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은 관광명소/성곽돌기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Ⅱ) '서장대~창룡문'구간

왕마구리 2010. 10. 6. 10:29

◀ 성곽의 꽃 '화성(華城)' ▶    

◁ 도시화로 사라져 버린 화성의 성곽이 복원되기를 기원하며... ▷  

  

【 화성(華城)의 개요 】

*사적 제3호

 세계문화유산(1997년 12월 유네스코 지정)

화성은 조선 22대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장조로 추존)가 당쟁으로 인하여 뒤주 속에서 참혹하게 죽음을 당한 것을 항상 슬피 생각해 오다가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자 아버지의 고혼을 위로하기 위해 양주땅 배봉산으로부터 유해를 수원 남쪽 화산(花山)으로 천봉하고, 정조18년(1794) 1월부터 정조20년(1796) 9월까지 2년 10개월여에 걸쳐 화려하고도 웅대한 성곽을 축성하였다.

화성은 실학자로 불리우는 유형원과 정약용의 성설을 설계의 기본 지침으로 삼아, 영의정 체제공이 성역을 주관하고 수원유수 조심태 등이 전력하여 이룩한 것으로 우리나라 성곽 중에서는 가장 과학적으로 구조물을 치밀하게 배치하면서도 우아하고 장엄한 면모를 갖춘 것이다.

특히 성곽의 축조에 석재와 전을 병용한 것, 그리고 화살과 창검을 방어하는 구조뿐만 아니라 총포를 방어하는 근대적 성곽 구조를 갖추고 있다는 점, 또한 용재를 규격화하고 거중기 등의 기계장치를 활용한 점 등에서 우리나라 성곽사상 가장 특기할 일이다.

 

화성 축성 공사에는 모두 22직종 1,840명의 장인들이 동원되었으며, 석재는 화성 북쪽의 숙지산에서 떠온 돌을 사용하고, 기와와 벽돌은 성역소에서 직접 가마를 마련해 구워냈다. 기둥이나 대들보에 쓰이는 큰 목재는 충남 안면도와 강원도의 산림을 가져다 사용을 하였다.

또한 정약용이 고안한 유형거와 거중기 등을 비롯한 장비를 이용하므로 자재 운반 등이 용이하고 수월해져서 일의 능률을 높여 공사 기간을 단축시키고 공사비를 절감할 수가 있었다.

화성은 지형에 의하면 평지와 산에 걸쳐 쌓은 '평산성'의 독특한 형태를 지닌 포곡식 산성으로, 성벽을 쌓는 재료를 한국에서 가장 널리 축조되는 풍부하고 질 좋은 화강암의 석성에 벽돌을 대대적으로 활용하는 '전축성'을 혼용한 것이 특징인데 방어시설은 주로 벽돌을 사용하고, 성벽 자체는 모두 돌로 축조하였다.

화성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최근에 축조한 성으로 규모와 시설을 보면,

성곽에는 동서남북으로 관문을 두었으며, 각 문의 사이에는 적정을 관찰할 수 있는 공심돈을 만들었고, 장대 2곳을 설치하여 군사를 훈련시켰다.

통신시설인 봉돈을 비롯하여 각 5개씩의 포루(鋪樓)와 포루(砲樓), 2개의 노대(弩臺), 4개의 각루(角樓), 성안을 흐르는 수원천에 2곳의 수문 등이 축조되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과학적인 설계 아래 세워진 성이다.

현재 사적 제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97년 12월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록 배경』

등록기준 중 두번째 기준인 '한 시대나 하나의 문화권을 통해 건축, 기념물, 문화환경 부문에서 지대한 영행력을 행사한 것'과 세번째 기준인 '소멸된 문명이나 문화전통에 대해 독특하거나 지극히 희귀한 사례, 적어도 예외적인 증명이 되는 것'에 근거하여 등재가 되었다.

특히 동서양을 망라하여 고도로 발달된 과학적 특징을 고루 갖춘 근대 초기 건축물의 뛰어난 모범이며, 18세기 군사건축물을 대표하여 유럽과 극동아시아 성제(城制)의 특징을 통합한 독특한 역사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화성의 특징과 우수성』

- 화성의 규모는 성의 둘레 5.7km(미복원 구간 포함), 면적은 130㏊로 동쪽 지형은 낮은 구릉을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51개의 시설물로 성곽을 이루고 있으나 이중 수해와 전란으로 7개의 시설물이 소멸되고 약 40개소의 시설물이 현존하고 있다. 이중 23개소에는 예술적 가치가 높은 한국고유의 누각을 설치하였다.

-화성의 축성동기는 군사적 목적보다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려는 정조의 정치적 측면, 농업 기술의 발전으로 생산력이 증대되어 상업이 활기를 띠자 서울과 지방간에 유통이 활발해져 삼남의 교통중심지인 수원을 경제 도시로 만들기 위한 신도시 건설이라는 경제적인 측면과 부모에 대한 효심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리고 도시기반시설인 문, 도로, 다리, 상가 등을 설치하고 생산기반시설인 저수지와 둔전을 경영함으로써 계획된 신도시로 건설되었다. 중국, 일본 등과는 달리 평지와 산지에 걸쳐 축조된 독특한 형태의 포곡식 산성으로 군사적 방어기능과 정치,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다.

