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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 조선왕릉! 구리 동구릉(東九陵) ⑦원릉(元陵)

왕마구리 2015. 3. 16. 00:23

◀ 세계유산 조선왕릉! 구리 동구릉(九里 東九陵) ▶

가족무덤을 이루고 있는 왕릉군!

조선왕릉의 변화 과정을 살필 수 있는 왕릉군!

 

 

조선왕릉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왕릉 가운데 가장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고유의 유적이다. 왕릉 개개의 완전성은 물론이고 한 시대의 왕조를 이끌었던 역대 왕과 왕비에 대한 왕릉이 모두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욱 큰 가치를 지닌다.

1392년 고려 왕조가 막을 내리고 탄생한 조선 왕조는 이후 1910년까지 무려 519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이어갔다.

이처럼 하나의 왕조가 500년 이상 지속된 것은 매우 보기 드문 유례이다. 이러한 유구한 역사를 가진 조선 왕조에는 27대 왕과 왕비 및 추존왕과 왕비가 있는데, 이 왕족의 무덤을 조선왕릉이라 한다.

왕족의 무덤은 왕실의 위계에 따라 능, 원, 묘로 분류된다.

능(陵)은 추존왕, 추존왕비를 포함한 왕과 왕비의 무덤이고,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말한다. 묘(墓)는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아들, 딸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 등의 무덤을 일컷는다.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2009년 6월 30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519년의 역사를 지닌 조선은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아 조상에 대한 존경과 숭모를 매우 중요한 가치로 여겨 역대 왕과 왕비의 능을 엄격히 관리하였다. 그리하여 42기의 능 어느 하나도 훼손되거나 인멸되지 않고 모두 제자리에 완전하게 보전되었다.

조선왕릉은 우리의 전통문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600여 년 전의 제례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

 

 

▷ 조선왕릉의 분포

조선 왕족의 무덤은 모두 119기에 이르며, 이 가운데 능이 42기이고, 원이 13기이며, 묘가 64기이다.

조선 왕족의 무덤은 무덤 주인의 신분에 따라 그 명칭을 달리하는데 능(陵)은 왕과 왕비의 무덤,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빈 또는 왕의 사친의 무덤, 그 외 왕족의 무덤은 일반인의 무덤처럼 묘(墓)라고 한다.

42기의 능 가운데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태조 원비 신의왕후의 능), 후릉(정종과 정안왕후의 능)을 제외한 40기의 능이 남한에 있다.

남한에 위치한 40기의 왕릉 중 강원도 영월에 위치한 장릉(단종의 능)을 제외한 39기의 능이 서울과 경기도 일원에 자리를 하고 있다. 500년이 넘는 한 왕조의 무덤이 이처럼 온전하게 보전되어 있는 것은 세계에 그 유래를 찾기 힘들며 문화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 조선왕릉의 제향

조선왕릉의 가치는 형태적 보존에만 있지 않고, 조선왕릉을 더욱 더 빛나게 하는 것은 600년 넘게 이어져 내려온 조선왕릉의 제례의식이다.

조선은 건국 이래 산릉제례를 엄격하게 지켜왔으며, 1945년 해방 후에는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이 기일에 올리는 제사인 능기신제(陵忌辰祭)의 전통을 이어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매년 왕과 왕비의 제향일에 산릉제례가 엄격하게 행해진다.

▷ 조선왕릉의 구성

조선왕릉은 죽은 자가 머무는 성(聖)의 공간과 산 자가 있는 속(俗)의 공간이 만나는 곳으로 그 공간적 성격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 능침공간 : 왕과 왕비의 봉분(능침, 능상)이 있는 성역 공간

   ** 제향공간 : 죽은 자와 산 자가 함께 하는 영역으로 제사를 지내는 공간(정자각, 침전)

   ** 진입공간 : 왕릉의 관리와 제례 준비를 위한 공간(재실)

 

                          ▲ 구리 동구릉의 재실 전체 전경(사진 左), 전사청과 재실(사진 中), 그리고 행랑채(사진 右)

 

▷ 조선왕릉의 변천사

조선왕릉 석물의 배치와 구조는 기본적으로 큰 변화없이 오랜 기간 반복되었지만 당시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나 당대 왕의 의지에 따라 약간씩의 변화가 있어 왔다.

제1기는 태조의 건원릉(1408)에서부터 문종 현릉(1452)으로 조선 왕릉의 기본 형식을 갖춘 시기이다.

제2기는 세조의 광릉(1468)에서부터 숙종 익릉(1681)까지로 석물의 전반적인 배치나 표현상에서 조선 왕릉 특유의 조각 양식이 확립된 시기이다.

