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은 관광명소/성곽돌기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Ⅰ) '장안문~서장대'구간

왕마구리 2010. 10. 5. 16:04

◀ 성곽의 꽃 '화성(華城)' ▶    

◁ 아름다운 건축의 백미!

계획된 신도시!

가장 근대적인 규모와 기능의 성곽! ▷  

  

【 화성(華城)의 개요 】

*사적 제3호

 세계문화유산(1997년 12월 유네스코 지정)

화성은 조선 22대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장조로 추존)가 당쟁으로 인하여 뒤주 속에서 참혹하게 죽음을 당한 것을 항상 슬피 생각해 오다가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자 아버지의 고혼을 위로하기 위해 양주땅 배봉산으로부터 유해를 수원 남쪽 화산(花山)으로 천봉하고, 정조18년(1794) 1월부터 정조20년(1796) 9월까지 2년 10개월여에 걸쳐 화려하고도 웅대한 성곽을 축성하였다.

화성은 실학자로 불리우는 유형원과 정약용의 성설을 설계의 기본 지침으로 삼아, 영의정 체제공이 성역을 주관하고 수원유수 조심태 등이 전력하여 이룩한 것으로 우리나라 성곽 중에서는 가장 과학적으로 구조물을 치밀하게 배치하면서도 우아하고 장엄한 면모를 갖춘 것이다.

특히 성곽의 축조에 석재와 전을 병용한 것, 그리고 화살과 창검을 방어하는 구조뿐만 아니라 총포를 방어하는 근대적 성곽 구조를 갖추고 있다는 점, 또한 용재를 규격화하고 거중기 등의 기계장치를 활용한 점 등에서 우리나라 성곽사상 가장 특기할 일이다.

 

화성 축성 공사에는 모두 22직종 1,840명의 장인들이 동원되었으며, 석재는 화성 북쪽의 숙지산에서 떠온 돌을 사용하고, 기와와 벽돌은 성역소에서 직접 가마를 마련해 구워냈다. 기둥이나 대들보에 쓰이는 큰 목재는 충남 안면도와 강원도의 산림을 가져다 사용을 하였다.

또한 정약용이 고안한 유형거와 거중기 등을 비롯한 장비를 이용하므로 자재 운반 등이 용이하고 수월해져서 일의 능률을 높여 공사 기간을 단축시키고 공사비를 절감할 수가 있었다.

화성은 지형에 의하면 평지와 산에 걸쳐 쌓은 '평산성'의 독특한 형태를 지닌 포곡식 산성으로, 성벽을 쌓는 재료를 한국에서 가장 널리 축조되는 풍부하고 질 좋은 화강암의 석성에 벽돌을 대대적으로 활용하는 '전축성'을 혼용한 것이 특징인데 방어시설은 주로 벽돌을 사용하고, 성벽 자체는 모두 돌로 축조하였다.

화성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최근에 축조한 성으로 규모와 시설을 보면,

성곽에는 동서남북으로 관문을 두었으며, 각 문의 사이에는 적정을 관찰할 수 있는 공심돈을 만들었고, 장대 2곳을 설치하여 군사를 훈련시켰다.

통신시설인 봉돈을 비롯하여 각 5개씩의 포루(鋪樓)와 포루(砲樓), 2개의 노대(弩臺), 4개의 각루(角樓), 성안을 흐르는 수원천에 2곳의 수문 등이 축조되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과학적인 설계 아래 세워진 성이다.

현재 사적 제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97년 12월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록 배경』

등록기준 중 두번째 기준인 '한 시대나 하나의 문화권을 통해 건축, 기념물, 문화환경 부문에서 지대한 영행력을 행사한 것'과 세번째 기준인 '소멸된 문명이나 문화전통에 대해 독특하거나 지극히 희귀한 사례, 적어도 예외적인 증명이 되는 것'에 근거하여 등재가 되었다.

특히 동서양을 망라하여 고도로 발달된 과학적 특징을 고루 갖춘 근대 초기 건축물의 뛰어난 모범이며, 18세기 군사건축물을 대표하여 유럽과 극동아시아 성제(城制)의 특징을 통합한 독특한 역사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화성의 특징과 우수성』

- 화성의 규모는 성의 둘레 5.7km(미복원 구간 포함), 면적은 130㏊로 동쪽 지형은 낮은 구릉을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51개의 시설물로 성곽을 이루고 있으나 이중 수해와 전란으로 7개의 시설물이 소멸되고 약 40개소의 시설물이 현존하고 있다. 이중 23개소에는 예술적 가치가 높은 한국고유의 누각을 설치하였다.

