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북 남원 만복사지(南原 萬福寺址) ▶
고구려식 절 배치의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사찰!!!
「 전북 남원(全北 南原) 소개 」
한반도의 서남부 내륙, 전라북도의 동남부 소백산맥 서사면의 넓은 분지에 위치하며, 시의 동남쪽은 지리산의 주 능선을 경계로 경남 하동군 및 전남 구례군과 북동부는 경남 함양군과 접하고, 서쪽은 임실군·순창군, 그리고 북쪽은 장수군과 인접하고 남쪽의 일부는 섬진강을 경계로 전남곡성과 접하고 있다.
지리적으로 전라남도·경상남도와 접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는 남원시는 88고속도로, 순천-완주 고속도로 와 전라선 철도, 그리고 3개 국도노선(17, 19, 24호)이 통과하며 호남과 영남을 연결하는 내륙의 관문이자 문화적·경제적 접촉지대이다.
노령산맥과 소백산맥 사이의 중산지인 남원시 지형은 크게 산지, 고원, 구릉, 평야로 구분된다. 산지는 남동부의 지리산지, 천황산(909m) 중심이 북부의 보절산지, 교룡산(518m) 중심의 대강산지로 구분되며, 고원은 보절산지의 서사면, 대강산지의 동사면 및 운봉읍을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고 평야는 섬진강 지류인 요천을 끼고 좁고 길다랗게 분포된 남원평야와 운봉 · 아영 · 인월에 분포된 운봉평야, 율천 주변의 충적지인 보절평야로 구분되며, 구릉지는 산지주변 및 남원 · 운봉평야 주변에 분포하고 있으며, 밭, 과수원 등으로 이용되고 있으나 토지이용도는 낮은 편이다.
동서간 거리 44.7km, 남북간 거리 28.6km의 남원시는 동남단 산간 대분지에 위치하여 내륙성 기후대에 속하므로 대체적으로 온화한 기후를 보이고 있으며, 동계에는 대륙성 고기압의 영향으로 추운날이 많고 하계에는 아열대 저기압 및 지리산의 영향으로 다우지역에 속하며 고원에 위치한 인월(아영) 지역은 산간지역으로 아한대성 기후 성향을 보인다.
최근 10년간(2003~2012) 평균기온은 12.3℃, 평균최고기온 19.0℃, 평균최저기온은 6.7℃이었으며, 기간 중 최고로 기온이 높았던 날은 37.0℃('05.07.23), 최저로 기온이 낮았던 날은 –19.3℃('05.12.18) 이었다. 또한, 연 강수량은 1,432.6mm, 강수일수는 117.7일 이었다.
「남원의역사」
지금까지의 자료를 보면 남원에 인간이 살기 시작한 것은 청동기 이후로 추측된다. 구석기와 신석기 유적은 확인된 바 없지만 앞으로 발견될 가능성이 크다. 남원의 대표적인 청동기 유적에는 지석묘가 있다. 한반도에서 지석묘는 청동기-철기시대에 사용되던 것이어서 이러한 지석묘들이 철기시대의 것일 수도 있지만 지석묘 이외에도 청동기 시대에 속할 것으로 보이는 유물 산포지가 자리 하고 있어 지석묘 중에는 청동기시대에 속하는 것도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원지역에서는 지석묘의 하부조사가 이루어진 예가 없어 그 구조와 시기를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분포와 입지, 외부관찰사항을 중심으로 다음과 같은 점을 파악할 수 있다.
상석의 방향이 주변의 강이나 개천의 흐름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지석묘 축조인들은 주변의 자연환경에 대하여 이전 단계 사람들보다 많은 관심과 관찰을 하였다.
