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산사(金山寺) ▶
1박2일간의 증도 모실길 탐방을 마치고 8월 3일 오후. 10여년전 한 차례 모악산 산행을 하며 하산길에 짧은 시간동안 잠시 탐방을 하였던 금산사 탐방을 위해 김제로 이동을 하여 저녁 8시가 넘어 모악산도립공원 금산사 입구 위락시설단지에 도착, 숙소를 잡고 늦은 저녁식사 후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주변에 여름 휴가를 즐기는 피서객들의 텐트촌이 이어지는 금산사계곡을 따라 금산사에 아들 신검에 의해 왕위를 빼앗기고 한때 유폐되었던 후백제 견훤이 935년경 금산산성과 함께 축조하였다는 사찰에 들어가는 관문인 횽예문(일명 석성문, 견훤문)을 지나 '모악산금산사' 현판이 걸린 일주문을 들어서며 금산사 탐방을 시작하였다.
금산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라 청련암, 청련사, 심원암 등 산내 암자를 거느리고 있지만 오늘도 무더위가 어제처럼 기승을 부리고 있고, 어제 증도 모실길 탐방 때 폭염 속에서 하루종일 뙤약볕을 맞으며 걸은 때문인지 걷는 것 자체가 싫어 오늘은 금산사 경내 탐방만 하기로 한다.
어제 증도 모실길 탐방에서 더위를 먹지 않고 날씨의 도움을 받아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고생없이 일정을 소화했더라면, 계획하였던 전라남도 담양에 위치한 산성산 산행과 산성산 정상에 축조된 금성산성 탐방을 하였을테니 이곳 금산사 탐방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금산사 탐방을 마치고 산내암자는 탐방하지 못하였지만 차령으로 약 10여분 거리에 위치한 금산사의 말사이며 창건년대는 정확치 않지만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귀신사를 대신 탐방하였다.
이곳 금산사 사찰 소개에서는 말미에 간략하게 귀신사를 함께 소개하기로 한다.
【 방문일자 】2011년 8월 4일(목)
【 금산사 소개 】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이다.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모악산에 자리하고 있다.
조선 성종23년(1492)에 작성된 "금산사 5층석탑 중창기"에 의하면, 금산사는 이미 석가모니 이전의 가섭불 때에 있었던 옛 절터를 다시 중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금산사의 터전이 오래 전부터 부처님과 인연이 깊었던 것임을 알수 있게 하는데, 남아있는 "금산사사적"의 기록에 의하면 백제 법왕 원년(599)에 나라의 평안과 백성의 복을 기원하기 위한 원찰로 조그만한 산문이 열리었고, 신라 혜공왕2년(766)에 진표율사께서 크게 중창하여 33척의 철미륵불상을 모신 후 미륵신앙의 근본도량 그리고 법상종 종찰로 크게 변모하였다.
금산사에서 승제법사의 가르침을 받아 수행을 하던 진표율사는 27세 때에 변산 부사의암에서 철저한 수행에 전념하는 등 17년 간을 몸을 돌보지 않는 망신참의 고행을 통하여 마침내 미륵보살과 지장보살로부터 간자와 계본을 전해 받게 된다. 이후 진표율사는 금산사로 다시 돌아와 중창불사를 발원하고, 경덕왕과 왕실의 후원을 받아 6년에 걸쳐 가람을 대규모로 일으켜 세웠는데 이 때가 경덕왕21년(762)부터 혜공왕2년(766)에 이르는 기간이었다.
후백제 견훤이 아들 신검에 의하여 유폐되었다고 전해오고 있는 금산사는 고려 문종33년(1079)에 주지로 부임한 혜덕왕사가 창건이념과 전통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사찰 전체를 관장하는 대사구와 판각, 경전강의 수련법회를 하는 광교원구와 사리탑과 비석을 안치하고, 원로대덕들께서 주석하시는 봉천원구로 삼분하여 경전연구, 실천수행, 중생교화, 사찰경영 등 합리적인 체계를 확립하여 전대미문의 전성기를 이룩하였다.
조선 선조25년(1592) 임진왜란 때 위기에 처한 나라와 백성들을 지키려는 뇌묵처영 스님을 중심으로한 1500여 승병들의 훈련장으로서 승병들의 헌신적인 활동에 의하여 재난을 겪지 않았다.
그후 정유재란때 왜군들의 보복으로 인하여 장엄했던 80여동의 건물과 40여의 암자가 한줌의 재가 되고 말았다.
선조31년(1601) 수문대사께서 열다섯분의 대덕스님과 함께 복원불사를 시작하여 장장 35년만인 인조13년(1635)에 오여래, 육보살을 모신 대적광전과 39척의 미륵불을 모신 미륵전 등 대사구지역만 낙성을 보았다.
영조1년(1725)에 지안 스님께서 1,400여 학인을 모아 화엄경을 강설하였고, 고종 광무초에 주지로 부임한 용명화상은 사리탑지를 훼손하려는 광부들을 저지하려다 폭행 당하여 순교 하였다.
