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은 관광명소/세계유산 조선왕릉

세계유산 조선왕릉! 구리 동구릉(東九陵) ⑨수릉(綏陵)

왕마구리 2015. 3. 17. 02:42

◀ 세계유산 조선왕릉! 구리 동구릉(九里 東九陵) ▶

가족무덤을 이루고 있는 왕릉군!

조선왕릉의 변화 과정을 살필 수 있는 왕릉군!

 

 

조선왕릉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왕릉 가운데 가장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고유의 유적이다. 왕릉 개개의 완전성은 물론이고 한 시대의 왕조를 이끌었던 역대 왕과 왕비에 대한 왕릉이 모두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욱 큰 가치를 지닌다.

1392년 고려 왕조가 막을 내리고 탄생한 조선 왕조는 이후 1910년까지 무려 519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이어갔다.

이처럼 하나의 왕조가 500년 이상 지속된 것은 매우 보기 드문 유례이다. 이러한 유구한 역사를 가진 조선 왕조에는 27대 왕과 왕비 및 추존왕과 왕비가 있는데, 이 왕족의 무덤을 조선왕릉이라 한다.

왕족의 무덤은 왕실의 위계에 따라 능, 원, 묘로 분류된다.

능(陵)은 추존왕, 추존왕비를 포함한 왕과 왕비의 무덤이고,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말한다. 묘(墓)는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아들, 딸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 등의 무덤을 일컷는다.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2009년 6월 30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519년의 역사를 지닌 조선은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아 조상에 대한 존경과 숭모를 매우 중요한 가치로 여겨 역대 왕과 왕비의 능을 엄격히 관리하였다. 그리하여 42기의 능 어느 하나도 훼손되거나 인멸되지 않고 모두 제자리에 완전하게 보전되었다.

조선왕릉은 우리의 전통문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600여 년 전의 제례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

 

 

▷ 조선왕릉의 분포

조선 왕족의 무덤은 모두 119기에 이르며, 이 가운데 능이 42기이고, 원이 13기이며, 묘가 64기이다.

조선 왕족의 무덤은 무덤 주인의 신분에 따라 그 명칭을 달리하는데 능(陵)은 왕과 왕비의 무덤,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빈 또는 왕의 사친의 무덤, 그 외 왕족의 무덤은 일반인의 무덤처럼 묘(墓)라고 한다.

42기의 능 가운데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태조 원비 신의왕후의 능), 후릉(정종과 정안왕후의 능)을 제외한 40기의 능이 남한에 있다.

남한에 위치한 40기의 왕릉 중 강원도 영월에 위치한 장릉(단종의 능)을 제외한 39기의 능이 서울과 경기도 일원에 자리를 하고 있다. 500년이 넘는 한 왕조의 무덤이 이처럼 온전하게 보전되어 있는 것은 세계에 그 유래를 찾기 힘들며 문화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 조선왕릉의 제향

조선왕릉의 가치는 형태적 보존에만 있지 않고, 조선왕릉을 더욱 더 빛나게 하는 것은 600년 넘게 이어져 내려온 조선왕릉의 제례의식이다.

조선은 건국 이래 산릉제례를 엄격하게 지켜왔으며, 1945년 해방 후에는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이 기일에 올리는 제사인 능기신제(陵忌辰祭)의 전통을 이어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매년 왕과 왕비의 제향일에 산릉제례가 엄격하게 행해진다.

▷ 조선왕릉의 구성

조선왕릉은 죽은 자가 머무는 성(聖)의 공간과 산 자가 있는 속(俗)의 공간이 만나는 곳으로 그 공간적 성격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 능침공간 : 왕과 왕비의 봉분(능침, 능상)이 있는 성역 공간

   ** 제향공간 : 죽은 자와 산 자가 함께 하는 영역으로 제사를 지내는 공간(정자각, 침전)

   ** 진입공간 : 왕릉의 관리와 제례 준비를 위한 공간(재실)

 

                          ▲ 구리 동구릉의 재실 전체 전경(사진 左), 재실의 전사청과 재실(사진 中) 그리고 행랑채(사진 右)

 

▷ 조선왕릉의 변천사

조선왕릉 석물의 배치와 구조는 기본적으로 큰 변화없이 오랜 기간 반복되었지만 당시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나 당대 왕의 의지에 따라 약간씩의 변화가 있어 왔다.

