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은 관광명소/호남권

(전북 전주)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한 곳! 경기전

왕마구리 2015. 6. 3. 23:03

◀ 전북 전주 경기전(全州 慶基殿)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한 전각!!! 

 

 

「 전북 전주(全北 全州) 소개 」

전통문화도시! 역사의 땅 '천년전주'

전주는 기린봉, 고덕산, 남고산, 모악산 및 완산칠봉 등이 동,남,서방으로 시가지를 둘러싸고 있는 분지에 자리하고 있다.

시가지의 대부분은 전주천 충적토상에 건설되어 대체로 평탄하여 남동방 전주천변에서 북서방으로 향하여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전주천은 시의 남동방 26km의 관촌평야와 경계한 분수령에서 기원하여 시가지의 중심을 남동방에서 북서방으로 관통하고 삼천은 노령산맥 북부를 흐르고 있는 삼진강의 북평 분수령인 임실군 운암면과 안주군 구이면계에서 시작되어 전주시 서부 농경지를 남방에서 북방으로 흐르다가 전주천에서 삼천과 합류하여 만경강으로 흐른다.

또한 소양천은 곰치에서 기원하여 전주시역의 북동 경계를 흘러 전주천과 합류되며 3개의 하천이 전주역의 남북으로 흐르고 있어 풍광이 명미하고 산자수명한 녹도를 이루고 있다.

면적은 206.22㎢, 연평균 기온 13.3℃, 연강수량 1313.1mm, 행정구역은 2구 33개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 전주 지명의 유래 》

전주의 옛 지명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시대에는 완산이라 하였는데 마한국명으로는 원지국이라 하였다. 전주라는 지명 사용은 통일신라시대 경덕왕16년(757)부터이다.

전주 완산의 비명 원의를 볼 때 "완(完)"과 "전(全)"은 모두 "온전하다"는 "온"이란 우리말 뜻을 지닌 글자이다. 따라서 "완"은 그 음도 "온"의 근사음으로서 "완"이란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특히 "온"이란 말은 완, 전자 이외에도 원(圓), 온(溫), 백(百)등의 한자 소리나 새김을 빌렸다.

삼국사기 백제기 온조왕 조를 보면 백제가 마한 땅을 어우르자 줄기차게 항거했던 원산성(圓山城)도 바로 이곳이며 온조왕의 온 자도 실은 온임금이란 뜻이 담겨 있다. 뿐만 아니라 백제의 백(百)자도 온을 빌어 쓴 글자로서 백제는 온 나라를 적은 것으로 실은 "완산"이나 "전주"와 같은 뜻이다.

이 말은 "온겨례가 바다를 건너다"라는 뜻이다. 결국 "온 다라"는 온겨레가 온 뜻을 어울러 온 힘을 합하여 거친 바다의 풍파를 헤쳐 온전하고 흠이 없으며 그리고 뚜렷하게 모든 것이 갖추어진 나라를 세우자는 이상이 담겨져 있다.

 

 

                      ▲ 경기전 입구 전경(사진 上)

                         경기전 정전의 뒷담(사진 下)

 

《 전주의 역사 》

송천동 사근 유적과 효자동 봉곡 유적으로 구석기시대부터 전주 지역에서 인류가 자리를 잡은 것으로 보이며, 마한·백제시대에는 중심지에서는 벗어나 있었지만, 만경강의 본류와 지류를 따라 충적지와 구릉지대가 발달한 자연환경과 지정학적인 이점을 바탕으로 중심지로의 성장을 예고되었다.

990년 견훤이 전주에 '후백제'를 세웠으며, 후백제의 왕도 전주성(견훤성, 지방기념물 제44호)은 승암산에서 기린봉 능선을 따라 북쪽으로 흐르는 구릉지대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걸쳐 있다.

고려 성종(983) 때 12목 체제를 실시하였는데, 전주목과 나주목이 설치되었고, 현종(1018)때 5도 양계체제로 개편되면서, 전주권과 나주권이 합쳐져 전라도가 되었다.

전주는 태조 이성계의 본향으로 조선 건국 후 전주에 태조어진을 모시고 경기전이라하여, 전주가 조선왕조의 발상지임을 분명히 하였다.

전주는 전라도를 총괄하는 전라감영의 수부였고, 한강이남에서 가장 큰 성이었던 전주부성은 객사가 중심에 위치하고 그 앞쪽으로 서편에 전라감영, 동편에 전주부영이 자리하였었다. 영조10년(1734) 감사 조현명이 전주성을 보수하고 4대문을 다시 쌓았다.

