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남 강진 정약용 유적(康津 丁若鏞 遺蹟) ▶
한국 사상의 원형, 실사구시의 실학이 집대성된 곳!
다산의 사상이 완성된 유배지!!!
「 전남 강진(全南 康津) 소개 」
강진군은 원래 백제시대의 도무군지역인 도강과 동음현 지역인 탐진이 영합된 지역으로 도강의 “강”자와 탐진의 “진”자를 합하여 강진이라 호칭되어 온 것으로써, 도강군은 백제시대에는 도무군, 통일신라 경덕왕 때에는 도무군이 양무군으로, 동음현이 탐진현으로 개칭되었다.
고려조에 도강군으로 개칭과 동시에 탐진현 일부지역이 영암군과 장흥군에 속하다가 명종 2년(1172) 이 곳에 감무를 두어 행정, 병무를 동시 담당토록 하였다.
조선조 태종 17년(1417) 도강현 지역의 일부인 현 병영면 지역에 전라도병영(병영 절제사)을 신설함과 동시에 동강현과 탐진현을 합하여 이 곳을 강진현이라 명명하였으며, 그 치소를 도강의 치소이던 송계(현 강진읍 송현 또는 성전면 수양지역)로 옮겼으나 조선조 성종 6년(1475)에 다시 탐진의 치소(현 강진읍)로 복귀하였다.
조선조 개국 503년(1895)에는 지방제도 개혁에 따라 강진군으로 개칭하고, 1914년에 백도면(현 신전면과 해남군 북일면의 일부)의 월성, 항리, 만수, 좌일, 금당, 내봉, 동리, 중산, 방책, 남촌 등 10개리를 해남군 북평면에 이속시키는 동시에 완도군 관할이던 가우도를 우리 군 도암면에 영속시켰다.
1936년 7월 1일 강진면이 강진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73년 7월 1일 도암면 남부의 7개리를 분할하여 신전 출장소를 설치하였고, 도암면 영파리를 강진읍에 편입하였다. 서기 1974년 10월 26일 도암면 신전출장소를 군 출장소로 승격된 후 1983년 2월 15일 면으로 승격되었다. 또한 1981년 9월 25일 마량출장소를 설치(1982년 2월 10일 개소)한 후 1989년 4월 1일 마량출장소가 마량면으로 승격되었고, 1990년 8월 1일 해남군 옥천면 봉황리 일원이 도암면으로 편입되어 헌재 우리 군의 행정구역은 1읍, 10개면, 112개 법정리, 287개 행정리, 292개 자연마을로 되어 있으며 약 5만 여명에 달하는 인구가 오순도순 정답게 살고 있다.
『 탐방한 강진군의 문화재들 』
● 강진 무위사
국보 제13호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 (康津 無爲寺 極樂寶殿)
국보 제313호 강진 무위사 극락전 아미타여래삼존벽화 (康津 無爲寺 極樂殿 阿彌陀如來三尊壁畵)
보물 제507호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 (康津 無爲寺 先覺大師塔碑)
보물 제1312호 강진 무위사 아미타여래삼존좌상 (康津 無爲寺 阿彌陀如來三尊坐像)
보물 제1314호 무위사 극락전 백의관음도 (無爲寺 極樂殿 白衣觀音圖)
보물 제1315호 무위사 극락전 내벽사면벽화 (無爲寺 極樂殿 內壁四面壁畵)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76호 무위사 삼층석탑 (無爲寺 三層石塔)
● 강진 월남사지
보물 제298호 강진 월남사지 삼층석탑 (康津 月南寺址 三層石塔)
보물 제313호 강진 월남사지 진각국사비 (康津 月南寺址 眞覺國師碑)
전라남도 기념물 제125호 월남사지 (月南寺址)
●강진 금곡사(金谷寺)
보물 제829호 강진 금곡사 삼층석탑 (康津 金谷寺 三層石塔)
●강진 정약용 유적(康津 丁若鏞 遺蹟) 사적 제107호
사의재(四宜齋)
다산초당(茶山草堂)
●백련사(白蓮寺)
보물 제1396호 강진 백련사 사적비 (康津 白蓮寺 事蹟碑)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36호 백련사 대웅전 (白蓮寺 大雄殿)
천연기념물 제151호 강진 백련사 동백나무 숲(康津 白蓮寺 동백나무 숲)
●강진 전라병영성 (康津 全羅兵營城) 사적 제397호
【 일 정 표 】2015년 11월 2일(월)-3일(화) 1박2일
◈ 첫째날(11/2) : (영암)도갑사-(강진)무위사-월남사지
◈ 둘째날(11/3) : 사의재-백련사-다산초당-금곡사-강진 전라병영성
전라남도 강진 여행은 월출산국립공원 내에 소재한 영암의 도갑사 방문을 겸하여 실시한 여행이었다.
