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맛과 멋, 풍류의 고장, 전북 고창(高敞)의 가을 ▶
▲ 무장읍성 동쪽 토성 위에서 바라본 읍성 내부의 전경
천오백년의 시간이 깃든 선운사의 동백이 붉은 꽃을 피우고 푸른 청보리밭이 봄 햇살에 푸릇하게 돋아나는 고창의 봄!
구시포해수욕장 바다 위로 무수하게 반짝이는 여름의 빛깔과 계곡마다 차가운 숨결의 물이 쏟아지고, 잘 익은 고창수박이 입을 쩌억 벌리는 푸르른 고창의 여름!
선운산 산등성이마다 오색으로 물드는 단풍, 선운사에서 붉게 피워 올린 꽃무릇과 계곡을 따라 천오백 년의 고찰 도솔암과 참담암을 향해 가을을 걷고, 학원관광농장에 소금을 뿌려놓은 듯한 메밀밭에서 쪽빛 하늘의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는 고창의 가을!
차가운 겨울 속에서 구시포해수찜을 즐기고,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며 선운사 산책로를 걸으며 겨울 사색에 잠기고 설경 속에서 평화를 만날 수 있는 고창의 겨울!
사계절이 즐거운 고창의 가을 단풍을 찾아 이번 여행에서는 당일 코스로 '고인돌과 징마재 따라 100리길' 문화생태탐방로의 제4코스 '천오백년 화염의 역사가 살아있는 선운산길'(일명 '보은길' 검단소금전시관~선운산 관광안내소/12.70km)을 탐방하며 천혜의 자연이 숨쉬며 형형색색의 단풍이 손짓하는 호남의 내금강이라 불릴만큼 아름다운 선운산도립공원 내 명승 제54호 도솔계곡, 천오백년 명승고찰 선운사와 부속암자인 참담암, 도솔암 등의 문화유적을 둘러 볼 계획이었다.
그러나 아침 일찍 출발하여 고창을 향해 출발하였으나, 예상보다 도착시간이 늦어 문화생태탐방로의 탐방을 동백꽃이 피는4월 중순경에 다시 시도를 하기로 하고 포기를 한다. 대신 가을의 정취를 물씬 체감할 수 있는 단풍관광으로 계획을 수정하여 천연기념물 제463호'로 지정된 '문수사의 단풍나무 숲'과 선운산도립공원내 선운사 탐방과 선운사에서 도솔암으로 이어지는 산책로를 따라 도솔제를 돌아오는 단풍길 트레킹로 변경, 실시를 하였다.
그리고 문수사와 단풍나무 숲 탐방 후 선운사로 이동하는 길목에 위치한 고창군내 2개의 읍성(고창읍성과 무장현읍성) 중 하나인 무장현 관아와 읍성을 추가로 탐방을 하였다.
이번 고창의 탐방기는 총 3편으로 나누어 게제를 하기로 하며, '선운사' 소개는 '내가 찾은 관광명소'의 '명찰을 찾아서'에 별도로 게제를 하기로 하여 총 4편으로 게제를 한다.
- 제 1편(문수사와 단풍) : 천년 기도 도량! 호남 제일의 문수 도장인 문수사와 단풍나무 숲
- 제 2편(무장현관아와 읍성) : 태종17년에 축성한 무장현 관아와 읍성
- 제 3편(선운사의 단풍) : 선운산도립공원내 선운사 단풍숲길
- 천오백년 명승고찰! 선운사
【 일 정 표 】2010년 11월 2일(화)
부천출발-(서해안고속도로)-고창분기점-(고창-장성간고속도로)→남고창I.C→문수사→무장현관아와 읍성→선운산도립공원 선운사와 단풍숲길→선운산I.C.-(서해안고속도로)→부천
제 2편 : 태종17년에 축성한 무장형 관아와 읍성(茂長縣 官衙와 邑城)
【 무장현 관아와 읍성(茂長縣 官衙와 邑城) 소개 】
*사적 제346호(1991년2월26일 지정)
*소재지: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성내리 149-1외 일원
무장읍성(茂長邑城)은 단순히 옛 무장현(茂長縣)의 읍성(邑城)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성(城)과 아울러 그 안에 있던 당시의 무장고을, 즉 읍내(邑內)(읍치(邑治), 군현(郡縣)들 각급 (各級) 수령(守令)의 치소(治所) 마을)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므로 무장읍지(茂長邑址)(혹은 무장성읍(茂長城邑))라 해야 정확할 것 같다.
