다. 오른손을 가지런히 펴고 엄지를 집게 손가락에 붙인 다음 손가락 끝을 당겨 오목하게 물을 받을 듯 만들면 영락없는 두륜산의 지세가 되며 그 주능선의 선은 남한지도와 흡사하다.
두륜산은 대둔산이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산이라는 뜻의 '듬'에 크다는 뜻의 관형어 '한'이 붙어 한듬→대듬→대둔으로 변한 것으로 풀이된다. 때문에 과거 대둔사는 한듬절로 불리기도 했다.
대둔사지에 의하면, 두륜산은 중국 곤륜산의 '륜'과 백두산의 '두'자를 따서 륜두산으로 불리다가 나중에 두륜산으로 변했다고 한다.
두륜산행은 여러 고승 대덕의 발자취를 뒤따라 적당히 땀을 흘리며 산봉을 오르면 되는 산행이라기보다 유유자적한 소요에 가까운 행위가 된다. 사계절 언제 찾아도 좋은 산으로 이른 봄에는 동백, 여름에는 울창한 수림과 맑은 계류가, 가을에는 찬란한 단풍이 길손을 맞아준다. 특히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왕벚나무가 유명하고, 정상에 서면 남해의 조망이 뛰어나고 우리나라 최남단 토말로 이어지는 땅끝지맥 산줄기가 아련하다.
▲ 영회 '서편제'와 KBS 1'1박2일' 촬영장소였던 대흥사 입구의 '유선관'에서
【 대흥사 창건과 역사 】
대흥사는 전남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799번지에 위치한 유서깊은 천년고찰로 신라 진흥왕5년(544)에 아도화상이 창건한 것으로 보고 있다.
대흥사의 역사를 기록한 책인 '죽미기', '만일암고기', '북암기' 등을 종합하여 수룡이성, 초의의순이 편집하고 기어자홍, 호의시오가 교정하여 순조23년(1823)에 간행된 '대둔사지'가 있는데 이러한 옛 자료들을 토대로 창건과 관련된 기록들을 살펴보면 '만일암고기'에는 백제 구이신왕7년(426)에 신라의 정관존자가 만일암을 창건하고 그후 백제 무령왕8년(508)에 이름이 전하지 않은 선행비구가 중건했다는 기록이 나오고, '고기'에는 통일신라시대인 헌강왕1년(875)에 도선국사가 중국 당나라에서 귀국한 후 500개의 사찰을 짓는게 좋겠다고 하여 지은 절 가운데 하나가 대흥사라고 말하기도 한다.
문화재자료 제78호로 지정되어 있는 대흥사는 13대종사와 13대강사를 배출한 우리나라 31본산의 하나로 조선 후기 불교 문화권의 산실이었으며, 지금은 대한불교 조계종 제22교구본사로 해남, 목포, 영암, 무안, 신안, 진도, 완도 등 8개 시군의 말사를 관장하고 있다.
사찰 경내에는 대웅보전, 침계루, 명부전, 백설당, 대향각, 천불전, 용화당, 봉향각, 동국선원, 표충사, 강례재, 서산대사유물관, 대광명전 보련각, 일로향실, 청신암, 진불암, 일지암, 만일암, 북미륵암 등이 있다.
▲ 대흥사 일주문과 해탈문
신라말 창건이후 고려시대에 어떠한 변천을 해왔는지는 잘 알 수 없고, 조선시대 전기까지도 사찰에 관한 기록을 찾아 볼 수 없는 점으로 보아 당시에는 그다지 번성하지 않은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대흥사가 역사상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조선 후기에 와서로 서산대사의 유품을 이곳 대흥사에 봉안하게 되고 서산대사를 기리는 표충사를 세우면서 절은 크게 번창하게 되었다. 대흥사는 넓은 산간분지에 크게 네 영역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일원, 중앙에 넓게 자리한 천불전 일원, 서산대사의 사당과 유물관이 있는 표충사 일원, 그리고 중심사역 뒷편에 있는 대광명전 일원이다. 이중 표충사와 대광명전 일원은 대흥사와 관련이 있는 스님들에 의해 후대에 조성되어 별원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으로 보아 대흥사의 옛 모습은 침계루앞 계곡을 중심으로 남원과 북원 일대로 나누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절이 처음에 어느 곳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지금과 같은 모습은 조선시대에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측하며, '대둔사지'에서는 '죽미기'에 대흥사가 해탈문을 지나는 시냇물을 중심으로 남원과 북원으로 나뉘어 있었다고 인용하고 있어 초창기의 가람 모습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서편제'의 촬영지로 잘 알려진 유선관을 지나 속세와 사찰의 경계라고 하는 피안교를 건너면 본격적인 절의 경내에 진입하게 된다.