강진으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영암의 도갑사를 먼저 탐방하고, 본격적인 강진지역의 문화재 탐방이 이루어졌으며,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으로 이어지는 만덕산 숲탐방로(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인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으로 가는 약 1km의 숲길)도 백련사와 다산초당 탐방시 함께 탐방을 하였다.
만덕산 숲탐방로는 강진 정약용유적 편에 사의재, 다산초당과 함께 내가 찾은 관광명소 '호남권'에 소개를 하기로 하며, 영암의 도갑사는 내가 찾은 관광명소 '명찰을 찾아서'에 별도로 소개를 하기로 한다.
또 다른 강진의 탐방지들은 내가 찾은 관광명소 '호남권'에 '강진 전라병영성'을, '무위사','월남사지'와 '백련사', 그리고 '금곡사'는 내가 찾은 관광명소 '명찰을 찾아서'에 각 사찰별로 소개를 하기로 한다.
- 마음의 평화를 얻는 곳. 쳔년고찰! 강진 무위사(無爲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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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저항 정신의 산 증거! 강진 전라병영성 (康津 全羅兵營城)
▲ 정약용 선생이 거처했던 옛터 표지석이 있는 곳의 고목(사진 上)
사의재 옆 동문샘(사진 下)
『 강진 정약용 유적 (康津 丁若鏞 遺蹟) 소개 』
*사적 제107호(1963년01월21일 지정)
*수량/면적:23,204㎡
*소재지: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산103-2번지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1762∼1836) 선생이 유배되어 11년간 머물면서 많은 책을 저술했던 곳이다.
정약용은 여유당(與猶堂) 등의 여러 호를 가지고 있으며, 천주교 이름으로는 요한(Johan)이라 하였다.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으며, 유형원과 함께 수원성을 설계하고 거중기 등의 신기재를 이용하여 수원 화성을 쌓기도 했다. 정조가 죽자 신하들의 모함을 받아 투옥되어 유배되었고, 그 후 18년간의 유배생활 동안 그는 많은 저서를 남겼다. 정약용의 사상은 한국사상의 원형과 직결된다고 할 수 있다.
이 곳에서 11년 동안 머물면서 『목민심서』와 『경세유표』, 『흠흠신서』를 비롯한 500여 권에 달하는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리고 이를 총정리한 『여유당전서』는 ‘철학’, ‘법제’, ‘종교’, ‘악경’, ‘의술’, ‘천문’,‘측량’, ‘건축’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장래에 도움이 될 학문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이는 세계적으로도 학술적 연구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 다산초당과 사의재 주변 관광안내도
♧ ♧ 강진 사의재(四宜齋)
사의재(四宜齋)는 다산 정약용이 1801년 강진에 유배 와서 처음 묵은 곳이다. 사의재는 이곳 주막집(동문매반가) 주인 할머니의 배려로 골방 하나를 거처로 삼은 다산이 몸과 마음을 새롭게 다잡아 교육과 학문연구에 헌신키로 다짐하면서 붙인 이름으로 "네 가지를 올바로 하는 이가 거처하는 집"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 사의재 전체 전경
다산은 생각과 용모와 언어와 행동, 이 네 가지를 바로 하도록 자신을 경계하였던 것이다. "생각을 맑게 하되 더욱 맑게, 용모를 단정히 하되 더욱 단정히, 말(언어)을 적게 하되 더욱 적게, 행동을 무겁게 하되 더욱 무겁게" 할 것을 스스로 주문하였다.
