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화나들길 제15코스(고려궁성곽길) ▶
옛 고려의 성곽! 강화산성을 따라서...
▲ 국화리저수지
【 걷기일자 】 2013년 1월 6일(일)
【 걷기코스 】강화산성 남문→선화골약수터→강화산성 성곽→청하동약수터→치성터→강화산성 암문→국화리공동묘지 갈림길↔강화산성 남장대→국화리공동묘지→국화리저수지-(저수지둑방길)→강화석수문→연무당터→강화산성 서문→강화정수장 입구→은수물갈림길/강화여고숲길→강화산성 북문→북장대터→강화나들길 제1코스 갈림길→북산→강화산성 동문→성공회강화성당→영흥궁
【 코스거리 】 약 11.00km
▷ 강화나들길 제15코스 '고려궁성곽길' 각 구간별 거리(강화나들길 리플렛) :
남문-(2.7km)→강화산성남장대-(2.4km)→국화리저수지-(3.4km)→북문-(2,5km)→동문
【 소요시간 】 총 5시간 11분 소요(휴식, 문화재 탐방 및 중식 : 1시간 44분 포함)/실제 걷기 시간 : 3시간 27분 소요
【 날 씨 】 흐 림
【 교 통 편 】 대중교통 이용
【 코스탐방 】
현재 강화도 내에 조성된 강화나들길 코스는 총 15개이며, 그 마지막 코스가 오늘 탐방한 제15코스 '고려궁 성곽길'로 고교 동창 25명과 함께 2013년 신년산행으로 실시를 하였다.
이 코스는 일부 구간이 기존의 강화나들길 코스와 중첩이 되는데, 2010년 3월28일 탐방한 제1코스 '심도역사문화의 길'에서 은수물갈림길(강화여고숲길)~강화산성 북장대 구간 및 성공회강화성당과 용흥궁 탐방, 2010년 7월10일 탐방한 제5코스 '고비고개길'에서 국화리저수지~서문 구간, 2012년 10월14일 탐방한 제14코스 '강화도령 첫사랑길'의 청하동약수터~남장대 구간 및 성공회강화성당 및 용흥궁 탐방 등이다.
그리고 강화산성 전체는 2010년 6월22일 실시한 '강화산성 성곽돌기'에서 남문을 출발하여 성곽을 따라 시계 방향(남문-서문-북문-동문-남문)으로 전체를 탐방한 적이 있어 오늘 코스의 대부분은 1~2차례 이미 탐방한 코스이다.
오늘 강화나들길 제15코스를 탐방하게 되어 총 15개의 코스 중 교통(배편)의 어려움으로 탐방을 실시하지 못한 제12코스 '주문도길'과 제13코스 '볼음도길'만 남게 되었다.
▲ 남문 밖에 설치된 강화나들길 제15코스 안내도
【 강화산성(江華山城)의 역사 】
*사적 제132호(1964년 6월 10일 지정)
*면적:784.170㎡
몽고의 침입으로 백성과 국토가 수난을 당하자 , 당시 실권자였던 최우가 1232년 강화도로 천도를 하고 고종28년(1234) 1월부터 왕궁과 내성, 관아시설의 공사를 본격적으로 실시를 하였다. 내성, 중성, 외성의 3중으로 구성된 구조였으며, 당시의 내성은 토석혼축 방식으로 규모있게 궁궐의 내성으로 쌓았는데 길이 약 1,200m로 지금의 강화성이다.
그리고 중성은 내성을 방어하기 위하여 고종37년(1250)에 축조되었으며, 둘레가 약 7km에 달하는 토성이었다. 또한 중성을 둘러싸는 외성은 1233년부터 강화 동쪽 해안을 따라 축조하기 시작하여 1235년에 전국 주, 현에서 일품군을 징발하여 대대적인 공사를 벌여 37.070척에 달하는 성이 1237년에 일차 완성되었다.