한국 불교 중흥과 교단정화 그리고 불교대중화 운동에 앞장서온 태공월주 화상께서 1961년 주지로 부임한 이후 도영, 도법, 평상, 원행 등 도제들과 용봉 스님 등 사부대중의 협력으로 일주문을 비롯하여 금강문, 사천왕문, 보제루, 미륵전, 대적광전, 나한전, 대장전, 명부전, 승당, 서전, 요사체 등의 건물을 중수 또는 중건하고 방등계단 성역화를 마무리하여 대사구를 완전 복원함으로서 오늘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금산사에는 심원암, 청련암, 청룡사 등 산내암자가 있으며, 전주시내에 전법과 포교의 중심 도량인 전북불교회관을 1986년에 건립하여 화엄불교대학을 운영하고 대중법회 등을 개최함으로써 불교 포교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 일주문을 통과하고 금산사로 가는 길
▲ 금산사 앞 계곡
【 금산사의 불전과 문화재들 】
▷ 전각들
♧ ♧ 금산사 대적광전(大寂光殿)
*화재이전 보물 제476호
미륵전의 서쪽 즉 가람의 중심에 자리한 대적광전은 연화장 세계의 주인인 비로자나불을 본존으로 모신 건물이다. 화엄종의 맥을 계승하는 사찰에서는 주로 이 전각을 본전으로 건립하며, '화엄경'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하여 화엄전, 비로자나불을 봉안한다고 해서 비로전이라고도 부른다.
현재 대적광전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다포식 팔작지붕으로 조선시대 건물이었으나 1986년 화재로 전소된 후 1994년에 본래대로 복원하였다. 원래 대웅광명전 또는 대법당이라고도 불렀다.
신라 때 진표율사가 창건하면서 지금의 미륵전을 금당이라고 기록한 것을 보면 아마도 이 자리에는 법당이 들어서 있었을 것이다. 대적광전이 지금의 웅장한 규모를 갖게 된 것은 정유재란 때 절이 전소된 뒤 1635년 수문대사의 중창에 의해서였다. 이후 영조52년(1776)에 금파대사의 법손인 두월장로가 중수하였고, 1926년과 1938년 미륵전 보수시에 수리하였다. 수문대사가 중창할 때 따로따로 모셨던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약사여래불과 여섯 보살을 함께 모심으로써 대적광전 하나로 통합해 창건하였던 것이다.
거대한 규모이면서도 날렵한 느낌을 주는 것은 한국 전통건축의 기능적, 예술적 지혜 덕택이다.
금산사가 미륵전을 토대로 미륵신앙을 표방하였지만 한국불교의 이러한 통불교적 경향은 고려시대 이후 반영되었을 것이다. 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와 마침내 대승불교의 대표적 부처와 보살을 모두 수용한 대 전각을 건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정면 처마 아래에 걸린 '대적광전' 편액은 석전 황욱(1898~1993)이 1991년 쓴 글씨다. 전라북도 고창에서 태어난 황욱은 붓을 손가락으로 잡는 것이 아니라 손바닥으로 잡고 붓 맨 윗부분을 엄지손가락으로 꽉 눌러쓰는 이른바 악필법을 창안하였는데, 이 편액의 글씨 역시 이러한 악필법으로 쓴 것이다.
황욱의 글씨로는 이 외에 구례 화엄사의 일주문에 걸린 '대화엄사(大華嚴寺)'와 '해동선종대가람(海東禪宗大伽藍)' 편액 등이 있다.
대적광전 내부 불단에는 비로자나불을 비롯한 5여래와 그 협시로서 6보살을 봉안하였다. 5여래는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왼쪽에서부터 아미타불, 석가모니불, 노사나불 그리고 약사불이다. 6보살은 역시 왼쪽부터 대세지보살, 관음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 일광보살, 월광보살이다.
대적광전에는 일반적으로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한 삼신(법신, 보신, 화신)불을 봉안하여 연화장 세계를 상징하게 된다. 그런데 금산사 대적광전에는 특이하게 5여래, 6보살이 모셔진 것이다. 이는 한국 불교의 특징인 통(通)불교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불타의 진리를 깨우치기 위해서 어느 하나의 사상이나 종파에 치우침이 없었고, 선과 교가 둘이 아님을 일찍부터 체득했던 때문이다.
내부 왼쪽 벽에는 1991년 당시 주지 월주 스님과 증면 월산 스님이 조성한 신중탱화를 봉안하였다.
♧ ♧ 금산사 미륵전(彌勒殿)
*국보 제62호(1962년 12월 20일 지정)
*소재지: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39
보제루를 지나 가람의 중심에 이르면 오른쪽으로 웅장한 규모의 미륵전이 자리를 잡고 있다.
미륵전은 미래의 부처님인 미륵이 그분의 불국토인 용화세계에서 중생을 교화라는 것을 상징화한 법당이다. 즉 미륵신앙의 근본도량을 사찰 속에 응축시킨 것이 미륵전이요, 먼 미래의 새로운 부처님 세계에서 함께 성불하자는 것을 다짐하는 참회와 발원의 장소이다.
