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숨겨진 아름다움, 천오백년 명승고찰!!! 선운사(禪雲寺) ▶
형형색색 물드는 가을의 단풍과
눈 내리는 겨울 동백꽃의 붉은 꽃송이의 고아한 자태가 아름다운 선운사
천오백년의 시간이 깃든 선운사의 동백이 붉은 꽃을 피우고 푸른 청보리밭이 봄 햇살에 푸릇하게 돋아나는 고창의 봄!
구시포해수욕장 바다 위로 무수하게 반짝이는 여름의 빛깔과 계곡마다 차가운 숨결의 물이 쏟아지고, 잘 익은 고창수박이 입을 쩌억 벌리는 푸르른 고창의 여름!
선운산 산등성이마다 오색으로 물드는 단풍, 선운사에서 붉게 피워 올린 꽃무릇과 계곡을 따라 천오백 년의 고찰 도솔암과 참담암을 향해 가을을 걷고, 학원관광농장에 소금을 뿌려놓은 듯한 메밀밭에서 쪽빛 하늘의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는 고창의 가을!
차가운 겨울 속에서 구시포해수찜을 즐기고,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며 선운사 산책로를 걸으며 겨울 사색에 잠기고 설경 속에서 평화를 만날 수 있는 고창의 겨울!
사계절이 즐거운 고창의 가을 단풍을 찾아 이번 여행에서는 당일 코스로 '고인돌과 징마재 따라 100리길' 문화생태탐방로의 제4코스 '천오백년 화염의 역사가 살아있는 선운산길'(일명 '보은길' 검단소금전시관~선운산 관광안내소/12.70km)을 탐방하며 천혜의 자연이 숨쉬며 형형색색의 단풍이 손짓하는 호남의 내금강이라 불릴만큼 아름다운 선운산도립공원 내 명승 제54호 도솔계곡, 천오백년 명승고찰 선운사와 부속암자인 참담암, 도솔암 등의 문화유적을 둘러 볼 계획이었다.
그러나 아침 일찍 출발하여 고창을 향해 출발하였으나, 예상보다 도착시간이 늦어 문화생태탐방로의 탐방을 동백꽃이 피는4월 중순경에 다시 시도를 하기로 하고 포기를 한다. 대신 가을의 정취를 물씬 체감할 수 있는 단풍관광으로 계획을 수정하여 천연기념물 제463호'로 지정된 '문수사의 단풍나무 숲'과 선운산도립공원내 선운사 탐방과 선운사에서 도솔암으로 이어지는 산책로를 따라 도솔제를 돌아오는 단풍길 트레킹로 변경, 실시를 하였다.
그리고 문수사와 단풍나무 숲 탐방 후 선운사로 이동하는 길목에 위치한 고창군내 2개의 읍성(고창읍성과 무장현읍성) 중 하나인 무장현 관아와 읍성을 추가로 탐방을 하였다.
이번 고창의 탐방기는 총 3편으로 나누어 게제를 하기로 하며, '선운사' 소개는 '내가 찾은 관광명소'의 '명찰을 찾아서'에 별도로 게제를 하기로 하여 총 4편으로 게제를 한다.
- 제 1편(문수사와 단풍) : 천년 기도 도량! 호남 제일의 문수 도장인 문수사와 단풍나무 숲
- 제 2편(무장현관아와 읍성) : 태종17년에 축성한 무장현 관아와 읍성
- 제 3편(선운사의 단풍) : 선운산도립공원내 선운사 단풍숲길
- 천오백년 명승고찰! 선운사
【 일 정 표 】2010년 11월 2일(화)
부천출발-(서해안고속도로)-고창분기점-(고창-장성간고속도로)→남고창I.C→문수사→무장현관아와 읍성→선운산도립공원 선운사와 단풍숲길→선운산I.C.-(서해안고속도로)→부천
【 교 통 편 】승용차 이용
【 선운사 소개 】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도솔산(선운산) 북쪽 기슭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로 명승고찰로 유명한 곳이다.
선운사에 창건에 대해서는 신라 진흥왕이 창건했다는 설과 백제 위덕왕24년(577)에 고승 검단선사가 창건했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하고 있다.
첫 번째 설은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이 만년에 왕위를 내주고 도솔산의 어느 굴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이때 미륵 삼존불이 바위를 가르고 나오는 꿈을 꾸고 크게 감응하여 중애사(重愛寺)를 창건함으로써 이 절의 시초를 열었단 것인데, 당시 이곳은 신라와 세력다툼이 치열했던 백제의 영토이기 때문에 신라의 왕이 이곳에 사찰을 창건하였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따라서 시대적, 지리적 상황으로 볼 때 검단선사의 창건설이 정설로 받아 들여지고 있다.
검단선사의 창건과 관련해서도 여러 가지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본래 선운사 자리는 용이 살던 큰 못이었는데 검단선사가 용을 몰아내고 돌을 던져 연못을 메워나가던 무렵, 마을에 눈병이 심하게 돌았는데, 못에 숯을 한 가마씩 갖다 부으면 눈병이 씻은 듯이 낫곤하여, 이를 신기하게 여긴 마을사람들이 너도나도 숯과 돌을 가져옴으로써 큰 못은 금방 메워지게 되었다. 이 메워진 연못 위에 절을 세우니 바로 선운사의 창건이다.
검단선사는 "오묘한 지혜의 경계인 구름(雲)에 머무르면서 갈고 닦아 선정(禪)의 경지를 얻는다."하여 절 이름을 '禪雲'이라 지었다고 전한다.