고려시대의 강화 내성에는 고려 궁궐과 관청이 들어서 있었는데, 그 규모나 배치를 모두 송도(개성)의 것을 옮겨놓은 듯이 비슷하게 하여 왕족과 귀족들은 송도에서와 마찬가지로 화려한 생활을 영위하였다. 궁궐의 정문은 정남향의 승평문 이었으며, 중성에는 모두 8개의 성문이 있었는데, 송도의 것을 그대로 본떠 동에 선인문, 서남에 광적문, 서북에 선의문, 동북에 창의문이 있었다.
그러나 고려와 몽고의 강화가 성립되어가던 고종46년(1259) 몽고의 요구로 내성이 헐리게 되었고, 외성도 허물었다. 그리고 송도로 완잔히 환도하는 고려 원종11년(1270)에는 궁궐도 헐리어 현재는 궁궐터마저 불완전하게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전기에 강화성을 축소하여 다시 축조하였고, 인조5년(1627)에 정묘호란이 있자 인조가 잠시 피난했으며, 인조14년(1636) 병자호란 때는 봉림대군을 비롯한 빈궁과 신하들이 피난했으나 강화성이 함락되면서 청군에 포로가 되었다.
이렇게 외침이 잦자 수차에 걸쳐 강화성을 개축하여 화강암의 석성으로 바꾸고 여장도 설치했다. 이렇게 하여 강화성은 4개의 성문과 4개의 암문, 남,북,서쪽의 장대와 2개의 수문 등의 시설을 갖추었다.
현재 북악과 남산을 연결하는 지역에 남아 있는 성벽의 일부와 성문은 거의가 조선시대에 축조되어 1970년대에 보수한 것이다.
동문은 망한루인데 없어진 것을 복원하였고, 첨화루인 서문은 숙종37년(1711)에 건립되어 그동안 퇴락되었다가 1977년에 개축되었다. 안파루인 남문은 1711년 건립되었으나 1955년 홍수로 무너진 것을 1975년에 복원한 것이다.
북문은 1783년에 건립하여 진송루라 했으나 무너져 없어진 것을 1977년에 복원했다.
조선시대에는 성내에 많은 관아가 들어서 있었으나 고종3년(1866) 당시 많은 건물이 소실되어 현재는 고려 궁터에 동헌과 이방청 등이 복원되어 있을 뿐이다. 성곽은 성의 동쪽 부분은 없어졌으나, 남쪽과 북쪽 산자락의 성곽은 보수되어 잘 보존된 상태이다.
조선 후기 병인양요, 신미양요와 일본의 침략에 의한 강화조약을 체결한 수많은 외세침략의 역사적인 현장으로 서문 근방에 일본의 강압에 의해 강화도조약이 조인되었던 연무당터가 있다.
▲ 강화나들길 제15코스의 출발지인 강화산성 남문
10:15~10:25=>강화산성 남문
강화나들길 제15코스의 출발지이다.
남문 밖 고려궁성곽길 안내도와 강화나들길 이정표(←부조고개입구 500m)가 있는 곳이 강화나들길 제15코스의 출발점이다. 남문을 배경으로 단체 기념촬영을 마치고 '부조고개길' 마을길을 따라 가며 오늘의 탐방이 시작되었다.
오늘 진행하게 되는 제15코스에는 다른 나들길 코스에서 대하지 못하였던 이정표가 길목마다 설치되어 있어 위치를 확인하면서 편하게 진행을 할 수가 있어 길 찾기에는 별 어려움이 없을 것 같다.
▲ 선화골약수터 갈림길(사진 左)과 입구의 이정표(사진 右)
마을길을 따라 약 500m를 진행하여 '상록이발관'을 지나자마자 이정표(↓강화산성 남문 500m/→선화골약수터 300m)가 설치된 ├자 갈림길(10:29)을 대하게 되고, 이곳에서 우측으로 방향을 틀어 시멘트 포장길(부조고개길46번길)을 따르면 마을 끝 시멘트 계단길을 만나고, 이를 오르면 넓은 임도를 따라 선화골약수터로 완만하게 오르게 된다.
▲ 선화골약수터(사진 左)와 입구의 이정표(사진 右)
10:35=>선화골약수터
이정표(↑남산등산로 100m/↓남문 800m)가 설치된 약수터 좌측으로 잠시 오르면 우측 남문에서 올라오는 강화산성 성곽을 만나게 된다.
