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은 관광명소/강원&충청권

(충남 아산)예안 이씨가 대대로 살던 마을! 아산 외암마을(牙山 外巖마을)

왕마구리 2016. 11. 22. 19:28

◀ 예안 이씨가 대대로 살던 마을! 아산 외암마을(牙山 外巖마을) 

살아있는 민속박물관

아산 외암리 참판댁(牙山 外岩里 參判宅)

아산 건재고택(牙山 建齋古宅)

 

 

천안시와 아산시는 수도 없이 방문을 하였으나, 역사,문화 탐방을 위해 방문을 한 것은 2~3회에 지나지 않고 방문을 한 때에도 광덕사, 외암민속마을, 현충사 등 한 두곳의 관광지를 정해 방문을 하였거나, 산행과 금북정맥 종주 산행 때 방문을 하였었다.

그러나 이번 탐방은 1박 2일간 문화재 탐방을 목적으로 실시를 하게 되었고, 기존에 방문하였던 천안 광덕사, 아산 현충사를 제외한 문화재들 중에서 일부 문화재들을 지정하여 탐방을 실시하게 되었다.

 

 

『 탐방한 천안시와 아산시의 문화재들 』

▦ 천안시의 문화재들

국보 제7호 천안 봉선홍경사 갈기비(天安 奉先弘慶寺 碣記碑)

보물 제99호 천안 천흥사지 당간지주(天安 天興寺址 幢竿支柱)

보물 제354호 천안 천흥사지 오층석탑(天安 天興寺址 五層石塔)

보물 제407호 천안 삼태리 마애여래입상(天安 三台里 磨崖如來立像)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2호 직산현관아<내동헌.외동헌.내삼문.외삼문>(稷山縣官衙<內東軒.外東軒.內三門.外三門>)

▦ 아산시의 문화재들

보물 제536호 아산 평촌리 석조약사여래입상(牙山 坪村里 石造藥師如來立像)

보물 제537호 아산 읍내동 당간지주(牙山 邑內洞 幢竿支柱)

사적 제109호 아산 맹씨 행단(牙山 孟氏 杏壇)

중요민속문화재 제194호 아산 성준경 가옥(牙山 成俊慶 家屋)

중요민속문화재 제195호 아산 외암리 참판댁(牙山 外岩里 參判宅)

중요민속문화재 제196호 윤보선 전대통령생가(尹潽善 前大統領生家)

중요민속문화재 제233호 아산 건재고택(牙山 建齋古宅)

중요민속문화재 제236호 아산 외암마을(牙山 外巖마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6호 온주아문 및 동헌(溫州衙門 및 東軒)

충청남도 기념물 제144호 아산 공세리성당(牙山 貢稅里聖堂)

 

 

【 일 정 표 】2016년 07월 11일(월)-2016년 07월 12일(화) 1박2일

                             ◈ 첫째날(07/11) : (천안)본선홍경사 갈기비-직산현관아-천흥사지 오층석탑 & 당간지주-삼태리 마애여래입상-(아산)맹씨행단-온주아문 및 동헌-                                                        읍내리 당간지주-평촌리 석조여래입상

                             ◈ 둘째날(07/12) : (아산)외암민속마을(외암리 참판댁, 건재고택)-윤보선 전대통령생가-공세리성당

 

천안 및 아산에서의 탐방 명소 소개는 내가 찾은 관광명소 '강원&충청권'에 아래와 같이 총 10편으로 나누어 소개를 한다.

 

- 고려시대 최고의 유학자 '해동공자' 최충의 글천안 봉선홍경사 갈기비(天安 奉先弘慶寺 碣記碑)

- 고려시대 불교양식천안 삼태리 마애여래입상(天安 三台里 磨崖如來立像)

- 고려 초기 창건된 천흥사지의 문화재들천안 천흥사지 당간지주(天安 天興寺址 幢竿支柱) 및 오층석탑(五層石塔)

- 조선시대 직산현의 지방행정관청! 직산현관아<내동헌.외동헌.내삼문.외삼문>(稷山縣官衙<內東軒.外東軒.內三門.外三門>)

- 고려시대 아산의 불교문화재들!  아산 평촌리 석조약사여래입상(牙山 坪村里 石造藥師如來立像) 및 읍내동 당간지주(邑內洞 幢竿支柱)

