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보 여행/강화 나들길

강화나들길 제 1-1코스(심도역사문화 길)

왕마구리 2010. 2. 13. 00:25

◀ 강화 나들길 제 1-1코스(심도역사문화 길) ▶  

◁ 강화읍내의 유적지를 돌아보고 강화산성을 따라서 역사의 현장을 탐방하다 ▷  

▲ 강화산성 북문과 북장대 사이의 산성 정상에서 한강과 강 건너 북녘 땅을 배경으로... 

 

▲ 강화산성 북장대를 지나 동문으로 성벽이 꺾이는 곡성에서 북문쪽으로 뒤돌아본 성벽길

 

 

【  걷기일자 】 2010년 3월 28일(일)

【  걷기코스 】강화시외버스터미널→알미골사거리→강화산성 동문→느티나무 보호수/강화 원불교→성공회강화성당→용흥궁/용흥궁공원→고려궁지→은행나무/보호수→북관운묘→한옥마을→강화향교→은수물약수터→숲속 쉼터→강화산성 북문-(성벽따라 이동)→북장대/갈림길→오읍약수터→송학골빨래터→대월초등학교→1차선포장도로→나들길 갈림길-(산길)→연미정/월곳돈대

 

【 코스거리 】 약 12.00km

【 소요시간 】 총  5시간 37분 소요(휴식, 문화재관람 및 중식 : 2시간 55분 포함)

                             실제 걷기 시간 : 2시간 42분 소요

【 날    씨 】 맑 음

 

【 교 통 편 】 대중교통 이용

<< 갈 때 >> 부천시외버스터미널 '소풍'앞 버스정류장(08:00)→#330번 강화행 시내버스→강화버스터미널(08:27~09:48)

<< 올 때 >> '월곳'버스정류장(16:01)-(#10번 군내버스)→강화버스터미널(16:12~16:20)-(#330번 부천행 시내버스)→부천시외버스터미널 '소픙'앞 버스정류장(17:50)

 

▷ 대중교통편 안내    

* 부천'소풍'시외버스터미널 앞 버스정류장↔강화시외버스터미널#330번 시내버스

      (3월2일부터 실시되는 운행시간)

      ①부천발 강화행=>06:20, 06:40, 07:00, 08:00, 08:50, 09:10, 10:20, 11:00, 11:40, 12:20~

      ②강화발 부천행=> ~12:00, 12:40, 13:20, 14:00, 14:50, 15:30, 16:20, 17:00, 17:50, 18:40,

                                       19:20, 20:00

      <참고> *2010년 2월 19일부터는 시내버스로 전환되어 경기, 인천, 서울 대중교통편과

                 환승 가능

                *2010년 3월 2일부터 운행시간 변경. 

                 (버스운행시간 문의 : 강화운수 T.032-933-2533) 

* '월곳'버스정류장/연미정→강화시외버스터미널 : #10번(강화↔대산리행) 군내버스

    ▷ 공휴일 & 일요일 : 07:10, 08:05, 10:00. 11:50, 15:40, 18:10, 19:25, 20:40(강화터미널 출발기준+10~15분)

     ▷ 평일 : 06:10, 07:05, 08:00, 09:20, 11:55, 13:50, 15:00, 16:00, 18:05, 19:20, 20:40(강화터미널 출발기준+10~15분)

 

【 코스탐방 】

이번 강화나들길은 강화읍 주변의 주요 유적지를 돌아 보는 역사문화 탐방코스로 이루어져 있다. 강화산성 동문을 시작으로 성공회 강화성당, 용흥궁, 고려궁지, 강화향교를 거쳐 강화산성 북문과 성벽을 일부 돌아보는 코스이다.

유적지를 돌아 보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고, 3월 25일(목) 시흥 늠내길 지1코스 '숲길' 탐방과 3월 27일(토) 관악산과 삼성산으로 이어지는 암릉인 자운암능선-관악산 연주대-학바위능선-삼성산-삼성산국기봉-국기봉능선 코스를 산행하느라 체력 소모가 많았던 때문인지 강화나들길 제1코스 '심도역사문화 길' 전체 거리의 약 70% 지점인 연미정에 도착하니 총 소요시간이 5시간 37분이나 걸렸다.

제1코스의 종착지인 강화역사관까지 남은 거리가 약 5~6km 정도로 굴곡이 심한 어려운 구간은 없을 것으로 판단은 들었지만 1시간 30분은 더 소요가 될 것 같고, 마침 월곳 버스정류장에서 강화터미널로 출발하는 버스(터미널 오후 4시 출발 대산리행)가 곧 도착을 할 것 같아 연미정 탐방을 끝으로 제1코스를 마무리하고, 다음에 나머지 구간을 지난 번 제3-1코스로 추가하여 실시하였던 정족산성 성돌기처럼 이번에도 제1-2코스를 임의대로 정하고 연미정갈림길 1차선포장도로에서 박진화미술관-당산나무-송뢰저수지/수문-돌모루-연미정으로 이어지는 우회 나들길을 추가하여 강화역사박물관으로 진행하기로 한다. 이 경우 우회 나들길이 약 4~5km가 추가되니 전체 거리는 약 10~11km로 늘어 나 하루 탐방 코스로는 부족함이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우회하는 예비코스가 나들길 표시 등 길찾기에 불편함이 없이 제대로 정비되어 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한 번 시도는 해 볼만 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 강화나들길을 알려주는 표시들

 

이번 코스를 돌면서 수도 없이 방문하였지만 한 차례도 탐방해 보지 않았던 강화읍내에 흩어져있는 유적지들을 돌아 보는 기쁨을 만끽하였고, 유적지 주변을 진행하는 코스라 대부분의 길이 포장도로일 것이라 지레 짐작을 했었는데, 예상보다는 숲길이나 산길로 잘 연결되어 있어서 비록 중도에 중단을 하였지만 코스에 대한 만족감을 느끼고 나들길 탐방을 마칠 수가 있었다.

