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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륵이 가야금을 타던 곳! 탄금대(彈琴臺)

왕마구리 2012. 11. 25. 17:10

◀ 충주 탄금대(忠州 彈琴臺) ▶

 

                 ▲ 탄금정에서 바라본 남한강과 용섬

 

【 탄금대 소개 】 

*명승 제42호(2008년07월09알 지정)

*소재지:충청북도 충주시 칠금동 산1-1번지 등

'대문산' 또는 "견문산"이라 불리는 작은 산으로 밑에는 남한강과 달천강이 합류하며, 산세가 평탄하면서도 기암절벽에 소나무 숲이 우거져서 경치가 좋다.

탄금대는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했던 곳이라 해서 붙은 이름이다.

삼국사기에 보면 우륵은 가실왕 당시의 가야 사람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가야금을 가지고 신라에 귀화하였다. 진흥왕이 기뻐하며 우륵을 충주에 거주케 하고는 신라 청년들 중에서 법지, 계고, 만덕을 뽑아보내 악을 배우게 하였다. 우륵은 이들의 능력을 헤아려 각기 춤과 노래와 가야금을 가르쳤다 한다. 그는 이곳을 우거지로 삼고 풍치를 상미하며산상대석에 앉아 가야금을 타니 그 미묘한 소리에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이곳을 탄금대라 불렀다.

탄금대 북쪽 뒤편 남한강 언덕에는 '열두대'라고 불리는 기암절벽이 있다.

 

                 ▲ 탄금정 아래 열두대

 

열두대란 이름의 유래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우륵이 탔던 가야금이 12줄이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라고 하고,

또 다른 하나는 임진왜란 때 신립 장군이 탄금대 강가를 배수진으로 활을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번개처럼 활시위에 화살을 당겨 활이 뜨거워지자, 이 암벽을 열두 번이나 오르내리며 물에 활을 식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신립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도순변사로 군졸 8,000여명을 거느리고 왜장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를 맞아 이곳에서 배수진을 치고 격전을 벌렸는데, 전세가 불리하여 패하자 천추의 한을 품고 강에 투신하여 자살하였다.

역사적 가치가 큰 명소인 탄금대는 남한강이 절벽을 따라 휘감아 돌고 울창한 송림이 우거져 있어 경관이 아름답고, 대에서 조망되는 남한강과 계명산, 남산 및 충주 시가지와 넓은 평야지대가 그림같이 펼쳐져 절경을 자아내고 있는 곳이다.

아곳에는 신립 장군의 충의심을 기리기 위해 군수 김용은이 건립하고 육당 최남선이 찬한 탄금대비가 있다. 또 충주문화원, 야외음악당, 충혼탑, 감자꽃노래비, 탄금정, 악성 우륵선생추모비, 신립 장군 순절비, 조웅장군 기적비, 궁도장, 대흥사 등과 조각공원 및 체육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1976년 12월 21일 충청북도기념물 제4호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지로 지정되었다.

 

                 ▲ 탄금대 안내도

 

▷ 탄금대의 지형

동서 방향의 길이 약 1km, 남북 방향 너비 약 600m 규모이며, 최고 지점이 해발 105~108m, 최저 지점은 해발 70m 내외여서 상대고도가 불과 38m에 불과하다. 고구마 모양의 작은 암반구릉이 강 가운데 있는 모습이고, 소나무와 상수리나무가 울창한 남한강변의 작은 언덕이다.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흘러온 남한강 줄기는 탄금대 서쪽에서 남한강 최대의 지류인 달천과 합류한다. 달천과 남한강이 합류하기 이전에 달천에서 요도천과 충주천이 모여 그야말로 합수머리를 이룬다.

남한강 본류에 남쪽에서 북쪽으로 모이는 달천의 물 흐름이 합치면서 큰 소용도리를 이루므로, 남한강 본류로 내려오던 토사가 쌓여 탄금대 북쪽 강 가운데는 용섬이라는 모래섬이 형성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탄금대 동북쪽으로도 샛강이 메워지기 전까지는 삼각주가 있었으며, 현재는 묘목 재배와 과수원 등으로 이용되고 있다.

탄금대는 북쪽으로 작은 계곡을 둔 반달 모양의 섬으로 되어 있었다.

해발 106m 내외의 동쪽 가장 높은 봉우리에서 동북쪽으로 해발 70m 내외의 평평한 '섬들'이라고 불르는 곳은 동쪽으로 길다란 '능암늪'을 가지고 있는데, 이 능암늪이 바로 샛강이었었다.

이 능암늪으로 변한 샛강은 서남쪽으로 탄금대 서남쪽을 돌아 충주읍성에서 내려오는 성내천(충주천)과 합류하여 탄금대 서쪽의 달천으로 흘러 들었고, 다시 남한강과 합류를 하였다. 탄금대는 그 자체가 암반으로 이루어진 높은 언덕이었으나, 그 동쪽의 '섬들'과 북쪽의 '용섬'은 이러한 남한강 본류와 달천이 합류하는 합수처에 형성된 일종의 삼각주인 것이다.