다시 말해 사적(史蹟) 제 346호는 성 안에 현존하는 객사(客舍)인 송사지관(松沙之館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4호), 동헌(東軒)인 취백당(翠白堂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5호 ), 남문(南門)인 진무루(鎭茂樓) 및 토성(土城)(전라북도 기념물 제11호)과 성외(城外)의 해자(垓字) 그리고 성밖에 상당거리 떨어져 있는 사직단지(社稷壇址) 여단지(여壇址)까지 포괄해 무장읍지(茂長邑址) 전역(全域)을 가리키는데, 이는 조선시대 읍치(邑治)(고을)의 한 유례로써 희귀한 존재로 조선시대 옛 읍성의 모습을 연구하고 살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 동쪽 토성위에서 바라본 동헌인 취백당
▲ 동쪽 토성위에서 바라본 객사인 송사지관
무장현(茂長縣)은 조선 태종17년(1417)에 여말(麗末) 왜구(倭寇)의 침입이 빈번하여 장사현(長沙縣)과 무송현(茂松縣) 양현(兩縣)을 합쳐 무장현을 새로이 개설(開設)하고 왜구침습(倭寇侵襲)에 대비하여 두 고을의 중간지점인 이곳에 진(鎭)을 두어 읍지의 중심지로 산고 성을 쌓아 그 병마사(兵馬使)로써 현사(縣事)(수령(守令))를 겸임(兼任)케 하였다.
후일 일반 예와 같이 현감(縣監)을 두었고, 일제강번기 초(初) 1913년의 부군폐합(府郡廢合)으로 고창군(高敞郡)에 편입(編入)되었다.
「무장읍지(茂長邑誌)」에 따르면 태종17년(1417) 처음 이곳에 읍치를 개설할 때 무장진병마사(茂長鎭兵馬使) 김저래(金著來)가 전라도 각 군현의 승려(僧侶)와 백성 2만여명을 동원하여 2월부터 5월에 걸쳐 읍성을 축조(築造)하고 여러 공공건물(公共建物)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남북(南北)으로 뻗은 사두봉(蛇頭峰)을 가운데로 하여 ㅁ자형으로 읍치(읍내)가 형성되어 있는데, 읍성 등 중요 유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무장현 읍성(茂長縣 邑城)
축조연대(築造年代)는 태종17년(1417)이고, 처음 축조할 당시는「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및「여지도서(輿地圖書)」의 "석축 주이천육백삼십구척 고칠척 내유이천(石築 周二千六百三十九尺 高七尺 內有二泉)"의 기록과 이보다 앞서는 「문종실록(文宗實錄)」의 1년 8월 병술조(丙戌條)에는 "읍성 주회일천사백칠십척 고칠척……해(해)자 주회이천일백이십칠척……(邑城 周回一千四百七十尺 高七尺…海(垓)字 周回二千一百二十七尺……)"이라한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석성(石城)이었으나 지금은 토성(土城)으로 변해 있는데, 토성으로 개축(改築)한 까닭과 시기를 전하는 기록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 고창읍성 북쪽 토성 안 전경과 토성 상부로 오르는 좌측의 계단
▲ 무장읍성 토성 동북쪽 곡성에서 바라본 북쪽 토성
▲ 무장읍성 북쪽과 동쪽 토성이 만나는 동북쪽 곡성 모습
▲ 무장읍성 토성 동북쪽 곡성에서 바라본 동쪽 토성 모습
길이 약 1.2㎞, 높이 약 1∼2m, 폭(幅) 상부(上部) 약 1∼2m, 하부(下部)약 3∼5m의 장방형(長方形) 평지성(平地城)으로 거의 원형에 가깝게 남아있는 원래 옹성을 두른 남문인 진무루(鎭茂樓)와 동문지(東門址) 그리고 옹성지(甕城址))를 포함하여 대부분이 남아있는데 도로개설 및 민가가 들어 서 오직 남문 좌우측의 일부(약 230m)만이 훼손되어 없어졌다.
「문종실록」에 의하면 읍성의 둘레는 1,470척(약 441m), 높이 7척(약 2m)이며, 해자의 둘레는 2,127척(약 638m)이고 문은 2개가 있으며, 성의 규모를 넓혀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남문 주위에 석축이 남아 있고, 또 동문지의 토성단면(土城斷面) 내부에 열석(列石)이 보이는데 이는 토성으로 개축하기(덮기) 이전의 석성(石城)의 구조로 짐작된다.