 

 

▲ 강화시외버스터미널

 

▲ 알미골사거리 

 

09:27~09:48=>강화시외버스정류장

     터미널 대합실에서 빵과 커피로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때우고 터미널 앞 도로로 나와 우측 강화읍내 방향으로 인도를 따라 풍물시장을 지나 강화인삼센터가 있는 사거리인 알미골사거리로 향한다.

 

▲ 알미골사거리의 도로이정표

 

알미골사거리(09:52)에 이르면 좌측 횡단보도를 이용, 도로를 건너 강화읍내로 들어간다.

좌측에 수협이 있는 사거리(수협사거리)에서 우측 도로건너 보이는 강화우체국쪽으로 다시 도로를 건너 우체국 좌측의 도로를 따라 들어간다.(10:00)

사거리에서 200여m 정도 떨어져 있는 고갯마루(10:04)에 이르러 도로 절개지 축대위를 아슬아슬하게 걸어가 좌측 도로로 내려서면 강화산성 동문이 보인다. 위험하게 축대위를 걷지 말고 인도를 따라 진행하는 것이 안전하고 이 길을 따라 가도 별 상관은 없다.

 

▲ 강화산성 동문

 

10:10~10:20=>강화산성 동문(망한루)

♧ ♧ 강화산성(江華山城) 

 

 

*사적 제132호

*소재지: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국화리, 남산리, 신문리 일원

 

이 성은 고려 고종이 몽고의 침입에 맞서 강화도로 천도하여 고종19년(1232)에 토성으로 축조하기 시작하여 그 규모가 매우 광대하여 강화읍 선원면 일대를 둘러 쌓았으나 몽고군의 강요로 헐리었다.

고려시대 당시 강화에는 내성, 중성, 외성이 있었는데 내성은 조선시대에 개축되어 현재의 강화산성이 되었다.

조선초에 이르러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하였으나 인조15년(1637) 병자호란시 일부 파손되어 효종3년(1652)에 보수하였다. 숙종3년(1677) 유수 허질이 전면은 돌로, 후면은 흙으로 개축 확장하였으며 그후 동,서,북쪽의 일부는 숙종35년(1709)에 유수 박권이, 동,남의 읿부는 숙종37년(1711) 유수 민진원이 완성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성은 둘레가 7,122m, 성벽의 높이는 약 3m, 너비는 4m 내외이다. 치첩 1813개소, 4대문(동문:망한루, 서문:첨화루, 남문:안파루, 북문:진송루). 4소문(암문), 2수문, 4개의 성문장청 등을 설치하였다. 서문인 첨화루는 1711년 강화유수 민진원이 건립하였고, 남문인 안파루는 쓰러진 것을 1973년에 복원하였으며, 북문인 진송루는 원래 문루가 없던 것을 1783년 김노진이 건립하였다. 또한 동문인 망한루는 각종 문헌사료와 발굴조사 결과에 기초하여 2003년에 복원하였다.

 

▲ 강화산성 안 동문 좌측의 나들길인 골목길

 

 

     동문 뒤, 성밖에는 강화중학교가 위치해 있다. 강화중학교가 있는 성밖에서 성문을 통과하면 주차장이 있고, 우측으로 '→동문안길 45번길' 도로 이정푯말이 보이고, 이정푯말에서 강화산성 동문을 우측에 두고 골목길을 빠져나가면 수령 600년이 된 느티나무 보호수(1982년 10월 15일 지정. 수고 19m, 나무둘레 7m)가 있는 ┬자 갈림길이 나타난다.

좌측에는 원불교 건물이 있다. 좌측으로 꺾어 약 10여m 떨어진 곳(원불교 건물 건너편)에 있는 또 다른 노목 우측의 밭길로 들어 약 150여m를 진행하면 ┬자 시멘트 포장 마을길(10:26)이 나타난다.

 

▲ 골목안에서 바라본 수령 600년된 느티나무 보호수

 

좌측으로 방향을 바꾸어 약 2분 정도를 따르면 성공회 강화성당 담장과 건물이 앞에 보인다. 강화성당 담장을 우측에 두고 내려가면 성당 옆문을 지나 강화나들길 이정표(성공회성당→강화초등교)가 설치된 강화성당 정문 앞에 서게 된다.

성당 정문 앞 길 건너에는 용흥궁이 자리를 잡고 있으며 용흥궁 대문은 아니지만 용흥궁으로 들어가는 출입구가 있다. 또한 출입구에서 조금만 더 내려가면 넓은 주차장이 있는 용흥궁공원이 자리를 잡고 있다.

10:28~10:50=>성공회 강화성당, 용흥궁 그리고 용흥궁공원

     성공회 강화성당의 옆문으로 들어가면 본당 건물이 중앙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우측으로는 별도의 사윗담장이 쳐진 성당 사택이 있다. 좌측으로 성당 본당 건물을 따라가면 동종이 보관된 내삼문(종루)과 성당 정문인 외삼문이 있으며 외삼문을 빠져나가면 영흥궁과 경계를 이루는 길이다.

 

♧ ♧ 성공회 강화성당(聖公會 江華聖堂)

*사적 제424호

*소재지:인천광역시 강화읍 강화군 관청리 422번지 

 

▲ 성공회 강화성당 본전

▲ 성공회 강화성당 정문

 

1890년 성공회가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전파된 후 1893년 영국인 왕란도 신부가 강화읍 갑곶리에서 회랑겸 사택을 매수하여 전도를 시작하였다. 그 후 왕란도 신부는 본국으로 돌아가고 1896년 조마가 신부가 부임하여 강화읍에서 김마가(김희준)를 전도하였다.

1897년에는 영화원이라는 보육원을 개설하고 서양 의술로 많은 환자를 치료하였으며, 현재 건물은 고요한(Charies Jone Corfe) 초대주교가 1900년에 지었는데 성베드로와 바우로 성당으로 명명되었다. 