제1기는 태조의 건원릉(1408)에서부터 문종 현릉(1452)으로 조선 왕릉의 기본 형식을 갖춘 시기이다.

제2기는 세조의 광릉(1468)에서부터 숙종 익릉(1681)까지로 석물의 전반적인 배치나 표현상에서 조선 왕릉 특유의 조각 양식이 확립된 시기이다.

제3기는 인조의 장릉(1731)에서부터 철종의 예릉(1864)까지이며 병풍석이나 장명등의 형태에서 약간의 변화가 있었고 조각의 비례가 바뀐다.

제4기는 황제릉이 조성된 시기로,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라 칭하면서 고종의 홍릉과 순종의 유릉이 황제릉의 형식을 취하였다. 이에 더하여 유릉의 석물에서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 이데올로기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 구리 동구릉 입구

 

『 구리 동구릉(九里 東九陵) 소개 』

*사적 제193호(1970년5월26일 지정)/유네스코 세계유산(2009년6월30일 지정)

*면적:1,969,675㎡

조선을 세운 태조의 무덤으로 쓰여지기 시작한 뒤 조선시대를 통하여 가족무덤을 이루고 있는 왕릉군이다.

동구릉이란 도성의 동쪽에 있는 9개의 무덤이란 의미로, 무덤이 생길 때 마다 동오릉, 동칠릉이라 불렀는데 철종6년(1855)에 수릉이 옮겨진 이후 동구릉으로 굳어졌다.

태조가 죽은 뒤 태종은 서울 가까운 곳에 후손들이 묻힐 좋은 땅을 찾다가 하륜에 의해 이곳을 무덤지역으로 정하였다고 한다. 400여 년에 걸쳐 왕릉이 자리잡았음은 동구릉의 지세가 풍수지리설에 의한 명당임을 나타내주는 것이라 하겠다.

동구릉에는 1대 태조의 건원릉을 중심으로 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무덤인 현릉, 14대 선조와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의 무덤인 목릉,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무덤인 원릉, 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무덤인 숭릉, 20대 경종의 비 단의왕후의 무덤인 혜릉, 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무덤인 원릉, 추존 문조대왕과 신정왕후의 무덤인 수릉, 24대 헌종과 효현왕후, 계비 효정왕후의 무덤인 경릉 등 9개의 무덤이 있다.

태조의 무덤인 건원릉은 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정릉을 기본으로 삼아서 만들었으며, 조선왕조 최초의 왕릉으로서 이후 왕릉의 본보기가 되었다.

동구릉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왕릉이 변화하는 과정을 살필 수 있다. 무덤을 만들 때 각 무덤에 따른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재실을 지었다고 하나 현재 각 무덤에 제실은 없고, 9개의 무덤을 하나의 경계지역으로 하여 구릉 남쪽에 재실이 있다.

전체적인 모습은 중앙 북쪽의 건원릉을 중심으로 동쪽에 3개, 서쪽에 5개의 무덤을 거느리고 있는 모습이다. 조선의 왕릉 중 한 지역내에 왕릉군을 이루고 있는 곳은 서오릉과 서삼릉이 있으나, 동구릉에 가장 많은 무덤이 있다.

 

▷ 동구릉의 국가지정문화재들

- 보물 제1741호 구리 동구릉 건원릉 정자각(2011년12월26일 지정)

- 보물 제1742호 구리 동구릉 숭릉 정자각(2011년12월26일 지정)

- 보물 제1743호 구리 동구릉 목릉 정자각(2011년12월26일 지정)

- 보물 제1803호 구리 동구릉 건원릉 신도비(2013년07월16일 지정)

 

【 소 재  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197번지

【 방문일자 】2015년 2월 28일(토)

【 관람정보 】

*관람시간 : (매주 월요일 휴관)

                  2월~5월,9월~10월:9시~18시(매표:9시~17시)/6월~10월:9시~18시30분(매표:9시~17시30분)/11월~1월:9시~17시30분(매표:9시~16시30분)

*관람요금 : 어른(19~64세) \1,000

*문의(조선왕릉 동부지구관리소) : T.031)563-2909, 564-2909

 

                          ▲ 구리 동구릉 안내도

 

*교통안내 :

  - 청량리역, 상봉역에서 #88번 또는 #220번 버스 환승, 동구릉 하차

  - 강변역에서 #1번, #1-1번, #1-2번, #92번 버스 환승, 동구릉 하차

  - 중앙선 구리역에서 마을버스 #2번, #6번 버스 환승, 동구릉 하차

【  탐방코스 매표소→수릉→현릉→건원릉→목릉→휘릉→원릉→경릉→혜릉→승릉→매표소

 조선왕릉 동구릉 소개는 탐방코스와는 관계없이 조성 순서에 따라 건원릉-현릉-목릉-휘릉-숭릉-혜릉-원릉-경릉-수릉의 순으로 하기로 한다. 또한 탐방기는 각 릉별로 나누어 총 9편으로 소개를 한다.

