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고18회/추억의 앨범들

2008년 가을 가족야유회 및 18산우회 강원도 1박2일 여행-제1편-

왕마구리 2008. 11. 25. 19:42

◀ -제1편- 오대산 월정사에서... ▶

▲ 월정사 대웅전과 팔각구층석탑을 배경으로...

【 여행일자 】2008년 11월 22일(토)~23일(일) 1박2일

【 여행코스 】강원도 일원

서울 잠실역출발-강원도 오대산국립공원 월정사-오대산국립공원 소금강-양양 솔비치콘도(숙박)-낙산사주차장/건어물 장보기-설악산국립공원 신흥사-권금성/케이블카관광-서울 잠실역도착 

【 참 석 자 】총 27명(13가족)

김광훈+이동희, 김경암+김경선+김가연, 김상수+이숙희, 김정두, 서영호+박미연, 윤창희+이미옥, 이상우+이영화, 이성규+김종구, 이종익+송미란, 이현동+이경희+이준규, 정지언+노숙희, 조경수+손순희, 천영면+김미숙

【 교 통 편 】45인승 관광버스

이번 여행은 10월 예정하였던 백령도 1박2일 관광이 졸업30주년 모교방문 행사 및 총동창회 체육대회(대구), 총동창회 기별등산대회(예봉산) 등 매주 주말에 행사가 연이어져 부담이 된다는 이유로 무기연기시키고, 11월 매년 개최하던 부부동반 가족초청 월례회 겸 송년모임을 12월 동기회 송년모임과 통합, 실시키로 결정되어 11월 2일(일) 18산우회 정기산행인 계룡산 단풍산행, 백령도 1박2일 관광, 그리고 11월 가족초청 월례회 등 3개의 행사를 통합하는 '2008년 재경대구고 18회 동기회 가을 가족야유회 겸 18산우회 11월 정기산행' 이란 타이틀로 13가족 총 27명의 동기 및 가족이 참석한 가운데 강원도 일원 관광을 실시하게 되었다.

항상 관광이나 산행을 하고 나면 기념촬영한 사진만으로 그 추억을 회상하는 것으로 만족을 하였고, 다녀온 곳이지만 각 관광지나 산행지에 대하여 충분한 지식을 습득하는 것을 게을리하는 경향이 있어 이번 여행기에서는 여행지의 자료를 수집하여 설명을 곁들여 작성하기로 한다.

이렇게라도 사진과 함께 설명을 첨부하여 약간의 지식을 얻게 된다면 예전보다는 더 오랜 기간동안 친구들과 함께 한 소중한 추억들을 기억하는데 도움이 되리란 생각이 들었고, 단순히 잘 놀고, 잘 먹고 마시고 좋은 경치를 잘 보고 왔다는 차원을 넘어 다시 한 번 더 복습을 함으로서 본인이 다녀온 여행지에 대한 기초 상식 정도는 습득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여행기 작성 방법을 약간 바꾸어 보기로 하였다.

이번 여행에서는 주말 영동고속도로의 차량 증가로 인한 정체 등으로 이동시간이 계획보다 길어져 처음 계획하였던 첫째날 소금강에서의 관광코스 축소(소금강주차장~구룡폭포 구간에서 무릉계)와 둘째날 숙소 출발시간이 지연되어 낙산사와 하조대 관광을 취소하는 아쉬움이 남았지만, 동해안의 일출을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숙소에서 감상할 수 있는 행운을 얻기도 하였다.

 

넋두리 한마디~~~

모든 여행에서 각 여행지에 따라 계절, 방문 횟수, 그리고 각자의 여행목적이나 보는 관점에 따라 느끼는 만족도는 각기 다르고, 특히 단체 여행에서 진행에 불만이나 아쉬운 생각이 들겠지만, 개인 여행이 아니고 예정된 계획대로 여행이 이루어지는 단체여행임을 감안한다면 이를 감수해야 하고 특히 기획단계에서 본인들이 원하는 바를 설명하거나 요청하지 않은 상황에서 본인들이 원하는 바를 하고 싶다면 앞으로는 개인이나 소규모 단위의 여행을 할 수 밖에 없어, 더 이상의 단체 여행을 기획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참가 구성원이 불만족스러운 여행을 기획하는 사람도 부담스러우며, 몇 차례 다녀 갔던 여행지를 다시 가는 기획자도 아까운 시간과 정열을 낭비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영리를 목적으로 기획을 한다면 구성원의 불평불만을 감수하며 여행을 진행하겠지만 기획자 또한 구성원의 한 사람이라면 욕 먹는 기획자이기를 포기하고 남들처럼 자유 의사대로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는 구성원으로 돌아가기를 원하거나 혼자서 새로운 여행지를 찾아 체험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후자를 택해 혼자서 새로운 여행지를 찾아 가겠지만...

 

이번 여행기는 관광지의 설명을 곁들여 작성을 하는 관계로 각 관광지별로 나누어 작성을 하기로 한다.

 

- 제1편 - 오대산 월정사에서...

- 제2편 - 오대산 소금강에서...

- 제3편 - 솔비치콘도에서... 그리고 일출

- 제4편 - 설악산 신흥사와 권금성에서...

 

▷ 오대산 월정사 소개

 

▲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앞에서...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오대산 동쪽 계곡에 위치한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25개 교구본사 중 제4교구의 본사이다.

자장율사가 중국 유학 중 636년 중국 오대산 문수사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였는데 "너희 나라 동북방에는 일만의 내가 상주하고 있으니 그곳에서 다시 나를 친견하라"는 게송을 문수로 부터 듣고 신라로 돌아오자 마자 문수보살이 상주한다는 오대산으로 들어 와 선덕여왕12년(643)에 임시로 초가를 짓고 머물면서 문수보살을 만나기를 고대하며 정진하였는데 이것이 월정사의 창건 기원이다.

