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은 관광명소/명찰을 찾아서

미륵신앙의 중심도량! 속리산 법주사

왕마구리 2010. 7. 11. 22:35

◀ 법주사(法住寺) ▶ 

 

삼년산성과 99칸 선병국가옥, 그리고 천연기념물인 정이품송을 둘러보고 법주사 입구 주차장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4시가 넘은 시간이다.

서둘러 법주사로 향하여 매표소에서 입장권(\3,000)을 끊어 매표소에서 법주사로 이어가는 진입로를 따라 들어가면 좌측에는 속리산국립공원에서 조성한 자연관찰로가 별도로 있다. 법주사로 향할 때는 아름드리 고목들이 터널을 이루는 넓은 진입로를 따르고 법주사 탐방을 마치고 되돌아 나올 때는 이 자연관찰로를 이용하기로 한다.

법주사 탐방과 속리산 산행 또는 속리산 내에 흩어져 있는 법주사 부속 암자까지 탐방하여 하루 종일 지불하는 관광요금이라면 모르겠지만, 약 2시간여의 법주사만의 탐방을 위해 투자하기에는 주차료(\4,000)와 입장료(\3,000)가 부담되는 탐방지다. 그러나 기타 관광지에서 주차료와 입장료를 전혀 내지 않았으니 이곳에서 한꺼번에 낸다고 편하게 생각을 한다.

두개의 편액(호서제1가람, 속리산내법주사)이 달려 있는 일주문을 지나면 속리산 등산로와 갈라지는 갈림길에 이르게 되는데 직진의 길이 등산로이고 좌측으로 들어가는 길이 법주사 방향이다.

법주사 입구 우측에는 법주사 배치도가 있고 좌측에는 '속리산사실기비'가 보관된 비각과 '벽암대사비'가 수정교 앞에 자리를 하고 있다.

수정교를 건너면 금강문이 나타나고, 금강문을 지나면 천왕문이 정면으로 나타난다. 금강문과 천왕문 사이의 공간에는 좌측으로 철당간지주, 법주사 석연지, 법주사 석조, 그리고 능인전 좌측 커다란 추래암 암벽에 새겨진 마애여래의상이 있다.

마애여래의상 앞을 지나 계곡 옆의 길을 따라 들어가면 두 곳의 부도전을 지나 수정암으로 가게 된다. 금강문과 천왕문 사이의 공간 우측에는 대형 주물솥인 철확이 당간지주와 마주 보고 서 있다.

천왕문 좌측에는 '통일호국 금동미륵대불'이 보인다. 천왕문을 지나면 정면으로 국내 유일의 5층 목탑이며 가장 높은 건축물인 팔상전이 자리하고 있고, 우측에는 석등 1기와 범종각이 보인다.

팔상전 뒷편에는 법주사 쌍사자석등이 있고, 우측에는 약사전, 좌측에는 보수공사중인 원통보전이 공사용 가리개로 모습을 가린채 덮여 있다. 쌍사자석등을 지나면 정면으로 대웅보전이 모습을 드러내는데 대웅보전 앞에는 보물 제15호로 지정된 법주사 사천왕석등이 자리하고 있다.

대웅보전 좌측에는 안쪽부터 삼성각, 명부전, 진영각이 일렬로 자리를 잡고 있으며, 진영각 아래며 원통보전 좌측에 해당되는 자리에 법주사 희견보살상이 있다.

청동미륵대불 뒷편이며 마애여래의상이 새겨진 추래암 우측에 별도의 담장으로 구획한 능인전이 자리를 하고 있으나 출입문이 잠겨져 있고, 출입이 금지된 장소라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진 세존사리탑은 볼 수가 없다.

마애여래의상 앞을 지나 수정암에 이르니 이곳 또한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 살짝 문 안으로 들어가 수정암의 중심법당인 극락전과 경내를 입구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을 한다.

수정암 앞 돌다리를 건너 법주사 진입로를 따라 나와 자연관찰로와 매표소 밖에 설치된 황토길을 걸어보고 주차장으로 향하며 법주사 탐방을 마무리한다.

 

법주사 경내에 있는 문화재를 전각, 목조물, 석조물, 철조물 등으로 나누어 소개를 하고, 일부 보수공사중이거나 출입이 금지되어 탐방치 못한 곳은 자료를 수집하여 함께 소개를 하기로 한다.

 

【 방문일자 】2010년 7월 5일(월)

【 탐방시간 】총 1시간 52분 소요(주차장 도착과 출발 기준)

【 교 통 편 】승용차 이용 

【 법주사 소개 】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이다.

신라 진흥왕14년(553)에 의신조사가 창건하였으며, 절 이름은 의신이 서역에서 불경을 나귀에 싣고 돌아와 이곳에 머물렀다는 설화에서 유래된 것이다. 혜공왕12년(776)에 금산사를 창건한 진표가 중창하였고, 그의 제자 영심 등에 의해 미륵신앙의 중심도량이 되었다.

진표율사가 7년간 머물면서 중창을 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삼국유사' 4권 '관동풍악발연수석기'에 보면 진표율사는 금산사에서 나와 속리산에 둘러 길상초가 난 곳을 표해 두고 바로 금강산에 가서 발연수사를 창건하고 7년 동안 머물렀다고 전한다. 그 후 금산사와 부안 부사의방에 머물 때 속리산에 살던 영심, 융종, 불타 등이 와서 진표율사에게 법을 전수받았다. 그때 진표율사가 그들에게 "속리산에 가면 내가 길상초가 난 곳에 표시해 둔 곳이 있으니 그곳에 절을 세우고 이 교법에 따라 인간세상을 구제하고 후세에 유포하여라." 하였다고 한다.

이때 영심스님 일행은 속리산으로 가서 길상초가 난 곳을 찾아 절을 짓고 길상사라 칭하고 처음으로 점찰법회를 열었다고 한다. 금산사를 중건한 진표스님이 미륵불을 조성하였기 때문에 진표스님의 법을 받은 영심스님 등도 마찬가지로 길상초가 난 곳에 절을 세우고 미륵불을 조성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내용을 근거하면 현재의 법주사는 영심스님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볼 수 있으나, 고려 인조때까지도 절 이름이 속리사라고 불렀다는 점과 '동문선'에 속리사라는 시가 실려있는 점으로 미루어 아마도 절 이름이 길상사에서 속리사로, 다시 속리사에서 법주사로 바뀐 것이 아닌가 생각되지만 지금까지 정확하게 규명되지는 않았다.