- 예안 이씨가 대대로 살던 마을! 아산 외암마을(牙山 外巖마을)

- 조선시대 온양군의 관아건물! 온주아문 및 동헌(溫州衙門 및 東軒)

- 전형적인 중부지방의 구성을 한 상류주택! 윤보선 전대통령생가(尹潽善 前大統領生家)

- 주위 경관이 아름다운 천주교의 성지! 아산 공세리성당(牙山 貢稅里聖堂)

- 고려 최영 장군의 집으로 조선 전기 맹사성 가족이 살았던 아산 맹씨 행단(牙山 孟氏 杏壇)

 

 

「  아산 외암마을(牙山 外巖마을) 소개

 

*중요민속문화재 제236호(2000년01월07일 지정)

*면적:157필지/198,194㎡

*소재지: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

설화산 기슭 경사지에 위치한 외암마을은 약 500년전에 강씨와 목씨 등이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전한다. 조선 명종 때 장사랑을 지낸 이정이 이주해 오면서 예안 이씨가 대대로 살기 시작하였다. 그 후 이정의 후손들이 번창하고 많은 인재를 배출하면서 점차 양반촌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정의 6대손인 이간이 호를 ‘외암’이라 지은 후 마을 이름도 ‘외암’이라 불렀다고 한다.

현재 이 마을에는 영암댁·참판댁·송화댁 등의 양반주택과 50여 가구의 초가 등 크고 작은 옛집들이 상당부분 원래모습을 유지한 채 남아 있다. 양반집은 조선시대 상류주택의 모습을 잘 갖추고 있으며, 넓은 마당과 특색있는 정원이 당시 양반의 생활모습과 풍류를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초가 역시 예스러운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고, 돌담으로 연결된 골목길과 주변의 울창한 수림이 마을의 경관을 더욱 고풍스럽게 하고 있다.

특히 한 마을에 전통적인 수법의 상류·중류·서민가옥이 함께 남아있어 마을의 형성이나 전통가옥의 연구에 매우 가치가 있다. 또 설화산에서 시작된 냇물이 마을을 통과하며 이루어낸 정원은 매우 특색있고 운치있어 마을 전체가 귀중한 가치를 간직하고 있다.

 

 

옛 사람들은 아무곳에나 삶의 터전을 정하지 않았다. 바람과 물, 주변 환경과 지리, 나아가 인심까지 두루 살폈다.

외암민속마을에서는 우리 선조들이 어떻게 삶터를 정해 수백 년을 살아왔는지 읽을 수 있는 곳이다. 외암민속마을에 들어가면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생동감이 있고, 건축은 주변 환경이나 경관 속에 사람이 어울져 살고 있을 때 생동감을 지니게 되고 가치가 살아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외암민속마을은 살아있는 민속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

 

 

'태극기 휘날이며', '클래식', '소름', '꼭지', 임꺽정' 등 영화촬영지로 유명한 외암민속마을은 이번이 세번째 방문이다.

그러나 매번 방문할 때 마다 마을 전체를 탐방하지 않고 산책하듯 대충 탐방을 하였는데, 오늘은 안내도를 가지고 마을 전체를 둘러보기로 한다.

▷ 탐방경로:매표소-물레방아-반석정-풍덕댁-연자방아-참판댁-송화댁-참봉댁-건재고택-교수댁-감찰댁-신창댁-매표소

 

                  ▲ 외암민속마을 입구

                  ▲ 외암민속마을 입구의 석각과 물레방아

 

♧ 반석정과 석각

반석은 외암마을 입구에 있는 바위이다.

반석에 '외암동천(巍岩洞天)'과 동화수석(東華水石)'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 외암민속마을의 보호수인 느티나무

 

♧ 보호수 느티나무

- 수종 : 도나무 느티나무

- 지정번호 : 8-97(1982년11월01일 지정)

- 수령 : 600년

- 수고 : 21m, 나무둘레 : 5.5m

매년 음력 1월14일 외암민속마을 보존회 주관으로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전통의식인 느티나무 목신제가 실시되고 있다.

 

 

                  ▲ 외암민속마을 풍덕댁

 

♧ 풍덕댁(豊德宅)

이사종의 7세손인 이택주(1721~1775)가 풍덕군수를 지낸 연유로 풍덕댁이라 불린다.

