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제주도의 관광명소

불과 물 그리고 바람의 하모니! 성산·오조 지질트레일

왕마구리 2015. 5. 14. 22:05

『 제주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

과거로부터 배우고 익혀서 지속가능한 미래를 만들어가는 곳!!! 

 

                  ▲ 성산일출봉과 오정개

 

제주는 '제주도 지질공원'(2009년 지정)과 '국가지질공원'(2012년12월 지정)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무엇보다도 2010년 10월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증되어 제주 천혜자원의 가치를 더욱 높이고 있다.

제주는 화산섬으로써 뛰어난 경관뿐만 아니라 약 180만 년 전부터 1천 년 전까지의 화산활동의 흔적이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있어 학술적으로도 연구가치가 매우 높다.

이런 가치를 인정받아 2010년 섬 전체가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증되었고, 그 중에서도 특히 경관이 아름다운 한라산, 만장굴, 성산일출봉, 서귀포층, 천지연폭포, 중문대포주상절리대, 산방산·용머리해안, 수월봉 등의 9곳이 핵심지질명소로 지정되어 세계지질공원 네트워크(GGN)에 가입되었다.

아울러 2014년 3월 우도, 비양도, 선흘곶자왈이 핵심지질명소로 추가돼 총 12곳으로 늘어나게 됐다.

지질공원이란 인공적으로 조성해 울타리로 들러싼 공원이 아니라, 지질적 특징이 뛰어나고 가치가 높은 지역을 선정해 그 명소를 활용하는 등 행위제한을 최소화하고 혜택은 극대화하면서, 자연의 보호와 활용을 조화롭게 하며 지역 경제발전에 기여하고자 만들어진 프로그램이다.

지질공원의 특징은

- 지구과학적으로 중요하고 아름다운 경관을 지닌 장소 로서

- 적당한 크기와 범위를 가지고 있으며,

- 자연,인문,사회,역사,문화,전통 등이 결합되어 있으며,

- 지역주민의 경제적 이익과 지속 가능한 발전전략이 수립된 공원이다.

 

                  ▲ 지질트레일 표시기와 표식기들

 

「 제주도 핵심 지질명소 」

 

 

1. 제주의 중심. 한라산

   1950m 높이의 남한 최고봉.

한라산은 제주의 화산 활동과 더불어 성장한 화산체로 순상화산의 정상에 성질이 다른 두 종류의 용암으로 이루어진 분화구가 놓여 있는 복합화산체이며, 그 독튿한 지형, 지질이 이루는 생태계 또한 특이하다.

고도에 따라 한대, 온대, 난대 등 식물의 수직분포가 뚜렷하고, 90여 종이나 되는 다양한 특산식물을 품고 있기도 하다.

특히 세계 최대 규모의 구상나무 숲과 극지고산식물의 다양성은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가치를 자랑한다.

 

                  ▲ 만장굴 세계 최대 용암석주(사진 左), 용암유선(사진 中), 용암표면 밧줄구조(사진 右)

 

2. 용암이 흐른 거대한 길. 만장굴

   총 길이가 7.4km에 달하는 만장굴은 부분적으로 다층 구조를 지니는 용암동굴로, 주 통로는 폭이 18m, 높이가 23m에 이르는 세계적인 규모의 동굴이다. 특히 지구상에서 그 예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동굴 내부의 형태와 지형이 잘 보존되어 있어 학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

만장굴은 동굴 중간 부분의 천장이 함몰되어 3개의 입구가 형성되어 있는데, 현재 일반인이 출입할 수 있는 입구는 제2입구이며, 1km만 탐방이 가능하다.

 

3. 물·불·바람·의 하모니. 성산일출봉

   높이 180m의 성산일출봉은 약 5천 년 전 얕은 바다에서 지하의 뜨거운 마그마와 물이 만나 격렬하게 반응하면서 분출된 화산재가 쌓여 형성되었다.

