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보 여행/강화 나들길

강화나들길 제14코스(강화도령 첫사랑길)

왕마구리 2012. 10. 22. 23:02

◀ 강화나들길 제14코스(강화도령 첫사랑길) ▶ 

 원범(철종)의 강화도 처녀 봉이와의 이루지 못한

첫 사랑의 흔적을 찾아가는 도보여행길!!!

                 ▲ 강화산성 남장대에서 바라본 보수중인 남문 방향의 성곽과 김포 문수산, 그리고 강화 일대 전경

 

【  걷기일자 】 2012년 10월 14일(일)

【  걷기코스 】영흥궁→48번국도→합일초등학교→산길입구→약사사입구→청하약수터→치성터→강화산성 암문→국화리공동묘지 갈림길↔강화산성 남장대→남산유스호스텔→2차선포장도로→선행천 둑방길→성산청소년수련원 입구 사거리/나무들의 집→산길입구→공동묘지→2차선포장도로→찬우물약수터→84번지방도→소나무숲→전주이씨묘→양봉장→2차선포장도로/신원초교→'햇님'공장-(철존외가길44번길)→철종외가

【 코스거리 】 약 11.70km

▷ 강화나들길 제14코스 '강화도령 첫사랑길' 각 구간별 거리(강화나들길 리플렛) :

     용흥궁-(2.2km)→청하(남산)약수터-(1.0km)→강화산성 남장대-(5.4km)→찬우물약수터-(3.1km)→철종외가

 

 

【 소요시간 】 총  5시간 11분 소요(휴식, 문화재 탐방 및 중식 : 1시간 44분 포함)/실제 걷기 시간 : 3시간 27분 소요

【 날     씨 】 맑 음

【 교 통 편 】 승용차 이용

【 코스탐방 】

강화도 내에 조성된 강화나들길이 오늘 현재 총 14개 코스가 완료되어 있는데, 지난 2011년 5월 교동도에 조성된 강화나들길 제9코스인 교동도1코스 '다음새길'를 탐방한 이후 추가로 5개 코스가 더 개발되어 개통된 상태이다.

새로 개통된 코스는

강화나들길 제10코스 : 교동도2코스 '머르메길'(17.2km)

강화나들길 제11코스 : 석모코스 '바람길/보문사가는길'(16km)

강화나들길 제12코스 : 서도코스 '주문도길'(11.3km)

강화나들길 제13코스 : 서도코스 '볼음도길'(13.6km)

강호나들길 제14코스 : '강화도령 첫사랑길'(11.7km)

인데 5개 코스 중 제10코스~제13코스까지 4개 코스는 강화도 부속 섬들에 위치해 있다.

이 중 제12코스와 제13코스는 뱃길로 1시간30여분 떨어져 있으며 외포리에서 하루 2차례만 왕복(외포리 출발 : 09시와 16시/주문도 출발 : 07시와 14시) 운행하는 배편으로 약 3시간 정도가 소요되는 코스를 당일 탐방으로 마치고 돌아오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는 곳이다.

그리고 1박2일의 계획으로 탐방을 하더라도 현지의 숙박시설 등의 정보가 없어 무작정 떠나고 보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곳이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서도코스를 탐방할 수 있도록 배 운행시간을 조정하여 첫 배를 타고 들어가 주문도나 볼음도에 최소 5시간 정도의 체류가 가능하도록 조정되어야 제대로 주변의 경치를 감상하며 도보여행을 즐길 수 있어 누구나 손쉽게 찾을 수가 있을 것 같다.(예를 들어 외포리 9시 출항→주문도 도착 10:30→주문도 출항 15:30 또는 16:00)

 

   

                 ▲ 강화나들길의 길잡이인 표식기와 방향표지판들

 

어쩔 수 없이 오늘은 계획없이 늦은 시간에 강화에 도착한 관계로 강화도 부속 섬들에 조성된 강화나들길 탐방을 포기하고 강화읍에서 출발하는 제14코스 '강화도령 첫사랑길'을 탐방하기로 한다.

 

옛 직물공장(심도직물)부지에 조성된 용흥궁공원에 주차를 하고, 주차장 우측 끝 강화성당 정문과 마주하고 있는 용흥궁 후문이 보이는 곳에 '강화도령 첫사랑길' 안내도와 강화나들길 제1코스 '심도역사문화길(강화버스터미널~갑곶돈대)' 안내도가 있다. 제1코스 탐방 때 방문하였던 주차장 위로 보이는 사적 제45호인 성공회 강화성당을 다시 찾아가 본다.

