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은 관광명소/명찰을 찾아서

(전북 남원)천 년의 세월을 버티며 들판 한 가운데 자리한 사찰! 실상사 제1부

왕마구리 2015. 9. 26. 22:28

◀ 전북 남원 실상사(南原 實相寺) ▶

천 년의 세월을 버티며 들판 한 가운데 자리한 사찰!!!

신라 구산선문 중 최초의 선종사찰!!!

 

「 전북 남원(全北 南原) 소개 」

한반도의 서남부 내륙, 전라북도의 동남부 소백산맥 서사면의 넓은 분지에 위치하며, 시의 동남쪽은 지리산의 주 능선을 경계로 경남 하동군 및 전남 구례군과 북동부는 경남 함양군과 접하고, 서쪽은 임실군·순창군, 그리고 북쪽은 장수군과 인접하고 남쪽의 일부는 섬진강을 경계로 전남곡성과 접하고 있다.

지리적으로 전라남도·경상남도와 접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는 남원시는 88고속도로, 순천-완주 고속도로 와 전라선 철도, 그리고 3개 국도노선(17, 19, 24호)이 통과하며 호남과 영남을 연결하는 내륙의 관문이자 문화적·경제적 접촉지대이다.

노령산맥과 소백산맥 사이의 중산지인 남원시 지형은 크게 산지, 고원, 구릉, 평야로 구분된다. 산지는 남동부의 지리산지, 천황산(909m) 중심이 북부의 보절산지, 교룡산(518m) 중심의 대강산지로 구분되며, 고원은 보절산지의 서사면, 대강산지의 동사면 및 운봉읍을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고 평야는 섬진강 지류인 요천을 끼고 좁고 길다랗게 분포된 남원평야와 운봉 · 아영 · 인월에 분포된 운봉평야, 율천 주변의 충적지인 보절평야로 구분되며, 구릉지는 산지주변 및 남원 · 운봉평야 주변에 분포하고 있으며, 밭, 과수원 등으로 이용되고 있으나 토지이용도는 낮은 편이다.

동서간 거리 44.7km, 남북간 거리 28.6km의 남원시는 동남단 산간 대분지에 위치하여 내륙성 기후대에 속하므로 대체적으로 온화한 기후를 보이고 있으며, 동계에는 대륙성 고기압의 영향으로 추운날이 많고 하계에는 아열대 저기압 및 지리산의 영향으로 다우지역에 속하며 고원에 위치한 인월(아영) 지역은 산간지역으로 아한대성 기후 성향을 보인다.

최근 10년간(2003~2012) 평균기온은 12.3℃, 평균최고기온 19.0℃, 평균최저기온은 6.7℃이었으며, 기간 중 최고로 기온이 높았던 날은 37.0℃('05.07.23), 최저로 기온이 낮았던 날은 –19.3℃('05.12.18) 이었다. 또한, 연 강수량은 1,432.6mm, 강수일수는 117.7일 이었다.

 

                      ▲ 실상사 경내 전경

 

「남원의역사」

지금까지의 자료를 보면 남원에 인간이 살기 시작한 것은 청동기 이후로 추측된다. 구석기와 신석기 유적은 확인된 바 없지만 앞으로 발견될 가능성이 크다. 남원의 대표적인 청동기 유적에는 지석묘가 있다. 한반도에서 지석묘는 청동기-철기시대에 사용되던 것이어서 이러한 지석묘들이 철기시대의 것일 수도 있지만 지석묘 이외에도 청동기 시대에 속할 것으로 보이는 유물 산포지가 자리 하고 있어 지석묘 중에는 청동기시대에 속하는 것도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원지역에서는 지석묘의 하부조사가 이루어진 예가 없어 그 구조와 시기를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분포와 입지, 외부관찰사항을 중심으로 다음과 같은 점을 파악할 수 있다.

상석의 방향이 주변의 강이나 개천의 흐름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지석묘 축조인들은 주변의 자연환경에 대하여 이전 단계 사람들보다 많은 관심과 관찰을 하였다.

상석의 크기로 당시 집단의 500-800명의 인구를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청동기의 유물로 추정되는 암각화가 1991년 6월에 발견되었으며 이것은 선사시대인에게 보편적인 태양숭배사상과 관련되는 원시신앙의 존재를 입증한다. 청동기 이후시대는 여러 주장이 있으나 삼한시대로 파악하고자 한다.삼한에는 마한, 진한, 변한이 있었고 각각에 다시 작은 나라들이 있었으며 남원 지역에도 마한 54소국 중 하나 이상의 국가가 존재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입증할 수 있는 문헌자료는 남아있지 않고 유적과 유물을 중심으로 추론만 하고 있는 실정이다.

삼국시대보다 앞서 만주와 한반도 북쪽에 고(古)조선(朝鮮)이 존속할때에 한반도 남쪽에는 진국(辰國)이 있었고 그 뒤를 이어 삼한(三韓)이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진국이나 삼한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것이 거의 없으며 겨우 마한(馬韓), 변한(弁韓) 진한(辰韓) 등 삼한의 이름과 그 삼한에 각각 54국 또는 12국씩 속하였다는 80여 소국들의 이름이 전해 올 뿐이다. 삼한 각각의 위치도 분명치가 않아서 학자들마다 주장이 다르며 그 소국의 위치에 대해서는 더욱 많은 주장들이 있다. 그 중 마한은 대체로 지금의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이런 의견이 분분해서 남원과 마한의 관계나 마한의 실체조차도 현재로서는 잘 알 수가 없다.

 

                      ▲ 실상사 동·서 삼층석탑과 석등

 

지리산 기슭, 산내면 달궁리(덕동리)에는 옛성터 하나가 거의 다 망가진 채 남아 있는 바 이 것은 마한 왕이 전란을 피해 와서 쌓은 달궁터라는 전설이 있고 <용성지(龍城誌), 조선 숙종 28년, 서기 1702년>와 <여지도서(輿地圖書), 영조 41년, 1765>에도 그에 관한 기록이 있다.