- 18세기 동양의 성곽을 대표하는 한국전통건축의 완성품으로 축성의 계획, 제도, 법식 뿐 아니라,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공사일지 등이 '화성성역의궤'에 완벽한 기록으로 남아 있어 건축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 화성만의 독특한 시설인 '공심돈' '현안' 등이 설치됨은 물론 성곽시설의 기능이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동양성곽의 백미라 할 수 있으며, 18세기 실학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50개가 넘는 시설물이 저마다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어 성곽 전체를 하나의 예술적 작품으로 보이게 하며, 화홍문의 수문은 기능과 7칸의 수문위에 축조된 문루가 하나의 예술품으로 조화를 이루어 방화수류정과 한폭의 그림을 연상케 한다. 

 

【 화성의 아름다운 건축물들 】

 

【 성문(城門) 】 4대문

화성을 출입하는 4개의 관문이며 이중 팔달문과 장안문이 각각 남북의 정문으로서 석축으로 된 무지개문(홍예문) 2층에 문루가 세워져 있고 벽돌로 쌓은 반원형 옹성이 문을 둘러 싸고 있는 독특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팔달문(제402호)과 화서문(제403호)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 팔달문,장안문,창룡문,화서문 등 4대문

 

【 공심돈(空心墩) 】

군사가 안으로 들어가서 적을 살필 수 있게 만든 망루의 일종으로 동북공심돈은 화성에서 가장 특이한 건물 가운데 하나로 중국 요동지방에 있는 평돈(平墩)을 모방하여 벽돌로 동그랗게 돈대를 쌓아 만들었다. 남공신돈은 남암문의 동쪽 치위에 위치해 있었으나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 서북공심동, 동북공심돈 등 2개소

 

【 장대(將臺) 】

장대는 모두 2개소가 있는데 서장대는 팔달산 정상에서 성 주변을 살피면서 군사를 지휘하던 곳이다. 사방 100리가 한눈에 보이는 이곳은 화성의 군사지휘본부로 일명 화성장대라고도 한다. 동장대는 평상시 군사를 훈련하고 지휘하던 곳이라 '연무대'란 별칭이 붙었다.

- 서장대, 동장대 등 2개소 

 

【 수문(水門) 】

화성을 가로질러 흐르는 수원천에 세운 수문으로 2개소가 설치되었으나 현재 남수문은 소멸되었고, 북수문만이 현존하고 있다. 다양한 기능과 견고함에 멋진 외관까지 함께 갖춘 북수문은 아름다운 경관을 지닌 당대의 대표적인 시설물이다.

-북수문(화홍문),남수문(현재 미복원) 등 2개소 

 

【 포루(砲樓) 】

화성에는 벽돌을 사용하여 모두 5개소의 포루를 만들고 3층으로서 지대위에 혈석(穴石:대포발사를 위해 구멍을 뚫은 돌)을 전면 2개, 좌우 3개씩 놓았으며, 그 위에 벽돌을 쌓았고 안쪽으로 판자를 잇대어 2층으로 구분하였다.

- 서포루, 북동포루, 동포루, 북서포루, 남포루 등 5개소 

 

【 암문(暗門) 】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만들어 적에게 들키지 않게 군수물자를 성안으로 공급할 수 있도록 만든 군사시설로 유사시에는 문을 닫고 주변에 쌓아 둔 돌이나 흙으로 암문을 메워 폐쇄하도록 하였다.

남암문은 시가지화 되면서 파괴되어 없다.

- 서남암문, 북암문, 동암문, 서암문 등 4개소 

 

【 포루(鋪樓) 】

치성 위에 설치한 누로 군사들을 숨겨두고 적군이 보지 못하게 하는 시설물로 아래쪽은 돌로 쌓고 중간 부분부터 벽돌로 축조하였다. 그 위에 집을 짓고 판자를 깔아 문루를 만들고, 좌우에는 활을 쏘는 구멍도 만들었다.

- 동북포루, 북포루, 서포루, 동일포루, 동이포루 등 5개소 

 

【 각루(角樓) 】

높은 위치에 건물을 세워 주변을 감시하기도 하고 때로 휴식을 즐길 수 있도록 한 곳을 말하며, 화성에는 총 4개소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중 동북각루는 방화수류정이라고 한다. 서남각루는 용도를 통하여 뻗어나간 외성의 끝에 위치하고 '화양루'라고도 불린다.

- 동북각루(방화수류정), 서북각루, 동남각루, 서남각루(화양루) 등 4개소 

 

[ 봉돈(烽墩) 】

비상상태를 알리는 역할을 하는 통신시설로 봉돈은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벽돌을 쌓고 그 위에 5개의 화두를 쌓았으며, 성벽에 총구멍을 뚫어 적으로부터 방어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연기를 피우는 봉화의 기능과 포대의 기능이 합쳐진 것이 봉돈이다.

 

 【 치성(雉城) 】

일정한 거리마다 성곽의 요소에서 바깥으로 튀어나오도록 한 구조물로서 성벽 가까이 좌우 방향으로 접근하는 적군을 공격하기 위한 시설물이다.

- 서삼치.서일치,서이치,용도서치,용도동치,동일치,동이치,동삼치,남치,북동치 등 10개소

 

【 노대(弩臺) 】

쇠뇌를 쏘던 방어시설로 산 정상부에 위치

하였고, 화성에는 2개소의 노대가 설치되어 있다.

이중 동북노대는 서노대가 성벽 안쪽에 만들어진 것과는 달리 치성 위에 벽돌을 쌓아 만들었다.