▲ 선화골약수터에서 청하동약수터로 향하며 넘게되는 강화산성 성벽(사진 上)
강화산성 성곽위의 이정표(사진 下)
10:40~10:42=>강화산성 성곽
이정표(↑청하동약수터 600m/→선화골약수터 340m)가 설치된 허물어진 성벽을 넘어, 산허리를 따라 이어지는 편안한 숲길을 10여분 진행하여 청화동약수터에 도착을 한다.
▲ 성벽을 넘어 청하동약수터가는 편안한 나들길
▲ 청하동약수터
10:52~11:07=>청하동약수터
약수터 입구의 이정표(↑소나무숲길 300m/↓선화골약수터 940m)를 지나면 넓은 베드민터장과 정자 쉼터가 있다.
▲ 청하동약수터의 이정표와 정자쉼터
정자 쉼터 좌측에는 제14코스 '강화도령 첫사랑길' 안내도가 있는데, 이곳부터 남장대를 거쳐 국화리공동묘지 갈림길인 능선갈림길까지 제15코스는 제14코스와 동일하게 진행을 하게 되는데 그 거리는 약 1.1km 정도가 된다.
▲ 청하동약수터와 강화산성 암문 사이의 제단
강화나들길 안내도와 정자 쉼터 사이의 계단길을 따라 100여m를 오르면 ┤자 갈림길. 좌측 길로 돌아 오르면 돌 축대를 쌓아 만든 제단이 있는 공터(11:11)를 지나 강화산성 암문 앞에 이르게 된다.
▲ 강화산성 암문(사진 上)
암문 앞의 이정표(사진 下)
11:13=>암문
이정표(↑남장대 700m/↓청하동약수터 200m)가 설치된 암문을 통과하고 성밖으로 나가 소나무 숲길을 지나면 국화리공동묘지 갈림길인 ┬자 능선갈림길(11:19)이다.
▲ ┬자 능선갈림길인 국화리공동묘지 갈림길(사진 上)
국화리공동묘지 갈림길의 이정표(사진 下)
이정표(←남장대 200m/↓청하동약수터 500m/→국화리공동묘지 250m)가 설치된 갈림길로 제14코스 '강화도령 첫사랑길'과 제15코스 '고려궁성곽길' 모두 좌측의 능선을 따라 남장대까지 갔다가 이곳으로 되돌아 내려와 우측의 능선을 따라 국화리공동묘지 방향으로 향하게 된다.
▲ 남산 정상의 성밖 전경
좌측으로 능선길을 따라 완만하게 오르면 우측으로 오늘은 안개가 짙게 깔려 제대로 시야가 확보되지 않아 주변의 풍경이 제대로 조망이 되지 않지만 맑은 날엔 강화대교와 문수산, 그리고 강화해협(염하강) 일대가 시원하게 조망이 되는 바위전망대를 지나 남산 정상일대의 강화산성 성곽에 이르게 되고, 성벽을 넘어가는 나무데크를 따라 성 안으로 들어가면 최근에 복원된 남장대가 자리를 하고 있다.
▲ 남장대
11:25~12:17=>남장대/남산
정상에 서면 좌측으로는 서문으로 이어지는 성곽과 그 뒷편으로는 군부대 통신탑이 정상에 자리한 고려산, 그리고 산 아래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국화리저수지가 자리를 하고 있고, 정면으로는 오늘 가야할 강화나들길인 발 아래 펼쳐진 강화읍 시가지를 감싸고 자리한 강화산성이 지나는 북장대가 있었던 북산 산줄기가 안개 때문에 희미하게 조망이 된다.
▲ 남장대에서 바라본 고려산(사진 上)
남장대에서 바라본 북산과 강화시가지(사진 下)
또한 우측 산줄기를 따라 남문으로 이어지는 강화산성 성곽이 내려가고 있으며, 멀리 문수산과 강화대교, 강화해협 일대가 그림처럼 펼쳐져야 하는데 안개 때문에 전혀 조망이 되지 않는다.
남장대 1층 마루에 자리를 잡고 이르지만 점심식사를 하고 가기로 한다.