▲ 무장읍성 동쪽에 신축된 누각
♧ 무장현 해자 (垓字)
흔히 성지(城池) 혹은 성호(城濠)라 하는 해자(호)는 방어목적의 성곽(城郭)에 필히 병설(倂設)되었던 것인데도 현재 성과 함께 해자가 남아있는 예가 극히 드물다.
무장현 해자는 남문의 동서 약 150m만 없어졌을 뿐, 폭(幅) 약 4m , 길이 약 574m에 이르는 흔적이 성 둘레에 완연히 남아 있다.
♧ 무장객사(茂長客舍) 「송사지관(松沙之館)」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4호
사두봉(蛇頭峰) 남록(南麓)의 읍성 내 중심에 자리잡고 있으며 조선시대 때 무장에 내려온 관리나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던 곳으로 정면 11칸, 측면 3칸, 건평(建坪)80평, 기단석축(基壇石築)의 높이가 80㎝이며 계단에 새긴 호랑이, 구름 등의 조각이 운치가 있으며, 좌우 지붕이 본관보다 낮은 점은 격을 낮추기 위해서 이다. 객사의 이름은 송사지관(松沙之館)(무송(茂松) 장사(長沙) 두 단어의 약어)이고 건립돤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선조14년(1581)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본관에 걸린 궐(闕)자를 새긴 나무패는 임금을 상징하는 것으로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수령과 집ㅇ 관리들은 여기에 경의를 표했으며,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에는 이곳에 모여 축하의식을 행하였다.
수년 전까지 면사무소로 사용된 까닭에 특히 내부구조의 변형이 심하였는데, 1990년에 원형에 가깝도록 수리를 하였다.
♧ 무장동헌(茂長東軒) 「취백당(翠白堂)」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5호
동헌은 조선시대의 각 행정단위에 파견된 수령이 정무를 보던 청사로 무장현감이 근무하던 이 동헌의 이름은 취백당(翠白堂)이고 성내의 서남쪽 현(現) 무장초등학교 교사(校舍)뒤편에 위치하며 정면 6칸, 측면 4칸, 건평 45평, 석축기단의 높이가 45㎝인 겹처마 양식이다.
두리기둥을 사용했으며, 기둥의 길이가 길어 건물 전체가 장중한 느낌이 든다.
조선 명종20년(1565)에 창건되어 수차례 수리를 거쳤다 하고, 일제강점기 때 초등하교 교실로 사용되는 등 크게 부서졌던 것을 1983년에 새로 고친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 모든 고을에서 거의 동헌은 군청 또는 면사무소로, 객사(客舍)는 학교로 개조 사용되었는데 무장의 경우는 그 반대이다.
<<취백당기(翠白堂記)>>
동헌에는 최집의 취백당기, 김하연의 찰미루기, 우여목, 이덕형, 정홍명의 동헌시, 기준의 동백정시가 걸려 있다.
무장은 무송과 장사를 합한 고을이라 동헌 이름을 원래 송사라 했는데 영조 때 최집이 부임해 와서 송사가 깊은 뜻이 없다하여 취백으로 바꾸었으니 취백은 곧 송사의 뜻이다.
푸를 취(翠)자는 소나무처럼 푸르고 늠름한 기상을 상징하고,
흰 백(白)자는 모래처럼 희고 결백한 절조를 상징한다.
유동(군유리)에 정일오라는 큰 선비가 있어 최집 현감을 대신하여 취백당기를 지었는데 '만고에 송사이면 만고에 취백'이라 하여 만고에 소나무처럼 푸르름을 간직하고 모래처럼 청백하기를 바라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 무장현의 남문「진무루(鎭茂樓)」
▲ 현재 보수공사중인 진무루
▲ 진무루 좌.우측으로 복원되어 있는 석축 성벽
무장현 읍성의 남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이층누문(二層樓門)으로 건평 4평이다.
광해군4년(1612)에 건립되어 여러 차례의 개수를 거쳤다 하고, 1984년에 크게 중창되었다.
♧ 성황당지(城隍堂址) 및 사직단지(社稷壇址) 여단지(여壇址)
모든 읍치(邑治)의 성내(城內)에 반드시 있었던 성황당지가 확인되고, 성밖에 필히 있었던 사직단지(22,730㎡)가 서북 약 1.5㎞ 지점인 무장면 월림리(月林里)에 , 여단지(23,206㎡)가 동북 약 2㎞ 지점인 무장면 도곡리(道谷里)에 확실히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각 고을에서 필수요건의 하나이던 향교(鄕校)가 타지방과 같이 성밖에 현존하고 있다.