 

▲ 성당 사택

 

▲ 성달의 동종이 보관된 종각겸 내삼문

 

성당은 한옥식 건물로 지어 동,서양의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백두산에서 운반해온 나무로 궁궐 도편수가 주도하여 지었다고 한다. 전체 성당의 모습은 세상을 구현하는 방주로서의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 배 모양을 취하고 있으며, 성당 건물은 장방형(넓이 4칸, 길이 10칸) 중층 구조로 배치와 내부구조는 전형적인 바실리카 양식을 응용하여 조화의 아름다움과 토착정신을 드러나게 하였다.

몇 차례 보수가 있었으나 처음의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성당 본전 1동, 사택 1동, 내삼문 1동, 외삼문 1동, 동종 1기가 보존되고 있다.

 

정문 계단을 내려서 도로를 따라 잠시 내려가면 좌측으로 출입구가 있는데 이를 통해 내려가면 용흥궁 내에 들어가게 된다.

넓은 빈터를 지나 계단을 내려서면 용흥궁 외전이 있고, 외전 앞을 지나치면 사윗단으로 둘러싸인 비각이 있다. 외전 앞 사윗담의 문을 빠져 나오면 용흥궁 내전으로 연결된다. 내전을 거쳐 용흥궁 정문을 나오면 안내문과 강화나들길 이정표(영흥궁→성공회성당)가 있다.

정문에서 나와 우측으로 올라가면 용흥궁공원이 있다.

 

♧ ♧ 용흥궁(龍興宮)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0호 

 

▲ 용흥궁의 외전

 

조선 25대 철종이 왕이 되기 전에 거처하던 잠저이다.

조선 철종4년(1853)에 초가집이던 것을 강화유수 정기세가 현재와 같은 기와집으로 개축하고 용흥궁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이 용흥궁의 배치는 서울 창덕궁의 연경당 낙선재와 같이 살림집으로 지어 질박한 느낌을 준다.

경내는 철종이 머물던 옛 집터임을 표시하는 비와 비각이 있다. 비각은 정방형으로 앞면과 측면이 각각 2.5m로 넓이가 6㎡이다. 비각에는 철종이 이곳에서 살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 있는데 '철종조잠저구기(哲宗朝潛邸舊基)'라고 쓰여 있다.

문앞에는 송덕비 2기가 나란히 서 있는데, 하나는 초가집을 기와집으로 새로 지은 강화유수 정세기의 것이고, 하나는 정세기의 아들 정원용의 것이다. 정원용은 강화도령을 왕으로 모시는 봉영의식을 맡았다.

 

 

▲ 용흥궁 내전

 

▲ 용흥궁의 비각 

 

철종의 이름은 변(?)이고, 초명은 원볌이다. 자는 도승, 호는 대용제로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 인(?)의 손자이다. 은언군의 아들 전계대원군과 용성부대부인 염씨 사이의 세째아들이다. 철종의 할아버지인 은언군은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할 때 강화로 쫓겨났으며, 1801년 신유박해 때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가 청나라 신부 주문모로부터 영세를 받은 사실이 발각되어 죽음을 당하였다.

철종은 순조32년(1831) 오늘날 안국동인 경행방에서 태어났다. 철종의 아버지 전계군은 헌종10년(1844) 철종의 큰형인 회평군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민진용의 옥'에 연루되어 능지처참을 당했다. 이때 철종은 둘째 형과 강화로 유배되어 지난날 은언군이 살던 집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그의 나이 열네살이었다.

철종은 5년 뒤인 1849년 19세의 나이에 순조의 비였던 순원왕후에 의해 왕으로 지목되었다. 봉영의식을 행한 뒤 그 해 6월 8일 덕완군에 봉해지고, 이튿날인 6월 9일 창덕궁 희정단에서 관례를 행한 뒤 인정문에서 즉위하였다. 1851년에는 대왕대비의 근친 김문근의 딸을 왕비로 맞았는데 이가 명순왕후이다.

철종은 1852년에 이르러서 대왕대비의 수렴청정에서 벗어나 친히 정치를 하였는데 정권은 안동 김씨 일족이 좌우하였으며 삼정의 문란으로 백성들의 생활은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마침내 1862년에는 진주민란을 시발로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전국의 여러 곳에서 민란이 발발하여 철종은 이에 민란의 원인이 되었던 삼정구폐를 위한 정책을 수립하는 등 민란수습에 진력을 다하였으나 뿌리 깊은 세도정치의 굴레를 벗어나 제대로 정치를 할 수가 없었다.

결국 철종은 정사를 소흘히 한 채 궁녀와 술에 의지하며 살다가 33세의 젊은 나이로 하직하였다. 혈육으로는 궁인 범씨 소생에 영혜옹주가 있어 금릉위 박영효에게 출가하였을 뿐 후사가 없었다.

시호는 문현무성헌인영효이다.

조선 광무7년(1903) 청안군 이재순이 보수하였고, 1974년 강화군에서 보수를 시작하여 수차에 걸쳐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용흥궁 정문 앞의 강화나들길 이정표 

 

▲ 용흥궁공원 주차장의 강화나들길 이정표 

 

용흥궁공원 주차장 입구에는 강화나들길 이정표와 문화생태탐방로 및 강화나들길 첫째길 '심도로 드는 길' 안내판이 있다.

용흥궁공원은 1947년부터 강화 지역에 자리를 잡아 한 때 '심도커텐'으로 일반인에게도 널리 알려졌던 국내의 유명 섬유업체였으며 강화의 대표적인 기업이었던 '심도직물' 공장터였으나, 1991년 부도로 법정관리를 받아오다 최종 도산이 되어 경매에 붙쳐졌던 공장부지를 강화군에서 인수, 공원을 조성한 곳이다.