사의재는 창조와 희망의 공간이다. 사려 깊은 주막 할머니의 "어찌 그냥 헛되이 사시려 하는가? 제자라도 가르쳐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얘기에 자신 스스로 편찬한 「아학편」을 주교재로 교육을 베풀고, 「경세유표」와 「애절양」 등을 이곳에서 집필하었다. 다산은 주막 할머니와 그 외동딸의 보살핌을 받으며 1801년 겨울부터 1805년 겨울까지 이곳에 머물렀다.
◈동문매반가
주막집(동문매반가) 주인 할머니의 배려로 유배봇짐을 풀고 골방 하나(사의재)를 거처로 삼은 다산선생이 마음을 새롭게 다잡아 교육과 학문연구에 헌신키로 다짐하게 되어 조선실학의 대가로 거듭나게 된 데는 주인할머니의 공이 크다 할 수 있다.
그 뜻을 기리고자 강진군에서 사의재 복원과 함께 당시 주막(동문배반가)을 재현하고자 이곳을 현대판 주모와 현대판 파전, 동동주 등의 토속적은 음식을 판매하는 주막으로 운영하고 있다.
▲ 사의재 옆 '동천정' 정자가 있는 정원 전경
◈동천정
사의재는 동천정을 포함하여 모두 갈대로 엮은 초가이엉이 특색이며, 전통방식의 소박한 나무다리와 수(水)공간을 가로질러 주막채로 향하는 길,
고즈넉한 옛 모습의 토석벽과 동네어귀에서 집안이 보일 듯 말 듯 집집마다 둘러쳐진 낮은 돌담길, 전통적인 연못 등을 조성하여 이곳을 찾는 이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장소이다. 동천정의 현판은 “동문샘의 정자”라는 뜻으로 다산선생의 제자인 황상의 글씨체를 집자했다.
▲ 사의재 뒷편의 한옥체험관
「 백련사에서 다산초당 가는 만덕산 숲탐방로(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 탐방기 」
백련사 탐방을 마치고 백련사 입구 안내도와 이정표가 설치된 숲길 입구에서 약 900m의 다산초당가는 숲길 탐방을 시작한다.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을 탐방하고 백련사주차장으로 되돌아 오는데는 약 2km의 거리이며, 다산초당 탐방시간 포함, 약 1시간20여분이 소요되었다.
▲ 백련사에서 다산초당 가는 숲길 입구
12:50=>백련사 입구 숲길 탐방로 입구
입구에 '백련사에서 다산초당가는 길' 안내도와 이정표(↑다산기념관 1,9km, 다산수련원 1.7km, 다산초당 0.9km, 애월루 0.4km)가 있는 탐방로 입구.
▲ 백련사주차장 갈림길(사진 上)
갈림길의 이정표(사진 下)
좌측으로 천연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된 '백련사 동백나무 숲이 있고, 이정표(←주차장 0.1km/↑다산기념관 1.9km, 다산수련원 1.7km, 다산초당 0.9km, 애월루 0.4km/↓백련사 0.1km)가 설치된 백련사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자 갈림길을 지나면 좌측으로 차밭이 펼쳐진다.
▲ 백련사 차밭
▲ 해월루갈림길로 오르는 계단길
차밭을 지나면 밧줄난간이 설치된 통나무 계단길(12:53).
계단길을 오르면 나무벤치 2개와 이정표(←해월루 0.1km/↑다산기념관 1.6km, 다산수련원 1.2km, 다산초당 0.6km/↓백련사 0.4km/→깃대봉 1.3km)가 설치된 쉼터 사거리이다.
좌측 길을 따라 잠시 들어가면 2층 누각인 해월루가 자리를 하고 있다.
▲ 해월루갈림길 사거리의 쉼터
▲ 깃대봉갈림길(사진 左)과 깃대봉 등산로(사진 右)
▲ 해월루 가는 길
▲ 해월루
13:00~13:12=>해월루
2층 누각에 오르면 강진만 일대가 시원하게 조망이 된다.
▲ 해월루에서 조망된 강진만 일대 전경
잠시 누각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갈림길로 되돌아나와 2~3분여를 내려가면 편안한 산책로가 이어진다.