 

                          ▲ 동구릉 재실 앞 느티나무(사진 左)와 동구릉 수릉 탐방로(사진 右)

 

 

「 수릉(綏陵) 」 추존 문조와 신정왕후의 능

헌종의 아버지 효명세자! 문조

왕위결정권을 가진 대왕대비로 고종을 철종의 뒤를 이어 왕위를 잇게 한 신정왕후

합장릉 인 단릉!

 

                          ▲ 홍살문 밖에서 바라본 구리 동구릉의 수릉

  

*위치: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7-2번지

*조성시기:고종27년(1890년) 8월 30일

수릉은 하나의 봉분에 혼유석 역시 하나만 마련되어 있어 마치 한 사람만을 위한 단릉처럼 보이지만, 문조와 신정익황후 조씨의 합장릉이다.

수릉 이전의 왕릉은 일반적으로 봉분 앞에 조,중,하계 3단의 높이로 나뉘어, 중계에는 문석인이, 보다 낮은 하계에는 무석인이 배치되었다, 그러나 수릉에서는 중계와 하계가 합쳐져 문석인과 무석인이 같은 공간에 배치된다. 이는 신분 제도의 변화에 의한 것이며, 이러한 상설제도는 「국조상례보편」에 따라 영조 때부터 따르게 되었다.

문석인은 금관조복에 얼굴이 길쭉하고 눈과 입술이 선적으로 가늘게 표현되었다. 어깨를 움츠리고 목을 앞으로 빼고 있는 형태에서 조선시대 후기 인물조각의 전형성을 볼 수 있다.

 

 

                          ▲ 구리 동구릉 수릉의 정자각

 

효명세자가 순조30년(1830) 승하하자 성북구 석관동 의릉 왼쪽 언덕에 세자의 무덤형식인 원으로 능을 조영하고, '연경묘'라고 하였다. 그 후 효명세자의 아들 헌종이 1835년 즉위하자 그를 익종으로 추존하고 능의 이름을 수릉이라고 하였다.

헌종13년(1846)에는 풍수상 불길하다는 의논이 제기되어 천장하기로 하고, 현궁을 발굴하여 정자각에 봉안하였다. 그리고는 그 해 5월 19일에 발인하여, 20일에 양주 용마산 아래로 천장하였다. 철종6년(1855) 8월에 다시 능을 발굴하여 건원릉 좌측 언덕으로 천장하였다. 고종27년(1890)에는 춘추 83세로 승하한 신정왕후를 수릉에 합장하여 모셨다. 광무3년(1899)에는 익종은 문조익황제로, 신정왕후는 신정익황후로 다시 추존되었다.

 

 

                          ▲ 수릉의 비각(사진 上)

                             수릉의 비 : 익종대왕수릉(사진 下左)과 문조익황제(사진 下右)

 

◈ 추존왕 문조(文祖)

생몰년도 : 1809~1830년

추존황제 효명세자 문조는 23대 왕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 사이의 큰 아들이자 24대 왕 헌종의 아버지로, 순조9년(1809) 8월 9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태어났다.

순조12년(1812)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순조27년(1827)에는 19세의 나이로 대리청정을 시작하였다. 어린 효명세자는 정조가 승하한 후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극에 달하였던 시기에 대리청정을 통해 강인한 군주의 모습을 보였다. 특정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그동안 소외되어 있던 인재들을 고루 등용하였으며, 백성을 위하는 선정을 펼쳤다. 또한 실학파 박지언의 손자 박규수와 교유하며 전문을 넓혔고, 타문화 수용에 긍정적인 자세를 보였다. 그러나 원래 몸이 약했던 그는 아들을 얻은 이후 더욱 자주 의원에게 처방을 받아야 했고, 결국 순조30년(1830) 5월 6일 22세의 젊은 나이에 창덕궁 희정당에서 요절하였다.

