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제 역사의 발자취를 찾아서...(부여 Ⅲ편) ▶
백제 왕실 별궁의 연못! 부여 궁남지(扶餘 宮南池)
백제 사비시대 중심 사찰! 부여 정림사지(扶餘 定林寺址)
2008년 6월12일~13일 1박2일간 삼국시대의 옛 수도였던 신라의 경주 탐방, 2010년 6월17일 백제의 공주(옹진) 공산성과 예산의 임존성 탐방에 이어 백제의 마지막 수도였던 부여(사비)를 찾아 1400여년 전 역사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기로 한다.
1박 2일이란 짧은 시간 내에 넓은 부여군 전역에 흩어져 있는 백제시대의 유적지와 문화재 그리고 사적지들을 전부 돌아보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사전에 탐방 가능한 곳을 미리 정하고 백제 역사 여행을 시작하였다.
부소산성, 가림성 등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사적지,
무량사와 대조사, 정림사지 등 국가지정문화재를 보관하고 있는 사찰이나 옛 절터,
그리고 백제 무왕의 별궁 연못으로 추정되는 궁남지 등을 찾아 이번 옛 백제의 마지막 수도였던 사비(부여) 여행을 하기로 하였다.
이번에 탐방한 유적지들의 자료를 정리하면서 탐방한 유적지에서 아쉽게 놓쳐버린 것이나, 짧은 일정으로 찾지 못한 유적지는 다음에 기회가 주어진다면 재 방문을 하여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기로 하고, 탐방기를 유적지 별로 정리하여 총 5편으로 나누어 작성을 해 보기로 한다.
- Ⅰ편 <천년의 세월을 이어 온 고찰! 무량사(無量寺)>
- Ⅱ편 <부여에 남아있는 조선시대의 객사와 관청! 홍산현 객사(鴻山縣 客舍)와 관아(官衙), 부여객사(扶餘客舍) 와 동헌(東軒)>
- Ⅲ편 <사비성의 외곽 방어성인 금강 하류의 가림성(加林城)과 거대한 미륵석불의 대조사(大鳥寺)>
- Ⅳ편 <왕실 별궁 연못인 궁남지(宮南池)와 사비시대 중심 사찰이었던 정림사지(政林寺址)!>
- Ⅴ편 <수도 사비의 중심 산성으로 백제 멸망의 비운의 장소! 부소산성(扶蘇山城)>
【 일 정 표 】2012년 9월 8일(토)-9일(일) 1박2일
◈ 첫째날(9/8) : 무량사(외산면)-홍산현객사&관아(홍산면)-대조사&가림성(임천면)-궁남지(부여읍)-정림사지(부여읍)
◈ 둘째날(9/9) : 부소산성&고란사-부여객사&동헌
【 부여 궁남지(扶餘 宮南池) 】
*사적 제135호(지정일:1964년06월10일)
*소재지: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117외
*면적:210,881㎡
부여 남쪽에 위치한 백제의 별궁 연못이다.
백제 무왕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궁궐의 남쪽에 연못을 팟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근거로 궁남지라 부른다.
'삼국사기 무왕조'에 따르면 "3월에 궁성 남쪽에 연못을 파고 물을 20여리나 되는 긴 수로로 끌어들였으며, 물가 주변의 사방에는 버드나무를 심고, 못 가운데에는 섬을 만들어 방장선산을 본떴다"라고 되어 있다.
▲ 궁남지의 연못가 산책로
이러한 왕궁 근처에 연못을 만드는 백제의 전통은 이미 한성시대부터 시작되었는데, 다만 한성시대에 조영된 왕궁에 딸린 연못은 아직 발굴된 바 없어서 그 실체를 확인하지 못하고 있으나, 이에 비해 웅진시대의 왕궁이었던 공산성 안에서는 당시의 것으로 판단되는 연못이 왕궁지로 추정되는 건물지와 함꼐 발굴되었다.