자장율사는 3일동안 음산한 날씨가 계속되어 문수보살 친견이라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태백 정암사에서 입적을 하게 되었으며, 비록 문수보살을 친견하지는 못하였지만 이로부터 월정사는 오대산 깊은 계곡에 터를 잡게 되었다.

그 뒤 유동보살(석가모니가 전생에 보살로서 수행할 때 연등불에서 공양했는데 그 당시의 이름)의 화신이라고 전해지는 신효거사와 범일국사의 제자였던 두타승 신의스님이 자장율사가 지었던 초가 터에 암자를 짓고 살았다. 신의스님이 죽은 후 오래동안 황폐하였던 이곳을 수다사(진부면 수항리에 있던 절로 지금은 절터만 있음)의 장로 유연스님이 암자를 짓고 살면서 월정사의 사찰 면모를 갖추었다. 

그 무렵 월정사는 금당 뒤쪽이 바로 산인 특수한 산지가람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금당 앞에 탑이 있고 그 옆에 강당 등의 건물이 세워져 있었는데 이는 남북자오선 위에 일직선으로 중문, 탑, 금당, 강당 등을 세운 신라시대 일반적인 가람 배치와는 다르다.

고려 충렬왕33년(1377) 화재로 전소된 것을 이일이 중창하였고, 조선 순조33년(1833)에 다시 화재로 전소된 것을 현종10년(1844년)에 영담, 정암스님 등이 중건하여 큰 사찰로서의 모습을 다시 회복하였다. 1911년에는 전국 31본산의 하나가 되어 강원도 남부의 사찰을 총괄하며 내려오다가 6.25전쟁 때 1.4후퇴 당시 작전상의 이유로 국군에 의하여 칠불보전을 비롯하여 영산전, 광웅전, 진영각 등 17동 건물이 모두 불타고 소장 문화재와 사료들도 모두 재가 되어 버린 비운을 맞이 하였다.

 

1964년 탄허스님이 법당인 적광전을 중창한 뒤 만화스님이 꾸준히 중건하여, 현재 삼성각, 대강당, 심검당, 승가학원, 범종각, 용금루, 일주문, 요사채, 창고 등이 있다.

동대 만월산을 뒤로 하고 그 만월산의 정기가 모인 곳에 고요하게 들어앉은 월정사는 사철 푸른 침엽수림에 둘러싸여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띠고 있으며, 그 앞으로는 맑고 시린 물에서 열목어가 헤엄치는 금강연이 또한 빼어난 경관을 그리며 흐르고 있다. 월정사를 품고 있는 오대산은 자연 조건이며 풍광이 빼어날 뿐더러 예로부터 오만 보살이 상주하는 불교성지로서 신성시 되고 있다. 신라 때부터 지금까지 1400여 년 동안, 개산조 자장율사에서부터 근대의 한암, 탄허스님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름난 선지식인들이 머물던 곳이려니와 월정사는 오늘날에도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이 곳 전나무 숲의 곧음과 푸름으로 승가의 얼을 지키고 있는 한국불교의 중요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

 

▲ 김광훈 동기회장 부부

♣ 월정사 적광전(寂光殿)

▲ 오대산 적광전

 

팔각구층석탑 뒤에 만월산 자락의 한 기운이 엉긴 곳에 자리한 적광전은 남향으로 된 정면 5칸, 측면 4칸의 매우 큰 법당으로 팔작지붕에 다포계 양식으로 세워졌으며 갖가지 문양이 어우러진 단청이 매우 화려한 건물이다.

1930년대 조선고적도보에 의하면 과거 7불을 모신 칠불보전이 자리하고 있었으나 6.25 전쟁 때 아군에 의해 소실되었다가 1968년 만화스님이 주지로 계실 때 다시 중건되었다. 적광전 외부 기둥 18개 중 16개는 오대산에서 자생하는 소나무이고 2개는 괴목이며, 내부기둥 10개는 오대산에서 자생하는 전나무로 만들었다.

적광전이 소실되기 전에는 칠불보전이라 했으며, 내부에는 비로자나 부처님을 모시는 것이 통례이나 이곳 적광전에는 그 통례를 깨고 석굴암의 본존불 형태를 따른 석가모니 대불이 봉안되어 있고 협시불을 모시지 않은 것도 특이하다. 이는 1964년 만화스님 법당 중창 당시에는 현판이 대웅전이었으나 1950년대 탄허스님의 오대산수도원을 기념하기 위해 결사의 주 경전이었던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신다는 의미로 적광전으로 현판을 고쳐 달았다.

적광전 뒷편 벽화는 10개의 소를 찾아 다니는 이야기를 그린 심우도가 그려져 있으며, 적광전 현판과 주련 글씨는 탄허스님의 친필이다. 주련의 넉 줄은 자장율사의 불탑게이다.

 

▲ 서영호 동기 부부

 

♣ 월정사 팔각구층석탑(月精寺 八角九層石塔)

    *국보 제 48호

    *소재지: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63-1

▲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월정사의 본당인 적광전의 앞뜰 중앙에서 조금 비껴난 자리에 위치해 있으며 연꽃 무늬로 치장한 이층 기단과 균등하고 우아한 조형미를 갖춘 탑신 그리고 완벽한 형태의 금동장식으로 장엄한 상륜부 등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뛰어난 석탑이다.

신라의 자장율사가 세웠다고 하나, 그 무렵의 탑들은 평면 정방형에 삼층 또는 오층의 탑으로 이루어진 점에 견주어 이 탑은 평면이 팔각형이며 탑의 층수도 구층에 이르는 늘씬한 자태를 이루어 고려시대의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탑은 전체를 화강암으로 조성하고 상륜부에 일부 금동장식을 더하였는데 여러차례 화재로 손상을 입은 부분이 더러 있으나 오늘날까지도 본래의 형태를 그대로 간직해 오고 있다. 기단은 아랫층 각면에 안상을 새기고 연꽃 장식을 하였으며 그 위로 괴임돌을 놓아 윗층 기단을 정성스레 받들어 기단 전체가 마치 부처님의 연꽃 대좌처럼 장식되었고 그 위에 탑신을 설치하였으니 탑신은 부처님인 셈이다.