 

 

그후 법주사는 왕실의 비호 아래 8차례의 중수를 거쳐 조선 중기에는 60여동의 전각과 70여개의 암자를 거느린 대찰이 되었다.

통일신라 성덕왕17년(720), 혜공왕12년(776)에 중건되었으며, 고려에 와서 태조원년(918)에도 중건된 기록이 있다. 세 아들을 출가시킨 고려 문종(1046~1083)의 여섯번째 아들이며 대각국사 의천, 혜덕왕사 소현의 아우인 도생승통이 법주사의 주지를 지냈는데, 투철한 법상종 승려였던 혜덕왕사를 은사로 출가를 한 사실로 보아 법상종 스님임을 알 수가 있고, 법주사가 신라이래로 법상종의 전통을 계속 이어옴을 알 수가 있다.

고려 숙동(1101년)때 그의 아우 대각국사를 위해 인왕경회를 베풀었을 때 모인 승려의 수가 3만이었다고 하므로 당시의 절의 규모를 짐작할 수가 있다.

고려시대 절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자료는 인조(1122~1146)때 김부식이 편찬한 '속리사점찰법회소', 충혜왕3년(1342)때의 '고려국속리산법주사자존국존비명', 그리고 '도생승통비' 등인데, 이를 통해 인조때까지는 법주사를 산 이름과 같은 속리사라 불렀고, 유학자 김부식이 왕명으로 점찰법회의 소문을 지를 만큼 사격이 높았음을 알 수가 있다. 충렬왕7년(1281)에는 왕이 절에 행차하여 산호전에 참배하였고, 충숙왕도 절을 다녀 갔다고 한다.

공민왕12(1363)에는 왕이 절에 행차하여 양산 통도사에 사신을 보내어 부처님의 사리1과를 법주사에 봉안하게 하였다. 이 사리탑은 지금 능인전 뒤쪽에 남아 있다.

 

 

조선 초 태조와 세조가 이곳에서 법회를 열었다고 전하며, 세종31년(1449) 12월에 속리산내의 복천사를 중창(복천사중수보궐문에 기록)한 세조의 스승으로 큰 존경을 받았던 신미대사가 머물며 절을 크게 중창하였다.

그러나 선조25년(임진왜란)으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으며, 부분적으로 중수를 계속 하였으나 정유재란을 맞아 또 다시 절이 전부 불타는 비운을 겪게 된다.

인조2년(1624) 벽암이 중창한 후 여러차례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게 되는데, 현존하는 건물은 1624년에 중건된 대웅보전, 1625년에 재건된 국내 유일의 5층 목탑인 팔상전, 1624년에 중창된 능인전과 원통보전이 있고, 이밖에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 조사각, 사리각, 선원에 부속된 대향각, 염화실, 응향각이 있다.

또한 법주사의 중심법당이었으며 장육상을 봉안했었다는 융화보전은 그 터만 남아 있고, 이곳에 근대 조각가인 김복진이 조성 도중 요절했다는 시멘트로 된 미륵불상이 1964년에 세워졌다. 1986년 이를 다시 헐고 1989년 초파일에 높이 33m의 청동미륵불상이 점안되었다.

이밖에도 국가지정문화재인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 석련지(국보 제64호), 사천왕석등(보물 제15호), 마애여래의상(보물 제216호), 신법천문도병풍(보물 제848호), 쾌불탱(보물 제1259호), 희견보살상(보물 제1417호), 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 제1361호), 철확(보물 제1413호),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보물 제1360호)외 지방지정문화재 다수가 있다.

 

 

▲ 법주사로 가는 길

 

【 법주사의 불전과 문화재들 】

▷ 전각들

♧ ♧ 법주사 대웅보전(大雄寶殿)

*보물 제915호(1987년 3월 9일 지정)

 

 

▲ 대웅보전의 편액과 귀공포

 

▲ 대웅보전의 처마와 내부의 천장과 봉안된 불상들

 

법주사가 신라 진흥왕14년(553)에 창건되고, 혜공왕12년(776)에 중건되었는데 임진왜란으로 모두 불타 기록에 의하면 인조2년(1624)에 벽암이 다시 지었으며 그 뒤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조선 중기의 양식을 잘 갖추고 있어 보물 제915호로 지정되었다. 창건 당시에는 대웅보전이 존재하지 않았고 미륵장륙상을 모신 용화보전이 있어 미륵신앙인 법주사의 중심 역할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법주사 경내의 동쪽 끝에 서향으로 배치된 주불전 건물로 전면 7칸, 측면 4칸, 높이 19m의 대규모 2층 팔작지붕 건물로 옛 기록과 기단석 양식으로 보아 지금의 건물은 고려 중기에 처음 세운 것으로 보인다.

중층 기단위에 자연석 초석과 정형 초석을 병행하고 원형 기둥을 세웠으며 하층의 공포는 내외2출목, 상층의 공포는 내외3출목이다. 평면 내부의 내진에 고주를 세워 고주 사이에는 대들보와 종보를 걸치고 고주와 일종의 외곽 평주 사이에는 퇴보를 걸고 퇴보 위에 2층의 변주를 세워 중층가구를 형성하였다.

외관은 중층이지만 내부는 통층으로 되어 있고 일렬로 늘어선 내진의 고주와 장대한 불상으로 인하여 장엄한 공간을 형성하였으며, 외진부에는 빗천장이, 내진부에는 우물천장이 설치되었고 불단 상부에는 판형의 닫집이 설치되었다.

충청남도 부여 무량사의 극락전, 전남 구례 화엄사의 긱황전과 함께 우리나라 3대불전의 하나이다.