- 동북노대, 서노대 등 2개소  

 

【 적대(敵台) 】 

성문과 옹성에 접근하는 적을 막기 위해 성문의 좌우에 설치한 방어시설로, 적대는 시설물의 반만 외부로 돌출되어 있고, 반은 성안으로 돌출되어 있다. 성곽보다는 높게 축조되어 적군의 동태와 접근을 감시하였다. 팔달문 좌,우의 적대((남동, 남서)는 도시화로 사라져 버렸다.

- 북서적대, 북동적대 등 2개소 

 

【 소 재 지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 화성 성곽 돌기 】

장안문→북서적대→북서포루→북포루→서북공심돈→화서문→서북각루→서일치→서포루→서이치→서노대/서장대→서암문→효원의종→서포루→서장대관광안내소→서삼치→3.1독립기념탑/대한독립기념비→서남암문/서남포사↔서남각루(화양루+용도동치<서남이치>+용도서치<서남일치>)→남포루→남치→팔달문→팔달문시장→수원천(지동시장입구/식사)→동남각루→동삼치→동이포루→봉돈→동이치→동포루→동일치→동일포루→청룡문→동북노대→동북공심돈→동장대(연무대)/연무대관광안내소→동암문→동북포루→북암문→동북각루(방화수류정)→북수문(화홍문)→북동포루→북동치+북동적대→장안문/원점회귀

 

▲ 수원화성 안내도

 

【 탐방일자 】 2010년 10월 2일(토)

【 소요시간 】총 5시간 47분 소요(휴식 및 중식 : 3시간 55분 포함)/실제 : 1시간 52분 소요

▷ 성 안과 밖을 왔다갔다 하며 성곽의 상태를 확인하고 개방된 각루나 포루 등에서 비를 피하며 주변의 경관 감상 및 사진을 촬영하느라 지체되었으며, 서정대관광안내소와 연무대관광안내소의 매점에서 각각 휴식, 그리고 팔달문 지나 지동시장내의 식당에서 식사 등 탐방과 별개로 소요된 시간이 많아 전체 탐방시간이 많이 길어지게 되었음.

▷ 탐방거리(이정표 기준) : 약 5,744m

    장안문-(610m)→화서문-(630m)→서장대-(770m)→화양루(서남각루)-(770m)→팔달문-(640m)→봉돈-(840m)→창룡문-(630m)→동장대-(400m)→방화수류정(동북각루)-(454m)→장안문/원점회귀 

【 날     씨 】 흐리고 비

【 교 통 편 】 대중교통 이용

<< 갈 때 >> 부천역/전철1호선→수원역-(#13번 시내버스)→'장안문' 버스정류장

<< 올 때 >> '갈 때의 역순'

 

【 탐 방 기 】

우리나라에 잔존하는 성곽의 대부분이 산 봉우리 정상을 돌아 수축된 테뫼식이나 두 개이상의 산 봉우리를 연결하는 포곡식 산성으로 군사적 목적으로 축성되어 건축물 등 문화재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일반인들의 관심을 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반면, 수원 화성은 도시의 한 복판에 평지와 높이 143m의 낮은 팔달산에 걸쳐 자리를 잡고 있는 계획된 도시 성곽으로 많은 건축물들이 성곽을 따라 설치가 되어 있어 일반인들의 흥미를 끌 뿐만 아니라 접근이 용이하여 누구나 손 쉽게 찾을 수가 있는 곳이다.

뿐만 아니라 국내 성곽에서 찾아 보기 힘든 치성, 옹성, 공심돈 등 새로운 축성방식의 도입과 강화도와 남한산성에서 일부 실험 사용되었던 벽돌을 대대적으로 활용한 성벽 축성 재료의 다양성으로 성곽을 따라 설치된 모든 건축물들이 같은 용도와 목적으로 건축되었을지라도 동일한 모양이 없이 지형에 따라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성내에는 임금이 임시로 거처하기 위해 마련된 행궁이 자리를 잡고 있은데, 일제강점기 때 일제가 의도적으로 파괴하여 과거 행궁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지만 광복 후 화성 공사에 관한 중요하고 방대한 자료가 모두 기록되어 있는 조선시대 건축 종합 보고서격인 '화성성역의궤(2007년 6월 14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제)'를 참고하여 1990년대 복원 공사가 시작되어 현재 복원이 완료된 화성행궁이 자리를 잡고 있으며,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성곽과 북문인 장안문, 동문인 창룡문의 문루가 파괴되었으나 현재는 일부 성곽과 시설물을 제외하고는 '화성성역의궤'를 근거로 복원이 완료되어 있다.

 

이 처럼 뛰어난 문화재인 화성산성 인근을 자주 지나쳤지만 제대로 탐방을 하지 않고, 차일피 미루기만 하고 멀리 떨어져 있는 산중의 성곽을 찾아 탐방을 실시하다가 이번에 화성행궁을 포함한 모든 시설물들을 탐방하는 화성돌기를 실시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장안문을 시작으로 한바퀴 돌아 원점으로 회귀하는 탐방을 시작하니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잔뜩 찌푸린 날씨에 비까지 내려 서장대에서 성내로 내려가 '화성행궁'을 1시간 정도 관람하고 다시 서장대에 올라 나머지 성곽돌기를 할 계획이었으나 이를 포기하고 개방된 포루나 각루에서 비를 피하기도 하며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청승맞은 탐방을 해야만 했다.