32분여의 성공회 강화성당과 용흥궁 관람시간을 보내고 주차장을 뒤로 하고 우측의 도로를 따라 오르면 강화초등학교 앞을 지나 고려궁지에 이르게 된다.

 

▲ 고려궁지로 들어가는 승평문

 

▲ 고려궁지 앞의 강화나들길 이정표 

 

▲ 고려궁지에서 은행나무가는 길목의 이정표 

 

10:55~11:34=>고려궁지

     입장권(어른 \900/일괄입장권 \2,700:전적지 5개지구<초지진,덕진진,광성보,역사관,고려궁지>)을 도보여권에 동봉된 할인권으로 할인받고(\900→\800), 제1코스 출발 확인 스탬프를 여권에 찍고 고려궁지 승평문을 들어서며 경내 관람을 시작하였다

승평군 계단 좌측에 강화나들길 이정표(고려궁지→은행나무)와 '강화산성 북문' 이정표가 있다.

궁내에 들어서니 단체 관람온 초등학생들이 인솔교사의 설명을 들으며 그룹을 지어 다니느라 붐비고 어수선하여 제대로 관람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강화유수부 동헌-외규장각-보호수-강화동종-강화유수부 이방청 순으로 고려궁지 내부를 한바퀴 돌아보고 벤치에 앉아 커피 한 잔을 마시며 휴식을 취하느라 약 40여분을 투자하고 고려궁지를 빠져나와 강화산성 북문을 향해 탐방을 계속 진행하였다.

 

♧ ♧ 고려궁지(高麗宮址)

*사적 제133호

*소재지: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회읍 관청리 743-1 

▲ 고려궁지의 수령 400년된 회화나무

 

이곳은 고려가 몽고의 침략에 줄기차게 항전하던 39년간의 궁궐터이다.

1232년 6월 고려 고종(재위 1213~1259)은 자주적 정신으로 항몽의 기치를 높이든 고려 무인들의 주장에 따라 지세가 험한 강화도로 천도하여 최우가 2,000여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1234년에 궁궐과 관아 건물을 완성하였다. 1270년 몽고와의 강화가 성립되어 개성으로 환도한 뒤 궁궐과 성은 무너졌다.

1637년 병자호란시 강화성이 청군에게 함락된 사실이 있으며, 그후 고려 궁터에는 조선 궁전건물(장령전, 행궁, 만령전, 봉선전, 외규장각, 척천정, 세심재 등) 및 유수부 건물들이 있었으나. 1866년 병인양요시 프랑스군에 의해 건물 등은 소실되고 지금은 유수부의 동헌과 이방청 건물만이 남아있다.(2003년 복원된 외규장각과 강화동종을 보관하는 종각 등이 있다)

이곳은 1977년 보수 정화되어 우리 민족의 자주정신과 국난극복의 역사적 교훈을 안겨주는 국민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곳 고려궁지는 지금으로부터 약 780년전 몽고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고려 왕조가 강화도로 피난했을 당시 임금님이 거처하시던 궁궐로 이곳에서 약 39년간(1232~1270) 몽고에 항쟁하였다. 강화도에 천도해온 고려 고종은 약 2년에 걸쳐 연경궁을 본궁으로 궁궐과 관아를 지어 건물의 명칭을 전부 개성의 궁궐과 똑 같이 하고 궁궐 뒷산도 송악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궁궐은 몽고와의 화친에 따라 허물었으며 현재 궁지 내에는 강화지역을 다스렸던 유수부가 있다. 또한 고려궁지내에는 외규장각이 있었으며 병인양요때 프랑스군들이 이곳에 있던 많은 서적들과 은궤, 지도 등을 약탈해 갔었다.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있는 고서들도 이곳에서 약탈해간 것이다. 고려궁지에는 오래된 역사와 함께 그 자리를 지켜온 고목들이 많으며 아름다운 꽃나무들로 봄이면 더욱 아름다운 정원이 된다.

 

((고려궁지 내의 남아 있는 문화재와 복원된 유적들))

 

 

 

 

 

 

 

 

♧ 강화유수부동헌(江華留守府東軒)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5호

 

조선시대 강화의 행정 책임자인 유수가 업무를 보던 중심 건물이다.

인조16년(1638) 유수 김신국이 수리하였고 영조45년(1769) 유수 황경원이 현윤관(顯允觀)이라 하였다.

명위헌(明威軒)이라는 현판은 영조때 명필인 백하 윤순이 쓴 것이다.

건물구조는 정면 8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겹처마 단층집으로 1977년 강화 중요 국방유적 복원 정화사업으로 정비하였다.

 

 

 

 

 

♧ 외규장각(外奎章閣)

여러 차례의 전란으로 강화도가 보장지처로 크게 주목 받게되고 국왕과 왕실 기록물의 중요성이 강조됨에 따라 정조6년(1782)에 건립되었다.

왕실 도서관 역할을 하였으며 왕실과 국가 주요 행사의 내용을 정리한 의궤등의 서적과 왕실 물품을 보관하였다.

어람용 어궤 표지는 특별하게 비단을 사용하고 종이는 고급 초주지를 사용하였으며, 해서체로 정성들여 글씨를 쓴 다음 붉은 선을 둘러 왕실의 위엄을 더 하였다.

 

병인양요(1866)때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습격하면서 외규장각과 여러 건물들을 파괴하여 서적을 약탈하였는데 외규장각에 보관중이던 은괴 19상자와 함께 프랑스군의 눈을 자극한 것도 채색비단 표지에 선명한 그림으로 장식된 의궤들이었다.

1975년부터 2001년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2003년 건물을 보관하였고, 현재 프랑스 정부를 상대로 외규장각 고문서 반환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현재 강화역사관에 보관, 전시중인 보물 제11-8호인 강화동종 ▶

▲ 강화동종을 보관하였던 종각 

   현재 복제품이 보관중이다   

 

종각은 당시의 강화산성 남문 주변인 김상용순절비 자리에 있었던 것을 1977년 강화 중요국방유적 복원 정화사업때 고려궁지로 이전하였다.

