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은 관광명소/호남권

(전북 전주)전주의 대표적인 문화재! 풍남문

왕마구리 2015. 5. 26. 23:39

◀ 전북 전주 풍남문(完州 豊南門)

전주의 대표적인 문화재!!! 

 

 

「 전북 전주(全北 全州) 소개 」

전통문화도시! 역사의 땅 '천년전주'

전주는 기린봉, 고덕산, 남고산, 모악산 및 완산칠봉 등이 동,남,서방으로 시가지를 둘러싸고 있는 분지에 자리하고 있다.

시가지의 대부분은 전주천 충적토상에 건설되어 대체로 평탄하여 남동방 전주천변에서 북서방으로 향하여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전주천은 시의 남동방 26km의 관촌평야와 경계한 분수령에서 기원하여 시가지의 중심을 남동방에서 북서방으로 관통하고 삼천은 노령산맥 북부를 흐르고 있는 삼진강의 북평 분수령인 임실군 운암면과 안주군 구이면계에서 시작되어 전주시 서부 농경지를 남방에서 북방으로 흐르다가 전주천에서 삼천과 합류하여 만경강으로 흐른다.

또한 소양천은 곰치에서 기원하여 전주시역의 북동 경계를 흘러 전주천과 합류되며 3개의 하천이 전주역의 남북으로 흐르고 있어 풍광이 명미하고 산자수명한 녹도를 이루고 있다.

면적은 206.22㎢, 연평균 기온 13.3℃, 연강수량 1313.1mm, 행정구역은 2구 33개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 전주 지명의 유래 》

전주의 옛 지명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시대에는 완산이라 하였는데 마한국명으로는 원지국이라 하였다. 전주라는 지명 사용은 통일신라시대 경덕왕16년(757)부터이다.

전주 완산의 비명 원의를 볼 때 "완(完)"과 "전(全)"은 모두 "온전하다"는 "온"이란 우리말 뜻을 지닌 글자이다. 따라서 "완"은 그 음도 "온"의 근사음으로서 "완"이란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특히 "온"이란 말은 완, 전자 이외에도 원(圓), 온(溫), 백(百)등의 한자 소리나 새김을 빌렸다.

삼국사기 백제기 온조왕 조를 보면 백제가 마한 땅을 어우르자 줄기차게 항거했던 원산성(圓山城)도 바로 이곳이며 온조왕의 온 자도 실은 온임금이란 뜻이 담겨 있다. 뿐만 아니라 백제의 백(百)자도 온을 빌어 쓴 글자로서 백제는 온 나라를 적은 것으로 실은 "완산"이나 "전주"와 같은 뜻이다.

이 말은 "온겨례가 바다를 건너다"라는 뜻이다. 결국 "온 다라"는 온겨레가 온 뜻을 어울러 온 힘을 합하여 거친 바다의 풍파를 헤쳐 온전하고 흠이 없으며 그리고 뚜렷하게 모든 것이 갖추어진 나라를 세우자는 이상이 담겨져 있다.

  

                      ▲ 전주의 아름다운 순례길 안내도

 

《 전주의 역사 》

송천동 사근 유적과 효자동 봉곡 유적으로 구석기시대부터 전주 지역에서 인류가 자리를 잡은 것으로 보이며, 마한·백제시대에는 중심지에서는 벗어나 있었지만, 만경강의 본류와 지류를 따라 충적지와 구릉지대가 발달한 자연환경과 지정학적인 이점을 바탕으로 중심지로의 성장을 예고되었다.

990년 견훤이 전주에 '후백제'를 세웠으며, 후백제의 왕도 전주성(견훤성, 지방기념물 제44호)은 승암산에서 기린봉 능선을 따라 북쪽으로 흐르는 구릉지대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걸쳐 있다.

고려 성종(983) 때 12목 체제를 실시하였는데, 전주목과 나주목이 설치되었고, 현종(1018)때 5도 양계체제로 개편되면서, 전주권과 나주권이 합쳐져 전라도가 되었다.

전주는 태조 이성계의 본향으로 조선 건국 후 전주에 태조어진을 모시고 경기전이라하여, 전주가 조선왕조의 발상지임을 분명히 하였다.

전주는 전라도를 총괄하는 전라감영의 수부였고, 한강이남에서 가장 큰 성이었던 전주부성은 객사가 중심에 위치하고 그 앞쪽으로 서편에 전라감영, 동편에 전주부영이 자리하였었다. 영조10년(1734) 감사 조현명이 전주성을 보수하고 4대문을 다시 쌓았다.

임진왜란 때 서울 춘추관을 비롯해 중주, 성주, 전주 등 4대 사고에 보관하였던 '조선왕조실록'이 모두 불탔으나 전주사고분만은 오희길, 손홍록, 안의 등에 의해 실록과 태조어진을 지킬 수 있었다.

전주는 호남 제일의 곡창지대 수부로 물산이 풍부하여, 호수는 한양, 평양에 이어 3번째였고, 인구수는 한양,평양,의주,충주에 이어 5번째로 큰 지역이었다.