비가 내리는 등 기상조건이 좋지 않아 '화성행궁'의 탐방을 이번에 포기하고 다음 기회로 미루어 두었으니, 다시 '화성행궁' 관람을 위해 화성을 탐방할 때에는 이번 탐방에서 미진하였던 성곽 외부의 모습을 일부 살펴 보고, '화성열차'도 한 번 타보기로 해야 겠다.

성곽을 따라 설치된 시설물들이 일반 산성에서는 보지 못하였던 것들이라 살펴 보는데에도 많은 시간이 걸렸고, 성곽 위를 따르다 보니 외부 성벽과 각 시설물들의 외부의 모습과 구조을 살펴 볼 수 있는 기회는 4대 성문과 5개의 암문 중 현재 남아 있는 4개의 암문을 통해 성밖으로 나갔을 때와 개방된 포루나 각루, 그리고 치성에서 제한된 범위 안에서만 가능하여 아쉬웠다. 또한 시설물들 중 개방된 누각 형태의 건축물을 제외하고는 모두 문이 잠겨 있어 내부 구조를 볼 수 없었다.

 

이번 화성돌기 탐방에서는 성곽의 길이는 약 5.7km로 길지 않지만 50여개 가까운 많은 건축물들이 성곽을 따라 설치가 되어 있어 전체를 한꺼번에 올리기에는 너무 자료와 사진 등이 방대하여 아래와 같이 구간별로 나누어 탐방기를 작성하기로 하였다.

 

- 화성(Ⅰ) 장안문~서장대 구간

- 화성(Ⅱ) 서장대~창룡문 구간

- 화성(Ⅲ) 창룡문~장안문 구간

 

탐방기를 작성하며 기재하는 시간은 각 시설물에 도착하여 각각의 시설물 구조나 주변 및 성밖의 성벽 등을 관찰하느라 소요된 시간을 표기한 것이므로, 화성 성곽돌기 실제 소요시간과는 무관하니 착오없으시기 바란다. 

실제로 사잔촬영, 성밖 다녀오기, 누각에 올라가 조망하기 등 걷기와 무관한 시간을 제외한다면 2시간~2시간30분 정도면 휴식시간을 포함하여 충분한 코스이다.

 

- 화성(Ⅱ) '서장대~창룡문' 구간 -

 

'장안문~서장대'구간에 이어 두번째 이야기로 '서장대~청룡문'까지의 시설물과 건축물들을 계속 소개하기로 한다.

화성 두번쩨 구간은 팔달산 정상에서 팔달산을 내려가는 성곽을 따라 남문인 팔달문에 이르면 화성의 산성구간은 끝이 나고 다시 평지성이 이어지게 된다.

원 계획은 서장대에서 성안에 복원해 둔 화성행궁으로 내려가 행궁을 답사하고 다시 성곽돌기를 할 계획이었으나, 본격적으로 비가 내리기 시작을 하여 오늘 성곽돌기를 1차 끝을 내고, 아쉽거나 부족했던 점을 찾아 다음 기회에 화성행궁 답사와 화성열차를 타고 화성 주변 돌기를 하면서 보충을 하기로 한다.

서장대에서 서남암문까지는 능선의 완만한 길이고, 서남암문에서 산성을 벗어나게 되는 팔달문까지는 내리막 성곽길이고 이후에는 평지성의 성곽을 따라 돌게 된다. 도시화로 팔달문 주변은 팔달문을 제외하고는 상업 건물과 시장 등 시가지가 들어서 성곽이 다시 나타나는 수원천까지는 현재 복원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다.

현재 복원이 되지 않고 사라진 성곽은 남치~팔달문과 팔달문~동남각루 사이의 성곽이고, 이 구간의 성곽위에 존재했어야 할 시설물들은 다음과 같다.

* 남암문 : 팔달문과 수원천 남수문 사이

* 남수문 : 수원천(현 지동시장 입구)

* 님공심돈 : 남암문 동쪽( 현 팔달문시장 도로 건너 상가지역)

* 남동적대와 남서적대 : 팔달문 좌우

이상 5개의 건축물이나 시설물들이 성곽이 사라지며 함께 멸실되었고, 이외에도 성안에 위치해 있었던 중포사와 내포사도 미복원된 상태이다.

팔달문 서쪽에 내려서면 팔달문 정문과 옹성을 좌측에 두고 반원을 그리며 반대편으로 돌아가 '팔달문시장' 아치가 세워진 도로를 따라 들어간다. 약 100여m 정도를 도로따라 들어가면 정면으로 수원천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나타나고 다리 건너에는 '지동시장'이란 큰 글자가 붙어 있는 지동시장 입구가 보인다.

다리 직전 좌측에는 '팔달문시장종합관광안내소'가 보이고 앞에는 만남의 광장이 있다. 수원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자마자 좌측으로 꺾어 잠시 들어가면 우측으로 성곽과 작은 언덕 위에 동남각루 누각이 보인다.

 

서장대에서 팔달문까지의 성곽에는 서암문, 서포루, 서삼치, 서남암문/서남포사, 남포루, 남치 등이 있으며, 서남암문 밖으로는 약 170m 정도의 용도가 이어지는데 그 끝에는 서남각루(화양각), 용도 중간 좌우로 용도동치(서남이치)와 용도서치(서남일치)가 자리를 하고 있다. 외성 형태의 보조 옹성의 시설물까지 포함하면 총 9개의 시설물이 설치가 되어 있다.