또한 이 지역에는 도적이 많았는데, 검단선사가 불법으로 이들을 선량하게 교화시켜 소금을 구워서 살아갈 수 있는 방도를 가르쳐 주었다. 마을사람들은 스님의 은덕에 보답하기 위해 해마다 봄,가을이면 절에 소금을 갖다 바치면서 이를 '보은염(報恩鹽)'이라 불렀으며, 자신들이 사는 마을이름도 '검단리'라 하였다.
선운사가 위치한 곳이 해안과 그리 멀지 않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염전을 일구었던 사실 등으로 미루어 보아, 염전을 일구어 인근의 재력이 확보되었던 배경 등으로 미루어 검단선사가 사찰을 창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고려 공민왕3년(1354)에 효정스님이 법당과 요사를 중수하였다.
조선 성종5년(1474) 향호주유 스님이 성종의 숙부 덕원군의 도움으로 이후 10여년에 걸친 중창불사를 진행하여 선운사의 옛 모습을 되찾았으나, 1597년 정유재란 때 어실을 제외하고 모든 건물이 소실되어 버렸고, 광해군5년(1613) 일관 스님과 원준 스님이 주축이 되어 불사가 진행된 이후로 중수와 중건이 계속되어 1713년에 이르러서는 외형적인 불사가 완성을 보게 되었다. 당시 선운사가 가장 번창할 때 89개의 암자와 189개에 이르는 요사가 산중 곳곳에 흩어져 있어 불국토를 이루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 화엄학의 종주 설파상언 스님과 선문의 중흥조 백파긍선, 구한말의 청정율사 영호정호 스님 등이 선운사에서 수행하면서 당대의 불교를 이끌어 온 명문사찰이다.
선운사 경내 및 산내암자인 참당암, 도솔암에는 보물 5점(보물 제290호 선운사대웅보전, 보물 제279호 선운사 관음전 금동지장보살좌상, 보물 제803호 참당암대웅전, 보물 제280호 도솔암 지장보살좌상, 보물 제1200호 도솔암마애불) 및 중요 문화재 11점이 보존되어 있으며, 경내의 동백나무숲(천연기념물 제184호), 장사송(천연기념물 제354호), 송악(천연기념물 제367호)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 선운사 사적기 >>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55호
선운사의 규모와 연혁 등을 살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선운사적(禪雲寺蹟)」, 「참당사사적기(懺堂寺蹟記)」, 「운사고적(雲寺古蹟)」의 3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 선운사적 : 조선 영조22년(1746)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70cm x 47cm 크기에 표지 포함 총 29장이다. 선운사 각 건물의 규모와 전각, 요사에 봉안된 불상, 탱화, 기물, 경전 등의 물목을 기록한 책이다.
- 참당사사적기 : 77cm x 57cm 크기에 표지 포함 총 21장이며, 참당사와 선운사의 사적이 기록되어 있다.
정조18년(1794)에 임상우가 쓴 '도솔산대참사고사'와 '대참사법당기', 숙종39년(1713)에 호월자가 쓴 '대참사사적기', 숙종33년(1707)에 능허후인이 쓴 '선운사창수승적기' 등이 실려 있다.
- 운고사적 : 숙종33년(1713) 능허후인이 쓴 '도솔산선운사창수승적기'와 계사년 5월에 쓴 '사중대종명', 광해군6년(1614)에 쓴 '전각요사창건연대방명열목' 등이 실려 있는 70cm x 47cm 크기의 표지 포함 총 31장이다.
▲ 팔상전 앞에서 바라본 경내 전경
【 선운사의 불전과 문화재들 】
♧ ♧ 선운사 대웅보전(大雄寶殿)
*보물 제290호
선운사의 본전으로 백제 위덕왕24년(577)에 고승 검단선사(또는 신라 진흥왕 때)가 세운 것으로 전하며, 지금의 건물은 조선 성종3년(1472)에 중건하여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광해군5년(1613)에 다시 지은 것이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긴 장방형 평면을 이루고 있으며, 건물 구조의 특징을 보면 측면에는 공포가 없는 대신 기둥 두개를 높이 세워 대들보를 받치도록 하였으며, 전체적으로 기둥 양옆 사이의 간격이 넓고 건물의 앞뒤 너비는 좁아 옆으로 길면서도 안정된 외형을 지니고 있다.
다포계 맞배지붕에 벽의 양 측면에는 풍우를 막기 위해 널판으로 풍판을 대었다.
막돌로 허튼 쌓기를 한 얕은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약한 배흘림이 있는 두리기둥을 세웠다. 정면의 모든 칸에는 빗살 창호를 달았으나 후면에는 중앙 칸에만 창호를 달고 양 측면의 협칸에는 교창을 달았다.
동쪽 면은 모두 벽체로 처리하고 서쪽 면에는 외짝 출입문을 달았다. 내부는 통칸으로서 불벽을 한 줄로 세워 그 앞에 불단을 만들었으며, 불단 위에는 흙으로 빗은 소조 삼세불을 봉안하고 삼존 사이에는 근래에 조성된 보살입상을 협시로 세웠다. 삼존은 중앙의 비로자나불을 주존으로 하여 왼쪽에는 아미타불, 오른쪽에는 약사불을 모셨다. 삼존불상 뒤의 후벽벽화는 숙종14년(1688)에 조성한 것으로, 중앙의 비로자나불회도를 중심으로 좌우에 아미타회상도, 약사회상도가 각각 자리를 잡고 있다.
천장에는 사실감이 돋보이는 커다란 운룡문이 그려져 있고, 안쪽 천장에는 우물 정(井)자 모양을 한 우물천장을 설치하여 구름, 학, 연꽃 등으로 장식하였다. 내부 벽에는 산수, 비천, 나한 등을 벽화로 장식하였고, 닫집과 중앙의 불단 등은 비교적 간략하고 단순한 모습이다.
