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은 관광명소/세계유산 조선왕릉

세계유산 조선왕릉! 서울 정릉(貞陵)

왕마구리 2015. 11. 7. 21:40

◀ 세계유산 조선왕릉! 서울 정릉(貞陵) ▶

 

조선왕릉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왕릉 가운데 가장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고유의 유적이다. 왕릉 개개의 완전성은 물론이고 한 시대의 왕조를 이끌었던 역대 왕과 왕비에 대한 왕릉이 모두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욱 큰 가치를 지닌다.

1392년 고려 왕조가 막을 내리고 탄생한 조선 왕조는 이후 1910년까지 무려 519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이어갔다.

이처럼 하나의 왕조가 500년 이상 지속된 것은 매우 보기 드문 유례이다. 이러한 유구한 역사를 가진 조선 왕조에는 27대 왕과 왕비 및 추존왕과 왕비가 있는데, 이 왕족의 무덤을 조선왕릉이라 한다.

왕족의 무덤은 왕실의 위계에 따라 능, 원, 묘로 분류된다.

능(陵)은 추존왕, 추존왕비를 포함한 왕과 왕비의 무덤이고,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말한다. 묘(墓)는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아들, 딸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 등의 무덤을 일컷는다.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2009년 6월 30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519년의 역사를 지닌 조선은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아 조상에 대한 존경과 숭모를 매우 중요한 가치로 여겨 역대 왕과 왕비의 능을 엄격히 관리하였다. 그리하여 42기의 능 어느 하나도 훼손되거나 인멸되지 않고 모두 제자리에 완전하게 보전되었다.

조선왕릉은 우리의 전통문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600여 년 전의 제례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

 

 

▷ 조선왕릉의 분포

조선 왕족의 무덤은 모두 119기에 이르며, 이 가운데 능이 42기이고, 원이 13기이며, 묘가 64기이다.

조선 왕족의 무덤은 무덤 주인의 신분에 따라 그 명칭을 달리하는데 능(陵)은 왕과 왕비의 무덤,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빈 또는 왕의 사친의 무덤, 그 외 왕족의 무덤은 일반인의 무덤처럼 묘(墓)라고 한다.

42기의 능 가운데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태조 원비 신의왕후의 능), 후릉(정종과 정안왕후의 능)을 제외한 40기의 능이 남한에 있다.

남한에 위치한 40기의 왕릉 중 강원도 영월에 위치한 장릉(단종의 능)을 제외한 39기의 능이 서울과 경기도 일원에 자리를 하고 있다. 500년이 넘는 한 왕조의 무덤이 이처럼 온전하게 보전되어 있는 것은 세계에 그 유래를 찾기 힘들며 문화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 조선왕릉의 제향

조선왕릉의 가치는 형태적 보존에만 있지 않고, 조선왕릉을 더욱 더 빛나게 하는 것은 600년 넘게 이어져 내려온 조선왕릉의 제례의식이다.

조선은 건국 이래 산릉제례를 엄격하게 지켜왔으며, 1945년 해방 후에는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이 기일에 올리는 제사인 능기신제(陵忌辰祭)의 전통을 이어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매년 왕과 왕비의 제향일에 산릉제례가 엄격하게 행해진다.

▷ 조선왕릉의 구성

조선왕릉은 죽은 자가 머무는 성(聖)의 공간과 산 자가 있는 속(俗)의 공간이 만나는 곳으로 그 공간적 성격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 능침공간 : 왕과 왕비의 봉분(능침, 능상)이 있는 성역 공간

   ** 제향공간 : 죽은 자와 산 자가 함께 하는 영역으로 제사를 지내는 공간(정자각, 침전)

   ** 진입공간 : 왕릉의 관리와 제례 준비를 위한 공간(재실)

 

 

                          ▲ 2012년 발굴 조사하여 2014년 복원된 정릉의 재실(사진 上

                             제기고(사진 下左)

                             행랑채(사진 下右)

 

▷ 조선왕릉의 변천사

조선왕릉 석물의 배치와 구조는 기본적으로 큰 변화없이 오랜 기간 반복되었지만 당시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나 당대 왕의 의지에 따라 약간씩의 변화가 있어 왔다.

제1기는 태조의 건원릉(1408)에서부터 문종 현릉(1452)으로 조선 왕릉의 기본 형식을 갖춘 시기이다.

