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은 관광명소/호남권

(전남 강진)민족저항 정신의 산 증거! 강진 전라병영성

왕마구리 2015. 12. 12. 21:35

◀ 전남 강진 전라병영성(全羅兵營城) ▶

민족저항 정신의 산 증거!!!

 

                    

「 전남 강진(全南 康津) 소개 」

강진군은 원래 백제시대의 도무군지역인 도강과 동음현 지역인 탐진이 영합된 지역으로 도강의 “강”자와 탐진의 “진”자를 합하여 강진이라 호칭되어 온 것으로써, 도강군은 백제시대에는 도무군, 통일신라 경덕왕 때에는 도무군이 양무군으로, 동음현이 탐진현으로 개칭되었다.

고려조에 도강군으로 개칭과 동시에 탐진현 일부지역이 영암군과 장흥군에 속하다가 명종 2년(1172) 이 곳에 감무를 두어 행정, 병무를 동시 담당토록 하였다.

조선조 태종 17년(1417) 도강현 지역의 일부인 현 병영면 지역에 전라도병영(병영 절제사)을 신설함과 동시에 동강현과 탐진현을 합하여 이 곳을 강진현이라 명명하였으며, 그 치소를 도강의 치소이던 송계(현 강진읍 송현 또는 성전면 수양지역)로 옮겼으나 조선조 성종 6년(1475)에 다시 탐진의 치소(현 강진읍)로 복귀하였다.

조선조 개국 503년(1895)에는 지방제도 개혁에 따라 강진군으로 개칭하고, 1914년에 백도면(현 신전면과 해남군 북일면의 일부)의 월성, 항리, 만수, 좌일, 금당, 내봉, 동리, 중산, 방책, 남촌 등 10개리를 해남군 북평면에 이속시키는 동시에 완도군 관할이던 가우도를 우리 군 도암면에 영속시켰다.

1936년 7월 1일 강진면이 강진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73년 7월 1일 도암면 남부의 7개리를 분할하여 신전 출장소를 설치하였고, 도암면 영파리를 강진읍에 편입하였다. 서기 1974년 10월 26일 도암면 신전출장소를 군 출장소로 승격된 후 1983년 2월 15일 면으로 승격되었다. 또한 1981년 9월 25일 마량출장소를 설치(1982년 2월 10일 개소)한 후 1989년 4월 1일 마량출장소가 마량면으로 승격되었고, 1990년 8월 1일 해남군 옥천면 봉황리 일원이 도암면으로 편입되어 헌재 우리 군의 행정구역은 1읍, 10개면, 112개 법정리, 287개 행정리, 292개 자연마을로 되어 있으며 약 5만 여명에 달하는 인구가 오순도순 정답게 살고 있다.

 

 

                      ▲ 전라병영성 남문

 

『 탐방한 강진군의 문화재들 』

● 강진 무위사

국보 제13호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 (康津 無爲寺 極樂寶殿)

국보 제313호 강진 무위사 극락전 아미타여래삼존벽화 (康津 無爲寺 極樂殿 阿彌陀如來三尊壁畵)

보물 제507호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 (康津 無爲寺 先覺大師塔碑)

보물 제1312호 강진 무위사 아미타여래삼존좌상 (康津 無爲寺 阿彌陀如來三尊坐像)

보물 제1314호 무위사 극락전 백의관음도 (無爲寺 極樂殿 白衣觀音圖)

보물 제1315호 무위사 극락전 내벽사면벽화 (無爲寺 極樂殿 內壁四面壁畵)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76호 무위사 삼층석탑 (無爲寺 三層石塔)

● 강진 월남사지

보물 제298호 강진 월남사지 삼층석탑 (康津 月南寺址 三層石塔)

보물 제313호 강진 월남사지 진각국사비 (康津 月南寺址 眞覺國師碑)

전라남도 기념물 제125호 월남사지 (月南寺址)

●강진 금곡사(金谷寺)

보물 제829호 강진 금곡사 삼층석탑 (康津 金谷寺 三層石塔)

●강진 정약용 유적(康津 丁若鏞 遺蹟) 사적 제107호

사의재(四宜齋)

다산초당(茶山草堂)

백련사(白蓮寺)

보물 제1396호 강진 백련사 사적비 (康津 白蓮寺 事蹟碑)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36호 백련사 대웅전 (白蓮寺 大雄殿)

천연기념물 제151호 강진 백련사 동백나무 숲(康津 白蓮寺 동백나무 숲)

●강진 전라병영성 (康津 全羅兵營城) 사적 제397호

 

【 일 정 표 】2015년 11월 2일(월)-3일(화) 1박2일

                             ◈ 첫째날(11/2) : (영암)도갑사-(강진)무위사-월남사지

                             ◈ 둘째날(11/3) : 사의재-백련사-다산초당-금곡사-강진 전라병영성

 

 

                      ▲ 전라병영성 남문과 남쪽 성벽(사진 上)

                         동쪽과 남쪽 성곽이 만나는 곳의 치성에서 바라본 전라병영성 내부 전경(사진 下)

 

전라남도 강진 여행은 월출산국립공원 내에 소재한 영암의 도갑사 방문을 겸하여 실시한 여행이었다.

