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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 조선왕릉! 구리 동구릉(東九陵) ⑧경릉(景陵)

왕마구리 2015. 3. 17. 01:37

◀ 세계유산 조선왕릉! 구리 동구릉(九里 東九陵) ▶

가족무덤을 이루고 있는 왕릉군!

조선왕릉의 변화 과정을 살필 수 있는 왕릉군!

 

 

조선왕릉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왕릉 가운데 가장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고유의 유적이다. 왕릉 개개의 완전성은 물론이고 한 시대의 왕조를 이끌었던 역대 왕과 왕비에 대한 왕릉이 모두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욱 큰 가치를 지닌다.

1392년 고려 왕조가 막을 내리고 탄생한 조선 왕조는 이후 1910년까지 무려 519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이어갔다.

이처럼 하나의 왕조가 500년 이상 지속된 것은 매우 보기 드문 유례이다. 이러한 유구한 역사를 가진 조선 왕조에는 27대 왕과 왕비 및 추존왕과 왕비가 있는데, 이 왕족의 무덤을 조선왕릉이라 한다.

왕족의 무덤은 왕실의 위계에 따라 능, 원, 묘로 분류된다.

능(陵)은 추존왕, 추존왕비를 포함한 왕과 왕비의 무덤이고,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말한다. 묘(墓)는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아들, 딸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 등의 무덤을 일컷는다.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2009년 6월 30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519년의 역사를 지닌 조선은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아 조상에 대한 존경과 숭모를 매우 중요한 가치로 여겨 역대 왕과 왕비의 능을 엄격히 관리하였다. 그리하여 42기의 능 어느 하나도 훼손되거나 인멸되지 않고 모두 제자리에 완전하게 보전되었다.

조선왕릉은 우리의 전통문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600여 년 전의 제례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

 

 

▷ 조선왕릉의 분포

조선 왕족의 무덤은 모두 119기에 이르며, 이 가운데 능이 42기이고, 원이 13기이며, 묘가 64기이다.

조선 왕족의 무덤은 무덤 주인의 신분에 따라 그 명칭을 달리하는데 능(陵)은 왕과 왕비의 무덤,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빈 또는 왕의 사친의 무덤, 그 외 왕족의 무덤은 일반인의 무덤처럼 묘(墓)라고 한다.

42기의 능 가운데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태조 원비 신의왕후의 능), 후릉(정종과 정안왕후의 능)을 제외한 40기의 능이 남한에 있다.

남한에 위치한 40기의 왕릉 중 강원도 영월에 위치한 장릉(단종의 능)을 제외한 39기의 능이 서울과 경기도 일원에 자리를 하고 있다. 500년이 넘는 한 왕조의 무덤이 이처럼 온전하게 보전되어 있는 것은 세계에 그 유래를 찾기 힘들며 문화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 조선왕릉의 제향

조선왕릉의 가치는 형태적 보존에만 있지 않고, 조선왕릉을 더욱 더 빛나게 하는 것은 600년 넘게 이어져 내려온 조선왕릉의 제례의식이다.

조선은 건국 이래 산릉제례를 엄격하게 지켜왔으며, 1945년 해방 후에는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이 기일에 올리는 제사인 능기신제(陵忌辰祭)의 전통을 이어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매년 왕과 왕비의 제향일에 산릉제례가 엄격하게 행해진다.

▷ 조선왕릉의 구성

조선왕릉은 죽은 자가 머무는 성(聖)의 공간과 산 자가 있는 속(俗)의 공간이 만나는 곳으로 그 공간적 성격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 능침공간 : 왕과 왕비의 봉분(능침, 능상)이 있는 성역 공간

   ** 제향공간 : 죽은 자와 산 자가 함께 하는 영역으로 제사를 지내는 공간(정자각, 침전)

   ** 진입공간 : 왕릉의 관리와 제례 준비를 위한 공간(재실)

 

                          ▲ 구리 동구릉의 재실 외부 전경(사진 左), 재실의 전사청과 재실(사진 中) 그리고 행랑채(사진 右)

 

▷ 조선왕릉의 변천사

조선왕릉 석물의 배치와 구조는 기본적으로 큰 변화없이 오랜 기간 반복되었지만 당시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나 당대 왕의 의지에 따라 약간씩의 변화가 있어 왔다.

제1기는 태조의 건원릉(1408)에서부터 문종 현릉(1452)으로 조선 왕릉의 기본 형식을 갖춘 시기이다.