-화성의 축성동기는 군사적 목적보다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려는 정조의 정치적 측면, 농업 기술의 발전으로 생산력이 증대되어 상업이 활기를 띠자 서울과 지방간에 유통이 활발해져 삼남의 교통중심지인 수원을 경제 도시로 만들기 위한 신도시 건설이라는 경제적인 측면과 부모에 대한 효심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리고 도시기반시설인 문, 도로, 다리, 상가 등을 설치하고 생산기반시설인 저수지와 둔전을 경영함으로써 계획된 신도시로 건설되었다. 중국, 일본 등과는 달리 평지와 산지에 걸쳐 축조된 독특한 형태의 포곡식 산성으로 군사적 방어기능과 정치,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다.

- 18세기 동양의 성곽을 대표하는 한국전통건축의 완성품으로 축성의 계획, 제도, 법식 뿐 아니라,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공사일지 등이 '화성성역의궤'에 완벽한 기록으로 남아 있어 건축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 화성만의 독특한 시설인 '공심돈' '현안' 등이 설치됨은 물론 성곽시설의 기능이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동양성곽의 백미라 할 수 있으며, 18세기 실학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50개가 넘는 시설물이 저마다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어 성곽 전체를 하나의 예술적 작품으로 보이게 하며, 화홍문의 수문은 기능과 7칸의 수문위에 축조된 문루가 하나의 예술품으로 조화를 이루어 방화수류정과 한폭의 그림을 연상케 한다. 

 

【 화성의 아름다운 건축물들 】

 

【 성문(城門) 】 4대문

화성을 출입하는 4개의 관문이며 이중 팔달문과 장안문이 각각 남북의 정문으로서 석축으로 된 무지개문(홍예문) 2층에 문루가 세워져 있고 벽돌로 쌓은 반원형 옹성이 문을 둘러 싸고 있는 독특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팔달문(제402호)과 화서문(제403호)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 팔달문,장안문,창룡문,화서문 등 4대문

 

【 공심돈(空心墩) 】

군사가 안으로 들어가서 적을 살필 수 있게 만든 망루의 일종으로 동북공심돈은 화성에서 가장 특이한 건물 가운데 하나로 중국 요동지방에 있는 평돈(平墩)을 모방하여 벽돌로 동그랗게 돈대를 쌓아 만들었다. 남공심돈은 남암문의 동쪽 치위에 위치해 있었으나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 서북공심동, 동북공심돈 등 2개소

 

【 장대(將臺) 】

장대는 모두 2개소가 있는데 서장대는 팔달산 정상에서 성 주변을 살피면서 군사를 지휘하던 곳이다. 사방 100리가 한눈에 보이는 이곳은 화성의 군사지휘본부로 일명 화성장대라고도 한다. 동장대는 평상시 군사를 훈련하고 지휘하던 곳이라 '연무대'란 별칭이 붙었다.

- 서장대, 동장대 등 2개소 

 

【 수문(水門) 】

화성을 가로질러 흐르는 수원천에 세운 수문으로 2개소가 설치되었으나 현재 남수문은 소멸되었고, 북수문만이 현존하고 있다. 다양한 기능과 견고함에 멋진 외관까지 함께 갖춘 북수문은 아름다운 경관을 지닌 당대의 대표적인 시설물이다.

- 북수문(화홍문), 남수문(현재 미복원) 등 2개소 

 

【 포루(砲樓) 】

화성에는 벽돌을 사용하여 모두 5개소의 포루를 만들고 3층으로서 지대위에 혈석(穴石:대포발사를 위해 구멍을 뚫은 돌)을 전면 2개, 좌우 3개씩 놓았으며, 그 위에 벽돌을 쌓았고 안쪽으로 판자를 잇대어 2층으로 구분하였다.

- 서포루, 북동포루, 동포루, 북서포루, 남포루 등 5개소 

 

【 암문(暗門) 】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만들어 적에게 들키지 않게 군수물자를 성안으로 공급할 수 있도록 만든 군사시설로 유사시에는 문을 닫고 주변에 쌓아 둔 돌이나 흙으로 암문을 메워 폐쇄하도록 하였다.

남암문은 시가지화 되면서 파괴되어 없다.

- 서남암문, 북암문, 동암문, 서암문 등 4개소 

 

【 포루(鋪樓) 】

치성 위에 설치한 누로 군사들을 숨겨두고 적군이 보지 못하게 하는 시설물로 아래쪽은 돌로 쌓고 중간 부분부터 벽돌로 축조하였다. 그 위에 집을 짓고 판자를 깔아 문루를 만들고, 좌우에는 활을 쏘는 구멍도 만들었다.

