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은 관광명소/세계유산 조선왕릉

세계유산 조선왕릉! 서울 헌.인릉 ①헌릉(獻陵)

왕마구리 2015. 3. 28. 21:45

◀ 세계유산 조선왕릉! 서울 헌.인릉(서울 獻.仁陵) ▶

 

                          ▲ 홍살문 앞에서 바라본 헌릉 전체 전경

 

조선왕릉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왕릉 가운데 가장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고유의 유적이다. 왕릉 개개의 완전성은 물론이고 한 시대의 왕조를 이끌었던 역대 왕과 왕비에 대한 왕릉이 모두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욱 큰 가치를 지닌다.

1392년 고려 왕조가 막을 내리고 탄생한 조선 왕조는 이후 1910년까지 무려 519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이어갔다.

이처럼 하나의 왕조가 500년 이상 지속된 것은 매우 보기 드문 유례이다. 이러한 유구한 역사를 가진 조선 왕조에는 27대 왕과 왕비 및 추존왕과 왕비가 있는데, 이 왕족의 무덤을 조선왕릉이라 한다.

왕족의 무덤은 왕실의 위계에 따라 능, 원, 묘로 분류된다.

능(陵)은 추존왕, 추존왕비를 포함한 왕과 왕비의 무덤이고,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말한다. 묘(墓)는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아들, 딸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 등의 무덤을 일컷는다.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2009년 6월 30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519년의 역사를 지닌 조선은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아 조상에 대한 존경과 숭모를 매우 중요한 가치로 여겨 역대 왕과 왕비의 능을 엄격히 관리하였다. 그리하여 42기의 능 어느 하나도 훼손되거나 인멸되지 않고 모두 제자리에 완전하게 보전되었다.

조선왕릉은 우리의 전통문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600여 년 전의 제례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

 

 

▷ 조선왕릉의 분포

조선 왕족의 무덤은 모두 119기에 이르며, 이 가운데 능이 42기이고, 원이 13기이며, 묘가 64기이다.

조선 왕족의 무덤은 무덤 주인의 신분에 따라 그 명칭을 달리하는데 능(陵)은 왕과 왕비의 무덤,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빈 또는 왕의 사친의 무덤, 그 외 왕족의 무덤은 일반인의 무덤처럼 묘(墓)라고 한다.

42기의 능 가운데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태조 원비 신의왕후의 능), 후릉(정종과 정안왕후의 능)을 제외한 40기의 능이 남한에 있다.

남한에 위치한 40기의 왕릉 중 강원도 영월에 위치한 장릉(단종의 능)을 제외한 39기의 능이 서울과 경기도 일원에 자리를 하고 있다. 500년이 넘는 한 왕조의 무덤이 이처럼 온전하게 보전되어 있는 것은 세계에 그 유래를 찾기 힘들며 문화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 조선왕릉의 제향

조선왕릉의 가치는 형태적 보존에만 있지 않고, 조선왕릉을 더욱 더 빛나게 하는 것은 600년 넘게 이어져 내려온 조선왕릉의 제례의식이다.

조선은 건국 이래 산릉제례를 엄격하게 지켜왔으며, 1945년 해방 후에는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이 기일에 올리는 제사인 능기신제(陵忌辰祭)의 전통을 이어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매년 왕과 왕비의 제향일에 산릉제례가 엄격하게 행해진다.

▷ 조선왕릉의 구성

조선왕릉은 죽은 자가 머무는 성(聖)의 공간과 산 자가 있는 속(俗)의 공간이 만나는 곳으로 그 공간적 성격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 능침공간 : 왕과 왕비의 봉분(능침, 능상)이 있는 성역 공간

   ** 제향공간 : 죽은 자와 산 자가 함께 하는 영역으로 제사를 지내는 공간(정자각, 침전)

   ** 진입공간 : 왕릉의 관리와 제례 준비를 위한 공간(재실)

 

 

                          ▲ 서울 헌.인릉의 재실(사진 上)

                             재실의 행랑청(사진 下)

 

▷ 조선왕릉의 변천사

조선왕릉 석물의 배치와 구조는 기본적으로 큰 변화없이 오랜 기간 반복되었지만 당시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나 당대 왕의 의지에 따라 약간씩의 변화가 있어 왔다.

제1기는 태조의 건원릉(1408)에서부터 문종 현릉(1452)으로 조선 왕릉의 기본 형식을 갖춘 시기이다.

제2기는 세조의 광릉(1468)에서부터 숙종 익릉(1681)까지로 석물의 전반적인 배치나 표현상에서 조선 왕릉 특유의 조각 양식이 확립된 시기이다.