강화동종은 1999년 10월 종에 균열이 생겨 더 이상 타종하지 못하게 되자 이를 복제하여 이곳에 설치하고, 원래의 종은 강화역사관으로 옮겨 보관, 전시하고 있다. 

  

 

♧ 강화동종(江華銅鐘)

*보물 제11-8호 

강화유수 윤지완이 주조한 것을 숙종37년(1711) 유수 민진원이 정족산성에서 현재와 같은 형태로 다시 주조한 것으로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인 사인비구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높이 198cm, 입지름 138cm로 조선 후기 동종으로는 큰 규모이다. 종꼭대기에는 두마리 용이 좌우로 서로 얼굴을 맞대고 종을 매달기 위한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종 윗면은 반원 모양으로 둥글고, 어깨 부분에는 'ㄱ'자형의 턱을 만들었다. 이것은 고려시대 꽃잎을 세워 장식하여 어깨 부분이 돌출되었던 것의 변형된 모습으로 보인다. 어깨에서 훨씬 떨어진 곳에 사각형 모양의 유곽이 4곳에 있는데, 그 안에는 9개씩의 연꽃으로 된 돌기가 있다.

몸통 중앙에는 굵은 2줄의 횡선이 둘러 상,하로 2등분하였고, 그 아래로는 종 입구 바로 위에 꽃무늬를 새긴 넓은 띠가 있을 뿐 다른 장식은 하지 않고 만든 시기를 알 수 있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이 종은 전통적인 고려 종의 양식이 퇴화하고, 조선 종의 새로운 특징이 잘 나타나 있는 종 연구의 중요한 자료이다. 성문을 열고 닫는 시간을 알리는데 사용되었다.  

 

 

♧ 강화유수부이방청(江華留守府吏房廳)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6호

 

강화유수이방청은 행정 실무자들이 업무를 보던 곳이다. 효종5년(1654) 유수 정세규가 세웠고, 정조7년(1783) 유수 김소진이 수리하였다. 1915년이후 강화등기소로 사용되다가 1972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구조는 'ㄷ'자형 단층기와집으로 방이 8칸, 마루가 12칸, 부엌이 1칸으로 모두 21칸 규모이다.

 

고려궁지 좌측 강화나들길 이정표(고려궁→은행나무)가 있는 도로에서 1982년 10월 15일 지정된 수고 25m, 나무둘레 6m의 수령 600년된 보호수(고유번호 4-9-2)인 은행나무 앞을 지나 '북문4길 16번길' 도로이정표 방향의 마을길을 따라 내려간다.

 

▲ 고려궁지 옆 수령 600년된 은행나무 보호수

 

▲ 사당인 '북관운묘'

 

┬자 삼거리에서 우측 '궁골길 2번길'로 방향을 틀어 '행복이 가득한 집' 푯말이 붙은 주택 앞과 '북관운묘(조선 고종29년<1894> 강화산성 수문장인 윤의보가 건립한 사당으로 외삼문은 1906년도에 중축)' 사당을 지나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내려간다. 잠시 후 사거리에서 직진의 연립주택 사이 시멘트 도로를 따라 한옥마을 주택가 골목(궁골길 5번길)을 빠져나가면 ┬자 삼거리이다.

 

 

▲ 뒤돌아본 한옥마을 골목길과 한옥마을이 끝나는 ┬자 삼거리의 강화나들길 이정표

 

11:48=>한옥마을

     삼거리 정면으로 나들길 이정표(한옥마을→강화향교)가 보이고, 좌측의 '송악길 42번길'을 따라가면 2차선 포장도로(11:51). 도로 건너 우측으로 잠시 오르면 '강화향교유림회관'과 강화여자고등학교가 있다. 강화여고 정문에서 강화향교유림회관을 끼고 좌측으로 도로를 계속 이어가면 '태광별장타운' 연립주택이 정면으로 보이는 ┬자 삼거리에 이르게 되는데 우측에 강화향교가 자리를 잡고 있다.

11:54~11:57=>강화향교

     강화향교로 들어가 보지만 문이 잠겨있어 들어 갈 수가 없어 담 너머로 대성전만 바라보고 도로를 따라 우측으로 오르면 정면으로 강화여자중학교 교문이 있고, 좌측으로 꺾이는 길 입구에는 강화나들길 이정표(은수물→북문)가 보인다.

잠시 도로따라 들어가면 산길이 시작되는 은수물약수터가 있다.

 

♧ ♧ 강화향교(江華鄕校)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4호

*소재지: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이 향교는 고려 인종5년(1147) 내가면 고천리에서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고종19년(1232) 강화읍 갑곶리(먹절)로 옮겼다가 고종46년(1259) 서도면 볼음도로 옮겼고, 조선 인조2년(1624)에는 유수 심열이 송악산 기슭으로 옮겼으며, 인조7년(1629)에 유수 이안눌이 위패를 모시고 명륜당을 세우는 등 비로서 완전한 체제를 갖추어 학궁이라 하였다 한다.

현종14년(1673) 유수 민시중이 남산골로 옮겼으나, 영조7년(1731) 유수 유척기가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경내에는 중국의 5현과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과 강학하던 명륜당 및 내,외삼문 등이 있고 동,서무는 터만 남아 있는데 현재의 건물들은 근래에 중수 또는 신축되었다.

 

▲ 은수물약수터 전경

 

▲ 강화여중 교문 옆 강화나들길 이정표 

 

▲ 은수물약수터

 

11:59~12:05=>은수물약수터

     산길이 시작되고, 완만하게 밭과 산의 경계선을 따라 오르면 강화산성이 지나는 ┬자 능선 갈림길(12:08)에 이르게 되는데, 좌측은 서문으로 이어지는 능선이다.