임진왜란 때 서울 춘추관을 비롯해 중주, 성주, 전주 등 4대 사고에 보관하였던 '조선왕조실록'이 모두 불탔으나 전주사고분만은 오희길, 손홍록, 안의 등에 의해 실록과 태조어진을 지킬 수 있었다.

전주는 호남 제일의 곡창지대 수부로 물산이 풍부하여, 호수는 한양, 평양에 이어 3번째였고, 인구수는 한양,평양,의주,충주에 이어 5번째로 큰 지역이었다.

조선의 문화예술을 선도한 예향의 도시 전주는 조선후기 대사습놀이가 열렸던 소리의 고장이며, 음식문호가 발전한 맛의 고장이다. 한지의 본가이며, 완판본이라는 이름으로 한양과 함께 출판문화를 주도했던 기록의 도시였다.

임진왜란(1592) 때 전주는 왜군이 들어오는 두 길목 웅치와 이치에서 전주성을 지켰으며, 정유재란(1597)때는 진주성이 함락되지만, 왜란 초 전주성과 호남수호는 7년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기반이 된 우국충절의 도시였다.

 

【 일 정 표 】2015년 5월 10일(일)-11일(월) 1박2일

                             ◈ 첫째날(5/10) 완주 탐방 : 화암사-위봉사-위봉산성-송광사

                             ◈ 둘째날(5/11) 전주 탐방 : 풍남문-전동성당-경기전-전주객사(풍패지관)-전주향교-만고사&남고산성

 

이번 전라북도 완주군과 전주시 탐방은 1박2일 일정으로 이루어졌으며, 완주군에서의 일정은 호남의 금강산! 대둔산, 어머니의 품 같은 명산! 모악산 등은 이미 일반산행과 금남정맥 종주 산행 등으로 몇 차례 산행을 실시하였으므로, 완주의 3대 명찰인 화암사, 위봉사, 송광사와 군사적 목적뿐만 아니라 다른 산성과는 달리 유사시 조선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축성하였다는 위봉사에서 송광사로 넘어가는 위봉산 고개에 자리한 위봉산성을 탐방하였다.

전주에서는 전주한옥마을 인근에 자리한 문화재들인 전주읍성의 남문인 풍남문, 호남지방 최초의 로마네스크 양식 건물로 전주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인 전주 전동성당, 조선왕조를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한 경기전, 전주객사인 풍패지관, 고려시대에 세웠다고 전해지는 전주향교, 그리고 남고산성과 남고사를 탐방하는 여행이었다.

 

전주에서 탐방하였던 관광명소들은 내가 찾은 관광명소 '호남권'에 5편으로 나누어 소개를 하기로 한다.

 

전주의 가장 대표적인 문화재! 풍남문(豊南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전동성당(殿洞聖堂)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한 곳! 경기전(慶基殿)

조선시대의 객사! 풍패지관(豊沛之館)

고려시대에 세웠다고 전하는 지방 교육기관! 전주향교(全州鄕校)

 

 

                      ▲ 전주 경기전 안내도

 

『 전주 경기전(全州 慶基殿) 』

*사적 제339호(1991년01월09일 지정)

*면적:49,589㎡

*소재지: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3가 102번지

조선 태종10년(1410) 전주, 경주, 평양 등 세 곳에 태조의 초상화를 모시고 어용전이라 하였다. 그 후 태종12년(1412)에 태조의 진전이라 부르다가 세종24년(1442)에 와서 전주는 경기전, 경주는 집경전, 평양은 영흥전으로 각각 이름을 지었다.

경기전 관원으로는 영(종5품) 1명, 참봉(종9품) 1명이 배속되었다.

경기전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6년(1614)에 중건하였다. 1971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었다가, 1991년 1월 9일 사적 제339호로 승격되었고 경기전 정전은 2008년 12월 1일 보물 제1587호로 승격되엇다.

경내에는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정전(보물 제1587호), 전주 이씨 시조인 이한공의 위패를 봉안한 조경묘, 조선의 여러 실록을 보관하였던 전주사고, 예종의 탯줄을 묻은 태실과 비, 그리고 어진을 보관하고 있는 어진박물관, 부속건물(수복천,마청,용실,조과청,제기고,어정,수문장청,전사청,동재·서재) 등이 있고, 경기전 밖에는 경기전 하마비가 자리를 하고 있다.