상석의 크기로 당시 집단의 500-800명의 인구를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청동기의 유물로 추정되는 암각화가 1991년 6월에 발견되었으며 이것은 선사시대인에게 보편적인 태양숭배사상과 관련되는 원시신앙의 존재를 입증한다. 청동기 이후시대는 여러 주장이 있으나 삼한시대로 파악하고자 한다.삼한에는 마한, 진한, 변한이 있었고 각각에 다시 작은 나라들이 있었으며 남원 지역에도 마한 54소국 중 하나 이상의 국가가 존재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입증할 수 있는 문헌자료는 남아있지 않고 유적과 유물을 중심으로 추론만 하고 있는 실정이다.
삼국시대보다 앞서 만주와 한반도 북쪽에 고(古)조선(朝鮮)이 존속할때에 한반도 남쪽에는 진국(辰國)이 있었고 그 뒤를 이어 삼한(三韓)이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진국이나 삼한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것이 거의 없으며 겨우 마한(馬韓), 변한(弁韓) 진한(辰韓) 등 삼한의 이름과 그 삼한에 각각 54국 또는 12국씩 속하였다는 80여 소국들의 이름이 전해 올 뿐이다. 삼한 각각의 위치도 분명치가 않아서 학자들마다 주장이 다르며 그 소국의 위치에 대해서는 더욱 많은 주장들이 있다. 그 중 마한은 대체로 지금의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이런 의견이 분분해서 남원과 마한의 관계나 마한의 실체조차도 현재로서는 잘 알 수가 없다.
지리산 기슭, 산내면 달궁리(덕동리)에는 옛성터 하나가 거의 다 망가진 채 남아 있는 바 이 것은 마한 왕이 전란을 피해 와서 쌓은 달궁터라는 전설이 있고 <용성지(龍城誌), 조선 숙종 28년, 서기 1702년>와 <여지도서(輿地圖書), 영조 41년, 1765>에도 그에 관한 기록이 있다.
『황령과 정령은 둘 다 지리산 기슭에 입세에 있으며 몹시 가파르고 험하여 소나 말이 다닐 수 없는 곳인데 거기서 서쪽으로 남원부까지는 50리쯤 된다. 옛 승려 청허당의 황령기 에는 "옛날 한 소제 즉위 3년에 마한의 임금이 진한의 난을 피하여 이 곳에 와서 도성을 쌓았는데 그 때 황, 정 두 장수로 하여금 그 일을 감독하고 고개를 지키게 하였으므로 마침내 두 사람의 성으로 고개 이름을 삼게 되었다. 그 도성을 유지한 것이 71년이었다." 하여 무너진 성과 허물어진 벽이 지금도 남아 있으며 그 도성이었다는 곳을 세상에서는 달궁터라 전한다. 두 고개 안에 있는 긴 골짜기는 중고에는 남원땅이었으나 지금은 운봉에 속한다.』
『달궁은 지리산 향로봉 아래 있으며 무너진 주춧돌과 허물어진 담이 지금껏 남아 있다. 승휴정의 황령기에는 "한 소제 3년에 마한이 진한의 난을 피하여 이 곳에 와서 도성을 쌓았다. 그 때, 황, 정 두 장수로 하여금 그 일을 감독하고 고개를 지키게 하였는데 황령은 황장 이 지킨 곳이요 정령은 정장이 지킨 곳이다. ···"하였으나 어디에 근거를 둔 말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 뒤 달궁에 사람들이 와서 살기 시작하여 촌락이 수십여촌이 형성 되었으나 신해년(영조 7년, 1731)에 한물이 지고 사태가 반야봉에서 무너져 내려와 마을 전체를 덮어 묻어버림으로써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위로부터 향과 축문을 내려 보내여 제사를 지냈다.』
위의 두글에 인용된 <황령기>의 저자는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이름으로 휴정은 그의 법명이요 청허는 서산과 함께 호이다. 위의 <황령기>는 서산대사가 지리산에 공부할 때 들은 달궁 전설을 글로 써서 남긴 것임을 짐작할 수 있는데 다른 뚜렷한 증거가 없는한 달궁 전설은 아직은 전설로만 취급될 수밖에 없다. 다만 전설 속에도 역사의 자취가 깃들어 있기 마련이므로 터무니없이 꾸며낸 것이라고 단정하고 매도할 일은 아니다.