1988년이래 여러 차례의 조사를 통해 무장읍지에는 현재까지 옛 고을(읍치)에서 2대 핵심 건물이던 객사와 동헌이 공존하고 있고, 또 읍성(토성)이 남문 및 동문(옹성)지와 함께 그 외주(外周)의 해자와 나란히 병존하고 있어서 다시 말해 객사와 동헌, 성곽과 해자가 같이 남아 있어서 드물게 보는 중요한 유적지임이 분명해졌다.
뿐만 아니라 향청(鄕廳)· 연청(椽廳)· 내아(內衙)와 성황당· 사직단· 여단 등 여러 공존시설의 원위치도 옛 지도나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거의 확인할 수 있어서 1991년 2월에 사적 제 346호로 지정하였다. 더욱이 무장읍지는 신문물 전래이후 다른 고을의 경우와는 달리 성밖의 고창∼영광 간 대로변으로 신시가지가 형성 개발되고, 성내에는 기존에 있었던 건물이나 시설물들이 모두 철거된 상태이며, 현재는 옛 유적들만 남아있는 등 여러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으므로 무장읍지는 오늘날 전국에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옛 우리 읍치(고을)의 전형을 조사 복원하는데 가장 적지(適地)로 복원 공사가 진행중에 있다.
▲ 무장읍성의 역사를 말해주는 성내의 노거수들
▲ 무장읍성 동헌인 취백당 정면 넓은 성 안에 자리를 한 돌축대가 있는 작은 연못
▲ 무장읍성 성 안 남쪽에서 북쪽/취백당 방향 넓은 터를 바라본 전경
<< 기타 무장현 읍성의 유물들 >>
▷ 무장읍성 감옥터
▲ 무장읍성 감옥터
조선시대 감옥이 있었으나 건물은 없어지고 터만 남아 있는 곳으로 각종 문헌을 참고하면 동쪽과 남쪽 토성이 만나는 곡성 안 아래로 추정이 된다.
1801년 이곳에서는 천주교 지도자인 최여겸(세례명 마티아 1763~1801) 순교자에게 자백을 받기 위해 참혹한 고문을 하였던 역사의 현장이다.
공읍면 갑촌에서 태어난 최여겸은 조선 후기 전라도 서부지역(흥덕, 고창, 영광, 함평)에 천주교를 전파하던 중 신유박해 때 한산(충남 서천) 처가에서 체포되어 치곳 무장에 압송되었으며, 전주 감영을 거쳐 서울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굽히지 않아 형조에서 사형선고를 내렸고 해읍정법(亥邑正法)에 따라 공읍면 개갑장터에서 1801년 7월 19일 39세의 나이로 참수당하였다.
"최여겸 순교지"는 고창군 향토문화유산 제1호로 지정되어 성지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 송덕비
▲ 객사 앞마당 서쪽에 자리잡은 송덕비들
무장읍성 내에 서있는 비들은 선정을 편 원님과 공덕이 있는 분들의 송덕비이다.
각 처에 흩어져 있는 것을 여기 한곳으로 모아 놓았다. 읍지관안에는 입비라 쓰여 있는 원님이나 되는데 현재는 11기만 남아 있다.
동치오년(1866)이라 한 비는 고종10년 병인년에 당시 환곡의 폐단을 개정하는 조목을 정해 놓은 것이고, 제목이 안 보이는 비는 글자가 많아 삭아 뚜렷하지 않지만 정준일 현간이 치수 공덕을 기리어 후임 정권이 영조 신유년(1741)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동치비 좌대에 오목오목 파인 것은 아낙네들이 접시불을 켜고 치성드린 흔적이라 하고,
▲ 좌대의 거북머리가 비틀어진 공덕비
현감비 거북머리를 비틀어 놓은 것은 백성들이 비를 세워 주면서도 미운 구석이 있어서 일부러 그랬다는 것이다.
읍지에는 권이진 현감도 희비를 세웠다 하는데 없어졌다. 송덕비는 대개 원님이 떠난 뒤에 백성들이 공덕을 잊지 못해 세우기 때문에 거사비라고도 하도 불망비라고도 한다.
쇠로 만든 철비는 조손조 후기의 몇 개 안 남은 귀중한 문화유산이며, 또한 읍지에 김유희 현감비도 철비로 나오는데 일제 때 군수용으로 뽑아 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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