이 건물은 미술사적으로 조선 중기의 뛰어난 건축기술과 조형미를 지니고 있어 섬세하고 다포의 장식적이다.
♧ 대웅보전 앞 육층석탑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9호
화강암으로 만든 고려시대 석탑이다.
방형의 축대 안에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정사각형의 돌 윗변을 둥글게 처리한 하대석을 얹었다. 그 위에 다시 네 귀가 우주로 조각된 방형의 중석을 세웠다. 갑석은 방형으로 되어 있는데, 아랫면은 수평으로 다듬고 중앙에는 1단의 받침을 새겼으며 윗면은 약간의 경사를 이룬 채 중앙에 1단의 옥신 괴임이 있다.
각 층의 옥신은 하나의 돌로 만들어고 네 귀마다 우주를 조각하였으며, 추녀는 수평을 유지한 채 하늘을 향해 약간 반전되어 있고, 낙수면의 경사는 약간 완만한 편이다.
전체적으로 탑신의 2층 옥신 높이가 급격히 줄어들고 3층 옥개석 역시 2층에 비해 폭이 좁아져 체감률이 심한 편이며, 3층 이상부터는 동일한 체감률로 이루어져 있다. 6층의 옥개석 위에 노방이 있고 노반 위에 복발이 남아 있으며, 그 위에 팔각의 귀꽃으로 각출된 보개를 얹어 놓았다.
사적기에는 조선 성종 때 행호선사가 홀로 우뚝 솟은 이 9층 석탑을 보고 사찰의 중창을 도모하였다고 적고 있어, 현재의 이 탑은 성종 이후 3층이 유실된 것으로 추측된다.
♧ ♧ 선운사 일주문(一柱門)
사찰이 시작되는 것을 알리는 문으로, 부처님을 향한 진리는 하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 ♧ 선운사 천왕문(天王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의 2층 누각 건물이다. 아래 층에는 사천왕상이 있으며, 위층에는 범종과 법고가 있다.
♧ 천왕문 범종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1호
선운사 천왕문 2층에 걸려 있는 조선 후기의 범종이다.
종신의 높이는 103cm, 구경 93cm, 견경 56cm이며 종을 매다는 고리인 용뉴를 포함한 전체의 총 높이는 129cm이다.
이 범종은 한국 범종의 특징인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용통이 없는 대신 윗면에 1개의 구멍을 뚫었고, 용뉴는 2마리 용으로 만들었다. 어깨부분에는 2줄의 선을 둘렀는데 선 안쪽으로 명문을 새겼다.
몸체 중앙에는 3개의 돌출된 선을 둘러 위와 아래로 구분해 놓았고, 윗부분에는 연화당초문대로 사각형 유곽대를 만들었으며, 그 안에 가운데가 돌출된 모양의 유두를 9개씩 두었다.
유곽과 유곽 사이에는 두 손을 마주 잡은 채 서 있는 보살을 양각하고, 머리 위로 8개의 작은 원을 만들어 원 안에 법자를 하나씩 새겨 넣었다.
용추는 머리부분이 외방을 향한 쌍두용을 투각하였고, 복잡한 세부처리는 주조한 다음 동편을 잘라 부착시키는 수법을 사용하였다.
이 범종에 음각된 명문으로 순조18년(1818) 도편수 권동삼과 부편수 이명환에 의해 개주되었으며, 이때 선운사 주지인 처영스님이 도감으로서 주조를 감독하였음을 알 수 있다.
♧ ♧ 만세루(萬歲樓)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53호
대웅보전 앞에 있는 건물로 불법을 배우는 승려들의 강의실이다.
백제 위덕왕24년(577) 선운사 창건 당시 선운사를 짓고 남은 목재를 사용하여 검단선사가 지었다는 설도 있고, 고려시대의 건물이라는 설도 있다. 700여년이나 된 기둥이 남아 있어 옛 자취를 느끼게 하는 건물로 지금의 건물은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19세기 말에 보수된 것이다.
정면 9칸, 측면 2칸의 건물로 넓은 평면에 비해 높이가 낮고 비규격적인 누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정면의 중앙칸은 폭이 390cm로서 양쪽 협칸에 비해 2배 정도 넓다.
자연석 기단에 기둥은 일부 배흘림이 있는 기둥을 사용하였고, 자연목을 껍질만 벗기고 다듬지 않은 채 그대로 사용하여 소박함과 함께 넉넉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중앙칸의 양쪽을 제외하고는 모두 판벽으로 처리하였으며, 내부의 서쪽 앞 두 칸씩은 칸막이로서 2층 구조를 만들어 종각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대들보 위에는 낮은 동자주를 얹었고 기둥 윗부분에는 작은 나무토막들을 포개 쌓았다. 특히 뒷면이 대웅전과 마주보며 개방된 것은 설법을 위한 강당의 기능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전면의 판창을 열면 대웅전의 앞마당에서부터 강당을 포함한 공간이 막힘없이 트이게 되어 통풍과 전망을 아울러 배려하였음을 알 수 있다. 천장은 연등천장이며, 바닥은 우물마루로 하였다. 건물 내부에는 각종 사적기와 현판이 16개나 걸려 있다.
▲ 영산전과 대웅보전
♧ ♧ 선운사 영산전(靈山殿)
대웅보전의 서쪽에 위치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2단의 높은 축대 위에 조성된 영산전의 원래 이름은 장육전(丈六殿)이었다.