2010년 고고학계는 일제히 남원의 운봉에 주목하였다. 백두대간 동쪽 운봉고원에 속한 남원 월산리 가야계 고총에서 백제왕의 주요 하사품으로 알려진 중국제 청자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또한 신라의 왕릉인 천마총 출토품과 습사한 철제 자루솥, 금제귀걸이, 갑옷 등 당시 가야의 힘을 가늠할 수 있는 다양한 위세품이 출토되었다. 이는 운봉고원이 백제와 가야의 문물교류의 창구 역할을 하며 가야계 소국으로 번성하였음을 반증하는 것인데 이처럼 운봉고원에 지역적인 기반을 둔 토착세력집단을 '운봉가야'라 한다.
운봉가야의 존재가 처음 알려진 것은 1982년의 일이다. 88고속도로공사 구역 내에 위치한 남원월산리 대형무덤에 대한 구제발굴이 실시되었는데 백제의 대형무덤일 것이라는 고고학자들의 예상과는 달리 그 조영주체가 가야로 밝혀지면서 비상한 관심을 끌게 되었다.
경상남도 함양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남원시 아영면과 인월면 일대, 즉 가야계 대형무덤이 자리한 월산리에서 1.7km 떨어진 남원 두락리에도 봉분의 직경이 20m 내외인 40여기의 가야계 고총이 무리지어 있다. 여기에는 직경이 30m 이상 되는 초대형급 무덤도 포함되어 있으며 현재가지 운봉고원 일대에서 발견된 가야계 중대형 고총과 말무덤은 100여기에 달한다. 이처럼 두락리 고분은 대가야의 대표 유적인 고령 지산동 고분군(고분 200여기)이나, 사적512호 경주 대릉원(고분 23기)에 비해 손색없는 규모로서 금관가야나 신라에 버금가는 운봉가야의 막강한 위세를 입증하고 있다.
운봉가야가 가야계 소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교통의 중심지요 전략적 요충지라는 천혜의 지리적 위치와 대규모 철광석 개발에 힘입은 바 크다. 운봉고원은 백두대간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예로부터 신라와 백제의 경계였고 현제에는 전라도와 경상도의 경계가 되고 있는 것이 바로 백두대간이다. 또한 운봉고원에는 대규모 철생산 유적이 밀집되어 있었기 때문에 운봉일대가 철 생산지로 급부상하면서 철을 수출하는 가야의 소국으로 성장한 것으로 추측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地理志)>에는 지금의 남원시,군이 마치 삼국시대 초부터 본래 백제와 신라 두 나라 땅으로 나뉘어 있었던 것처럼 되어 있어 곧 한쪽은 신라 땅으로 모산현(母山縣)이 설치되어 있었고 다른 한쪽은 백제의 고룡군(古龍郡)과 거사물현(居斯勿縣)이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한다.그러한 내용은 그 뒤에 <고려사(考慮史)> 지리지부터 <대동지지(大東地志) >에 이르기까지 조선시대의 모든 지리지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어서 틀림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위의 내용은 정확한 사실이 아니고 삼국시대 말기의 한때의 사실일 뿐이다. 다만 운봉 지역 특히 인월면, 아영면 일대의 고분군에서 가야계로 알려진 유물이 많이 나왔다고 하므로 이 지역이 어떤 식으로든, 단순히 교역을 가졌거나 아니면 그 영역의 일부였거나 간에, 변한 또는 가야와 관계가 있었을 것임은 인정되지만 신라가 삼국시대 초부터 이 곳에 진출했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신라 즉 경주(慶州)와 남원 사이에 가로 놓인 경상남도와 경상북도 일부 지역이 신라 영토로 편입되는 것은 삼국시대 말기의 일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신라는 이 곳을 차지한 뒤에야 소백산맥을 넘어 남원의 운봉 지역에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라 문무왕 때 남원 지역이 신라에 완전 합병되었으며, 신문왕 5년(685) 봄 3월에는 처음으로 남원에다 소경을 설치하고 여러 주와 군의 민가를 옮기어 나누어 살게 하였으며, 신문왕 11년(691) 3월 13일에는 남원성을 쌓았다. 