 

                  ▲ 외암민속마을 풍덕댁의 사랑채(사진 左)와 안채(사진 右)

 

풍덕댁은 외암마을의 중앙 앞쪽에 있으며, 마을의 다른 집과 같이 'ㄴ'자 모양의 사랑채와 'ㄴ'자 모양의 안채로 이루어져 있고, 서쪽에 'ㅡ'자 모양의 창고를 두었다.

전체적으로 건물과 건물 사이가 조금씩 떨어진 'ㅁ'자 집으로 집 뒷편에는 마을의 다른 집에서 볼 수 없는 작은 동산이 있다.

 

♧ ♧ 아산 외암리참판댁(牙山 外岩里參判宅)

*중요민속문화재 제195호(1984년12월24일 지정)

*수량:5동

*소재지: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외암민속길 42-15(외암리)

 

 

외암리 민속마을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참판댁은 큰집과 작은집이 담장을 사이에 두고 이웃하여 자리잡고 있다. 19세기 후반 규장각의 직학사와 참판을 지낸 이정렬이 고종으로부터 하사받아 지었다고 한다. 큰집의 사당과 작은집의 대문채·사당은 20세기 초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 솟을대문을 단 외암리참판댁의 대문간채

 

동남향으로 자리잡은 큰집은 솟을대문을 낸 '一'자형 대문간채 안에 'ㄴ'자형의 사랑채와 곳간채가 'ㄱ'자형의 안채와 안마당을 감싸면서 튼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 외암리참판댁의 큰집 안채

 

                  ▲ 외암리참판댁의 큰집 사랑채(사진 上)

                                           큰집 사랑채 툇마루(사진 下)

                  ▲ 외암리참판댁의 큰집 곶간채

 

대문간채는 사랑채가 정면으로 보이지 않도록 약간 서쪽으로 틀어져 있다. 안채의 서북쪽 뒷편에는 사당이 자리잡고 있으며 대문 앞으로 돌담을 쌓아서 깊이 있는 진입로를 마련하고 있다.

 

                  ▲ 외암리참판댁의 작은집 안채(사진 左)와 사랑채(사진 右)

 

큰집 바로 아래에 있는 작은집은 서남향을 하고 있으며, 큰집과 비슷하게 튼 'ㅁ'자의 배치를 하고 그 앞에 대문간채가 '一'자형으로 있다. 안채와 사랑채의 평면구성은 큰집과 비슷하며, 사당은 안채의 동북쪽 뒷편에 있다. 대문간채는 초가지붕으로 평대문을 냈으며, 큰집과 달리 사랑채를 향하도록 동쪽으로 틀어서 배치하였다. 큰집의 대문 앞으로 돌담을 쌓아 공간을 연출한 것이 특이하다.

이 집은 돌담을 쌓아 아름다운 공간을 구획하고 있으며, 집안의 살림살이가 잘 보존되어 옛 생활방식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전통가옥이다.

 

 

 

♧ 외암 이간사당(李柬詞堂)

이간(1677~1727) 선생의 자는 공거, 호는 외암 또는 추월헌, 본관은 예안으로 입향조 사종의 6세손이다.

숙종조(1716) 세자시강원 자의, 영조 즉위 1년동안에는 회덕현감, 경연관을 잠시 지냈다. 정조 때 이조참판, 성균관 좨주, 순조때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불천위에 제수되었다.

 

                  ▲ 외암민속마을 이간사당

 

증호는 문정공으로 외암서원에 신주가 모셔졌다.

선생은 율곡을 태두로 하는 기호학파의 이름난 성리학자로 수암 문하의 강문팔학사 중 으뜸이었다. 선생의 독창적인 인물성동론은 윤화적 세계관, 이신론적 가치관을 바탕으로 체계화한 보통주의적 철학사상이다. 그의 인물성동론이 조선 후기 최대 학술 논쟁인 호락논변의 실마리가 되었으므로 스스로 낙론계의 선봉에 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인물성동론은 후속되는 인물균론, 인물막변론으로 빌전하여 북학파 형성에 영향을 주게 되었으며 조선 후기 정치적,사회적 혼란기에 통치 이념으로 변화되어 소인교화론, 탕평론, 서얼소통론 등 혁파 논리의 기초가 되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 외암민속마을 이간사당과 종손댁

                  ▲ 외암민속마을 송화댁 정원에서 바라본 외암 종손댁

 

♧ 외암 종손댁(宗孫宅)

외암 이간선생의 종손이 살고 있어 종손댁이라 불린다.