50분 넘게 점심식사와 휴식시간을 가지고 남장대를 배경으로 단체 기념사진 한 장을 남기도 강화산성을 다시 넘어 왔던 길을 되돌아 내려간다.
능선갈림길을 지나면 제14코스 '강화도령 첫사랑길'인 좌측 남산유스호스텔로 내려가는 ┤자 갈림길.
▲ 남장대에서 국화리공동묘지로 내려가는 능선길
▲ 남장대에서 국화리공동묘지로 내려가는 능선길의 제14코스 '강화도령 첫사랑길' ┤자 갈림길
이곳에서 제14코스와의 동행을 마무리하고 직진의 능선길을 잠시 따르면 능선상에 자리한 국화리공동묘지가 시작된다.
▲ 국화리공동묘지
12:25=>국화리공동묘지
능선에 조성된 공동묘지의 묘 사이를 빠져나가면 공동묘지가 끝날 즈음 이정표(↓남장대 500m/→국화저수지 1.3km)가 설치된 ├자 갈림길.
▲ 국화리공동묘지의 ├자 갈림길과 이정표(사진 上)
국화리공동묘지에서 국화저수지로 내려가는 길(사진 中)
국화저수지 직전의 시멘트 포장도로(사진 下)
우측으로 꺾어 완만하고 긴 내리막길을 따라 ┬자 시멘트 포장도로에 내려선다.
이정표(←국화저수지 500m/↓남장대 1.3km)가 설치된 포장도로에서 좌측으로 내려가면 이정표(↑서문 1.4km/↓남장대 1.8km)가 설치된 2차선 포장도로(12:45)를 건너 국화저수지에 이르게 된다.
2차선 포장도로 길 건너에는 '저수지휴게소' 버스정류장이 있다.
▲ 국화저수지
12:46=>국화저수지
강화나들길 제5코스 '고비고개길'(강화터미널~외포리선착장)과 만나는 국회저수지에서 우측의 저수지 갓길을 따르면 저수지 제방위에 이르게 된다.
▲ 국화저수지 둑방길과 수문이 있는 저수지 둑방길 끝
좌측으로 넓게 펼쳐진 얼음으로 덮혀 있는 저수지를 두고 둑방길을 따른다. 수문이 있는 저수지 끝에서 우측으로 꺾어 계단길을 내려가 다리를 건너면 ┬자 갈림길(12:55). 좌측은 저수지를 따라 도는 산책로가 이어진다.
우측으로 방향을 틀어 개천을 우측에 두고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서문으로 향한다.
▲ 포장도로변의 데크길 입구의 제15코스 이정표와 끝의 제15코스 이정표(사진 上)
포장대로변의 데크길(사진 下)
2차선 포장도로와 만나 길 건너 입구에 강화나들길 제5코스 이정표가 설치된 데크길을 따라 내려가면 좌측 길 건너에는 강화고등학교가 자리를 하고 있다. 데크길 끝에 이르면 제15코스 나들길 이정표(↓국화저수지 400m)가 보인다.
강화고등학교 정문 앞을 지나 약 250여m 정도를 내려가면 강화관광안내도와 화장실이 설치된 넓은 버스 차고지가 있고, 도로 삼거리 건너편으로는 강화산성 서문이 자리를 하고 있다.
우측 개천위로는 복원된 강화산성 성곽이 지나는데 개천에는 강화석수문이 설치되어 있다.
♧ 강화석수문(江華石水門)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0호
이 수문은 강화산성의 내성에 연결되어 강화읍을 통하여 흐르는 동락천을 가로지르는 수문으로서 조선 숙종37년(1711)에 축조되었다.
3개의 무지개 모양을 한 홍예문으로 재질은 화강암이며 길이가 18.2m, 높이 2.7m, 폭 2.4m이며, 홍예의 높이는 1.7m, 폭은 3m이다.
1910년 갑곶리 동락천 입구의 다리로 사용되었다가 1972년 하수문 자리로 옮겨졌던 것을 1992년 현 위치에 옮겨 복원하였다.