『황령과 정령은 둘 다 지리산 기슭에 입세에 있으며 몹시 가파르고 험하여 소나 말이 다닐 수 없는 곳인데 거기서 서쪽으로 남원부까지는 50리쯤 된다. 옛 승려 청허당의 황령기 에는 "옛날 한 소제 즉위 3년에 마한의 임금이 진한의 난을 피하여 이 곳에 와서 도성을 쌓았는데 그 때 황, 정 두 장수로 하여금 그 일을 감독하고 고개를 지키게 하였으므로 마침내 두 사람의 성으로 고개 이름을 삼게 되었다. 그 도성을 유지한 것이 71년이었다." 하여 무너진 성과 허물어진 벽이 지금도 남아 있으며 그 도성이었다는 곳을 세상에서는 달궁터라 전한다. 두 고개 안에 있는 긴 골짜기는 중고에는 남원땅이었으나 지금은 운봉에 속한다.』

『달궁은 지리산 향로봉 아래 있으며 무너진 주춧돌과 허물어진 담이 지금껏 남아 있다. 승휴정의 황령기에는 "한 소제 3년에 마한이 진한의 난을 피하여 이 곳에 와서 도성을 쌓았다. 그 때, 황, 정 두 장수로 하여금 그 일을 감독하고 고개를 지키게 하였는데 황령은 황장 이 지킨 곳이요 정령은 정장이 지킨 곳이다. ···"하였으나 어디에 근거를 둔 말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 뒤 달궁에 사람들이 와서 살기 시작하여 촌락이 수십여촌이 형성 되었으나 신해년(영조 7년, 1731)에 한물이 지고 사태가 반야봉에서 무너져 내려와 마을 전체를 덮어 묻어버림으로써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위로부터 향과 축문을 내려 보내여 제사를 지냈다.』

위의 두글에 인용된 <황령기>의 저자는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이름으로 휴정은 그의 법명이요 청허는 서산과 함께 호이다. 위의 <황령기>는 서산대사가 지리산에 공부할 때 들은 달궁 전설을 글로 써서 남긴 것임을 짐작할 수 있는데 다른 뚜렷한 증거가 없는한 달궁 전설은 아직은 전설로만 취급될 수밖에 없다. 다만 전설 속에도 역사의 자취가 깃들어 있기 마련이므로 터무니없이 꾸며낸 것이라고 단정하고 매도할 일은 아니다.

2010년 고고학계는 일제히 남원의 운봉에 주목하였다. 백두대간 동쪽 운봉고원에 속한 남원 월산리 가야계 고총에서 백제왕의 주요 하사품으로 알려진 중국제 청자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또한 신라의 왕릉인 천마총 출토품과 습사한 철제 자루솥, 금제귀걸이, 갑옷 등 당시 가야의 힘을 가늠할 수 있는 다양한 위세품이 출토되었다. 이는 운봉고원이 백제와 가야의 문물교류의 창구 역할을 하며 가야계 소국으로 번성하였음을 반증하는 것인데 이처럼 운봉고원에 지역적인 기반을 둔 토착세력집단을 '운봉가야'라 한다.

운봉가야의 존재가 처음 알려진 것은 1982년의 일이다. 88고속도로공사 구역 내에 위치한 남원월산리 대형무덤에 대한 구제발굴이 실시되었는데 백제의 대형무덤일 것이라는 고고학자들의 예상과는 달리 그 조영주체가 가야로 밝혀지면서 비상한 관심을 끌게 되었다.

경상남도 함양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남원시 아영면과 인월면 일대, 즉 가야계 대형무덤이 자리한 월산리에서 1.7km 떨어진 남원 두락리에도 봉분의 직경이 20m 내외인 40여기의 가야계 고총이 무리지어 있다. 여기에는 직경이 30m 이상 되는 초대형급 무덤도 포함되어 있으며 현재가지 운봉고원 일대에서 발견된 가야계 중대형 고총과 말무덤은 100여기에 달한다. 이처럼 두락리 고분은 대가야의 대표 유적인 고령 지산동 고분군(고분 200여기)이나, 사적512호 경주 대릉원(고분 23기)에 비해 손색없는 규모로서 금관가야나 신라에 버금가는 운봉가야의 막강한 위세를 입증하고 있다.

운봉가야가 가야계 소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교통의 중심지요 전략적 요충지라는 천혜의 지리적 위치와 대규모 철광석 개발에 힘입은 바 크다. 운봉고원은 백두대간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예로부터 신라와 백제의 경계였고 현제에는 전라도와 경상도의 경계가 되고 있는 것이 바로 백두대간이다. 또한 운봉고원에는 대규모 철생산 유적이 밀집되어 있었기 때문에 운봉일대가 철 생산지로 급부상하면서 철을 수출하는 가야의 소국으로 성장한 것으로 추측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地理志)>에는 지금의 남원시,군이 마치 삼국시대 초부터 본래 백제와 신라 두 나라 땅으로 나뉘어 있었던 것처럼 되어 있어 곧 한쪽은 신라 땅으로 모산현(母山縣)이 설치되어 있었고 다른 한쪽은 백제의 고룡군(古龍郡)과 거사물현(居斯勿縣)이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한다.그러한 내용은 그 뒤에 <고려사(考慮史)> 지리지부터 <대동지지(大東地志) >에 이르기까지 조선시대의 모든 지리지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어서 틀림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위의 내용은 정확한 사실이 아니고 삼국시대 말기의 한때의 사실일 뿐이다. 다만 운봉 지역 특히 인월면, 아영면 일대의 고분군에서 가야계로 알려진 유물이 많이 나왔다고 하므로 이 지역이 어떤 식으로든, 단순히 교역을 가졌거나 아니면 그 영역의 일부였거나 간에, 변한 또는 가야와 관계가 있었을 것임은 인정되지만 신라가 삼국시대 초부터 이 곳에 진출했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신라 즉 경주(慶州)와 남원 사이에 가로 놓인 경상남도와 경상북도 일부 지역이 신라 영토로 편입되는 것은 삼국시대 말기의 일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신라는 이 곳을 차지한 뒤에야 소백산맥을 넘어 남원의 운봉 지역에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라 문무왕 때 남원 지역이 신라에 완전 합병되었으며, 신문왕 5년(685) 봄 3월에는 처음으로 남원에다 소경을 설치하고 여러 주와 군의 민가를 옮기어 나누어 살게 하였으며, 신문왕 11년(691) 3월 13일에는 남원성을 쌓았다. 그 뒤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남원소경을 설치하여 전주의 관할 밑에 두었다가 고려 태조 23년(940)에 이르러 남원부로 격하되었다. 이 때에 구례현도 남원부로 편입하게 되었다. 그후 제6대 성종 14년(995)에 전국을 10도로 재개편 하였을 때 남원부는 강남도에 소속되었으며 제8대 현종 9년(1018)에 이루어진 새로운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전국이 8목 15부로 분류하게 될 때에도 남원은 15부 가운데 하나로 남게 되었다. 제26대 충선왕 2년(1310)에 이르러 무슨 이유였는지 모르지만 대방군으로 격하 되었다가 남원군으로 고친 바 있다. 제31대 공민왕 9년(1360)에 다시 남원부로 승격시켰다. 이때부터 남원부의 별호를 용성(龍城)이라 불렀다.