 

 

 

                 ▲ 용흥궁공원의 강화둘레길 제1코스 '심도역사문화길'과 제14코스 '강화도령 첫사랑길'의 안내도(사진 上)

                    용흥궁공원에서 바라본 성공회 강화성당(사진 下)

 

♧ 성공회강화성당(聖公會江華聖堂)

*사적 제424호(2001년01월04일 지정)

*소재지: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길22(관청리)

 

 

1900년 11월 15일에 준공된 한국 최초의 성공회 성당으로 '성베드로와 바올로 성당'이라고도 하며,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소속 성당이다. 강화군 강화읍에 있기 때문에 강화성당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현존하는 한옥 교회 건물로서는 가장 오래 된 것이다.

고종33년(1896) 강화에서 처음으로 한국인이 세례를 받은 것을 계기로, 사찰 양식을 본 떠 찰스 종 코프(Bishop Charles John Corfe 한국명:고요한) 초대 주교가 건립한 한식 중층건물이다. 이 성당은 서양의 바실리카식 교회건축 공간구성을 따르고 있으며, 가구 구조는 한식 목구조와 기와지붕으로 되어 있는 점이 특징이다.

 

                 ▲ 성공회 강화성당의 외삼문

 

강화성당은 입구 계단, 외삼문과 내삼문, 성당 건물, 사제관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외삼문은 솟을대문에 팔작지붕으로, 현판에는 성공회강화성당이라는 한문이 쓰여져 있다. 동쪽에 초대 사제의 묘비가 서 있고, 내삼문은 평대문에 팔작지붕으로 서쪽 칸은 종각으로 쓰여 감사성찬례때 사용하는 종이 걸려 있다.

성당의 현판에는 '천주성전'이라는 글이 한문으로 써져있고 팔작지붕과 돌로 되어 있는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내외부는 서양식 장식이 거의없는 한옥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정면 4칸, 측면 10칸의 바실리카식 평면구성으로, 내부공간은 교회기능에 충실하도록 연출하였다. 초기 성공회 선교사들의 토착화 의지가 나타나 있는 성당건물이다.

한국인으로서 1915년 첫 성공회 사제가 된 김희준 신부를 배출하였으며, 당시 한글로 기록된 사제 서품장은 예배당 내에 보존되어 있다.

2009년에는 사회에 불만이 있는 30대 남성에 의해 방화가 시도 되었으나 감시원에 의해 발각되어서 화재를 면한 사건이 발생하였었다.

 

강화성당을 잠시 둘러보고 길 건너 아래에 있는 용흥궁에서 오늘의 나들길 탐방을 시작한다.

 

12:34=>용흥궁

     조선 제25대 왕인 철종(1831~1863, 재위 1849~1863)이 왕위에 오르기 전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되었다가 강화로 옮겨져 살던 잠저로 왕위에 오르자 철종4년(1853)년 강화유수가 새로 지은 용흥궁은 강화나들길 제1코스 '심도역사문화길(강화터미널~갑곶돈대)'의 경유지이며, 제14코스 '강화도령 첫사랑길'의 출발지이기도 하다.

 

♧ 용흥궁(龍興宮)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0호(지정일:1995년03월01일)

*소재지: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441번지

조선 제25대 왕인 철종(재위:1849~1863)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전 집으로 철종이 왕위에 오르자 강화유수 정세기가 철종4년(1853) 건물을 새로 짓고 용흥궁이라 이름하였다.

 

 

 

                 ▲ 용흥궁 외전

 

지금 남아있는 건물은 정면 8칸의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자붕에, 지붕을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에서만 있는 주심포 양식을 취한 외전(사랑채),

 

                 ▲ 용흥궁 내전

 

정면 7칸의 맞배지붕인 내전(안채), 그리고 별전 등이 있다.

 

 

                 ▲ 철종의 잠저였음을 기록한 용흥궁의 비각과 비석

 

그리고 철종이 살았던 옛 집임을 표시하는 비석과 비각이 있다.

용흥궁은 창덕궁의 연경당, 낙선재와 같이 살림집의 유형을 따라 지어진 소박하고 순수한 느낌을 준다.

 

오늘 걷게 되는 길이 왕위에 오르기 전 강화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던 강화도령 원범과 강화도 처녀 봉이(양순이)와 나누었던 풋풋한 사랑의 흔적을 찾아가는 '강화도령 첫사랑길'이라, 그 주인공인 강화도령 '철종'의 드라마틱한 삶을 먼저 알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 철종(哲宗, 1831~1863, 재위:1849~1863)

조선 제25대 왕.

이름은 변, 초명은 원범, 자는 도승, 호는 대용재이다.

사도세자 후궁 소생 양재 임씨 소생으로 정조의 이복아우인 은언군 인의 손자로 전계대원군 광과 융성대부인 염씨 사이에서 삼현제의 막내로 1831년 경행방 사제에서 삼형제의 막내로 태어났다.