미륵전은 신라 경덕왕21년(762)부터 혜공왕2년(766) 사이에 진표율사가 가람을 중창하면서 미륵보살에게 계를 받았던 체험 그대로를 가람에 적용하여 세웠다. 내부에는 미륵장륙상을 본존으로 모셨으며 남쪽 벽에는 미륵과 지장보살에게서 계를 받는 광경을 벽화로 조성하였다.
그러나 이 건물은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었으며, 지금의 모습은 조선 인조13년(1635)에 수문대사가 다시 지은 뒤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거대한 미륵존불을 모신 법당으로 용화전, 산호전, 장륙전이라고도 하며, 특이하게 1층에는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에는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에는 '미륵전(彌勒殿)'이라는 각기 다른 편액이 걸려있다. 이름은 다르지만 미륵불의 세계를 나타낸다.
1층과 2층은 정면 5칸, 측면 4칸이고, 3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 크기로,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지붕 네 모서리 끝에는 층마다 모두 얇은 기둥(활주)이 지붕 무게를 받치고 있다.
▲ 미륵전 귀공포(左), 정면공포(中) 그리고 내부가구(右)
건물 안쪽은 3층 전체가 하나로 터진 통층이며, 제일 높은 기둥을 하나의 통나무가 아닌 몇 개를 이어서 사용한 것이 특이하다. 전체적으로 규모가 웅대하고 안정된 느낌을 주며,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3층 목조 건물로 이러한 다층의 사찰 건축으로서 미륵전은 법주사의 팔상전과 함께 한국 건축사의 위대한 업적으로 꼽힌다. 일찍이 삼국시대로부터 축적된 기술적, 미학적 아름다움은 국토 곳곳을 불국토의 장엄으로 만들어 나갔던 것이다.
미륵전의 내벽과 외벽에는 사이 사이에 수많은 벽화가 그려져 있다. 보살과 신장 그리고 수도하는 모습 등 다양한 벽화는 건물의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한 편 오른쪽 벽에는 고종27년(1890)에 조성한 제석천룡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용준, 정선, 오종 등의 금어가 그렸는데, 적색과 녹색이 주조를 이루며 불법을 수호하는 신중의 모습을 잘 표현하였다.
♧ 미륵전 안의 미륵불
미륵불 본존은 높이가 11.82m이고, 삼존불 중의 협시는 8.79m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이다.
통일신라시대 진표율사가 미륵전을 조성할 당시에는 3년간에 걸쳐 완성한 미륵장륙상 한 분만 모셔졌었다. 그 뒤 조선시대에 수문대사가 다시 복원 조성하면서 소조 삼존불로 봉안했는데, 1934년에 실화로 일부가 소실되었다. 4년만인 1938년 우리나라 근대 조각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김복진(1901~1940)이 석고에 도금한 불상을 다시 조성해 오늘날의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미륵본존은 거대한 입상이지만 전체적으로 균형과 조화를 이룬 모습이다.
지금도 남아 있는 불단 아래의 거대한 청동대좌는 정확한 조성시기를 알 수 없지만 잦은 소실과 복원의 과정에서도 오랜 세월동안 변함없는 그 자리에 있으면서 여러 불상을 받들고 있는 역사의 대변자가 되는 셈이다.
본존불은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을 바깥으로 향하고, 왼손 역시 손가락을 조금 오므렸지만 밖을 보이게 한 시무외인이다. 대개 미륵불은 다른 불상과 구별되는 별개의 특징을 지니지 않는다. 대본존불 양 옆의 협시보살은 왼쪽이 법화림 보살이고, 오른쪽이 대묘상 보살이다. 협시보살 좌우에는 언제 봉안하였는지 모르는 또 다른 것이 2구가 있다. 본존의 협시보다 약간 작지만 역시 금을 입힌 소조상이다.
♧ ♧ 금산사 대장전(大藏殿)
*보물 제827호(1985년 01월 08일 지정)
*소재지: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35-2
미륵전의 정면 서쪽에 위치한 대장전은 진표율사가 절을 중창하면서 세운 목조탑으로 본래 불경을 보관하던 곳이었다. 미륵전을 짓고 미륵전 뜰 가운데 세운 목조탑으로 당시의 양식은 탑과 같이 산개형의 층옥으로서 맨 꼭대기 옥개에는 솥뚜껑 모양의 철개를 덮고, 다시 그 위에 불꽃 모양의 석조 보조를 올렸다. 그 뒤 조선 인조13년(1635)에 가람을 중창하면서 본래 목탑이었던 것을 지금과 같은 전각의 형태로 변경하면서 대장전이라 이름이 붙여졌으며 1922년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지붕 위에 복발, 보주 등의 목조탑 흔적이 남아 있어 지금도 신라시대 목탑 양식을 엿볼 수 있다.
▲ 대장전 보병(左), 귀공포(中) 그리고 꽃살문(右)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크기이며, 지붕은 옆 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기둥 윗부분에 장식하여 지붕 처마를 받치는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다. 이를 다포 양식이라 하는데 양쪽 칸에는 1개, 가운데 칸에는 공포를 2개씩 올렸다.
건물 안에는 석가모니와 가섭, 아난의 제자상을 모시고 있으며,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꾸민 우물천정이고 석가모니가 앉아 있는 수미단에는 정교한 장식문을 조각해 놓았다.