남쪽에는 천연의 해자인 샛강, 북쪽에는 남한강 본류, 동쪽으로는 샛강과 성내천, 서쪽으로는 달천의 합수머리로 둘러쌓인 사방이 물로 돌리어진 천연의 섬이자 요새였다. 탄금대 동쪽 가장 높은 곳에서 서향으로 낮아진 사면을 에워싼 토루(흙으로 쌓은 성)로 된 성터는 동서 방향으로 약 180m, 남북 방향으로 폭이 80~100m에 달하며, 둘레가 약 360~400m 정도 규모의 옛 토성자국이 남아 있다.

이 토성의 북쪽에 형성된 봉우리는 해발 105m인 최고 높은 부분이 토성의 동북쪽 모서리가 되고 북쪽으로는 야래 강물이 흐르는 험준한 단애로 되어 있다. 북쪽 지형은 자연적인 안부를 그 서쪽을 보강하듯 높이 쌓아올려 높아진 성벽을 이루었으며, 가장 가파른 곳이며 암반이 노출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며 마치 충남 부여의 부소산성의 서북쪽에 위치한 낙화암을 연상케 한다.

탄금대 북쪽의 남한강의 강 폭은 대략 500m 정도이며, 남쪽의 샛강의 너비는 150~200m나 되었었다.

 

▷ 탄금대의 토성

탄금대의 토성은 도로, 묘지, 사당, 사찰, 비 등의 조성으로 원상이 많이 파괴되었다.

뚜렷하게 토성의 형태가 남아있는 곳은 동쪽 성벽, 남쪽 성벽과 서쪽 성벽의 일부이고, 북쪽 성벽은 바깥으로 향한 급경사로 따로 성벽을 쌓을 필요로 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으나, 일부를 제외하고는 흙으로 쌓은 흔적, 혹은 바깥으로 성벽을 이루었던 흔적이 남아 있기도 하다.

동쪽 성벽은 주능선에서 북향하여 통로가 북동쪽 끝을 약간 깎아 성벽을 훼손하였으나 낮아지는 능선을 따라 약 90m의 토루가 확인되었다.

바깥쪽으로는 탄금대 전체의 중앙으로 낮아지는 계곡이고, 안쪽으로도 지세를 따라 자연스럽게 경사지면서 내황처럼 빗물이 흐르도록 되어 있다. 동벽의 남쪽에 작은 통로가 있어서 성 출입을 할 수 있는데 동벽의 북쪽보다는 이곳이 출입이 용이한 지형이다.

남쪽 성벽은 동벽 남단의 작은 문에서 사당까지 인데 서쪽에서 굴곡되어 서쪽 성벽과 연계되었고 그 길이는 대략 120m이다.

성벽은 외측 경사면이 있고 안쪽으로는 내외겹축된 부분이 거의 확인되지 않고 있다. 서쪽 성벽 역시 동일한 양상인데 사당에 의해 크게 훼손되었고, 그 북단에 낮아진 곳으로 통하는 길이 있다. 성젹은 잘리어진 단절면이 있으나 판축처럼 흙을 수평으로 교대다짐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으며 적갈색 내비 황갈색 점토질로 비교적 두텁게 층을 이루어 다져진 것만 확인된다.

토성의 크기는 동서 길이 150m, 남북 폭 100m 정도의 불규칙한 원형 내지 타원형의 평면에 둘레가 400m 범위 이내의 소형에 해당된다.

북동쪽의 토성을 동,남,서쪽으로 탄금대의 구릉들이 애워싸듯 자리를 하고, 남쪽의 낮아진 경사면과 택지 밑 경작지를 포함하여 전체구역은 직경 약 1km에 둘레 3km를 약간 넘는 범위가 북으로 남한강의 본류, 동,서,남으로 해자 모양의 샛강들이 둘러싸고 있는 형태이다.

강변의 구릉에 좌우가 강물로 가로막힌 독립된 지형을 이용한 점에서는 규모는 다르나 풍납동토성, 몽골토성, 청주 정북동토성 등을 연상케 한다. 이러한 위치에 축조된 금강유역의 옛 백제의 도성이었던 공주의 공산성, 부여의 부소산성이 둘레가 2~3km에 이르는 대규모인 것에 비해, 탄금대의 토성은 규모가 작지만 동일한 유형에 속한다.