제2기는 세조의 광릉(1468)에서부터 숙종 익릉(1681)까지로 석물의 전반적인 배치나 표현상에서 조선 왕릉 특유의 조각 양식이 확립된 시기이다.

제3기는 인조의 장릉(1731)에서부터 철종의 예릉(1864)까지이며 병풍석이나 장명등의 형태에서 약간의 변화가 있었고 조각의 비례가 바뀐다.

제4기는 황제릉이 조성된 시기로,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라 칭하면서 고종의 홍릉과 순종의 유릉이 황제릉의 형식을 취하였다. 이에 더하여 유릉의 석물에서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 이데올로기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 구리 동구릉 입구

 

『 구리 동구릉(九里 東九陵) 소개 』

*사적 제193호(1970년5월26일 지정)/유네스코 세계유산(2009년6월30일 지정)

*면적:1,969,675㎡

조선을 세운 태조의 무덤으로 쓰여지기 시작한 뒤 조선시대를 통하여 가족무덤을 이루고 있는 왕릉군이다.

동구릉이란 도성의 동쪽에 있는 9개의 무덤이란 의미로, 무덤이 생길 때 마다 동오릉, 동칠릉이라 불렀는데 철종6년(1855)에 수릉이 옮겨진 이후 동구릉으로 굳어졌다.

태조가 죽은 뒤 태종은 서울 가까운 곳에 후손들이 묻힐 좋은 땅을 찾다가 하륜에 의해 이곳을 무덤지역으로 정하였다고 한다. 400여 년에 걸쳐 왕릉이 자리잡았음은 동구릉의 지세가 풍수지리설에 의한 명당임을 나타내주는 것이라 하겠다.

동구릉에는 1대 태조의 건원릉을 중심으로 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무덤인 현릉, 14대 선조와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의 무덤인 목릉,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무덤인 원릉, 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무덤인 숭릉, 20대 경종의 비 단의왕후의 무덤인 혜릉, 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무덤인 원릉, 추존 문조대왕과 신정왕후의 무덤인 수릉, 24대 헌종과 효현왕후, 계비 효정왕후의 무덤인 경릉 등 9개의 무덤이 있다.

태조의 무덤인 건원릉은 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정릉을 기본으로 삼아서 만들었으며, 조선왕조 최초의 왕릉으로서 이후 왕릉의 본보기가 되었다.

동구릉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왕릉이 변화하는 과정을 살필 수 있다. 무덤을 만들 때 각 무덤에 따른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재실을 지었다고 하나 현재 각 무덤에 제실은 없고, 9개의 무덤을 하나의 경계지역으로 하여 구릉 남쪽에 재실이 있다.

전체적인 모습은 중앙 북쪽의 건원릉을 중심으로 동쪽에 3개, 서쪽에 5개의 무덤을 거느리고 있는 모습이다. 조선의 왕릉 중 한 지역내에 왕릉군을 이루고 있는 곳은 서오릉과 서삼릉이 있으나, 동구릉에 가장 많은 무덤이 있다.

 

▷ 동구릉의 국가지정문화재들

- 보물 제1741호 구리 동구릉 건원릉 정자각(2011년12월26일 지정)

- 보물 제1742호 구리 동구릉 숭릉 정자각(2011년12월26일 지정)

- 보물 제1743호 구리 동구릉 목릉 정자각(2011년12월26일 지정)

- 보물 제1803호 구리 동구릉 건원릉 신도비(2013년07월16일 지정)

 

【 소 재  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197번지

【 방문일자 】2015년 2월 28일(토)

【 관람정보 】

*관람시간 : (매주 월요일 휴관)

                  2월~5월,9월~10월:9시~18시(매표:9시~17시)/6월~10월:9시~18시30분(매표:9시~17시30분)/11월~1월:9시~17시30분(매표:9시~16시30분)

*관람요금 : 어른(19~64세) \1,000

*문의(조선왕릉 동부지구관리소) : T.031)563-2909, 564-2909

 

                          ▲ 구리 동구릉 안내도

 

*교통안내 :

  - 청량리역, 상봉역에서 #88번 또는 #220번 버스 환승, 동구릉 하차

  - 강변역에서 #1번, #1-1번, #1-2번, #92번 버스 환승, 동구릉 하차

  - 중앙선 구리역에서 마을버스 #2번, #6번 버스 환승, 동구릉 하차

【  탐방코스 매표소→수릉→현릉→건원릉→목릉→휘릉→원릉→경릉→혜릉→승릉→매표소

 조선왕릉 동구릉 소개는 탐방코스와는 관계없이 조성 순서에 따라 건원릉-현릉-목릉-휘릉-숭릉-혜릉-원릉-경릉-수릉의 순으로 하기로 한다. 또한 탐방기는 각 릉별로 나누어 총 9편으로 소개를 한다.