제8대 현종 9년에 강남도와 해양도를 합하여 전라도라 명칭을 붙이고 2목 2부 18군 32현을 두었는데 이들 2목 2부 가운데에는 남원부가 포함되어 있어 전라도의 4대 도시 가운데 하나로 부상하게 되었다.

 

                      ▲ 실상사 보광전 앞에 위치해 있는 동·서 삼층석탑과 석등 전경

 

조선시대에 1413년 태종13년 남원도호부로 승격하였으며, 남원도호부는 1부 1군 9현(담양·곡성·창평·구례·순창·임실·무주·진안·장수 등)을 관할하였다.

1457년 남원진영이 설치되어 인근6현(곡성·옥과·구례·창평·장수·운봉)을 관할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시 남원 전투로 12000명의 인명손실을 입고 남원성이 함락되어 직산 전투까지 일본군이 삼남지방을 유린하였다.

 

▷ 남원성 전투

정유재란시 남원성의 수비는 구원군으로 왔던 양원의 군대에 의해서 전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양원은 5월 21일 서울을 떠나 전주를 거쳐서 6월 13일 남원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양원은 남원성 내에 있는 용성관에 남원성을 지키기 위한 작전 본부를 설치하였다. 이보다 앞서 전주에 도착한 양원은 순찰사에게 모든 읍에 있던 군졸과 군마를 남원성으로 모이게 하라는 지시를 하였다. 이것이 남원성 수비를 위한 양원의 첫 조치였다. 양원이 남원에 도착한 뒤에는 지금까지의 남원성을 지키려는 계획과는 상당히 달라지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명나라 구원군이 오기 전에 조선측에서는 남원성을 방치하면서까지 산성의 방어 계획에만 전념하였다. 그러나 명나라 구원군이 도착한 후 양원이 조선군과 명나라 군대의 지휘권을 장악하게 되면서부터 산성의 수호계획을 파기하고 남원부성의 수호 계획만을 일방적으로 결정 해버린 것이다.

남원성 싸움에 참여한 왜군의 병력은 육군의 좌군 수군으로 총 56,800명이 된다. 이러한 숫자는 조선관군과 명나라 군대의 4,300 - 4,400여명과 비교하면 너무나도 엄청난 차이가 있음 을 알 수 있다. 무기면에서 왜군이 남원성 싸움에 사용한 종류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조총이 주목할만한 것이었다. 이에 비하여 조선 관군과 명나라 군대는 곤봉·활·칼·창으로 무장하였기 때문에 개인 장비면에서 왜군이 훨씬 앞선 당시로는 최신예무기를 소유하였다.

남원성의 함락으로 충청도와 전라도가 붕괴되었고 서울까지 민심이 동요되어 세자와 중전이 피난길에 오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와 같이 남원성 싸움은 남원 지방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조선 전체가 붕괴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던 매우 중요한 싸움이었다.

 

                      ▲ 실상사로 들어가는 해탈교 건너 석장승 2기가 있는 삼거리

 

1654년 전라좌영이 설치되었다.

1895년 6월 23일(음력 윤 5월 1일) 전국의 행정체계가 23부로 개편되면서 이전 전라도 서부지역을 관할하는 남원부가 설치되어 그 치소가 되었다. 본래의 남원부는 군(郡)이 되었고 남원군을 포함해 16군을 관할하였다.

1896년 8월 4일 13도제로 환원되어 남원부가 전라남,북도로 분할 편입되었다. 남원군은 전라북도에 편입되었다.

1906년 지사면·둔남면 등이 임실군으로 편입되었다.

1910년 관할의 48방(坊)을 22개 면으로 통폐합하였다.

1911년 일부지역이 순창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4월 1일 남원군, 운봉군을 남원군으로 통폐합하였다.

1935년 3월 1일 대산면 일부를 순창군에, 남원읍 금성리를 대산면에, 주천면 노암리를 남원읍에 편입하고, 흑송면·두동면을 송동면으로 합면하였다.(1읍 17면)

1956년 7월 8일 왕치면(王峙面)을 남원읍에 합면하였다.(1읍 16면)

1981년 7월 1일 남원읍 일원을 관할로 남원시가 설치되었다.(16면)

1983년 2월 15일 주천면 신촌리·어현리를 남원시에 편입하고, 덕과면 금암리를 임실군 둔남면(현 오수면)에 편입하였다.

1995년 1월 1일 남원시 일원과 남원군 일원을 관할로 도농복합형태의 남원시가 설치되었다.(16면 9행정동)

1995년 3월 2일 운봉면을 운봉읍으로 승격하였다.(1읍 15면 9행정동)

1998년 5월 1일 동면을 인월면으로 개칭하였다.