강진으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영암의 도갑사를 먼저 탐방하고, 본격적인 강진지역의 문화재 탐방이 이루어졌으며,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으로 이어지는 만덕산 숲탐방로(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인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으로 가는 약 1km의 숲길)도 백련사와 다산초당 탐방시 함께 탐방을 하였다.

만덕산 숲탐방로는 강진 정약용유적 편에 사의재, 다산초당과 함께  내가 찾은 관광명소 '호남권'에 소개를 하기로 하며, 영암의 도갑사는 내가 찾은 관광명소 '명찰을 찾아서'에 별도로 소개를 하기로 한다.

또 다른 강진의 탐방지들은 내가 찾은 관광명소 '호남권'에 '강진 전라병영성'을, '무위사','월남사지'와 '백련사', 그리고 '금곡사'는 내가 찾은 관광명소 '명찰을 찾아서'에 각 사찰별로 소개를 하기로 한다.

 

- 마음의 평화를 얻는 곳. 쳔년고찰! 강진 무위사(無爲寺)

- 신라계 양식의 석탑 흔적이 남아 있는 절터! 강진 월남사지(月南寺址)

- 고려8국사와 조선8종사의 숨결이 들리는 곳! 련사(白蓮寺)

- 한국 사상의 원형! 다산의 사상이 완성된 유배지! 강진 정약용 유적 (康津 丁若鏞 遺蹟)

- 임진왜란 승병의 훈련장! 금곡사(金谷寺)

- 민족저항 정신의 산 증거! 강진 전라병영성 (康津 全羅兵營城)

 

                      ▲ 전라병영성 복원·정비계획 안내도

                      ▲ 전라병영성지 옛 모습

 

『 강진 전라병영성(康津 全羅兵營城) 소개 』

*사적 제397호(1997년04월01일 지정)

*수량/면적 93,139㎡

*소재지:전라남도 강진군 병영면 병영성로 175, 외 (성동리)

전라병영성은 조선 1417년(태종 17년)에 초대 병마도절제사 마천목 장군이 축조하여 1895년(고종 32년) 갑오경장까지 조선왕조 500년간 전라도와 제주도를 포함한 53주 6진을 총괄한 육군의 총지휘부였다. 수많은 역사와 일화 속에 민족저항 정신의 산 증거로 존속되어 왔으며, 1894년 동학농민전쟁으로 불타고 곧 이은 갑오경장의 신제도로 폐영되었다.

 

 

                      ▲ 전라병영성 동문

 

                      ▲ 전라병영성 동문 위 누각에서 바라본 남문 방향 전경

                      ▲ 전라병영성 남문 진남루에서 바라본 동문 일대

 

                      ▲ 전라병영성 동문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성벽 외부 전경

                      ▲ 전라병영성 동문기준 동쪽 성벽 북쪽(사진 左)과 남쪽(사진 右)에 위치한 치성

 

전라병영성 성곽 전체 길이는 1,060m이며, 높이는 3.5m, 면적은 93.139㎡이다. 지정 당시 성곽 내 육군 지휘부 시절의 건물이나 유적은 소실되어 없었으며, 성곽만 일부 남아 있는 상태였다.

 

 

                      ▲ 전라병영성 동쪽과 남쪽 성벽이 만나는 모서리에 설치된 치성에서 바라본

                         동문으로 이어지는 동쪽 성벽(사진 上)

                         남문으로 이어지는 남쪽 성벽(사진 下)

 

                      ▲ 전라병영성 남문에 설치된 진남루

 

1997년 사적 지정 이후 1998년부터 본격적으로 복원 작업이 시작되었다. 성곽은 거의 복원되었으며, 성문은 남문(진남루)과 동문이 복원 완료되었고, 서문은 현재 복원 중이다.

 

                      ▲ 전라병영성 남문

 

                      ▲ 전라병영성 남문 옹성위에서 바라본

                         서쪽 방향 남쪽 성벽(사진 上)

                         동쪽 방향 남쪽 성벽(사진 下)

 

                      ▲ 도로에서 바라본 서쪽 성벽(사진 上)

                         복원전 서문지(사진 下)

 

♧ ♧ 강진 성동리 은행나무(康津 城東里 은행나무)

*천연기념물 제385호(1997년12월30일 지정)

*소재지:전라남도 강진군 병영면 성동리 70번지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로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가 전해질 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을 단풍이 매우 아름답고 병충해가 없으며 넓고 짙은 그늘을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어 정자나무 또는 가로수로도 많이 심는다.