개천으로 내려가 돌다리를 건너 수문 밑을 통과하고 성안으로 들어 다시 돌다리를 건너 오르면 넓은 공터가 나타나는데 이곳이 일본의 강압에 의해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었던 연무당터이다.
▲ 연무당터와 표석
연무당터 앞을 지나는 4차선 포장도로를 건너면 서문이다.
▲ 강화산성 서문(사진 上)
서문 앞의 이정표(사진 下)
13:03~13:26=>강화산성 서문
강화나들길 이정표(↑서문교회 200m/↓국화저수지 700m)가 설치된 서문 밖에서 국화저수지부터 함께 하였던 강화나들길 제5코스와 작별을 하고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오르면 강화동산교회(서문교회) 앞을 지나 이정표(←정수장입구 300m/↓서문 200m)가 설치된 ┤자 고개삼거리이다.
▲ 서문교회가 자리한 ┤자 고개삼거리(사진 上)
강화정수장 철망펜스 옆길(사진 下)
좌측으로 방향을 꺾어 정면으로 보이는 정수장 철망펜스 담장을 향해 100여m를 오르고 난 후 펜스를 우측에 두고 좌측으로 돌아 내려가면 강화정수장 입구 도로에 내려서게 되고, 좌측으로 20여m를 내려가면 다시 성곽길이 시작되는 ┤자 삼거리이다.
▲ 강화정수장 입구 삼거리(사진 上)
강화정수장 입구 삼거리의 숲길 입구에 설치된 이정표(사진 下)
13:35~13:38=>정수장입구 삼거리
길 건너 성곽길이 시작되는 산길로 들어서면 입구에 강화나들길 이정표(↑강화여고숲길 400m/↓서문 500m)가 보이고, 성곽길을 완만하게 오르고 내려서면 강화나들길 제1코스 '심도역사문화의 길'(강화터미널~갑곶돈대)과 만나게 되는 강화여고숲길 입구인 은수물 갈림길에 이르게 된다.
▲ 성곽길(사진 上)
은수물갈림길과 이정표(사진 下)
13:45=>강화여고숲길/은수물갈림길
이정표(↑북문 1.05km/↓서문, 진고개/→은수물 0.3km)가 있는 이곳 갈림길에서 강화나들길 제15코스는 강화산성 북문과 북장대를 거쳐 북산 직전 ┤자 갈림길인 오읍약수터 갈림길까지 제1코스와 함께 하게 된다.
오르막길인 성곽길을 따라 50여m를 오르면 Y자 삼거리. 입구에는 나들길 이정표(↓서문 900m/→북문 900m)가 있다.
직진의 오르막을 이루는 성곽을 버리고 우측의 산 사면의 숲길을 따라 진행을 한다. 숲속의 간이 쉼터(13:50)를 지나 편안한 송림숲길을 따르면 강화산성 북문에 이르게 된다.
▲ 강화산성 북문(사진 上)
성밖에서 바라본 북문과 북문 옆 성곽길로 오르는 계단(사진 下)
13:55~14:14=>강화산성 북문
북문 옆 우측 계단으로 올라 성곽길을 따른다.
▲ 북장대터로 오르는 길에 뒤돌아본 북문 일대와 성곽길(사진 上)
북장대터로 오르는 길에 바라본 북장대터와 성곽(사진 下)
복원되지 않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성벽위를 따라 완만하게 오르면 넓은 공터에 이르게 되는데 우측 끝에 '북장대'란 한시 푯말이 있는 북장대터이다.
▲ 북장대터와 북장대터의 한시 푯말
14:20~14:25=>북장대터
좌측으로는 한강과 북녘땅이 조망이 되는데 오늘은 안개가 잔뜩 낀 흐린 날씨 탓에 제대로 조망이 되지 않는다.
▲ 북장대터에서 바라본 안개속에 숨어버린 북녘땅과 한강(사진 上)
북장대터에서 바라본 남장대가 있는 남산(사진 下)
그리고 우측으로는 강화 시가지와 강화산성 남장대가 자리한 남산이 조망이 되는데 이 방향 또한 뚜렷하지가 않아 아쉬움이 남는다.