제3기는 인조의 장릉(1731)에서부터 철종의 예릉(1864)까지이며 병풍석이나 장명등의 형태에서 약간의 변화가 있었고 조각의 비례가 바뀐다.

제4기는 황제릉이 조성된 시기로,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라 칭하면서 고종의 홍릉과 순종의 유릉이 황제릉의 형식을 취하였다. 이에 더하여 유릉의 석물에서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 이데올로기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 서울 헌.인릉 입구

 

【 소 재  지 】서울특별시 서초구 헌인릉길 34(내곡동 1-2449)

【 방문일자 】2015년 3월 14일(토)

【 관람정보 】

*관람시간 : (매주 월요일 휴관)

                  2월~5월,9월~10월:9시~18시(매표:9시~17시)/6월~10월:9시~18시30분(매표:9시~17시30분)/11월~1월:9시~17시30분(매표:9시~16시30분)

*관람요금 : 어른(19~64세) \1,000

*문의(조선왕릉 중부지구관리소) : T.02)445-0347,3412-0118

 

                          ▲ 서울 헌.인릉 안내도(사진 上)

                             서울 헌.인릉 산책로 안내도(사진 下)

 

*교통안내 :

  - 양재역 #11번 출구, 강남역 7번 출구에서 #407번, #408번, #440번 또는 #462번 버스 환승, 헌,인릉(강남,서초구예비군훈련장) 하차

【  탐방코스 헌.인릉재실→매표소→인릉→산책로→헌릉→매표소

조선왕릉 헌.인릉 소개는 헌릉과 인릉으로 나누어 소개를 한다.

재실은 원래 제사를 지내는 건물인 관계로 무덤과 같은 지역에 있는데, 헌.인릉의 재실은 서로 떨어져 위치해 있다. 인릉과 헌릉 뒤편으로 자리한 대모산 기슭에 총 1,720m의 산책로가 만들어져 있어 인릉과 헌릉 사이의 산책로 입구에서 출발하여 현재 산불방지 등을 이유로 폐쇄된 구간을 제외한 인릉-제1쉼터-제5쉼터-헌릉 구간 약 650m를 탐방하였으며, 탐방한 산책로는 인릉 소개할 때 간략하게 소개하기로 한다.

 

                          ▲ 인릉에서 헌릉가는 길

 

 

「 헌릉(獻陵) 」 조선 제3대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

조선왕릉의 위엄을 잘 보여주는 조선시대 쌍릉의 대표적인 능제

 

                          ▲ 헌릉의 능침

 

*사적 제193호(1970년5월26일 지정)/유네스코 세계유산(2009년6월30일 지정)

*위치:서울특별시 서초구 헌인릉길 34

*면적:1,969,675㎡

*조성시기:세종2년(1420년) 9월 17일(원경왕후 하관일)

조선 3대 태종과 원비 원경왕후의 봉릉이 같은 언덕에 조영된 쌍릉 형식으로, 조선시대 쌍릉의 대표적인 능제이다.

병풍석의 규모와 확트인 전경, 정자각 중심의 제향공간과 능침공간 사이의 높이 차이 등 초기 조선 왕릉의 위엄성을 잘 드러내 주는 요소를 갖추고 있다.

헌릉의 능 앞 석물들은 망주석, 혼유석, 장명등은 각1쌍이고 양석, 호석은 각 4쌍, 문무인석과 마석은 각각 2쌍씩 배치되었는데, 이는 고려 왕조의 현릉(玄陵)과 정릉(正陵) 제도를 기본으로한 것이며, 조선시대의 후릉과 같이 망주석을 제외하고는 각각 하나씩을 다 갖춘 가장 웅장한 배치 방법이다.

현릉이 지닌 조선 초기 왕릉으로의 특성을 두 가지 꼽자면 소전대와 상석 아래 놓인 고석의 개수를 들 수 있다.

정자각 북서쪽에 있는 소전대라고 하는 석물은 제례의 마지막 절차인 지방을 불사르는 시설로 태조 건원릉과 이곳 헌릉에서만 볼 수 있는 조선시대 초기의 석물이다. 한편 봉릉 앞 상석 아래에 놓인 고석의 개수가 5개인데, 이와 같이 고석이 5개인 능은 태조의 건원릉, 태종의 헌릉으로 모두 조선 초기 상설제도에서 볼 수 있는 형식이다.

헌릉에는 불교 요소를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법석은 물론, 원찰의 설립을 금하였다.