 

 

 

                      ▲ 일직선 배치의 경기전 홍살문(사진 上)

                                                       외삼문(사진 中)

                                                       내삼문(사진 下)

 

건물의 구성은 본전, 본전 가운데에사 달아낸 헌(軒), 본전 양 옆 익랑 등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를 두르고 있는 내삼문,외삼문 등으로 공간을 분할하고 있다.

본전은 남향한 다포식 맞배집 건물로, 높게 돋우어 쌓은 석축 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세웠는데 건물의 세번째 기둥열에 고주를 세우고 그 가운데에 단을 놓았다. 이 단 양 옆에는 일산과 천개를 세웠다. 본전 앞에 내단 현은 본전보다 한 단 낮게 쌓은 석축 기단 위에 4개의 기둥을 세우고 2익공식 포작을 짜올린 맞배지붕 건물이다.

본전과 헌이 이루는 구성은 왕릉에 제사를 지내려고 세운 정자각의 구성과 같다. 또한 본전 양 옆에는 문의 좌우편에 잇대어 지은 행랑인 익랑 2칸, 전각 주위에 세운 행랑인 무(廡) 4칸이 있다.

 

                      ▲ 전각 좌,우에 배치된 각 4칸의 무

 

내삼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된 3문으로 그 양 옆에 익량 2칸을 두었다.

외삼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인 맞배지붕 건물로 익랑을 두지 않았으며, 양옆 가운데에 사이기둥을 세워 삼문을 달았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는 아산, 묘향산, 적상산 등으로 옮겨졌던 어전은  1614년 경기전이 중건되면서 다시 돌아왔다가 동학혁명 때 위봉산성으로 옮겨져 화를 면했으며 현재 경기전에 모셔져 있는 어진은 1872년 서울 영희전의 영정을 모본으로 해서 새로 그린 것이다.

원래의 규모는 훨씬 컸으나 일제시대에 경기전의 서쪽 부지와 부속 건물을 철거해서 일본인 소학교를 세우면서 절반 정도가 잘려 나간 것이다. 남아 있는 경기전 건물의 모습은 홍살문을 지나 외삼문과 내삼문을 연결하는 간결한 구조이다.

 

 

                      ▲ 경기전 담장 앞의 보호수인 은행나무

                           - 고유번호:9-1-3-1(1982년09월20일 지정)

                           - 수령 : 250년, 수고 : 25m, 나무둘레 : 3.2m

 

경기전 탐방코스 】 경기전 하마비→매표소→홍살문→경기전 정전→전주사고→조경묘→경기전 부속건물→예종대왕 태실 및 비→매표소

 

♧ ♧ 전주 경기전 정전(全州 慶基殿 正殿)

*보물 제1578호(2008년12월01일 지정)

 

 

조선 왕조를 개국시킨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한 곳이다.

태조 어진을 모신 곳을 어용전, 태조진전 등으로 명명하던 것을 세종24년(1442)에 경기전이라 명명하였다. 1410년에 창건된 경기전은 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되고 1614년에 중건했다.

1872년 태조 어진을 새롭게 모사하여 봉안하면서 경기전의 전반적인 보수가 이루어졌다.

 

 

정전은 다포계 양식으로 외3출목, 내3출목이고, 5량 구조의 맞배, 겹처마 지붕이다. 살미의 석쇠가 발달되어 있고 내부에서는 초각 처리되어 안정된 조선 중기의 형식이 반영되어 있다.

 

                      ▲ 측면에서 바라본 경기전 정전의 배례청

 

배례청은 이익공을 가진 익공계 양식으로 겹처마 맞배지붕이며 배례청의 박공면은 정전의 정면 모습이 된다.

정전과 배례청은 화강암 원형 초석 위에 민흘림의 원기둥을 세웠다. 내부의 5.8m나 되는 2개의 고주는 종보를 직접 받고 있으며, 양측면의 기둥도 대들보를 받는 고주로 되어 측부재 구조가 간결하고 견고하게 짜여있다.

 

                      ▲ 경기전 정전의 내부 전경

 

포작의 내부 살미 조각과 보아지 및 종도리를 받는 파련 대공의 섬세한 조각과 우물천정 단청 등의 의장이 화려한 편으로 다른 유교 건축과 차별화된 권위성을 볼 수 있다.