 

                 ▲ 탄금대가 포함된 조국순례자연보도(원통산구간) 안내도

 

▷ 탄금대와 관계된 인물들

▦ 우측

삼국사기에 기록된 우륵의 생애

우륵이 가야국에서 지은 12곡은 하가라도, 상가라도, 보기, 달기, 사물, 물혜, 하기물, 사자기, 거열, 사팔혜, 이사, 상기물 이었으며, 니문이 지은 세곡은 오(까마귀), 서(쥐), 순(메추라기) 이었다.(삼국사기 32권 잡지)

"이들 곡중 보기, 사기, 이사를 제외한 9곡은 당시의 군, 현의 이름과 같아서 악법을 제정하고 인정을 연유하여 준설케 하였으니 나라가 잘 다스려 지고 어지러운 것은 음조에 연유한 것이 아니다" 하고 이를 행하였으므로 대악으로 발전되었다.라고 삼국사기에 전하고 있어 해당지역의 민요 연구에 긴요한 자료가 된다.

충주의 금휴포, 탄금대는 모두 그 이름이 우륵에게서 유래한다고 한다.

충주읍지에 의하면 우륵은 탄금대에서 가야금에 전념하였다 하는데 그 말년에 관하여는 전혀 알 길이 없으며 다만 우륵이 탄 가야금의 오묘한 음악에 이끌려 모여든 사람들이 부근에 부락을 이루니 이것이 칠곡리(지금의 칠금동), 금뇌리(지금의 금능리), 청금리(지금의 청금정) 등의 마을 명칭이 오늘까지 이르러니 우르의 가야금에 담은 예술은 참으로 위대하였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1977년 악성 우륵선생 추모비가 건립되고, 우륵선생의 위대한 예술혼을 오늘에 되살려 우리의 국악을 계승발전 시키려는 향토제전인 우륵문화재가 매년 화려하게 펼쳐지고 있다.

 

▦ 충장공 신립

명종원년(1546) 10월23일 아버지 신화국과 어머니 파평 윤씨의 세째아들로 태어났다.

명종22년(1567) 무과에 급제한 후 진주판관이 되었다. 그때 진주목사 양응정은 "공은 대기인데 글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하여 신립은 책을 끼고 배우면서 그를 스승으로 대하였고, 양응정은 신립을 더욱 기특히 여겼다.

선조16년(1583) 2월 은성부사로 있을 때 야인들의 소굴을 소탕하였다.

선조17년(1584) 은성부사 신립은 변방의 일을 보고하고 모친에게 문안드릴 일로 한양에 왔는데, 임금이 그를 불러 술을 내리고 비단 2필과 주향라 2필을 하사하였다.

선조17년 3월11일 북도병사로 제수받아 임지로 떠나며 임금에게 하직인사를 올리니, 술을 내리고 남단,철익, 호초 한 말과 환도, 궁대, 동개, 장편전, 수은갑, 투구 등을 내렸다.

선조20년(1587) 2월 왜적선 18척이 전라도 흥양 지경을 침범하여 이들고 싸우던 중 녹도 권관 이대원이 전사했다는 전라감사의 보고가 도착하자 , 신립을 우방어사로 군관 30명을 거느리고 그날로 전라도로 떠나게 하여 밤을 세워 남쪽지방으로 출정하게 하였다. 전라감사가 도내의 군사를 다 출동시켜 바닷가에 주둔하였으나 왜선은 이미 돌아가 버린 후였다. 5,6일이 지나도 왜적이 왔다는 정보가 없어서 각 진은 군사를 해산시키고, 신립도 돌아오던 중 잘못된 일이 있어 삼사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선조20년(1587) 12월 "선조가 사정원에서 병조판서 정언신과 부제학 윤선각, 남병사 신립을 인견하였다." 하였으니 언제 남병사로 임명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때 남병사로 있었음은 분명하다.

선조21년(1588) 10월 가을파보의 수졸이 보장을 모욕하였다하여  신립이 수졸의 목을 베어 죽이고 보고하였는데, 사간원에서 "병사가 비록 한 도의 병마를 거느리고 있으나 싸움에 임하여 적과 맞선 시기가 아니면 참형을 쓸 수 없으니 신립을 파직하소서"하여 신립은 남병사에서 파직되어 동지중추부사로 전보되었다. '선조실록'에 '임금이 우의정 정언신, 동지중추부사 신립, 전라병사 이일을 불러서 변비에 관한 일을 의논하였다'하였으니 이를 알 수 있다.

또한 종지중추부사로 있다가 언제 평안감사에 발탁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선조23년 2월 평안병사로 제직하다가 선조24년 2월 6일 평안병사에서 체직되어 경직으로 붙였다 하였으니, 이때에 신립이 한성판윤에 임명된 것으로 보인다.

선조25년 2월 조정에서는 대장 신립과 이일을 제도에 보내어 병비를 순시하도록 하였는데, 이일은 호남과 호서로 가고 신립은 경기와 해서로 가서 궁시와 창도를 점검하고 한달 뒤에 서울로 돌아왔다.

