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북 전주향교(全州鄕校) ▶
고려시대 세웠다고 전해지는 지방 교육기관!!!
「 전북 전주(全北 全州) 소개 」
전통문화도시! 역사의 땅 '천년전주'
전주는 기린봉, 고덕산, 남고산, 모악산 및 완산칠봉 등이 동,남,서방으로 시가지를 둘러싸고 있는 분지에 자리하고 있다.
시가지의 대부분은 전주천 충적토상에 건설되어 대체로 평탄하여 남동방 전주천변에서 북서방으로 향하여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전주천은 시의 남동방 26km의 관촌평야와 경계한 분수령에서 기원하여 시가지의 중심을 남동방에서 북서방으로 관통하고 삼천은 노령산맥 북부를 흐르고 있는 삼진강의 북평 분수령인 임실군 운암면과 안주군 구이면계에서 시작되어 전주시 서부 농경지를 남방에서 북방으로 흐르다가 전주천에서 삼천과 합류하여 만경강으로 흐른다.
또한 소양천은 곰치에서 기원하여 전주시역의 북동 경계를 흘러 전주천과 합류되며 3개의 하천이 전주역의 남북으로 흐르고 있어 풍광이 명미하고 산자수명한 녹도를 이루고 있다.
면적은 206.22㎢, 연평균 기온 13.3℃, 연강수량 1313.1mm, 행정구역은 2구 33개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 전주 지명의 유래 》
전주의 옛 지명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시대에는 완산이라 하였는데 마한국명으로는 원지국이라 하였다. 전주라는 지명 사용은 통일신라시대 경덕왕16년(757)부터이다.
전주 완산의 비명 원의를 볼 때 "완(完)"과 "전(全)"은 모두 "온전하다"는 "온"이란 우리말 뜻을 지닌 글자이다. 따라서 "완"은 그 음도 "온"의 근사음으로서 "완"이란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특히 "온"이란 말은 완, 전자 이외에도 원(圓), 온(溫), 백(百)등의 한자 소리나 새김을 빌렸다.
삼국사기 백제기 온조왕 조를 보면 백제가 마한 땅을 어우르자 줄기차게 항거했던 원산성(圓山城)도 바로 이곳이며 온조왕의 온 자도 실은 온임금이란 뜻이 담겨 있다. 뿐만 아니라 백제의 백(百)자도 온을 빌어 쓴 글자로서 백제는 온 나라를 적은 것으로 실은 "완산"이나 "전주"와 같은 뜻이다.
이 말은 "온겨례가 바다를 건너다"라는 뜻이다. 결국 "온 다라"는 온겨레가 온 뜻을 어울러 온 힘을 합하여 거친 바다의 풍파를 헤쳐 온전하고 흠이 없으며 그리고 뚜렷하게 모든 것이 갖추어진 나라를 세우자는 이상이 담겨져 있다.
《 전주의 역사 》
송천동 사근 유적과 효자동 봉곡 유적으로 구석기시대부터 전주 지역에서 인류가 자리를 잡은 것으로 보이며, 마한·백제시대에는 중심지에서는 벗어나 있었지만, 만경강의 본류와 지류를 따라 충적지와 구릉지대가 발달한 자연환경과 지정학적인 이점을 바탕으로 중심지로의 성장을 예고되었다.
990년 견훤이 전주에 '후백제'를 세웠으며, 후백제의 왕도 전주성(견훤성, 지방기념물 제44호)은 승암산에서 기린봉 능선을 따라 북쪽으로 흐르는 구릉지대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걸쳐 있다.
고려 성종(983) 때 12목 체제를 실시하였는데, 전주목과 나주목이 설치되었고, 현종(1018)때 5도 양계체제로 개편되면서, 전주권과 나주권이 합쳐져 전라도가 되었다.
전주는 태조 이성계의 본향으로 조선 건국 후 전주에 태조어진을 모시고 경기전이라하여, 전주가 조선왕조의 발상지임을 분명히 하였다.
전주는 전라도를 총괄하는 전라감영의 수부였고, 한강이남에서 가장 큰 성이었던 전주부성은 객사가 중심에 위치하고 그 앞쪽으로 서편에 전라감영, 동편에 전주부영이 자리하였었다. 영조10년(1734) 감사 조현명이 전주성을 보수하고 4대문을 다시 쌓았다.