 

                      ▲ 경기전 배례청에 조각된 거북상 1쌍

                         한 마리는 아쉽게도 목이 잘려져 있다. 장수를 상징하는 거북을 통해 목조건물인 정전이 화마를 피하고,

                         조선왕조가 영원하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한 쌍의 거북상을 조각하였다고 전해진다.

 

구조 부재들의 이음과 맞춤이 정확하며 견고하고 조선 중기의 전통 건축 기법이 잘 전수된 안정된 구조와 부재의 조형 비례는 건축적 품위를 돋보여 준다.

조선왕조를 개국한 태조 어진이 봉안된 정전 기능과 품위에 기준한 내삼문 내의 신로 및 향로의 엄격한 격식, 그리고 정전과 배례청 평면 조합 및 어방구조 등이 보물로서의 문화재 가치가 인정된다.

 

♧ ♧ 조선 태조 어진(朝鮮 太朝 御眞)

*국보 제317호(2012년06월29일 지정)

*소재지:경기전 어진박물관

왕의 초상화는 조산 추모의 의미뿐만 아니라 왕실의 영구한 존속을 도모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로 가로 150cm, 세로 218cm이다.

태조의 초상화는 한 나라의 시조로서 국초부터 한양의 문소전, 외방의 출생지인 영흥의 준원전, 평양의 영숭전, 개성의 목청전, 경주의 집경전, 본관인 전주 경기전 등 여러 곳에 특별하게 보관되어 총 26점이 있었으나 현재 전주 경기전에 있는 태조 초상화 1점만이 남아 있다.

신숙주가 찬술한 『영모록』을 보면, 당시 경복궁 내 선원전의 열성어진 봉안처에서 받들던 태조어진이 무려 26축이었다고 한다.

전주 경기전의 어진은 태조 재위 당시에 제작된 집경전의 어진을 태종10년(1409)에 모사하여 태종11년(1410)에 봉안하였으며, 영조39년(1763에 수리를 거쳐, 오래되어 낡고 해짐에 따라 고종9년(1872) 영희전에서 받들던 태조어진을 범본으로 하여 화사 박기준, 조중묵, 백은배 등이 모사한 이모본이다. 태조 어진의 이모와 관련된 전 과정이 『어진이모도감의궤』에 수록되어 있다.

경기잔의 태조어진은 1592년 임진왜란 때에 의주를 거쳐 묘향산에 이안되었고, 1597년 정유재란 때에 어진이 봉안되어 있던 경기전이 소실되자 광해군6년(1614)에 경기전이 중건된 후에야 전주로 환안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 다시 무주 적상산으로 피난을 가서 이듬해 환안되었다. 영조43년(1767)에는 전주성에 화재가 발생하여 전주향교로 옮겼으며, 동학농민운동 당시에는 위봉사 법당으로 이안된 후 다시 환안되었다.

2005년 문화재청 국정감사에서 태조어진의 훼손 사실이 드러나 2008년 보존 처리를 완료하고 전주시로 반환되었으며, 2010년부터는 경기전 경내에 위치한 어진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예술성과 희소성, 상징성, 학술적 가치 등을 고려하여 2012년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 지정되었다.

 

 

임금이 쓰는 모자인 익선관과 곤룡포를 착용한 채 정면을 바라보며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상으로 전체적인 형식은 현재 대만 고궁박물원에 보관중인 명나라 태조 초상화와 유사하다.

태조는 본래 무인으로서 풍채가 좋았다고 전하는데, 어진은 신장이 크고 당당한 모습으로 위풍당당한 군주의 위엄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 어진은 이모본으로서 조선 초기의 초상화법을 충실하게 따르는 동시에 제작 당시의 화풍도 반영되어 있다. 화면은 전체적으로 정교하게 배채 처리하였다. 곤룡포의 윤곽선은 상당히 각지게 묘사되었고, 양다리쪽에서 삐져나온 옷의 형태는 장말손상을 비롯한 조선왕조 초기 공신상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아래에 깔린 채전(채색한 양탄자)은 숙종조까지 왕의 초상화에 사용된 것으로 상당히 높게 올라간 것으로 보아 오래된 화법임을 알려준다.

용상에 새겨진 화려한 용무늬는 화장사에 소장된 공민왕상에서 보이는 것으로, 고려말에서 조선초까지 왕의 초상화에서 나타나는 형식이다.