 

 

                          ▲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참도(사진 上)

                             헌릉 능침영역으로 오르는 입구에서 뒤돌아본 비각과 정자각 후면(사진 下)

 

원경왕후가 세종2년(1420) 7월 10일 수강궁(창경궁) 별전에서 태종보다 일찍 세상을 뜨자, 태종의 명으로 같은 해 9월 17일 대모산 기슭에 건좌손향으로 왕후의 능을 조영했는데, 숭유억불 정책으로 원찰을 세우지 못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세종4년(1422) 태종이 승하하자 아들 세종은 같은 해 9월 6일 왕과 왕비의 능을 나란히 하는 유교를 숭상하는 정책에 따라 어머니 원정왕후의 능 옆에 봉릉을 따로 만들어 아버지를 모시고 난간으로 연결하여 쌍릉을 조성하고 곡장을 둘렀다. 능원에는 2개의 신도비가 있는데, 임진왜란 때 손상된 원래의 신도비와 숙종21년(1695) 하나 더 증설하여 세운 것이다.

왕릉의 신도비는 태조의 건원릉, 정종의 후릉, 태종의 헌릉, 세종의 영릉 때까지 세웠다가 그 이후에는 완전히 폐지했는데, 현재 왕릉의 신도비는 건원릉과 헌릉에서만 볼 수 있으며, 세종의 영릉 신도비는 서초구 내곡동 원래의 터에 묻혀 있던 것을 1973년에 발굴하여 현재의 청량리 홍릉동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입구에 있다.

 

 

 

                          ▲ 헌릉의 정자각(사진 上)

                             헌릉 정자각의 정면과 측면 전경(사진 中)

                             헌릉의 정자각 우측면의 낮은 신계(사진 下)

 

♧ 서울 태종 헌릉 신도비(서울 太宗 獻陵 神道碑)

*보물 제1804호(2013년07월16일 지정)

세종4년(1422)에 세운 것이다.

 

                          ▲ 태종 헌릉 신도비가 보관된 비각

                          ▲ 태종 헌릉 신도비의 비신(左:정면, 中:측면, 右:후면) 

                          ▲ 태종 헌릉 신도비의 이수

 

태종 신도비는 태조의 다섯째 아들로 조선왕조 국기를 튼튼히 다졌던 제3대 태종 이방원(1367~1422)의 생애와 업적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비문을 새겨 새운 것이다.

비문은 태종 때의 문신이자 문장가인 변계량이 지었고, 전액은 당대의 서예가 권홍(1360~14460이 썼다. 다만 비문 글씨를 누가 썼는지 밝혀지지 않았으나 조선 초기의 서예문화와 그 경향을 연구하는 데는 손색이 없는 중요한 금석문 자료이다.

태종 헌릉 신도비는 임진왜란으로 인해 귀부는 손상되었지만 이수는 원형이 잘 보되고 있어, 조선 초기 새롭게 명나라의 석비 전통을 받아들이는 비석의 이수양식을 연구하는데 기준작이 된다.

세조 때 영의정 정인지 등이 왕의 공덕은 실록에 있으므로 새로이 신도비를 세울 필요가 없다고 주청해 이후 왕릉에서는 신도비를 세우지 않았다. 현재 조선 왕릉의 신도비는 건원릉과 헌릉에서만 볼 수 있다.

 

◈ 숙종21년(1695) 병화로 1424년 건립된 비에 새긴 글씨가 떨어져 나가 알아보기 어려워 원래의 비 옆에 새로 세운 신도비

 

                          ▲ 숙종21년 구비 옆에 세운 태종 헌릉 신도비

 

◈ 제3대 태종(太宗)

생몰년도 : 1367~1422년

재위기간 : 1400~1`418

태조와 신의왕후 한씨의 다섯 번째 아들로 고려 공민왕16년(1367) 5월 16일 함흥 귀주동 사저에서 태어났다.

고려 우왕9년(1383) 문과에 급제하여 밀직사대언이 되었는데, 조선의 왕 중 유일하게 과거에 급제한 왕이 되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 왕조를 건국하는 데 큰 공을 세워 조선이 건국된 1392년 정안군에 봉해졌다. 그러나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와 정도전 등의 경계로 세자 책봉에서 탈락하였으며, 이에 불만을 품고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신덕왕후 소생의 세자 방석을 폐위시켰으며, 둘째 형인 영안군이 왕위를 계승하도록 양보하였다.

그로부터 2년 후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박포의 계략에 넘어간 태종의 네째 형이 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자, 태종은 이를 평정하고 1400년 11월, 정종에 이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1405년에는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였고, 17년 10개월이 재위기간 동안 중앙제도와 지방 제도를 정비하였다. 사병 폐지로 군사권을 장악하고, 전국의 인구를 파악하여 조세 징수와 군역 부과에 활용하는 호폐법을 실시하는 등 국가의 기틀을 다지고, 조선 왕조의 기반을 닦는데 많은 치적을 남겼다.