제2기는 세조의 광릉(1468)에서부터 숙종 익릉(1681)까지로 석물의 전반적인 배치나 표현상에서 조선 왕릉 특유의 조각 양식이 확립된 시기이다.

제3기는 인조의 장릉(1731)에서부터 철종의 예릉(1864)까지이며 병풍석이나 장명등의 형태에서 약간의 변화가 있었고 조각의 비례가 바뀐다.

제4기는 황제릉이 조성된 시기로,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라 칭하면서 고종의 홍릉과 순종의 유릉이 황제릉의 형식을 취하였다. 이에 더하여 유릉의 석물에서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 이데올로기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 서울 정릉 입구 매표소/정문(사진 上)

                             정릉 홍살문(사진 下)

 

【 방문일자 】2015년 10월 27일(화)

【 관람정보 】

*관람시간 : (매주 월요일 휴관)

                  2월~5월,9월~10월:9시~18시(매표:9시~17시)/6월~10월:9시~18시30분(매표:9시~17시30분)/11월~1월:9시~17시30분(매표:9시~16시30분)

*관람요금 : 어른(19~64세) \1,000

*관람소요시간 : 약 1시간(정릉산책로 탐방 포함)

*문의(조선왕릉 중부지구관리소/서울 정릉) : T.02)914-5133

 

 

                          ▲ 서울 정릉 안내도

 

*교통안내 :

- 성신여대역(4호선) 6번 출구에서 아리랑고개 방향 100m 지점 버스 이용

  →#1014번, #162번 버스 이용 정릉입구 하차

  →#1114번, #1213번, #7211번, #153번, #171번, 8143번 벼스 이용 정릉2동주민센터 하차

 

「 서울 정릉(南陽州 貞陵) 」 조선 제1대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능

조선 최초의 왕비, 신덕왕후의 능!!!

남편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조선의 퍼스트레이디!!! 

 

 

*사적 제208호(1970년5월26일 지정)/유네스코 세계유산(2009년6월30일 지정)

*위치: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2동 산87-16번지

*면적:299,574㎡

*조성시기:태종9년(1409년)

조선 태조 이성계의 두번째 부인인 신덕왕후(?∼1396) 강씨의 무덤이다.

 

                          ▲ 수복방 뒷편에서 바라본 전경 

 

정릉은 단릉으로 조성된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능이다. 처음에는 현재 정동의 영국대사관 자리에 능역이 조영되었으나, 태조가 승하한 후, 원비의 태생인 태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신덕왕후는 평민으로 강등되고, 현재의 위치로 천장되었다.

따라서 왕릉제인 병풍석이나 난간석은 봉분에서 사라지고, 4각 장명등, 고석, 상석 등만이 원래의 것으로 추정된다. 그 중 장명등은 고려시대 공민왕릉의 양식을 따른 것으로 조선시대 능역의 가장 오래된 석물인 동시에 예술적 가치가 높다.

정릉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세우지 않고, 호석과 양석이 각 1쌍으로 줄어들고, 무석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왕후의 무덤에 비하여 빈약하지만 조선왕조 최초로 만들어진 왕비의 무덤이다.

정릉의 공간은 일반 왕릉의 영역이 직선축을 이루는 데 비해, 자연 지형에 맞추어 절선축으로 조성되어 있다. 능역 입구 금천교의 모습은 우리나라 자연형 석교의 조형기술을 볼 수 있으며 재실터 양 옆으로 서 있는 느티나무의 보호수도 살펴 볼만한 가치 있는 역사경관이다.

 

 ◀ 고려 양식을 계승한 사각 장명등

 

 

                          ▲ 정릉 재실 근처의 보호수인 느티나무들

                              (사진 左) 수령 360년, 수고 21m, 나무둘레 3.6m

                              (사진 右) 수령 165년, 수고 17m, 나무둘레 3.2m

 

「능의역사」

극진히 사랑했던 현비가 갑자기 승하하자 태조는 도성 안인 현 덕수궁 뒤편 현재 영국대사관 자리로 추정되는 곳에 능역을 조성하고 강씨 봉분 우측에 훗날 자신이 묻힐 자리까지 함께 마련하여 능호를 정릉으로 정하였다. 아울러 능의 동편에 흥천사(興天寺)라는 절을 지어 재궁으로 삼고 능침사찰로 하였다.