- 동북포루, 북포루, 서포루, 동일포루, 동이포루 등 5개소 

 

【 각루(角樓) 】

높은 위치에 건물을 세워 주변을 감시하기도 하고 때로 휴식을 즐길 수 있도록 한 곳을 말하며, 화성에는 총 4개소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중 동북각루는 방화수류정이라고 한다. 서남각루는 용도를 통하여 뻗어나간 외성의 끝에 위치하고 '화양루'라고도 불린다.

- 동북각루(방화수류정), 서북각루, 동남각루, 서남각루(화양루) 등 4개소 

 

[ 봉돈(烽墩) 】

비상상태를 알리는 역할을 하는 통신시설로 봉돈은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벽돌을 쌓고 그 위에 5개의 화두를 쌓았으며, 성벽에 총구멍을 뚫어 적으로부터 방어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연기를 피우는 봉화의 기능과 포대의 기능이 합쳐진 것이 봉돈이다.

 

 【 치성(雉城) 】

일정한 거리마다 성곽의 요소에서 바깥으로 튀어나오도록 한 구조물로서 성벽 가까이 좌우 방향으로 접근하는 적군을 공격하기 위한 시설물이다.

- 서삼치.서일치,서이치,용도서치,용도동치,동일치,동이치,동삼치,남치,북동치 등

 10개소

 

【 노대(弩臺) 】

쇠뇌를 쏘던 방어시설로 산 정상부에 위치

하였고, 화성에는 2개소의 노대가 설치되어 있다.

이중 동북노대는 서노대가 성벽 안쪽에 만들어진 것과는 달리 치성 위에 벽돌을 쌓아 만들었다.

- 동북노대, 서노대 등 2개소  

 

【 적대(敵台) 】 

성문과 옹성에 접근하는 적을 막기 위해 성문의 좌우에 설치한 방어시설로, 적대는 시설물의 반만 외부로 돌출되어 있고, 반은 성안으로 돌출되어 있다. 성곽보다는 높게 축조되어 적군의 동태와 접근을 감시하였다. 팔달문 좌,우의 적대(남동,남서)는 도시화로 사라졌다.

- 북서적대, 북동적대 등 2개소 

 

【 소 재 지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 화성 성곽 돌기 】

장안문→북서적대→북서포루→북포루→서북공심돈→화서문→서북각루→서일치→서포루→서이치→서노대/서장대→서암문→효원의종→서포루→서장대관광안내소→서삼치→3.1독립기념탑/대한독립기념비→서남암문/서남포사↔서남각루(화양루+용도동치<서남이치>+용도서치<서남일치>)→남포루→남치→팔달문→팔달문시장→수원천(지동시장입구/식사)→동남각루→동삼치→동이포루→봉돈→동이치→동포루→동일치→동일포루→청룡문→동북노대→동북공심돈→동장대(연무대)/연무대관광안내소→동암문→동북포루→북암문→동북각루(방화수류정)→북수문(화홍문)→북동포루→북동치+북동적대→장안문/원점회귀

 

▲ 수원화성 안내도

 

【 탐방일자 】 2010년 10월 2일(토)

【 소요시간 】총 5시간 47분 소요(휴식 및 중식 : 3시간 55분 포함)/실제 : 1시간 52분 소요

▷ 성 안과 밖을 왔다갔다 하며 성곽의 상태를 확인하고 개방된 각루나 포루 등에서 비를 피하며 주변의 경관 감상 및 사진을 촬영하느라 지체되었으며, 서정대관광안내소와 연무대관광안내소의 매점에서 각각 휴식, 그리고 팔달문 지나 지동시장내의 식당에서 식사 등 탐방과 별개로 소요된 시간이 많아아 전체 탐방시간이 많이 길어지게 되었음.

▷ 탐방거리(이정표 기준) : 약 5,744m

    장안문-(610m)→화서문-(630m)→서장대-(770m)→화양루(서남각루)-(770m)→팔달문-(640m)→봉돈-(840m)→창룡문-(630m)→동장대-(400m)→방화수류정(동북각루)-(454m)→장안문/원점회귀 

【 날     씨 】 흐리고 비

【 교 통 편 】 대중교통 이용

<< 갈 때 >> 부천역/전철1호선→수원역-(#13번 시내버스)→'장안문' 버스정류장

<< 올 때 >> '갈 때의 역순'

 

【 탐 방 기 】

우리나라에 잔존하는 성곽의 대부분이 산 봉우리 정상을 돌아 수축된 테뫼식이나 두 개이상의 산 봉우리를 연결하는 포곡식 산성으로 군사적 목적으로 축성되어 건축물 등 문화재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일반인들의 관심을 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반면, 수원 화성은 도시의 한 복판에 평지와 높이 143m의 낮은 팔달산에 걸쳐 자리를 잡고 있는 계획된 도시 성곽으로 많은 건축물들이 성곽을 따라 설치가 되어 있어 일반인들의 흥미를 끌 뿐만 아니라 도심에 위치하여 접근이 용이하여 누구나 손 쉽게 찾을 수가 있는 곳이다.