선조25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한성판윤 신립을 도순변사로 임명하고 전 목사 김여물을 종사관으로 삼아 대군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내려가 왜적을 막도록 하였으나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패하여 죽었다.

영의정 평양부원군에 추증되고 시호는 충장이다.

 

신립의 맏아들 신경진은 선조33년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대장과 병조판서를 역임하고 영의정이 되었다. 인조반정으로 정사공신원훈으로 평성부원군이 되었고 시호는 충익이며 인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둘째 아들 신경유는 선조36년 무과에 장원급제하고, 가의대부 훈련도정을 역임했다. 인조반정으로 정사공신 2등에 녹훈되고 동평군에 봉해졌다. 병조판서에 증직되고 시호는 경의이다.

셋째 아들 신경연은 광해군7년 무과에 급제하여, 어영, 호위대장, 지돈령부사를 역임하고 인조반정으로 정사공신 2등에 녹훈되고 좌찬성에 증직되었으며 시호는 충도이다.

첫째 여식은 선조의 네째 아들 신성군 후의 부인이며, 둘째 여식은 이대엽의 처이다.

손자는 형조판서 평흥군 신준, 증 공조참의 신담, 신호, 증 영의정 평원군 신해 등이며, 현손 신완은 영의정을 지냈다.

 

【 탄금대전투 】

1592년 4월 28일 신립이 계획한 전투의 구상은 아군은 기병이 위주이고, 적군은 보병이 위주가 된 것으로 파악한데서 시작된다.

탄금대전투의 실상을 가장 요약하여 정리한 '선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1592년 4월부산에 상륙한 왜군 대병력이 파죽지세로 쳐들어오자 조정에서는 북방 방비에서 용맹을 떨친 신립을 삼도순변사(三道巡邊使)로 임명, 이를 막게 하였다.

신립이 충주에 도착한 뒤 4월 24일 부장 몇 사람과 조령(鳥嶺)으로 달려가 형세를 살필 때, 먼저 경상도로 남하했던 순변사 이일(李鎰)이 상주에서 패해 돌아왔다.

이 때 종사관(從事官) 김여물(金汝岉) 등이 “적은 군대로 왜적의 대군을 방어할 곳은 마땅히 지형이 험한 조령뿐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신립은 그 말에 따르지 않고 “이곳에서는 기병(騎兵)을 쓸 수 없으니 마땅히 평원에서 일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지휘관인 신립의 의견에 따라 탄금대에서 기병으로 배수진을 치게 되었고 이때 김여물은 이미 조선군의 패배를 예상했다.

 

                  ▲ 탐금대 북쪽을 감싸는 남한강

  • 김여물의 논지 - 새재에 있는 바위를 방패삼아 궁병으로 공격하면 승산이 있다. (기록에 따라, 이종장, 이일도 이와 같이 주장한다.)
  • 이일의 논지 - 새재를 수비하기에는 늦었으니, 한강으로 물러나 한강 방어선을 구축하자고 했다.
  • 신립의 논지 -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쳐야만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도망병이 속출하기 때문이며 자신이 기병의 전문가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궁병이 아닌 기병으로 왜구를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 또한 기병 대 보병으로 병종 상 우위를 점할 수 있다.

 

                 ▲ 탄금대 북쪽을 감싸는 남한강

 

26일 그는 드디어 충주의 서북 4㎞ 지점에 있는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으나, 앞에 논이 많아 말을 달리기에 불편하였다.

신립은 경상 전라 충청 삼도 도순변사로서 전체 방어전을 지휘해야 하는 위치다. 그리고 신립이 지휘한 경군은 각 도의 상번군, 무관, 종실, 내시위 군졸 등으로 구성된 중앙군으로서 일개 방어거점인 문경새재에 투입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도순변사인 신립이 고착방어보다는 야전에서 기동방어를 선택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새재는 조방장 변기의 방어구역이었다. 신립이 충청도 병력을 증원받지 못한 것이 충청도관찰사 윤선각(후에 윤국형으로 개명)이 저술한 기재사초에 언급되어 있다. 신립군에 예속될 예정인 전라도군 2천 명이 북상 도중 탄금대 패전 소식을 듣고 돌아간 기록이 난중잡록에 보인다.

27일 고니시(小西行長)가 거느린 왜군은 이미 조령을 넘어 단월역(丹月驛)에 이르렀다. 이에 충주목사 이종장 (李宗長)과 순변사 이일이 척후로 나갔지만, 적군에게 길이 막혀 신립은 적정(敵情)을 정탐할 수 없었다.

음력 4월 28일에 해당되는 양력은 6월 초로서 장마철이었으며 또한 이날 탄금대에는 기병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소나기가 쏟아졌다. 숫적으로도 열세였지만 지형적으로도 불리하였고 기후마저 도와주지 않아 신립이 이끄는 조선군은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16세기 말이라면 보병의 화약무기에 비해 아직은 기병이 유리할 수도 있는 시기이나, 조총이라는 화약무기를 대량 운용한 왜군에 대한 대처법을 조선군이 제대로 알지 못했을 수도 있다.