1998년 9월 22일 쌍교동을 폐지하고, 용정동을 향교동에 합동하였다.(1읍 15면 7행정동)

 

                      ▲ 실상사 옛 해우소였던 '변소화랑'

 

『 탐방한 남원군의 문화재들 』

● 실상사 백장암

국보 제10호 남원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南原 實相寺 百丈庵 三層石塔)

보물 제40호 남원 실상사 백장암 석등(南原 實相寺 百丈庵 石燈)

보물 제420호 백장암 청동은입사향로(百丈庵 靑銅銀入絲香爐)

전라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66호 백장암 보살좌상

전라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211호 백장암 소장 범종(百丈庵 所藏梵鍾)

● 실상사

사적 제309호 남원 실상사(南原 實相寺)

보물 제33호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南原 實相寺 秀澈和尙塔)

보물 제34호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비(南原 實相寺 秀澈和尙塔碑)

보물 제35호 남원 실상사 석등(南原 實相寺 石燈)

보물 제36호 남원 실상사 승탑(南原 實相寺 僧塔)

보물 제37호 남원 실상사 동ㆍ서 삼층석탑(南原 實相寺 東ㆍ西 三層石塔)

보물 제38호 남원 실상사 증각대사탑(南原 實相寺 證覺大師塔)

보물 제39호 남원 실상사 증각대사탑비(南原 實相寺 證覺大師塔碑)

보물 제41호 남원 실상사 철조여래좌상(南原 實相寺 鐵造如來坐像)

중요민속문화재 제15호 남원 실상사 석장승(南原 實相寺 石長栍)

전라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45호 실상사 극락전(實相寺 極樂殿)

전라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88호 실상사 위토개량성책(實相寺 位土改量成冊)

전라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37호 실상사 동종(實相寺 銅鐘)

●용담사

보물 제42호 남원 용담사지 석조여래입상(南原 龍潭寺址 石造如來立像)

전라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1호 용담사 칠층석탑(龍潭寺七層石塔)

●광한루원

명승 제33호 광한루원(廣寒樓苑)

보물 제281호 남원 광한루(南原 廣寒樓)

●만복사지

사적 제349호 남원 만복사지(南原 萬福寺址)

보물 제30호 남원 만복사지 오층석탑(南原 萬福寺址 五層石塔)

보물 제31호 남원 만복사지 석조대좌(南原 萬福寺址 石造臺座)

보물 제32호 남원 만복사지 당간지주(南原 萬福寺址 幢竿支柱)

보물 제43호 남원 만복사지 석조여래입상(南原 萬福寺址 石造如來立像)

 

【 일 정 표 】2015년 8월 6일(목)-7일(금) 1박2일

                             ◈ 첫째날(8/6) : 실상사 백장암-실상사-정령치-용담사

                             ◈ 둘째날(8/7) : 광한루원-만복사지

 

여름 휴가를 대신하여 찾은 이번 남원 여행의 원 계획은 '지리산둘레길' 남원 구간을 탐방하는 것이었으나, 너무나 무더운 날씨 탓에 계획을 변경하여 국가지정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남원지역의 관광명소를 찾게 되었다.

남원은 이미 서너 차례 방문을 하였으나 지리산둘레길 탐방, 바래봉 철쭉산행, 그리고 대표적인 명소인 광한루원을 탐방하는 것으로 이루어졌었기 때문에 갑자기 변경한 계획이지만 제대로 문화재를 탐방해 보는 기회로 삼아 실시를 하였다.

 

이번 남원 여행에서 탐방하였던 관광명소들 중 광한루원을 내가 찾은 관광명소 '호남권'에 소개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내가 찾은 관광명소 '명찰을 찾아서'에 아래와 같이 소개를 하며, 단 실상사는 문화유적이 많은 관계로 제1,2부로 나누는 등 총 6편으로 나누어 소개를 하기로 한다.

 

- 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이 전해지는 천년고찰! 실상사 백장암(實相寺 百丈庵)

- 천 년의 세월을 버티며 들판 한 가운데 자리한 사찰! 실상사(實相寺) 제1부

- 천 년의 세월을 버티며 들판 한 가운데 자리한 사찰! 실상사(實相寺) 제2부

- 천년의 향기를 느끼는 사찰! 용담사(龍潭寺)

- 조선시대 지방관아의 대표적인 관아정원! 광한루원(廣寒樓苑)

-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 '만복사저포기'의 무대! 만복사지(萬福寺址)

 

『 남원 실상사(實相寺) 소개 』

*사적 제309호(1984년10월19일 지정)

*수량/면적:278,989㎡

*소재지:전북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33-3번지 외

실상사와 백장암 약수암을 포함한 일대로서 지리산 북쪽 기슭에 지리산 자락이 감싸 안은 듯 평화롭고 풍요로운 고을 남원시 산내면에 천년 고찰 실상사(實相寺)가 있다.

지리산의 북쪽 관문인 인월에서 심원, 달궁, 뱀사골 방면으로 향하다 보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왼쪽 마천방면으로 가다 보면 만수천(萬壽川)변에 호국사찰로 천 년의 세월을 버티고 지내온 실상사가 나타난다.

 

 

                      ▲ 실상사 입구를 흐르는 지리산 반선계곡 물이 만들어낸 만수천

                         실상사로 들어가는 만수천을 가로지르는 '해탈교' 위에서 바라본 전경

 

만수천과 뱀사골 방면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만나는 지점이 산내면 면소재지, 즉 인월에서 뱀사골 방면으로 가다 보면 나타나는 삼거리 부근이다. 이 삼거리에서 동쪽을 향해보면 천왕봉이 손에 닿을 듯 눈 앞에 선하다. 그 발 아래 산내면 입석리 들판이 넓게 펼쳐지는데 그 곳에 실상사가 자리잡고 있다.

실상사는 지리산 깊은 계곡에서 흐르는 만수천을 끼고 풍성한 들판 한가운데 위치해 있으며 동으로는 천왕봉과 마주하면서 남쪽에는 반야봉, 서쪽은 심원 달궁, 북쪽은 덕유산맥의 수청산 등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채 천년 세월을 지내오고 있다. 대부분 우리나라의 사찰이 깊은 산중에 자리잡고 있는데 비해 지리산 자락의 실상사는 들판 한가운데 세워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지리산 사찰 중 평지에 자리한 절은 이 곳 실상사와 단속사가 있는데 단속사는 폐허가 된채 석탑만 남겨져 있는데 비해 실상사는 여전히 사찰 구실을 하고 있다.

천년사찰, 호국사찰로 잘 알려진 실상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의 말사로, 신라 흥덕왕(興德王) 3년(서기 828년) 증각대사 홍척(洪陟)이 당나라에 유학, 지장의 문하에서 선법(禪法)을 배운 뒤 귀국했다가 선정처(禪定處)를 찾아 2년동안 전국의 산을 다닌 끝에 현재의 자리에 발길을 멈추고 창건했다.