 

▲ 산길 입구

▲ 밭 경계선을 따라 능선으로 오르는 길

▲ 산성 성벽 복원공사를 위해 벌목해둔 서문으로 이어지는 능선

▲ 산성 성벽 복원공사를 위해 벌목해둔 북문으로 이어지는 능선

 

능선 정상부에는 모두 강화산성 복원공사를 위해 나무들을 베어둔 상태이다. 우측의 벌거숭이 능선을 약 50여m 오르면 Y자 갈림길이 나타나는데 직진의 산성길을 버리고 우측의 숲 사면길을 따라 나들길이 이어진다.

 

▲ 능선길을 버리고 북문가는 숲길이 시작되는 갈림길 입구

▲ 나무에 묶어둔 강화나들길 플랭카드

▲ 북문가는 산사면의 소나무 숲길

 

입구에 '어서 오시겨! 강화나들길은 여기 입니다'란 프랭카드가 나무에 붙어있는 완만한 산책길인 소나무 숲길을 오르면 의자와 간이 벤치가 있는 쉼터가 나타난다.

 

▲ 숲속의 간이쉼터

 

12:12~12:19=>간이쉼터

     다시 자리를 잡고 앉아 잠시 소나무 산림욕을 즐긴다는 기분으로 약 7분간 휴식. 3월 25일 시흥늠내길 탐방, 어제(3월 24일) 관악산~삼성산 연계산행(자운암능선-학바위능선-삼성산국기봉능선의 암릉산행)으로 피로가 누적된 때문인지 잦은 휴식이 이어지고, 문화재 관람 등으로 많은 시간을 투자하게 되어 오늘 나들길 탐방은 다른 때보다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이 된다.

 

 

▲ 북문가는 편안한 소나무 숲길

 

편하게 산길을 빠져 나가면 포장도로에 이르고, 우측으로 강화산성 북문이 자리를 잡고 있다.

 

▲ 강화산성 북문

 

▲ 북문 옆의 강화나들길 이정표 

 

▲ 북문 밖의 강화산성 보호구역 안내도 

 

▲ 성 밖에서 바라본 북문 

 

▲ 성 밖 오읍약수터로 내려가는 길 

 

12:27~12:43=>강화산성 북문(진송루)

     다시 이곳에서 화장실을 다녀오는 등 16분을 지체하고 성문 앞 강화문화생태탐방로 안내도와 나들길 이정표(북문→북장대)를 확인한다. 성문 밖으로 나가 강화나들길의 탐방 경유지인 오읍약수터로 내려가는 긴 내리막 도로와 우측에 설치된 '보호구역' 안내도 등을 살펴보고 성 안으로 들어와 우측의 계단길을 올라 강화성벽을 따라 북장대로 향한다.

강화나들길이 성벽을 따라 북장대로 갔다가 오읍약수터 방향으로 내려가는 반원을 그리는 경로로 이루어져 있는데, 직접 성밖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내려가도 오읍약수터에 이를 수가 있다. 그러나 성벽을 따라 오르면 시야가 트여 주변의 경관을 즐길 수 있는데, 특히 한강 건너로 조망되는 북녘 땅인 황해도 개풍군의 전경과 고려산에서 혈구산으로 이어지는 강화지맥과 국화저수지 등 멋진 풍광들을 놓치게 된다.

성벽길을 따라 완만하게 오르면 전망이 좋은 성벽 정상에 이르게 되는데 우측에 약간의 공터가 있는 둔덕이 있어 이곳에 오르면 사방으로 시야가 확보되어 조망이 빼어나다.

12:53~12:58=>성벽 정상

     좌측으로는 유유히 흐르는 한강과 마을 아래에 펼쳐지는 해안 마을의 풍경이 정겹고, 강 건너로는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고요한 정적속에 숨죽이고 있는듯한 북녘 땅인 황해도 개풍군의 전경이 펼쳐진다.

 

▲ 북장대로 추정되는 성벽 정상에서 바라본 한강과 북녘 땅인 황해도 개풍군

▲ 북장대로 추정되는 성벽 정상에서 바라본 고려산에서 혈구산으로 이어지는 강화지맥 산줄기와 국화저수지 

▲ 북장대로 추정되는 성벽 정상에서 내려다본 강화시가지

 

우측으로는 강화지맥의 최고봉인 고려산과 고려산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리는 산줄기가 고비고개를 넘어 혈구산을 솟구치고 있는 장쾌한 전경과 고비고개 밑으로는 아름다운 국화저수지가 조망이 된다.

강화나들길 제5코스 '고비고개 길'이 지나는 곳이기도 하다. 1시 방향으로는 산 아래 강화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오는 곳이기도 하며, 강화산성 전체의 윤곽을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 동문으로 이어지는 강화산성 성벽길

▲ 강화산성 성벽위의 오읍약수터 갈림길

 

성벽 따라 잠시 내려가면 안부에 강화나들길 이정표(북장대→오읍약수터)가 있는 갈림길이고 좌측 무너진 성벽 넘어 내려가는 산길이 오읍약수터 가는 길이다. 이정표에 북장대라 표시가 되어 있는데 정확한 위치가 맞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이곳에 내려서기 직전의 성벽 정상이 사방으로 시야가 확보되어 관측이 용이하여 군사적으로 볼 때 북장대를 설치했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계속 이어지는 성벽을 따라 시선을 돌리면 오르막이고 약 200여m 떨어진 곳에 또 다른 정상이 있어 혹시 그 곳이 북장대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다녀오기로 한다.

13:01~13:07=>북장대

     전방으로 약 200여m 떨어진 정상에 오르니 성벽이 우측으로 꺾이는 곡성을 이루는 곳으로 아마 강화산성 치성인 것 같다. 이곳에도 아무런 표시판이 없어 정확한 내용을 알 수가 없으나 이곳에서 우측으로 성벽이 꺾이어 동문으로 내려가는 것 만은 확실하다.