기병의 신속한 기동성을 믿었기에 탄금대로 내려왔고 도망병을 관리하기 위해 배수진을 쳤던 신립의 판단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배수진이었기 때문에 치고 빠지는 전술을 구사할 수 없었고 그날따라 비가 왔으므로 기병이었기 때문에 움직임에 제한이 많았다.

28일 새벽 왜군은 부대를 나누어 본진은 충주성에 돌입하고, 좌군(左軍)은 달천(達川) 강변으로 숨어 내려왔으며, 우군(右軍)은 산으로 숨어 동쪽으로 나가 강을 건넜다. 신립은 당황해 충주성으로 급히 말을 달렸으나, 군대의 전열이 미처 정비되기도 전에 성안의 왜군이 나팔소리를 신호로 일제히 출격, 조선의 관군은 대패하였다.

전사한 장수들의 신도비문, 시장 등을 종합해보면 조선군이 2-3회 기병돌격을 시도한 다음 왜군에게 포위섬멸 당한 것으로 전투의 전체적인 윤곽이 그려진다.

 

재조번방지나 연려실기술, 수정실록 등에 의하면 전투 막판에 신립이 탄금대로 돌아와 김여물에게 "살고자 하는가?" 라고 묻자 김여물이 "내 어찌 살고자 하겠소" 라고 답하고 신립과 김여물이 함께 적병을 죽이고 둘다 강물에 뛰어들어 죽은 것이라 기록되어 있다. 충주의 사민(士民)과 관속은 아군을 믿고 피난하지 않아 왜군에게 희생된 사람이 다른 지방보다 많았다.

이 전투의 영향으로 인하여 왜군은 한양까지 일사천리로 올라갔으며 선조는 어쩔 수 없이 도성을 버리고 북쪽으로 몽진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 전투에서 이일만 유일하게 살아남았는데 이일은 평복으로 갈아입고 북상해 어가행렬과 만난다.

 

【 탐방일자 】2012년 8월 1일(수)

【 탐 방 기 】  

여름 휴가를 맞아 8월1일~2일간 1박2일 동안 '사계절이 아름다운 괴산의 명소를 찾아서'란 테마로 충청북도 괴산군을 찾아가는 길에 중간에 위치한 충주의 탄금대를 탐방하게 되었다.

역사적인 장소라 항상 인근을 지날 때마다 한 번은 탐방을 하리라 생각을 하였었지만 그 계획을 이루지 못하다가 이번에 여름휴가에 그 소원을 풀게 되었다.

그러나 한층 기대에 부풀어 찾은 곳이라 그런지, 주변의 경관이나 문화유적 등 볼거리가 없어 약간의 아쉬움과 실망감을 느꼈었지만, 이번 탐방으로 탄금대의 유래와 탄금대가 지닌 사적 의미를 공부해 보는 기회가 되었다는 것에 만족을 한다.

탄금대와 주변에 있는 탑(塔), 정자, 비(碑) 등을 소개하는 것으로 탐방기를 대신히기로 한다.

 

 

 

                 ▲ 탐금대 숲길 산책로

 

♧ 용섬

충청북도 충주시 칠금동 산1-1번지 탄금대에서 십이대 앞 남한강 중간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철새의 도래지로 이용되고 있었으나 현재 용섬은 사유지로 토지 주인이 농사를 짓기 위하여 자연 형태의 습지를 밭으로 변경하고 있는 상태이다.

 

                ▲ 탄금대의 대흥사 옆 강변에서 바라본 용섬

 

현재의 토지는 실제 조사면적이 약 24,000평 규모이나 토지대장에는 3팔자 12,450평으로 되어 있다.

오래 전에 용섬에는 1가구가 살았었는데 충주댐을 만들기 전 1970년대에 대홍수가 나자 용섬은 물에 쓸리고 식구들이 미루나무 꼭대기에서 구조 신호를 보내다가 실종되었다는 얘기가 있다.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고 모래가 쌓여서 생긴 섬으로 충주댐 아래 보조댐으로 만수위시 섬이 물에 잠기지 않으며 겨울철에는 천둥오리를 비롯한 철새의 서식지가 되었으며 탄금대와 연계하여 개발 가치가 충분히 있고 지금은 나무보다는 풀 종류가 많다.

 

 

                 ▲ 탄금정가는 길(사진 上)

                    탄금정가는 길에 바라본 남한강 일대 전경(사진 下)

 

♧ 탐금정(彈琴亭)

 

 

2층의 누각 형태의 이층 콘크리트 건축물이다.