뿐만 아니라 국내 성곽에서 찾아 보기 힘든 치성, 옹성, 공심돈 등 새로운 축성방식의 도입과 강화도와 남한산성에서 일부 실험 사용되었던 벽돌을 대대적으로 활용한 성벽 축성 재료의 다양성으로 성곽을 따라 설치된 모든 건축물들이 같은 용도와 목적으로 건축되었을지라도 동일한 모양이 없이 지형에 따라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성내에는 임금이 임시로 거처하기 위해 마련된 행궁이 자리를 잡고 있는데, 일제강점기 때 일제가 의도적으로 파괴하여 과거 행궁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지만 광복 후 화성 공사에 관한 중요하고 방대한 자료가 모두 기록되어 있는 조선시대 건축 종합 보고서격인 '화성성역의궤(2007년 6월 14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제)'를 참고하여 1990년대 복원 공사가 시작되어 현재 복원이 완료된 화성행궁이 자리를 잡고 있으며,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성곽과 북문인 장안문, 동문인 창룡문의 문루가 파괴되었으나 현재는 일부 성곽과 시설물을 제외하고는 '화성성역의궤'를 근거로 복원이 완료되어 있다.

 

이 처럼 뛰어난 문화재인 화성산성 인근을 자주 지나쳤지만 제대로 탐방을 하지 않고, 차일피 미루기만 하고 멀리 떨어져 있는 산중의 성곽을 찾아 탐방을 실시하다가 이번에 화성행궁을 포함한 모든 시설물들을 탐방하는 화성돌기를 실시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장안문을 시작으로 한바퀴 돌아 원점으로 회귀하는 탐방을 시작하니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잔뜩 찌푸린 날씨에 비까지 내려 서장대에서 성내로 내려가 '화성행궁'을 1시간 정도 관람하고 다시 서장대에 올라 나머지 성곽돌기를 할 계획이었으나 이를 포기하고 개방된 포루나 각루에서 비를 피하기도 하며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청승맞은 탐방을 해야만 했다.

비가 내리는 등 기상조건이 좋지 않아 '화성행궁'의 탐방을 이번에 포기하고 다음 기회로 미루어 두었으니, 다시 '화성행궁' 관람을 위해 화성을 탐방할 때에는 이번 탐방에서 미진하였던 성곽 외부의 모습을 일부 살펴 보고, '화성열차'도 한 번 타보기로 해야 겠다.

성곽을 따라 설치된 시설물들이 일반 산성에서는 보지 못하였던 것들이라 살펴 보는데에도 많은 시간이 걸렸고, 성곽 위를 따르다 보니 외부 성벽과 각 시설물들의 외부의 모습과 구조을 살펴 볼 수 있는 기회는 4대 성문과 5개의 암문 중 현재 남아 있는 4개의 암문을 통해 성밖으로 나갔을 때와 개방된 포루나 각루, 그리고 치성에서 제한된 범위 안에서만 가능하여 아쉬웠다. 또한 시설물들 중 개방된 누각 형태의 건축물을 제외하고는 모두 문이 잠겨 있어 내부 구조를 볼 수 없었다.

 

이번 화성돌기 탐방에서는 성곽의 길이는 약 5.7km로 길지 않지만 50여개 가까운 많은 건축물들이 성곽을 따라 설치가 되어 있어 전체를 한꺼번에 올리기에는 너무 자료와 사진 등이 방대하여 아래와 같이 구간별로 나누어 탐방기를 작성하기로 하였다.

 

- 화성(Ⅰ) 장안문~서장대 구간

- 화성(Ⅱ) 서장대~창룡문 구간

- 화성(Ⅲ) 창룡문~장안문 구간

 

탐방기를 작성하며 기재하는 시간은 각 시설물에 도착하여 각각의 시설물 구조나 주변 및 성밖의 성벽 등을 관찰하느라 소요된 시간을 표기한 것이므로, 화성 성곽돌기 실제 소요시간과는 무관하니 착오없으시기 바란다. 

실제로 사잔촬영, 성밖 다녀오기, 누각에 올라가 조망하기 등 걷기와 무관한 시간을 제외한다면 2시간~2시간30분 정도면 휴식시간을 포함하여 충분한 코스이다.