170평에 달하는 건물의 내부에는 1624년 대웅보전을 중창하면서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비로자나불을 주존으로 우측에 석가여래와 좌측에 노시나불이 협시한 삼신불을 봉안하고 있다. 2003년 2월 3일 보물 제1360호로 지정되었다.

삼신불 뒤로는 삼신불후불탱을 봉안하고 있는데 불상과 마찬가지로 각각 독립된 후불탱으로 1925년 보응, 문성 스님 등이 그렸는데 비로자나후불탱은 가로 348cm, 세로 616cm의 커다란 종이에 족자로 이루어졌다. 중앙에 비로자나불이 크게 자리 잡고 상단에는 문수, 보현보살과 성문중, 하단에는 성중과 동자상을 표현하였다.

좌,우의 노사나후불탱과 석가여래후불탱은 규모만 작을 뿐 비로자나후불탱과 흡사하다.

대웅전 오른쪽 벽에는 1897년에 조성한 신중탱, 왼쪽 벽에는 1928년에 조성한 삼장탱이 있다.

지금의 건물은 벽암대사가 중창한 이후 400년만에 2005년 10월 4년간의 공사 끝에 옛 모습을 그대로 원형 복원한 것이다.

 

♧ 법주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

*보물 제1360호(2003년 2월 3일 지정)

 

    

 

대웅보전 내에 모셔진 이 삼불좌상은 본존불인 비로자나불상을 중심으로 왼쪽에 아미타불상, 오른쪽에 석가여래상을 협시불로 배치한 삼불상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1624년 벽암대사가 대웅보전을 중창하면서 조성한 것으로 보이며, 크기는 전체 높이 550cm이고, 허리 둘레 390cm로서 우리나라 소조불상 중에서 가장 크다. 삼신불의 모습은 대체로 서로 일치하고 수인만 다르게 표현되어 있다.

비로자나불상은 네모진 얼굴에 건장하면서 굴곡이 없는 평면적인 몸체와 무릎을 하여 괴체적인 느낌을 준다. 왼손은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지권인의 손 모양을 하고 있으며, 양 어깨를 모두 덮은 옷은 대의 자락이 팔목에서 대칭되게 흘러내려 장식적이다.

아미타불상은 본존불과 거의 유사한 유형의 불상으로 왼손은 가슴에 올리고 오른손은 배에 두었으며 엄지와 중지를 맞댄 손 모양을 하고 있다.

석가여래상은 비로자나불과 아미타불상과 거의 같은 체형, 얼굴 모습 등 동일한 양식적 특징을 보여준다. 손 모양은 석가모니불이 흔히 취하는 항마촉지인으로 무릎 위에 올린 오른손의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다.

한편 아미타불상과 석가여래불상은 손 모양과 불상의 성격이 서로 다른데도 불구하고 옷 차림법이 마치 판에 박은 듯한 양식 특징을 보이고 있어 흥미롭다.

전체적으로 장대한 체구에 비하여 동안이며, 옷주름을 두텁게 표현한 이 불상은 조형성이 탄탄하여 임진왜한 후의 새로운 조형을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비록 불상 안에 넣어둔 유물들이 대부분 도난당했으나 남아있는 연기문에 의하면, 조선 인조4년(1626)에 조성되었으며, 그 후로부터 121년이 지난 영조23년(1747)에 불상에 다시 금칠을 하였음을 알 수 있어 조선 후기 불상 연구에 기준작으로 평가된다.

 

♧ ♧ 팔상전(捌相殿) 

*국보 제55호(1962년 12월 20일 지정)

 

 

 

법주사 팔상전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5층 목조탑으로 지금의 건물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짓고 1968년에 해체, 수리하였다.

벽 면에 부처의 일생을 8장면으로 구분하여 그린 팔상도가 그려져 있어 팔상전이라 이름 붙였다.

팔상도란 1)석가모니가 도솔천에서 내려오는 장면, 2)룸비니 동산에서 마야부인에게서 태어나는 장면. 3)궁궐의 네 문밖으로 나가 세상을 관찰하는 장면, 4)성을 넘어 출가하는 장면, 5)설산에서 고행하는 장면, 6)보리수 아래에서 마귀를 항복시키는 장면, 7)성불 후 녹야원에서 설법하는 장면, 8)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하는 장면 등 석가모니의 일생을 여덟 장면으로 표현한 그림이다.

 

 

▲ 팔상전 전체 전경과 귀공포

 

▲ 팔상전 서쪽 측면과 천장무늬

 

1층과 2층은 앞,옆면 5칸, 3,4층은 앞,옆면 3칸, 5층은 앞,옆면 2칸씩으로 되어 있고, 4면에는 돌계단이 있는데 낮은 기단위에 서 있어 크기에 비해 안정감을 준다. 지붕은 꼭대기 꼭지점을 중심으로 4개의 지붕면을 가진 사모지붕으로 만들었으며, 지붕 위쪽으로 탑 형식의 머리장식이 달려 있다.

건물의 양식구조가 층에 따라 약간 다른데, 1층부터 4층까지는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고, 5층은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설치한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쪽은 사리를 모시고 있는 공간과 불상과 팔상도를 모시는 공간, 그리고 예배를 위한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법주사 팔상전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우리나라 탑 중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며 하나뿐인 목조탑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 ♧ 원통보전(圓通寶殿)

*보물 제916호(1987년 3월 9일 지정)

▲ 보수중인 원통보전

▲ 수리 보수전의 원통보전 전경<자료화면>

 

▲ 원통보전의 편액(左)과 추녀와 공포(右)

 

▲ 원통보전의 내부 천장구조(左)와 봉안해둔 목조관음보살좌상과 내부 천장(右) 

 

전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정사각형 단층 건물이다. 지붕은 중앙에서 4면으로 똑같이 경사가 진 사모지붕이며,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에는 앉은 키 2.8m의 금색 목조 관세음보살상을 모시고 있다. 단순하지만 특이한 건축 양식을 갖추고 있어 건축사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인조2년(1624)에 벽암이 다시 중건하였으며, 그 뒤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현재(2010년 7월 5일) 보수중이다.