 

                  ▲ 외암민속마을 종손댁

                  ▲ 외암 종손댁의 안채 안방과 부엌(사진 左) 그리고 안채와 붙어있는 문간채(사진 右)

 

안채는 'ㄱ'자 모양으로 중앙에 2칸의 대청마루가 있고 왼쪽에는 안방과 부엌이 있다. 오른쪽의 건너방 앞에는 들마루를 내었고, 들마루 밑에 온돌용 아궁이가 있다.

안채 남쪽에 'ㅣ'자 모양의 문간채를 배치하였으며 대문 앞에 외암사당이 있다.

 

                  ▲ 넓은 마당에 조성된 정원이 있는 송화댁

 

♧ 송화댁(松禾宅)

송화군수를 지낸 이장현(1779~1841)으로 인해 '송화댁'이라는 택호가 붙었다.

이장현은 이사종의 9세손으로 호는 초은이며, 순조10년 식년시에서 진사가 되었다.

 

 

                  ▲ 외암민속마을 송화댁(사진 上)

                     송화댁의 사랑채(사진 下)

 

송화댁의 앞쪽에는 'ㄴ' 모양의 사랑채를 두고, 뒤쪽에 'ㄱ'자 모양의 안채를 두었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의 동편에 중문간을 두어 전체적으로 건물과 건물 사이가 조금씩 떨어진 튼 'ㅁ'자 집을 하고 있다.

넓은 사당 마당에는 정원을두었는데, 사람의 손이 많이 타지 않아 자연미가 절로 흘러 넘친다. 마을 상부에서 흘러온 물길을 적당히 굽이치게 하고 물길 주위에는 주변의 돌을 놓아 마치 산속에서 만난 계곡과 같다. 정원의 수목도 들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를 심어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150여년 된 정원수와 형상석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전통정원이다.

 

♧ 참봉댁(參奉宅)

이 집은 이서종의 12세손인 이중렬(1859~1891)과 그의 아들 이용후(1886~1955) 부자가 참봉 벼슬을 지낸 연유로 얻은 택호이다. 특히 이충렬은 1891년의 중광시에서 진사에 급제했다.

 

                  ▲ 외암민속마을 참봉댁

 

이 마을에서는 보기 드물게 'ㅡ'자 모양 안채와 사랑채가 나란히 2열로 평행 배열된 '二'자 집이다.

약 6m의 거리를 두고 안채와 사랑채를 배치하였는데 정면 길이는 같고 측면의 폭은 서로 다르게 하였다.

 

♧ 교수댁(敎授宅)

조선시대 말 대구판관, 전라도와 경상도 관찰사, 성균관 대사성, 명성황후 혼전향관을 지냈고,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한 퇴암 이성렬(1888~1943)이 살던 집으로, 후에 성균관 교수를 지낸 이용구(1854~?)가 살게 되면서 붙은 택호이다.

 

 

 

                  ▲ 외암민속마을 교수댁 안채(사진 上)

                     교수댁의 사랑채(사진 中)

                     교수댁의 문간채(사진 下)

 

이 집은 원래 'ㄱ'자 모양의 안채와 'ㄴ'자 모양의 사랑채, 'ㅡ'자 모양의 문간채로 이루어져 '므'자 모양으로 이루어졌으며, 안채 우측에 사당이 있고 사랑채 우측에 별채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 외암민속마을 교수댁 사랑채와 문간채 사이 마당의 정원

 

교수댁의 정원은 건재고택, 송화댁과 함께 외암마을을 대표한다.

정원의 크기는 건재고택이나 송화댁 보다 작지만 인위적으로 꾸민 정원은 다른 양반집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설화산에서 흘러온 수로를 마당으로 끌어들여 굽이치게 하고 연못을 만들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수목 등 아름다운 정원을 갖추었으나 일부 정원이 훼손되었다.

 

♧ ♧ 아산 건재고택(牙山 建齋古宅)

*중요민속문화재 제233호(1998년01월05일 지정)

*소재지: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외암민속길 19-6(외암리)

 

 

설화산 아래 자리한 외암리마을의 중심부에 서북향한 옛집으로 '영암집'이라고도 한다. 조선 숙종 때의 문신 이간(1677∼1727)이 태어난 집을 현 소유자의 증조할아버지인 건재 이상익(1848∼1897)이 고종 6년(1869)에 지금 모습으로 지었다고 한다.