공산성에서 발굴된 연못은 바닥이 좁고 위로 올라갈수록 넓어지는 원형의 연못인데 직경 7.3m, 바닥 직경 4.8m, 그리고 깊이 3m의 크기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한성시대와 옹진시대의 연못은 그 자체만 확인될 뿐 궁남지와 같이 신선과 불로초가 있고, 황금과 백은으로 된 궁궐도 있는 일종의 이상향인 삼신산(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궁남지 한 가운데에 방장산을 모방한 조산이 있었다면 이는 중국 진,한나라 때부터 신선사상에 근거하여 삼신상을 조성하였던 것이 백제의 왕궁 조원(造苑)에 처음 들어 온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 연꽃이 재배되고 있는 궁남지
궁남지에 대한 직접적인 것은 아니지만. '삼국사기 백제 무왕37년조'에는 "8월에 망해루에서 군신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고, 다시 39년조에는 "3월에 왕이 왕궁의 처첩과 함께 대지에서 배를 띄우고 놀았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어, 궁남지가 조성될 당시에 붙여진 이름은 아니고, 백제시대에는 단지 대지라고 불리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또한 뱃놀이를 할 수 있을 만큼 그 규모가 컸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규모는 정확히 알 수가 없고, 현재는 1만평 정도만 남아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약 3만평 정도가 연못으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확한 크기는 발굴조사를 통해서만 확인될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궁남지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의자왕 15년조'에 보이는 "2월에 태자궁을 지극히 화려하게 수리하고 왕궁 남쪽에 망해정을 세웠다"라는 기록이다.
망해루나 망해정을 대지(궁남지)를 바라보면 바다와 같이 시원한 시원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고, 이렇게 바다로 느낄 정도의 큰 연못을 왕궁 근처에 만드는 것이 백제가 처음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신라의 경우 문무왕대에 안압지를 만들고, 그 안에 삼신도를 조성하며, 주변에 임해전을 세우게 되는데, 이 모든 것이 기본적으로 백제의 궁남지와 같은 개념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런 점에서 백제의 조원 기술은 삼국 중 으뜸이었으며, 통일신라의 조원에 큰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가 있다.
▲ 연못 안 조산의 정자(사진 上)
연못 안의 조산을 연결하는 나무다리(사진 下)
연못 동쪽에 당시의 별궁으로 보이는 궁궐터가 남아 있으며, 현재 연못 주변에는 별궁 안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우물과 주춧돌이 남아있고 연못 안에는 정자와 목조다리를 만들어 놓았다.
(궁남지에서 부여 궁남지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2011년 7월28일 고시)
▲ 부여 정림사지 안내도(사진 上)
부여 정림사지 박물관(사진 下)
【 부여 정림사지(扶餘 定林寺址) 】
*사적 제301호(지정일:1983년03월26일)
*소재지: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54
*면적:59,245㎡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시기(538~660년)의 중심 사찰이 있던 자리이다.
발굴조사 때 강당터에서 나온 기와에서 '태평8년 무진 정림사 대강당초(太平八年 茂辰 定林寺 大藏唐草)'라는 글이 발견되어. 고려 현종19년(1028) 당시 정림사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즉 고려시대에 백제 사찰의 강당 위에 다시 건물을 짓고 대장전이라고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정림사의 주요 건물 배치는 중문, 오층석탑, 금당, 강당에 이르는 중심축선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놓이고, 건물을 복도로 감싸고 있는 배치를 하고 있다. 그러나 특이하게 가람 중심부를 둘러싼 복도의 형태가 정사각형이 아닌 북쪽의 간격이 넓은 사다리꼴 평면으로 되어 있다.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중문 앞의 연못이 정비되어 있고, 석불좌상을 보호하기 위한 건물은 1993년에 지어졌다.
백제 때에 세워진 국보 제9호 5층석탑과 고려시대 만들어진 보물 제108호 석불좌상이 남아 있다. 출토 유물로는 백제와 고려시대의 장식기와를 비롯하여 백제 벼루, 토기와 흙으로 빚은 불상들이 있다.