 

 

「 경릉(景陵) 」 조선 제24대 헌종과 원비 효현왕후, 계비 효정왕후의 능

세 개의 봉분이 나란히 있는 조선왕릉 유일의 삼연릉!

 

                          ▲ 홍살문 밖에서 바라본 구리 동구릉의 경릉

 

 

*위치: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9-2번지

*조성시기:철종원년(1849년) 10월 28일

경릉은 세 개의 봉분이 나란히 있는 조선 왕릉 중 유일한 삼연릉 형태이다.

제일 우측의 능침이 현종의 것이고, 가운데가 효현왕후 능침이며, 좌측이 계비 효정왕후 능침이다. 이는 우왕좌비의 원칙에 따른 것으로 중국 등과는 다르게 배치되어 있어 조선 왕릉의 특징을 보여준다.

모두 병풍석은 없고 난간석으로 세 능침이 이어져 있으며, 각 능침 앞에 혼유석을 따로 두었다. 봉분 아래가 초계, 중계, 하계 3단의 구획으로 이루어진 영조 이전의 왕릉과는 달리 문석인, 무석인이 한 단에 세워져 있다. 문무석인의 얼굴은 입체적이라기보다는 가는 선으로 조각하여 평면적이지만 눈꺼풀과 눈동자 등은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 구리 동구릉 경릉의 삼연릉인 헌종릉과 원비 효현왕후릉과 계비 효정왕후릉

 

건원릉의 서쪽 언덕에 있던 선조의 목릉을 천정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는 목릉에 수기가 차고 불길하다는 원주목사 심명세의 상소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구릉을 파헤치고 현궁을 열어보니 수기가 없어 그의 불길론이 해소되었다. 따라서 헌종9년(1843) 춘추 16세로 승하한 효현왕후 김씨의 능을 이 자리에 조성하였다.

그로부터 6년 후 헌종이 승하하자 효현왕후 김씨의 경릉 서쪽에다 모셨다. 건원릉 서쪽에 위치한 이곳은 헌종의 국상 이후 왕릉 택지를 위하여 13곳이나 되는 길지를 돌아다닌 끝에 찾아낸 '십전대길지'의 명당이라고 전해진다.

1904년에는 춘추 73세로 승하한 헌종 계비 효정왕후 홍씨를 경릉의 동쪽에 모셨다. 이리하여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세 개의 봉분을 가진 왕릉이 완성되었다.

 

 

                          ▲ 경릉의 정자각

 

◈ 조선 24대 헌종(憲宗)

생몰년도 : 1827~1849년

재위기간 : 1834~1849년

헌종은 순조의 손자이자 후에 익종으로 추존된 효명세자와 신정왕후 조씨의 장남이다.

4세 때인 순조30년(1830) 5월 6일 아버지 효명세자를 여의고, 그 해 9월 왕세손에 책봉되었다. 1834년 11월 13일 순조가 승하하자 헌종은 경희궁 숭정문에서 즉위했다. 헌종은 8세의 어린 나이로 할아버지인 순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므로 실제의 정사는 할머니이며 순조비인 안동 김씨 순원왕후가 수렴청정하게 되었다.

11세가 되던 헌종3년(1837) 3월에는 인동 김씨인 김조근의 딸을 왕비로 맞았다.

이들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는 왕실의 외척으로서 서로 대립하여 세도정치를 주도하였다. 뿐만 아니라 두 차례에 걸친 역모 사건이 발생하고, 천주교에 대한 박해 문제와 관련하여 외국 군함이 처음으로 조선 근해에 나타나 민심이 흉흉했다. 또한 국가 재정의 3대 요소인 전정, 군정, 환곡 삼정의 문란으로 인해 백성들은 큼 부담을 안고 살아가야 했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서 15세의 나이에 친히 수렴청정을 거두고 정사를 돌보기 시작한 헌종은 '동문휘고', 열성지장', '동국사략', '삼조보감' 등을 완성하였으며, 각 도에 제언을 수축하게 하는 등 치적을 쌓았다.