▲ 편안한 숲길
▲ 편안한 숲길의 쉼터(사진 左)와 천일각 직전의 숲길(사진 右)
나무벤치 2개와 이정표(↑다산초당 0.3km/↓백련사 0.7km, 애월루 0.4km)가 있는 ┣자 갈림길을 지나 편안하게 내려가면 좌측으로 천일각이 자리한 다산초당 입구에 도착을 한다.
▲ 다산초당 천일각 입구에 설치된 안내판들
▲ 천일각
▲ 다산초당
13:24~13:50=>다산초당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인 '백련사가는 오솔길' 표지판, '천일각과 백련사 가는 길' 표지판, 그리고 이정표(↓백련사 1km, 애월루 0.7km/→다산초당, 다산기념관 1km, 다산수련원 0.6km)가 있는 천일각 입구에서 우측으로 꺾어 내려가면 다산동암, 다산 정약용의 영정이 모셔진 다산초당, 동암 등 3채의 건물과 화장실이 마련되어 있다.
다산초당 주변에는 다산3경인 제1경 '정석', 제2경 '약천', 제3경 '다조'가 있어 이곳들을 둘러보며 약 25분여를 보내고, 왔던 길을 되돌아 백련사로 향하였다.
▲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되돌아 가며 촬영한 숲길
첫번째 오르막 정상(13:55),
나무벤치 2개와 이정표(↑백련사 0.7km, 애월루 0.4km/↓다산초당 0.3km)가 있는 ┫자 갈림길,
2분여의 넓고 편안한 탐방로를 지나 이정표(↑백련사 0.5km, 애월루 0.2km/↓다산초당 0.5km)가 설치된 곳부터 오르막이 시작된다.
나무벤치 2개와 이정표(←깃대봉 1.3km/↑백련사 0.4km/↓다산기념관 1.6km, 다산수련원 1.2km, 다산초당 0.6km/→해월루 0.1km)가 설치된 해월루와 깃대봉갈림길인 오르막 정상 사거리 쉼터(14;00).
고정밧줄 난간이 설치된 긴 통나무 계단길을 내려서면 우측에 차밭(14:04)이 펼쳐지고, 차밭이 끝나는 곳에 이정표(↑백련사 0.1km/↓다산기념관 1.9km, 다산수련원 1.7km, 다산초당 0.9km, 해월루 0.4km)가 설치된 ┣자 갈림길.
직진의 백련사 방향 산길을 버리고, 우측으로 꺾어 내려가면 해탈문 직전 백련사 진입도로에 내려서게 된다.
▲ 백련사 진입로 삼거리
▲ 백련사 진입로 삼거리의 이정표
이정표(←백련사 0.2km/↓다산기념관 1.9km, 다산수련원 1.7km, 다산초당 0.9km,해월루 0.4km /→주차장 0.1km)와 '백련사 동백나무숲' 안내문이 설치된 삼거리이다.
우측 도로 따라 잠시 내려가면 백련사 해탈문을 지나 주차장에 도착을 하며 백련사와 다산초당, 그리고 백련사에서 다산초당까지의 숲길 탐방이 끝이 났다.
▲ 백련사 해탈문과 백련사주차장에 서있는 일주문
14:09=>백련사주차장
백련사주차장에서 다산수련원으로 이동. 약 400여m를 탐방로를 따라 진행하여 다산기념관 삼거리까지 왕복하며 진행하지 못하였던 반대편(다산초당에서 기념관과 수련원가는 길) 탐방로인 '삼남길'도 일부 탐방해 보았다.
▲ 다산수련원에서 다산초당으로 가는 탐방로
♧ ♧ 다산초당(茶山草堂)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주택.
