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은 관광명소/성곽돌기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Ⅴ) '화령전'

왕마구리 2011. 2. 22. 14:27

◀ 정조의 어진을 모신 '화령전(華寧殿)' ▶

  

【 화성(華城)의 개요 】

*사적 제3호

 세계문화유산(1997년 12월 유네스코 지정)

화성은 조선 22대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장조로 추존)가 당쟁으로 인하여 뒤주 속에서 참혹하게 죽음을 당한 것을 항상 슬피 생각해 오다가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자 아버지의 고혼을 위로하기 위해 양주땅 배봉산으로부터 유해를 수원 남쪽 화산(花山)으로 천봉하고, 정조18년(1794) 1월부터 정조20년(1796) 9월까지 2년 10개월여에 걸쳐 화려하고도 웅대한 성곽을 축성하였다.

화성은 실학자로 불리우는 유형원과 정약용의 성설을 설계의 기본 지침으로 삼아, 영의정 체제공이 성역을 주관하고 수원유수 조심태 등이 전력하여 이룩한 것으로 우리나라 성곽 중에서는 가장 과학적으로 구조물을 치밀하게 배치하면서도 우아하고 장엄한 면모를 갖춘 것이다.

특히 성곽의 축조에 석재와 전을 병용한 것, 그리고 화살과 창검을 방어하는 구조뿐만 아니라 총포를 방어하는 근대적 성곽 구조를 갖추고 있다는 점, 또한 용재를 규격화하고 거중기 등의 기계장치를 활용한 점 등에서 우리나라 성곽사상 가장 특기할 일이다.

 

화성 축성 공사에는 모두 22직종 1,840명의 장인들이 동원되었으며, 석재는 화성 북쪽의 숙지산에서 떠온 돌을 사용하고, 기와와 벽돌은 성역소에서 직접 가마를 마련해 구워냈다. 기둥이나 대들보에 쓰이는 큰 목재는 충남 안면도와 강원도의 산림을 가져다 사용을 하였다.

또한 정약용이 고안한 유형거와 거중기 등을 비롯한 장비를 이용하므로 자재 운반 등이 용이하고 수월해져서 일의 능률을 높여 공사 기간을 단축시키고 공사비를 절감할 수가 있었다.

화성은 지형에 의하면 평지와 산에 걸쳐 쌓은 '평산성'의 독특한 형태를 지닌 포곡식 산성으로, 성벽을 쌓는 재료를 한국에서 가장 널리 축조되는 풍부하고 질 좋은 화강암의 석성에 벽돌을 대대적으로 활용하는 '전축성'을 혼용한 것이 특징인데 방어시설은 주로 벽돌을 사용하고, 성벽 자체는 모두 돌로 축조하였다.

화성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최근에 축조한 성으로 규모와 시설을 보면,

성곽에는 동서남북으로 관문을 두었으며, 각 문의 사이에는 적정을 관찰할 수 있는 공심돈을 만들었고, 장대 2곳을 설치하여 군사를 훈련시켰다.

통신시설인 봉돈을 비롯하여 각 5개씩의 포루(鋪樓)와 포루(砲樓), 2개의 노대(弩臺), 4개의 각루(角樓), 성안을 흐르는 수원천에 2곳의 수문 등이 축조되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과학적인 설계 아래 세워진 성이다.

현재 사적 제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97년 12월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록 배경』

등록기준 중 두번째 기준인 '한 시대나 하나의 문화권을 통해 건축, 기념물, 문화환경 부문에서 지대한 영행력을 행사한 것'과 세번째 기준인 '소멸된 문명이나 문화전통에 대해 독특하거나 지극히 희귀한 사례, 적어도 예외적인 증명이 되는 것'에 근거하여 등재가 되었다.

특히 동서양을 망라하여 고도로 발달된 과학적 특징을 고루 갖춘 근대 초기 건축물의 뛰어난 모범이며, 18세기 군사건축물을 대표하여 유럽과 극동아시아 성제(城制)의 특징을 통합한 독특한 역사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화성의 특징과 우수성』

- 화성의 규모는 성의 둘레 5.7km(미복원 구간 포함), 면적은 130㏊로 동쪽 지형은 낮은 구릉을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51개의 시설물로 성곽을 이루고 있으나 이중 수해와 전란으로 7개의 시설물이 소멸되고 약 40개소의 시설물이 현존하고 있다. 이중 23개소에는 예술적 가치가 높은 한국고유의 누각을 설치하였다.

-화성의 축성동기는 군사적 목적보다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려는 정조의 정치적 측면, 농업 기술의 발전으로 생산력이 증대되어 상업이 활기를 띠자 서울과 지방간에 유통이 활발해져 삼남의 교통중심지인 수원을 경제 도시로 만들기 위한 신도시 건설이라는 경제적인 측면과 부모에 대한 효심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리고 도시기반시설인 문, 도로, 다리, 상가 등을 설치하고 생산기반시설인 저수지와 둔전을 경영함으로써 계획된 신도시로 건설되었다. 중국, 일본 등과는 달리 평지와 산지에 걸쳐 축조된 독특한 형태의 포곡식 산성으로 군사적 방어기능과 정치,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다.

- 18세기 동양의 성곽을 대표하는 한국전통건축의 완성품으로 축성의 계획, 제도, 법식 뿐 아니라,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공사일지 등이 '화성성역의궤'에 완벽한 기록으로 남아 있어 건축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 화성만의 독특한 시설인 '공심돈' '현안' 등이 설치됨은 물론 성곽시설의 기능이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동양성곽의 백미라 할 수 있으며, 18세기 실학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50개가 넘는 시설물이 저마다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어 성곽 전체를 하나의 예술적 작품으로 보이게 하며, 화홍문의 수문은 기능과 7칸의 수문위에 축조된 문루가 하나의 예술품으로 조화를 이루어 방화수류정과 한폭의 그림을 연상케 한다. 