증각대사가 구산선종(九山禪宗) 가운데 최초로 그의 고향인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에 절을 세운 것이다. 증각대사의 높은 불심을 높게 기린 흥덕왕이 절을 세울 수 있게 해줬고 왕은 태자선광(太子宣光)과 함께 이 절에 귀의했다. 증각은 실상사를 창건하고 선종(禪宗)을 크게 일으켜 이른바 실상학파(實相學派)를 이루었고 그의 문하에서 제 2대가 된 수철화상과 편운(片雲)스님이 가르친 수많은 제자들이 전국에 걸쳐 선풍(禪風)을 일으켰다. 신라 불교의 선풍을 일으키며 번창했던 실상사는 그 이후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화재로 전소됐다가 3차례에 걸쳐 중수 복원돼 오늘에 이른다.

 

                      ▲ 실상사 안내도

 

세조때(1468) 원인모를 화재로 전소됐다는 기록과 정유재란 때 왜구에 의해 전소됐다는 설이 동시에 전해지고 있다. 화재로 인해 실상사의 승려들은 숙종 5년(1680)까지 약 200년 동안 백장암에서 기거했으며 절에는 철불, 석탑, 석등 등만 남아 있었다 한다. 그러다가 숙종 때 300여 명의 수도승들과 함께 침허대사가 상소문을 올려 36채의 대가람을 중건했다. 또 순조 21년(1821) 의암대사가 두번째 중건을 했으며 고종 21년(1884)에 월송대사가 세번째 중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여기서 제3중창건을 하게 된 것은 고종 19년(1882) 어떤 사람들이 절터를 가로챌 목적으로 방화를 했기 때문이다.

또한 실상사는 6•25를 맞아서는 낮에는 국군, 밤에는 공비들이 점거하는 등 또 한차례의 수난을 겪게 됐는데 용케도 사찰만은 전화를 입지 않았다.

천년 세월을 보내오면서 호국사찰로 알려진 실상사에는 유독 일본, 즉 왜구와의 얽힌 설화가 많이 전해진다. 앞서 언급한 사찰의 전소원인을 정유재란 당시의 왜구에 의한 것으로 보고 있는 부분에서도 일본과 관련된 전설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약사전의 약사여래불은 천왕봉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천왕봉 너머에는 일본의 후지산이 일직선상으로 놓여져 있다 한다. 이 때문에 가람배치도 동쪽을 향해 대치형을 하고 옆으로 강이 흘러 대조적이다.

 

                      ▲ 실상사 안내도

 

이 절에는 "일본이 흥하면 실상사가 망하고 일본이 망하면 실상사가 흥한다"는 구전이 있는데 이는 천왕봉 아래 법계사에서도 전해지고 있어 흥미를 끈다.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실상사 경내의 보광전 안에 있는 범종에 일본 열도의 지도가 그려져 있는데 스님들이 예불할 때마다 종에 그려진 일본열도를 두들겨 치고 있다. 이는 앞서 언급했듯 우리나라와 실상사가 흥하면 일본이 망한다는 구전에 의한 것으로 여겨진다.

스님들이 이 속설에 따라 범종의 일본지도를 많이 두드린 탓에 범종에 그려진 일본지도 중 훗카이도와 규슈지방만 제 모양으로 남아 있을 뿐 나머지 열도는 희미해져 가고 있다. 최근의 독도 영유권에 대한 일본의 망언이 있는 오늘날 한일관계를 두고 볼 때 보광전의 범종에 얽힌 사연이 갖는 의미는 우리에게 많은 점을 일깨워주기에 충분하다. 이 같은 전설과 구전들을 살펴볼 때 실상사는 일본에 대한 호국사찰이며 불교문화의 큰 도량임을 알 수 있다.

실상사에는 백장암과 서진암, 약수암 등의 암자가 있으며 이 곳에는 신라시대의 많은 문화유산들이 산재해 있다. 국보 제10호로 지정된 백장암 삼층석탑은 전형에 구애받지 않은 자유로운 설계를 하고 있어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공예탑이기도 하다. 실상사의 문화유적은 보물급에는 수철화상능가보월탑(33호, 905), 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34호), 석등(35호, 개산당시), 부도(36호, 고려), 삼층쌍탑(37호, 887년), 증각대사응료탑(38호, 861년 이후), 증각대사응료탑비(39호), 백장암석등(40호, 9세기 중엽), 철제여래좌상(41호, 개산당시), 청동은입사향로(420호, 1584년), 약수암목조탱화(421호, 1782년)등 11점이 보존되어 있다. 지방유형문화재로는 극락전(45호,1684년), 위토개량성책(88호, 토지대장), 보광전범종(138호, 1694년), 백장암보살좌상(166호,고려), 백장암범종(211호, 1743년)등 5점이다.

중요민속자료는 실상사 입구의 만수천을 가로지르는 해탈교 양쪽에 세워져 있는 석장승 3기(15호)가 그것이다. 장승은 벅수라고도 하는데 보통 한 쌍으로 세워져 있으나 이 곳의 장승은 남녀를 판별할 수 없으며 만수천 양쪽에 원래는 4기가 세워져 있었다. 절을 향해 건너기 전에 세워진 한쌍의 돌장승 중 오른편 장승은 1936년 홍수때 떠내려 가고 없다. 잡귀를 막기위해 세워진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은 두 눈과 코가 크고 둥글며 머리에는 모자를 쓰고 손은 창을 든 것 같은 모습이며 "대장군(大將軍)"은 뒤에 만들어진 듯 이렇다 할 특징은 없다.

실상사에는 이렇듯 호국의 정신이 흐르며 찬란한 신라불교문화의 숱한 문화재가 잘 보존돼 있는 천년고찰이다.

 

  천 년의 세월을 버티며 들판 한 가운데 자리한 사찰! 실상사(實相寺) 제1부 ◈

우리나라 단일 사찰 중에 가장 많은 문화재를 보유한 곳!!!

매표소를 지나 석장승 1기가 입구를 지키고 있는 다리를 건너면 ┣자 갈림길이 나타나는데 실상사로 들어가는 직진 길 양쪽에 석장승 2기가 자리를 하고 있다.

우측 길은 실상사 경내 탐방을 마치고 나중에 보물 제36호로 지정된 '남원 실상사 승탑' 가는 길로, 갔다가 되돌아오는데 약 20여분이 소요된다.

직진 길을 따라 실상사로 향하면 천왕문을 통과하고 경내 마당으로 들어서게 되는데, 정면으로 동,서 삼층석탑, 석등, 보광전이 일렬로 배치된 전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보광전 우측으로는 명부전과 약사전이 남북으로 배치가 되어 있다.