아들 헌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익종으로 추존되고 고종 때 문조익황제로 추존되었다.

((일화))

"남녘 못에 잠긴 용이 있으니

구름을 일으키고 연기와 안개를 토하더라

이 용이 조화가 많으니

능히 사해의 물을 옮기리로다"

위의 「잠룡(潛龍)」이라는 시는 추존 황제 문조가 세자 시절에 지은 것이다. 자신을 물속에 잠긴 용이라 표현한 것이 앞으로 강력한 군주로서 조선을 이끌어 나아갈 포부를 밝힌 듯하다. 실로 그는 세도정치에 시달린 아버지 순조의 희망이었으며, 대리청정을 하며 왕권을 강화하고, 정세를 안정시키기 위한 결단력있는 정책을 펼쳤다.

한 편 효명세자는 자주 궁궐 밖을 미행하였는데, 어느 날 북촌 자하동을 지나다가 글을 읽는 낭랑한 목소리에 끌려 한 집에 당도하였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박규수였다. 세자는 그 자리에서 박규수의 할아버지 박지원이 지은 '열하일기'를 함께 보는 등 그와 밤새 이야기를 나누고 훗날 박규수를 등용할 것을 굳게 약속하고는 궁궐로 돌아왔다. 그러나 호명세자는 결국 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22살의 나이에 생을 마감하였다. 서로 교유하며 문명을 떨친 둘 사이의 약속은 결국 훗날 효명세자의 부인인 신정왕후에 의해 실현되었다.

 

◈ 신정왕후(神貞王后) 조씨

생몰년도 : 1808~1890년

순조8년(1808) 12월 6일 조만영의 딸로 태어났으며, 12세 때 효명세자와 가례를 올려 세자빈에 책봉되었다. 효부라는 칭찬을 듣던 새지빈 조씨는 순조27년(1827) 헌종을 낳았고, 1834년 헌종이 왕위에 올라 죽은 남편인 효명세자가 익종으로 추존되자 왕대비가 되었다.

철종8년(1857) 순종비인 순원왕후가 승하하자 대왕대비가 되었다. 그리고 철종14년(1863) 철종도 후사없이 승하하자 왕실의 권한은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가 쥐게 되었다.

왕위 결정권을 가지고 있던 대왕대비 조씨는 흥선군 이하응과 손을 잡고, 흥선군의 둘째 아들 고종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했다. 또한 안동 김씨 세력을 더욱 약화시키기 위하여 고종을 아들로 삼아 철종이 아니라 익종의 뒤를 잇게 했다. 그리고 내전에 고종의 옥좌를 마련하고 자신은 그 뒤에서 수렴청정을 하며, 명성왕후가 정치에 참여하기 전까지 흥선대원군과 함께 정국을 주도했다.

대왕대비 조씨는 국가가 여러 재난에 시달리자 눈물을 흘리며 죽지 않은 것을 한탄했다고 한다. 대왕대비는 고종27년(1890) 4월 17일 춘추 82세로 경복궁 흥복전에서 승하하여, 그 해 8월 30일 수릉에 합장했으며, 광무3년(1899) 11월 17일에 신정익황후로 추존되었다.

((일화))

효명세자가 일찍 승하함으로 인해 왕비로서의 영화를 누려보지 못하고, 안동김씨의 세도에 눌려 지내던 신정익황후는 철종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흥선대원군과 함께 손잡고 고종을 왕위에 오르게 한 후 왕실 최고 어른으로서의 권력을 거머쥐었다.

꽃문양 담으로 유명한 경복궁의 자경전은 재건된 것이기는 하나, 흥선대원군이 그녀를 위해 1867년 지은 건물이다. 또 현재 부산 동아대학교 박물관에는 신정익황후의 40세 생신을 축하하는 잔치모습을 그린 8폭 병풍이 소장되어 있다. 8폭 중 7폭은 전각, 나무, 산수를 채색하여 그렸고, 마지막 폭은 도총관, 조기영 등 9명의 관등과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 도화서의 일류급 화원들이 그린 작푼으로 추정된다. 헌종13년(1847) 정월 초 하루 창덕궁 인정전 앞뜰에서 거행된 잔치에는 400여 명이 참석했는데, 관직에 따라 서로 다른 관복을 입은 문무백관과 행사에 참여하는 인물, 그리고 창검을 들고 도열해 있는 군관들의 모습을 섬세하게 사실적으로 표현해 당시 궁중의식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 경복궁 자경전(景福宮 慈慶殿)

*보물 제809호(1985년01월08일 지정)

*소재지: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로 37, 경복궁

 

 

1867년 경복궁을 다시 지으면서 자미당 터에 고종의 양어머니인 신정왕후 조대비를 위해 지은 대비전으로 중건 이후 화재로 소실됨에 따라서 고종25년(1888)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른다.