 

 

♧ 법주사 목조관음보살좌상(木造觀音菩薩坐像)

*보물 제1361호(2003년 2월 3일 지정)

원통보전에 모셔진 나무로 만든 관음보살좌상으로 머리에는 화염보주로 호화롭게 꾸민 보관을 쓰고 있는데, 관의 가운데에는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고, 배 부분에는 복갑같은 둥근 꽃장식 판을 두르고 있어서 전반적으로 장식성이 두드러져 보인다.

네모꼴에 가까운 얼굴은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으며, 오른손은 가슴에 올리고 왼손은 배에 두었으며 엄지와 중지를 맞댄 손 모양을 하고 있는데, 마치 실제 인물의 부드러운 손을 대하듯 곡선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생동감이 넘쳐난다.

양어깨를 덮은 천의 자락 역시 신체의 굴곡을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 내리도록 표현함으로써 부피감있는 곡선미를 보여주고 있다.

불상 안에서 나온 유물 가운데서 불상조성기가 발견되어 순치2년, 즉 1655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간단하고 단순, 소박하지만 부피감이 있는 이 목조관음보살상은 임란 후 제작된 조선 후기 불상연구에 있어 중요한 기준작으로 평가된다.

관음보살릉 달리 원통대사라 부르기도 하는데 원통이란 널리 통하여 두루 막힘이 없는 것, 즉 궁극적 깨달음의 상태를 의미한다.

관음보살은 대자대비의 화신으로 관세음보살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에서 관세음이란 세간의 음성을 관한다는 의미이다. 즉 사바에서 모든 중생들의 괴로움을 듣고서 그들을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자비의 보살인것이다.

보살의 높이는 2,8m이고 입가의 머금은 미소는 중생의 아픔을 달래 주는 듯하다. 무플 아래 좌,우에는 남순동자와 해상용왕을 봉안하였다.

 

♧ ♧ 능인전(能仁殿)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232호(2004년 1월 9일 지정) 

 

 

청동미륵대불의 왼쪽으로 별도의 담장으로 구획한 전각으로 법주사 사리각세존사리탑 앞에 조성된 건물이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인조2년(1624)에 법주사 중건시 벽암대사에 의해 중창되었다고 하며 건물 내에는 석가모니불과 연대 미상의 16나한상, 2위의 여래상이 봉안되어 있다. 또한 1992년에 조성된 신중탱이 있다.

조선 후기 호영스님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알려진 '법주사전경도'에는 사리각이라 표기되어 있어 이 전각이 원래 사리탑 적멸보궁의 예배처로 사용되었던 곳이라고 한다. 만약 이곳이 적멸보궁의 예배처로 사용되었다면 통도사 대웅전과 마찬가지로 그 안에 불상이 조성되지 않아도 되며, 또한 이곳이 16나한을 모신 나한전이라면 그곳에는 비로자나불이 아닌 석가모니불을 주존불로 하는 16나한의 상이 모셔져 있어 현재로서는 건물의 처음 성격을 추정할 수가 없다.

'능인(能仁)'이라 함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별칭 중 하나로 '능히 일체 중생을 교화하여 이롭게 하는 사람'이란 뜻이라고 하며, 능히 사바세계(온갖 괴로움을 참아 견뎌야 한다는 뜻에서 감인세계라 말하기도 한다)의 온갖 괴로움을 참아낼 뿐만 아니라 그 괴로움 속의 중생들을 견뎌낼 분이라는 뜻에서 능인이라 표하기도 한다. 이렇듯이 교화력을 갖춘 분, 곧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이곳 건물 안에 머물러 계시기 때문에 능인전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전면 3칸, 측면 2칸의 작은 건물로 이익공 흩처마 맞배지붕이다. 규모는 29.32㎡로 건물 뒤에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호인 법주사 세존사리탑이 있으며, 건물의 전면 담장 밖에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0호인 법주사 석조가 옮겨져 있다.

건물의 규모는 작지만 건물의 기단석 및 기둥 등이 옛 형태대로 잘 유지되고 있으며, 팔상전, 대웅보전, 원통보전, 사천왕문 등고 함께 법주사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 건물로 보존 가치가 높다.

현재 능인전은 탐방객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 ♧ 명부전(冥府殿)

전면과 측면이 각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대웅전 좌측, 삼성각과 진영각 사이에 있다.

명부전에는 명부세계를 주재하는 지장보살을 주존으로 모시는 전각이다. 지장보살은 석가여래 입멸 후 미륵불이 출현할 때까지 무불 세계의 중생들을 구제하겠다는 원을 세운 분이다.

도리천에서 머물면서 미혹에 빠져 있는 중생들을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하며, 지옥에 단 한 명의 중생이라도 남아 있다면 성불하지 않겠다고 하여 스스로의 성불마저도 미뤄 둔 대자비의 보살이다.

법주사는 일찍부터 지장보살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데, 절의 중흥조 진표율사는 몸을 돌보지 않는 치열한 수행을 통해 지장보살에게서 정계를 받았다. 삼국유사에는 '지장보살이 석장을 흔들며 와서 가호하니 손과 팔이 전과 같이 되었다. 보살이 스님에게 가사와 발우, 그리고 계본 등을 주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스님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더욱 분발하여 마침내 미륵의 수기를 받았다고 한다. 이후 스님은 금산사에 이르러 지장신앙에 입긱한 점찰법회를 거행하였다. 이러한 법주사 지장신앙의 전통은 다시 제자 영심에게 이어져 나갔던 것이다.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절에는 지장전이라 하여 지장보살을 봉안한 전각이 있었으나, 18세기에서 20세기 초 사이의 가람에는 지장전이 사라졌다.

불전 안에는 오른손에 석장을 잡고 왼손에는 여의주를 든 지장보살과 그 협시로 도명존자, 무독귀왕을 봉안하였고, 다시 그 좌,우에 각각 5구씩의 시왕상이 있는데 시왕상마다 모두 동자상을 대등하였다. 또한 각 2구씩의 판관, 녹사, 인왕상도 배치되었다.