또한 보광전 좌측에는 칠성각이 아담하게 자리를 하고 있다.

천왕문을 들어서자마자 좌측으로 방향을 틀어 우측으로 나타나는 실상사 요사채 건물들을 지나 약 150여m를 진행하면 담장속에 자리한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5호로 지정된 극락전이 나타나고, 극락전 주변으로는 보물로 지정된 수철화상탑과 탑비, 증각대사탑과 탑비가 자리를 하고 있다.

 

실상사 제1부에서는 제2부에서 소개하게 될 승탑과 탑비 등을 제외한 실상사 경내의 건축물, 석탑, 석등, 철조여래좌상, 동종 그리고 실상사 입구를 지키고 서 있는 석장승 등의 문화재들을 소개하기로 한다.

 

【 실상사 문화재 탐방순서 】

석장승(중요민속문화재 제15호)-천왕문-동·서 삼층석탑(보물 제37호)-석등(보물 제35호)-보광전-실상사 동종(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37호)-명부전-철조여래좌상(보물 제41호)-극락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5호)-증각대사탑비(보물 제39호)-증각대사탑(보물 제38호)-수철화상탑(보물 제33호)-수철화상탑비(보물 제34호)-실상사 승탑(보물 제36호)

 

                      ▲ 실상사 경내로 들어서는 문인 천왕문

 

♧ ♧ 남원 실상사 동·서삼층석탑(南原 實相寺 東·西三層石塔)

*보물 제37호(1963년01월21일 지정)

*소재지: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입석길 94-129, 실상사(입석리)

 

                      ▲ 실상사 보광전 앞에서 바라본 삼층석탑

 

실상사의 중심법당인 보광전 앞뜰에 동·서로 세워져 있는 두 탑이다. 실상사는 통일신라 흥덕왕 3년(828)에 홍척(洪陟)이 창건하였으며 풍수지리설에 의거하여, 이 곳에 절을 세우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정기가 일본으로 건너간다 하여 지은 것이라 한다. 이 곳에는 3층 석탑 이외에도 석등, 묘탑, 탑비, 부도, 철조여래좌상 등이 있어 유명하다.

 

                      ▲ 실상사 보광전 앞 동(사진 左), 서(사진 右)삼층석탑

 

탑은 2층으로 된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동서 두 탑 모두 탑의 머리장식이 거의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희귀한 예이다.

 

                      ▲ 완전하게 남아 있는 동·서 삼층석탑의 상륜부 머리장식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져 통일신라시대의 정형을 보이며,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처마밑이 수평이며, 밑면의 받침은 4단이고,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는데, 그 정도가 부드러우면서도 경쾌하다.

특히 탑의 머리장식은 원래대로 잘 보존되어 각 장식부재들이 차례대로 올려져 있다.

이와 같이 두 탑은 규모나 양식이 같아서 동시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대작은 아니지만 돌의 구성이 정돈되어 있는 통일신라 후기의 뛰어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 삼층석탑의 동탑(사진 左)과 서탑(사진 右)의 기단부

 

♧ ♧ 남원 실상사 석등(南原 實相寺 石燈)

*보물 제35호(1963년01월21일 지정)

*소재지: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입석길 94-129, 실상사(입석리)

 

 

실상사는 지리산 천왕봉의 서쪽 분지에 있는 절로, 통일신라 흥덕왕 3년(828)에 홍척(洪陟)이 선종 9산의 하나로 실상산문을 열면서 창건하였다. 이 석등은 실상사 보광명전 앞뜰에 세워져 있다.

석등은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밑에 3단의 받침을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는데, 평면은 전체적으로 8각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 실상사 석등 하대석 복련과 귀꽃 장식(사진 上)

                         중대석 북 모양의 간석(사진 下)

 

받침부분의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는 8장의 꽃잎을 대칭적으로 새겼다. 화사석은 8면에 모두 창을 뚫었는데, 창 주위로 구멍들이 나 있어 창문을 달기 위해 뚫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붕돌은 여덟 곳의 귀퉁이가 모두 위로 치켜올려진 상태로, 돌출된 꽃모양 조각을 얹었다. 머리장식에는 화려한 무늬를 새겨 통일신라 후기의 뛰어난 장식성을 잘 보여준다.

 

                      ▲ 석등 화사석과 옥개부

 

이 석등은 규모가 커서 석등 앞에 불을 밝힐 때 쓰도록 돌사다리를 만들어 놓았으며, 지붕돌의 귀퉁이마다 새긴 꽃모양이나 받침돌의 연꽃무늬가 형식적인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보인다.

 

♧ ♧ 남원 실상사 철조여래좌상(南原 實相寺 鐵造如來坐像)

*보물 제41호(1963년01월21일 지정)

*소재지: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50번지

약사전에 봉안되어 있는 통일신라 후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실상사 창건 당시부터 지금까지 보존되어 오고 있는 유명한 철불이다. 통일신라 후기에는 지방의 선종사원을 중심으로 철로 만든 불상이 활발하게 만들어졌는데, 이 불상 역시 한 예로서 당시의 불상 양식을 잘 표현하고 있다.

머리에는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기교있게 붙여 놓았고, 정수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아담한 크기로 자리잡고 있다. 귀는 그런대로 긴 편이고, 목에 있는 3줄의 주름인 삼도(三道)는 겨우 표현되고 있다. 좁아진 이마, 초생달 모양의 바로 뜬 눈, 다문 입 등의 근엄한 묘사는 이전의 활기차고 부드러운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어깨선이 부드럽고 가슴도 볼륨있게 처리되었지만 전반적으로 다소 둔중한 느낌을 주며, 양 어깨에 모두 걸쳐 입은 옷 역시 아래로 내려올수록 무거운 느낌을 준다. 옷주름은 U자형으로 짧게 표현되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에 유행하던 옷주름 표현기법으로 비교적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이상과 같은 특징을 지닌 실상사 철제여래좌상은 긴장감과 활력이 넘치던 8세기의 불상이 다소 느슨해지고 탄력이 줄어드는 9세기 불상으로 변화하는 과도기적인 작품이라는 점에 그 의의를 둘 수 있다.