 

- 화성(Ⅰ) '장안문~서장대' 구간 -

 

▲ 성밖에서 바라본 화성의 정문인 장안문과 좌측의 북동적대 그리고 우측의 북서포루

 

수원역 4번출구로 나오면 좌측에 수원광광안내소가 있어 수원화성과 수원지역 관광안내 책자 등을 챙기고 약 30여m 떨어진 북측 버스정류장에서 장안문행 13번 시내버스(11:10)에 오른다.

약 25분 후 장안문 버스정류장에 내려 약 100여m 떨어진 수원화성의 정문이며 북문인 장안문으로 향한다. 장안문에 도착하니 좌측(동쪽)에 북동적대와 북동치, 우측(서쪽)으로 북서적대와 북서포루, 그리고 전면에는 반원형의 옹성의 엄중한 경호를 받으며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자리를 하고 있다.

그러나 지상 공격으로부터 엄중한 경호를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장안문은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에는 이를 견디지 못하고 문루가 퐈괴되는 불행을 겪게 되었었다.

장안문 바깥 옹성문을 들어서며 수원화성 탐방이 시작된다.

화성 첫번쩨 구간인 장안문에서 팔달산 정상의 서장대까지 구간을 살펴보면 서문인 화서문까지는 평지성이 이어지며, 북서적대, 북서포루, 북포루, 서북공심돈 등 4개의 시설물이 설치가 되어 있다. 화서문을 지나면 팔달산 오름길의 산성 성곽이 이어지는데 팔달산 정상의 서장대(화성장대)를 포함하여 오르막 성곽에 서북각루, 서일치, 서포루, 서이치, 서노대 등 6개의 시설물을 지나게 되어 화성의 북쪽과 서쪽의 성곽을 따라 가게 되는 셈이다.

장안문과 화서문을 포함하면 총 12개의 시설물이나 건축물들을 대하게 되는 구간이다.

 

12:08=>장안문

     장안문 버스정류장에 도착한지 약 30여분을 넘게 외부 성벽과 옹성, 그리고 성곽 위에서 주변의 경관을 둘러보고 장안문을 출발하여 서문인 화서문으로 향한다. 장안문과 화서문 사이는 평지에 건설된 성곽으로 걷기에는 어려움이 없는 구간이다.

이정표(←팔달문 1.5km, 화성행궁 850m/↑화서문 500m/↓화홍문 500m)가 있는 곳에 홍이포 1문이 북쪽 방향을 겨냥한 채 중앙에 자리를 잡은 북서적대가 있다.

 

▲ 북서적대 앞의 이정표

▲ 북서적대 앞에서 바라본 화서문 방향의 성곽길

▲ 북서적대에서 바라본 북서포루로 이어지는 외부 성벽 모습

 

북서적대를 지나면 특이한 지붕의 북서포루(12:17)와 북포루(12:20)를 연거퍼 지나 우리나라 성곽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망루와 같은 서북공심돈을 대하게 된다.

이 세곳의 시설물들은 모두 문이 잠겨 있어 내부 구조는 볼 수가 없다. 또한 포루와 공심돈이 외부로 돌출된 치성 위에 건축된 구조물들이라 외부 성벽 등을 관측하기에 좋은 장소이지만 구조물들이 설치되어 있어 실내로 들어가기 전에는 관측이 불가능 하여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서북공심돈은 화서문 동쪽에 바짝 붙어 있어 화서문을 통해 성밖으로 나가 외벽 등을 관찰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화성에 현존하는 2개의 공심돈 중 성곽돌기를 하며 자유롭게 외부 모습을 관찰을 할 수 있는 곳이다. 

 

▲ 성안에서 바라본 화서문과 서북공심돈

▲ 성밖에서 바라본 화서문과 서북공심돈 

▲ 서북각루 오름길에서 뒤돌아본 화서문과 서북공심돈

 

서북공심돈 바로 좌측에는 화서문이 연결되어 있고, 문을 통해 성밖으로 나가 외부성벽과 서북공심돈의 완전한 외부 모습을 조망해 볼 수 있다. 또한 팔달산 오름 성곽이 시작되는 곳으로 화서문 밖에 서면 서북각루의 돌출된 모습과 누각이 조망이 되는데 화서문과 어우러진 경관이 한층 더 아름다움을 연출하고 있다.

화서문 밖에도 성문 보호를 위한 옹성이 설치되어 있으나, 장안문처럼 옹성에 출입문이 달려있지 않고 화서문을 나가면 좌측으로 옹성과 성벽 사이가 트져 있는 형태이다.