제3기는 인조의 장릉(1731)에서부터 철종의 예릉(1864)까지이며 병풍석이나 장명등의 형태에서 약간의 변화가 있었고 조각의 비례가 바뀐다.

제4기는 황제릉이 조성된 시기로,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라 칭하면서 고종의 홍릉과 순종의 유릉이 황제릉의 형식을 취하였다. 이에 더하여 유릉의 석물에서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 이데올로기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 구리 동구릉 입구

 

『 구리 동구릉(九里 東九陵) 소개 』

*사적 제193호(1970년5월26일 지정)/유네스코 세계유산(2009년6월30일 지정)

*면적:1,969,675㎡

조선을 세운 태조의 무덤으로 쓰여지기 시작한 뒤 조선시대를 통하여 가족무덤을 이루고 있는 왕릉군이다.

동구릉이란 도성의 동쪽에 있는 9개의 무덤이란 의미로, 무덤이 생길 때 마다 동오릉, 동칠릉이라 불렀는데 철종6년(1855)에 수릉이 옮겨진 이후 동구릉으로 굳어졌다.

태조가 죽은 뒤 태종은 서울 가까운 곳에 후손들이 묻힐 좋은 땅을 찾다가 하륜에 의해 이곳을 무덤지역으로 정하였다고 한다. 400여 년에 걸쳐 왕릉이 자리잡았음은 동구릉의 지세가 풍수지리설에 의한 명당임을 나타내주는 것이라 하겠다.

동구릉에는 1대 태조의 건원릉을 중심으로 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무덤인 현릉, 14대 선조와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의 무덤인 목릉,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무덤인 원릉, 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무덤인 숭릉, 20대 경종의 비 단의왕후의 무덤인 혜릉, 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무덤인 원릉, 추존 문조대왕과 신정왕후의 무덤인 수릉, 24대 헌종과 효현왕후, 계비 효정왕후의 무덤인 경릉 등 9개의 무덤이 있다.

태조의 무덤인 건원릉은 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정릉을 기본으로 삼아서 만들었으며, 조선왕조 최초의 왕릉으로서 이후 왕릉의 본보기가 되었다.

동구릉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왕릉이 변화하는 과정을 살필 수 있다. 무덤을 만들 때 각 무덤에 따른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재실을 지었다고 하나 현재 각 무덤에 제실은 없고, 9개의 무덤을 하나의 경계지역으로 하여 구릉 남쪽에 재실이 있다.

전체적인 모습은 중앙 북쪽의 건원릉을 중심으로 동쪽에 3개, 서쪽에 5개의 무덤을 거느리고 있는 모습이다. 조선의 왕릉 중 한 지역내에 왕릉군을 이루고 있는 곳은 서오릉과 서삼릉이 있으나, 동구릉에 가장 많은 무덤이 있다.

 

▷ 동구릉의 국가지정문화재들

- 보물 제1741호 구리 동구릉 건원릉 정자각(2011년12월26일 지정)

- 보물 제1742호 구리 동구릉 숭릉 정자각(2011년12월26일 지정)

- 보물 제1743호 구리 동구릉 목릉 정자각(2011년12월26일 지정)

- 보물 제1803호 구리 동구릉 건원릉 신도비(2013년07월16일 지정)

 

                          ▲ 구리 동구릉 재실 앞 느티나무

 

【 소 재  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197번지

【 방문일자 】2015년 2월 28일(토)

【 관람정보 】

*관람시간 : (매주 월요일 휴관)

                  2월~5월,9월~10월:9시~18시(매표:9시~17시)/6월~10월:9시~18시30분(매표:9시~17시30분)/11월~1월:9시~17시30분(매표:9시~16시30분)

*관람요금 : 어른(19~64세) \1,000

*문의(조선왕릉 동부지구관리소) : T.031)563-2909, 564-2909

 

                          ▲ 구리 동구릉 안내도

 

*교통안내 :

  - 청량리역, 상봉역에서 #88번 또는 #220번 버스 환승, 동구릉 하차

  - 강변역에서 #1번, #1-1번, #1-2번, #92번 버스 환승, 동구릉 하차

  - 중앙선 구리역에서 마을버스 #2번, #6번 버스 환승, 동구릉 하차

【  탐방코스 매표소→수릉→현릉→건원릉→목릉→휘릉→원릉→경릉→혜릉→승릉→매표소

 조선왕릉 동구릉 소개는 탐방코스와는 관계없이 조성 순서에 따라 건원릉-현릉-목릉-휘릉-숭릉-혜릉-원릉-경릉-수릉의 순으로 하기로 한다. 또한 탐방기는 각 릉별로 나누어 총 9편으로 소개를 한다.