▲ 북장대와 북산 중간의 좌측 제1코스의 오읍약수터가는 ┤자 갈림길(사진 上)
┤자 갈림길의 이정표(사진 中)
┤자 갈림길에서 바라본 북산과 북산으로 이어지는 성곽길(사진 下)
좌측 오읍약수터로 내려가는 길과 강화나들길 이정표(↑북장대 300m/↓북문 300m)가 있는 곳으로 강화나들길 제1코스 갈림길인 ┤자 갈림길(14:28)을 지나 강화산성의 최고봉인 북산 정상에 도착을 한다.
14:30=>북산
이곳에서 강화산성 성벽은 우측으로 꺾이어 돌아 서문으로 내려가게 된다.
▲ 북산에서 내려오는 성곽길
성곽길을 따라 내려가면 이정표(←동문/↑고려궁지/→강화산성)가 설치된 안부사거리(14:34).
▲ 사거리의 이정표(사진 上)
마을로 내려가는 길(사진 下)
이곳에서 직진 길을 따라 진행하여 고려궁지를 거쳐 성공회강화성당과 용흥궁이 있는 곳으로 내려간 다음, 동문으로 향하는 것이 제15코스의 원 코스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코스를 바꾸어 동문을 먼저 간 다음 성공회강화성당과 용흥궁 탐방을 마지막으로 하여 코스 탐방을 마치기로 한다.
▲ 산길이 끝나는 곳(사진 上)
산길이 끝나고 이어지는 마을길(사진 下)
사거리에서 좌측으로 방향을 바꾸어 내려가면 산길이 끝(14:39~14:49)나고, 마을길이 이어진다.
▲ 원불교 앞 보호수
수령 600년에 수고 19m, 나무둘레 7m의 느티나무 보호수(지정일:1982년10월15일)가 있는 원불교 앞 ┤자 갈림길(14:49)에 이르러 좌측의 '동문안길45번길'인 골목길로 들어 골목길을 빠져 나가면 강화산성 동문이 나타난다.
▲ 강화산성 동문
14:52=>강화산성 동문
동문에서 성골회강화성당과 용흥궁을 가기 위해 왔던 길로 되돌아 나가 원불교 앞에 이르러, 정면으로 보이는 성공회강화성당을 향해 마을길을 따라 가면 5분도 채 걸리지 않아 강화성당에 도착을 하게 된다.
성공회강화성당과 길 건너 아래 자리한 용흥궁을 둘러보고 오늘의 제15코스 탐방을 마무리(15:19)하고 첫 출발지였던 강화버스터미널로 향하며 오늘의 일정을 마감하였다.
♧ 성공회강화성당(聖公會江華聖堂)
*사적 제424호(2001년01월04일 지정)
*소재지: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길22(관청리)
1900년 11월 15일에 준공된 한국 최초의 성공회 성당으로 '성베드로와 바올로 성당'이라고도 하며,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소속 성당이다. 강화군 강화읍에 있기 때문에 강화성당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현존하는 한옥 교회 건물로서는 가장 오래 된 것이다.
고종33년(1896) 강화에서 처음으로 한국인이 세례를 받은 것을 계기로, 사찰 양식을 본 떠 찰스 종 코프(Bishop Charles John Corfe 한국명:고요한) 초대 주교가 건립한 한식 중층건물이다. 이 성당은 서양의 바실리카식 교회건축 공간구성을 따르고 있으며, 가구 구조는 한식 목구조와 기와지붕으로 되어 있는 점이 특징이다.
▲ 성공회 강화성당의 사제관(사진 上)과 외삼문(사진 下)
강화성당은 입구 계단, 외삼문과 내삼문, 성당 건물, 사제관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외삼문은 솟을대문에 팔작지붕으로, 현판에는 성공회강화성당이라는 한문이 쓰여져 있다. 동쪽에 초대 사제의 묘비가 서 있고, 내삼문은 평대문에 팔작지붕으로 서쪽 칸은 종각으로 쓰여 감사성찬례때 사용하는 종이 걸려 있다.