그 뒤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남원소경을 설치하여 전주의 관할 밑에 두었다가 고려 태조 23년(940)에 이르러 남원부로 격하되었다. 이 때에 구례현도 남원부로 편입하게 되었다. 그후 제6대 성종 14년(995)에 전국을 10도로 재개편 하였을 때 남원부는 강남도에 소속되었으며 제8대 현종 9년(1018)에 이루어진 새로운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전국이 8목 15부로 분류하게 될 때에도 남원은 15부 가운데 하나로 남게 되었다. 제26대 충선왕 2년(1310)에 이르러 무슨 이유였는지 모르지만 대방군으로 격하 되었다가 남원군으로 고친 바 있다. 제31대 공민왕 9년(1360)에 다시 남원부로 승격시켰다. 이때부터 남원부의 별호를 용성(龍城)이라 불렀다.
제8대 현종 9년에 강남도와 해양도를 합하여 전라도라 명칭을 붙이고 2목 2부 18군 32현을 두었는데 이들 2목 2부 가운데에는 남원부가 포함되어 있어 전라도의 4대 도시 가운데 하나로 부상하게 되었다.
▲ 만복사지 발굴 당시의 북 금당지와 목탑지 전경
조선시대에 1413년 태종13년 남원도호부로 승격하였으며, 남원도호부는 1부 1군 9현(담양·곡성·창평·구례·순창·임실·무주·진안·장수 등)을 관할하였다.
1457년 남원진영이 설치되어 인근6현(곡성·옥과·구례·창평·장수·운봉)을 관할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시 남원 전투로 12000명의 인명손실을 입고 남원성이 함락되어 직산 전투까지 일본군이 삼남지방을 유린하였다.
▷ 남원성 전투
정유재란시 남원성의 수비는 구원군으로 왔던 양원의 군대에 의해서 전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양원은 5월 21일 서울을 떠나 전주를 거쳐서 6월 13일 남원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양원은 남원성 내에 있는 용성관에 남원성을 지키기 위한 작전 본부를 설치하였다. 이보다 앞서 전주에 도착한 양원은 순찰사에게 모든 읍에 있던 군졸과 군마를 남원성으로 모이게 하라는 지시를 하였다. 이것이 남원성 수비를 위한 양원의 첫 조치였다. 양원이 남원에 도착한 뒤에는 지금까지의 남원성을 지키려는 계획과는 상당히 달라지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명나라 구원군이 오기 전에 조선측에서는 남원성을 방치하면서까지 산성의 방어 계획에만 전념하였다. 그러나 명나라 구원군이 도착한 후 양원이 조선군과 명나라 군대의 지휘권을 장악하게 되면서부터 산성의 수호계획을 파기하고 남원부성의 수호 계획만을 일방적으로 결정 해버린 것이다.
남원성 싸움에 참여한 왜군의 병력은 육군의 좌군 수군으로 총 56,800명이 된다. 이러한 숫자는 조선관군과 명나라 군대의 4,300 - 4,400여명과 비교하면 너무나도 엄청난 차이가 있음 을 알 수 있다. 무기면에서 왜군이 남원성 싸움에 사용한 종류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조총이 주목할만한 것이었다. 이에 비하여 조선 관군과 명나라 군대는 곤봉·활·칼·창으로 무장하였기 때문에 개인 장비면에서 왜군이 훨씬 앞선 당시로는 최신예무기를 소유하였다.