1471년 처음 조성될 때는 2층 전각 형태였으나 1614년 중건하면서 단층으로 바뀌었고, 1821년과 1839년에 중수하였다. 장육전이란 이름은 내부에 봉안된 불상이 1장 6척이나 되는 큰 불상이었기 때문이며, 거대한 불상을 봉안하기 위해서 2층의 누각 건물로 조성했던 것이다.
♧ 영산전 목조삼존불상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8호
영산전에 봉안된 목조삼존상으로서, 석가모니 좌상을 주존으로 제화갈라보살과 미륵보살 입상이 양쪽에 협시하고 있다.
석가모니불의 높이는 3m, 협시보살의 높이는 2.4m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이며, 주존은 16각의 난간을 두른 목각연화대좌에 모셔져 있다. 가운데 석가여래좌상은 몸에 비해 머리가 크고 육계가 없으며, 얼굴은 방형에 가깝다. 목부문 아래에 삼도가 좁게 표현되어 있고, 통견납의(通肩衲衣)의 간략한 의습에 가슴 밑 군의상단(裙衣上端)이 직선적이다.
수인은 오른손을 무릎 위에서 손 등을 위로 하여 중지를 무릎에 접하고 있고, 왼손은 손 등을 밑으로 하여 제2지와 무지를 맞대고 있다.
양 협시보살은 화려하게 장식된 보관을 쓰고 손에는 연꽃을 들고 있다. 이 삼존상은 목조불로서는 희귀한 우수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 ♧ 선운사 명부전(冥府殿)
저승의 유명계를 나타낸 전각으로, 원래는 지장보살을 봉안한 지장전과 시왕을 봉안한 시왕전이 별도로 있었던 것을 17세기 이후에 두 전각을 결합하였다.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이 맞배지붕 건물로 공포는 초익공 형식을 사용하였는데 연봉이 달린 쇠서나 봉황두 형태의 초각 등에서 조선 후기의 장식적 경향이 나타난다. 전면의 중앙 3칸에는 분합문을 설치하였으며, 양쪽 협칸은 상단에 띠살 형태의 창, 하단에 판장문 형태로 마감하였다.
♧ ♧ 선운사 산신각(山神閣)
산신각은 영산전 뒤, 팔상전 옆에 위치하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614년에 조성된 이후 여러 번의 중수가 있었다.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부터 전해 오던 토착 신앙이 불교가 도입되면서 서로 융화되어 새롭게 산신신앙으로 등장한 것으로 우리나라에만 나타나는 신앙 형태이다.
▲ 산신각(左)과 팔상전(右)
♧ ♧ 선운사 팔상전(八相殿)
석가모니의 행적 가운데 극적인 여덟 장면을 그림으로 나타낸 팔상탱화를 봉안하는 곳이다.
1706년의 중건 때 함께 봉안한 팔상탱화가 있었으나 현존하지 않고, 현재는 1900년에 새로 조성된 팔상탱화 중 6점이 남아 있다. 석가여래좌상도 근래에 조성한 것이며, 본존 뒤의 후불 벽화 역시 1901년에 조성된 것이다.
♧ ♧ 선운사 관음전(觀音殿) : 현재(2010년 11월) 보수 수리중
대웅보전의 뒷편 동쪽에 위치하고 정면, 측면 각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불전 내부에는 보물 제279호로 지정된 금동지장보살좌상과 최근에 조성한 천수천안관세음보살 탱화, 그리고 오른쪽 벽에는 1991년에 조성한 신중탱화가 있다.
지장보살이 주존불이므로 전각의 이름이 지장전, 또는 명부전이 되어야 하지만 이곳 관음전에는 지장보살을 봉안하고 있다.
♧ 관음전 금동지장보살좌상
*보뭉 제279호
조선 초기의 제작된 금동지장보살좌상으로 높이 1m이다.
머리는 고려시대 지장보살상에서 폭 넓게 나타나는 두건을 쓴 모습이며, 두건을 묶은 띠가 이마를 두른 후 귀를 덮고 양 가슴부분까지 내려와 있다. 풍만한 얼굴에 조그마한 아래턱 주위로 살집이 많은 이중턱을 이루어 후덕한 인상을 주며, 목에는 굵게 주름진 삼도가 표현되어 있다. 하체는 무릎 높이가 낮아서 상체에 비해 빈약한 편이고, 결가부좌한 다리는 옷에 덮혀 있어 보이지 않는다.
오른손은 어깨 높이까지 들어서 엄지와 넷째 손가락을 맞댄 듯 굽혔고, 왼손은 아랫배에 붙여서 엄지와 중지를 약간 구부렸는데 비교적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어깨에서 끈으로 매듭지은 독특한 치레장식이 특징인데, 이는 고승의 진영이나 불.보살상에서 보이는 형식이기도 하다.
겉옷 안에는 수평으로 가로질러 가슴까지 올라온 군의를 띠매듭으로 단정하게 동여매었다.