 

▲ 동구릉 경릉의 비

 

((일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헌종은 두 명의 왕후와 세 명의 후궁을 두었다.

헌종4년(1838) 간택령을 내려 효현성황후를 왕비로 맞아하였으나,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자식 없이 요절하였다. 그 후 계비를 맞아들이기 위하여 스스로 간택에 참여하였다가 훗날의 경빈 김씨를 마음에 두게 된다. 그러나 간택의 결정권은 왕실의 어른인 대왕대비에게 있었고, 경빈 김씨가 아닌 홍재룡의 딸 효정왕후 홍씨가 최종 간택되었다.

이에 헌종은 3년을 고심한 끝에 왕비가 후사를 생산할 가능성이 없다는 핑계로 대왕대비의 허락을 받아 삼간택에서 낙선한 경빈 김씨를 후궁으로 맞아들였다.

 

간택후궁은 종2품 숙의로 책봉되는 관례를 무시하고 경빈 김씨를 바로 정1품 빈에 책봉하고, 헌종13년(1847) 창덕궁 서쪽에 별궁인 낙선재를 지어주기까지 했다.

예술을 사랑한 헌종은 경빈 김씨와 함께 이 별궁에서 고금 명가의 유필을 벗 삼아 지내기를 좋아 하였다.

낙선재에 여러 차례 불려 들어갔던 조선 후기 서화가 소치 허유의 기록에는 낙선재는 헌종이 평상시 거처하는 곳이며, 추사 김정희의 글씨로 쓰여진 현판이 가득하다는 등의 묘사가 잘 드러나 있다.

그러나 헌종은 이곳에서 예술과 사랑을 누리는 생활을 2년도 채 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운 정국을 뒤로 하고 헌종15년(1849) 6월 6일 23세의 어린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 경릉의 비각

 

◈ 효현왕후(孝顯王后) 김씨

생몰년도 : 1828~1843년

영돈령부사 영흥부원군 김조근의 딸로 순조28년(1828) 3월 14일에 태어나, 같은 안동 김씨인 순원왕후의 뜻으로 10세 때인 헌종3년(1837) 3월 18일 왕비에 책봉되었다. 4년 뒤 가례를 올렸으나, 가례를 올린지 2년만인 헌종9년(1843) 8월 25일 창덕궁의 대조전에서 후사 없이 요절하였다. 철종2년(1851) 경혜와 정순의 휘호가 내리고, 후에 단성과 수원의 존호가 더해졌다. 또한 순종때는 효현성황후에 추존되었다.

 

◈ 효정왕후(孝定王后) 홍씨

생몰년도 : 1831~1903년

헌종의 계비로 본관이 남양인 영돈령부사 익풍부원군 홍재룡의 딸로서 순조31년(1831) 1월 22일에 태어나, 헌종10년(1844) 9월, 14세의 나이로 왕비의 자리에 올랐다. 헌종이 승하하고 철종이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었으며, 광무7년(1903) 11월 15일 후사 없이 춘추 73세로 승하하여 경릉에 안장되었다.

 

♧ 헌종가례진하도 병풍(憲宗架禮陳賀圖 屛風)

*보물 제733-2(2011년11월01일 지정)

*소재지:경기도박물관 소장

헌종10년(1844) 조선 24대 왕 헌종이 계비 효정왕후와 치른 가례를 기념하여 제작된 궁중기록화이다.

8세에 즉위한 헌종은 효현왕후가 죽자 이듬해 10월 18일 홍재룡의 딸을 계비로 맞아 들였다. 10월 22일 경희궁 숭정전에서 교서를 반퐈고 문무백관의 진하를 받았는데 바로 이 진하례 광경을 주제로 하여 만든 병풍이다.

 

 

제1폭에는 예식을 맡아보던 예관제학 조병구가 쓴 진하례 때  축하의 글이 쓰여 있다.

제2첩에서 7첩까지 여섯 폭에는 창덕궁 인정전을 배경으로 하여 진하례가 그려져 있다. 효정왕후의 책봉, 가례, 진하는 실제로는 경희궁에서 치르졌으므로, 이그림은 사실과 부합되지 않지만 19세기 진하도병에서는 실제 장소와 상관없이 항상 창덕궁 인정전을 배경으로 진하례를 그렸다. 따라서 이 병풍에서도 창덕궁 인정전을 비롯한 크고 작은 전각이 산수, 수목, 인마들과 함께 질서정연하면서도 호화롭게 묘사된 가운데 문무백관들이 질서정연하게 집결되어 있다.