 

 

병영면의 은행나무는 강진읍에서 북동으로 14.8㎞ 떨어진 병영면 소재지에 위치해 있다. 이 지역은 고려시대에 도강(도강)현의 현청이 있던 곳으로서, 조선시대 태종 17년(1417년)에 병영을 설치하여 병마 절도사를 둔 곳이기도 하다. 이 곳으로부터 은행나무는 약 500m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다.

강진 성동리 은행나무는 동성마을 중앙에 우뚝 솟아 마을의 상징목으로 되어 있으며 나이가 약 8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32m, 가슴높이의 둘레 7.2m, 수관폭은 중심에서 동쪽으로 16.5m, 서쪽으로 13m, 남쪽으로 10.9m, 북쪽으로 3.5m나 뻗어 있다. 뿌리가 민가의 부엌, 방 밑에까지 뻗어 있으며 뿌리 부근에는 주민들이 휴식처로 이용하고 있는 큰 바위가 놓여져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병영면은 네덜란드 하멜(Hamel) 일행이 약 7년간(1656.3∼1663.2) 머물렀던 곳이라 한다. 이들은 이 곳에서 생활하면서 크고 오래된 은행나무를 보았다고 『하멜표류기』에 기록하고 있는데, 바로 이 은행나무가 아닌가 추정된다.

전해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옛날 어느 여름철에 폭풍이 휘몰아쳐 큰 은행나무의 크고 작은 가지들이 많이 부러졌다. 이를 보고 받은 병사가 부러진 큰 가지를 성안으로 가져 오게 하고 이로써 많은 가구를 만들게 했다. 이 때 목침도 만들어 이것을 병사가 사용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이 목침을 베고 잠을 자던 병마절도사는 그날로 병이 나서 신음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떤 유명한 의원도 병의 원인을 알아내지 못하였다. 백약이 무효인지라 끝내는 무당을 불러 푸닥거리(굿)를 하고 점도 쳐보니 은행나무 목침을 병사가 사용한데 그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가지가 부러진 은행나무에 제사를 올리고 목침을 다시 붙어 주어야 완쾌가 된다고 하였다. 이에 무당의 말을 따라 그대로 하였더니 병사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았다. 지금도 은행나무 고목을 살펴보면 목침덩이가 들어있는 듯이 볼록해진 곳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이후로 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2월 15일 자정 무렵에 은행나무에게 마을의 평안과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으며 지금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이 은행나무는 오랜 세월동안 주민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온 나무로 역사적·문화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다. 또한 오래되고 큰 나무로서 생물학적 보존가치도 크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 ♧ 하멜체류지

이 지역은 네델란드인 하멜일행이 1656.3 ~ 1663.2월까지 약 7년간 억류생활을 했던 곳이다. 하멜일행 33명은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몇몇은 결혼해 살기도 했으며, 생계를 위해 잡역을 하거나 나막신을 만들어 팔았고 춤판을 벌여 삯을 받기도 했다. 우리나라 나막신이 일본의 나막신과 달리 네델란드와 같이 통으로 만들어진 것을 볼때 이들이 나막신을 전래한 것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하며, 또 이 지역 일부에 남아있는 담장중에 빗살모양으로 쌓인 담장이 있어 하멜일행이 잡역을 하면서 쌓았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하멜일행은 이 곳 은행나무 밑에서 수인산성을 바라보며 고향을 생각하기도 했다고 한다. 1663년 병영 생활을 마치고 좌수여 12명, 순천 5명, 남원 등지로 5명이 분리 이송되었으며, 마지막 체류지인 여수에서 일행중 7명이 1666년 9월 탈출후 「하멜표류기」를 저술함으로써 이곳에서의 생활을 최초로 서양에 알리기도 했다.

「 하멜(?~1692) 」

네덜란드의 선원.

한국에 관한 서양인 최초의 저술인 〈하멜 표류기〉의 저자이다.

 

 

1653년(효종 4) 1월 배를 타고 네덜란드를 출발하여 바다비아를 거쳐 타이완에 도착했다. 그해 7월 64명의 선원과 함께 무역선 스페르웨르호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長崎]를 향해 가던 도중 폭풍을 만나 8월 제주도 부근에서 배가 난파되어 일행 36명이 제주도 산방산 앞바다에 표착했다.

제주목사 이원진(李元鎭)의 심문을 받은 후 이듬해 5월 서울로 호송되어 훈련도감에 편입되었다. 그뒤 1657년 강진의 전라병영, 1663년(현종 4) 여수의 전라좌수영에 배치되어 잡역에 종사했다. 1666년 9월 7명의 동료와 함께 탈출,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1668년 본국으로 돌아갔다. 귀국 후 13년간의 한국 억류 경험을 바탕으로 〈하멜 표류기〉를 저술했다. 이것은 한국을 서양에 소개한 최초의 책으로 당시 유럽인들의 이목을 끌었다.

1980년 한국과 네덜란드의 공동출연으로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 산방산 해안에 하멜 기념비가 세워졌다.

 

 

                      ▲ 전라병영성이 소재한 병영면의 식당에서 저녁식사로 주문한 한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