울창한 숲 사이로 마음을 가다듬고 걷다보면 일주문을 바로 앞에 두고 한쌍의 장승이 서 있는데 천하대장군과 금귀장군으로 보통 절을 수호하는 수호신으로 사찰 앞에 서있는 장승이다. 일주문을 지나면 50여기의 부도와 14기의 탑비가 모셔져 있는 부도전이 나온다. 운학교를 건너 약간 오르면 해탈문이 나오는데, 해탈문에는 사천왕상이 없다.
일설에 의하면 대흥사에 사천왕상이 없는 이유는 북으로는 영암 월출산, 남으로는 송지 달마산, 동으로는 장흥 천관산, 서로는 화산 선은산이 대흥사를 감싸고 있기 때문에 풍수적으로 완벽한 형국을 취하고 있어 사천왕상이 세워져 있지 않다고 한다.
【 대흥사 경내의 전각과 풍경들 】
▲ 심진교를 건너 대웅보전 앞으로 가기 위해 통과하는 침계루
♧ 대웅보전(大雄寶殿)
대흥사의 중심 건물로 시냇물을 사이에 두고 놓여 있는 심진교를 건너 침계루를 지나면 나타난다.
이 건물은 조선 현종8년(1667) 심수대사가 중건하였다고 하나 그후에도 중수가 있었던 듯하다. 전면에 장대석으로 높이 쌓은 단위에 기단을 마련하고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을 지었는데, 귀기둥을 제외하고 전면 기둥 상부에는 용두를 새기고 쇠서에도 연꽃을 새겨 조선 후기적 특징을 보여준다.
건물 전면에는 각 칸마다 빗살무늬의 이분합문을 달았으며, 가운데 현판은 조선 후기의 명필인 원교 이광사(1705~1777) 선생의 글씨이다. 건물 안에는 목조 석가삼존불과 16나한이 봉안되어 있고, 삼존불 뒤에는 영산, 약사, 미타의 후불탱화가 그려져 있다.
((대웅보전의 현판에 얽힌 일화))
추사 김정희가 헌종6년(1840) 제주도로 귀양을 가는 길에 이곳 대흥사에 기거하고 있는 초의선사를 만나기 위해 대흥사에 들렀다가 이광사가 써준 대웅전 현판을 보고 조선의 필체를 망가뜨리는 글씨라며 직접 자신이 대웅보전의 현판을 써주고 갔다.
그후 유배지에서 깨우침을 얻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대흥사에 들렀다. 그리고 이광사의 현판 글씨가 아직도 보관되어 있는 것을 알고 자신의 아집을 사과드리고 다시 내다 걸게 하였다. 그리고 대신 대웅전 완편 백설당에 '무량수각'의 현판을 써주었다고 한다.
당시 대흥사에는 추사와 절친하였던 초의선사가 기거하고 있어 추사 김정희와 교류가 이어지며 이웃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던 다산 정약용과도 교류 관계가 이어져 대흥사를 중심으로 한 이들 석학들의 차와 학문, 시, 서화 등 예술의 교류는 한때 새로운 문화의 꽃을 피우게 한다.
▲ 삼층석탑 앞에서 바라본 응진전과 대웅보전
♧ 천불전(千佛殿)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8호
천불전이란 과거에도 천년, 미래에도 천년이 있다는 것으로 어느 때나 무한한 부처님이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세워진 건물이다. 즉 어느 때 어느 곳에서 누구나 다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대승불교의 근본사상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 천불전이다.
대흥사 대웅보전을 나오면 맨 먼저 마주치는 것이 천불전이다.
한마리의 용이 천장에서 날아가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는 가허루를 들어서면 옥으로 만든 천개의 불상이 있는 천불전이 나온다. 남원 중심곽의 가장 안정된 곳에 자리잡은 법당으로 대둔사지에는 이 건물이 순조11년(1811)에 소실된 뒤 2년 후에 완호스님에 의해 중건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완호는 초의대사의 전법스승으로서 천불전 중건에 주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높이 쌓인 돌담위에 자리하는데, 낮은 기단에 세워진 건물이다. 자연석을 주춧돌로 사용하였으며, 그 기초위에 기둥을 세워 비교적 견고하게 보인다.
건물 앞쪽 문에는 정교한 국화무늬, 연화무늬의 꽃살 분합문을 달았다. 건물 내부 중앙에 나무로 만든 본존불을 모셔 두었고, 주위에 옥석으로 조각한 천개의 작은 불상들이 배열된 것이 특징이다.
((천불전의 전설))
천불전에 봉안된 옥으로 만든 천불은 조성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 옥불은 처음 완호스님 등이 천불전을 짓고 경주에서 생산되는 옥석으로 열사람이 6년간에 걸쳐 조성했다 한다. 불상이 완성되자 옥불을 3척의 배에 싣고 경주에서 울산과 부산 앞바다를 거쳐 대흥사로 향하였다. 그러나 한 척의 배가 울산진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 결국 닿은 곳이 일본의 장기현이었다. 일본인들은 옥불을 보고 기쁜 마음에 서둘러 절을 짓고 봉안하려 했다.