▲ 대장전 내부(左), 내부공포(右)
삼면의 벽은 모두 10폭의 벽화로 장엄하였는데, 흔히 볼 수 있는 십우도나 극락세계의 장엄 등이 아니라 구체적 인물과 사건이 등장하는 모습이다. 또한 외벽에도 좌우로 벽화가 그려져 있다. 한편 대장전 내부 출입문 위에는 1974년 건물을 중수할 때 참여한 사람들의 인명과 불상의 개금불사에 시주한 사람들 이름을 적은 현판이 걸려 있다.
전체 건물 구조와 크기가 비교적 간단하고 작지만 큰 관심을 끄는 변형 건물로, 탑 형식의 목조 건축물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문화재이다.
♧ ♧ 금산사 보제루(普濟樓)
천왕문 지나 가람의 중심에 이르면 누각 건물이 보제루이다.
정면 7칸, 측면 3칸의 2층 누각식 건물로서 아래층은 절 앞마당으로 오르는 계단 역할을 한다. 우리나라 사찰에서 누각건물이 본격적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와서 부터이다.
잦은 외침에 따라 승병이 조직되고 금산사가 승병의 집결장소가 되면서 군사적 필요에 의해 누각이 번성하였다고 한다. 이후 승병이 사라지면서 누각건물은 법회와 강설, 그리고 대중집회의 장소로 사용되었고, 오늘날에는 이런 실용적 기능보다는 가람의 한 구성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보제루는 정확한 연혁이 남아 있진 않지만 조선 중기에 만세루라는 12칸짜리 누각이 있었으므로 이를 계승한 건물로 보인다.
1975년에 신축하여 1997년에 증축하였다.
♧ ♧ 금산사 나한전(羅漢殿)
소승불교의 최고의 경지에 오른 나한에 대한 신앙을 하는 전각이다.
나한은 아라한의 준말로서 의역하면 살적, 응공, 응진이라 한다. 살적(殺賊)은 수행의 적인 모든 번뇌를 항복받아 죽였다는 뜻이며, 응공(應供)은 인간과 천상의 공양을 받을 만하다는 뜻이며, 응진(應眞)은 '진리에 상응하는 이'라는 의미이다.
일반적으로 나한전에는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하여 보통 5백인을 모신 오백나한전과 16나상을 모신 응진전으로 대별된다.
금산사 나한전은 1993년 새롭게 조성한 건물로 방등계단과 오층석탑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계단을 참배하였기 때문에 계단예배전이라고도 불렀다.
내부에는 석가여래를 본존으로 하여 문수, 보현보살을 봉안하였다. 또한 석가여래의 여러 제자 가운데 으뜸이라고 하는 아난과 가섭을 모셨고, 16나한상과 2인의 시자상도 목조로 조성하였다. 그리고 전각이름에 걸맞게 소형의 오백나한상을 계단식의 단을 마련하여 봉안하였다.
▲ 금산사 나한전(左)과 삼성각(右)
♧ ♧ 금산사 삼성각(三聖閣)
나한전 뒤편에 자리한 1943년 건축물로 1983년 해체,보수하였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면적은 19.96㎡이다.
삼성각은 우측에 산신, 중앙에 칠성, 좌측에 독성을 함께 봉안하고 있는 전각이다. 산신은 재물, 칠성은 수면, 독성은 복을 관장하는 존재로 알려져 있다.
♧ ♧ 금산사 조사전(祖師殿)
금산사의 중창조이신 진표율사부터 역대 조사 열두분 스님의 영정을 봉안한 건물로서 새롭게 고증을 거쳐 1998년도에 건립하였다.
▲ 금산사 조사전(左)과 원통전(右)
♧ ♧ 금산사 원통전(圓通殿)
대자대비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모신 사찰 전각이다.
관음보살이 주원융통하게 중생의 고뇌를 씻어주는 분이라는 뜻에서 원통전이라 부르며, 관음보살 보관위에는 '아미타부처님' 그리고 아래에는 11가지 다른 모습의 십일면관음이 모셔져 있다.
♧ ♧ 금산사 일주문(一柱門)
금산사에 오르는 산길에서 처음 만나는 건물이 '모악산 금산사'라는 현판이 걸린 일주문이다.
일주문은 기둥이 일직선상의 한 줄로 늘어서 있어 일주문이라 부른다. 이 일주문은 일심(一心)을 상징하며 신성한 가람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로부터 부산히 흩어진 한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진리로 향하게 하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다.
1975년에 세운 목조의 맞배지붕 양식이며, 현판은 일중 김충현의 글씨이다.
♧ ♧ 금산사 금강문(金剛門)
일주문을 지나 100여m를 오르면 작은 개울 건너에 자리 잡은 금강문이 나타난다. 금강문은 대개 천왕문의 대문에 금강역사의 모습을 그려 놓거나, 때로는 천왕문 안에 조각상을 만들어 세우기도 한다. 그리고 금산사와 같이 금강문을 천왕문 앞에 별도로 모시는 경우도 있다.