이 보살상은 선운사 도솔암에 봉안되어 있는 고려 후기의 선운사지장보살좌상(보물 제280호)과 목걸이 장식이나 밋밋한 가슴표현 등이 유사하지만, 머리가 크고 하체가 빈약하여 신체 비례가 부자연스러운 점, 목이 짧고 어깨가 올라가 움추린 듯한 자세, 간략한 장식과 형식적인 옷주름 등은 고려 보살상의 양식에서 벗어난 것으로 조선 초기의 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선운사지장보살좌상과 함께 그 예가 드문 지장보살상의 하나로, 조선시대 지장신앙의 양상을 보여주는 귀중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지장보살상은 일제강점기에 도난을 당한적이 있는데, 이때 영험함을 보인 사실로 인해 더욱 널리 추앙받고 있다. 1936년 일본인 2명과 한국인 1명이 공모하여 보살상을 훔친 후, 거금으로 매매되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다. 그런데 이때부터 지장보살상이 영이를 나타내기 시작하여, 소장자의 꿈에 수시로 나타나서 "나는 본래 전라도 고창 도솔산에 있었다. 어서 그곳으로 돌려 보내달라"고 하였다. 소장자는 다소 이상한 꿈으로만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이후로 병이 들고 가세가 점점 기울게 되자 꺼림직한 마음에 보살상을 다른 이에게 넘겨 버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지장보살이 소장자의 꿈에 나타났으나 그 역시 이를 무시하였고, 집안에 우환이 끊이지 않게 되자 다시 다른 이에게 넘기게 되었다. 그후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면서 이 보살상을 소장한 사람들이 겪은 일들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마지막으로 소장하게 된 사람이 이러한 사실을 고창경찰서에 신고하여 모셔갈 것을 부탁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당시 선운사 스님과 경찰들이 일본 히로시마로 가서 모셔오게 되었는데, 이때가 도난당한 지 2년여 만인 1938년 11월이었다.
당시 잃어버린 보살상을 다시 모시고 온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찍은 사진에도 사건에 대한 개요가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당시 주지는 '이우운'으로 기재되어 있다.
♧ 선운사 석씨원류 목판(釋氏原流 木板)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4호
조선 인조26년(1648)에 새긴 가로 39cm, 세로 29.5cm의 목판본으로, 선운사 관음전에 봉안되어 있다.
원래 103매의 목판으로 판각되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절반 가량이 망실되고, 50매 100판의 원본과 별도의 2매 4판만이 남아 전해지고 있다.
'석씨원류'란 설가모니의 일대기와 석가모니 이후 서역 및 중국에서 불법이 전파된 사실을 기술한 것이다.
선운사 목판은 망실 부분이 많아서 편집 내용을 확실히 알 수 없으나, 현종14년(1673)에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불암사에서 새긴 '석씨원류' 목판(보물 제591호, 목판 212장,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보관)이 현재까지 완질로 남아 있고 간행시기도 비슷하여, 유포 당시의 간행내력과 편집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선운사판 '석씨원류'는 명나라 헌종황제의 '어제석씨원류서'가 실리고 이어 하호연이 지은 '석씨원류서'가 실려 있다. 하호연의 서에 의하면, 이 책은 사명대사가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구해온 것을 인조26년(1648)에 최서용, 해운법사 등이 간행한 것으로 불암사 판보다 25년이나 앞선다.
책의 편제는 글의 위쪽에 그림을 배치하여 책의 내용을 알기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는 불암사판 등의 책이 왼쪽 면에 글을 싣고 오른쪽 면에 그림을 두어 한 항목이 2면을 차지한 양식에 비해 한 항목의 도설이 1면에서 모두 끝나게 하는 편제를 지니고 있다.
이 책은 우리나라 목판인쇄사에서 새로운 편제의 도설판형을 채택하여 방대한 양의 서책을 간행함으로써 판식과 판화의 역사를 가늠하게 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 조사전
▲ 범종각
▲ 영산전 앞마당 좌측 담장옆의 약수터
▲ 성보박물관
선운사 단풍을 감상하기 위한 탐방이고, 문수사와 무장현 관아와 읍성을 먼저 탐방한 다음 방문한 탐방지라 시간적 여유가 없어 선운사 경내에 있는 동백나무숲을 제외하고 선운사 주변의 천연기념물과 선운사 산내암자인 참당암과 도솔암을 방문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다음 '고인돌.질마재따라 100리길' 문화생태탐방로 탐방 때 선운산도립공원 내에 위치한 이번에 방문치 못하였던 곳들을 탐방할 수가 있어 미리 탐방지의 내용들을 예습한다는 차원에서 미리 정리를 해 보기로 한다.
물론 다음에 탐방을 마치고 보다 자세한 내용들을 정리하여 게제를 다시 하겠지만...
【 선운사 주변의 천연기념물 】
♧ 선운사 동백나무숲
*천연기념물 제184호
이 동백나무숲은 백제 위덕왕24년(577) 선운사가 세워진 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나무의 평균 높이는 약 6m이고, 둘레는 30cm로서, 선운사 대웅보전 뒷쪽 비스듬한 산 사면 아래 30m 넓이의 가느다란 띠 모양으로 조성되어 있다.
동백나무는 차나무과에 속하는 나무로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일본, 중국 등의 띠뜻한 지방에 분포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남쪽 해안이나 섬에서 자란다. 꽃은 이른 봄에 피는데 매우 아름다우며, 꽃이 피는 시기에 따라 춘백, 추백, 동백으로 부른다. 이 동백나무숲은 아름다운 사찰 경관을 돋보이게 하고 있으며, 사찰림으로서 문화적 가치와 동백나무숲으로서 생물학적 보존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 장사송
*천연기념물 제354호
선운사에서 도솔암을 올라가는 길가의 진흥굴 바로 앞에서 자라고 있다.
수령은 6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23m, 둘레는 2.95m이다. 높이 2m 정도에서 줄기가 크게 둘로 갈라져 있고, 그 위에서 다시 여러 갈래로 갈라져 부채살처럼 퍼져 있다.
고창사람들은 이 나무를 '장사송' 또는 '진흥송'이라고 하는데, 장사송은 이 지역의 옛 이름이 장사현이었던데에서 유래한 것이며, 진흥송은 진흥굴 앞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나무의 모양이 아름답고 생육상태가 양호하여 보기 드물데 오래된 소나무로서 보존가치가 인정되어 천연기념물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 송악
*천연기념물 제367호
절벽 아래쪽에 뿌리를 박고 절벽을 온통 뒤덮은 채 뻗어 올라 자라는데, 정확한 수령은 알 수 없으나 보기 드물 정도의 크기로 보아 600여년 정도로 추정된다.