철종의 기구한 삶의 뿌리는 할아버지인 은언군 때부터 시작되는데, 은언군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참한 죽음으로 어머니인 숙빈 임씨와 함께 궁에서 쫓겨나 가난하게 살다가 간신히 군호를 받고 형편이 나아질 무렵 정조가 세손으로 책봉되자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세력들이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 지기들의 위치가 위험해질 것이라 염려되어 새 왕자를 추대하여는 음모를 꾸미게 되는데, 이 일이 발각되어 정조의 이복동생인 막내이들 은전군은 자결하고 은신군과 함께 제주도로 귀양을 가게 되며, 은신군은 제주도에서 병사하고 은언군은 강화도로 유배지를 옮긴다.

은언군 인은 아들을 셋 두었는데, 정조 즉위 일등공신 홍국영이 정조3년(1779) 은언군의 큰 아들 상계군 담을 자기 조카로 삼아 보위를 잇게 하려는 야심을 품다 제거되어 큰아들 상계군 담은 모반죄로 몰려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자살하는 등 위기를 맞았고, 다시 구선복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강화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

정조가 죽고 순조가 죽위하여 순조1년(1801) 천주교 박해사건인 신유대박해가 일어나자 부인 송씨와 큰며느리 신씨가 천주교 신자임이 밝혀져 두 여인과 철종의 할아바지인 은언군 인이 마침내 사사되게 된다. 이 때 은언군의 남은 유일한 아들이 철종의 아버지인 전계대원군 광이다.

얼마 후 유배에서 풀린 전계대원군 이광은 한양으로 이주하여 융성대부인 염씨와 결혼을 하여 세 아들을 두게 되는데, 헌종10년(1844) 민진용이 은언군의 아들(철종의 아버지)과 은언군의 손자 원경의 신임을 받고 있는 이원덕을 포섭하여 은언군의 손자이자 이광의 아들인 원경을 왕으로 추대하려 모의를 꾸미는 역모사건이 발각되어 관련자 모두가 능지처첨을 당하는 '민진용의 옥'이 일어난다. 이에 연루된 전계대원군 이광의 첫째아들 원경이 사사되고, 둘째아들 경응과 함께 교동으로 유배되었다가 곧 강화로 옮겨져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하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이 때 강화 처녀 봉이(양순이)라는 처녀와 연애를 하게 된다.

1848년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헌종의 6촌 이내에 드는 왕족이 없어, 헌종의 7촌 아저씨벌이 되는 영조의 유일한 혈손인 그는 순조비인 순원왕후의 명으로 궁에 들어가 덕완군에 봉해지고 왕위에 올랐다. 여기서 의문이 남는 것은 둘째아들 경응을 제치고 셋째인 원범이 왕위에 오르게 된 내력인데, 남아있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 알 수는 없지만 둘째 경응은 아마조 강화도에서 병사한 것으로 추측이 된다.

즉위후에는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했으며, 철종2년(1851) 감조순의 7촌 조카인 김문근의 딸을 왕비(철인왕후)로 맞아들인 뒤로는 국구가 된 김문근이 장악하여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계속되었다.

그런데 안동김씨 가문의 왕비가 불편해할 것을 알고 미리 철종의 연인이었던 강화 처녀 봉이(양순이)는 그들에 의해 비명 횡사를 하게 된다.

1852년부터 왕의 친정이 시작되되어 경험이 쌓이면서 1859년부터 관리들의 부정을 공격하는 등 비교적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했다. 1861년에는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훈련도감의 마보군과 별기군의 군사를 이용하여 궁궐의 숙위를 강화하려 했다. 그라나 세도정치의 폐단으로 봉건적인 통치기반이 무너지고 삼정(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이 더욱 심해져 백성들의 생활은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1862년 진주 당성지방을 시작으로 삼남지방 곳곳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나, 철종은 봉기발생지역의 수령과 관속을 처벌하여 흐트러진 봉건기강을 확립하는 한편, 농민의 요구조건을 일부 수렴함으로써 민심을 수습하려고 했다. 농민 봉기가 잠시 가라앉은 5월 이후에는 삼정이정청을 설립해 삼정의 개혁을 공포하고 재야 유생층과 관료들에게 개혁책을 모집했다. 이때 마련된 삼정의 정책은 주로 삼정운영의 개선에 초점을 두었으며, 법정 세액 이외의 각종 부가세를 일체 혁파하고 도결이나 방결을 폐지하고 환곡의 경우 토지세로 전환시키는 등 조세개혁의 원칙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후속조치가 취해지지 않는 가운데 지배층의 이해관계가 얽혀 삼정이정책은 시행되지 못했다.