지징보살상 뒤에는 1996년에 조성한 지장보살도가 있고, 1992년에 주조한 동종도 있다. 명부전 외벽에는 삼면에 걸쳐 지옥세계의 무서운 장면이 벽화로 그려졌는데, 이를 통해 중생들로 하여금 경계심을 일으켜 생전에 선업을 닦도록 가르침을 주고 있다.

지금의 명부전은 최근에 조성한 것이다.

 

▲ 명부전(左)과 삼성각(右) 

 

♧ ♧ 삼성각(三聖閣)

대웅보전 왼쪽에 위치한 전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안에는 칠성, 독성, 산신을 탱화로 봉안하였다.

칠성은 북두칠성을 말하고, 산신은 우리나라 고유의 재래신앙이 불교에 스며든 것이다. 그리고 독성은 부처님의 16제자 중의 하나인 나반존자를 가르킨다.

삼성각은 이처럼 불교와 외래신앙이 습합된 결과로서 특히 산신의 역할이 강조되면서 대개 가람의 외곽에 들어 서는데, 이 삼성각은 다른 나라 사찰에서는 찾아 볼 수없는 우리나라 사찰에서만 나타나는 전각이다.

그러나 법주사의 가람 구조상 산 쪽으로 진출하기 어려웠던 듯 대웅보전의 오른쪽에 자리를 잡았으며, 봉안된 탱화들은 1991년에 조성한 것이다.

중앙의 칠성탱은 상단부에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칠성여래가 있고, 중단부에는 북극성에 해당하는 치성광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일광, 월광보살이 협시하였다. 그리고 하단부에는 수 많은 별들의 무리를 나타낸 18수의 무리가 보살상처럼 표현되었다.

왼쪽의 독성탱은 천태산에 머물며 홀로 수행하는 독성을 중심으로 2명의 시자가 시봉하고 있다.

산신탱은 호랑이를 타고 앉은 산신과 시자의 모습이다. 삼성각 외벽에는 호랑이와 숲 속에서 수행하는 독성의 모습을 벽화로 나타냈다.

 

♧ ♧ 진영각(眞影閣)

 

명부전과 나란히 서 있는 전면 7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진영각은 조사각이라고도 하며 고승대덕의 영정을 봉안하는 곳으로 조사란 어느 학파를 창건하거나 또는 크게 중흥시킨 선덕으로서 후학들에게 존경을 받는 큰스님을 일컫는 말로 특히 선가에서 즐겨쓰는 말이다.

본래 법주사에는 조사각이라 하여 조선 영조의 후궁이었던 영빈이씨가 원당으로 사용하던 선희궁원당에 모셨었는데, 1991년 지금의 진영각을 새로 지었다. 18세기 중엽에 작성된 호영 스님의 법주사전경도에 의하면 영자전이라 하여 지금의 삼성각 위쪽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안에는 법주사의 창건주 의신 조사, 전법초조 태고선사를 중심으로 모두 30분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 ♧ 약사전(藥師殿)

 

약사전은 전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안에는 중생의 질병과 고통을 치유하는 약사불과 후불탱을 봉안하였다.

약사 신앙은 대표적 불보살신앙 가운데 하나로 동방의 정유리세계를 교화하는 부처님인 약사여래는 보살도를 닦을 때, 열 두 가지의 크고 거룩한 원을 세워서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구하는 바를 다 이루게하여 부처님이 되신 분이다.

우리나라의 약사 신앙은 대체로 8세기 이후에 번성하였으며, 삼국유사에 약사 신앙의 영험이 많이 전한다. 선덕여왕 때 밀본스님이 약사경을 읽고 왕의 병을 고쳤고, 통일신라 때 경주에 위치한 신라의 대표적 사찰 중의 하나인 분황사에는 거대한 크기의 약사여래입상이 있었다. 또한 경주 남산의 곳곳에서 발견되는 사방불과 약사여래입상 등이 약사 신앙의 대중적 인기를 보여 준다.

법주사에 약사전이 들어선 것은 오래되지 않은 듯 하다. 조선 중기의 가람이나 18세기 중엽의 배치도에는 약사전이 존재하지 않았고, 20세기 초에 원통보전 동쪽 정면에 작은 규모의 약사전이 비로소 등장하였다. 지금의 약사전은 최근에 조성한 것인데, 안에는 약사여래좌상과 1997년에 조성한 약사후불탱을 봉안하였다.

 

♧ ♧ 범종각(梵鐘閣) 

 

팔상전의 동쪽(오른쪽) 정면에 있는 전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76년 종무소를 허물고 그 자리에 새로 지었다.

범종, 운판, 법고, 목어 등이 있다. 이 네가지 법구가 불당 앞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이를 '불전사물'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네가지 법구들의 용도와 의미가 각각 다른데, 범종은 지옥에서 한없는 고통을 겪고 있는 중생들을 위해, 운판은 하늘을 나는 날개 달린 짐승들을 위해 모두 이 소리를 들음으로써 영원한 해탈심을 느끼게 한다. 또한 법고는 땅 위에 사는 네 발 달린 짐승들을 위해, 목어는 물 속에 사는 생명들을 위해 울린다.

 

▷ 목조 문화재들

♧ ♧ 일주문(一柱門)

 

 

 

 

기둥이 한 줄로 되어 있는데서 유래된 말이다. 네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을 얹는 일반적인 가옥 형태와는 달리 일직선상의 두 기둥 위에 지붕을 얹는 독특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

사찰을 들어가는 첫 번째 문을 독특한 양식으로 세운 것은 일심(一心)을 상징하는 것이다. 신성한 가람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를 불법의 청량수로 말끔히 씻고 일심으로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인 가르침이 담겨 있다. 즉 사찰 금당에 안치된 부처의 경지를 향하여 나아가는 수행자는 먼저 지극한 일심으로 부처나 진리를 생각하며 이 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 ♧ 금강문(金剛門)

 

 

일주문을 지나 수정교를 건너면 본격적으로 법주사 경내에 들어서게 되는데 그 첫 입구가 금강문이다. 전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좌,우에는 돌담이 늘어서 회랑을 형성하고 있다. 금강문은 인왕상을 봉안하기 때문에 인왕문(仁王門)이라고도 부른다.