성당의 현판에는 '천주성전'이라는 글이 한문으로 써져있고 팔작지붕과 돌로 되어 있는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내외부는 서양식 장식이 거의없는 한옥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정면 4칸, 측면 10칸의 바실리카식 평면구성으로, 내부공간은 교회기능에 충실하도록 연출하였다. 초기 성공회 선교사들의 토착화 의지가 나타나 있는 성당건물이다.
한국인으로서 1915년 첫 성공회 사제가 된 김희준 신부를 배출하였으며, 당시 한글로 기록된 사제 서품장은 예배당 내에 보존되어 있다.
2009년에는 사회에 불만이 있는 30대 남성에 의해 방화가 시도 되었으나 감시원에 의해 발각되어서 화재를 면한 사건이 발생하였었다.
강화성당을 잠시 둘러보고 길 건너 아래에 있는 용흥궁에서 오늘의 나들길 탐방을 시작한다.
12:34=>용흥궁
조선 제25대 왕인 철종(1831~1863, 재위 1849~1863)이 왕위에 오르기 전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되었다가 강화로 옮겨져 살던 잠저로 왕위에 오르자 철종4년(1853)년 강화유수가 새로 지은 용흥궁은 강화나들길 제1코스 '심도역사문화길(강화터미널~갑곶돈대)'의 경유지이며, 제14코스 '강화도령 첫사랑길'의 출발지이기도 하다.
♧ 용흥궁(龍興宮)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0호(지정일:1995년03월01일)
*소재지: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441번지
조선 제25대 왕인 철종(재위:1849~1863)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전 집으로 철종이 왕위에 오르자 강화유수 정세기가 철종4년(1853) 건물을 새로 짓고 용흥궁이라 이름하였다.
▲ 용흥궁 내전
지금 남아있는 건물은 정면 8칸의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자붕에, 지붕을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에서만 있는 주심포 양식을 취한 외전(사랑채),
▲ 용흥궁 외전
정면 7칸의 맞배지붕인 내전(안채), 그리고 별전 등이 있다.
▲ 철종의 잠저였음을 기록한 용흥궁의 비각과 비석
그리고 철종이 살았던 옛 집임을 표시하는 비석과 비각이 있다.
용흥궁은 창덕궁의 연경당, 낙선재와 같이 살림집의 유형을 따라 지어진 소박하고 순수한 느낌을 준다.
영흥궁의 주인인 강화도령 '철종'의 드라마틱한 삶
♧ 철종(哲宗, 1831~1863, 재위:1849~1863)
조선 제25대 왕.
이름은 변, 초명은 원범, 자는 도승, 호는 대용재이다.
사도세자 후궁 소생 양재 임씨 소생으로 정조의 이복아우인 은언군 인의 손자로 전계대원군 광과 융성대부인 염씨 사이에서 삼현제의 막내로 1831년 경행방 사제에서 삼형제의 막내로 태어났다.
철종의 기구한 삶의 뿌리는 할아버지인 은언군 때부터 시작되는데, 은언군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참한 죽음으로 어머니인 숙빈 임씨와 함께 궁에서 쫓겨나 가난하게 살다가 간신히 군호를 받고 형편이 나아질 무렵 정조가 세손으로 책봉되자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세력들이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 지기들의 위치가 위험해질 것이라 염려되어 새 왕자를 추대하여는 음모를 꾸미게 되는데, 이 일이 발각되어 정조의 이복동생인 막내이들 은전군은 자결하고 은신군과 함께 제주도로 귀양을 가게 되며, 은신군은 제주도에서 병사하고 은언군은 강화도로 유배지를 옮긴다.
은언군 인은 아들을 셋 두었는데, 정조 즉위 일등공신 홍국영이 정조3년(1779) 은언군의 큰 아들 상계군 담을 자기 조카로 삼아 보위를 잇게 하려는 야심을 품다 제거되어 큰아들 상계군 담은 모반죄로 몰려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자살하는 등 위기를 맞았고, 다시 구선복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강화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
정조가 죽고 순조가 죽위하여 순조1년(1801) 천주교 박해사건인 신유대박해가 일어나자 부인 송씨와 큰며느리 신씨가 천주교 신자임이 밝혀져 두 여인과 철종의 할아바지인 은언군 인이 마침내 사사되게 된다. 이 때 은언군의 남은 유일한 아들이 철종의 아버지인 전계대원군 광이다.