임진왜란 때 서울 춘추관을 비롯해 중주, 성주, 전주 등 4대 사고에 보관하였던 '조선왕조실록'이 모두 불탔으나 전주사고분만은 오희길, 손홍록, 안의 등에 의해 실록과 태조어진을 지킬 수 있었다.
전주는 호남 제일의 곡창지대 수부로 물산이 풍부하여, 호수는 한양, 평양에 이어 3번째였고, 인구수는 한양,평양,의주,충주에 이어 5번째로 큰 지역이었다.
조선의 문화예술을 선도한 예향의 도시 전주는 조선후기 대사습놀이가 열렸던 소리의 고장이며, 음식문호가 발전한 맛의 고장이다. 한지의 본가이며, 완판본이라는 이름으로 한양과 함께 출판문화를 주도했던 기록의 도시였다.
임진왜란(1592) 때 전주는 왜군이 들어오는 두 길목 웅치와 이치에서 전주성을 지켰으며, 정유재란(1597)때는 진주성이 함락되지만, 왜란 초 전주성과 호남수호는 7년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기반이 된 우국충절의 도시였다.
【 일 정 표 】2015년 5월 10일(일)-11일(월) 1박2일
◈ 첫째날(5/10) 완주 탐방 : 화암사-위봉사-위봉산성-송광사
◈ 둘째날(5/11) 전주 탐방 : 풍남문-전동성당-경기전-전주객사(풍패지관)-전주향교-만고사&남고산성
이번 전라북도 완주군과 전주시 탐방은 1박2일 일정으로 이루어졌으며, 완주군에서의 일정은 호남의 금강산! 대둔산, 어머니의 품 같은 명산! 모악산 등은 이미 일반산행과 금남정맥 종주 산행 등으로 몇 차례 산행을 실시하였으므로, 완주의 3대 명찰인 화암사, 위봉사, 송광사와 군사적 목적뿐만 아니라 다른 산성과는 달리 유사시 조선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축성하였다는 위봉사에서 송광사로 넘어가는 위봉산 고개에 자리한 위봉산성을 탐방하였다.
전주에서는 전주한옥마을 인근에 자리한 문화재들인 전주읍성의 남문인 풍남문, 호남지방 최초의 로마네스크 양식 건물로 전주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인 전주 전동성당, 조선왕조를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한 경기전, 전주객사인 풍패지관, 고려시대에 세웠다고 전해지는 전주향교, 그리고 남고산성과 남고사를 탐방하는 여행이었다.
전주에서 탐방하였던 관광명소들은 내가 찾은 관광명소 '호남권'에 5편으로 나누어 소개를 하기로 한다.
- 전주의 가장 대표적인 문화재! 풍남문(豊南門)
-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전동성당(殿洞聖堂)
-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한 곳! 경기전(慶基殿)
- 조선시대의 객사! 풍패지관(豊沛之館)
- 고려시대에 세웠다고 전하는 지방 교육기관! 전주향교(全州鄕校)
▲ 전주향교 만화루와 일월문 전경
『 전주향교(全州鄕校) 』
*사적 제379호(1992년12월23일 지정)
*면적:10,357.4㎡
*소재지: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교동 26-3번지 외
향교는 유학교육과 인재양성을 위해 지방에 설립된 교육기관이다.
원래 고려 공민왕3년(1354)에 지어졌다고 전하고 있다. 원래의 위치는 전주시 풍남동이었으나. 남쪽에 태종10년(1410)에 태조의 어진을 봉안하는 경기전이 지어지고, 세종23년(1441) "글 외고 읽는 소리, 회초리를 치는 소리 등이 시끌벅적하여 끊이지 않으므로 태조의 영령을 편안히 모실 수 없다"는 이유로 전주성 서쪽으로 6,7리 떨어진 황학대 아래 지금의 신흥중고등학교 부지로 옮겨 지었다.
▲ 전주향교 출입문인 만화루(사진 上)
대성전으로 들어서는 일월문(사진 下)
지금의 위치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고 난 뒤인 선조36년(1603) 향교의 위치가 읍성에서 멀고 전주천을 넘어 다니기 불편하며, 당시 객사를 기준으로 좌측에 문묘, 우측에 사직단이 있도록 규정한 옛 제도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당시의 관찰사 장만의 의논에 따라 다시 옮긴 것이다.