대체로 문 양쪽에는 금강저나 칼과 창을 손에 들고 있는 금강역사가 모셔진다. 그래서 왼쪽에는 밀적금강, 오른쪽에는 나라연금강을 모시는데, 혹 입을 벌리고 있는 상을 아금강역사라 부르고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을 우금강역사라 부르기도 한다.

이곳 금강문 안에는 1974년에 조상한 금강역사 2위와 사자를 탄 문수보살,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을 함께 봉안하였다.

 

♧ ♧ 사천왕문(四天王門)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46호(1977년 12월 6일 지정)

 

신라 진흥왕14년(553)에 처음 세워진 법주사의 정문이다. 그 후 몇차례 다시 지어졌다가 조선 인조2년(1624)에 벽암선사가 지은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면 5칸, 측면 2칸의 비교적 큰 규모로 맞배지붕이며 앞면 3칸은 판문을 달아 출입을 하도록 하였고, 양쪽의 끝 칸에는 문이 아니라 작은 판창을 단 특이한 구조로 국내의 천왕문 중 규모가 가장 크다.

또한 봉안된 사천왕상은 우리나라 현존 사천왕상 중 최대의 걸작품으로 평가받고 잇다.

동쪽 세계를 관장하는 지국천왕은 손에 비파를 들고 인간 감정의 기쁨의 세계를 총괄하고, 서쪽 세계를 관장하는 광목천왕은 용과 여의주를 들고서 노여움의 감정을 주관하고, 남쪽 세계를 관장하는 중장천왕은 칼을 들고 사랑의 감정을 주관하며, 북쪽 세계를 다스리는 다문천왕은 탑 또는 큰 깃대를 들고 즐거움의 감정을 주관한다. 이처럼 인간사를 관장하고 있는 사천왕은 착한 일과 악한 일을 적절한 시기에 판단하여 그에 따른 상과 벌을 내린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천왕문에 들어서는 사람들은 두려운 마음으로 최대의 공경을 올리곤 한다.

 

▷ 석조 문화재들

♧ ♧ 마애여래의상(磨崖如來倚像)

*보물 제216호(1963년 1월 21일 지정) 

 

능인전 옆의 추래암 암벽에 돋음새김으로 조각된 고려시대의 마애불상으로 전체 높이가 약 6m이다.

의상이란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말하지만 여기서는 의자 대신에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다.

불상의 머리는 바위에 새긴 것들에서는 보기 드물게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촘촘하 새겼다. 둥글고 온화한 얼굴에는 크고 긴 코와 둥근 눈썹, 뚜렷한 눈두덩과 함께 두꺼운 입술이 잘 표현되어 묘한 미소를 짓고 있다. 여기에 귀는 어깨까지 길게 내려왔고 목에 있는 3줄의 주름이 고려 초기 마애불의 특징적인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불상이 입고 있는 옷은 왼쪽 어깨에만 걸친 형태로 가슴에서 다리 사이로 흘러내려 아름다운 곡선을 이룬다.

손모양은 오른손을 가슴 앞에 들어서 손바닥을 밖으로 하고, 가운데 손가락을 구부려 엄지와 맞대었다. 왼손은 앞으로 수평으로 들어서 손바닥을 위로 향하고 있다.

이 불상은 화사한 연꽃 위에 걸터 앉고 큼직한 연꽃 잎 위에 발을 올려놓고 있어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자세를 취하고 있다.

불상의 오른쪽 바위 면에는 짐 실은 말을 끄는 사람과 말 앞에 꿇어 앉은 소를 새겨 놓았다. 이것은 의신조사가 불경을 실어 오는 모습과 소가 불법을 구하는 전설을 그렸다고 하는 법주사의 창건 설화와 관계되는 암각화로 추정된다.

이 암각화는 예술적으로는 우수하지 못하지만 절의 구심점인 미륵불과 창건 설화를 표현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마애여래좌상 북쪽 벼랑에는 또 다른 마애불이 새겨져 있는데 심하게 마멸되어 정확히 추정하기는 힘들지만 어떤 대좌에 앉아 있는 의상의 모습으로 왼손에는 지장보살이 지니는 특유의 여의주가 새겨져 있어 지장보살로 추정된다, 상호의 표현과 옷자락의 모양 등으로 미루어 마애여래의상과 동시대인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생각된다.

 

♧ ♧ 쌍사자석등(雙獅子石燈)

*국보 제5호(1962년 12월 20일 지정) 

 

 

 

법주사 대웅전과 팔상전 사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걸작으로 높이 3.3m의 팔각석등이다.

넓다란 8각의 바닥돌 위에 올려진 사자 조각은 두 마리가 서로 가슴을 맞대고 뒷발로 아래돌을 디디고 서서 앞발과 주둥이로 윗돌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팔각의 지대석은 아래, 위에 가는 테를 돌리고 우주를 나타냈으며, 윗면에는 역시 팔각의 고임을 나타냈고 다시 그 안에 원형의 고임을 새겼다.

하대석은 한 겹의 커다란 연꽃문양과 그 속에 또 다른 꽃 문양을 조각하였다. 위로 올라가면서 점차 좁아져 중대석을 받고 있다. 중대석은 두 마리의 사자가 뒷발로 버티어 서서 앞발로 상대석을 받치는 모습으로, 가슴을 맞대고 머리를 위로 향한 똑 같은 모습이다.

사자의 조각은 매우 정교하여 크고 둥그런 눈, 머리의 갈기, 몸체의 근육 등이 마치 살아 있는 느낌이다. 사자가 받들고 있는 상대석의 아랫 부분은 두 줄의 가는 받침 위에 원형에 가까은 양련석이다. 다시 그 위의 화사석은 팔각으로 네 면에만 장방형의 화창을 냈다. 이곳에 여러 개의 구멍이 남아 있다.

옥개석은 위에서 아래로 약간의 경사를 보이고 추녀 끝에서 반전되었다. 옥개석의 위에는 복련과 공 모양의 보주가 장식되어 있다.