 

                          ▲ 경복궁 자경전 전경(사진 左)과 후경(사진 右)

 

자경전은 대비가 일상생활을 하는 침전 건물로, 총 44칸 규모이다. 겨울에 따뜻하게 지낼 수 있도록 서북쪽에 복안당이라는 침실을 두고 중앙에는 중심 건물인 자경전을 두었다. 또 동남쪽에는 다락집인 청연루를 두어 여름을 시원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하였다.

 

                          ▲ 경복궁 자경전 합각벽의 무늬와 화문장

 

주변에는 수십 개의 집과 담장, 문들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대부분 없어졌다. 지금은 장수를 기원하느 뜻을 가진 글자와 꽃,나비,대나무, 형태를 흙으로 구워 새겨 넣은 아름다운 꽃담장과 동식물 무늬인 십장생을 조화있게 새겨 넣은 집 모양의 굴뚝이 남아 있다.

자경전은 조선시대 법궁인 경복궁 안에 남아 있는 유일한 대비전이다.

♧ 경복궁 자경전 십장생굴뚝(景福宮 慈慶殿  十長生굴뚝)

*보물 제810호(1985년01월08일 지정)

*소재지: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로 37, 경복궁

 

                          ▲ 경복궁 자경전 십장생굴뚝

 

십장생굴뚝은 자경전 뒷담의 한 면을 돌출시켜 만든 것이다.

굴뚝은 네모 형태로, 가운데는 동식물 무늬인 십장생을 새겨 넣었다. 십장생 무늬는 가장 한국적인 무늬로 알려졌는데, 이것은 조대비의 만수무강을 기원하여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굴뚝은 벽돌을 쌓아 만들었고 그 위에 기와지붕을 언젅으며 지붕 위에는 연기를 빠지게 하는 시설을 해 놓았다.

 

                          ▲ 경복궁 자경전 십장생굴뚝의 도깨비상(사진 左), 코끼리상(사진 中), 학상(사진 右)

                          ▲ 경복궁 자경전 십장생굴뚝면 귀신쫓는 형상의 불가사리 무늬(사진 左)

                             굴뚝벽 중앙부분의 소나무 무늬(사진 中)

                             굴뚝벽 측면의 박쥐문과 덩쿨무늬(사진 右)

 

굴뚝이면서 장식적인 기능을 충실히 하고 구 조형미 역시 세련되어 조선시대 궁궐에 있는 굴뚝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 조대비 사순칭경진하도 병풍(趙大妃 四旬稱慶陳賀圖 屛風)

*보물 제732호(1982년03월04일 지정)

*소재지:부산광역시 서구 구덕로 255, 동아대학교 박물관

조선 제24대 헌종의 어머니인 조대비의 40세 생신을 축하하는 잔치모습을 그린 병풍이다. 조대비는 순조19년(1819) 세자빈으로 책봉되었으나, 세자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일찍 죽어 왕비는 되지 못하였다. 후에 그의 아들인 헌종이 왕위에 올라 후에 왕대비가 되었다.

 

 

가로 458cm, 세로 169cm의 8폭 병풍으로 7폭은 전각, 나무, 산수를 채색하여 그렸고 마지막 1폭은 도총관 조기영 등 9명의 관등과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헌종13년(1847) 정월 초하루 창덕궁 인정전 앞뜰에서 거행된 잔치에는 400여명이 참석했는데, 관직에 따라 서로 다른 관복을 입은 문무백관과 행사에 참여하는 인물 그리고 창검을 들고 도열해 있는 군관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해 당시 궁중의식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화려한 색깔의 당채를 사용하여 그린 전각, 나무, 산수 등과 인물들의 섬세한 표현에서 도화서의 일류급 화원들이 그린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 작품은 회화사에서 뿐만 아니라 당시 복식연구와 170년 전의 궁중풍속을 볼 수 있는 기록화로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