 

♧ 장안문(長安門)

▲ 옹성안에서 바라본 장안문

 

▲ 성밖 북동쪽에서 바라본 장안성(左)과 북서쪽에서 바라본 장안성(右) 전경

▲ 성안에서 바라본 장안성 후면

 

장안문은 화성 4대문 중 북쪽 문으로 사실상 정문에 해당된다.

1794년 2월 28일 공사를 시작하여 9월 5일에 완공하였다. 장안이라는 말은 수도를 상징하는 말이자 나라의 백성들이 행복된 삶을 추구하고 안녕을 상징하는 의미이다.

아마도 정조는 장안이라는 말을 화성의 정문으로 삼으면서 수원의 백성들을 기쁘게 해주고자 하셨던 것 같다.

 

 

▲ 장안문 앞의 반월형 옹성과 대문

▲ 장안문 반월형 옹성위 문루와 용도

 

▲옹성 반월형 출입문과 용도

 

장안문 누각의 지붕은 우진각 지붕으로 웅장한 위엄을 주고 있으며 서울의 국보1호 숭례문보다 큰 문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성문이다. 성문의 바깥에는 반월형의 옹성을 쌓았는데 이것은 항아리를 반으로 쪼갠 것과 같다고 하여 붙인 이름으로 성문을 적의 직접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한국전쟁시 미군의 폭격으로 문루가 불타 훼손된 것을 1975년 '화성성역의궤'에 의거 복원하여 지금의 웅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 북서적대에서 바라본 장안문

▲ 북동적대에서 바라본 장안문

 

♧북서적대(北西敵台)

성문과 옹성을 보호하기 위해 성문 좌우에 있는 치성 위에 세운 시설로서 4대문 중 장안문과 팔달문 양쪽에 설치하였다. 그러나 팔달문 좌우의 남동, 남서적대는 수원 시가지화와 더불어 사라져 버리고, 장안문 좌우의 북서, 북동적대만 남아 있다.

장안문의 서쪽에 위치한 북서적대의 높이는 성벽과 같으며 포루와 치성이 성곽 밖으로 완전히 돌출된 반면 반은 외부로 돌출되고 반은 성안으로 돌출되어 있다. 밖으로 3개의 현안을 뚫고 벽돌로 쌓은 담장마다 충구멍을 만들었다.

 

 

 

((적대에 설치된 홍이포)) 길이 215cm, 구경 10cm, 중량 1,800kg로 명나라 말부터 청나라 때까지 사용된 유럽식 화포로 포구쪽에서 화약과 포탄을 장전하여 발사하는 포구장전식 화포이며, 사정거리가 700m에 달하는 위력적인 화기로써 성곽 또는 포루 등에 배치하거나 성곽 공격용으로 사용하였다.

 

♧북서포루(北西砲樓)

 

 

하성의 5개 포루 중 화서문과 장안문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조18년(1794) 9월 24일에 완공되었다.

포루는 적이 성벽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화포로 쏠 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로 치성의 발전된 형태이다. 북서포루는 성밖으로 약 8.8m 돌출되어 있으며, 지붕의 형태가 성안쪽은 맞배지붕이고, 성밖쪽은 우진각 형식으로 된 것이 특징이다.

 

♧북포루(北鋪樓)

 

 

 

포루는 성곽을 밖으로 돌출시켜 만든 치성위에 지은 목조건물이며 초소나 군사대기소 같은 곳이다. 정조19년(1795) 2월 20일 완공하였다.

장안문과 화서문 중간에 위치하여 근처의 북서포루와 함께 성벽에 다가서는 적을 공격할 수 있게 하였다. 내면에는 나무사다리를 설치하였으며, 누각에 판문을 설치하고 판문에는 구멍을 뚫어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 

 

 

 

공심돈은 성곽 주위와 비상시에 적의 동향을 살피기 위한 망루와 같은 것으로 화성에 처음 나타났다.

화성에는 서북공심돈, 남공신돈, 동북공심돈 등 세 개를 설치하였는데, 남암문의 동쪽 치위에 위치하고 서북공심돈과 형태는 같으나 규모가 약간 작은 남공심돈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정조20년(1796) 3월 10일 완공된 서북공심돈은 내부를 전돌로 벽채를 4각으로 쌓았으며 3층으로 꾸며 사다리를 통해 오르내릴 수 있도록 했고, 중앙부는 빈 공간을 두었다. 3층에는 마루를 깔아 단층 망루를 세우고 4면에 판문을 설치하였으며 성벽과 망루의 판문에는 구멍을 뚫어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작은 구멍으로는 백자총, 큰 구멍으로는 불랑기포를 쏘게 하였다.