당시 사회의 혼란을 종교적으로 구제하여는 동학이 창시되어 새로운 세력으로 확대되자 이를 탄압하고 교주 최제우를 '혹세무민'이라는 죄를 씌워 체포했다.

철종은 대왕대비의 선택에 의하여 불시에 왕위에 올랐으며, 대왕대비의 친정인 김조순 가문이 경쟁세력을 도태시키면서 전보다 강화된 독점권력을 누리는 시기에 재위하여 세도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치를 바로잡지 못했다.

자식들은 유난히 단명을 한다.

철인왕후 김씨와에 아들을 하나 두었으며, 드 외에 후궁과 궁인에게서 아들 넷을 얻었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모두 일찍 죽었다. 그의 유일한 혈육으로는 숙의 범씨에게서 난 영혜옹주가 한 명 있었을 뿐인데 그녀 또한 박영효와 혼인한 지 3개월 만에 죽고 말았다.

 

용흥궁 정문을 나와 우측의 골목길을 따라 용흥궁공원과 고려궁지, 그리고 강화산성 북문으로 이어지는 2차선 포장도로로 나오게 된다.

좌측으로 50여m를 내려가면 48번 국도가 지나는 4차선 포장도로가 나타난다.

 도로 건너 새로 개설된 직진의 2차선 포장도로 '남산길'을 이어가면 우측으로 관광안내소를 지나 정면으로 합일초등학교가 자리잡은 ┬자 삼거리.(12:43)

 

 

                 ▲ 합일초등학교 앞 ┬자 삼거리(사진 左)와 산길로 들어가는 ├자 갈림길 입구(사진 右)

 

우측으로 학교를 끼고 돌아 포장길을 따라 오르면 학교 담장이 끝나는 곳에 사거리. 우측의 마을길을 따라 100여m를 오르면 '신앙촌상회'가 있는 골목사거리에 이르게 된다.

계속 직진의 마을길을 따라 강화산성이 지나는 남산으로 향하면 정면에 '성산아파트'가 있는 ┬자 삼거리에 닿고,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꺾자마자 우측 성산아파트 옆으로 골목길이 보인다.

├자 갈림길 좌측에는 진행 방향 표시가 된 나들길 이정푯말과 표식기, 우측 골목 입구 집에는 '청하동길 36번길 20-1' 푯말이 붙어있다.

골목길 따라 100여m를 오르면 산길이 시작된다.

 

                 ▲ 산길 입구

 

12:55=>산길입구

     완만하고 호젓한 산책로인 오르막 숲길을 따르면 통나무계단 오르막(15:05)이 나타나고, 잠시 오르면 편안한 숲길이 약 3분간 이어진다.

 

 

 

 

 

                 ▲ 청하동약수터로 오르는 산길

 

 길이가 짧은 나무다리를 하나 건너면 임도처럼 넓은 오르막 산길이 약사사입구까지 이어진다.

이정표(←약수터 50m/↑정상 270m/→약사사 90m)가 설치된 갈림길 좌측으로는 약사사 진입도로가 꺾이어 내려가고, 우측으로는 약사사로 향하는 길이 이어진다.

직진길로 들어서면 넓은 배드민턴장과 체육시설이 설치된 청하동약수터이다.

 

 

 

                 ▲ 청하동약수터 입구의 이정표(사진 上左)와 청하약수터(사진 上右)

                    청하약수터의 쉼터(사진 下)

 

13:11~13:30=>청하동약수터/남산약수터

     2층 팔각정자 쉼터와 나무벤치들이 마련되어 있다. 용흥궁을 출발하여 이곳 청하동약수터까지 거리가 2.2km인데 약 37분이 소요되었다.

정자 쉼터 옆으로 '강화도령 첫사랑길' 안내도가 있고, 그 사이로 강화산성 남장대로 오르는 나들길인 나무계단길이 보인다.

 

                 ▲ 청하동약수터에서 강화산성 암문으로 오르는 ┤자 갈림길

 

쉼터에 자리를 잡고 약 20분 가까이 커피 한 잔을 하며 휴식을 취하고, 계단길을 따라 100여m 정도를 오르면 입구에 나들길 방향표시 푯말이 설치된 ┤자 갈림길에 이르게 되고, 직진의 넓은 길을 버리고 좌측의 오솔길로 들어 가파른 돌계단길을 따라 오르면 넓은 공터에 돌축대를 쌓아 제단을 만들어 둔 치성터(13:37).

 

                 ▲ 치성터

 

제단 앞 공터를 지나 편안하게 산 허리의 둘레길을 따르면 강화산성 성곽과 강화산성에 남아있는 유일한 암문을 대하게 된다.