 

【 화령전(華寧殿) 】 

*사적 제115호(1963년1월28일 지정)

*면적:12,288㎡

*소재지: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신풍동 92-2

 

                  ▲ 화령전 운한각과 이안청 전경(사진 上)

                     외부에서 바라본 화령전 야경(사진 下)

 

조선 제22대 임금이었던 정조(재위 1776~1800)가 1800년 6월 28일 승하하시고, 이후 제23대 순조는 아버지 정조의 지극한 정성을 본받기 위해 순조1년(1801)에 수원부의 행궁 옆에 정조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해 건물을 짓고 화령전이라 하였다.

처음 지어질 당시의 화령전은 초상화를 모시는 정전인 운한각을 비롯하여,

 

                  ▲ 이안청

 

홍수나 화재 등 만약의 사태가 났을 때 정조의 어진을 옮겨 모시는 이안청,

국왕 및 제사를 모시기 위해 화령전에 온 관리들이 몸을 깨끗이 하고 대기하는 재실인 풍화당,

 

 

 

                  ▲ 전사청 전면(사진 上左)과 후면(사진 上右) 전경

                     전사청 야경(사진 下)

 

화령전 제사를 담당하는 관리들이 업무를 보는 전사청,

 

 

 

                  ▲ 화령전 외삼문

 

                  ▲ 화령전 내삼문

 

그리고 향대청.제기고.외삼문.내삼문.협문이 있었다.

 

                  ▲ 전사청에서 정전 앞마당으로 들어가는 남측협문

 

이 중 남쪽에 있었던 향대청과 제기고 건물은 남아있지 않다. 정전 현판의 글씨는 순조가 직접 쓴 것이다.

이곳에 속한 건물들은 정전인 운한각의 건축규범에 따라 지어졌으며, 특히 이안청은 지붕이 있는 복도식으로 정전과 연결되어 있어 눈이나 비가 올 때도 젖지 않도록 하였다.

 

                  ▲ 운한각과 이안청을 연결하는 지붕있는 복도각

 

화령전은 화성에서 '화(華)'자를 따고, 사서삼경의 하나인 '시경'에서 '돌아가 부모에게 문안하거라(귀령부모 歸寧父母)'에서 '령(寧)'자를 따서 붙인 것이다. 곧 화령전은 국왕 순조가 화성에 묻힌 선왕 정조를 찾아가 문안을 여쭙는 전각이었으며, 순조는 이곳에서 노인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베풀기도 하고, 직접 정조가 태어난 탄신일과 돌아가신 납향일에 제향을 지내기도 하였다.

제향은 1920년 일본인에 의해 정조의 초상화가 창덕궁으로 옮겨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봉안된 정조의 초상화는 세차례 그려졌는데 화령전에는 융복(군복)입은 초상화가 모셔졌으며, 현재의 초상화는 2005년에 새로 제작한 것이다.

궁궐에 지어진 다른 영전들과는 달리, 수원에 지어진 화령전은 대청에 의한 격식과 기능에 따른 영역의 구분이 확보된 대표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몇 채의 사라진 건물을 제외하면 비교적 좋은 상태로 보존되어 당시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 탐방일자 】2011년 2월 15일

【 소요시간 】약 15분

【 날     씨 】맑 음

【 탐 방 기 】

2010년 8월 27일(금) 야간에 한차례 화성행궁을 찾았을 때는 입장이 불가능하여 담장 밖에서 화령전을 바라만 보아야 했었는데, 이번 주간 탐방에서는 출입이 가능하여 한바퀴 돌아 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화령전의 출입은 화령전의 정문인 외삼문을 통하지 않고 화성행궁을 통하여 낙남헌 앞 넓은 옛 활터를 지나 전사청 담장에 만들어 놓은 출입구를 통해서 입,출입이 가능하였다.

 

♧ 운한각(雲漢閣)

 

 

                  ▲ 화령전의 운한각 전경(사진 上)

                     운한각에 봉안된 정조대왕의 어잔(사진 下)

 

화령전의 정전으로 정조의 초상화를 봉안한 건물이다.

운한은 임금이 가뭄을 걱정하여 하늘에 기우제를 올릴 때 불려졌다는 '시경'의 시구에서 따왔다. 앞에는 제사때 악공들이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월대가 있고, 세 개의 계단이 놓여 있는데 가운데 계단은 혼백만이 사용하는 계단이다.

 

 

                  ▲ 운한각내에 보관중인 어가(사진 左)와 내부 천장 모습(사진 右)

 

                  ▲ 운한각 외부 처마

 

1801년 만들어진 조선 후기의 가장 대표적인 건물이다.

 

♧ 풍화당(風化堂)

 

재실로서 제향이 있을 때 제를 올리는 사람이 미리와서 머무는 건물이며, 풍화는 사회의 풍속과 기강을 교화시킨다는 의미이다.

화령전 내 본전이 있는 운한각 앞 마당 우측 북쪽에 별도의 공간내에 있으며 북측 협문으로 연결이 된다.

 

♧ 제정(祭井) 

 

 

 

화령전의 제례에 사용될 정화수를 뜨는 우물로 어정(御井)이라고 한다.

화령전의 제정은 정방향의 형태로 각 방향에 14개(4면 총 56개)의 장대석을 치밀하게 쌓아 올렸다. 높이 5.5m이고 바닥에서 물이 고인 높이는 약 4m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