 

                          ▲ 희릉에서 원릉 들어가는 길

 

 

「 원릉(元陵) 」 조선 제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능

세 개의 비(碑)가 있는 원릉!

 

                          ▲ 홍살문 밖에서 바라본 구리 동구릉의 원릉

  

*위치: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8-2번지

*조성시기:정조원년(1776년) 7월 27일

원릉은 병풍석을 세우지 않고 난간석을 둘러 만든 왕릉이다.

왕릉과 왕비릉 앞에는 혼유석이 각각 놓여 있고, 좌우에 망주석 1쌍이 세워져 있다. 망주석에 조각된 꽃무늬가 세련되고 화려하다. 좌우 세호 중 오른쪽 망주석에 새겨진 세호는 위로 향하고 있고, 왼쪽 망주석에 새겨진 세호는 아래로 기어 내려가는 모양을 하고 있다. 그리고 능의 중간에 놓인 사각옥개형 장명등은 화사석과 옥개석 부분을 제외하고 상,중,하대석 부분은 꽃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문석인은 전체적으로 비율과 입체간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으나, 사실적인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 눈길을 끈다. 또하 무석인은 장군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위풍당당하기보다는 유약한 모습을 하고 있다. 무석인의 얼굴에서도 잔잔히 머금고 있는 미소를 찾을 수 있다.

 

                          ▲ 구리 동구릉 원릉의 전경 

 

정조원년(1776) 3월 5일 영조가 승하하였다.

영조는 무려 52년간에 이르는 긴 재위기간 동안 여덟 차례에 걸쳐 산릉원을 조성하거나 천장을 하는 등 산릉제도에 관심이 많았다.

원릉 정성왕후가 잠든 서오릉의 홍릉을 자신의 자리로 정해 쌍릉을 조영하기를 바랐으나, 손자인 정조는 영조가 승하한 그 해 7월 27일 건원릉 서쪽 두 번째 산줄기에 그를 안장하고 원릉이라고 했다.

원래 이곳은 현종원년(1660) 10월 효종 능인 영릉이 조영되었던 곳인데, 현종14년(1673) 석물에 틈이나 빗물이 스며들 염려가 있다고 하여 천봉하기로 하고 봉분을 열었으나 깨끗하여, 끝내는 당론으로 번져 전날의 영릉도감의 책임자가 파직되었던 사건이 일어났던 곳이다.

원릉을 조성한지 29년이 지난 순조5년(1805)에는 61세의 나이로 승하한 영조 계비 정순왕후 김씨를 원릉의 옆에 모셨다.

 

                          ▲ 원릉의 정자각

 

◈ 조선 21대 영조(英祖)

생몰년도 : 1694~1776년

재위기간 : 1724~1776년

영조는 숙종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화경숙빈 최씨이다. 숙종25년(1699) 6세 때 연잉군에 봉해지고, 경종이 숙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1721년에 경종의 건강이 좋디 않고 아들이 없는 것을 이유로 왕세제에 책봉되었다. 당시 그의 왕세제 책봉을 주장하는 노론과 시기상조론을 들어 반대한 소론 간의 정쟁이 극심했으며, 영조 자신도 이 소용돌이에 휘말려 경종을 시해하려는 시도에 가담했다는 모함을 받기도 하였다.

1724년 이러한 치열한 정쟁 속에 즉위한 영조는 붕당의 대립 자체를 완화, 해소하는 것을 왕정의 큰 과제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즉위와 동시에 왕권을 강화하고, 균형있는 인재 등용을 통하여 탕평세력을 구축하였다. 영조는 탕평 정치로 조정 뿐 아니라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는 여러 가지 폐단을 고치는 개혁 조치를 단행했다.

특히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 되어온 양역조의 양을 감소시키는 균역법을 시행했고, 노비 신공을 혁파하는 등 획기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과감하고 개혁적인 조치들을 단행하여 조선 후기 나라의 기틀을 재차 다지는데 큰 공을 세웠으나, 영조38년(1762)에는 세자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벌열의 움직임에 대한 과도한 경계심으로 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어 죽이는 참사를 빚기도 하는 등, 당쟁의 혼란을 완전히 잠재우지는 못하였다.

영조52년(1776) 3월 5일 춘추 83세로 경희궁 집경당에서 승하하였다.

((일화))

영조는 무수리에게서 태어난 숙종의 서자이다. 비록 왕자이기는 하였으나 어머니의 신분 때문에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궁궐 외곽의 초라한 집에서 천시받으며 어렵게 성장하였다.