 

 

 

약사여래는 중생의 병고 뿐만 아니라 현실세계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현실이익적인 부처님이다. 이처럼 약사여래는 인간의 생노병사 가운데 가장 고통스러운 병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우리 나라에 약사신앙이 전래된 이후 계속 신앙되었다.

약사불상이 다른 불상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한 손에 약그릇을 들고 있는 점이다. 그러나 현재 약사불로 신앙되고 있는 불상 가운데는 약그릇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실상사의 약사여래도 약그릇을 갖고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불상을 통일신라 말 구산선문에서 본존으로 모시던 노사나상(盧舍那像)이라고도 하며, 근래에는 원래의 손이 아미타 수인을 하고 있어 아미타불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제2대 조사인 수철국사가 약사여래상과 석탑 2기를 세웠다는 설이 있어 현재 약사전에 봉안된 철조여래상은 수철국사가 조성한 약사불이 아닌가 한다.

이 불상은 실상사가 중창될 때까지 들판에 있었으며, 약사전을 세운 후 그 안에 봉안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불상에는 보화(寶貨)가 많이 들어 있다는 말이 있어 일찍부터 도굴꾼에 의해 훼손된 적이 있다. 불상의 복장품에는 효령대군의 발원문과 사경(射經) 및 인경(印經)이 수백 권이나 있었고, 고려판 화엄경소 등 보기드문 서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 중 일부는 도난 당하였고, 나머지는 건물과 함께 불탔다고 한다.

실상사 약사여래불상은 9세기에 접어들면서 유행하는 철불(鐵佛)의 초기작품으로써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 불상은 건장한 신체와 물결식의 옷주름에서 가장 융성했던 시기의 양식이 남아 있음을 엿볼 수 있다.

현재의 두 손은 나무로 만들어 끼워넣은 것으로, 1987년 복원할 때 나온 철제 손과 같은 모양이다. 대좌는 흙으로 만들었으나 허물어진 곳이 많아 자세한 모습은 알 수 없다.

 

 

♧ ♧ 남원 실상사 석장승(南原 實相寺 )

*중요민속문화재 제15호(1969년12월5일 지정)

*소재지: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33-1번지

*수량/면적:3기

장승은 민간신앙의 한 형태로 마을이나 사찰 입구에 세워져 경계를 표시함과 동시에 잡귀의 출입을 막는 수호신의 구실을 한다. 실상사 입구에 있는 3기의 돌장승 역시 경계표시와 함께 경내의 부정을 금하는 뜻에서 세운 것으로 보여진다.

 

                      ▲ 실상사로 들어가는 해탈교를 건너기 전 좌측의 돌장승인 옹호금사축귀장군

 

만수천의 해탈교를 건너기 전 마을쪽에 있는 돌장승이 옹호금사축귀장군(擁護金沙逐鬼將軍)이고, 해탈교를 건너자 마자 길 좌우에 2기의 돌장승이 마주보고 서 있다. 오른쪽 논두렁 가에 있는 돌장승이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이고, 왼쪽의 괴목 아래 서 있는 돌장승이 대장군(大將軍)이다.

 

 

                      ▲ 실상사로 들어가는 해탈교를 건너 좌측 괴목 아래 대장군(사진 上左)과 우측 논두렁가의 상원주장군(사진 上右)

                         괴목 아래 석장승인 대장군(사진 下)

 

3기의 장승은 거의 같은 모습으로 머리에 벙거지를 쓰고 있으며 크고 둥근 눈에 뭉툭한 주먹코이다. 윗 송곳니 두 개가 삐져나와 험상궂은 듯 하지만 입가의 미소가 순한 심성을 드러내고 있다. 길게 수염이 표시되고 몸체에는 좌우 각각 상원주장군, 대장군, 옹호금사축귀장군이라는 이름이 새겨있다. 다만 수염이 반대로 향하고 있어 상원주장군과 대장군은 대칭적인 한 쌍을 염두에 둔 조각인 듯싶다. 대장군의 기단석(基壇石)과 상원주장군의 뒷면에 있는 기록으로 보아 실상사 석장승들은 조선 영조 원년(1725)과 영조 7년(1731)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원래는 모두 네 개가 있었는데 절을 건너는 해탈교 입구의 두 개 중 오른쪽의 것이 홍수로 쓸려 내려가 현재는 세 개만 남아 있다.

 

                      ▲ 해탈교 입구 우측의 홍수로 쓸려 사라진 석장승을 대신하여 만들어 둔 석장승

 

♧ ♧ 남원 실상사 동종(南原 實相寺 銅鐘)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37호(1992년06월20일 지정)

*소재지: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입석길 94-129, 실상사(입석리)

실상사 경내에 있는 높이 123㎝, 입 지름 83㎝의 종이다.

종을 매다는 고리는 용이 종머리를 딛고 있는 형상이며,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용통은 간략화 된 용이 꼬리를 휘감은 모양을 하고있다.

몸통 위쪽은 원안에 범자를 양각한 문양을 12곳에 배치하였다. 그 아래 사각형을 이룬 유곽이 4면에 있으며, 사이사이에 두 손으로 꽃가지를 잡고 보관을 쓴 보살상이 1구씩 배치되었다. 유곽의 테두리는 덩굴무늬로 장식되었고, 안쪽으로는 꽃 모양의 유두 9개가 있다.

종에 새긴 글을 통해 조선 숙종 20년(1694)에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 보광전에 보관중인 실상사 동종

 

절에서 사용하는 종을 흔히 범종이라고 하는데, 그 소리로써 하루의 일과를 모든 대중에게 알리는 역할을 한다. 범종은 소리로 장엄하고 시간을 알려주며, 귀신을 쫓고 지상 및 하늘과 지옥의 모든 중생을 구제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실상사에는 통일신라시대의 범종이 있었는데 깨진 상태로 동국대학교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고, 강희(康熙) 33년(1694)에 주조한 범종은 현재 보광전에 있다.

이 종은 몸체의 위는 좁고 아래로 가면서 넓게 퍼진 모습이다. 종 몸체에 기록된 글에 의하면 강희 33년에 만든 것으로 무게는 800근이다. 종을 만든 사람은 김상립, 정칠립, 김천수, 김선봉 등으로 여기에서 처음으로 범종을 만든 사람을 편수(便手)로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은 기록으로 보아 이 종은 침허대사가 실상사를 중창할 때 만든 것으로 보인다.