남원성의 함락으로 충청도와 전라도가 붕괴되었고 서울까지 민심이 동요되어 세자와 중전이 피난길에 오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와 같이 남원성 싸움은 남원 지방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조선 전체가 붕괴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던 매우 중요한 싸움이었다.
1654년 전라좌영이 설치되었다.
1895년 6월 23일(음력 윤 5월 1일) 전국의 행정체계가 23부로 개편되면서 이전 전라도 서부지역을 관할하는 남원부가 설치되어 그 치소가 되었다. 본래의 남원부는 군(郡)이 되었고 남원군을 포함해 16군을 관할하였다.
1896년 8월 4일 13도제로 환원되어 남원부가 전라남,북도로 분할 편입되었다. 남원군은 전라북도에 편입되었다.
1906년 지사면·둔남면 등이 임실군으로 편입되었다.
1910년 관할의 48방(坊)을 22개 면으로 통폐합하였다.
1911년 일부지역이 순창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4월 1일 남원군, 운봉군을 남원군으로 통폐합하였다.
1935년 3월 1일 대산면 일부를 순창군에, 남원읍 금성리를 대산면에, 주천면 노암리를 남원읍에 편입하고, 흑송면·두동면을 송동면으로 합면하였다.(1읍 17면)
1956년 7월 8일 왕치면(王峙面)을 남원읍에 합면하였다.(1읍 16면)
1981년 7월 1일 남원읍 일원을 관할로 남원시가 설치되었다.(16면)
1983년 2월 15일 주천면 신촌리·어현리를 남원시에 편입하고, 덕과면 금암리를 임실군 둔남면(현 오수면)에 편입하였다.
1995년 1월 1일 남원시 일원과 남원군 일원을 관할로 도농복합형태의 남원시가 설치되었다.(16면 9행정동)
1995년 3월 2일 운봉면을 운봉읍으로 승격하였다.(1읍 15면 9행정동)
1998년 5월 1일 동면을 인월면으로 개칭하였다.
1998년 9월 22일 쌍교동을 폐지하고, 용정동을 향교동에 합동하였다.(1읍 15면 7행정동)
『 탐방한 남원군의 문화재들 』
● 실상사 백장암
국보 제10호 남원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南原 實相寺 百丈庵 三層石塔)
보물 제40호 남원 실상사 백장암 석등(南原 實相寺 百丈庵 石燈)
보물 제420호 백장암 청동은입사향로(百丈庵 靑銅銀入絲香爐)
전라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66호 백장암 보살좌상
전라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211호 백장암 소장 범종(百丈庵 所藏 梵鍾)
● 실상사
사적 제309호 남원 실상사(南原 實相寺)
보물 제33호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南原 實相寺 秀澈和尙塔)
보물 제34호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비(南原 實相寺 秀澈和尙塔碑)
보물 제35호 남원 실상사 석등(南原 實相寺 石燈)
보물 제36호 남원 실상사 승탑(南原 實相寺 僧塔)
보물 제37호 남원 실상사 동ㆍ서 삼층석탑(南原 實相寺 東ㆍ西 三層石塔)
보물 제38호 남원 실상사 증각대사탑(南原 實相寺 證覺大師塔)
보물 제39호 남원 실상사 증각대사탑비(南原 實相寺 證覺大師塔碑)
보물 제41호 남원 실상사 철조여래좌상(南原 實相寺 鐵造如來坐像)
중요민속문화재 제15호 남원 실상사 석장승(南原 實相寺 石長栍)
전라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45호 실상사 극락전(實相寺 極樂殿)
전라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88호 실상사 위토개량성책(實相寺 位土改量成冊)
전라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37호 실상사 동종(實相寺 銅鐘)
●용담사
보물 제42호 남원 용담사지 석조여래입상(南原 龍潭寺址 石造如來立像)
전라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1호 용담사 칠층석탑(龍潭寺七層石塔)
●광한루원
명승 제33호 광한루원(廣寒樓苑)
보물 제281호 남원 광한루(南原 廣寒樓)
●만복사지
사적 제349호 남원 만복사지(南原 萬福寺址)
보물 제30호 남원 만복사지 오층석탑(南原 萬福寺址 五層石塔)
보물 제31호 남원 만복사지 석조대좌(南原 萬福寺址 石造臺座)
보물 제32호 남원 만복사지 당간지주(南原 萬福寺址 幢竿支柱)
보물 제43호 남원 만복사지 석조여래입상(南原 萬福寺址 石造如來立像)
【 일 정 표 】2015년 8월 6일(목)-7일(금) 1박2일
◈ 첫째날(8/6) : 실상사 백장암-실상사-정령치-용담사
◈ 둘째날(8/7) : 광한루원-만복사지
여름 휴가를 대신하여 찾은 이번 남원 여행의 원 계획은 '지리산둘레길' 남원 구간을 탐방하는 것이었으나, 너무나 무더운 날씨 탓에 계획을 변경하여 국가지정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남원지역의 관광명소를 찾게 되었다.