또한 서암문과 서포루 사이 성곽길 좌측에는 '효원의 종각'이 있어 타종 체험(유료)을 할 수가 있으며, 서남암문 직전 성곽길 좌측 약간 떨어진 곳에는 삼일독립기념탑과 대한민국독립기념비가 자리를 하고 있다.

서남암문에서 용도를 따라 서남각루까지 갔다가 서남암문으로 되돌아 와야 하며, 서장대에서 서남암문까지는 팔달산 능선의 편안한 성곽길이지만 서남암문을 지나면 가파른 내리막 계단길이 팔달문까지 이어지게 된다. 그리고 서포루와 서삼치 사이에는 일부 성곽이 트여 있고 도로가 가로지르고 있는데 도로따라 우측 성밖으로 나가면 서장대관광안내소, 매점, 그리고 화장실이 있어 쉬어 갈 수가 있다.

또한 팔달문을 지나면 팔달문시장과 지동시당이 이어지는데 시장내 다양한 먹거리가 있어 부담없이 푸짐한 식사를 하고 갈 수가 있다.

 

수원천에서 다시 시작되는 성곽길을 따르면 동남각루까지 짧은 오르막 계단길이 있지만 부담이 되지 않고 이후로는 평지성의 성곽길을 따르게 되어 있다.

팔달문에서 창룡문까지 사라진 시설물을 제외하고 현존하는 시설물과 건축물들은 동남각루, 동삼치, 동이포루, 봉돈, 동이치, 동포루, 동일치, 동일포루, 창룡문 등으로 총 9개가 있어 이번 구간(서장대~창룡문)에는 총 18개의 시설물이나 건축물들을 지나게 되는 코스이다.

 

13:05=>서장대

     서장대를 뒤로 하고 약 50여m를 성곽을 따르면 우측에 서암문이 있다. 서암문을 통해 성밖으로 나가 외부 성벽을 살펴보고 성곽을 따라 잠시 올라가면 매표소가 나타난다.

 

 

▲ 서암문 밖에서 바라본 외부 성벽 모습

 

''효원의종' 타종 체험과 화성 입장권을 판매하는 매표소(13:08~13:21)이다. 장안문이나 이곳 매표소 또는 연무대 등 어디에서 구입을 해도 전체 코스를 탐방할 수 있는데 혹시 중간에 입장권을 검사할지 모르니 잘 챙겨 두어야 한다.

'효원의종'을 지나면 서포루(13:22)가 있고, 완만하게 내려가면 이정표(←화성열차타는곳/↑서남각루/↓매표소,서장대/→관광안내소,화장실)가 있는 사거리이다. 터진 성곽 밑으로 도로가 지나는 사거리로 우측 도로 따라 성밖으로 나가면 관광안내소와 매점이 자리를 하고 있다.

매점(13:25~13:39)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휴식을 취하고 성밖 기준 우측으로 돌출된 성곽인 서삼치가 보여 가까이 가 확인을 한다.

성안으로 들어 성곽길을 따라 서삼치(13:39)를 지나 서남암문/서남포사(13:42~13:44) 입구에 도착을 한다.

 

 

 

▲ 서남암문과 서남각루 사이의 용도

 

▲ 서남암문과 서남각루 사이의 용도에 설치된 서남이치(용도동치)와 서남일치(용도서치)

 

암문을 빠져나가 양쪽으로 여장이 설치된 용도를 따라가면 좌측으로 용도동치(서남이치), 우측으로 용도서치(서남일치)가 연이어 나타나고 용도 끝에 이르면 서남각루(화양루) 누각(13:49~13:52)이 자리를 하고 있다.

서남암문으로 되돌아 나와(13:55~13:57) 길 건너 맞은 편 약 50여m 떨어진 곳에 설치된 '삼일독립기념탑'과 '대한민국독립기념비'를 둘러 보고 성벽 옆 가파른 계단길을 내려간다.

 

▲ 서남암문에서 팔달문으로 내려가는 성곽길

 

▲ 남포루 앞에서 올려다본 성곽 옆 게단길과 내려다본 팔달문 주변의 시가지 전경

 

남포루(14:01)와 남치(14:06)를 지나 내려서면 성곽은 끝이 나고 팔달문관광안내소가 있다. 시가지화로 사라져버린 화성의 성곽이 완전히 복원되기에는 어려움이 따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도로를 따라 계속 직진하니 팔달문이 정면에 나타난다.

 

♧ 서암문(西暗門) 

 

 

암문은 성곽의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적이 알지 못하고록 출입구를 내어 사람이나 가축이 통과하고 군수품을 조달하기 위하여 설치된 문으로 화성에는 5곳의 암문이 설치되어 있다. 그러나 팔달문과 남수문의 중간에 위치해 있던 남암문은 그 지역이 시가지화되면서 파괴되어 현재는 남아 있지 않아 현존하는 암문은 4곳이다.

자연지형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설치하였기 때문에 암문 가까이 접근하기 전에는 암문이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이다. 정조20년(1796) 6월 18일 완공되었다.

 

((참고)) '효원의 종' 안내문 : 서암문과 서포루 중간에 위치 

 

모든 이에게 효성심을 심어줌은 물론 가족의 건강과 나라의 평안을 기원하는 수원시민의 염원을 담아 만든 종이다.