층과 층 사이에는 마루판을 여닫도록 문을 만들어 나무사다리를 이용하게 되어 있고, 출입문은 작은 무지개문으로 하였다. 다른 건축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설비로서 구조도 특수하고 화서문과 잘 어울려 성곽 경관을 한층 더 아름답게 하고 있다.

정조21년(1797) 1월 화성에 왔던 정조는 성을 순례하면서 신하들에게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만든 공신돈이니 마음껏 구경하라"고 하며 만족했던 시설이기도 하다.

 

♧화서문(華西門)

*보물 제403호 

 

 

 

화성의 서쪽 문으로 석축으로 된 무지개 문위에 단층 문루가 세워져 있으며 사방은 여장으로 둘러졌고, 팔달문이나 장안문과는 다르게 문의 전면에는 벽돌로 쌓은 반월형 옹성이 한쪽인 터진 모양으로 설치되었다.

 

▲ 서쪽 성곽위에서 바라본 화서문과 옹성

▲ 대문이 없고 옆이 터진 화서문 옹성

▲ 서쪽 성곽위에서 바라본 화서문 문루 옆 모습

 

문루 안에는 중앙에 마루를 깔았으며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아담하고 우아한 멋을 풍기고 있다. 동문인 청룡문과 규모와 형식이 비슷하며 옹성 안 홍예문 좌측 석벽에는 성문 공사를 맡은 사람들과 책임자들을 기록한 공사실명판이 있다. 편액은 초대 화성유수였던 체제공이 썼으며,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보물 제403호로 지정되었다.

 

12:25~12:42=>화서문

     화서문 옆 성곽 밑으로는 차량이 통행하는 차도가 지나고 있다. 그러나 성곽돌기에서는 차도를 건널 필요가 없다. 화서문 누각을 통과하면 차도 위로 육교 형태의 성곽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 화서문 옆 성곽 밑을 지나는 차도 

▲ 화서문밖에서 바라본 서북각루로 이어지는 성곽의 외부 성벽 모습

▲ 이정표가 있는 오르막 성곽길이 시작되는 지점

▲ 좌측으로 야생화 산책로가 갈라지는 갈림길

▲ 서북각루로 이어지는 성곽의 외부 성벽 모습

 

화서문을 뒤로하면 이정표(←화성행궁 800m/↑서장대 650m/↓장안문 650m, 화홍문 1.1km)가 있고 팔달산 정상에 위치한 서장대를 향한 오름길의 성곽이 이어진다. '야생화 산책로'란 안내판이 나타나면 좌측으로 팔달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또 다른 흙길 산책로가 성곽길과 나란히 함께 한다.

포장이 된 오르막 성곽길을 따라가면 서북각루(12:45~12:50)에 이르게 되는데, 2층 누각이 개방형이라 누구나 신발을 벗고 올라가 쉴 수 있는 쉼터의 역할을 하고 있다. 누각에 오르면 지나온 화서문과 서북공심돈 일대가 시원하게 내려다 보이고, 가야 할 서장대로 이어지는 성곽과 서포루가 조망이 된다.

 

▲ 서북각루에서 뒤돌아본 화서문과 서북공심돈 일대와 화성 성곽

▲ 성신사갈림길의 이정표

 

서일치(12:51~12:53)를 지나면 이정표(←성신사 600m/↑서장대 350m/↓화서문 330m, 서북공심돈 350m)가 있고, 서포루(12:55~12:58) 앞에 이르면 좌측으로는 야생화산책로가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계속 함께 한다.

좌측 방향으로 가면 화성행궁 뒷편 산중턱에 자리잡은 '성신사' 사당이 있는데 이곳은 화성행궁을 방문할 때 찾기로 한다. 화성을 다스리는 신을 모신 사당으로 정조20년(1796) 7월 11일 공사가 시작되어 한 달만에 완공한 건물이다.

서이치(13:00~13:01)에 이르면 화서문부터 완만하던 오르막이 가파른 계단길 오르막으로 변하여 서장대가 있는 팔달산 정상까지 이어진다.

정상에 오르면 봉화대처럼 보이는 '서노대'와 화성장대라고도 불리는 서장대가 있는 넓은 공터에 이르게 된다.

 

♧서북각루(西北角樓) 

 

 

 

 

 

각루는 성곽의 돌출된 요지 중 비교적 높은 위치에 세워져 주변을 감시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으며 비상시 각 방면의 군사지휘소 역할을 하는 곳이다. 화성에는 4개의 각루가 있는데 서북각루는 숙지산 자락이 마주 보이는 팔달산 북쪽 중턱의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화서문 일대의 군사를 지휘하기 위해 만들었다.