높이 23m, 가슴높이 둘레 2.95m이고, 가지의 길이는 동서 16.8m, 남북 16.7m이다.
송악은 두릅나무과에 속하는 늘 푸른 덩굴식물로, 줄기에서 뿌리가 나와 암석 또는 다른 나무 위에 붙어 자라며 어두운 곳을 좋아한다. 잎은 광택이 있는 진한 녹색이고, 꽃은 10월에 녹색으로 피며, 열매는 다음해 5월에 둥글고 검게 익는다.
우리나라에서는 서남해안 및 섬지방의 숲 속에서 주로 자라고 있다. 고창 삼인리는 송악이 내륙에서 자랄 수 있는 북방한계선에 가까우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 선운사의 산내 암자들 】
♧ ♧ 참당암
선운사의 암자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녔으며, 지금은 산내암자로 사격(寺格)이 위축되었지만 본래 참당사 또는 대참사(大懺寺)로 불리었던 거찰(巨刹)이었다. 삼국시대 의운(義雲)스님에 의해 설립되었는데, 창건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한다.
의운스님이 도솔산 법화굴(法花窟)에 살고 있을 때 산 아래 죽포 포구에 돌배 한척이 들어왔다. 이 배는 속인들이 보려고 다가가면 바다로 멀어지곤 하다가, 의운스님이 제자들을 이끌고 포구로 나가서야 저절로 다가왔다. 이윽고 배에서 노를 젓던 한 금인(金人)이 나타나 여러 불상과 경전과 보인(寶印)을 스님에게 전해주고 떠났다. 그날 밤 스님의 꿈에 금인이 나타나서 "나는 우전국의 왕인데 불상을 모신 곳을 찾아 해동의 여러 산천을 두루 돌아다니넌 중, 도솔사에 대참(大懺)의 신령스러운 기운이 서린 것을 보고 이 곳으로 왔으니, 청컨대 집을 짓고 편안히 모시도록 하시오"라고 당부하였다.
이에 스님은 산 가운데 터를 잡고 진흥왕의 도움으로 절을 세우고 '대참사'라 하였으니, 이때는 581년(백제 위덕왕 28)이었다. 이 절이 삼국시대 의운스님이 세운 것이라 하더라도, 당시 이곳은 신라와 세력다툼이 치열했던 백제의 영토였기 때문에 신라의 진흥왕이 시주한 것은 후일에 첨가된 내용일 가능성이 크다.
창건 이후의 역사는 전하지 않고 고려시대에 1328년(충숙왕 15)부터 이듬해까지 중수가 있었으며, 1346년(충목왕 2)부터 1398년(태조 7)까지 약 52년에 걸쳐 점찰신앙(点察信仰) 법회가 개설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여러 차례의 중건이 있었는데 먼저 1530년(중종 25)에 재중수하였고, 이어서 1614년(광해군 6), 병자호란 뒤인 1642년(인조 20), 1794년(정조 18)등 4차에 걸친 중수가 있었다. 당시는 법당 동쪽에 승당, 서쪽에 미륵전, 위로는 약사전, 아래로는 명부전등 여러 전각을 갖추어 조선 후기까지만 해도 독립된 사찰로서 번성하였으나, 성종대(1469~1494)이후 선운사가 산중의 중심도량이 되면서 상대적으로 차츰 사세가 약화되었다. 현재 참당암의 전각은 대웅전과 약사전(藥師殿)·응진전(應眞殿)·명부전(冥府殿)·도솔선원 ·요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참당암 대웅전은 보물 제803호이며, 약사전에 봉안되어있는 약사여래불상(실제로는 지장보살상으로 보아야 함)과 참당암 동종은 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 참당암 대웅전
선운사 산내암자 참당암의 중심건물로서 신라시대 의운화상(義雲和尙)이 창건하였다는 기록이 전하며, 그 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현존하는 건물은 조선시대의 것이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매 칸마다 4분합문을 달았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고, 지붕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다포양식의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다.
앞면에 짜인 공포는 전형적인 18세기 다포양식인 반면 뒷면 공포는 굽면이 곡선이다.
석가여래를 본존으로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이 협시한 삼존불을 봉안하고 있으며, 1900년에 후불탱화로서 영산회상도를 조성하였다.
이 건물은 여러 차례의 중수가 있었음에도 여전히 고려시대 건축 부재(部材)의 양식을 지니고 있어 이채로우며, 조선 후기의 빼어난 건축미를 지니고 있다.
♧ 참당암 지장보살
참당암의 약사전(藥師殿)에 봉안되어 있는 납석제(臘石製)의 좌상으로서 높이 80㎝, 무릎폭 50㎝이다.
