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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사람이 하나되는 철원(鐵原)의 겨울 제Ⅴ편 노동당사와 승일교

왕마구리 2013. 1. 22. 12:03

◀ 아름다운 한탄강이 감아도는 통일의 땅!!! 철원의 겨울을 찾아서...

【 철원군(鐵原郡) 소개 】

강원도 철원군은 총 면적이 898.4㎢이고, 둘레는 212km, 동서의 폭은 96.4km, 남북의 길이는 25.7km로 평강군 북방산을 수원으로 한 한탄강과 서면, 근남면으로부터 화강(남대천)이 갈말읍 북쪽에서 합류하여 깊은 계곡을 이룬 한탄강이 동송읍과 갈말읍의 경계를 따라 임진강에 합류하고 있다.

대체로 동북방은 1,000m 내외의 높은 산들이 연결되어 있으며, 중부와 서남방은 비교적 언덕과 평야를 이루어 대철원 곡창지대를 만들고 있다.

고구려시대에는 철원 또는 모을동비라 불리었고, 신라의 경덕왕 때 철성, 그 후 궁예가 901년 도읍을 풍천원(현 철원군 북면 흥원리)에 정하고 국호를 마진이라 하였으며, 911년 국호를 태봉이라 개칭하여 18년간 통치하였다.

919년 고려 태조 때 철원으로 개칭한 후 동주로 개명하였으며, 충성왕2년(1310) 다시 철원부가 되었다.

세종16년(1434) 경기도에서 강원도로 이관되었으며, 영조22년(1747) 춘천으로부터 전관도호부를 이설하여 3부 6현을 관할하였다. 고종32년(1895) 5월26일 춘천부 철원군이 되었다가, 1896년 강원도 철원군이 되었다.

1945년 8.15 해방과 동시에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분단되어 철원군 전역이 공산치하에 들어 갔다가 한국전쟁이후 국군의 북진에 따라 일부 지역이 수복되었으며, 1963년 1월1일부로 김화군 중 8개 읍면이 철원군에 편입되고, 신서면이 경기도 연천군에 편입되었다.

1980년 4개읍(철원, 김화, 갈말, 동송읍)과 7개면으로 확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철원군의 심벌마크(사진 左), 마스코트(사진 中), 그리고 캐릭터인 철루미(사진 右)

 

이번 철원군 탐방은 철원팔경(고석정, 삼부연폭포, 직탕폭포, 도피안사, 매월대폭포. 토교저수지, 순담계곡, 제2땅굴)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철원팔경의 인근에 자리한 노동당사, 승일교 등을 이동 중 추가로 탐방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철원팔경 중 제2땅굴은 7년 전 한 차례 방문을 한 적이 있었고, 제2땅굴과 월정리역은 민통선 이북의 군사지역이라 탐방을 위해서는 고석정국민관광지 매표소에서 별도의 절차를 거쳐야 하는 번거러움이 있어 이번 탐방에서는 제외를 하였다.

또한 세계적인 철새도래지인 토교저수지와 천통리 샘통 2곳의 탐방을 계획하였다가 토교저수지의 겨울철새인 독수리들만 탐조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샘통 철새도래지는 방문을 포기하였다.

이번 철원군 겨울탐방 내용은 총 5편으로 나누어 다음과 같이 소개를 하기로 한다.

 

- 자연과 사람이 하나되는 철원 Ⅰ편 : 빙벽을 이룬 철원의 겨울 폭포들 직탕폭포(直湯瀑布), 매월당폭포, 그리고 삼부연폭포

- 자연과 사람이 하나되는 철원 Ⅱ편 : 임꺽정의 활동무대였던 한탄강의 국민관광지 고석정(孤石亭)

- 자연과 사람이 하나되는 철원 Ⅲ편 : 한탄강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곡! 순담계곡

- 자연과 사람이 하나되는 철원 Ⅳ편 : 유일하게 국가지정문화재(국보 및 보물)를 보유한 철원의 사찰! 도피안사(到彼岸寺)

- 자연과 사람이 하나되는 철원 Ⅴ편 : 안보관광명소인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노동당사(勞動黨舍)와 승일교(承日橋)

 

【 일 정 표 】2013년 1월 14일(월)-15일(화) 1박2일

                     ◈ 첫째날(1/14) 오후 : 토교저수지-노동당사-도피안사-직탕폭포-고석정

                     ◈ 둘째날(1/15) : 매월당폭포-순담계곡-승일교-삼부연폭포

 

◀ 자연과 사람이 하나되는 철원의 겨울(Ⅴ편) : 노동당사(勞動黨舍)와 승일교(承日橋) 

안보관광의 명소인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 철원 노동당사(鐵原 勞動黨舍) 】 

*근대문화유선 등록문화재 제22호(2002년05월31일 지정)

*소재지: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관전리 3-2외

이 건물은 1945년08월15일 해방 후 북한이 공산독재정권 강화와 주민 통제를 목적으로 건립하고 한국전쟁까지 사용한 북한 노동당 철원군 당사로서 악명을 떨치던 곳이다.

북한은 이 건물을 지을 때 성금이라는 구실로 1개리 당 백미 200가마씩을 착취하였으며, 인력과 장비를 강제 동원하는 한편 특히 건물의 내부작업 때는 비밀유지를 위하여 공산당원이외는 동원하지 않았다 한다.

 

 

 

-대지면적 : 3,115㎡(942.29평)

-건평 : 386㎡(117평)/연면적 : 1,118㎡(339.4평)

-층수 : 3층/건물 높이 : 13.3m

 

 

 

                  ▲ 벽체만 남아있는 철원 노동당사의 2층과 3층

 

지상 3층 건축물. 조적식 기둥 및 벽체로 수직재를 이루고 있으며, 보 및 스라브는 철근 콘크리트 수평재로 수직재와 결구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천장은 목조 삼각형 지붕틀을 사용한 흔적이 있으며, 1층에 원기둥 2개를 세워 현관을 두었으며, 그 위에는 아치로 장식하여 정면성을 부각하고 있다.