열두대 가는 길목 전망좋은 곳에 서 있다. 1층은 2단의 기단을 만들고 한 변의 길이가 7m 의 정방형 위에 한 변의 길이가  80cm 정방형의 주초석을 놓고 이에 사방 50cm 크기의 사각기둥을 각각 280cm 거리에 4개를 놓아 2층 누각을 지탱하고 있으며 폭 120cm의 계단을 만들어 2층으로 올라가는 통로를 만들었다.

2층은 720cm를 한 변의 길이로 하는 정방형으로 가운데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고 가에는 난간을 둘러 전망대로 이용되고 있으며 네 기둥사이에는 지름 60cm의 원형콘크리트 기둥을 세워 초익공 계통의 공포를 구성하였다.

본래 천운정으로 광무7년(1903) 충청북도 관찰사 김양규가 조부가 충주목사로 재임시 지금의 교육청 자리에 있던 연못(상연당) 가운데에 석가산을 쌓고 그 위에다 육각정을 세우고 천운정이라 이름 짓고 매년 7~8월이 되면 수령과 유생들이 모여 시를 짓고 즐기던 곳이었다.

 

                 ▲ 탄금정에서 바라본 남한강 전경

광무10년(1906) 충주공립보통학교를 이곳에 건축하고 운동장으로 사용키 위해 상연정을 메우제 되며 육각정은 사직산으로 옮기고 임시 석영으로 사용하다가, 1955년 당시 충주읍장이었던 박승두가 이 정자가 사직산에 이건되어 있던 것을 탄금대 열두대 위로 옮긴 것이다. 목조된 이 정자는 낡아서 1976년 6월 이 자리에 현재의 탐금정을 짓고 6각형이던 천운정은 1977년 호암지 3번 국도 옆 동산에 콘크리트 건물로 6각정 정자가 다시 지어졌다.

 

♧ 탄금대 충혼탑(忠魂塔)

 

 

우리나라 국운을 이어온 이면에는 겨레의 생명을 계승시키느라 자기 자신을 희생시킨 애국충정이 뒷받침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 뜻을 이념으로 해온 대한민국 상이군인용사회 충청북도 충주분회와 대한제대장병보도회(현 재향군인회)에서 1955년 11월 호국영령들을 기리기 위한 충혼탑을 건립하기로 결의하고 건립장소를 모색하다가 선열들의 피가 맺힌 전적지인 탄금대에다 건립예산 200만환으로 건립하게 되었다.

충혼탑 건립준공은 1956년 9월이며, 안치 대상은 해방후 특히 6.25동란등으로 국가의 방패가 되어 낙화한 충주 중원지방 전몰장병과 경찰관, 군속, 군노무자 2,838의의 넋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하였으며 매년 현충일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충혼탑은 문화관에서 열두대로 가는 길 옆에 넓은 부지 위에 서 있다. 넓은 잔디밭에 978㎡의 넓이에 직사각형 모양으로 철책을 세우고 정면에 310cm 크기의 철문을 만들어 출입을 통제하였다. 철책 양옆에는 2개의 국기게양대를 세웠고 탑 앞에는 78 x 124cm 크기의 화강암으로 만든 상석을 놓고 상석 앞에는 향로석이 있으며 향로석 옆에는 6각의 향합석이 있다.

상석 뒤에는 탑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고 탑의 기단부는 2층으로 구성하였는데 초층 기단의 크기는 360cm 정방형에 높이는 165cm이며, 2단 기단은 240 X 245cm에 높이는 118cm 정도이며, 그 위에 10cm의 탑신받침을 놓고 5개의 탑들을 중층으로 쌓아올려 탑신을 구성하였다.

탑신의 아래쪽에는 무궁화를 양각하고 그 위로 忠魂塔이라 음각하였다.

충혼탑 글자 위로 태극기를 조각하였으며, 맨 위의 돌은 탄환 모양으로 만들어 탑신을 마무리지었다. 전체의 석재는 모두 화강암이며 높이는 8.5m이다.

특히 충혼탑이란 글씨는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이라는데 의의가 크다.

 

♧ 탄금대 팔천고혼위령탑

 

 

1592년 4월 14일 부산, 동래를 거쳐 북상중인 왜군을 맞아 조정에서는 지형조건상 죽령과 조령을 지키는 일이 급선무라고 생각하고 순변사 이일을 경상도로 내려 보냈다.

이때 신립이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고자 본인이 싸우겠다고 의사를 밝히자 왕은 그를 도순변사로 임명, 보검을 내려주었고 신립은 유성룡이 모집해준 군관 80여명만을 데리고 충주 일대로 내려오면서 각지에서 젊은 농민들까지 모아 8,000여명의 군졸을 이끌고 4월 26일 충주에 도착하여 4월 28일 이곳 탄금대 주변에 배수진을 치고 왜군을 맞아 사력을 다하여 분투하였으나,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에 비해 화력의 열세와 중과부적으로 천추의 한을 남기고 장졸들과 함께 장열히 최후를 마친 전적지이다.