태종18년(1418) 충녕대군을 세자로 삼아 2개월 뒤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서 정치에 관여하다가 세종4년(1422) 5월 10일 연화방 신궁(창경궁)에서 56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일화))

태종 이방원은 아버지를 도와 조선 건국에 큰 공을 세웠지만,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와 정도전 등과 대립하여 세자 책봉에서 탈락하였다. 이 과정에서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막내아들 방석이 세자에 오르게 되었고, 더불어 정도전이 재상 중심의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왕자의 사병을 혁파하려 하자, 수세에 몰린 이방원은 결국 태조7년(1398) 8월 정변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방원은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과 함께 사병을 동원하여 청도전, 남은 등의 일파를 제거하고, 세자 방석과 그의 형 방번도 아울러 살해하였다. 이 사건이 제1차 왕자의 난이다. 이 난을 통해 태조는 방원의 형인 영안군을 세자로 책봉하는 교지를 내렸고, 영안군은 곧 조선 제2대 임금 정종으로 즉위하였다.

그로부터 2년 후에는 신의왕후의 소생 사이에서 권력투쟁이 일어났다. 불공평한 논공행상으로 이방원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중신 박포가 이방원의 네째 형인 이방간으로 하여금 난을 일으키도록 부추겨, 이로 인해 이방간과 이방원은 개경 시가지에서 무력 충돌을 하게 되었는데, 이방원이 승리하고 박포는 사형에 처했으며, 이방간은 유배됨으로써 진정국면을 맞게 되었다. 이후 지위가 더욱 확고해진 이방원은 그해 2월 세자로 책봉되고, 11월에 왕위를 물려받아 조선 3대 임금 태종이 되었다.

 

◈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

생몰년도 : 1365~1420년

고려 공민왕14년(1365) 7월 1일 여흥부원군 민제의 딸로 태어났다.

고려 우왕8년(1382) 이방원과 혼인하고, 조선이 개국된 후에는 정녕옹주에 봉해졌다. 1400년 이방원이 세자에 책봉되는 동시에 정빈에 봉해졌으며, 같은 해 왕위에 오르자 정비에 진봉되었다.

원경왕후 민씨는 태종보다 두 살이 많았는데, 태종이 왕위에 오르기까지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녀는 자신의 형제들을 동원하여 1차 왕자의 난에서 태종이 승리할 수 있는 계략을 제시하고, 실천에 옮겼다. 결국 태종은 원경왕후의 도움으로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고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태종이 즉위한 후에는 불화가 그치지 않았다.

태종이 권력의 분산과 왕권의 강화를 위해 친족배척의 정책을 쓰는 한편 후궁을 늘려나갔는데, 원경왕후는 이에 크게 질투하고 불만을 품게 되었다. 심기가 불편해진 태종은 자신의 왕위 등극에 공을 세운 원경왕후의 형제 민무구, 민무질 형제와 민무휼, 민무희 형제를 유배 보내고 자결하도록 했다. 친정에 이러한 불화가 계속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막내아들 성녕대군이 14세의 어린 나이에 홍역으로 세상을 떠나자 원경왕후 민씨는 묘앞에 대자암을 지어놓고 그의 명복을 비는 것으로 말년을 보내다가 세종2년(1420) 7월 10일 수강궁 별전에서 춘추 56세로 승하하였다.

((일화))

제1차 앙자의 난에서 이방원이 정도전 등의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득세할 수 있었던 데에는 원경왕후 민씨의 도움이 컸다.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기 열흘 전, 정도전 일파는 왕자들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을 혁파하였다. 이 때 사병을 거느린 왕족과 귀족들은 병사 뿐만 아니라 지니고 있던 무기며 군장비를 모두 내놓아야 했다.

그러나 원경왕후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얼마간의 사병과 무기를 친정집에 숨겨두었다. 1398년 8월 26일, 당시 태조의 병환이 깊어서, 왕자들은 근정전 문 밖 서쪽 행랑에 모여 숙직을 하고 있었다. 원경왕후는 집사를 보내 자신이 갑자기 복통이 심하다는 핑게를 들어 이방원을 불러내였다.

집에 와서 갑옷을 입고 거사하고, 그리고는 자신의 친형제인 민무구, 민무질 형제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한편, 숨겨둔 사병과 무기를 풀어 이방원에게 내주었다. 이로 인해 제1차 왕자의 난은 성공하였고, 이방원은 왕위 계승을 위한 수순을 한 차례 밟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