1층에는 온돌을 설치하여 군사가 숙식을 하며 이곳을 지키게 하였다.

 

♧서일치(西一雉) 

 

▲ 서북각루에서 바라본 서일치로 이어지는 외부성벽(左)과 서일치 상부(右)

 

일정한 거리마다 성곽에서 바깥쪽으로 튀어나오도록 한 시설물로서 성벽 가까이에 접근하는 적군을 공격하기 위한 시설물로 화성에는 10개소가 있다.

치는 꿩을 말하는 것으로서 능히 자기 몸을 숨기고 주변을 잘 살펴보기 때문에 그 뜻을 따서 치성이라고 하였다.

서북각루와 서포루 사이에 위치한 치성이다.

 

♧서포루(西砲樓)

 

서북각루와 서장대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조20년(1796) 5월 30일 완공되었다. 화성의 지휘소인 서장대의 근거리에 위치하고 있어 5개의 포루 중 가장 중무장한 포루이다.

아랫부분은 3~6단의 화강석의 돌을 쌓고 그 윗부분은 벽돌을 쌓았으며, 맨 위의 건물은 나무로 만들었다. 윗 부분에는 양쪽에 3문씩 6문의 대포를 설치하여 성벽을 향해 기어오르는 적을 공격하게 하였다. 화성 축조이후 한 차례의 전쟁도 일어나지 않아 실제 사용되지는 않았다.

 

♧서이치(西二雉)

서포루와 서장대 사이에 위치한 치성이다.

 

▲ 서이치 상부와 서이치에서 서장대로 오르는 가파른 계단길

 

♧서노대(西弩臺) 

 

노대는 성 가운데서 다연발 활인 노쇠를 쏘기 위하여 높게 지은 것으로서 화성의 노대는 서노대와 동북노대 2기가 있다.

누각이 없이 전돌을 쌓아 높은 대를 만든 시설물로 적의 공격을 항상 감시해서 대와 성 전체에 오방색 기로 신호를 하여 적이 근접했을 때 쇠뇌를 쏠 수 있도록 만든 진지이다.

서노대는 서장대의 서북쪽에 동향하여 자리잡고 있으며 팔각형으로 약 3m의 높이로 여장을 쌓아 만들어졌으며, 이곳에 오르면 성밖의 서쪽이 한눈에 들어와 적으로부터 군사지휘소인 서장대를 효과적으로 보호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 팔달산 정상의 서장대와 서노대

 

13:05=>서장대

     이곳에서 '화성(Ⅰ) 장안문~서장대'구간의 소개를 마치고 다음 편에서 계속 이어가기로 한다. 처음 계획은 이곳에서 좌측 산 아래 위치한 '화성행궁'을 방문하고, 다시 이곳으로 올라와 계속 성곽돌기를 하기로 하였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을 하여 '화성행궁' 방문은 다음 기회로 연기하고 오늘은 비를 맞더라도 성곽돌기를 끝내기로 한다.

 

▲ 서장대의 이정표

 

♧서장대(西將臺) 

 

장대란 성곽일대를 한눈에 바라보며 화성에 주둔했던 장용외영 군사들을 지휘하던 지휘소를 말하며 화성에는 동장대와 서장대 두 곳이 있다.

팔달산 정상(해발 143m)에 자리한 서장대는 성의 안팎은 물론 화성 일대와 이 산을 둘러싸고 있는 백 리 안쪽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정조의 친필 편액인 '화성장대(華城將臺)'가 걸려 있다. 정조18년(1794) 8월 11일 터 닦기 공사를 시작하여 9월 29일 완성되었다.

2층 구조로 되어 있으며 정조19년(1795) 윤 2월 12일 현릉원(융릉) 참배를 마치고 정조는 서장대에 올라 성을 수비하고 공격하는 주간훈련과 야간훈련을 직접 지휘하기도 하였다.

예로부터 오방색이란 깃발이 있는데 이는 방위별 색깔을 말하며 동쪽은 청색, 서쪽은 백색, 남쪽은 적색, 북쪽은 흑색, 중앙에는 황색 등으로 이에 따라 깃발이 설치되었다고 한다. 앞의 큰 깃발은 각각 뜻을 가지고 있으며 이중 황색기는 장수기로 군의 지휘관이 이곳에 있다는 표시이며, 흰색기는 병권을 상징하는 깃발로 병조판서 등이 이곳에 있을 때 게양하게 된다고 한다. 물론 왕이 행차하면 용기를 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