금강역사는 불교의 수호신이다.
대체로 불탑 또는 사찰의 문 양쪽을 지키는 수문신장의 역할을 담당하며, 인왕역사라고도 한다. 이 신은 여래의 온갖 비밀스런 사적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5백의 야챠신을 거느리고 현겁 천불의 법을 수호한다고 한다.
이 건물은 1994년에 새로 지어 안에는 인왕상 2체와 사자를 탄 문수동자,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를 모셨다. 본래 금산사에는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금강문이 따로 있는데, 현재의 금강문을 지나 바로 오른쪽에 '모악산 금산사' 현판이 걸린 건물이 그것이다.
1994년에 가람을 일신할 때 절의 입구를 변경하면서 본래의 금강문 왼쪽 앞에다 새롭게 금강문을 세웠던 것이다. 지금은 새로 세운 금강문에 자리를 내주고 전각이름마저도 사라졌지만, 1556년에 경휘 스님이 재건한 뒤 1972년 중수 때까지 오랜 역사를 지닌 유서 깊은 건물이다.
♧ ♧ 금산사 천왕문(天王門)
금강문괴 일직선상에 있다.
천왕문은 불법을 수호하는 외호신인 사천왕을 모신 전각이다. 외호신이란 불국정토의 외곽을 맡아 지키는 신이라는 뜻이며, 동,서,남,북 네 곳을 지키게 된다.
이 곳 천왕문은 1994년에 가람을 중수하면서 새롭게 조성했다. 안에는 사방에서 불법을 외호하는 지극천왕, 증장천왕, 광목천왕, 다문천왕을 봉안하였다.
▷ 금산사의 석조물들
♧ ♧ 금산사 오층석탑(五層石塔)
*보물 제25호(1963년 01월 21일 지정)
금산사 미륵전 북쪽 위 송대(松臺)라고 불리는 높은 받침 위에 세워져 있는 탑이다.
바로 뒤에는 석종모양의 사리계단이 있는데, 이렇듯 사리계단 앞에 석탑을 세워놓은 것은 사리를 섬기던 당시 신앙의 한 모습이기도 하다.
전설에 따르면 후백제의 견훤이 금산사를 창건하면서 이 석탑을 건립하였다고 하나 이는 잘못된 것이고,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기본 양식을 따르면서도 기단이나 지붕돌의 모습 등에서 색다른 면을 보이고 있어 고려시대 작품으로서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고려시대에 조성되었다는 확실한 기록이 전한다.
1971년 11월에 석탑을 해체 수리하는 과정에서 '모악산금산사오층석탑중창기'가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 가운데 경종4년(979)에 시작하여 981년에 완성했다는 사실이 보인다. 한편 탑속에서는 중창기와 함께 금동관음상을 비롯한 여러 소불상이 발견되었는데, 이 탑의 복장품들은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상,하 2단의 기단 위에 5층 탑신을 올린 모습의 높이는 7.2m의 탑으로, 기단부는 아래층 기단의 규모가 좁아져 있고, 각 기단의 윗면에 다른 돌을 끼워서 윗돌을 받치도록 하고 있어 주목된다. 탑신부는 2층 이상에서 줄어드는 비율이 제법 부드럽고, 각 층의 몸돌에 새겨진 기둥조각이 넓은 편이다. 지붕돌은 밑면에 3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처마는 완만한 곡선을 그리고 있다.
6번째 층은 다른 층처럼 몸돌의 각 귀퉁이에 기둥이 새겨져 있고, 지붕돌 모양의 것이 덮여 있으나, 이것은 탑의 머리장식을 받치기 위한 노반으로 다른 탑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모습이다. 머리 장식은 온전히 유지되어 원형이 잘 남아 있다.
탑의 구조는 통일신라 석탑의 일반형을 따르고 있으나, 하층기단이 협소하고, 옥개석 추녀 끝이 살딱 들려 있는 등 고려시대 탑의 특징을 보여준다. 기단부는 10여개의 장대석으로 지대를 구축하고, 그 위에 조립하였는데 하층기단 면석 각각 1매의 돌로 구성되었고, 층별 체감비율은 완만한 편이며, 각 옥개석 상면에 1단의 각형 괴임을 하였다.
상륜부는 노반석부터 정상부의 보주까지 온전히 보존되었는데, 노반이 크고 넓으며, 그 위에 특이한 형태의 복발이 있고, 복발 위에 양련이 새겨진 양화석이 놓여 있으며 그 위에 보륜과 보주가 있다.
▲ 금산사 송대에 위치한 오층석탑과 금강계단(방등계단)
♧ ♧ 금산사 금강계단(金剛戒壇, 방등계단)
*보물 제26호(1963년 01월 21일 지정)
금산사 경내의 송대(松臺)에 방등계단이 있고, 이 계단의 중앙에 5층석탑과 나란히 위치한 종 모양의 석탑인 석종형 부도이다.