남원은 이미 서너 차례 방문을 하였으나 지리산둘레길 탐방, 바래봉 철쭉산행, 그리고 대표적인 명소인 광한루원을 탐방하는 것으로 이루어졌었기 때문에 갑자기 변경한 계획이지만 제대로 문화재를 탐방해 보는 기회로 삼아 실시를 하였다.
이번 남원 여행에서 탐방하였던 관광명소들 중 광한루원을 내가 찾은 관광명소 '호남권'에 소개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내가 찾은 관광명소 '명찰을 찾아서'에 아래와 같이 소개를 하며, 단 실상사는 문화유적이 많은 관계로 제1,2부로 나누는 등 총 6편으로 나누어 소개를 하기로 한다.
- 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이 전해지는 천년고찰! 실상사 백장암(實相寺 百丈庵)
- 천 년의 세월을 버티며 들판 한 가운데 자리한 사찰! 실상사(實相寺) 제1부
- 천 년의 세월을 버티며 들판 한 가운데 자리한 사찰! 실상사(實相寺) 제2부
- 천년의 향기를 느끼는 사찰! 용담사(龍潭寺)
- 조선시대 지방관아의 대표적인 관아정원! 광한루원(廣寒樓苑)
-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 '만복사저포기'의 무대! 만복사지(萬福寺址)
◈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 '만복사저포기'의 무대! 만복사지(萬福寺址) ◈
『 남원 만복사지(萬福寺址) 소개 』
*사적 제349호(1991년03월30일)
*수량/면적:39,269㎡
*소재지:전북 남원시 왕정동 489번지
기린산을 북쪽에 두고 남쪽으로 넓은 평야를 둔 야산에 위치한 만복사터는 고려 문종(재위 1046∼1083) 때 지어진 것으로 전한다.
5층과 2층으로 된 불상을 모시는 법당이 있었고, 그 안에는 높이 35척(약 10m)의 불상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에는 대웅전을 비롯한 많은 건물들과 수백 명의 승려들이 머무는 큰 절이었으나 정유재란(1597)때 남원성이 함락되면서 불타 버렸다고 한다.
발굴조사시 많은 건물의 흔적을 찾았으며 청자와 백자, 많은 기와가 출토되어 고려시대 미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5층석탑(보물 제30호)·불상좌대(보물 제31호)·당간지주(보물 제32호)·석불입상(보물 제43호)등이 현재 절터 내에 남아있다.
고구려식의 절 배치를 따르고 있으며,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절중에 하나로 의의가 크다.
♧ ♧ 남원 만복사지 오층석탑(南原 萬福寺址 五層石塔)
*보물 제30호(1963년01월21일 지정)
*소재지:전라북도 남원시 왕정동 481-1번지
고려시대에 승려 도선이 창건하였다고 전하는 만복사의 옛터에 서 있는 탑이다. 원래 이곳에는 절터 중앙에 목탑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1979년부터 1985년까지 7차에 걸친 발굴조사로 많은 건물지와 다수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현재 탑은 4층까지만 남아있고, 5층 이상은 모두 없어졌다.