 

                 ▲ 강화산성 암문

 

13:40=>강화산성 암문

     암문 입구에 이정표(↑남장대 700m/↓청하약수터 200m)가 있고, 현재 강화산성 성곽 복원공사가 한창 진행중이라 주변이 어수선하기만 하다.

 

 

 

 

                 ▲ 암문 입구의 이정표(사진 上左)와 성밖에서 바라본 암문(사진 上右)

                    암문의 문을 설치하였던 흔적들(사진 下)

 

이곳은 강화산성 성곽돌기를 할 때 이미 한차례 다녀 간 곳이고, 그 당시에는 남문에서 남장대에 올랐다가 서문으로 내려갈 때 이곳을 지났었다.

 

 

                 ▲ 복원공사가 한창 진행중인 강화산성(사진 上)

                    성뱎의 소나무숲의 호젓한 산길(사진 下)

 

암문을 통과하고 성밖으로 빠져나가 소나무 숲속의 호젓한 길을 따르면 이정표(←남장대 200m/↓청하동약수터 500m/→국화리공동묘지 250m)가 설치된 ┬자 능선갈림길(13:47)에 이르게 되는데, 이곳에서 좌측의 길 따라 남장대를 올랐다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국화리공동묘지 방향으로 내려가게 된다.

 

 

 

                 ▲ 남장대 전의 능선삼거리(사진 上左)와 이정표(사진 上右)

                    남장대 전 바위전망대에서 바라본 문수산과 강화 일대의 전경(사진 下)

 

좌측으로 부담없는 넓고 호젓한 산길을 100여m 진행하면 우측으로 김포 문수산과 강화대교, 그리고 강화해협이 시원하게 조망되는 바위전망대가 나타난다.

전망바위에 서서 잠시 주변의 풍경을 감상하고 편안하게 오르면 복원된 강화산성 성벽을 넘어가도록 설치된 나무데크가 보이고 이를 넘어서면 강화산성 남장대가 복원되어 있는 남산 정상에 이르게 된다.

 

 

 

                 ▲ 강화산성 안밖을 연결하는 데크길(사진 上左)과 데크위에서 바라본 복원된 성곽과 남장대(사진 上右)

                    성안에서 바라본 성곽과 남장대(사진 下)

 

13:55~14:10=>강화산성 남장대

     복원된 남장대에 이르면 사방으로 주변의 경치가 시원하게 펼쳐지는데,

 

                 ▲ 강화산성 남문 방향으로 이어지는 성곽과 멀리 조망되는 문수산

 

동쪽으로는 김포 문수산과 염하강이 흐르는 강화해협,

 

                 ▲ 남장대에서 조망된 고려산과 국화리저수지

 

서쪽으로는 강화 고려산과 그 아래로 강화나들길 제5코스 '고비고개길'이 지나는 국화리저수지가

 

                 ▲ 강화산성 북문이 있는 북산과 강화산성 안에 펼쳐지는 강화시가지, 그리고 한강 너머의 북녁 땅

 

북쪽으로는 강화산성 북문이 있는 북산과 북산 아래 강화시가지, 그리고 멀리 한강 너머로 북한 개풍면이 조망이 된다.

 

♧ 강화산성(江華山城)

*사적 제132호(1964년06월10일)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애가면, 하점면 일원

 

                 ▲ 강화산성 서문으로 이어지는 성곽

 

고려가 몽고의 침입으로 인해 당시 무인인 최우가 결사항전의 일환으로 강화도로 고종19년(1232) 천도할 당시 궁궐과 함께 축조되었다.

원래 내성, 중성, 외성의 3중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궁궐의 내성으로 축조된 것은 고종21년(1234) 1월부터였고, 당시는 토석혼축이었다. 그리고 1,200m의 강화성인 내성을 방어하기 위한 중성이 축조된 것은 고종37년(1250)으로 둘레가 약 7km에 달하는 토성이었다.

또 중성을 둘러싸는 외성은 1233년부터 축조하기 시작하여 , 1235년 전국 주,현에서 일품군을 징발하여 대대적인 공사를 벌인 결과 동쪽 육지를 바라보는 선을 따라 37,070척에 달하는 성이 1237년 1차 완성되었다.

고려시대 강화 내성에는 고려 궁궐과 관청이 들어서 있었는데, 그 규모나 배치를 모두 송도(지금의 개성)의 것을 옮겨 놓은듯이 비슷하게 하여 왕족과 귀족들은 송도에서와 마찬가지로 화려한 생활을 영위하였다.

궁궐의 정문은 정남향의 승평문이었다.