탑신 안에는 부처님의 사리를 모셨으니 불사리는 부처님의 전신이나 다를 바 없고 그러한 전신의 부처님이 연꽃 대좌 모양의 기단위에 계신 것은 당연하다.

그리하여 기단 위에는 부처님을 앉히기 위하여 방석과 같은 석재를 별도로 끼웠으며 탑 앞의 석조보살 좌상도 부처님과 같은 탑 앞에서 공양하는 자세를 하고 있다.

탑신은 일반적인 석탑의 경우 위층으로 올라 갈수록 급격히 줄어드는 모습과는 달리 2층 탑신부터 거의 같은 높이를 유지하고 있으며 하늘을 향해 솟아 오르는 느낌을 더해주고 있다.

팔각은 불교의 실천수행에 기본이 되는 팔정도를 상징하며, 층마다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석재로 이루어지고 일층 탑신의 사면에는 사각형의 작은 감실(불상을 모셔주는 방)이 하나씩 마련되어 있는데 남면의 감실이 가장 크고 문틀을 단 흔적이 있다.

몸돌은 모서리마다 귀기둥이 새겨지고 끝은 밑면이 수평이고 위는 곡선으로 처리하여 추녀 끝이 살짝 위로 솟아 들려 있는 여덟 곳의 귀퉁이에는 풍경이 달려 있어 언제나 바람의 향기를 음미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흐트러짐이 없는 정연한 상륜은 보탑의 격조를 한층 더하여 주며, 여기에 금동장식을 더하여 탑위에 보관을 얹은 듯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여러번의 화재로 1970년 해체보수를 통하여 1, 5, 6, 9층을 새 돌로 갈았으며, 그 당시에 1층과 5층에서 총 12점의 사리구가 발견되었다. 은제의 불상 1구와 4점의 청동거울, 금동 향합과 향주머니, 진신사리경 등 총 12점의 유물들은 2003년 6월 보물로 일괄 지정되었다.

 

또한 2000년 8월 월정사 석조보살좌상 보수공사 시에는 지하 1m 아래에서 탑의 기단부로 보이는 또 하나의 유구가 발견이 되어 학계의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이 팔각구층석탑은 높이 15.2m로 우리나라 팔각석탑으로는 가장 크고, 아름다움에서도 단연 으뜸인 고려전기 10세기경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또한 당시 불교문화 특유의 화려하고 귀족적인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전체적인 비례와 조각수법이 착실하여 다각다층석탑을 대표할 만하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풍경과 금동으로 만들어진 머리장식을 통해 금속공예의 수법을 살필 수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48호로 지정되었다.

 

 

 

▲ 김경암 동기 가족

 

♣ 월정사 석조보살좌상(石造菩薩坐像)

   *보물 제139호

   *소재지: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63

 

 

월정사 경내의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팔각구층석탑을 향하여 정중하게 오른쪽 무릎을 꿇고 왼다리를 세워 두손을 모으고 탑을 공양하는 모습을 취하고 있는 좌상 전체 높이 1.8m의 석조보살좌상이다.

입에 부드러운 웃음을 머금고서 부처님을 바라보고 있는 이 보살상을 일명 약왕보살이라고도 한다.

턱이 약간 길고 눈두덩이 두껍고 빰은 도톰하며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띠고 있어 복스럽게 느껴진다.

머리위에 높다란 원통현관을 쓰고 있는데 관 옆에 작은 구멍이 얕게 파져 있는것으로 보아 관에 장식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이 된다. 보발은 등으로 살짝 감추어져 있으며 목에는 삼도를 새기고 앞가슴은 영락으로 장엄한 채 두손을 가슴앞에 모아 무엇을 잡고 있는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조금 아래로 내려 놓은 오른쪽 팔꿈치는 아래에 받침을 괴었는데, 재미있게도 이 받침은 동자상이다.

 

지금은 월정사 경내 성보박물관에 이전하여 보관중이다.

 

2000년 8월 석조보살좌상 보수공사 당시 지하 1m 아래에서 상중하 3부분으로 구성된 대좌가 발견되어 학계의 많은 동향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대좌의 연꽃문양은 통통하게 살이 오른 둥글며 커다란 중판연화문을 조각했다.

 

이 보살은 탑을 향하여 정중앙이 아닌 오른쪽으로 조금 치우쳐 앉아 있고, 상체가 하체에 견주어 큰데 이것은 우리 눈의 착시현상을 감안한 것이다.

그리고 오른쪽 무릎을 꿇은 것은 고대 인도의 관습에 따라 자신을 낮추고 스승에게 최상의 존경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다.

 

이 석조보살좌상은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강릉 신복사지 석불좌상(보물 제84호)과 같은 형식이지만 상체에 비해 하체가 빈약하여 조형상 다소 불균형스런 모습이다.

그러나 개태사와 신북사지 탑 공양상과 더불어 고려시대 화엄종 계통사원에서 만든 특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며, 당대 불교사상의 한 단면을 살펴 볼 수 있는 작품으로 높이 평가된다.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39호로 지정되었다.

 

이 보살상이 약왕보살임은 법화경에 잘 나와 있는데,

법화경 약왕보살본사폼에는 과거 일월정명덕 부처님이 계실 때, 희견보살이 부처님으로부터 법화경 설법을 듣고 현일체색신삼매를 얻었다.

환희심에 가득찬 보살은 여러가지 공양을 올렸고, 마침내 천이백년동안 향을 먹고 몸에 바른 후 자신의 몸을 태우며 공양하였다.