정상에 서서 북문에서 진행하여온 성벽길을 되돌아 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왔던 길을 내려가 무너진 성벽을 넘어 오읍약수터로 향한다.

 

▲ 나무계단길을 따라 오읍약수터로 내려서다 뒤돌아본 강화산성

▲ 오읍약수터 가는 내리막길

 

▲ 오읍약수터 가는 편안한 소나무숲길

▲ 북문에서 내려오는 시멘트 포장도로와 만나는 삼거리

 

약간의 경사도가 있는 나무계단길과 밧줄이 매여진 내리막길 한 곳을 지나 내려서면 소나무 숲길이 나타나면서 편안하고 호젓한 산책길로 바뀌어 좌측으로 방향을 바꾸며 산사면을 따라 나들길이 이어진다.

북문에서 오읍약수터로 내려오는 시멘트 도로와 만나 우측으로 도로따라 약 50여m를 내려가면 오읍약수터이다.

 

 

오읍약수터 전체 전경과 강화나들길 이정표

 

▲ 오읍약수터 표지석 

 

▲ 오읍약수터 

 

13:14~13:18=>오읍약수터

     입구에 표지석이 있고 약수터 끝 우측 숲길 입구에는 강화나들길 이정표(오읍약수터→송학골빨래터)와 첫째길 옛 이름인 '심도로 드는 길' 안내도, 그리고 정자가 있다.

정자를 지나 숲길로 다시 들어 마을에서 약 50~100여m쯤 떨어져 마을을 따라 이어지는 흙길을 밟으며 약 3분 정도를 진행하며 큰 노목 아래 빨래터가 있는데 이정표나 안내판은 없지만  '송학골빨래터'인 모양이다.

 

▲ 송학골 빨래터

▲ 시멘트 포장도로 삼거리

 

잠시 후 시멘트 도로를 만나 좌측으로 50여m를 내려가면 ┬자 시멘트 포장도로 삼거리(13:23).

우측의 도로를 따라 진행하면 2차선 포장도로가 가로지르는 사거리(13:25~13:28)에 이르게 된다.

 

▲ 2차선 포장도로와 만나는 사거리

▲ 대월초등학교가 있는 포장도로 고갯마루로 가는 차도 옆 인도

▲ 바닥에 표시된 나들길 안내

 

횡단보도를 건너 우측으로 도로를 따라 걷기꾼들을 위해 만들어 둔 것으로 보이는 인도를 따라 도로 고갯마루로 향한다. 나지막한 고갯마루에 이르면 좌측으로 대월초등학교가 자리를 하고 있다.

 

 

▲ 대월초등학교 

 

▲ 대월초등학교 정문 옆 공터 끝의 강화나들길인 돌계단 

 

13:33~14:15=>대월초등학교

     학교 정문 우측에 테이블이 딸린 의자가 설치된 쉼터와 공터가 있어 쉬어가기 좋은 곳이지만 도로변이라 공터 끝 좌측 돌계단을 오르면 직사각형의 반듯한 축구장 넓이의 공터가 있어 이곳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가기로 한다.

공터 끝 용도를 알 수없는 흰색 페인트를 칠한 긴 담장 앞에 자리를 잡고 컵라면과 빵으로 42분간 느긋한 늦었지만 점심식사 시간을 갖는다.

식사를 마치고 학교 좌측의 옆길로 내려가면 마을이 나타나고 멀리 한강과 북녘 땅이 보인다.

 

▲ 마을길을 따라서...

 

▲ 공사중인 신설도로 밑 굴다리

 

▲ 철망이 꺾이는 곳에서 전신주 옆 좌측 수레길을 따라서... 

 

마을길인 시멘트 도로에 내려서 우측으로 50여m를 가면 삼거리이고,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방향을 바꾸면 공사중인 신설도로 굴다리가 나온다. 굴다리를 통과하고 잠시 마을길을 이어가면 우측으로 녹색철망이 나타나는데 철망이 끝나는 곳에서 마을길을 버리고 좌측 숲을 향해 진행을 한다. 물론 입구에 나들길 표시가 되어 있다.

 

▲ 마을길을 버리고 들어선 산길

▲ 잣나무숲 터널길

 

수레길을 따라 완만하게 오르면 잣나무숲 터널길이 나타나고 이를 통과하면 우측에 묘 1기가 있는 ┬자 능선 삼거리(14:25)에 오르게 된다.

 

 

우측으로 능선길을 따르면 능선 우측으로는 잣나무가 줄을 지어 능선길과 함께 한다. 묘 5기가 있는 곳에 이르면 좌측으로 시야가 확보되어 한강과 북녘 땅이 내려다 보이고(14:30) 1분여를 편안하게 내려가면 좌측에서 올라오는 수레길과 만나게 되고 잠시 후 Y자 갈림길에서 좌측의 길로 내려간다.

 

 

 

산 사면을 따라 나있는 호젓하고 부드러운 길을 당분간 이어가다 좌측 방향에서 오는 수레길과 만나(14:35) 우측으로 수레길을 따른다. 평탄하고 편한 넓은 수레길을 5분간 진행하면 1차선 포장도로가 나타난다.

 

▲ 연미정가는 두 갈래 갈림길인 1차선 포장도로

▲ 연미정가는 두 갈래 갈림길인 1차선 포장도로의 강화나들길 안내도 

▲ 연미정가는 두 갈래 갈림길 중 하나인 산길입구

 

14:41~14:44=>1차선 포장도로

     길 건너 숲길 입구에 강화나들길 첫째길 '심도로 드는 길' 안내도가 있는데 이곳이 연미정으로 가는 갈림길이다. 우측의 도로를 따라 진행하여도 연미정으로 갈 수가 있지만 산길을 따라 가기로 한다.