누구나 종을 칠 때에는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부모님에 대한 효성심을 되새겨 보는 값진 시간이 되시길 바란다.

-타종시간 : 매일 10:00~18:00

-제1타종 : 부모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효도를 다짐하며

-제2타종 : 가족의 건강과 화목을 다짐하며

-제3타종 : 자신의 발전과 소원성취를 기원

 

♧ 서포루(西鋪樓) 

 

정조20년(1796) 8월 18일 완공되었으며 서암문이 적에게 발견되어 공격받는 것을 대비하여 설치된 치상위의 목조건물로 초소나 군사대기소와 같은 곳이다.

서장대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성밖으로 약 7m 돌출되었고, 누각에는 판문이 설치되어 있고 전안을 두어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 성밖과 안에서 바라본 서삼치

♧ 서삼치(西三雉)  서포루와 서남암문 사이에 위치 

 

♧ 서남암문(西南暗門)과 서남포사(西南鋪舍) 

 

 

이 문은 용도의 출입문으로 만들어졌으며 문 위에는 안팎으로 낮은 성가퀴(여장이라고도 하며 적으로부터 몸을 숨기기 위하여 성곽에 낮게 설치한 담장)를 설치하였다. 팔달산의 한쪽 높은 곳으로 성의 서남방향 조망이 좋은 곳이라 화성의 암문 중 유일하게 적을 감시하는 포사가 설치되어 있다. 정조20년(1796) 8월 6일 홍예가 완성되었다.

 

▲ 서남암문 위에 설치된 서남포사

 

포사는 성밖의 위험을 성안으로 알리는 역할을 하는 시설물로 깃발을 휘두르거나 대포를 쏘아 위급신호를 전달한다. 서남포사는 서남암문위에 지은 것으로 건물은 넓이가 한 칸이고, 군사가 항상 지키므로 온돌을 놓고 사면에 관문을 설치하였다.

 

♧ 서남각루(西南角樓, 화양루) 

 

 

각루는 성곽의 돌출된 요지 중 비교적 높은 위치에 누각을 세워서 성곽 주변을 감시하거나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설치한 시설물이다.

서남각루는 일명 화양루라고 하며 서남암문 밖 170m 지점의 외성 끝에 위치하고 있으며 산의 높은 지점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전략적 요충지로 전망이 매우 좋다. 서남암문에서 이곳까지 이어지는 통로를 용도라고 부르며 통로 좌측에는 서남이치(용도동치)가, 우측에는 서남일치(용도서치)가 설치되어 있다.

 

((참고)) 삼일독립기념탑과 대한민국독립기념비 : 서남암문 길 건너 숲속에 위치

*삼일독립기념탑

3.1독립기념탑은 단기 4302년(1969) 3월 1일 우리 선열들이 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항쟁한 성업을 길이 빛내고 선열의 명복을 빌자는 참뜻을 두고 건립하게 되었다. 이후 광복 후 중포산에 세운 것을 3.1동지회가 1969년 10월 15일 팔달산 중턱으로 옮겨 놓은 것이 지금의 모습이다.

원래 중포산에 세워진 3.1독립기념탑은 왜경 수원경찰서 사범계주임 오구찌 소위의 순국비를 허물은 자리에 세운 것이다. 삼일동지회는 1969년 4월 12일 창립총회 때 3.1정신의 계승,발전을 위하여 3.1독립기념탑 건립과 동공원에 있는 대한독립기념비를 같은 자리에 이전하기로 결의하였고, 수원시를 비롯한 각급 기관과 학교 및 학생들의 자율적인 협찬을 받아 건립하게 되었다.

 

 

 

*대한독립기념비

대한민국의 광복을 기념하기 위하여 단기 4281년(1948) 8월 15일 수원시민이 세운 기념비이다.

이 비는 수원 시민과 학생 일동이 대한민국 광복을 기념하기 위하여 수원동공원에 건립하였던 것인데 1969년 수원 시민의 날인 10월 15일 3.1독립기념탑과 함께 3.1동지회가 이곳 수원시 팔달산 중턱으로 이전 설치하였다. 높이는 4m이다.

 

♧ 남포루(南砲樓) 

 

 

팔달문과 서남암문 사이 팔달산의 남쪽 중턱에 위치하고 있으며 성밖으로 약 8.8m 돌출되어 있고, 정조20년(1796) 7월 9일 완공되었다.

팔달문 주위의 성벽과 화양루 용도를 수비하기 위해 설치를 하였다.

포루는 성벽에서 돌출시켜 벽돌을 이용 3중층으로 지은 누각건물로 화포를 감추어 두고 위, 아래에서 한꺼번에 공격할 수 있도록 한 성곽 시설물 중에서 가장 중무장된 시설이라 할 수가 있다. 성벽 아랫부분까지 구조물이 설치되었으나 성안에서는 외관상 단층 누각만 있는 것으로 보인다.

 

♧ 팔달문(八達門)

*보물 제402호 

 

 

 

 

 

화성의 남쪽 문으로 충청, 전라, 경상도의 사람들이 이 문을 통과해서 들어오기에 사통팔달 통한다는 의미로 만든 것이다. 팔달문은 축성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 문은 석축으로 된 무지개문 위에 2층으로 문루가 세워져 있고 벽돌로 쌓은 반월형 옹성이 문을 둘러싸고 있으며 옹성의 출입문이 중앙에 있는 것이 특징이며, 옹성 위의 초루는 축성 당시에는 없었으나 후에 세운 것이다.