그리고 다시 몸을 받아 일명정명덕국의 왕자로 태어났을 때 일월정덕여래는 그가 장차 부처님이 될 것이라는 수기를 주었다.

희견보살은 부처님의 사리를 수습하여, 팔만사천의 사리탑을 세우고 탑마다 보배로 만든 깃발과 풍경을 매달아서 장엄하게 꾸몄다. 그러고도 모자라 탑앞에서 자신의 두 팔을 태우며 칠만이천 세 동안 사리탑을 공양하였으니 이 분이 바로 약왕보살이다.

 

 

▲ 천영면 동기 부부

 

♣ 월정사 수광전(무량수전)

▲ 월정사 수광전

 

무량수전은 서방 극락정토의 교주 아미타불을 모신 곳으로 수광전, 극락전이라고도 한다.

아(阿)란(아미타 Amitabha, 무량광無量光, 무량수無量壽) 한량없다(無)의 뜻으로 미타는 수명을 뜻하니 목숨이 없는 수명의 다함이 없는 부처님이란 뜻이다.

월정사 무량수전은 상단에는 아미타부처님과 협시보살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좌우에 모시고 뒤쪽으로 극락의 법회 장면을 묘사한 목각탱화 극락회상도를 모시고 있다. 중단에는 지장보살님을 모시고 지장시왕 목각탱화를 봉안하고 있으며, 하단에는 지옥의 중생을 극락으로 인도한다는 인로왕보살님을 금선묘의 탱화로 봉안하고 있다.

지금의 무량수전은 1989년 도명스님 때 착공하여 1992년 현해스님이 완공한 건물이다.

 

▲ 정지언 동기 부부

 

♣ 월정사 범종루(梵鐘樓)와 석경원(碩經院)

▲ 월정사 범종루와 석경원

 

범종루는 북, 종, 운판, 목어 등 사물을 두는 곳이다.

새벽예불과 저녁예불 등 하루에 두 번 두드린다. 북은 걸어 다니는 모든 중생을, 종은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위해 친다. 이 종소리를 들으면 지옥 옥졸들이 지옥 중생들을 괴롭히다가 잠깐 쉰다고 한다. 운판은 청동이나 철로 만든 구름 모양의 넓은 판으로 날아 다니는 중생들이 이 소리를 듣고 해탈하라고 친다. 목어는 물고기 모양으로 나무의 속을 파서 만들었으며 물 속에서 사는 중생들을 위해 두드린다.

 

석경원은 범종루 아래에 위치해 있으며 불교서적과 불구용품을 판매하고 있다.

 

원래 1층 건물이었던 것을 1973년 8월에 육바라밀을 상징하여 2층 6각으로 개축한 것이며, 단청이 화려하고 아름다운 팔작지붕의 누각형 건축으로 1994년 현해스님이 보수했다. 범종루에는 신라계통과 중국계통의 범종양식을 절충한 높이 154cm, 구경 89cm인 범종이 있는데 용문산 상원사에서 옮겨온 것으로 그 소리가 은은하기로 유명하다.

범종의 주조연대는 불기 2524년(1980)이고 몸체 사방에는 생황, 비파, 북, 피리의 악사비천을 배치하였는데, 이는 8세기 신라 상원사 동종 악사비천상 이래의 범종양식을 계승한 것이다.

 

▲ 이현동 동기회 총무이사 부부

 

♣ 월정사 삼성각(三聖閣)

 

 

 

 

 

 

삼성각은 독성 나반존자, 산신님, 칠성님을 모신 곳이다.

 

나반존자는 남인도 천태산에서 홀로 선정을 닦아 십이연기를 깨달은 성자로 우리나라에서는 단군을 신격화한 것으로 신앙되고 있다.

 

칠성님은 본디 중국에서 유입된 도교신앙의 신으로 북두칠성의 별자리를 신격화한 것으로 한국에 들어와 토착화 되었다.

처음에는 약사신앙과 결합되었다가 조선 중기 이후 수명신의 본디 모습이 강조되어 병자나 자식 낳기를 기원하는 사람들의 신앙이 되었다.

 

우리나라에는 산에 호랑이가 많았으며 산을 주재하는 산악신이 있다고 믿었는데 산신님의 다른 모습이 호랑이라고 믿었으며 주로 호랑이와 같이 표현되었다.

 

이는 모두 불교가 들어 오면서 호법신장의 하나로 흡수된 것으로 불교의 포용력과 흡수력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삼신각 상단에 칠성탱화와 칠성조각을 모시고, 향우측으로 산신탱화와 산신조각, 향좌측으로 독성탱화와 조각을 봉안하고 있다.

1994년 현해스님이 중건하엿다.

 

 

 

 

▲ 이상우 동기 부부

 

♣ 월정사 금강루

 

▲ 월정사 금강루

 

월정사의 금강루는 사천왕문을 지난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일주문, 사천왕문, 불이문으로 이어지는 한국사찰의 가람배치에 있어서 월정사는 불이문의 자리에 금강문을 두고 있다.

금강문의 오른쪽에는 움금강역사상이라고도 하는 나라연금강이, 왼쪽에는 훔금강역사상이라고도 불리우는 밀적금강이 있으며 특히 밀적금강역사는 지혜의 무기인 금강저를 들고 부처님을 호위한다.

이는 일체만물의 생명에서부터 소멸까지를 표현한 것으로 금강역사의 강한 힘과 지혜로 불법을 호지하고 사찰을 수호하며 불교의 진리를 표현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 2층 누각으로 1997년 12월 현해스님이 착공하고 1999년 10월에 낙성하였다.

 

▲ 김상수 동기 부부

 

♣ 월정사 일주문

  

  

▲ 상원사 일주문(측면)

▲ 상원사 일주문(정면)

 

▷ 월정사의 인물들

♣ 개산조 자장율사

신라 진평왕12년(590) 진골출신으로 소판 벼슬을 지낸 김부림의 아들로 태어났다. 늙도록 자식이 없던 김부림은 부인과 함께 천수관음보살 앞에 나아가 자식 낳기를 발원하여 자장을 얻었다.