그러나 일인들의 꿈에 이 불상들이 나타나 우리들은 지금 조선국 해남의 대흥사로 가는 중이니 이곳에 봉안하면 안된다고 말하였다. 일인들은 이 꿈을 꾸고 나서 옥불들을 거두어 배에 실어 해남 대흥사로 보냈으며 일본을 거쳐 온 불상들은 불상을 분칠할 때 밑바닥에 '日'자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 천불전 우측에 자리하고 있는 수행도량
▲ 명부전과 범종각
♧ 응진전앞 삼층석탑
*보물 제320호
▲ 응진전과 삼신각 ▲ 삼층석탑
탑이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것으로 불교의 상징적인 신앙대상이다.
이 석탑은 높이 4.3m로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형태를 따라 만들어졌다. 이 탑은 대흥사(대둔사)내에 있는 응진전에서 조금 비켜진 곳에 자리 한다. 탑의 형식은 부분적으로 간략하게 처리되었으나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구조를 잘 나타내고 있으며 돌을 짜 맞추는 방법에 있어서 매우 단정하고 온아하며 세밀함을 보여준다.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신리의 일반적인 석탑으로 아래, 위층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다.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도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처마가 두껍고 윗면은 경쾌하게 곡선을 그리고 있으며, 밑면에는 4단의 받침을 두었다.
정상에는 머리장식으로 몸돌로 보일만큼 큰 노반(머리장식받침) 위에 복발(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 양화(솟은 연꽃모양의 장식), 보륜(바퀴모양의 장식) 등이 올려져 있다.
탑신은 1층 몸돌에 비해 2층 이상의 몸돌 높이가 크게 줄었으나, 넓이는 거의 줄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의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기단의 가운데 기둥수가 하나로 줄어들고.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가 4단인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에 세워진 작품으로 추측된다.
두륜산(대둔산) 정상부근에 세워진 대흥사북미륵암삼층석탑(보물 제301호)과 함께 통일신라의 석탑양식이 서남단 지방에까지 전파되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1967년 1월 탑을 해체, 보수하는 과정에서 기단부분에서 높이 120cm의 동으로 만든 여래좌상 1구가 발견되었다.
대흥사의 유물 중 가장 앞선 시기의 유물로 전하는 말에 의하면 신라 자장율사가 가져온 석가여래의 사리를 봉안한 사리탑이다.
♧ 대흥사 부도전
부도는 큰 스님의 사리나 유골을 모신 탑이며 그 분들의 행적을 살필 수 있어 당시의 사회상이나 역사적 사실까지도 알아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보통 사람들은 한문에 밝지 않아 알아보기 힘들고 재미없어 지나치거나 겉 모습만 흝어보기 십상이다.
대흥사 부도전에는 호국의병대사인 서산대사를 비롯하여 그의 문도들 중 초의, 호암, 상원 등 13분의 대종사와 만화, 원호, 연예, 광열 등 13분의 대강사를 위시하여 그 외 고승들의 사리가 안치되어 있다.
대흥사 일주문을 막 지나면 오른편에 부도 54기와 탑비 27기가 자리 잡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조선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17세기 말에서 19세기 사이에 제작된 것이다. 대흥사 부도전에 많은 부도가 자리잡은 것은 그 만큼 고승들이 많이 배출되었으며 조선시대 후기 고승들을 승상하는 세력과 절 분위기가 일치한 때문이다.
40여년전 영국 왕실 고고학회 회원 120여명이 찾아와 역사적 가치와 예술성에 탐복했을 정도의 뛰어남을 자랑하지만 부도와 탑비의 연대별 배치나 성격별 분류가 안돼 아쉽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곳의 탑비들은 대부분 부도의 주인공에 해당되며, 그 외에 이곳에 시주했거나 다산 정약용 등 도움을 준 사람들의 비가 주를 이룬 곳이다.
이곳 탑비 중에서 대흥사 창건 연유와 내력을 소상하게 기록한 대흥사 사적비가 자리하고 있는데 조각의 정교함과 크기로 이름 나 있다.
♧ 서산대사 부도
*보물 제1347호
총고 260cm로 화강석으로 만들어졌는데 서산대사 비보다 앞서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서산대사가 입적한 후인 1631년에 세워진 이 부도는 청허당 서산대사비의 뒷편에서 약 5m 떨어져 있는데 팔각당식 부도의 계통을 이은 제미있는 작품이다.
탑에는 '청허당'이라는 당호가 뚜렷이 남아있어 이 부도의 주인공이 서산대사임을 확실히 밝혀주고 있다.
상륜부 받침에는 용의 머리를 새기었고 옥개석 팔각의 귀꽃 위치에는 용 여섯마리, 쥐 한마리를 부각하였다. 그리고 지반위의 하대석 받침은 가늘고 긴 안상과 복연의 연화를 새기고 있다. 전반적으로 이 조각수법은 장흥보림사의 서부도(보물 제156호/고려시대)와 같은 계통의 작품이다. 이 부도는 표현양식이 매우 사실적이며, 조각기법이 이곳 부도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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