성문의 높이는 약 19.5m이며, 지붕형식은 우진각 지붕으로 웅대함과 위엄을 나타내고 있다. 성문의 옹성에는 '오성지'라는 시설을 만들어 적의 화공시 물을 이용해서 불을 끌 수 있도록 만든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으며 특이한 것은 성문의 우측 석축에는 석수 김상득 등 성문을 축조한 관계자 이름과 인원 등이 새겨진 실명판이 새겨져 있다.

 

14:09~14:27)=>팔달문

     팔달문이 도로 중앙에 자리를 하여 로터리를 이루고 있어 접근이 불가능하다. 팔달문을 좌측에 두고 반원을 그리며 팔달문 동쪽 반대쪽으로 가니 팔달문시장 입구이다. 팔달문시장을 우측에, 팔달문을 등뒤에 두고 도로를 따라 직진하니 정면으로 '지동시장' 큰 간판이 붙은 시장 건물이 보이고 그 앞으로는 수원천이 흐르고 있다.

수원천을 가로지르는 다리 입구 좌측에는 '팔달문시장관광안내소' 건물이 보이고 앞에는 만남의 광장인지 벤치와 의자들이 설치되어 있고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점심식사 시간을 놓쳤지만 지동시장에서 식사를 하고 가기로 한다.

생선구이에 우중충한 날씨에 비까지 내리니 청화 한병으로 반주를 곁들이며 여유있는 점심식사(14:30~15:38)를 하고, 디저트로 커피 한잔까지 마시니 1시간이 넘는 시간이 후딱 지나가 버린다.

 

 

▲ 지동시장 입구의 이정푯말과 지동시장 전경

▲ 다시 시작되는 성곽 외부 성벽과 동남각루

▲ 동남각루로 오르는 가파른 계단길

 

다리를 건너자마자 지동시장 입구에서 좌측으로 수원천을 끼고 약 100여m를 올라가니 우측에 성곽이 다시 나타난다.

 

▲ 동삼치에서 바라본 동이포루 방향의 외부 성벽 모습

▲ 동삼치에서 바라본 동이포루 방향의 내부 여장 모습

 

가파르게 계단길을 따라 오르게 되는데 짧은 거리라 별 부담은 없다. 동남각루(15:41~15:43)와 동삼치(15:44~15:45)를 차례로 지나 동이포루에 도착을 한다.

 

 

▲ 동이포루에서 바라본 봉돈과 외부 성벽 모습

 

비가 내려 잠시 신발을 벗고 동이포루 누각에 올라가 주변을 둘러 보며 잠시 휴식(5:47~15:53)도 취해본다. 성곽을 넘어 성밖으로 나갈 수 있는 기회가 드믈어 이렇게 출입이 가능한 밖으로 돌출된 누각에 올라가는 것이 시원하게 지나온 성곽길과 가야할 성곽길을 멀리 조망을 할 수가 있고, 외부 성벽도 확인을 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 동포루에서 뒤돌아본 성안의 성곽과 근접한 차도와 밀집된 주택가 

▲ 동일포루에서 동포루 방향으로 뒤돌아본 외부 성벽 모습

▲ 동일포루에서 창룡문 방향으로 조망된 외부 성벽 모습

▲ 동일포루 누각위에서 창룡문 방향으로 조망된 모습

 

동포루(16:02~16:03)와 동일치(16:07)를 차례로 지나 다시 출입이 가능한 누각이 있는 동일포루(16:10~16:17)에 도착하여 굵어진 빗발도 피할 겸 다시 신발을 벗고 올라간다. 동남각루부터 이곳까지는 좌측 성곽 바로 아래로 갓길 주차장이 설치된 도로와 도로 건너에는 밀집된 주택가들이 성곽과 함께 이어진다. 또한 성밖에도 도로를 사이에 두고 주택가들이 계속 이어진다. 아마 화성 정비작업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성곽 바로 옆에도 주택들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창룡문 밖에서 바라본 창룡문 옹성부터 동일포루쪽의 외부 성벽 모습

 

누각 위에 오르니 가야할 방향으로 청룡문이 보이고, 청룡문을 지나면서 좌측으로 반원을 그리며 휘어지며 돌아가는 성곽이 보인다. 성곽이 곡선을 이루는 꼭지점 부근에 동북공심돈이 그 앞으로 펼쳐지는 국궁장의 넓은 활터 때문에 막힘이 없어 그런지 유난히 우뚝 솟아 보이고, 마치 외국의 초원지대에 서있는 높은 농가 건물처럼 보여 목가적인 분위기가 연출된다.

동일포루를 뒤로 하면 이내 창룡문에 도착을 하게 된다.