자장은 어려서부터 마음이 맑고 슬기롭고 문장과 생각이 풍부하여 세속에 물들지 않았다. 부모를 여윈 뒤로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고 원녕사란 절을 짓고 수도의 길로 들어 구도를 위해 혼신의 정열을 쏟고 있을 때 조정에서 여러차례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엿다. 이에 선덕여왕이 "취임하지 아니하면 목을 베리라" 하여도 끝내 출사하지 않고 "내 차라리 하루라도 계를 지니고 죽을지언정, 백년을 파계하고 살기를 원치 않는다"고 하며 강한 출가 의지를 나타내니 선덕여왕도 어쩔 수 없이 출가를 허락하였다.

자장의 수도가 날로 깊어지자 많은 사람들이 계를 받으려고 찾아왔으나 그럴수록 자장은 당나라로 건너 가 불법을 더욱 익혀 크게 교화하기를 바랐다.

마침내 선덕여왕5년(636)에 당나라에 건너가 문수보살이 머무는 오대산에 가서 기도하던 중 꿈에 노스님이 나타나 게송을 주었다. 문득 깨어나니 꿈은 선명하나 게송이 모두 범어였으므로 그 뜻을 전혀 알 수 없었다. 이튿날 아침, 스님이 오셔서 "어찌하여 수심에 싸여 있습니까?"하고 물으니 자장율사가 "꿈에 대성인에게서 사구게를 받았으나 해석할 수 없어서 입니다."하였다. 그러자 그 스님이 게송을 해석해 주고 가사와 발우 한 벌, 부처님의 정골 사리 등을 주면서 "이것은 부처님의 도구이니 잘 간직하시고, 당신의 나라 동북방 명주 땅에 오대산이 있는데, 그곳에 일만의 문수보살이 늘 거주하니 가서 뵙도록 하시오."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자장율사는 문수보살을 친견한 것이었다. 자장율사는 중국에 더 머무르다가 선덕여왕12년(643)에 돌아와 오대산에 월정사를 창건하였다.

그 뒤로 분황사에 머물면서 나라의 최고 고문인 대국통이라는 벼슬에 추대되어 황룡사에 아홉 층짜리 탑을 세울 것을 건의하였다. 탑을 아홉층으로 함은 주변의 아홉 나라가 신라를 중심으로 뭉쳐지기를 바라는 간절함을 상징하는 것이니, 이 구층탑의 조성으로 삼국통일을 기원하였다.

황룡사 구층탑은 선덕여왕14년(645) 두 해에 걸친 공사 끝에 완공되었으며, 선덕여왕15년(646)에 양산 통도사에 금강계단을 세워 중생제도에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이렇게 자장율사가 불교 교단의 기강을 바로 세우는데 전력을 다하니 머리 깎고 스님이 되기를 원하는 자가 해마다 늘어났다. 만년에 서라벌을 떠나 명주 땅을 찾아나서 강릉 가까운 곳에 수다사를 세웠고, 꿈속에서 이끌린 대로 태백산 갈반지를 찾아 석남원을 세우고 입적할 때까지 이 곳에서 만년을 보냈다.

 

♣ 한암당 중원 대종사

경허, 만공, 수월과 함께 근세에 선종을 중흥시킨 한암스님은 1876년 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났다. 호는 한암이요, 이름은 중원이며 온양이 본관이다.

천성이 영특하고 총기가 뛰어나 한 번 의심이 나면 풀릴 때까지 캐묻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스물 두 살이 되던 해 금강산에 유람을 갔다가 발심하여 장안사에서 출가하였다.

출가한 뒤 몇 해 지나 신계사 보운강화에 갔다가 보조국사의 '수심결'을 읽고 크게 깨달은 바 있었고, 구름처럼 떠돌아 다니는 운수행각에 나서 성주 청암사에서 경허화상을 만났다. 하루는 경허화상을 모시고 차를 마시다가 경허화상이 '선요'의 한 구절인 "어떤 것이 진실로 구하고 진실로 깨닫는 소식인가? 남산에 구름이 일어나니 북산에 비가 내린다"라는 문답을 인용하면서 이것이 무엇인가?  하자, 한암은 "창문을 열고 앉았으니 와장이 앞에 섰다"고 답하였다. 경허화상은 이튿날 법상에 올라가 대중을 돌아보면서 "한암의 공부가 개심을 초과했다."고 인가하였는데 이 때가 스물 네살이었다.

서른살되던 해인 1905년 양산 통도사 내원선실의 조실로 있다가 1910년 봄에 선승들을 해산시키고 평안도 맹산 우두암에 들어가 보임 중에 불을 지피다가 홀연히 깨달음을 얻었으니 이 때가 서른 다섯 되던 겨울이었다.

한암은 이 때부터 중생이 서로 의탁하여 사는 이 세상에 들지도 않고 나지도 않으면서 수시수처에서 선풍을 크게 떨쳤다.

한암스님이 쉰이 되던 1925년 서을 봉은사 조실 스님으로 있다가 "차라리 천고에 자취를 감춘 학이 될 지언정 삼춘에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배우지 않겠노라"하면서 오대산에 들어갔다. 한암은 오대산에 들어와 들고 다니던 단풍나무 지팡이를 중대 사자암 앞뜰에 심었는데 지팡이가 꽂힌 자리에서 잎사귀와 가지가 돋아나와 나무가 되니 중대암 앞 단풍나무가 그것이다. 이즈음 조계종 초대종정이 되었다.