▲ 만복사지 오층석탑의 탑신부(사진 上)와 기단부(사진 下)
탑의 받침대 역할을 하고 있는 기단부(基壇部)는 땅에 파묻혀 있는데, 이는 훗날 이 지역의 땅바닥이 높아졌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탑신부의 1층 몸돌은 대단히 높고 2층 이상은 약 3분의 1로 크기가 줄어 들었다.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고, 지붕돌은 밑면 전체가 위로 들려 있어, 마치 목조건축의 지붕을 보고 있는 듯하다.
특이한 점은 각 지붕돌 위에 몸돌을 괴기 위한 별도의 네모난 돌이 끼워져 있는 것으로, 당대 석탑의 특징을 보여주는 한 예이다.
이 탑은 고려 문종 때인 11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1968년 이 탑을 보수하다가 탑신의 1층 몸돌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 ♧ 남원 만복사지 석조대좌(南原 萬福寺址 石造臺座)
*보물 제31호(1963년01월21일 지정)
*소재지:전라북도 남원시 왕정동 494-11번지
만복사는 고려시대의 승려 도선이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불상을 올려놓는 받침인 석좌는 절 안에 위치하고 있다. 이 석좌는 거대한 하나의 돌로 상·중·하대를 조각하였는데 육각형으로 조각한 것이 특이하다.
▲ 석조대좌 상대 윗면의 불상을 고정하기 위한 네모난 구멍
하대는 각 측면에 안상(眼象)을 새기고, 그 안에 꽃을 장식했으며, 윗면에는 연꽃모양을 조각하였다. 중대는 낮으며, 짧은 기둥을 본떠 새겼다. 상대는 중대보다 넓어지고, 평평한 윗면 중앙에 불상을 끼웠던 것으로 보이는 네모진 구멍이 뚫려 있다. 옆면에 연꽃이 새겨졌던 부분은 주변 전체가 파손되었다.
이 작품은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8각형에서 벗어난 6각형이며, 안상 안에 꽃을 장식한 것은 고려시대에 유행한 양식으로, 11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 ♧ 남원 만복사지 당간지주(南原 萬福寺址 幢竿支柱)
*보물 제32호(1963년01월21일 지정)
*소재지:전라북도 남원시 남문로 325-5(왕정동)
절에 행사가 있을때 절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고 하며, 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 깃대를 고정시켜던 당간지주의 구멍
이 당간지주는 만복사터에 동·서로 마주보고 서 있으며, 지주사이에 세웠던 깃대는 남아있지 않고 이를 고정시켰던 구멍이 세 군데에 뚫려 있다. 현재 아래부분과 기단이 땅속에 파묻혀 있어 그 이하의 구조는 알 수 없다.
두 지주 각 면이 고르지 못하여 전체적으로 투박하고 별다른 장식이 없으며, 전체적으로 생략화·단순화된 것으로 보아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 ♧ 남원 만복사지 석조여래입상(南原 萬福寺址 石造如來立像)
*보물 제43호(1963년01월21일 지정)
*소재지:전라북도 남원시 왕정동 482-1번지
전라북도 남원시 만복사 절터에 서 있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높이 2m의 불상이다. 만복사는 고려 문종(재위 1046∼1083) 때 창건된 사찰이고, 이 석조여래입상도 창건 때 같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동국여지승람』 에 의하면 만복사에는 동쪽에 5층의 전각, 서쪽에 2층의 전각이 있고 그 안에 35척(尺)의 금동불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런 기록으로 보아 만복사가 매우 큰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 석조여래입상 상반신과 머리 광배(사진 上)
석조여래입상 손목부분과 홈(사진 下)
민머리의 정수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둥글게 솟아 있다. 살이 오른 타원형의 얼굴은 눈·코·입의 자연스러운 표현과 함께 원만한 인상을 보여준다. 어깨에서 팔로 내려오는 곡선, 몸의 굴곡 등도 아주 원만하고 부드럽게 표현되어 있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에는 둥근 칼라와 같은 독특한 옷깃의 접힘이 있으며, 그 아래에는 둥근 옷주름이 표현되어 있다. 오른팔은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왼팔은 아래로 내려서 역시 손바닥을 보이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손은 따로 끼울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는데 지금은 모두 없어진 상태이다.