안면 처리 역시 정면에서 바라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목한 부위에 살포시 음영이 깔려 있는 점 등은 이모 당시의 화법을 보여준다. 옷주름 처리는 곧은 직선으로 조선 초기 양식을 보이지만 선염 효과가 선 둘레에 조심스럽게 나타나 있다. 하지만 이 태조어진은 전체적으로 볼 때 원본에의 충실함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어진은 국왕의 위엄을 나타내기 위하여 정면관이 제일 바람직하다. 하지만 정면관은 그려내기가 가장 어렵다는 『승정원일기』의 기록을 참조해 보면, 이 어진은 정면관을 훌륭히 소화해 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태조 어진은 조선조 왕실문화의 격조를 잘 보여주는 초상화이다.

현재 어진의 진본은 전주 경기전 어진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으며, 모사본이 국립전주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등에 전시되어 있다.

 

♧ 전주 경기전 하마비(全州 慶基殿 下馬碑)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22호(2013년11월15일 지정)

 

 

경기전 하마비는 임진왜란 후 경기전이 중건되던 광해군6년(1614)에 처음 세웠으며, 철종7년(1856)에 중각되었다.

비석에는 '지차개하마 잡인무득입(至此皆下馬 雜人毋得入)'이라고 새겨 계급의 높고 낮음, 신분의 귀천을 떠나 모두 말에서 내리고, 잡인들의 출입을 금한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 경기전 하마비의 축면(사진 左)과 후면(사진 右)

 

경기전 하마비는 여느 하마비와는 다르게 판석위에 비를 올리고 그 판석을 두 마리의 사자(혹은 해태)가 등으로 받치고 있는 특이한 형태로, 단지 하마의 의미로서만이 아닌 경기전 수호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비석의 형태는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특이한 형태여서 조형적인 가치 뿐만 아니라 내용적인 측면에서도 경기전이 어떤 곳인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상징물이기도 하다.

 

♧ 전주 경기전 조경묘(全州 慶基殿 肇慶廟)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6호

 

                      ▲ 경기전 조경묘 전체 전경

 

전주 이씨의 시조인 이한과 그의 부인 경주 김씨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 경기전 조경묘의 전사청과 재실

 

이한은 신라 때 '사공(도성을 쌓고 고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의 한 벼슬)'이라는 높은 벼슬을 지냈다.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는 이한의 21대 후손이다.

조경묘는 영조47년(1771)에 세웠으며, 영조가 세손인 정조로 하여금 쓰도록 한 이한과 그의 부인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철종5년(1854) 경기전과 함께 보수해 오늘 날의 모습을 갖추었다.

 

 

                      ▲ 경기전 조경묘 홍살문과 외삼문(사진 上)

                         외삼문의 후면 전경(사진 下)

 

조경묘는 경기전과 함께 전주가 조선왕조의 발상지임을 상징하는 곳이다.

 

                      ▲ 경기전 예종대왕 태실 옆 전주사고로 들어가는 협문

 

♧ 예종대왕 태실 및 비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26호

이 태실은 조선 예종대왕의 태를 항아리에 담아 넣어 둔 석실이다.

 

 

왕가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그 태를 소중히 석실에 보관하였는데, 이를 태실이라고 한다. 원래 선조11년(1578) 완주군 구이면 원덕리 태실마을 뒷산에 세웠다가 영조10년(1734) 다시 고쳐 세웠다.

1928년 일본의 조선총독부가 태 항아리를 가져가면서 파괴되어 구이초등학교 부근에 있던 것을 1970년 이곳으로 옮겼다.

이 태실은 팔각형 돌 난간 안에 기단석을 놓고 그 위에 둥근 돌을 얹은 다음 지붕돌을 덮었다. 비석은 태실과 함께 옮긴 것으로, 예종대왕 태실임을 알리는 글과 비석의 건립연대를 앞면과 뒷면에 각각 새겼는데 건립연대는 선조11년(1578)이다.

잘 보관된 거북 모양의 받침돌과 뿔없는 용의 모습을 새긴 머릿돌이 돋보이는 비석이다.

 

♧ 전주사고(全州史庫)

 

 

 

우리나라는 고려시대부터 춘추관과 예문관을 상설하고 사관을 두어 날마다 시정을 기록하였으며, 한 임금이 전왕시대의 역사를 편찬하여 이를 신록이라 하고 특별히 설치한 사고에 봉안하여 왔었다.

조선왕조에서 실록을 편찬한 것은 태종9년(1409)부터 태종13년(1413)까지 4년간의 태조실록 15권을 편찬한 것이 처음이며, 세종8년(1426)에 정종실록 6권을 편찬하고, 세종13년(1431) 태종실록 36권을 편찬한 후 태조·정종·태종의 3조 실록 각 2부씩 등사하여 1부는 서울의 춘추관과 1부는 충주사고에 봉안하였다.