중성에는 모두 8개의 성문이 있었는데, 송도의 것을 그대로 본떠 동에는 선인문, 서에 선기문, 남에 태안문, 북에 북창문을 두었고, 동남에 장패문, 서남에 광덕문, 서북에 선의문, 동북에 창희문이 있었다. 그러나 고려가 39년간의 대몽항쟁을 끝내고 몽고와 강화가 성립되어가던 고종46년(1259) 몽고의 요구로 내성이 헐리게 되었고, 외성도 허물었다. 고려사에는 백성들이 강화 성곽을 허물면서 차라리 성을 쌓지나 말걸 하며 통탄하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고려가 송도로 안전히 환도를 하는 원종11년(1270)에는 궁궐도 헐리어 현재는 궁궐터마저 불완전하게 남아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인조5년(1627)에 정묘호란이 있자 인조가 잠시 피난했으며, 인조14년(1636) 병자호란 때는 봉림대군을 비롯한 빈궁들과 신하들이 피난했으나 청군에 의해 강화성이 함락되면서 포로가 되었고 성도 다시 파괴되었다.

이렇게 외침이 잦자 조정에서는 이후 수 차례 걸쳐 강화성을 개축하였으며, 숙종3년(1677) 화강암의 석성으로 바꾸고 여장(성벽위에 덧쌓은 낮은 담)도 설치하였으나 현재 여장은 모두 무너진 상태이다. 이렇게 하여 강화성은 4개의 성문과 4개의 암문, 남,북,서쪽의 장대와 2개의 수문 등의 시설을 갖추었다.

현재 북악과 남산을 연결하는 성벽의 일부와 성문은 거의 조선시대에 축조되어 1970년 보수한 것이다.

동문은 망한루인데 사라진 성문을 복원하였고, 서문은 첨화루로 숙종37년(1711)에 건립되어 그동안 퇴락되었다가 1977년 개축하였다.

남문은 안파루로 1711년 건립되어 1955년 홍수로 무너진 것을 1975년 복원하였으며, 북문인 진송루는 1783년 건립되어 무너져 없어진 것을  1977년에 복원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성내에 많은 관아가 들어서 있었으나 고종3년(1866) 병인양요 당시 많은 건물이 소실되어 현재는 고려 궁지에 동헌과 이방청 등이 복원되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서문 근방에는 일본의 강압에 의해 강화도조약이 조인되었던 연무당이 있다.

현재 성의 동쪽 부분은 없어졌으나, 남북쪽 산자락은 잘 보존되어 있다. 조선 후기 병인양요, 신미양요와 일본 침략에 의한 강호조약을 체결한 수많은 외세침략의 역사적인 현장이다.

 

◆ 강화산성 남장대

 

 

높이 8.4m, 1층 34.69㎡, 2층 7.78㎡의 목조 누각 형태

강화산성 남측 정상부에 위치해 있어 서울을 비롯해 북한지역 개성까지 조망할 수 있는 곳으로, 조선시대 서해안 방어를 담당하던 진무영에 속한 군사 시설로 감시와 지휘소 역할을 했던 곳으로 전해진다.

 

오늘 코스 중 가장 전망이 좋은 곳이며, 조선 후기 외침의 역사를 품고있는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청하동약수터를 출발하여 1km 지점이며, 출발지인 용흥궁을 기준으로는 3.2km 지점이다. 지난 번 강화산성 성곽돌기를 할 때에는 남장대가 복원되지 않은 상태였고, 정상을 외롭게 지키고 있었던 것은 산불감시탑이었는데 오늘은 남장대가 주인이 되어 서있고, 그 옆에 산불감시탑이 초라한 모습으로 여전히 자리를 하고 있다.

 

                 ▲ 강화산성 남장대에서 능선갈림길로 되돌아 내려가는 능선길

                 ▲ 능선삼거리지나 남산유스호스텔로 내려가는 ┤자 갈림길

 

다시 성벽을 넘어 왔던 길을 되돌아 내려가 능선삼거리(14:13)에서 국화리공동묘지 방향의 넓고 뚜렷한 길을 따라 잠시 내려가면 좌측으로 오솔길이 보이는 ┤자 갈림길.

물론 입구에는 나들길 방향 표시 푯말이 있지만 그냥 지나칠 수가 있으니 주의가 요구되는 곳이다.

 

 

 

                 ▲ 남산유스호스텔로 내려가는 나들길

 

직진의 뚜렷한 내리막길을 버리고 좌측 오솔길로 들어가면 우측으로 고정 밧줄난간이 설치된 지점에 이르게 되는데, 이곳에서 나들길은 좌측으로 꺾이어 내려가게 된다. 내리막길을 따르면 행사가 있었던 코스인지 나들길 주변의 나무 곳곳에 방향을 알리는 화살표가 그려진 코팅지들이 박혀 있다. 쓰러진 거목이 나들길을 먹고 누워 있는 곳에서 좌측으로 돌아 나가면 고정 밧줄난간이 설치된 통나무 계단길 내리막.(14:20)

계단길이 끝나면 임도와 만나는 ┬자 삼거리.