방등계단은 수계법회를 거행할 때 수계단을 중앙에 마련하고, 그 주위에 삼사와 칠증이 둘러앉아서 계법을 전수하는데 사용했던 일종의 의식법회 장소이다. 이러한 예는 경상남도 양산의 통도사와 개성의 불일사 등지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한국불교의 독특한 유산이다. 불교의 정신을 대표하는 계, 정, 혜, 삼학 가운데 계는 으뜸으로서 계를 지킴은 불교의 기본 토대가 된다. 이 계의 정신이 일체에 평등하게 미친다는 의미에서 방등계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석종형 탑은 인도의 불탑에서 유행한 것으로 통일신라 후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외형이 범종과 비슷해서 석종으로 불리운다.
기단의 각 면에는 불상과 수호신인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으며, 특히 아래 기단 네면에는 인물상이 새겨진 돌기둥이 남아 돌난간이 있었던 자리임을 추측하게 한다. 난간 네 귀퉁이 마다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다.
탑신을 받치고 있는 네 귀에는 사자머리를 새기고 중앙에는 연꽃무늬를 돌렸다. 판석 위에는 종 모양의 탑신이 서 있다. 꼭대기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머리를 밖으로 향한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고 그 위로 연꽃 모양을 새긴 2매의 돌과 둥근 석재를 올려 장식하였다.
기단에 조각을 둔 점과 돌난간을 두르고 사천왕상을 배치한 점 등으로 미루어 불사리를 모신 사리계단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 탑은 가장 오래된 석종으로 조형이 단정하고 조각이 화려한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 ♧ 금산사 노주(露柱)
*보물 제22호(1963년 01월 21일 지정)
금산사 대적광전에서 서남쪽에 위치한 대장전으로 가는 길의 중간에 있는데, 그 이름을 노주(노반지주의 줄임말)라고 하였으며 처음에는 전각의 정면 귀퉁이에 세우는 두 개의 장대였다가 나중에 탑의 상륜부를 구성하는 부재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무엇으로 사용한 것인지 그 용도를 알 수 없는 보기 드문 유물이다. 꼭대기에 놓인 꽃봉우리모양의 조각만 없으면 불상을 얹은 사각형의 대좌처럼 보인다.
사중기록에 보면 '노주'는 잘못된 명칭이고, '광명대(光明臺)'로서 미륵전 앞에서 미륵불에게 광명을 공양하던 석등이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지금의 모습은 불을 밝히는 곳인 화사석(火舍石)이 없어진 상태가 된다.
땅 위에 바닥돌을 놓고, 그 위에 아래,중간,위받침돌을 순서대로 얹어 놓았다. 아래받침돌에는 네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겨 면을 둘로 나눈 뒤 안상을 조각하였다. 아래받침돌 윗면과 윗받침돌에는 아무런 꾸밈이 없는 중간받침돌을 사이에 두고 대칭되게 연꽃잎을 새겼는데, 아래븓침돌의 연꽃잎이 넓고 짧은 반면, 윗받침돌의 연꽃잎은 좁고 길쭉하게 표현하였다.
꼭대기에는 석탑과 같은 머리장식이 남아 있는데, 둥근 받침부분과 보주(연꽃봉우리 모양의 장식)를 가늘고 긴 사잇기둥이 연결하는 형태이다. 절이 창간된 때가 통일신라시대라고는 하지만, 당간지주 외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것이 거의 없으며, 이 노주도 받침돌에 새겨진 조각의 양식이나 각 부분의 수법으로 보아 고려 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 ♧ 금산사 석련대(石蓮臺)
*보물 제23호(1963년 01월 21일 지정)
석련대는 석조연화대좌의 준말로 불상을 올려놓는 돌로 만든 받침대이다.
연화대좌는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이 석련대는 규모도 크고 그 형태가 희귀한 것이 특징이며, 높이가 1,67m, 둘레가 10m가 넘는 거대한 연화대로 대석 전체가 1개의 돌로 되어 있다. 금산사 대적광전에서 동남쪽으로 10여m 되는 돌단 밑에 있는데 이곳이 원래 위치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규모가 워낙 거대해서 이동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을 감안한다면 제자리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고려시대 이후 절을 중창하면서 석련대가 놓였던 전각은 사라지고 그 위에 봉안된 불상은 다른 전각이 들어서면서 그곳으로 옮겨 갔을 것이다.
한 돌로 조각한 것이지만 여러 개의 돌을 사용한 것처럼 상,중,하의 구성이 정연하다.
상대는 윗면이 평평하며 중앙에 석불입상의 양발을 세워 놓았던 것으로 보이는 네모난 구멍이 두 개 있다. 밑면에는 윗면을 떠받치는 연꽃이 에워싸고 있으며, 꽃잎 사이에도 작은 잎들이 틈틈이 새겨져 있어 더욱 화려하다.
중대는 육각형으로 꽃무늬를 돋음새김하였다. 하대석의 측면은 10각형으로 8개면에는 안상을 음각하고, 그 안에 서화형을 조각하였으며 2개의 면에는 사자상을 조각하였다. 하대석의 윗부분은 복련화를 각변에 따라 10판을 돌렸는데 힘찬 역동감을 강조하여 표현하였다.
이 작품은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안상내의 무질서한 배치, 연꽃잎 속의 화사한 무늬나 중대석 안상 내의 귀꽃형 장식 문양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10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직된다.