성덕왕19년(720)에 이 석등을 세운 것으로 추측되며, 신라 석등을 대표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 희견보살상의 향로와 얼굴

 

▲ 희견보살상의 배면과 하반부

 

 

♧ ♧ 희견보살상(喜見菩薩像)

*보물 제1417호(2004년 10월 7일 지정) 

 

 법주사 희견보살상은 청동미륵대불 오른쪽에 자리를 히고 있으며, 지대석 위에 비교적 큰 향로를 머리에 이고 서 있는 독특한 보살입상으로 흔치 않은 조각상이다.

전체 높이 약 2m에 이른 이 보살상은 법화경 약왕보살본사품에 장하는 희견보살을 조각한 것으로, 희견보살은 법화경을 공양하기 위해 스스로 몸과 팔을 불태워 소신 공양을 올렸다는 보살이다.

하나의 돌로 대좌에서 머리 위의 판석까지를 조각하였고, 맨 위의 향로만이 다른 돌로 조각하였다. 보살이 밟고 서 있는 대좌는 별 다른 조각없이 판석에 가깝다.

아마도 이 대좌의 반쯤은 땅속에 묻어 고정시켰던 것 같다.

얼굴부분이 심하게 파손되어 전혀 알아 볼 수가 없으나 볼록한 가슴, 굵은 다리와 팔에서 역동적인 분위기가 연출되며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어깨에 두른 겉옷은 팔을 들 때 자연스럽게 펼쳐지듯이 가슴을 활짝 드러내며 옆으로 젖혀졌다. 속옷은 하의에만 표현하였는데 배꼽 아래로 띠 매듭이 보인다.

두 팔과 머리로 떠받친 그릇받침은 투박한 판석이다. 그 위의 향로는 네 겹의 굵은 연꽃잎을 둘러 화려한 느낌을 준다. 전체적으로 선이 굵고 대담한 기법이 돋보이는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다.

 

 

 

한편에서는 이 보살상을 가섭존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일반적으로 희견보살은 단정한 모습에 왼손에는 깃발을 든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이 작품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석가여래의 제자였던 가섭존자가 가깝다고 한다.

가섭존자는 석가가 입멸한 후 미륵불이 출현할 때까지 열반에 들지 않고 세상에 남아 가사와 발우를 전하라는 석가여래의 가르침을 받는다.

이러한 경설을 바탕으로 법주사의 보살상은 희견보살이 아닌 가섭존자가 미륵불에게 전할 가사와 발우를 머리에 이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그럴 경우 보살상의 명칭을 가섭봉발가사탑으로 해야 옳다고 한다. 일찍부터 법주사는 미륵도량이었고, 가람 곳곳에는 미륵불과 관련된 유물이 산재하고 있어 미륵신앙을 구현한 가섭존자의 조각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 ♧ 석연지(石連池)

*국보 제64호(1962년 12월 20일 지정)

 

 

법주사 천왕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능인전 앞에 석연지가 있다.

높이는 200cm, 전체 둘레는 665cm에 이르는 거대한 조형물인 작은 연못으로 어떠한 용도로 쓰였는지는 불확실하지만 물을 담아 연꽃을 띄워 두었다고 하며, 연꽃 모양으로 조성된 연못이라는 뜻에서 연지라 부른다.

전체 구조는 네 부분으로 나뉜다.

전체 석조물을 받치고 있는 지대석과 팔각 기단부, 그 위에 구름과 연꽃의 형상이 조각된 원통형의 중대석, 석연지의 몸체, 그리고 상단의 난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은 외곽에 장방형의 부재로 사각의 테를 두르고 안에 지대석을 두었으며, 하대석은 팔각으로 각 면에 안상과 우주를 새겼다. 위에는 3단의 중단으로 체감을 줄여 올라가다가 복련으로 살짝 덮었다.

중대석은 전체 구조의 기둥 역할을 하는데 둥글게 피어나는 구름 문양이 사방을 감쌋다. 위의 거대한 상대석을 받치기 위래 윗면을 아래보다 넓게 하여 안정감이 있어 보인다. 상대석인 연지는 반구형으로 밑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3단의 커다란 양련을 새겼으며 다시 그 연꽃 속에는 보상화문을 화려하게 나타내었다.

연지의 가장 윗부분은 일종의 난간처럼 보이는데 연지 위에 동자 기둥을 세우고 난간이 올라섰는데 둥근 원형 면마다 천인상을 새겼다. 불국사 다보탑에 새겨진 돌난간의 기둥과도 비슷하며 밑의 난간 벽에는 여러가지 무늬를 새겨 놓아 화려함을 한층 더 살려준다.

일부가 파손되기는 했지만 상단에 놓인 이 난간의 형상으로 미루어 혹 향로를 조성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추정하기도 한다. 8세기경에 제작된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재질이 화강암임에도 섬세하게 조각되었으며, 전체적으로 한 송이 연꽃을 염두에 두고 조성했음에도 절제된 화려함 속에 우아함이 피어나는 아름다운 자태는 석연지의 대표작으로 불리울 만하다. 

 

♧ ♧ 법주사 석조(石槽)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70호(1980년 11월 13일 지정) 

 

법주사의 3천 승려들의 식수를 담아두던 돌그릇이라 한다.

직사각형의 모양으로 아무런 조각을 하지 않은 간결한 모습이며, 규모는 길이 446cm, 폭 240cm로 제법 크다. 통일신라 성덕왕1년(720)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능인전 앞에 위치하고 있다.

 

♧ ♧ 속리산사실기비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167호(1989년 12월 8일 지정) 

 

법주사 입구 수정교 앞에 있는 비로 비각 안에 있다.

비의 크기는 높이 1.63m, 너비 0.65m이다. 현종7년(1666)에 송시열이 이야기를 짓고 명필 송준길이 글씨를 써서 세웠는데 비문의 내용은 속리산 수정봉 위에 있는 거북바위의 내력을 쓰고 미신을 타파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속리산은 매우 아름다워서 사람들이 소금강산이라고 불렀으며, 그 이름이 중국에도 알려져 중국사람들도 한번쯤 구경하기를 원하는 명산임과 세조가 이곳에 행차한 사실 등을 적고 있다. 특히 수정봉 마루에 있는 거북바위에 대해서는 머리를 서쪽으로 두고 있는데 중국인들이 중국의 재물이 우리나라로 들어온다고 하여 그 머리를 자르고 거북의 등에 탑을 세웠다고 한다. 이것을 효종4년(1653)에 옥천군수 이두양이 다시 머리를 잇게 하였는데, 그 후 충청병마절도사 민진익이 관찰사 임의백에게 일러 탑을 헐어 버렸다는 사실이 적혀있다.