얼마 후 유배에서 풀린 전계대원군 이광은 한양으로 이주하여 융성대부인 염씨와 결혼을 하여 세 아들을 두게 되는데, 헌종10년(1844) 민진용이 은언군의 아들(철종의 아버지)과 은언군의 손자 원경의 신임을 받고 있는 이원덕을 포섭하여 은언군의 손자이자 이광의 아들인 원경을 왕으로 추대하려 모의를 꾸미는 역모사건이 발각되어 관련자 모두가 능지처첨을 당하는 '민진용의 옥'이 일어난다. 이에 연루된 전계대원군 이광의 첫째아들 원경이 사사되고, 둘째아들 경응과 함께 교동으로 유배되었다가 곧 강화로 옮겨져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하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이 때 강화 처녀 봉이(양순이)라는 처녀와 연애를 하게 된다.
1848년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헌종의 6촌 이내에 드는 왕족이 없어, 헌종의 7촌 아저씨벌이 되는 영조의 유일한 혈손인 그는 순조비인 순원왕후의 명으로 궁에 들어가 덕완군에 봉해지고 왕위에 올랐다. 여기서 의문이 남는 것은 둘째아들 경응을 제치고 셋째인 원범이 왕위에 오르게 된 내력인데, 남아있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 알 수는 없지만 둘째 경응은 아마조 강화도에서 병사한 것으로 추측이 된다.
즉위후에는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했으며, 철종2년(1851) 감조순의 7촌 조카인 김문근의 딸을 왕비(철인왕후)로 맞아들인 뒤로는 국구가 된 김문근이 장악하여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계속되었다.
그런데 안동김씨 가문의 왕비가 불편해할 것을 알고 미리 철종의 연인이었던 강화 처녀 봉이(양순이)는 그들에 의해 비명 횡사를 하게 된다.
1852년부터 왕의 친정이 시작되되어 경험이 쌓이면서 1859년부터 관리들의 부정을 공격하는 등 비교적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했다. 1861년에는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훈련도감의 마보군과 별기군의 군사를 이용하여 궁궐의 숙위를 강화하려 했다. 그라나 세도정치의 폐단으로 봉건적인 통치기반이 무너지고 삼정(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이 더욱 심해져 백성들의 생활은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1862년 진주 당성지방을 시작으로 삼남지방 곳곳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나, 철종은 봉기발생지역의 수령과 관속을 처벌하여 흐트러진 봉건기강을 확립하는 한편, 농민의 요구조건을 일부 수렴함으로써 민심을 수습하려고 했다. 농민 봉기가 잠시 가라앉은 5월 이후에는 삼정이정청을 설립해 삼정의 개혁을 공포하고 재야 유생층과 관료들에게 개혁책을 모집했다. 이때 마련된 삼정의 정책은 주로 삼정운영의 개선에 초점을 두었으며, 법정 세액 이외의 각종 부가세를 일체 혁파하고 도결이나 방결을 폐지하고 환곡의 경우 토지세로 전환시키는 등 조세개혁의 원칙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후속조치가 취해지지 않는 가운데 지배층의 이해관계가 얽혀 삼정이정책은 시행되지 못했다.
당시 사회의 혼란을 종교적으로 구제하여는 동학이 창시되어 새로운 세력으로 확대되자 이를 탄압하고 교주 최제우를 '혹세무민'이라는 죄를 씌워 체포했다.
철종은 대왕대비의 선택에 의하여 불시에 왕위에 올랐으며, 대왕대비의 친정인 김조순 가문이 경쟁세력을 도태시키면서 전보다 강화된 독점권력을 누리는 시기에 재위하여 세도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치를 바로잡지 못했다.
자식들은 유난히 단명을 한다.
철인왕후 김씨와에 아들을 하나 두었으며, 드 외에 후궁과 궁인에게서 아들 넷을 얻었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모두 일찍 죽었다. 그의 유일한 혈육으로는 숙의 범씨에게서 난 영혜옹주가 한 명 있었을 뿐인데 그녀 또한 박영효와 혼인한 지 3개월 만에 죽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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