이 존상은 머리에 두건을 쓰고 이마에 테를 두르고 있는 점, 두건의 아랫자락이 어깨를 덮고 있는 점, 가슴에 늘어뜨린 목걸이 장식이나 두터운 귀 부분 등이 선운사 금동보살좌상과 흡사하다. 다만 수인(手印)이 금동보살좌상처럼 사실적이지 못하며, 두껍고 높은 무릎에 표현된 옷주름 등이 선운사 금동지장보살상의 형식을 따르고 있으나 더욱 간략화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수인은 이례적으로 왼손이 무릎 위에서 촉지인(觸地印)을 짓고 있으며, 오른손은 가슴 앞에 두고 엄지와 검지 사이에 보주(寶珠)를 들고 있다. 이러한 납석제좌상은 그 크기나 상호ㆍ의관 등이 금동보살좌상과 공통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오른손에 얼핏 보아 약함인 듯한 지물을 들고 있어 '약사여래'라는 명칭이 붙여진 듯하나, 여래상에는 두건이 아닌 육계가 있어야 하고 보배영락을 장식하는 경우가 거의 없으므로 여래상이 아닌 보살상으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이 상의 명칭은 약사여래불상이 아닌 지장보살좌상(地藏菩薩坐像)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 참당암 동종
조선 정조 12년(1788)에 조성된 범종으로 선운사 참당암 대웅전 안에 있다. 총 높이는 100㎝, 구경 50㎝, 복경(腹經) 60㎝, 구연(口緣) 두께 4.4㎝의 전형적인 조선시대 범종이다.
종신(鐘身)에는 사방에 보살입상이 있는데, 섬세하고 우아한 선으로 표현되어 있다. 보살상 사이마다 유곽(乳郭)을 양각하였으며, 넓은 유곽 안에는 굵은 거치문대(鋸齒文帶)를 새겼다.
종의 어깨 부분에는 12개의 원권(圓圈)을 두르고 각 원권 안에 범자(梵字) 1자씩을 양각하였다. 보살입상 외곽하연(外郭下緣)에 접하여 돌대(突帶)를 두르고, 구연(口緣)과의 중간에는 한줄기의 돌대가 있는데, 이 양 돌대 안에는 명문판(銘文板)이 불규칙하게 주조되어 명문ㆍ시주명 등이 음각되어 있다.
구연대(口緣帶)는 넓은 평면돌대 위에 유곽과 동일한 거치문대를 두르고 있으며, 용뉴는 빈약한 용체의 쌍룡이 꼬리를 맞댄 채 사지를 딛고 웅크리고 있는 형상이다.
명문에 따르면 이 종은 정조 12년에 내원암 중종으로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내원암은 현재 내원골에 터만 남아 있다.
♧ ♧ 도솔암
도솔암의 정확한 창건사실은 알 수 없으나, 사적기에는 선운사와 함께 백제 때 창건되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이에 따르면 신라 진흥왕이 만년에 왕위를 버리고 도솔산의 한 굴에서 머물고 있었는데, 어느날 밤 바위가 쪼개지며 그 속에서 미륵삼존불이 출현하는 꿈을 꾸고 이에 감응하여 중애사.선운사.도솔사등 여러 사암을 창건하였다는 것이다. 당시 백제의 영토였던 이 곳에 신라왕이 머물렀을 가능성은 희박하여 창건사항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미륵삼존의 출현이나 ‘도솔(兜率)’이라는 이름 등은 도솔암이 미륵신앙의 배경하에 창건된 사찰임을 알 수 있다.
특히 도솔암 서편의 거대한 암벽에 새겨진 마애불좌상(磨崖佛坐像)은 고려 초기의 마애불 계통 불상으로 크게 주목받고 있는데, 사람들이 이 마애불을 ‘미륵불’이라 부르고 있었던 데서도 도솔암과 미륵신앙의 깊은 관련성을 잘 말해주고 있다. 마애불좌상이 조성된 이래 이불상의 배꼽에는 신기한 비결(秘訣)이 숨겨져 있다는 전설이 전하여, 동학농민전쟁 무렵에는 동학의 주도세력들이 현세를 구원해줄 미륵의 출현을 내세워 민심을 모으기 위해 이 비기를 꺼내가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발굴조사에 따르면 이 곳에서 출토된 기와에 ‘도솔산 중사(兜率山仲寺)’라는 명문이 있어 당시에는 절이름을 중사라고도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에 들어오면 도솔암은 상도솔암 하도솔암 북도솔암 등 세 암자로 나뉘어져 독자적인 이름을 갖게 된다. 상도솔암은 지금의 도솔천내원궁으로서 1511년 지은(智誾) 스님이 중창한 뒤 1694.1829년에 각각 중수하고 1705년에 중종을 봉안하였는데, 조선 말 이후 내원궁만 남기고 퇴락하였다.
하도솔암은 현재 마애불상이 있는 곳으로서 1658년에 해인(海印)스님이 창건하였으며, 북도솔암은 지금의 대웅전이 있는 자리로서 1703년(숙종 29)에 최태신이 창건하였다. 이처럼 각기 독자적인 암자였던 것이 근세와 와서 북도솔암을 중심으로 하나의 암자로 통합된 것이다. 현재 도솔암의 전각은 대웅전 나한전 도솔천내원궁 요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도솔암내원궁에는 보물 제280호인 지장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마애불좌상은 보물 제 1200호, 나한전과 내원궁은 각각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 도솔암 내원궁
험준한 바위 위에 세운 법당으로 상도솔암(上兜率庵)이라고도 한다.
조선 중종 6년(1511)에 중창하고, 숙종 20년(1694)에 3창(三創), 순조 17년(1817)에 4창(四創)하였다. 거대한 바위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기단 없이 편편한 곳에 자리를 잡아 원형초석만 두었는데, 기단이 없어 건물이 낮아지므로 하인방(下引枋)의 높이만큼 되는 장초석(長礎石)을 사용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에 기둥은 두리기둥을 사용하였고, 벽선에 아자형(亞字形) 2분합문(分閤門)을 달았다.
천장의 구조는 우물천장이며, 건물의 규모는 작지만 겹처마에 8작지붕을 올려 안정된 느낌을 주고 있다.
이 내원궁에는 금동지장보살좌상(보물 제280호)을 봉안하고 있다.