 

「 흥천사(興天寺) 」

정릉의 원찰로 태조 이성계가 정성을 들여 건립한 것으로 유명하다.

170여탄의 큰 규모로 절이 완공된 후 태조는 흥천사의 종소리를 들어야 수저를 들었다고 한다. 정릉이 옮겨간 후에도 흥천사는 왕실사찰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중종5년(1510) 유생들이 일으킨 화재로 소실되었다. 그후 정릉 이장 당시 이 근처로 옮겨 온 스님들에 의해 법맥을 이어오다, 정릉이 복원되면서 신흥사로 개칭하고 지금의 정릉 인근 위치에 가람을 지었다.

고종2년(1865) 흥선대원군 등의 시주를 받아 대방과 요사채를 짓고 이름을 다시 흥천사로 고쳤다.

 

그러나 잘 조성된 정릉은 신덕왕후의 왕자인 방번과 방석이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살해되고 태조의 원비 신의왕후의 다섯 번째 소생인 태종이 즉위하면서부터 푸대접을 받았다.

1406년(태종 6) 정릉의 능역이 도성 안에 위치하는 것은 옳지 못하며, 능역 또한 너무 넓다는 논란이 있자 태종은 정릉 100보 밖까지를 주택으로 허가하였다. 따라서 하륜 등 당대 세도가들이 정릉의 숲을 베어내고 저택을 짓게 되었다. 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태조는 애써 조성한 사랑하는 아내의 능이 초토화되는 것을 보고 남몰래 눈물지었다고 한다.

1409년(태종 9)에는 의정부에서 왕의 무덤이 모두 도성 밖에 있는데 정릉만이 도성 안에 있고, 무덤이 크고 넓다는 논란이 있어서 정릉을 도성 밖으로 이전하자는 상소가 올라왔고, 태종이 이를 허락하여 지금의 정릉 위치인 도성 밖 양주 땅 사을한록으로 천장하였다. 태종은 이때 능을 옮기면서 봉분을 깎아버리고 정자각을 헐었으며, 석물들을 모두 땅에 묻도록 하였다.

 

 

1410년(태종 10) 여름에는 청계천의 광통교가 홍수로 인해 무너지자 예전 정릉의 석물이었던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병풍석들을 실어다 광통교 돌다리를 만들게 하였고, 그 밖의 목재나 석재들은 태평관을 짓는데 사용하였다. 따라서 백성들은 왕비의 능을 구성하던 석재들을 밟고 다니게 되었다.

정릉이 있던 이 일대는 지금까지 정동(貞洞)으로 불리고 있다.

 

                          ▲ 일반적인 왕릉 조영 양식과 차이를 모이는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ㄱ'자로 꺾여 있는 참도

 

태종은 종묘에 신위를 모실 때 태종과 자신의 친어머니 신의왕후만을 함께 모시고, 신덕왕후의 신위는 모시지 않음으로써, 그녀를 후궁의 지위로 격하시켜 버렸다. 이로써 태조가 사랑했던 신덕왕후는 죽은 후에도 새어머니를 미워한 아들에 의해 한참을 푸대접 받다가, 그로부터 260년이 지난 1669년(현종 10) 다시 정릉의 상설을 복구하고 종묘에 배향을 결정하게 되어 그 한을 풀게 되었다. 이 때 정릉에서 성대한 제사를 지냈는데, 그날 정릉 일대에 많은 비가 쏟아져서 사람들이 이를 ‘세원지우(洗寃之雨)’라고 불렀다고 한다. 세원지우란 신덕왕후의 원을 씻어주는 비라는 뜻이다.