용두(龍頭)는 앞을 바라보고 있고, 뒤에 붙은 소리통은 형식적으로 작게 만들었다. 상대(上帶)는 표현하지 않고 대신에 범자(梵字)를 돌아가며 새겼으며, 유곽(乳廓)은 종 몸체 중간쯤에 치우치게 배치하였다. 유곽대에는 당초무늬와 연꽃 모양의 유두(乳頭)가 9개씩 있고, 보살상은 유곽을 중심으로 합장한 채 서 있다. 보살이 서 있는 아래 부분에는 명문(銘文)이 있고 당좌(撞座)와 하대(下臺)는 표현하지 않았다.

이 종에 얽힌 이야기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전해 온다. 즉 실상사를 중창하고 난 후 국왕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종을 만들고 아침 저녁으로 나라가 번창하기를 기도하며 종을 쳤다고 한다.

그런데 이 범종에는 우리 나라 지도와 일본의 지도가 새겨져 있어, 이 종을 치면 일본의 경거망동을 경고함과 동시에 우리 나라를 흥하게 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이와 같은 소문 때문에 일제 말기에는 주지스님이 문초를 당하기도 하였으며 종 치는 것이 금지되기도 하였다. 지금도 지도 일부가 그대로 남아 있어 그러한 사실에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

 

 

                      ▲ 실상사 극락전가는 길(사진 上)

                         극락전가는 길목의 이정표(사진 下)

 

【 실상사의 전각들 】

 

▦ 실상사 극락전(實相寺 極樂殿)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5호(1974년09월27일 지정)

*소재지: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50번지

 

 

지리산에 위치한 실상사는 통일신라 흥덕왕 3년(828)에 홍척이 처음 지은 절이다. 당나라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온 홍척은 풍수지리학적으로 이곳에 절을 세우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정기가 일본으로 건너간다고 하여 이 절을 지었다고 한다.

극락전은 조선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불에 탔다가 다시 지어졌다.

극락전의 옛이름은 부도전(扶道殿)으로 계오대사가 1684년(숙종 10)에 건물을 짓고 부도전(浮屠殿)이라 하였다. 이와 같이 부도전이라 한 것은 근처에 홍척국사와 수철화상의 부도가 있기 때문이다. 1751년(영조 27)에 포문비구(抱文比丘) 한심(漢諶)이 옛 연하당(蓮荷堂)과 금당(金堂)의 기와를 사용하여 요사채를 수리하고 부도전(扶道殿)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788년(정조 12년)에 금파 관오대사가 대시주 이휘와 별좌 홍찬, 재민과 더불어 중수하였다. 1832년(순조 32)에 의암대사가 기봉, 처윤과 함께 중건하여 극락전으로 이름을 바꾸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불단 위에는 아미타여래좌상이 있으며, 그 좌우에는 목조보살상이 있었으나 몇 년 전에 분실하였다.

극락전 요사채는 1932년에 남성법(南性法) 스님이 영원사(靈源寺)에서 옮겨 세운 것으로, 지리산의 기운이 솟아오르는 명당으로 알려져 수행납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다. 가운데 칸에는 세짝의 문을 달았고 양쪽은 한짝 씩의 문을 달았다. 건물 안은 바닥에 마루를 깔고, 뒤쪽 높은 기둥 사이에 후불벽을 설치하고 불단 위에는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다.

 

▦ 실상사 보광전(實相寺 普光殿)

실상사의 주법당인 보광전은 1884년(고종 21)에 월송대사가 세운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이다.

 

 

건물 안에 모셔진 삼존상 중 본존불은 조선시대에 조성한 것이고, 좌우의 관음, 세지 두 보살은 원래 극락전에 아미타불과 함께 봉안되었던 것으로 월씨국(베트남)에서 모셔왔다고도 한다.

현재는 단청이 되어 있지 않아 소박한 모습으로 실상사를 찾는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그렇지만 조선후기의 건축양식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로써, 보광전 주변에는 83평을 추정케 하는 주춧돌이 남아 있어 굉장한 규모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1991년 동국대 박물관에 의한 보광전 주변 발굴에 의한 보광전 주변 발굴에서 이미 증명된 적이 있다.

불상 뒤에는 아미타여래도가 있고, 불단 오른편에는 1981년에 만든 신중불화와 산신불화, 그리고 왼편에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37호인 동종이 있다.

 

▦ 실상사 약사전(實相寺 藥師殿)

 

 

약사전은 몸과 마음의 질병을 낫게 함으로써 중생을 교화하는 서원을 세운 약사여래를 봉안하는 전각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이다. 1883년 함양, 산청 유생들의 방화에도 불타지 않고 지금까지 남아 있는데, 특히 ㅈ우앙의 꽃문창살은 단청이 선명해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전각 안에는 통일신라시대에 철로 만든 약사불상(보물 제41호)과 불상 뒤에는 조선 후기에 그린 약사불화가 있다.

 

▦ 실상사 명부전(實相寺 冥府殿)

 

 

명부전은 갖가지 지옥의 장면을 그린 시왕(十王)의 그림이나 조각을 모신 전각으로 주존은 지장보살이다.

실상사의 명부전은 길선당(吉禪堂)의 옛터에 건립된 것으로 장육전(丈六殿) 동쪽에 있던 것으로 1821년(순조 21)에 의암대사가 옮겨 지은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로 안에는 지장보살 삼존상, 시왕상 10구, 판관상 6구, 인왕상 2구가 있다. 지장보살상 뒤에는 1987년에 조성한 지장시왕도가 있다.

시왕상은 본존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로는 제1 진광대왕, 제3 송제대왕, 제5 염라대왕, 제7 태산대왕, 제9 도시대왕이 있고, 왼쪽으로는 제2 초강대왕, 제4 와관대왕, 제6 변성대왕, 제8 평등대왕, 제10 전륜대왕이 배치되었다.

 

▦ 실상사 칠성각(實相寺 七星閣), 범종각(梵鐘閣) 그리고 천왕문(天王門)

 

                      ▲ 실상사 칠성각(사진 左)과 범종각(사진 右)

 

칠성각은 보광전 왼편에 자리하고, 범종각은 천왕문을 들어서면 우측에 위치해 있다.

천왕문은 실상사 경내 앞마당으로 들어서는 출입문이다.

 

                      ▲ 실상사 요사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