♧ 도솔암 지장보살좌상
선운사 도솔암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 봉안되어 있는 고려 후기의 금동지장보살좌상으로 높이는 96.9㎝이다.
대좌(臺座)와 광배(光背)가 모두 없어지고 불신(佛身)만 완전하게 남아 있는데, 상체가 늘씬하고 당당하여 고려 후기의 장곡사금동약사여래좌상(보물 제337호)이나 문수사금동불좌상과 흡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길상좌(吉祥坐)를 한 탄력적인 하체나 부드럽고 단아한 어깨선, 상ㆍ하체의 비례 등이 전체적으로 균형잡힌 형태를 지니고 있다. 머리에는 두건을 썼는데, 이마를 감싼 후 귀 뒤로 넘겨서 어깨까지 천을 늘어뜨린 모습이다.
이러한 형태의 두건을 쓴 지장보살〔被巾地藏〕의 모습은 고려시대에 널리 유행하였던 도상적 특징으로, 현존하는 많은 고려불화에서 그 예를 살펴볼 수 있다. 얼굴은 둥글고 단아한 인상을 주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이목구비 등을 세부적으로 꼼꼼하게 표현하였다. 양 귀에는 만개한 화문(花紋)을 띠로 연결하여 귓불에 묶은 이식(耳飾)을 착용하고 있어,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보살상이 원형 고리를 길게 늘어뜨려 매달고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른 특이한 형태라 하겠다.
오른손은 가슴 부분에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댄 중품인(中品印)을 취하고 왼손은 가슴과 배 중간쯤에 들어 법륜(法輪)을 잡고 있는데, 이는 육도중생을 구제한다는 의미로서 보주(寶珠)ㆍ석장(錫杖)ㆍ법륜 등의 지물을 들고 있는 지장보살의 일반적인 특성을 표현한 것이다. 앉은 자세는 오른발을 왼 무릎에 올린 모양으로 발을 실감나게 표현하였다. 어깨나 소매ㆍ무릎 등에 몇 가닥의 간단한 주름만을 표현하여, 상에 나타난 선묘는 유려하게 휘어지는 맛과 함께 단순ㆍ명쾌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 보살상은 고려 후기의 불상양식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우아하고 세련된 당대 최고의 걸작이라 할 수 있다.
♧ 도솔암 마애불
*보물 제1200호
도솔암의 서편 암벽 칠송대(七松臺)에 새겨진 높이 13m, 너비 3m에 이르는 거대한 마애불상이다. 전설에 의하면 백제 위덕왕(재위 554∼597년)이 검단선사(黔丹禪師)에게 부탁하여 암벽에 불상(마애불)을 조각하고 동불암이라는 공중누각을 짓게 하였는데, 조선 영조 때 무너졌다고 한다. 불상은 낮은 부조로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이며, 머리에는 뾰족한 육계가 있다.
방형(方形)에 가까운 평면적인 얼굴에 눈은 가늘고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으며, 우뚝 솟은 코에 앞으로 내민 일자형의 두툼한 입술이 소박하고 익살스러운 미소를 띤 것처럼 보인다. 귀는 어깨에 닿을 정도로 길게 늘어져 있고, 목은 표현하지 않아서 상체 위에 머리를 올려놓은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상체는 방형에 가슴이 넓고 평면적이며, 결가부좌한 넓은 하체에 손과 발 역시 체구에 비해 큼직큼직하다. 투박한 두 손은 활짝 편 채 아랫배에 가지런히 붙여져 있다.
불의(佛衣)는 통견(通肩)으로 두꺼운 편은 아니나 옷주름선이 선각으로 형식화되어 있고, 평평한 가슴 아래로 선명하고 단정한 군의(裙衣)의 띠매듭이 가로질러 새겨져 있다.
대좌는 비교적 높은 2단으로 되어 있는데, 상대(上臺)에는 옷자락이 늘어져 덮여 있고 하대(下臺)는 간략한 연꽃무늬의 연화좌로서 전반적으로 마멸이 심한 편이다.
광배는 표현되지 않았고, 가슴에는 사각형으로 큼직하게 복장(腹藏)구멍을 나타내었다. 머리 위에는 사각형의 구멍이 여러 개 뚫려 있고 부러진 서까래가 꽂혀 있는 것도 있는데, 이는 불상을 보호하기 위해 지붕만 있는 누각 형태의 목조 전실(前室)을 마련하였던 흔적으로 보인다.
이 불상은 고려 초기의 거대한 마애불 계통 불상으로 크게 주목받고 있다. 사람들은 이 마애불을 미륵불이라 부르고 있는데 불상의 배꼽에 신기한 비결(秘訣)이 숨겨져 있다는 전설이 전하여, 동학농민전쟁 무렵에 동학의 주도세력들이 미륵의 출현을 내세워 민심을 모으기 위해 이 비기를 꺼내가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 도솔암 나한전
선운사의 산내암자인 도솔암에 있는 법당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에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현존하는 건물은 건축수법으로 보아 조선 말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나한전 내부에는 흙으로 빚은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가섭과 아난이 협시하였고, 1910년 용문암에서 옮겨온 16나한상을 모시고 있다.
도솔암은 선운사의 산내암자로서 대웅전 서쪽 15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으며, 원래는 여섯 도솔암이 있었으나 현재는 상하 2개의 도솔암만 남아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조선시대 도솔암 용문굴에 이무기가 살면서 주민들을 괴롭혔는데, 이를 쫓아내기 위해 인도에서 나한상(羅漢像)을 모셔와 이곳에 안치하자 이무기가 사라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무기가 다시 나타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이무기가 뚫고 간 바위 위에 나한전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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