 

하루는 일본 조동종 사토오가 오대산 상원사에 와 한암에게 "어떤 것이 불법의 대의입니까?" 하고 묻자 한암스님은 놓여 있던 안경집을 들어 보일 뿐이었다. 계속해서 "스님은 대장경과 조사어록을 보는 동안 어느 경전과 어느 어록에서 가장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까?" 하니 한암스님은 사토오의 얼굴을 쳐다보며 "적멸보궁에 참배나 갔다 오라."고 대답하였다.

이어 사토오는 "스님께서는 만년의 경계와 초심의 경계가 같습니까, 다릅니까?"하고 묻자 한암은 "모르겠노라." 대답했다. 이에 사토오가 일어나 절을 하면서 활구 법문을 보여주어 감사하다고 하자, 한암스님은 "활구라고 하였으니 벌써 사구가 되었네." 하였다. 사토오는 삼 일 동안 머물다 떠나면서 "한암스님은 세계에서 둘도 없는 인물이다." 하며 떠났다.

이 일이 있은 다음부터는 일본의 저명인사의 발걸음이 잦았다. 일본 경무국장(치안감) 이케다가 2차대전 막바지에 찾아와 "이번 전쟁은 어느나라가 이기겠습니까?" 하고 물으니 스님은 "이 있는 나라가 이기지요." 하며 부드러우면서도 날카롭게 대답하였다. 패색이 짙은 전세를 아는 이케다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떠났다 한다.

 

6.25전쟁이 나자 모든 사람들이 피난을 떠났으나 한암은 그대로 상원사에 남았다. 이어 1.4후퇴 때에 국군이 월정사와 상원사가 적의 소굴이 된다 하여 모두 불태우려고 했다. 월정사를 불태우고 상원사에 올라온 군인들이 상원사 법당을 불태우려고 했는데, 한암스님이 잠깐 기다리라고 이르고 방에 들어가 가사와 장삼을 수하고 법당에 들어가 불상 앞에 정좌한 뒤 불을 지르라고 했다.

장교가 "스님이 이러시면 어떡합니까?" 하자 "나는 부처님의 제자요, 법당을 지키는 것이 나의 도리니 어서 불을 지르시오." 하며 자세를 흐트리지 않았다. 이에 감복한 장교는 법당의 문짝만을 뜯어내 마당에서 불을 지르고 떠났다. 오늘날 상원사 법당이 남은 것은 오로지 한암스님의 덕이다.

 

1.4후퇴로 모두 피난을 떠난 지 두 달쯤 지나 1951년 3월 21일(신묘년 음력 2월14일) 아침, 스님은 죽 한 그릇과 차 한 잔을 마시고는 손가락을 꼽으며 "오늘이 음력으로 2월 14일이지" 하고는 가사와 장삼을 찾아서 입고 단정히 앉아 입적했다. 이 때 한암스님의 세수는 75세요, 법랍은 54년이었다.

당시 정훈장교인 김현기 거사가 사진을 찍기 위해 입적하신 방한암 스님을 햇볕이 드는 바깥채로 모셔 나오기 위하여 육신을 드니 몹시 가벼웠다고 한다. 그것은 방한암 스님이 입적하기 보름 전부터 사바세계의 인연이 다함을 알고 물 외에는 먹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암스님은 이야기 남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일발록' 한권을 남겼는데 그마저 1947년 봄 상원사에 불이 났을 때 타고 말았다. 이 책은 뒤에 1995년 월정사 주지 현해스님이 문도들의 뜻을 모아 '한암일발록'으로 재간행하였다. 제자로는 보문, 난암, 탄허 등이 있으며, 1925년 오대산에 들어온 후 입적할 1951년까지 27년 동안 오대산문을 나서기 않아 수행자의 귀감이 되고 있다.

 

▲ 조경수 동기 부부

 

▷ 월정사의 산내 부속암자들

 

 

♣ 상원사

 

 ◀ 상원사 입구 표지석(2006년 2월 5일 18산우회 오대산 산행때 촬영)

 

나라 안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선원으로서도 널리 알려져, 일찍부터 월정사 산내 암자에 그치지 않는 명성을 누려오고 있다. 특히 사람이 자주 다니는 도로에서 멀지 않은데도 깊은 산사의 숙연한 분위기가 매우 뛰어나 참선수행으로써 본래의 참면목을 깨우치려는 눈 푸른 수행납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는 절이다.

신라 성덕왕4년(705) 신라의 보천과 효명 두 왕자에 의해 오대산 중대에 진여원으로 창건되었다.

자장율사가 개산한 뒤로 오대산이 불교 성지로서 이름을 빛내면서 마침내 오류성중 곧 다섯 부류의 성인들이 머무는 곳으로 신앙화되기 시작하던 즈음이다. 이 때의 창건 설화를 '삼국유사'에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신라 신문왕의 아들 보천태자는 아우 효명과 더불어 저마다 일천 명을 거느리고 성오평에 이르러 여러 날 놀다가 태화 원년에 형제가 함께 오대산으로 들어갔다.

형 보천태자는 오대산 중대 남쪽 밑 진여원 터 아래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그곳에 암자를 짓고 살았으며, 아우 효명은 북대 남쪽 산 끝에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그 곳에 풀로 암자를 짓고 살았다. 두 사람은 함께 예배하고 염불하면서 수행하였으며 오대에 나아가 공경하며 참배하던 중 오만의 보살을 친견한 뒤로 날마다 이른 아침에 차를 달여 일만의 문수보살에게 공양했다. 이 때 신문왕의 후계를 두고 나라에서 분쟁이 일자 사람들이 오대산에 찾아와 왕위를 이을 것을 권하였는데 보천태자가 한사코 돌아가려 하지 않자 하는 수 없이 효명이 사람들의 뜻을 좇아 왕위에 올랐다. 그가 성덕왕이다.

왕이 된 효명태자는 오대산에서 수도하던 중에 문수보살이 여러 모습으로 몸을 나타내 보이던 곳에 진여원을 개창하니 이 곳이 지금의 상원사이다.