정면으로 넓은 공터에 유스호스텔 훈련장이 보이고, 우측의 넓은 임도를 따라 내려가면 남산유스호스텔에 이르게 된다.

 

                 ▲ 강화남산유스호스텔

 

14:30~14:43=>강화남산유스호스텔

     유스호스텔 한 쪽 그늘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10여분이 넘게 휴식을 취하고 도로를 따라 유스호스텔을 뒤로 하면 좌측으로 남산골프연습장이 있고, 우측으로 꺾이어 내려가는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내려가면 '↓강화 남산유스호스텔 500m'란 입간판이 서있고, 정면 100여m 떨어진 곳으로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고 있는 사거리(14:52).

우측 '화성길'을 따라 진행을 한다.

 

 

                 ▲ 남산유스호스텔 입간판이 있는 ┬자갈림길(사진 左)과 2차선 포장도로와 만나는 나들길(사진 右)

 

'건영3차' 아파트 지나 ┤자 갈림길(14:56).

아파트 단지를 끼고 좌측으로 2차선 포장도로(14:56)에 내려선다.

우측으로 '명진컨벤션웨딩부페' 건물이 보이는데 2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50여m 떨어진 '명진컨벤션웨딩부페' 앞으로 가서, 길 건너 '강화군음식업지부' 건물 좌측의 시멘트 포장길로 향한다.

 

 

 

                 ▲ 2차선 포장도로의 '강화군음식업지부' 건물 옆 시멘트 포장길(사진 上左)과 선행천과 만나는 ┬자 삼거리(사진 上右)

                    농로의 갈대밭(사진 下)

 

양쪽으로 논이 펼져지는 농로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나가면 정면으로 지방하천 '선행천'이 가로지르는 ┬자 농로삼거리에 이르게 되고,

우측으로 방향을 틀어 선행천을 끼고 둑방길을 따라 나간다.

 

 

 

                 ▲ 선행천 둑방길(사진 上)

                    선행천과 만나는 2차선 포장도로(사진 下左)과 성산청소년수련원 입구 사거리(사진 下右)

 

다시 2차선 포장도로(15:16)와 만나 좌측으로 50여m를 이동하면 '성산청소년수련원 →0.8km' 표지판이 있는 ┼자 사거리에 이르게 되는데 '남산리' 버스정류장이 자리를 하고 있으며 그 뒷편에 '지방하천 선행천' 표지판이 보인다.

좌측으로 방향을 틀어 선행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르 건너 '나무의 집(보리떡도서관' 옆을 지나 시멘트 포장길을 이어가면 입구에 쓰러진 농가 1채가 있는 산길이 시작된다.

 

 

                 ▲ 산길 입구의 폐가(사진 上)

                    우측으로 토성처럼 쌓아놓은 언덕이 나타나는 나들길(사진 下)

 

산길로 들어서면 밤나무 과수원이 나타나고, 우측으로 인위적으로 쌓은듯한 토성 형태의 언덕이 산길 옆으로 계속 이어진다.

오르막이 끝나는 능선(15:28~15:35)에 올라 쓰러진 나무를 의자 삼아 다시 휴식을 취한다.

 

                 ▲ 편안한 산길

 

우측으로 꺾이어 편안하게 능선길은 이어지고, 좌측으로 녹슨 철조망이 잠시간 나들길과 함께 한다.

 

                 ▲ 찬우물약수터 직전의 2차선 포장도로

 

공동묘지(15:40)에 이르면 산길은 수레길로 바뀌어 2차선 포장도로(15:42)로 이어지고, 도로를 건너 잠시 오르면 시멘트 포장길이 나타난다.

 

 

                 ▲ 찬우물약수터 가는 시멘트길

 

포장길을 따라 100여m를 내려가면 좌측에 체육시설과 나무벤치가 마련된 넓은 공터가 있고, 우측으로는 혈구산 등산로 입구에 '혈구산 등산안내도'가 보이는데 찬우물약수터이다.

 

 

 

                 ▲ 찬우물약수터의 혈구산 등산안내도(사진 上)

                    찬우물약수터(사진 下左)과 찬우물약수터의 식당사진 下右)

 

15:45~16:45=>찬우물약수터

     '소문난 맛집 묵집' 식당에서 칼국수로 늦은 점심식사를 하고, 파전에 막걸리 한 잔을 하면서 다리를 뻗고 약 1시간의 긴 휴식을 취한다.