 

 

                  ▲ 아산 건재고택의 안채 대청마루(사진 上左)와 안방(사진 上右)

                                            안채 전체 전경(사진 下)

 

문간채·사랑채·안채를 주축으로 하여, 안채의 오른쪽에 나무광·왼쪽에 곳간채·안채 뒷편 오른쪽에는 가묘(家廟)를 배치하였다. 안채와 사랑채는 'ㄱ'자형 집으로 마주하여 튼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또 사랑채 앞은 넓은 마당으로 연못과 정자 등으로 구성된 정원을 꾸몄다.

 

                  ▲ 아산 건재고택의 사랑채

 

                  ▲ 아산 건재고택의 사랑채 내부(사진 上左)와 앞퇴(사진 上右)

                                            사랑채 측면 툇마루 전경(사진 下)

                  ▲ 아산 건재고택의 사랑채 후면

 

우리나라 전통 정원은 사랑채 앞마당을 빈 공간으로 두거나 화단을 꾸며 나무를 심었는데, 이 집은 자연경관을 위주로 한 정원을 꾸몄다. 소나무·은행나무·감나무 등의 수목을 마당 전체에 자연스럽게 심고 일본 정원의 기법인 거북섬을 꾸며, 전통과 외래 조경이 섞인 조선 후기 절충형 정원을 이루고 있다. 또한 설화산 계곡에서 흐르는 명당수가 마당을 거쳐 연못으로 흐르게 하는 특이한 조경을 보이고 있다. 연못자리에는 원래 별당이 있었다고 한다. 정원에 있는 2동의 정자는 원래 초가였던 것을 기와지붕으로 개조한 듯하다. 집 주위에는 돌담을 둘렀고 담 밖에는 초가로 지은 하인집이 있다.

 

 

                  ▲ 아산 건재고택의 가묘(사진 上左)와 노비집(사진 上右)

                                            문간채(사진 下)

 

집안에는 도자기·낙관·서화·현판·생활용구 등 대대로 물려오는 유물 300여 점이 보관되어 있다. 특히 사랑채에 보관되고 있는 '이간(李柬)'의 교지는 '입향조(入鄕祖)'의 근거자료가 된다. 조선 후기 사대부가의 전형적인 건축으로, 건물의 배치와 규모·기법으로 보아 외암리 민속마을을 대표할 만한 주택이다.

 

 

 

♧ 감찰댁(監察宅)

택호의 유래를 알 수 없으나 옛 주인의 관직에서 따온 것으로 추측된다.

 

 

                  ▲ 외암민속마을 감찰댁(사진 上)

                     미공개로 출입이 불가능하여 담장 너머로 바라본 감찰댁(사진 下)

 

안채의 중앙에 있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6칸 대청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방을 서쪽에는 마루방을 설치하였고, 아랫쪽으로 안방이 있으며 이어서 부엌과 작은 방을 배치하였다.

안채의 동쪽 뒤편에 가묘가 있는데, 정면 1칸, 측면 1칸 반, 홑처마 맞배지붕이며 측면이 긴 형태로 되어 있다.

안채의 동쪽에는 대나무숲이 있고, 그 앞으로 정원과 정자가 있으며 작은 연못이 조성되어 있다. 사랑채와 문간채는 오래 전에 훼손된 것을 고증하여 최근에 복원하였다.

 

                  ▲ 외암민속마을 신창댁

 

♧ 신창댁(新昌宅)

홍경래의 난을 진압한 이용현(1783~1865)과 관련이 있다.

이용현은 이사종의 9세손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총관, 경연특진관 등을 지냈다. 이용현의 6세손인 이창선까지 살았으므로 전에는 이 집을 병사댁이라 불렀으나 그 후손이 서울로 이전하여 현재는 신창댁으로 부르고 있다.

 

                  ▲ 식당으로 영업중인 외암민속마을 신창댁 안채(사진 左)와 입구의 간판(사진 右)

 

신창댁이란 택호는 이사종의 12세손인 이세열씨의 부인인 보성 임씨의 친정이 신창인데서 기원한다.

사랑채가 따로 없는 이 집의 안채는 마을에서 유일하게 '∩'자 모양 평면으로 가운데 3칸의 대청마루를 두고 건너방 끝방을 사랑방으로 사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