 

♧ 동남각루(東南角樓) 

 

 

팔달문과 수원천의 동쪽 높은 구릉 정상에 위치해 있으며 성벽이 꺾이는 모퉁이에 있어 성 전체를 바라보기 좋은 곳에 있다. 성벽이 산세 때문에 동남각루가 있는 곳에 이르러 가파르게 뚝 끊어져 누각이 성 위로 불쑥 나와서 멀리 평야까지 바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화성의 4개 각루 중 성 안팎으로 시야가 넓은 곳으로 남수문 방면의 방어를 위하여 남공심돈과 마주보여 군사를 지휘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 동삼치(東三雉)  동이포루와 동남각루의 중간 지점에 위치 

 

♧ 동이치(東二雉)  봉돈과 동포루의 중간 지점에 위치

♧ 동일치(東一雉)  동포루와 동일포루의 중간 지점에 위치

 

♧ 동이포루(東二鋪樓) 

 

 

화성의 5개 포루 중 동쪽에 있고 봉돈의 남쪽에 자리하여 봉돈 방면 공격에 대비하여 치성 위에 몸을 숨기고 있던 군사들이 적을 공격하는 시설물이다. 동이포루의 건축양식을 보면 동일포루와 유사하게 체성까지는 돌로 치를 만들고, 치 위에 벽돌로 여장을 쌓은 후 2칸의 포루를 만들었다. 그러나 만든 모양에서 모서리가 둥근 것이 다른 점이다.

정조20년(1796) 7월 3일 완공되었고 평탄하고 넓은 지형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북쪽의 포루와는 다르게 성벽에서 많이 돌출되었으며 관문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

 

♧ 봉돈(烽墩) 

 

우리나라 대부분의 봉수대는 성밖 산봉우리에 있으나 화성의 봉돈은 성내에 있는 점이 특이하다. 또한 성곽과 맞물려 벽돌로 쌓아 올려진 우리나라 성곽 양식에서는 보기 드문 시설물로 그 규모나 외관이 정교하고 위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술작품처럼 장려하게 축조되었다.

화성의 봉돈은 화성의 사방 경계와 정찰 임무를 하여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빛을 통해 신호를 하였다.

옛날 급한 정보의 전달은 봉화로 연락하였는데 이곳 화성의 봉돈은 용인 석성산의 육봉과 연락하고, 또 바다로는 홍천대의 해봉과 연락하였다고 한다.

낮에 연기를 올릴 때는 연기가 흩어지지 않고 곧 바르게 위로 올라가도록 하기 위하여 이리 똥, 말똥을 말린 것을 주로 사용하였으며, 근대에는 청솔가지, 쑥대 등을 사용하였다. 5개의 화독중 평상시에는 1개의 봉화를 올렸으며, 적이 나타나면 2개, 경계에 접근하면 3개, 경계를 침범하면 4개, 적과 접전시는 5개의 봉화를 올려 비상사태를 전달했다고 한다.

 

♧ 동포루(東砲樓) 

 

 

동쪽 동일치와 동이치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조20년(1796) 7월 16일에 완공되었다.

포루의 벽은 적의 포격에 한번에 부서지지 않도록 모두 벽돌을 사용하여 만들었으며 공심돈과 같이 안을 비워 적을 위와 아래에서 동시에 공격할 수 있게 하였다.

포루는 치성과 비슷하나 돌출된 성벽 내부를 비워 2층으로 꾸미고 여기에 군사들이 각종 포루를 가지고 공격할 수 있도록 꾸민 것으로 포루의 외벽에는 바닥에서부터 수많은 총구멍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성벽과 같은 높이의 외벽은 모두 판문을 대고 거기에 짐승얼굴을 그려 넣은 팔작지붕을 한 건물을 설치하였다.

 

♧ 동일포루(東一鋪樓)

 

 

청룡문 남쪽에 위치한 포루로 정조20년(1796) 7월 10일에 완공하였다.

평탄하고 넓은 지형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북쪽 포루와 다르게 성벽에서 많이 돌출되었으며 관문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 청룡문 일대의 공격에 대비하여 치성 위에 군사들이 몸을 숨기고 있다가 적을 공격하는 시설물이다.

건축양식은 체성까지는 돌로 치를 만들고, 치 위의 여장은 벽돌로 만든 후 3칸의 포루를 만들었다.

 

16:20~16:35=>창룡문

     성밖으로 나갈 수 있는 곳이다. 창룡문도 화서문과 비슷한 구조로 옹성이 구측되어 있고 규모도 비슷해 보인다. 창룡문을 나가면 정면으로 장안문처럼 별도의 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반월형의 옹성이 앞을 가로 막고 좌측으로 성벽과 옹성 사이가 트여 있어 자유롭게 나갈 수가 있다.

 

▲ 창룡문 누각에서 바라본 동북공심돈과 곡성을 이루는 성곽

 

창룡문 누각에 올라가면 정면으로는 동장대가 우측으로는 성곽이 돌아 나가는 곳에 동북공심돈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 조망이 된다. 정면으로 보이는 동장대는 직선 거리로는 약 150여m 정도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이고, 성안을 지나는 차도를 건너면 국궁장 사수대를 지나 동장대로 갈 수가 있다.

성밖으로 나가 외부 성벽과 창룡문을 살펴 보고 성곽위로 올라 마지막 구간인 장안문으로 향한다.

창룡문에서 장안문까지의 시설물과 건축물 등은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Ⅲ) '창룡문~장안문'구간에서 소개하기로 한다.

 

♧ 창룡문(蒼龍門)

 

 

 

 

 

화성의 동쪽 문으로 규모와 특징이 화서문과 거의 동일하다. 무지개처럼 쌓은 석축 위에 1층의 누각을 만들었는데 장안문과 팔달문에 비하면 그 규모가 매우 작다.

 

 

 

 

또한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옹성을 반달모양으로 쌓아 작은 규모를 보이고 있다.

옹성안 홍예문 좌측 석벽에는 성벽 공사를 맡은 사람들과 책임자들을 기록한 공사 실명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