 

 

                          ▲ 정릉 정자각

                          ▲ 왕릉에 제향을 지낼 때 쓸 제사 음식을 간단히 데우는 등 준비를 하는 곳인 수라간(사진 左)

                             능에서 화재나 부정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지키는 수복이 근무하는 곳인 수복방(사진 中)

                             비를 보관하는 비각(사진 下)

                          ▲ 신덕왕후 비

 

◈ 신덕왕후(神德王后) 강

생몰년도 : ? ~1468년

 

 

신덕왕후는 상산부원군에 추증된 강윤성의 딸로 태어났다. 친가는 고려의 권문세가로서 이성계의 권력 형성과 조선을 건국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전해진다. 고려시대에는 고향에서 결혼한 부인인 향처(鄕妻)와 서울에서 얻는 새 부인인 경처(京妻)를 두는 것이 풍습이었다. 신덕왕후는 태조의 경처였는데, 향처인 한씨 부인이 태조가 즉위하기 전인 1391년 세상을 떠났으므로 조선이 개국된 1392년 신덕왕후가 조선 최초의 왕비로 책봉되었다.

신덕왕후는 태조와의 사이에 방번, 방석 두 아들과 경순공주를 두었으며, 태조가 그녀를 극진히 사랑했다고 전해진다.

1396년(태조 5) 8월 13일 판내시부사 이득분의 집에서 병환으로 승하하였다. 사랑하던 신덕왕후를 잃은 태조는 정릉을 조영하고, 능 동쪽에 그녀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로 흥천사를 세웠다. 이 원찰에서 정릉에 재를 올리는 종소리를 듣고서야 아침 수라를 들었다고 한다.

신덕왕후가 승하한 지 2년 후에는 그녀의 소생 중 막내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데 원망을 품은 방원을 비롯한 전처 소생 아들들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방번과 방석을 살해하는 비극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 정릉 금천교

 

((일화))

태조는 신덕왕후를 극진히 사랑했다고 전해진다. 그들이 처음 만나 사랑을 싹틔우게 된 계기에 대한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전의 어느 날, 말을 달리며 사냥을 하다가 목이 매우 말라 우물을 찾았다고 한다. 마침 우물가에 있던 아리따운 그 고을의 처자에게 물을 청하였는데, 그녀는 바가지에 물을 뜨더니 버들잎 한 웅큼을 띄워 그에게 건네주었다. 태조가 버들잎을 띄운 이유를 묻자 뒷날의 신덕왕후가 된 그 처녀는 “갈증이 심하여 급히 물을 마시다 체하지나 않을까 염려되어 그리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이 대답을 들은 이성계는 그녀의 갸륵한 마음 씀씀이에 반하여 부인으로 맞아들이게 되었다.

 

 

「정릉산책로 탐방」

정릉 왕릉 탐방을 마치고, 홍살문 우측의 산책로를 따라 시계 반대 방향으로 약 2.5km의 정릉 탐방로 산책을 시작한다.

 

 

산책로 탐방 시작(12:35)

완만한 오르막 산책로를 따르면 위치표시목 '정릉1-1' 지나 Y자 갈림길.

 

 

 

정릉 산책로 안내도와 이정표(←장수천 200m/5분)가 있다.

나무벤치 쉼터와 우측으로 정릉 소방 철문(12:37)이 있는 곳을 지나, 계속되는 오르막길의 통나무 계단을 오르면 위치표시목 '정릉1-2'(12:41). 뒷편 소나무숲 공터에 나무벤치가 설치된 쉼터.

 

                          ▲ 정릉 산책길 첫번째 쉼터의 나무 밑둥이 여러 갈래로 벌어져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의자

                          ▲ 정릉 산책길의 1,2,3 쉼터

 

잠시 내려간 후 통나무 계단을 오르면 또 다시 쉼터(12:45)를 지나 위치표시목 '정릉1-3'과 우측 공터에 쉼텨(12:47)가 자리를 하고 있다.

 

 

 

                          ▲ 정릉 산책길의 4, 5 쉼터

 

 

편안해진 산책로를 따르면 우측 철망펜스 밖으로 북악스카이웨이 도로가 지나고 있다.

위치표시목 '정릉1-4'(12:50)를 지나 북악스카이웨이 도로로 통하는 철문이 있는 곳에 쉼터(12:53)가 보이면, 산책로는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위치표시목 '정릉1-5'와 정릉산책길 안내도가 있는 ┫자 갈림길에서 10여m 떨어진 곳에 이정표(→정문 500m/10분)가 있는 ┣자 갈림길(12:58). 우측 계단길을 따라 내려가면 위치표시목 '정릉1-6'(13:02)을 지나 정릉 재실(13:04)에 이르며 정릉산책길은 끝이 난다.

약 30여분의 시간이 소요된 정릉산책길 탐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