1980년의 발굴조사에서 금당지, 중문지, 강당지, 회랑지 등이 확인되었고 또한 석탑 기초의 판축기법, 다량의 와당과 격목와 등이 발견되어 백제시대에 창건한 절임이 분명하게 되었다.
♧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扶餘 定林寺址 五層石塔)
*국보 제9호(지정일:1962년12월20일)
*소재지: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54
국보 제11호인 미륵사지석탑과 함께 백제 석탑이 목탑의 번안이라고 하는 근거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석탑양식의 계보를 정립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고, 1981년에는 정림사지에 대한 전면 발굴이 이루어져 석탑 주변도 조사되었다. 석탑의 주변 일대를 발굴 조사한 결과 가람배치의 전모가 밝혀졌고, 일찍이 석탑 주변에서 '태평8년 무진 정림사 대강당초(太平八年 茂辰 定林寺 大藏唐草)'라는 명문의 기와가 출토되어 고려 초기인 현종19년(1028)에는 정림사라고 불렀던 것이 확실히 밝혀져, 그 뒤 이 석탑의 명칭을 정림사지오층석탑이라 부르고 있다.
석탑의 높이는 8.33m, 석탑의 구조는 일반적인 건축이나 석탑에서와 같이 지대석을 구축하고 기단부를 구성한 다음 그 위에 5층의 탑신부를 놓고 정상에는 상륜부를 형성하였다.
기단부는 8매의 장대석으로 지대석을 만들고 그 위에 다시 8매의 낮은 돌을 놓은 다음 양 우주(모서리 기둥)와 1탱주, 면석이 16매로 조립되어 있는 중석을 놓았다. 중석 위의 갑석은 8매로 구성되었으며 두껍다. 상부면은 약간의 경사가 있도록 하여 낙수면을 이루게 하였으며 탑신부를 받는 받침없이 평평한 갑석 위에 탑신을 놓았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이 108개나 되는 석재로 이루어졌는데 각 층의 조립형식은 같다.
조층탑신은 규격이 크기 때문에 12석으로 구성되었으며 네 귀퉁이에 배흘림이 있는 우주석을 세우고 그 사이의 각 면은 2매씩의 긴 판석을 끼웠다. 2층 이상의 탑신에 있어서는 2,3층 4매, 4층은 2매, 5층은 1매의 석재로 구성되었다.
각 층의 양쪽 우주에는 역시 배흘림이 표현되었으나 초층에 비해 2층 이상 탑신의 높이가 급격히 체감되어 아주 낮아졌기 때문에 우주도 짧아서 배흘림이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위로 올라갈수록 체감된 탑신석 전체에 비하여 우주의 폭이 넓은 점이 눈에 띈다.
각 층 옥개석은 낙수면부와 받침부가 별개의 석재로 구성되었으며 모두 여러 개의 판석으로 결구하였는데, 각 세부에서 목조가구의 변형수법을 볼 수 있다. 특히 두공(공부 부재의 총칭)을 변형시킨 받침이나 낙수면 네 귀퉁이에서의 기와지붕의 우동마루형 등은 목조가구의 수법을 잘 보여준다.
옥개석 하면의 받침부는 4매의 각형 판석을 아래에, 그 위에 다시 8매의 각을 죽인 모죽임형 판석을 얹은 2단으로 미륵사지석탑에서 보이는 창방, 평방, 포벽 등의 석재가 없고 목조건축의 공포 부분을 간략하게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모전석탑에서 시작된 신라의 석탑 역시 목조건축의 공포 부분을 간략화하여 지붕 아래를 내어쌓기로 하여 옥개 받침을 표현하였고, 통일신라 감은사지삼층석탑에 이르면 각형의 5단 층급받침 형태로 옥개받침이 정형화되고 낙수면은 지붕모양으로 경사를 나타나게 하였다.