건축 당시 이 건물 일대가 철원읍 시가지로서 한국전쟁 당시 여타 건물들이 모두 파괴, 인멸되었음에도 이 건물만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얼마나 견고하고 튼튼하게 지어졌는지 짐작이 간다.

 

                  ▲ 노동당사 1층의 복도

                  ▲ 노동당사 현관을 들어서면 나타나는 2층으로 오르는 계단

 

공산 치하 5년동안 북한은 이곳에서 철원, 김화, 평강, 포천 일대를 관장하면서 양민 수탈과 애국인사들의 체포, 구금, 고문, 학살 등의 소름끼치는 만행을 수없이 자행하였으며, 한 번 이곳에 끌려 들어가면 시체가 되거나 반 송장이 되어 나올만큼 무자비한 살육을 저지른 곳이기도 하다.

이 건물 뒤 반공호에서는 많은 인골과 함께 만행에 사용된 수 많은 실탄과 철사줄 등이 발견되었다.

 

노동당사 건물 앞 우측 주차장 끝 도로변에는 일제강점기 때 철원군에서 설치한 구철원군도로원표가 남아 있고, 건물 좌측으로는 일제강점기에 세워졌던 철원경찰서지가 남아 있다.

 

◈ 구철원군 도로원표(道路元標)

 

 

일제강점기에 철원군에서 세운 도로원표이다.

도로원표에는 "평강 16.8km, 김화 28.5km, 원산 181.6km, 평양 215.1km, 이천 51.4km, 포천(총탄자국으로 불명)km"라고 기롣되어 있다. 옛 철원읍은 철원평야의 중심지에 도시가 형성되었으며, 경원선과 금강산전철이 운행되고 각종 농축산물의 집산과 관광객들의 왕래가 빈번했으며, 예로부터 도내에선 춘천과 더불어 도청을 유치하려던 대읍부향으로 손꼽혔다.

-도로원표(道路元標)

  도로의 기점, 종점 또는 경과지를 표시하는 것으로 도로원표의 위치는 도청, 시청, 군청 등 행정의 중심지, 교통의 요충지, 역사적,문화적 중심지로 정하도록 되어 있으므로 도로원표가 위치한 곳은 역사적으로 도시의 중심, 교통의 중심지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

 

◈ 철원경찰서지

 

 

청사의 정확한 건립연대는 모르나. 일제식민통치기구에 의해 간행된 "철원읍지"에 의하면 1937년 당시 경찰본서 인원은 34명이었으며, 철원 역전 주재소를 비롯하여 관내 10개 주재소와 1개의 출장소가 설립되어 있으며, 주재소당 4명의 경찰력을 배치하여, 일제식민통치의 전위기구로서 역할을 수행하였다.

광복후 일본이 물러 간 자리에는 소련군이 주둔하여 사령부로 사용하였으며, 이후 인공치하에서는 군내무서로 사용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노동당사와 더불어 거의 온전하게 남아 있었으나, 후에 완전히 파괴되어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있다.

 

                  ▲ 노동당사 옆에 자리하였던 옛 철원경찰서 모습

 

【 철원 승일교(鐵原 承日橋) 】 

*근대문화유선 등록문화재 제26호(2002년05월31일 지정)

*소재지: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문혜리와 동송읍 장흥4리의 경계

 

                  ▲ 한탄대교에서 바라본 승일교

 

이 교량은 소련식유럽공법의 철근콘크리트 라멘조 아치교로서 교량 높이 35m, 길이 120m, 폭 8m로 일제강점기 철원농업전문학교 토목과 과장이며, 구주공전 출신으로 진남포 제련소의 굴뚝을 설계했다는 김명여 교사가 설계하여 시공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국전쟁으로 남,북한이 시차를 두고 완성한 남북합작의 다리이다.

북한정권하인 1948년 8월부터 군사적 연결로로 사용하려는 목적으로 장흥리쪽부터 당시 철원 및 김화 지역 주민들이 5일간 교대제의 노력공작대라는 이름으로 총동원되어 공사를 시작하여 다리의 절반 정도를 추진한 상태에서 한국전쟁 발발로 중단되었다가, 수복이후 우리 정부에서는 약간 다른 특색의 공법으로 나머지 구간 공사를 마무리하고 "승일교"라고 명명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 강변의 다리 아래에 자리한 정자에서 바라본 승일교

 

다리 이름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원래 "한탄교"라는 이름으로 공사가 시작되었으며, 지도상에도 "한탄교"라 명기되어 있다. 북한이 절반 가량 완성했다가 남측이 나머지 부분을 완공해 이승만 대통령의 '승'자와 김일성의 '일'자를 합해 이름을 붙였다 한다.

1952년 미79공병대대 중위로 한국에 복무했던 제임스 N.패터슨씨가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자료에 의하면 일본인에 의해 공사가 시작되어 다리의 양쪽 입구 15m 2경간과 50m 1경간만을 완성하고 50m 1경간을 남겨둔 채 중단되었으며, 미79공병대대가 1952년 4월3일 상부로부터 아치다리를 건설하라는 명령을 받아 1952년 4월16일 공사를 시작하여 1952년 8월15일 완공하였다고 한다.

1999년 8월11일 한탄대교가 바로 옆에 건설되면서 차량 통행이 금지되었다.

 

                  ▲ 한탄대교와 승일교 

 

                  ▲ 승일교 입구의 표지석과 주차장 입구의 승일공원 표지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