♧ ♧ 금산사 육각 다층석탑(六角 多層石塔)
*보물 제27호(1963년 01월 21일 지정)
금산사 대적광전 오른쪽 앞마당에 위치하며, 탑의 재질은 흑백의 점판암으로 된 특이한 경우이며, 완전한 모습은 아니지만 정교하면서도 우아한 공예적 석탑이다.
본래의 자리는 금산사 소속의 봉천원 대웅대광명전의 앞마당에 있었으며, 봉천원이 문종33년(1079) 혜덕왕사가 창건하였으므로 탑도 이 무렵 조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와 정유재란으로 봉천원이 모두 소실되자 수문대사가 대사구, 곧 지금의 금산사를 중창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탑을 옮겨왔다.
탑을 받치는 기단에는 연꽃조각을 아래,위로 장식하였고, 탑신부는 각 층마다 몸돌이 있었으나 지금은 가장 위의 2개 층에만 남아 있다. 몸돌은 각 귀퉁이 마다 기둥모양이 새겨져 있고, 각 면에는 원을 그린 후 그 안에 좌불상을 새겨 넣었다. 지붕돌은 낙수면에서 아주 느린 경사를 보이다가 아래의 각 귀퉁이에서 우아하게 들려있다. 밑면에는 받침을 두었는데, 그 중심에 용과 풀꽃무늬를 새겨 놓았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남은 것이 없었으나, 훗날 보충한 화강암으로 만든 장식이 놓여 있다.
벼루를 만드는데 주로 쓰이는 점판암을 사용하여 이색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으며, 각 층의 줄어드는 정도가 온화하고 섬세하다. 몸돌과 지붕돌에 새겨진 조각수법으로 보아 고려 전기에 세워진 탑으로 짐작된다.
♧ ♧ 금산사 당간지주(幢竿支柱)
*보물 제28호(1963년 01월 21일 지정)
금산사 금강문에서 동북쪽으로 50여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 입구에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 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금산사 경내의 당간지주는 높이 3.5m로 양쪽 지주가 남북으로 마주보고 서 있다.
지주의 기단은 한 층인데, 잘 다듬은 6장의 길쭉한 돌로 바닥을 두고, 그 위를 2장의 돌을 붙여서 마무리했다. 기단 위에는 당간을 세우는 받침을 지주 사이에 둥근 형태로 조각하였고, 받침 주변에는 괴임을 새겨두었을 뿐 별다른 꾸밈은 없다. 양쪽 지주의 안쪽 면에는 아무런 조각도 없는 반면에 바깥면에는 가장자리를 따라 세로 띠를 돋을새김하였다.
지주의 꼭대기부분은 안쪽 면에서 바깥쪽면으로 떨어지는 선을 둥글게 깎았다.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구멍은 각각 지주의 위,중간,아래의 3곳에 뚫었다. 이처럼 구멍을 3곳에 두는 것은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적 특징으로, 경주 보문사지 당간지주(보물 제123호)와 익산 미륵사지 당간지주(보물 제236호)에서도 볼 수 있다.
▲ 경주 보문사지 당간지주(左)와 익산 미륵사지 당간지주(右)
기단부와 당간받침을 완전하게 갖추고 있는 작품으로, 지주의 면에 새겨진 조각 수법이 훌륭하다. 우리나라 당간지주 중에서도 가장 완성된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통일신라시대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8세기 후반, 진표율사가 금산사를 중창한 혜공왕2년(766) 무렵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 ♧ 금산사 석등(石燈)
*보물 제828호(1985년 01월 08일 지정)
금산사 대장전 앞뜰에 놓여 있는 전체 높이 3.9m의 8각 석등으로, 불을 밝히는 부분인 화사석을 중심으로 그 밑에 아래받침돌, 가운데기둥, 윗받침돌로 3단을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어 놓았는데, 꼭대기의 머리장식까지 모두 온전히 남아 있다.
아래받침돌은 둥근 평면 위에 여덟 장의 연꽃잎을 새겼고, 그 위의 세워진 가운데기둥은 위는 좁고 아래가 넓은 모양이다.
윗받침돌은 아래받침돌보다 크고 무거운데, 역시 둥근 평면 위에 여덟 장의 연꽃잎을 조각하였다. 화사석은 네 면에 창을 만들어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하였다. 창 주위에는 구멍이 3개씩 뚫려있는데, 창문을 닫기 위한 구멍이었던 듯하다. 지붕돌은 여덟 곳의 귀퉁이마다 작은 꽃조각으로 꾸며 놓았다.
전체적으로 단순함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는데, 지붕돌의 꽃조각이나 석등 각 부분늬 조각수법 등으로 미루어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짐작된다.
▲ 금산사 대장전과 그 앞의 석등
▣ 귀신사(歸信寺)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 금산사의 말사이다.
창건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전해지는 것이 없으나 676년 의상이 창건하고 국신사(國信寺)라 하였으며 국신사(國神寺)라고도 표기되기도 한다.