찬우물약수터 지나 우측으로는 '강화도령 첫사랑길' 안내도와 사랑과 소원을 적은 쪽지를 매다는 러브트리판이 있다.

 

 

 

84번지방도 4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삼거리로 나가 좌측 강화읍 방향으로 인도를 따라 150여m를 내려가면 ┤자 도로삼거리가 나타나고, 우측의 횡단보로를 이용 도로 반대편으로 건너 간다.

도로를 건너 반대 방향(찬우물약수터 방향)으로 인도를 따라 역으로 올라간다.

 

                 ▲ 84번지방도 도로변의 나들길 입구인 ┤자 갈림길

 

약 50여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자 갈림길에서 좌측 소나무숲을 향해 올라가야 하는데 갈림길을 놓치고 찬우물고개 도로삼거리(16:55)까지 올라갔다 다시 ┤자 갈림길(17:02)로 되돌아 내려와 좌측의 소나무숲길로 향한다. 10여분간 알바.

 

                 ▲ 소나무숲길

 

푹씬푹씬한 솔밭길을 따라 오르면 능선사거리(17:09).

정면의 사람 왕래가 드문 때문인지 희미한 오솔길로 들어 묘 2기를 돌아 내려가면 전주이씨 묘 2기(17:14)가 있고, 편안한 수레길이 이어진다.

 

 

                 ▲ 양봉장과 ┤자 갈림길

 

벌통이 길게 놓여있는 넓은 공터의 양봉장(17:16)을 지나 시멘트 포장길(17:17)에서 좌측 길을 따라 가다 '←대문고개로57번길/↑강화동로942번길' 도로이정표가 있는 ┤자 갈림길에서 직진하여 Y자 삼거리(17:19)에 도착을 한다.

우측 길로 들어 성희교회를 지나면 좌측으로 신원초교 건물이 보이고, 잠시 후 2차선 포장도로에 이르게 된다.

좌측으로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구군인아파트' 버스정류장을 지나 고갯마루 ├자 갈림길에 이르게 되는데 좌측에는 신원초교가 자리를 하고 있다.

 

 

 

                 ▲ 신원초교로 이어지는 2차선 포장도로와 만나는 ┬자 삼거리(사진 上左)과 신원초교가 있는 고갯마루의 ├자 갈림길(사진 上右)

                    신원초교가 있는 고개에서 이어지는 시멘트 포장도로(사진 下)

 

17:24=>신원초교

     우측의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진행을 하면 ┬자 삼거리(14:30).

좌측 길로 들어서면 다시 ┬자 삼거리(14:32).

 

                 ▲ 저물어가는 해를 가슴에 안고 농로를 따라서...

 

우측의 농로길인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100여m를 내려가면 ┤자 갈림길. 좌측으로 다시 100여m를 들어가면 ┬자 삼거리(17:34).

우측의 농로 시멘트길을 따라 100여m를 내려가면 '햇님'공장 건물이 있고, 공장 철망펜스를 우측에 두고 좌측의 논두렁길을 진행하여  ┬자 시멘트 포장길.

 

 

                 ▲ 철종외가길44번길

 

우측으로 진행하여 '철종외가길44번길' 도로이정표가 있는 '햇님' 공장 정문에 도착을 한다.

철종외가길 시멘트 포장길을 약 4분여간 따르면 철종외가 입구에 도착을 하게 된다.

 

 

17:43~18:00=>철종외가

     좌측으로 20여m를 들어가면 강화나들길 제14코스 '강화도령 첫사랑길'의 종착지인 철종외가에 도착을 하게 된다.

 

♧ 철종외가(哲宗外家)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8호(1995년03월01일 지정)

*소재지:안천광역시 강화군 신원면 냉정리 264번지

 

 

조선 철종의 외숙부 염보길이 살던 집이다.

철종4년(1853)에 지은 이 건물은 원래 안채와 사랑채를 좌우에 두고 H자형 배치를 취하고 있었으나 행랑채 일부가 헐려 지금은 'ㄷ'자 형태의 몸채만 남아 있다

사랑채와 안채가 ㅡ자형으로 연결되어 있고 안(안채)과 밖(바깥채)의 공간을 작은 담장(화장담)으로 간단히 분리하였다. 규모는 작으나 예스럽고 우아한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건물이다. 

 

철종외가를 둘러보고 마을길을 따라 4분여를 나가면 2차선 포장도로아 만나게 되는데 '대장간' 버스정류장이 있으며, 강화읍으로 향하는 많은 노선버스가 지나고 있어 대중교통 이용에는 불편함이 없는 곳이기도 하다.

#63번 군내버스를 타고 강화읍내로 향하며 오늘 나들길 탐방이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