영조의 어머니는 숙종이 승하하기 이전에 일찍 세상을 떠나 빈의 대우도 받지 못했고, 양주땅 고령산 기슭에 묻혔는데, 그 묘가 초라하였다. 궁중예법에 따라 능호나 원호를 붙일 수도 없었다. 이 사실이 늘 맘에 걸렸던 영조는 오랜 노력 끝에 어머니의 묘를 간신히 「소령원(昭寧園)」으로 승격시키는데 성공하였다.

하루는 영조가 미복 찲으로 궁을 나와 산책하던 중에 시골의 나무꾼이 향나무를 팔고 있는 것을 보았다. 영조가 향나무를 어디서 캐온 것이냐고 물으니, 무식한 나무꾼은 제 앞의 임금을 몰라보고, 나랏님의 모후를 모신 소녕릉이 있는 고령 양주산에서 캐온 나무라고 설명해 주었다. 나무꾼은 능과 원을 구별하지 못하고 능이라고 부른 것이지만, 오랜 세월 어머니의 묘를 능으로 꾸며드리고 싶었던 영조는 나무꾼의 '소녕릉' 소리에 감격하였다. 그리하여 나무꾼이 팔던 향나무를 비싼 값에 쳐주고, 그를 소녕원 능참봉에 제수하였다.

영조는 강하고 결단력 있는 군주였으나, 내면으로는 자신의 출생 신분과 정통성에 대한 콤플렉스, 어머니에 대한 안타까움과 정쟁에 휘말려 아들을 죽일 수 밖에 없었던 사연 등 평생 큰 아픔을 삭여야 했다.

 

 

                          ▲ 원릉의 비각(사진 上) : 세 기의 비가 보관되어, 비각도 다른 능에 비해 규모가 크다.

                             원릉의 세 개의 비(사진 下)

                                 *(左)1776년 건립된 첫번째 비 : '조선국영종대왕원릉'(정조의 어필)

                                 *(中)1890년 건립된 두번째 비 : '조선국영조대왕원릉'(고종의 어필)

                                 *(右)세번째 정순왕후의 비 : '조선국정순왕후부좌'

 

◈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

생몰년도 : 1745~1805년

영조21년(1745) 11월 10일 본관이 경주인 오흥부원군 김한구의 딸로 태어났다.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가 승하하자 영조35년(1759) 6월 22일 15세의 나이에 66세 영조의 계비로 책봉되었다.

그녀의 친정은 모론의 주심 가문이었으나, 그녀보다 나이가 많았던 아들 사도세자는 소론에 기울어져 노론에게 비판적이었고, 이 갈등으로 인해 사도세자의 죽음에 정순왕후가 빌미를 제공했다고 전해진다. 정조가 승하하고, 1800년 순조가 11세로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실시하였는데, 스스로 여자국왕女主, 女君)을 칭하고 실질적으로 국왕의 모든 권한을 행사하였다. 과감하게 국정을 주도하여 조정의 주요 신하들로부터 개인별 충성서약을 받았으며, 정조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사도세자에게 동정적이었던 시파인물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다음 해에는 격렬한 천주교 탄압을 일으켜 정약용 등의 남인들을 축출하고, 국왕 친위대인 장용영을 혁파하는 등 정조가 수립한 정치질서를 부정하였다. 그러나 1803년 12월에 수렴청정을 그치게 되자, 정세가 부뀌어 벽파가 조정에서 숙청되고 친정인사들도 대부분 도태되었다.

1805년 1월 12일 춘추 61세로 창덕궁에서 승하하여, 그 해 6월 20일 원릉의 영조 옆에 예장되었다.

((일화))

15세의 어린 나이에 66세 영조의 비가 된 정순왕후는 그 후 사도세자를 살해하는데 빌미를 제공하고, 정조와 바대 입장에 섰으며, 순조 대에는 수렴청정을 하며 실실적인 국왕의 권한을 행사했다. 이러한 그녀의 대담라고 단찬 성격을 나타내는 일화는 왕비 간택 때에서부터 전해진다.

간택 시 영조가 왕비 후보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다른 사람들은 산이 깊다, 물이 깊다고 대답했지만, 정순왕후는 인심이 가장 깊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고개가 무엇이냐는 물음에는 보릿고개라는 인상적인 답을 하였다고 전한다. 왕비로 간택된 후에는 상궁이 옷의 치수를 재기 위하여 잠시 돌아서 달라고 하자 단호한 어조로 "네가 돌아서면 되지 않느냐"고 추상같이 꾸짖었다고 한다. 어린 나이였음에도 왕비의 체통을 지킬 줄 아는 당찬 여인임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