최치원이 '법장화상전'의 각주에서 언급한 화엄십찰의 하나가 국신사이기 때문에 의상이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는 듯 한데, 그러나 의상이 창건했다고 주장하는 사찰이 전국에 100여 군데가 넘지만 실제로 의상이 창건한 사찰은 양양 낙산사와 영주 부석사 뿐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문무왕16년(670)은 의상대사가 문무왕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를 창건할 때이며, 676년 이후 의상대사는 입적할 때까지 부석사를 떠나지 않았으므로 676년 의상이 귀신사를 창건허였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만일 의상대사가 귀신사를 다녀간 적이 있다면 당나라 유학에서 돌아온 671년부터 675년 사이 5년동안의 어느 때 일 수는 있다. 그러나 어느 고문에도 의상과 귀신사의 직접적인 연관 기록을 찾을 수가 없다.
또 한가지 가능성은 의상의 10대 제자 혹은 그 법손들의 창건 가능성인데 현재 이것이 가장 유력한 설이다.
최치원(857~?)의 '법장화상전' 각주에서 의상화엄전교십찰의 기록에서 국신사(귀신사의 옛 이름)가 언급되어 있으므로 적어도 9세기 이전에 귀신사가 창건되어 국신사로 존재했던 것만은 틀림이 없다.
자수무경(1664~1737)의 '전주무악산귀신사사적기'에 백제 법왕(재위599~600)때 원당사찰로 창건되었다는 기록이 전하는데 어떤 근거로 귀신사를 법왕때의 왕실원찰이라 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신라말 도윤이 중창하고 현재의 귀신사로 개칭하였으며, 고려시대 숙종의 네째 아들이며 대각국사 의천의 제자인 원명국사 징엄(1090~1141)이 중창하였다.
임진왜란 때 전화로 폐허가 된 것을 1601년 염화, 신허스님이 전각을 짓고 절을 중건하였으며, 귀신사에 관한 발견된 기록 가운데 가장 오래된 인조11년(1633)에 작성된 상량문이 발견되어 덕기스님이 1624~1633년 사이에 대대적인 중창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가 있다.
이후 여러 차례 중수가 이루어졌으며 고종10년(1873) 춘봉스님이 중창했으며, 1884년에 명부전을 중수하였다.
♧ 귀신사 대적광전(大寂光殿)
*보물 제826호(1985년 01월 08일 지정)
*소재지: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81
지혜의 빛을 비춘다는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은 17세기 경에 다시 지은 것으로 짐작이 된다.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로, 지붕은 옆에서 보았을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 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 귀신사 대적광전 교살창과 머름(左), 기둥하부 모습(中) 그리고 전면(右)
▲ 귀신사 대적광전 내부 천장(左), 귀공포(中) 그리고 편액(右)
앞면 3칸 문에는 빗살무늬 창호를 달았고, 오른쪽과 왼쪽 끝칸인 퇴칸은 벽으로 만든 점이 특이하다.
판석으로 면석을 이루고, 이 위에 갑석을 놓은 기단에서는 옛스러운 맛을 느낄 수 있다. 전면 처마는 겹처마이나, 후면은 홑처마이고, 양측에는 풍판을 달았다.
이 사찰에는 명부전과 연화대석, 석수 등 많은 석물들이 있으며, 특히 임진왜란 때에는 승병을 양성하던 곳이라 한다.
♧ 귀신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塑造毘盧疵那三佛座橡)
*보물 제826호(1985년 01월 08일 지정)
*소재지: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81
귀신사 대적광전에 봉안된 삼불좌상으로 지권인의 비로자나불을 본존으로 하고 좌우에 약사불과 아미타불을 배치한 삼불형식으로 , 흙으로 제작한 소조상이다.
임진왜란 이후 17세기에는 대형의 소조불상이 많이 만들어졌는데 이 삼불좌상은 법주사 소조삼불좌상(보물 제1360호, 1626년 현진 作), 완주 송광사 소조삼불좌상(보물 제1274호, 1641년 청헌 作) 등과 더불어 이러한 양상을 입증하여 주는 좋은 예이다.
이 삼불좌상은 규모가 매우 커서 보는 이를 압도하게 하는데, 인자하고 부드러운 얼굴표현과 허리가 긴 장신형의 불신은 매우 우아하고 품위 있는 불격을 보여준다. 특히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싸 쥐고 왼쪽 검지 끝을 오른쪽 검지 첫째 마디쪽으로 뻗은 지권인의 표현은 명대 비로자나불에서 나타나는 수인이며, 허리가 긴 장신형의 불상 비례 역시 명초에 유행하던 표현이어서 명대 조각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이 삼불좌상은 1633년에 작성된 귀신사 나한전 낙성문에 1633년 이전에 삼불상이 만들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자수 무경의 '전주모악산귀신사사적사인'에 의하면 절의 중건이 1624년이라고 하므로 1624년에서 1633년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귀신사 비로자나삼불좌상은 17세기 전반, 명대의 조각양식을 수용하면서 이를 조선 불상에 정착시키고 나아가 새로운 양식을 창출해 내고자 하였던 일면을 드러내 줄 뿐만 아니라 거대한 규모와 소조불상 조각의 뛰어난 기법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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