영조43년(1767) 전주에 2,300여 호가 불타는 화재가 발생했을 때 경기전에 보관하고 있던 태조의 어진을 향교로 옮겨 봉안하였으며, 동학농민운동 당시, 전주를 점령한 농민군에 의해 농민들을 모으는 주요 거점이 되기도 한다.
▲ 전주향교 대성전에서 명륜당으로 들어가는 중문
1949년 동·서무에 안치되어 있던 112개의 위패 가운데 동국 18현을 제외한 94위, 계성사의 5위 총 99위가 펌출되고, 남은 위패도 한국전쟁으로 인민군에 의해 아무렇게나 버려졌으나 버려진 위패는 그 해 8월에 이병은이 몰래 수습하여 벽장 속에 숨겨 두었으며, 보관되어 있던 목판들이 불살라지기도 했다. 향교 건물도 인민위원회 사무실이며 마초지로 쓰이며 훼손되었다.
1952년 전주 유생들이 위성계를 조직하여 성금을 거두어 향교를 수리하고, 위패도 다시 제작하였다.
1987년 당시 내무부 장관 김종호의 국고 지원과 전라북도지사 홍석표의 도비 지원으로 대성전과 동·서무를 해체복원하였으며, 계성사와 명륜당, 동·서재 일월문, 입덕문, 계성문, 중문 등을 중보수하고 지경문이 철거된 자리에 만화루를 새로 지었으며, 장판각을 지어서 보존해오던 희귀 서적의 인쇄목판을 보관하였다.
▲ 전주향교 명륜당
▲ 전주향교 명륜당 동재(사진 左)와 서재(사진 右)
전주향교에는 여러 훌륭한 분들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7호)을 비롯해 동·서무, 계성사, 학생들을 가르치던 곳인 명륜당 등의 여러 건물이 있다.
대성전은 효종4년(1653) 고쳐 세웠는데, 이기발이 중건기를 남겼다. 이후 융희 원년(1907) 군수 이중익이 다시 고쳤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명륜당은 광무8년(1904)에 군수 권직상이 고쳤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이다.
우리의 옛 교육기관을 둘러 볼 수 있는 이곳은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기관은 없어졌다. 그러나 봄·가을에 공자께 제사를 지내고 초하루,보름에는 향을 피루고 있다.
▲ 전주향교 계성사(사진 左)와 입덕문(사진 右)
♧ 전주향교 대성전(全州鄕校 大成殿)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7호(1971년12월02일 지정)
공자를 모신 사당이다.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시대에는 향교에 공자를 모신 사당을 두고, 유학을 장려했다. 이 대성전은 효종4년(1653)에 다시 세우고, 대한제국 융희 원년(1907)에 다시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대성전 내에 봉안된 공자존영과 위패
대성전에는 공자의 위패를 가운데 모시고, 동·서쪽으로 맹자 등 네 성인, 공자의 제자 열 사람, 주자 등 중국 송나라 때 유학자 여섯 사람을 함께 모셨다.
동무·서무에는 신라시대 설총을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 나라 유학자 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 대성전 동무(사진 左)와 서무(사진 右)
향교에서는 매달 음력 초하루와 보름에 사당에 향불을 피워 올리고, 매년 봄·가을에는 석전대제를 지냈다. 관청의 후원을 받아 향교의 선비들이 주관하여 치렀던 이 제사는, 공자의 뜻을 기리는 큰 행사이다.
【 전주향교 내 보호수들 】
▲ 대성전 서무 앞 보호수인 은행나무
- 고유번호:9-1-4(1982년09월20일 지정)
- 수령 : 400년/수고 : 30m/나무둘레 : 10.4m
- 음양의 조화를 이루기 위하여 김해동이란 사람이 암컷 나무 옆에 심은 수컷 나무
▲ 대성전 동무 앞 보호수인 은행나무
- 고유번호:9-1-5(1982년09월20일 지정)
- 수령 : 350년/수고 : 30m/나무둘레 : 5.5m
▲ 명륜당 서재 앞 보호수인 은행나무
- 고유번호:9-1-3(1982년09월20일 지정)
- 수령 : 380년/수고 : 32m/나무둘레 : 6.6m
▲ 대성전 우측 옆 보호수인 은행나무
- 고유번호:9-1-7-1(1982년09월20일 지정)
- 수령 : 250년/수고 : 20m/나무둘레 : 3.7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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