조선의 문화예술을 선도한 예향의 도시 전주는 조선후기 대사습놀이가 열렸던 소리의 고장이며, 음식문호가 발전한 맛의 고장이다. 한지의 본가이며, 완판본이라는 이름으로 한양과 함께 출판문화를 주도했던 기록의 도시였다.

임진왜란(1592) 때 전주는 왜군이 들어오는 두 길목 웅치와 이치에서 전주성을 지켰으며, 정유재란(1597)때는 진주성이 함락되지만, 왜란 초 전주성과 호남수호는 7년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기반이 된 우국충절의 도시였다.

 

【 일 정 표 】2015년 5월 10일(일)-11일(월) 1박2일

                             ◈ 첫째날(5/10) 완주 탐방 : 화암사-위봉사-위봉산성-송광사

                             ◈ 둘째날(5/11) 전주 탐방 : 풍남문-전동성당-경기전-전주객사(풍패지관)-전주향교-만고사&남고산성

 

이번 전라북도 완주군과 전주시 탐방은 1박2일 일정으로 이루어졌으며, 완주군에서의 일정은 호남의 금강산! 대둔산, 어머니의 품 같은 명산! 모악산 등은 이미 일반산행과 금남정맥 종주 산행 등으로 몇 차례 산행을 실시하였으므로, 완주의 3대 명찰인 화암사, 위봉사, 송광사와 군사적 목적뿐만 아니라 다른 산성과는 달리 유사시 조선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축성하였다는 위봉사에서 송광사로 넘어가는 위봉산 고개에 자리한 위봉산성을 탐방하였다.

전주에서는 전주한옥마을 인근에 자리한 문화재들인 전주읍성의 남문인 풍남문, 호남지방 최초의 로마네스크 양식 건물로 전주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인 전주 전동성당, 조선왕조를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한 경기전, 전주객사인 풍패지관, 고려시대에 세웠다고 전해지는 전주향교, 그리고 남고산성과 남고사를 탐방하는 여행이었다.

 

전주에서 탐방하였던 관광명소들은 내가 찾은 관광명소 '호남권'에 5편으로 나누어 소개를 하기로 한다.

 

전주의 가장 대표적인 문화재! 풍남문(豊南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전동성당(殿洞聖堂)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한 곳! 경기전(慶基殿)

조선시대의 객사! 풍패지관(豊沛之館)

고려시대에 세웠다고 전하는 지방 교육기관! 전주향교(全州鄕校)

 

                      ▲ 안심사 입구 요사채 옆에서 바라본 경내 전경

 

『 전주 풍남문(全州 豊南門) 』

*보물 제308호(1963년01월21일 지정)

*소재지: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풍남문3길 1(전동)

읍성은 지방행정의 중심이 되는 고을을 둘러싸고 있는 성을 말한다.

 

 

                      ▲ 전주읍성 성안에서 바라본 풍남문

 

옛 전주읍성의 남쪽문으로 선조30년(1597) 정유재란 때 파괴되었던 것을 영조10년(1734) 성곽과 성문을 다시 지으면서 명견루라 불렀다. '풍남문'이라는 이름은 영조43년(1767) 화재로 불탄 것을 관찰사 홍낙인이 영조44년(1768) 다시 지으면서 붙인 것이다.

순종 때 도시 계획으로 성곽과 성문이 철거되면서 풍남문도 많은 손상을 입었는데, 지금 있는 문은 1978년부터 시작된 3년간의 보수공사로 옛 모습을 되찾은 것이다.

일반적인 성문과 마찬가지로 성벽의 일부를 형성하는 석축기대 중앙에 홍예문이 있고 그 위에 중층문루가 있다.

규모는 1층이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2층이 정면 3칸, 측면 1칸이며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다.

평면상으로 볼 때 1층 건물 너비에 비해 2층 너비가 갑자기 줄어들어 좁아 보이는 것은 1층 안쪽에 있는 기둥을 그대로 2층까지 올려 모서리기둥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이 같은 수법은 우리나라 문루 건축에서는 보기 드문 방식이다.

 

 

                      ▲ 성밖에서 바라본 풍남문 앞의 옹성(사진 上)

                         성밖에서 바라본 옹성 내부(사진 下左)와 성안에서 문틈을 통해 바라본 옹성 내부(사진 下右)

 

영조10년(1734) 성의 시설이 낡아서 수축할 때의 공사 내역을 기록한 조현명의 〈명견루기〉에 의하면, 이 성문은 조선 초기에 최유경이 축성하였다고 한다.

처음 성을 축성할 때 남문 위에는 명견루라는 3층 문루가 있었는데, 1767년 3월 화재로 소실되자 그 해 9월부터 관찰사 홍낙인 재건을 시작하였으며, 이때 현재의 모습처럼 2층 문루가 되었으며 풍남문이라고 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대부분의 성벽과 풍남문을 제외한 나머지 성문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으며, 1978년부터 3년간 실시된 중수공사 때 풍남문 양쪽에 있었다는 포루와 종각을 옹성과 함께 복원하였다.

부재에 사용된 조각 모양과 1층 가운데칸 기둥 위에 용머리를 조각해 놓은 점들은 장식과 기교를 많이 사용한 조선 후기 건축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옛 문루건축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문화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