평행사선부감의 형식으로 표현된 궁궐장면은 조선왕실문화의 위엄과 화려한 분위기를 그대로 재현해 주고 있다.

제8첩에는 선전관청의 관원으로 이루어진 선전관좌목이 보인다. 25명 관원들의 품계, 관직명, 생년, 과거급제년, 본관 등이 기록되어 있다. 좌목으로 보아 이 병풍은 선전관들이 주도하여 헌종가례 및 진하를 기념하여 제작된 선전관청의 계병이라 할 수 있으며, 관행상 좌목에 들어 있는 선전관원 전원에게 모두 분급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극세필에다 진체로 이루어진 대폭의 가례도는 회화사 면에서도 주목할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동시에 170여년 전의 궁중혼례모습을 생생하게 엿 볼 수 있는 귀중한 역사자료라고 말할 수 있다.

<헌종가례진하도병풍>과 같은 내용의 그림이 동아대학교 박물관(보물 제733호)과 국립중앙박물관에 각각 1점씩 소장되어 있다. 이들 세 병풍은 밑그림에서 약간씩 차이를 보이며, 각종 의장물이나 인물의 복식과 포치, 그리고 등장인물들의 수효도 상이하다. 그러나 전체적인 표현 양식은 거의 같아서 제작 시기는 거의 같은 무렵으로 생각된다.

경기도 박물관 소장 <헌종가례진하도병풍>은 조선후기 왕실의 주요행사인 가례와 관련된 귀중한 자료이다. 동시대에 제작된 궁중행사도 계병들과 비교하면 예술적 완성도면에서 약간 뒤지지만, 기 지정된 보물 제733호에 비교해 볼 때 같은 필치와 화풍을 보여주며, 상태는 오히려 보다 양호한 편이다.

 

♧ 헌종가례진하도 병풍(憲宗架禮陳賀圖 屛風)

*보물 제733-1(1982년03월04일 지정)

*소재지:부산광역시 서구 구덕로 255(동아대학교 박물관)

헌종10년(1844) 조선 24대 왕 헌종이 계비 효정왕후와 치른 가례를 기념하여 제작된 궁중기록화로 크기는 가로 115cm, 세로 51cm이며 비단에 채색되었다.

8세에 즉위한 헌종은 효현왕후가 죽자 이듬해 10월 18일 홍재룡의 딸을 계비로 맞아 들였다. 10월 22일 경희궁 숭정전에서 교서를 반퐈고 문무백관의 진하를 받았는데 바로 이 진하례 광경을 주제로 하여 만든 병풍이다.

 

 

제1폭에는 예식을 맡아보던 예문제장 조병구가 쓴 진하례 때  축하의 글이 쓰여 있고, 제8폭에는 선전관청 관원 25명의 관등, 이름, 본관이 쓰여 있다. 이로 보아 이 병풍은 선전관들이 주도하여 제작, 이름이 적힌 모든 선전관들에게 병풍을 나눠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2~7폭에는 창덕궁 인정전을 배경으로 한 진하례 광경이 그려져 있다. 효정왕후의 책봉, 가례, 진하는 모두 경희궁에서 치루어졌으나 그림은 창덕궁으로 되어 있다. 이는 19세기에 유행한 진하도 병풍의 특징 중 하나로 실제 의례 장소와 관계 없이 창덕궁 인정전을 배경으로 그렸다.

그림은 인정전을 중심으로 양 옆으로 이어지는 전각들은 평행사건구도로 질서정연하면서도 화려하게 그려졌다. 인정전 대청에는 금관조복 차림의 승지와 사관이 부복하였고, 북향한 대치사관은 치사문을 낭독하고 있다. 원경에 표시된 석조의 무지개 형태 문은 후원의 불로문으로 생각된다.

특별히 불로문을 그린 것은 장수를 기원하는 뜻을 담았기 때문이다. 인물들의 이목구비 표현이 없으며 윤곽에 사용된 필선은 다소 뭉툭하고 굵기의 차이가 있다. 장대한 구도, 화려한 색채, 정교한 묘사로 진하라는 국가의례가 충실히 재현되었으며 국가의 가례를 축하하는 경사스런 분위기가 잘 살아 있는 작품이다.

170여년 전 궁중혼례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어 회화로서 뿐만 아니라 역사자료로서도 가치가 있으며 보관상태도 매우 양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