이 전투에서 산화한 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탑이 팔천고혼위령탑이다.

탑 상단에 형상화한 혼불은 산화한 영령들을 추모하는 모습으로 조국을 지키는 수호신을 상징하고, 아래 부분의 신립 장군과 5인 군상은 최후를 맞이하여 굴하지 않는 호국충절을 나타내고 있으며, 바위와 바닥 부분의 원반모양은 탄금대를 싸고 도는 남한강과 달천강의 물결 모양을 살려 구성한 것이다.

또한 탑 뒷부분의 부조벽은 당시의 전투장면을 재현하여 탄금대전투를 한 눈에 느낄 수 있도록 구상한 작품이다.

8천고혼을 4인의 군상으로 표현하고 탑신 상단부에 혼불을 표현하여 산화한 영령들을 추모하는 모습과 조국을 지키는 수호신의 의미를 부여한 작품이다.

*건립기간:2001년12월29일~2003년01월15일

*사업비:삼억칠천사백오십만원(\374,500,000)

*규 모 : 높이 15m(탑신), 지름 18m(기단부)

 

                 ▲ 탄금정에서 대흥사로 내려가는 길

 

♧ 대흥사

 

 

1955년 오법우 스님이 창건한 대한불교태고종의 사찰로 탄금대 북쪽 계곡의 끝 부분 남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곳인 충장공 신립장군순절비 아래 자리를 하고 있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2칸에 23.5평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요사채 2동과 종각,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 양 옆에 한쌍씩 4개의 석등(전체높이 3m, 하대석은 지름 110cm, 높이 80cm의 크기)과 석탑, 석비가 있다.

대웅전 옆에는 이 절의 창건자인 오우법 스님의 부도탑이 있다.

 

 

** 대흥사 9층석탑

대웅전 축대 아래 자리한 9층석탑은 화강암의 석재를 다듬어 만들었다.

지대석은 한변의 길이가 260cm, 높이가 20cm이며, 60cm 정도 크기의 8개의 돌기둥을 세워 쇠줄로 연결하였다. 그 위에 한변의 길이가 180cm, 높이 45cm인 하나의 돌로 면석을 만들고 그 위에 한변의 길이 18cm, 높이 15cm의 하나의 돌을 놓아 갑석으로 하여 단층기단 형식을 취했다.

갑석 위에 한변의 길이 130cm, 높이 8cm의 탑신받침을 놓고 그 위에 길이 95cm 높이 48cm의 초층 탑신석이 놓이고, 그 위에 길이 120cm 높이 24cm의 초층 옥개석이 놓였다. 옥개석은 층급받침이 없고 경사가 완만하며 합각마루의 반전이 거의 없고 귀의 추녀가 약간 올라가 경쾌한 감을 준다.

각 층의 탑신과 옥개석이 체감하여 9층의 탑신석은 길이 25cm, 높이 18cm로 옥개석은 길이 60cm, 높이 20cm로 줄어 들었다. 상륜부는 노반과 연봉만 있어 단순하게 느껴진다. 탑에 사용된 석재는 화강암이며, 전체 높이는 5m70cm이다.

 

♧ 충장공신립장군순절비(忠壯公申砬將軍殉節碑)

 

 

1981년 건립된 전체 높이 376cm의 이 비는 탄금대 대흥사 뒷편에 있다.

비의 받침돌은 거북 형태로 만들고 앞 뒤 길이가 260cm에 달하고 폭이 147cm이며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거북 형태로 조각한 수법은 간단하며 치졸하다. 빗돌의 높이는 197cm이며, 너비가 79.5cm, 두께는 28.5cm로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앞면에는 한자로 '忠壯公申砬將軍殉節碑'라 쓰고 뒷면에는 전부 한글로 비문을 쓰고 <>안에 한자를 넣어 뜻을 명확히 하였다. 비의 우측면에는 이 비의 설립에 관여한 사람을 기록하였다.

개석은 이수형태로 너비 100cm, 두께 51cm, 높이 100cm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앞면과 뒷면에 각각 용 두 마리를 양각하였으나 조각수법이 치졸하다.

전체 높이는 376cm이며, 1981년에 건립하였다.

 

                 ▲ 대흥사에서 열두대입구로 오르는 길

 

♧ 감자꽃 노래비

감자꽃 노래비는 135 x 180cm의 지대석과 그 위에 120 x 162cm의 2중 지대석 위에 높이 360cm, 폭 60cm의 반원통형의 화강암을 세우고 지름 110cm의 반구형에 감자꽃을 새겨 돌기둥의 25cm 상단에 배치하고 감자꽃 조각위에 45 x 60cm의 검은돌을 붙이고 거기에 글자를 새겼으며, 글자판 위 10cm 상단에 10 x 45cm의 오석에 노래비라는 제목을 음각하였다.