 

고려시대에는 상원사가 어떠한 중창의 발자취를 걸어 왔는지 밝히는 자료가 없으나 이색의 '오대상원사승당기'에는 고려말 나옹스님의 제자라고 알려진 영로암이라는 스님이 오대산을 유람하다가 터만 남은 상원사를 중창하였다고 적혀있다.

고려말부터 일기 시작한 척불정책은 조선시대에 들어 더욱 게세어져 불교는 극박한 박해를 받게 되었으며, 태종은 승려의 도성출입을 금지하고 11종이던 불교종파를 7종으로 통합하는 등 척불에 앞장섰으나 만년에는 상원사 사자암을 중건하고 자신의 원찰로 삼았다. 또 나아가서는 권근에게 명하여 '먼저 떠난 이의 명복을 빌고 후세에 까지 그 이로움이 미치게 하여 남과 내가 고르게 불은에 젖게하라'고 하였다.

이어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불교에 귀의하여 그 잘못을 참화하기 위해 많은 불사를 행하였으며 나라에 간경도감을 설치하여 불서의 간행에도 많은 힘을 기울였다.

이런 세조가 오대산에서 두 번의 이적을 체험하였는데, 지병을 치료하기 위해 상원사에서 기도하던 중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병이 나았고, 상원사 참배 중에 고양이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일화가 그것이다. 이렇듯 세조와 상원사는 뗄 수없는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1984년에 발견된 문수동자 복장에서는 세조의 딸 의숙공주가 문수동자상을 봉안한다는 발원문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근세에는 방한암 스님이 오대산에 들어와 27년간 두문불출하며 수도 증진하였으며 수련소를 개설하여 후학 양성에 진력하였다.

 

▲ 김정두 동기

 

▦ 세조와 상원사

세조는 즉위 내내 단종을 죽인 죄책감에 시달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특히 만년에는 단종의 어머니이며 형수인 현덕황후의 혼백에 시달려 아들 의경세자가 죽자 그녀의 무덤을 파헤치는 등 패륜을 범하기도 하였다. 또한 현덕황후가 자신에게 침을 뺕는 꿈을 꾸고 나서 피부병에 걸려 전신에 종기가 돋고 고름이 나는 등 잘 낫지도 않아 견디기 무척 힘든 나날을 보내었다. 세조는 명의의 치료와 명약으로도 효험을 보지 못하자 오대산으로 발길을 돌려 부처님께 참회기도를 올려 낫기를 발원하였다.

세조가 어느 날 오대천의 맑은 물이 너무 좋아 혼자 목욕을 하고 있다가 그 때 지나가던 한 동승에게 등을 밀어줄 것을 부탁하였는데 동승이 등을 밀자 몸이 날아갈 듯이 가벼워졌다. 목욕을 마친 세조는 동승에게 "그대는 어디 가든지 임금의 옥체를 씼었다고 말하지 말라."고 하니 동승은 미소를 지으며 "대왕은 어디 가든지 문수보살을 친견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하고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세조가 놀라 주위를 살피니 동승은 간 곳 없고 어느 새 자기 몸의 종기가 씻은 듯이 나은 것을 알았다. 이렇듯 문수보살의 가피로 불치병이었던 피부병을 치료한 세조는 크게 감격하여 화공을 불러 그 때 만난 동자의 모습을 그리고 목각상을 조각하게 하니 이 목각상이 바로 상원사 문수동자상이다.

지금은 문수동자의 화상은 없어졌지만 목각상은 상원사 법당에 모셔져 있다. 세조가 당시 친견한 문수보살의 모습을 그리려고 많은 화공을 불렀지만 잘 그리지 못하였는데 하루는 누더기를 걸친 노스님이 와서 자신이 그려 보겠다고 하여 세조가 이러저러한 모습을 설명해 주자 노스님은 자신이 알아 그리겠다고 설명을 듣지 않았다. 이윽고 그려온 문수동자상의 모습이 너무나도 똑같아 세조는 놀라고 기쁜 마음에 "스님은 어디서 오셨습니까?"하고 물으니 노스님은 "나는 영상회상에서 왔습니다."하고는 곧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 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결국 세조는 문수보살을 두번이나 친견한 것이다.

 

 

 

 

 

 

 

 

 

 

 

 

 

 

 

 

 

 

 

 

 

▦ 상원사 목조문수보살좌상

    *국조 제221호

    *소재지: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산1

    *크기:98cm

 

나무로 조성된 불상이며, 보관이 없는 머리는 양쪽으로 묶어 올리고 앞머리는 자연스럽게 내려 이마를 가렸으며 얼굴은 양볼을 도톰하게 하여 천진해 보인다.

 

이목구비는 온화하고 적당히 가는 목에는 삼도가 보인다. 가슴에는 영락이 달린 목걸이를 걸치고 오른편 가슴쪽으로 드러난 통견의 천의를 걸치고 가슴 밑으로 띠를 매었는데 옷주름이 명확하다. 손모양은 오른손을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왼손을 내려서 엄지와 약지를 맞댄 듯한 아미타구품인을 하고 있으며, 왼쪽 다리는 안으로 접고 오른쪽 다리는 밖으로 둔 반가부좌를 하고 있다.

 

이 불상은 조각수법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1984년 7월 문수보살상에서 조성발원문 등 23점의 복장 유물이 발견됨으로써 이 불상이 조선 세조12년(1466)에 조성된 것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발견된 23점의 복장유물은 불상에도 사리를 보장하고 복장을 만들어 넣은 매우 드문 예를 보여주고 있다.