낙수면은 평박하면서도 넓어서 늘씬한데, 네 귀퉁이의 전각이 전체적으로 살짝 반전되어 목조건축의 처마선처럼 경쾌하다. 옥개석 위에는 다른 돌을 놓아 높은 굄대를 만들어 그 위층의 탑신을 받고 있다. 이와 같은 높은 굄은 2층 이상의 탑신이 지나치게 체감되어 자칫하면 중후해질 것을 우려하여 취해진 구조로서, 이로 말미암아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유지하면서 오히려 경쾌감을 더하고 있다.
상륜부는 현재 5층 옥개석 위에 거의 원추형에 가까운 노반석 하나가 있을 뿐 다른 부재가 없으며, 찰주공은 노반을 관통하여 그 밑의 옥개석 중심부에까지 패여 있다.
1963년 조사에서 4층 탑신 남면에 두께 13cm의 판석으로 가린 사리공이 있는 것을 확인하였는데 사리 장치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 석탑의 특징은 목조탑의 구조를 석재로써 변형하여 표현하고 있는 탑으로서, 좁고 낮은 단층기단과 각 층 우주에 보이는 배흘림 수법, 얇고 넓은 각 층 옥개석의 형태, 옥개석 각 전각에 나타난 반전, 목조건물의 두공을 변화시킨 옥개석 하면의 받침수법, 낙수면 네 귀의 우동마루형 등에서 그와 같은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현재 상륜부를 결실한 노반석까지의 석재가 149개나 되는 것에서도 이 탑이 목조가구의 번안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세부수법에 있어서는 맹목적인 목조양식의 모방에서 탈피하여 정돈된 형태에서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이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장중하고 명쾌하여 격조 높은 기품을 보이고 있다.
이 탑의 초층탑신에는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한 공을 기리는 글이 해서로 새겨져 있어서 한떄 '편제탑(平濟塔)'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익산 미륵사지석탑과 함께 백제시대에 세워진 귀중한 탑으로, 세련되고 격조 높은 기품을 풍기고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며, 백제석탑이 목탑의 번안에서 시작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는 근거를 보여주고 있는 백제탑 형식 중 전형적인 석탑이자 석탑의 시조라 할 수 있다. 또한 이 석탑은 각부의 양식수법이 특이하고 본격적인 석탑으로 정착하고 있는 전이적인 규범을 보여주고 있어 한국 석탑의 계보를 정립시키는데 귀중한 존재가 되고 있다.
♧ 부여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扶餘 定林寺址 石造如來坐像)
*보물 제108호(지정일:1963년01월21일)
*소재지: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54
▲ 석조여래좌상과 대좌(대좌의 높이를 실감나게 보여주기 위해 옆에서 기념촬영)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남북으로 마주보고 있다.
정림사는 6세기 중엽에 처음 창건되어 백제 멸망 때까지 번창하였던 사찰로 고려시대에 다시 번창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석불상은 고려 때의 번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금의 머리와 보관은 제작 당시의 것이 아니라, 후대에 다시 만들어 얹은 것으로 보인다. 신체는 극심한 파괴와 마멸로 형체만 겨우 남아 있어 세부적인 양식과 수법을 알아보기 어렵지만, 어깨가 밋밋하게 내려와 왜소한 몸집을 보여준다. 좁아진 어깨와 가슴으로 올라간 왼손의 표현으로 보아 왼손 검지 손가락을 오른손으로 감싸쥔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 석조여래좌상과 대좌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는 상대,중대,하대로 이루어진 8각으로 불상보다 공들여 만든 흔적이 역력하다.
상대는 연꽃이 활짝 핀 모양이며, 중대의 8각 받침돌은 각 면에 큼직한 눈모양을 새겼다. 하대에는 연꽃이 엎어진 모양과 안상을 3중으로 중첩되게 표현했다.
현재 불상이 자리하고 있는 위치가 백제시대 정림사지의 강당 자리로 이곳에서 발견된 명문기와를 통해 이 작품은 고려시대 절을 고쳐 지을 때 세운 본존불로 추정된다.
11세기 중엽의 만복사 대좌나 불상과 함꼐 11세기 고려 불상 양식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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