강진만이 한눈에 굽어보이는 만덕산 기슭에 자리한 다산초당은 조선시대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대학자 정약용선생이 유배생활을 했던 곳이다. 다산(茶山)이라는 호는 강진 귤동 뒷산 이름으로 이 기슭에 머물고 계시면서 자신의 호로 써 왔다. 조선후기 대표적 실학자인 다산선생이 1801년 강진에 유배되어 18년여 동안 적거생활하시는 동안『목민심서』『경세유표』등 500여권의 방대한 책을 저술하면서 조선시대 성리학의 공리 공론적이며 관념론적인 학풍을 실용적인 과학사상으로 이끌고자 하는 실사구시의 실학을 집대성한 곳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2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 병조참지, 형조참의 등을 지냈으며 1801년 신유사옥으로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다시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처음에는 강진읍 동문밖 주막과 고성사의 보은산방, 제자 이학래 집 등에서 8년을 보낸 후 1808년 봄에 윤규로(尹奎魯)의 산정이던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해배되던 1818년 9월까지 10여년 동안을 다산초당에서 생활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저술을 하였으며, 다산의 위대한 업적이 대부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다산은 1818년 57세로 강진에서 유배가 풀려나 고향 마재로 돌아가 1836년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다산의 독백서를 보면 고향에 가서도 다산에서의 추억을 잊지 못함을 알 수 있다.
다산초당은 노후로 붕괴되었던 것을 다산유적보존회에서 1957년 복원한 정면 5칸, 측면 2칸의 도리단층기와집으로 문화재관리국에서 관리하고 있다. 그 후 다산선생이 거처하였던 동암과 제자들의 유숙처였던 서암을 복원하였다.
▲ 다산초당 동암(사진 左)과 서암(사진 右)
◈ 동암(東庵)
송풍루라고도 불리는 동암은 다산이 저술에 필요한 2천여권의 책을 갖추고 기거하며, 손님을 맞았던 곳이다.
다산은 초당에 있는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에 머물며 집필에 몰두하였으며, 목민관이 지녀야 할 정신과 실천 방법을 적은 <목민심서>도 이곳에서 완성했다. 1976년 서암과 함께 다시 세웠는데, 현판 중 보정산방은 추사의 친필을 모각한 것이고, 다산 동암은 다산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 서암(西庵)
윤종기 등 18인의 제자가 기거하던 곳이다.
차와 벗하여 밤 늦도록 학문을 탐구한다는 뜻으로 다성각이라고도 하며, 1808년에 지어져 잡초 속에 흔적만 남아 있던 것을 1975년 강진군에서 다시 세웠다.
다산초당에는 이밖에도 다산선생의 재취가 남아있는 다산4경이 있다. 다산선생 직접 병풍바위에 「丁石」이라는 글자를 직접 새긴 정석(丁石)바위, 직접 수맥을 찾아 차를 끓이던 약수인 약천(藥泉), 차를 끓였던 반석인 다조(茶竈), 연못 가운데 조그만 산처럼 쌓아놓은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 등 다산사경과 흑산도로 귀양간 둘째형 약전을 그리며 고향이 그리울때 심회를 달래던 장소에 세워진 천일각이라는 정자가 있다.
1970년, 1971년, 1975년에 보수공사를 하였으며, ‘茶山艸堂’이라는 현판은 김정희(金正喜)의 글씨로 유명하다.
▲ 다산초당과 서암 사이의 제1경 '정석'가는 길
「 다산4경 」
*제1경 정석(丁石) : 다산이 직접 새셨다고 전해지는 정석은 다산초당의 제1경이다. 아무런 수식도 없이 자신의 성인 정(丁)자만 따서 새겨 넣은 것으로, 다산의 군더더기 없는 성품을 그대로 보여준다.
▲ 다산초당의 1경 '정석'(사진 左)과 2경 '약천'(사진 右)
*제2경 약천(藥泉) : 가뭄에도 좀처럼 마르지 않는 이 샘은 다산초당의 2경이다. 처음에는 물이 촉촉하게 젖어있던 것을 다산이 직접 파서 돌틈에서 맑은 물이 솟아 나왔다고 한다. 다산은 약천의 물을 마시면 "담을 삭이고 묵은 병을 낫게 한다"고 기록하였다.
*제3경 다조(茶竈) : 다산이 이곳에 오기 전부터 있던 이 돌은 차 달이는 부뚜막으로 쓰던 것이다. 다산은 이곳에서 약천의 물을 떠다 솔방울로 불을 피워 찻물을 만들었다. 다산초당의 3경이다.
▲ 다산초당의 3경 '다조'(사진 左)과 4경 '연지석가산'(사진 右)
*제4경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 : 다산초당 옆 연못에 조성한 작은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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