노래비 옆면에 30 x 35cm의 오석에 부착하여 여기에 감자꽃 노래비의 설립에 관하여 기록하였다. 탄금대의 동쪽 충혼탑 옆에 위치해 있다.

 

 

* 노래비(碑文)

 

   감자꽃

 

자주 꽃 핀 건

자주감자

파보나 마나 자주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감자

파보나 마나

하얀감자

 

* 권태응(權泰應 1918~1951)

1918년 4월20일 충주 칠금동 362번지에서 출생. 어려서는 주부님께 서당공부를 하다가 9살 때 충주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해서 1932년 3월25일 졸업하고 서울 제일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에 입학, 1937년 3월4일 우등생으로 졸업하였다.

그 해 4월1일 일본 조도전대학 전문부 문학과에 진학하였으나 민족운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입건되어 1학년을 못마치고 중퇴를 당하고 만다.

가정은 부유한 편이었으며 조부께서는 한학자였고, 부친은 일찍 개화하여 1920년경 도일해서 일본인들의 압제를 무릅쓰고 유학을 한 분이다.

제일고등보통학교 재학 당시부터 성적이 우수했지만 특히 문학에 튿출했고 음악, 운동(정구)도 좋아하는 다정다감한 성격이었으나 정의심이 강한 편이어서 한국인으로서 당당하지 못한 행위가 있을 경우 폭력으로 제재를 해 주는 일이 가끔 있어서 일본인으로부터 요주의 인물이라는 지목을 받았다.

어느 날 가정방문을 온 일본인 교사에게 한 장의 사진이 발각되어 문제된 일이 있었다. 사진은 북악산에 올라 총독부를 내려다보며 큰돌을 들고 쳐부수려는 사진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우등생이었기에 관용을 받았던 것이다.

일본서 유학할 때 입건이 되고 퇴학(1938년)을 당한 후부터는 재일 유학생들을 규합하여 독서회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본격적으로 하였다. 그때 일본경찰에 연행된 일이 한 두번이 아니었는데 다행히도 그때 일본인 중 궁교라는 유력인사의 노파와 잘 알게되어 어려운 고비를 여러 차례 도움을 받았으나 결국 진상이 밝혀져 1935년 5월 형무소에 투옥되어 모진 옥살이를 하다가 몸이 나약해져 폐결핵으로 판명되자 1940년 6월에 출옥하게 되었다.

귀국 후 인천의 결핵요양원에 입원 치료를 받았다. 입원중에도 작품활동을 계속하였고 병세가 좋아지자 결혼도 하고 농장생활을 하며 작품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면서도 동민들을 모아 야학을 구실로 항일사상을 강의하고 때론 각본을 만들어 소인극을 하는 등 민족운동에만 전념하다가 1945년 해방 후 신약에 효과를 얻어 병이 좋아지더니 1950년 한국전쟁으로 약을 얻기 힘들자 1951년 3월28일 별세하였다.

그는 아동문학가였으나 주로 토속적인 것을 소재로 하는 작품이 많고 그 맥 속에서 반드시 항일을 내용으로 부각시키고 있었다 한다.

'고추밭', '율무', '옹달샘' 등이 있으며 당시 창씨개명을 반대하던 작품으로 '감자꽃'이 남아 있다.

 

♧ '탄금대사연' 노래비

 

충주를 대표하는 향토가요로 37년동안 시민의 사랑을 받아 온 '탄금대사연' 노래비는 2005년 6월29일 야외음악당 앞에 세워졌다.

바닥너비 2.7m, 높이 6.1m의 화강암 및 오석으로 만들어진 비로 음표를 형상화하였다.

1968년 봄 신인가수에 의해 처음 발표된 '탄금대사연'은 KBS에 재직중이던 충주 출신 언론인 이병환 작사와 오아시스레코드사에 전속으로 활동하던 백봉 작곡가에 의해 만들어진 노래이다.

1968년 백진주양이 처음 발표되었으며, 하길(1970), 주현미(1980), 백승태(1992), 최유정(2005) 등 6명의 가수에 의해 불려졌으며, 많은 국민들로부터 사랑받는 곡으로 자리잡아 왔다.

 

* 탄금대사연

= 작곡 : 백봉

= 작사 : 이병환

* 노래 : 주현미

 

탄금정 굽이돌아 / 흘러가는 한강수야

신립장군 배수진이 / 여기인가요

열두대 굽이치는 / 강물도 목메는데

그님은 어디가고 / 물새만이 슬피우나

송림이 우거져서 / 산새도 우는가요

가야금이 울었다고 / 탄금인가요

우측이 풍류읊던 / 대문산 가는허리

노을진 남한강에 / 님부르는 탄금아가씨

 

                 ▲ 충혼탑에서 탄금대입구 주차장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