유물로는 의숙공주발원문, 문수상등중수발원문, 백지묵서진언집 두루마리 대방광불 화엄경, 오대진언, 묘법연화경, 대방강원 각수다라요의경, 육경합부, 명주적삼, 생명주적삼, 금동제 사리함, 사리, 수정구슬, 백색수정 사리병, 세조의 어의를 싼 노란색 명주 보자기 등이 있으며, 유물은 월정사 내 성보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관람료:무료)

 

이 동자상은 예배를 대상으로 만들어진 국내 유일의 동자상이라는 것이 주목할 만하고, 고려시대 불상에서 조선시대 전기 불상으로 전개되는 불상조성 양식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또 발원문과 함께 나온 조선시대 초기의 의상과 다수의 불경은 조선 복식사와 불교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조선 세조대왕이 직접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조성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 상원사 동종

    *국보 제36호

    *소재지: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산1

                현재 월정사 내 성보박물관에 전시

 

현존하는 한국 종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우며 청아한 소리 또한 이루 비길데 없는 이 종은 신라 성덕왕24년(725)에 조성되었다.

조선 태종 때 불교가 박해를 받을 때 안동으로 옮겨졌다가 조선 예종 원년(1469)에 상원사에 다시 옮겨진 것으로 한국 종 고유의 특색을 모두 갖추고 있는 대표적 범종이다.

 

음통이 있는 용뉴 아래 종신은 약간 길쭉하게 배를 불리다 끝에서 안으로 살짝 오므라든 형태가 이상적인 비례감과 안정감이 있는 조형미를 이루었고, 풍부한 양감과 함께 세부적인 묘사 수법이 사실적이다.

종신에 있는 상대, 하대, 4유곽의 문양은 당초문을 바탕으로 2~4인의 작은 주악비천상이 있는 반원권문이 새겨졌고, 종복에 비천상과 교대로 있는 당좌는 8연화문으로 표현되었다.

특히 비천상은 경쾌하기 이를데 없는 모습으로 구름 위에서 천의 자락을 휘날리는 모습이나 또 공후와 생을 연주하는 손의 표현이 매우 섬세하여 생동감이 넘친다.

불록한 두 빰, 유연한 신체에 걸친 천의 등은 8세기 전반의 이상적인 사실풍의 불교 조각을 잘 나타내고 있다.

정상에는 약동하는 용이 있고 그 옆에는 연꽃이 조각된 음통이 붙어 있다.

용뉴 좌우에는 70자에 달하는 명문이 해서체로 음각되었는데 첫머리에 '개원 십삼일 을축 3월 8일 종성기지'라고 되어 있어, 신라 성덕왕24년(725)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원사 종에 보이는 음통, 종 끝부분이 안으로 오므라든 종신형, 상대와 하대 및 4유곽 등의 주조적인 특징은 한국 종의 대표적인 유형이 되어 이후의 모든 종이 계승되었다.

 

이 종의 소재 사찰명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조선 초기에는 경북 안동 본부 문루에 걸려 있었는데 전하는 말에 따르면 안동 근처의 어느 사찰에 봉안되어 있다가 태종이 불교를 박해할 때 안동 문루로 옮겨졌다고 한다.

세조 때 상원사에 봉안할 종을 팔도에서 찾고 있던 중 안동에 있던 이 종이 선정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세조가 승하한 직후인 예종 원년(1469)에 상원사에 도달했다고 한다.

종은 안동에서부터 상원사로 옮겨오던 중에 3,379근이나 되는 큰 종이 장차 죽령을 넘으려 하는데 노상에서 움직이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종꼭지를 하나 떼어서 안동으로 보내니 비로소 움직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전설을 입증하듯 네 곳의 유곽 안에 1곽의 종류가 없다. 이러한 고사는 대종 운반의 어려움을 나타내고 있지만 민속신앙의 한 형태를 보여주기도 한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36호로 지정된 이 종은 높이 167cm, 입지름 91cm이고, 경주 성덕대왕신종(국보 제29호)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완형의 통일신라시대 범종 3구 중 하나로 가장 오래된 것이다.

 

 

 

 

▲ 2006년 2월 5일 18산우회 오대산 정기산행 때 상왕봉 정상에서...

 

♣ 오대산 적멸보궁

    *강원도 지방유형문화재 제28호

 

◀ 2006년 2월 5일 18산우회 오대산 정기산행 때 적멸보궁 앞에서...

 

적멸보궁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곳이다.

전멸보궁은 모든 바깥 경계에 마음의 흔들림이 없고 번뇌가 없는 보배스런 궁전이라는 뜻이다. 욕심과 성냄, 어리석음이 없으니 괴로울 것이 없는 부처님의 경지를 나타낸다.

적멸보궁은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어 법당안에는 따로 부처님상을 조성하지 않고 불단만 설치하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나라에는 다섯군데의 적멸보궁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오대산 적멸보궁이다.

-5대 적멸보궁-

*영축산 통도사(경남 양산시 하북면)

*태백산 정암사(강원 정선군 고한읍)

*사자산 법흥사(강원 영월군 수주면)

*설악산 봉정암(강원 인제군 북면)

 

오대산 적멸보궁은 신라 자장율사가 중국 오대산에서 기도하던 가운데 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얻은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봉안한 불교의 성지이다.

중대에 위치한 적멸보궁은 오대산 비로봉에서 흘러내린 산줄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중앙에 우뚝 솟아 있다. 적멸보궁이 자리한 곳은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형국이라 하여 용의 머리에 해당된다.

조선시대 어사 박문수가 이곳을 방문하고 천하의 명당이라고 감탄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 곳 중대는 또한 오대산 오만보살신앙의 중심을 이루고 있으니, 곧 동대의 일만의 관음보살, 남대의 일만의 지장보살, 서대의 일만의 대세지보살, 북대의 오백 나한들이 중대 적멸보궁의 불사리를 법신불로 상정하여 예배공양을 하고 있다.

 

법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불사리를 모신 곳이라 불상이 안치되어 있지 않고 불단만 조성되어 있다.

정면 중앙문에만 두 짝 판장문을 달았고 좌우 칸에는 중방을 설치하여 상부에는 띠살의 하개교창을 달았으며, 하부는 판장벽으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