▲ 석조여래입상 광배 뒷면의 음각된 여래입상(사진 上)
석조여래입상 상대석과 하대석(사진 下)
광배(光背)는 머리광배와 몸광배로 이루어져 있으며 굵은 선으로 구분되고 있다. 윗부분이 없어진 머리광배에는 활짝 핀 연꽃잎과 연꽃줄기가 새겨져 있고, 몸광배에는 연꽃줄기만이 새겨져 있다. 이들의 바깥에는 불꽃무늬가 조각되어 있고, 좌우에는 각각 2구씩의 작은 부처가 들어 있다.
남원 만복사지 석조여래입상은 얼굴이나 몸 등에서 매우 원만하고 부드러운 성격이 드러나 있지만 옷주름이나 몸의 자세는 다소 부자연스러운 면이 보인다.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고려시대로 접어들면서 쇠퇴해가는 불상 양식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 석조여래입상을 보관하고 있는 전각
♧ 만복사지 석인상
당간지주에서 남쪽으로 4km 떨어진 곳에 2기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는데, 도로변에 노출되어 있어 서고 위험이 높은 1기의 석인상을 이곳으로 옮겼다.
석인상의 형태는 사각형의 돌기둥에 3개의 면만을 사용하여 사람 형상을 조각하고 나머지 한 면은 편평하게 다듬었다. 다듬은 면에는 두 개의 구멍이 확인되는데, 위쪽 구멍은 머리 정상부에서 아래쪽으로 122cm, 두번째 구멍은 318cm 내려온 곳에 있다.
▲ 석인상(정면)
▲ 석인상의 측면(사진 左)과 후면(사진 右) 모습
석인상의 머리부는 정상부가 둥글고 볼록하게 솟아 있으며, 얼굴은 안구를 심하게 돌출시켜 분노의 모습을 띠고 있다.
몸통부는 상반신에 못을 걸치지 않은 반나체이며, 오른손은 완잔히 구부려 주먹에는 그 성격이 불분명한 물건을 쥐고 있다. 군의는 허리 부분에서 묶어 상단부 옷자락이 밖으로 뒤집혀 늘어 뜨렸으며, 옷주름은 굵은 물결무늬로 선명하게 돌출시켰다.
하반신은 수직으로 늘어뜨린 옷주름에 가려졌고, 다리 부분은 간략하게 표현되었다. 다리의 아래쪽은 대좌를 사용하지 않고 사각형의 돌기둥을 뾰족하게 다듬었다.
석인상의 전체 높이는 550cm이며, 머리 위에서 다리 끝까지의 길이는 370cm 내외이다.
♧ 만복사지 석등대석(石燈臺石)
목탑지 중앙에서 12.1m 남쪽 지점, 즉 중문지와 목탑지의 가운데 지점에 위치한다.
1개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동서 120cm, 남북 115cm 아래 부분을 정방향으로 만든 뒤 그 위에 일변 43cm 크기의 팔각을 돌출 구획하고 가변에 복엽연화문을 양각하였다. 상면 가운데 당간지주를 끼우기 위해 직경 20cm의 구멍을 파 놓았다.
연화문의 조각기법으로 보아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만복사 창건 당시부터 이곳에 위치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 만복사지에서 발견된 기타 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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