산길로 들어 잠시 오르면 '창원황씨가족묘'와 4기의 묘(14:47)가 있고, 우측으로 휘어지는 길을 따르면 좌측으로 저수탱크 1개, 우측으로는 소나무숲이 있다.

 

▲ 철조망과 가시나무가 심어진 옆길을 따라서...

▲ 검은색 그물망이 쳐진 밭 옆을 지나서...

 

우측으로 녹슨 철조망과 가시나무가 심어져 있는 길을 따라 굴곡없는 편안한 능선길을 이어가면 검은색 그물망이 쳐진 밭에 'OS 오색농원'이란 나무푯말과 저수탱크를 다시 지나 직진의 완만한 오르막길을 오르면 뚜렷한 능선길이 나타난다.(14:57)

계속 직진하여 넓은 잔디밭에 창원황공지묘 2기(15:01)가 있는 곳까지 진행하고, 잘못된 방향의 길로 들어 섰음을 알고 다시 BACK(15:03)을 하여 창원황씨묘 3기가 있는 곳에서 우측으로 꺾어 좌측으로 군 교통호가 나들길과 나란히 하는 내리막을 따라 내려간다.

 

▲ 군교통호를 따라서...

 

교통호가 끝나고 좌측으로 밤나무 과수원이 있는 길을 따르면 간이 상수도 취수원을 지나 시멘트 포장도로 고갯마루에 내려선다.

포장도로에 내려서면 정면으로 월곳돈대인 연미정이 조망이 되는데 우측의 포장도로를 따라 내려가서 연미정으로 향하기가 싫어 혹시 산길이 이어지는지 확인을 하기 위해 도로 건너 산속으로 들어가 보지만 뚜렷한 길을 발견하지 못하고 10여분의 시간을 허비한다.

 

▲ 뒤돌아본 시멘트 포장도로 고갯마루

 

▲ 시멘트 포장도오 직전의 간이 상수도 취수원 시설물

 

▲ 마을로 이어지는 포장도로

 

15:08~15:18=>시멘트 포장도로

     우측으로 포장도로를 내려가면 처음 연미정 갈림길에서 헤어졌던 1차선 포장도로에서 내려오는 도로와 만나는 ┬자 삼거리. 좌측으로 연미정을 향해 도로를 따라 진행하다 해안도로 약 100여m 정도 전 좌측으로 방향을 바꾸어 나가면 연미정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 월곳돈대에서 바라본 강화해협 건너 문수산

 

▲ 연미정의 강화나들길 이정표 

 

▲ 연미정 앞 '월곳' 버스정류장 

 

15:25~16:01=>연미정/월곳돈대

     주차장 앞에는 월곳 버스정류장이 있고, 좌측에는 100여m 떨어진 곳에 '민통선 제9검문소'가 보인다.

도로 건너 강화나들길 이정표(연미정→용정리)와 '심도로 드는 길' 안내도를 확인하고 월곳돈대에 오르면 돈대 안에 연미정 정자와 수령 500년된 두 그루의 느티나무 보호수(2000년 11월 27일 지정)가 정자 주변에 아름드리 가지를 뻗고 오랜 세월 동안 격동의 역사 현장을 묵묵히 지키며 서 있다.

 

♧ ♧ 연미정(燕尾亭)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4호 

 

이 정자는 고려시대에 지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초창년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고려 고종이 1244년 시랑 이종주에게 명하여 구제하기 위하여 학생을 이곳에 모아놓고 면학케 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후 조선 중종5년(1510) 삼포왜란때 전라좌도방어사가 되어 왜적을 무찌르고, 도총관을 거쳐 중종7년(1512) 함경도지방의 야인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순변사가 되어 이를 진압한 공로로 장무공 황형에게 이 정자를 하사하였다 한다. 후에 황형은 공조판서까지 지냈고 정자 밑에 반쪽으로 갈라진 작은 비석에는 '고공신장무공황형택'이라고 새겨져 있다.

이 곳은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여 한 줄기는 서해로, 또 한 줄기는 강화해협(염하강)으로 흘러 그 모양이 마치 제비꼬리 같다 하여 연미정이라 하였다 한다. 높은 석주 위에 세운 팔작집으로 영조20년(1744) 중건, 고종28년(1891) 중수 등 여러 차례 걸쳐 보수를 하였다. 조선 인조5년(1627) 정묘호란시 이곳에서 청국과 굴욕적인 형제관계의 강화조약을 체결한 곳이기도 하다.

이에 강화에 5진 7보 8포대 54돈대를 설치하여 섬 전체가 마치 톱니바퀴가 감싸고 있는 모습이 된 것이다.

파주시와 김포시가 한눈에 들어 오기도 하는 곳으로, 옛날에는 서해로부터 한양으로 가는 배가 이 정자 밑에 닻을 내려 조류를 기다려 한강으로 들어 갔다고 한다.

정자는 주위에 석축이 둘러쳐져 있고, 평지 위에 사방 8m의 바닥을 높이고 10개의 기둥을 세워 지붕을 얹어 만들었다. 정자 양쪽에는 수령 약 500년이 넘은 느티나무 두 그루가 웅장한 자태로 그 정취를 더해 주고 있다.

 

♧ ♧ 월곳돈대 

 

강화해협을 방어하던 강화의 5진(월곳진, 제물진, 용진진, 덕진진, 초지진) 중의 하나인 월곳진에 소속된 돈대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돈대이다.

 

연미정이 있는 월곳돈대에 서면 강화해협과 강 건너 문수산의 전경이 아름답다.

연미정 앞 버스정류장에서 대산리까지 들어갔다 되돌아나오는 강화행 버스에 오르며, 연미정을 뒤로 하고 오늘의 강화나들길 제1코스의 소구간 탐방을 마무리하며 다음 탐방을 기약하며 미련없이 강화터미널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