 

                      ▲ 경기전 전주사고 내부 전경

 

그러나 2부의 실록만으로는 그 보존이 매우 걱정되어 세종27년(1445)에 다시 2부를 더 등사하여 전주, 성주에 사고를 신설하고 각 1부씩 분장하였었다.

선조25년(1592) 임진왜란 때 춘추관, 충주, 성주의 3 사고의 실록은 모두 소실되고 오직 전주사고의 실록만이 병화를 면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손홍록, 안의 등이 실록을 내장산 용굴암에 이안, 사수하였기 때문이다.

전주사고에는 실록 784권 614책 47궤, 기타 전적이 64종 556책 15궤가 봉안되어 있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실록각은 소실되었는데 1991년 이를 복원하였으며, 조선왕조실록(국보 제151호)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 경기전 부속건물 영역과 전주 전동성당

 

【 경기전의 부속건물들 】

 

                      ▲ 경기전 부속건물 안내도

                      ▲ 경기전 부속건물 전경

 

▣ 용실(舂室) : 제수용 음식을 만드는 방앗간으로 디딤방아와 절구를 두고 경기전 제례에 사용되는 음식을 만드는 곳이다.

 

                      ▲ 경기전 조과청(사진 左)과 용실(사진 右)

 

▣ 조과청(造菓廳) : 조병청(造餠廳)이라고도 한다.

    떡이나 튀겨서 꿀을 바른 약과와 비슷한 과자인 유밀과, 곡물가루를 꿀에 반죽하여 판에 박아 만드는 과자인 다식 등의 제사 음식을 만들고 보관하는 장소이다. 국조오례의(국가와 왕실, 왕과 신하와의 관계 등을 규정한 제도를 도식으로 엮은 책)에 기록된 진전의 찬실도(제사 음식을 차리는 방법을 그린 그림)에는 중박계(약과), 붉은 산자, 흰 산자, 다식, 과일, 각색떡, 탕 등을 사용한다고 되어 있다.

 

                      ▲ 경기전 전사청

 

▣ 전사청(典祀廳) : 나라 제사에 제수 준비와 제상 차리는 일을 담당하는 전사관이 집무하면서 제사 준비를 하는 곳이다.

▣ 제기고(祭器庫) : 제향 때 사용하는 각종 제기, 기물, 기구 등을 보관하는 장소로 마루 바닥은 지면과 분리되어 있어 습기가 차지 않고 기물을 보관하는데 적합하게 지어져 있다.

 

                      ▲ 경기전 제기고(사진 左)와 어정(사진 右)

 

▣ 어정(御井) : 임금의 음식을 만들거나 임금이 마실 물을 기르는 우물을 말한다.

    종묘, 사직단 등 임금이 참여하는 제례에 사용하는 우물도 어정이라고 한다.

 

                      ▲ 경기전 동재(사진 左)와 서재(사진 右)

 

▣ 동재·서재(東齋·西齋) :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지어진 집으로 제각이라고도 하며, 제관들의 제례의식을 하기 위한 곳이다.

 

                      ▲ 경기전 마청

 

▣ 마청(馬廳) : 경기전의 의식이나 관원의 교통 수단의 목적으로 지어졌으며, 조정에서 참례하기 위해 내려온 관리의 말을 두는 곳이다.

 

                      ▲ 경기전 수복청

 

▣ 수복청(守僕廳) : 경기전의 제사에 관한 일을 맡아 보는 하급관원들이 수직하는 곳으로 주로 큰 일이 있을 때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임시로 거처하는 곳이다.

    「세조실록」 세조8년 8월 6일조에 의하면 전주 경기전에 수복의 수가 관노 1명, 양민 18명이 교대로 지켰다고 한다. 이를 미루어 볼 때 수복청에는 항상 몇 명이 거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경기전 수문장청

 

▣ 수문장청(守門將廳) : 경기전 일곽을 지키는 수문군들이 업무를 보는 곳으로 경덕헌(慶德軒)이라고도 한다.

    경기전의 규모와 연혁, 제향을 맡은 관원의 역할과 각종 제향절차 등을 한자 등으로 기록한 「경기전의」에 수문청장을 갑자년에 신설하여 을축년 준공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경덕헌은 수문장청에 붙여진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