당시 지식인들이 숭명사대의 명분으로 불교를 억압하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비문의 내용이 매우 흥미롭고 불교와 유교의 관계가 잘 나타나 있다.

 

♧ ♧ 벽암대사비(石槽)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71호(1980년 11월 13일 지정) 

 

벽암(1575~16660)은 조선 중기의 스님, 승병장으로 자는 징원, 호는 벽암, 성은 김씨이다.

선조8년(1575) 12월 23일 보은에서 태어났으며, 9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10세에 화산암의 설묵에게 공부했으며, 선조21년(1588) 스님이 되었다. 부휴 선수를 만난 후 줄곧 선수를 따라 속리산, 덕유산, 가야산, 금강산 등을 유력했다. 선조25년(1592) 임진왜란 중에는 산중에 피난해서도 공부를 쉬지 않다가 이듬 해 사명 유정이 선수를 천거하여 전장의 진두에 나서게 하자 그는 선수를 대신해서 전장에 나가 명나라 장수와 함께 해전에서 왜적을 크게 무찔렀다.

인조2년(1624) 조정에서 승려들에게 남한산성을 쌓게 했을 때는 팔도도총섭으로서 3년만에 완성했다. 이 공으로 보은천교원조 국일도대선사라는 호를 받았다. 그 뒤 화엄사를 수리하고 교화 활동에 힘쓰다가 병자호란을 만나 왕이 남한산성에 피란했다는 소식을 듣고 3천명의 승병을 모아 항마군이라 이름한 뒤 스스로 승병장이 되어 북상했으나, 도중에 왕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진군을 중지하였다.

그후 법주사에 주석하며 전쟁중에 의병의 본거지라고 불태워버린 법주사의 대웅보전, 팔상전, 원통보전 등을 복원하여 법주사를 중창하고, 송광사, 해인사, 백운사, 상선암, 보개산, 묘향산 등으로 옮겨다니며 교화 활동을 펴다가 화엄사로 돌아가서 현종1년(1660) 1월 12일 나이 86세, 법랍 72년으로 입적했다.

이 비는 조선 현종(1664) 때 건립된 벽암대사의 비로 글씨는 선조의 손자인 낭성군 이오가 썼으며, 법주사 입구 수정교 앞에 남아 있어 대사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 철조 문화재들

♧ ♧ 법주사 철확

*보물 제1413호(2004년 8월 31일 지정) 

 

 

 

금강문을 들어서면 철당간지주와 마주 보고 우측에 서 있는 큰 사발의 형상을 한 쇠솥으로 높이 120cm, 지름 270cm, 둘레 1080cm, 그리고 기벽의 두께 3~5cm의 거대한 크기이다.

무게는 약 20여 톤으로 추정되는데 본래는 강원 옆 공양간 주위에 있었던 것을 옮겨 놓은 것이다.

3,000명 정도가 먹을 수 있는 장국을 끓일 수 있다고 하는데 법주사 내 곳곳에 있는 거대한 석조물통 및 항아리와 함께 번성했던 법주사의 옛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유물이다.

비교적 단순한 구조에 몸체에는 아무런 문양이나 기록이 주조되지 않아 제작연대, 제작자 및 제조방법 등을 알 수 없지만, 용해온도가 청동보다 훨씬 높은 주철로 주조된 대형의 주물솥이라는 점에서 기술사적 측면에서 매우 귀중한 자료로 국내에서 전하는 사례가 매우 희귀할 뿐만 아니라 거의 완벽한 조형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 ♧ 철당간지주(鐵幢竿支柱)

 

당간지주는 당간과 지주가 합쳐진 말이다. 당간은 절의 행사나 법회 등을 알리는 안내문을 높게 세운 깃대로서 찰 또는 찰주라고도 부르고, 지주는 이 당간을 세울 수 있도록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버팀돌이다. 일반적으로 당간은 목재로 만들기 때문에 남겨진 예가 거의 없고 지주만 남아 흔히 당간지주라고 부른다.

법주사의 당간지주는 고려 초인 목종7년(1006)에 조성된 것으로서, 조성 당시의 높이가 16m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뒤 조선 후기 고종3년(1866) 대원군의 명령으로 국가에서 당백전을 주조하기 위해 사찰의 많은 금속물들이 징발 당했는데 이런 과정에서 당시 용화전의 미륵장륙상과 이 철당간이 사라졌다고 한다.

1910년 무렵 22m 높이의 철당간을 확대, 복원하였고, 1972년에 보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 ♧ 청동미륵대불

 

절 왼쪽에 커다랗게 서 있는 이 미륵불은 여러 번 옷을 갈아 입은 전력이 있는 기구한 사연을 안고 있다.

신라 혜공왕(776) 때 진표율사가 금동미륵대불을 처음 지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때 몰수되었는데, 근대 조각가인 김복진이 조성 도중 요절했다는 시멘트로 된 미륵불상이 1964년에 세워졌다. 1990년에는 붕괴 직전의 시멘트 대불이 높이 33m의 청동대불로 다시 태어났다.

2000년 들어 원래 제 모습을 찾아주고자해서 금동미륵불 복원 공사를 했다. 3mm 두께로 황금을 입히는데 모두 80kg이 들어갔다.

청동미륵대불이 서 있는 곳은 미륵장륙상을 안치했다는 용화보전이 있던 자리이다.

 

▷ 기타 문화재들

♧ 경내의 요사채

 

♧ 수정암

 

 

 

 

♧ 수정암에서 법주사주차장 가는 길 

▲ 수정암 앞의 징검다리

 

▲ 자연관찰로

▲ 황토지압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