본래는 육지와 떨어진 섬이었으나 파도에 의해 침식된 퇴적물들이 해안으로 밀려들어와 쌓이면서 일출봉과 제주도를 이어 놓았다.

이곳의 해 뜨는 장면은 영주십경 중 첫번째로 꼽히며, 성산일출제에는 새해의 첫 해돋이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 성산일출봉(사진 左)과 중문대포주상절리(사진 右)

 

4. 바다에 두른 용암 병풍. 중문대포주상절리

   주상절리대는 서귀포시 중문동에서 대포동에 이르는 해안을 따라 약 2km에 걸쳐 있다.

기둥형태의 주상절리는 뜨거운 용암이 식으면서 부피가 줄어 수직으로 쪼개짐이 발생하여 만들어지는데, 대체로 5~6각형의 기둥형태로 만들어진다. 특히 이곳 주상절리는 중문의 옛 이름인 '지삿개'를 따서 '지삿개 주상절리'라고도 부른다.

제주도에는 이곳 외에도 예래동 해안가. 안덕계곡, 천제연폭포, 산방산 등에서 주상절리가 발달해 있다.

 

5. 세월 따라 상류 쪽으로 조금씩 올라가고 있다? 천지연폭포

   서귀포 서쪽에 자리하고 있는 천지연폭포는 하늘과 땅이 만나는 연못이라는 뜻을 담고 있으며, 높이 22m의 기암절벽 아래로 하얀물기둥을 이루며 떨어지는 폭포수의 웅장함은 제주에서 가장 아름답고 대표적인 폭포로 손꼽히기에 부족함이 없다.

폭포에는 천연기념물인 무태장어와 담팔수 나무를 비롯, 구실잣밤나무, 송엽란, 산유자나무 등 각종 희귀식물이 분포되어 있다.

 

                  ▲ 천지연폭포(사진 左)과 서귀포층(사진 右)

 

6. 100만 년의 기록. 서귀포층

   서귀포층은 천지연폭포 입구에서 서쪽 해안가 절벽을 따라 약 1.5km에 걸쳐 드러나 있다.

서귀포층은 약 180만 년 전 지하에서 상승한 마그마가 물과 만나 격렬하게 반응하여 화구 주변에 화산분출물이 쌓이고, 파도에 의해 깎이고, 다시 분출물이 쌓이기를 반복하면서 생긴 약 100m 두께의 지층으로, 제주도 지하에 넓게 깔려 있는데, 일부가 솟아올라 있어 땅 위에서 관찰할 수 있다.

 

  ◀ 산방산

 

7. 80만 년을 품은 거대 용암돔. 산방산

   산방산은 해발 395m의 거대한 조면암질 용암돔으로 약 80만 년 전에 형성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든 희귀한 화산지형일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경관을 만들어낸 웅장한 지형으로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8. 80만 년 전 탄생의 흔적. 용머리해안

   산방산 아래쪽에 자리 잡은 용머리해안은 용이 머리를 들고 바다로 들어가는 자세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용머리는 제주도에서 가장 오래된 화산체로 한라산과 용암대지가 만들어지기 훨씬 이전에 일어난 수성화산 활동에 의해 만들어진 응회환이다.

 

                  ▲ 용머리해안(사진 左)과 수월봉(사진 右)

 

9. 세계 지질학자들이 꿈에 그리는 세계 최고의 화산학 로드. 수월봉

   제주도 서부지역 고산리에 위치한 수월봉은 높이 77m의 작은 언덕형태의 오름으로 제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몰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수월봉은 약 18,000년 전 지하에서 상승하던 마그마가 물을 만나 강렬하게 폭발하며 뿜어져 나온 화산재들이 쌓이면서 형성된 응회환의 일부로, 이곳에 새긴 지층구조는 수월봉의 화산활동은 물론 전 세계 응회환의 분출과 퇴적과정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로서 지질학적 가치가 매우 크다.

수월봉에는 현재 3가지의 지질트레일 코스(수월봉 엉알길, 당산봉 트레일, 차귀도 트레일)가 있으며, 시간대에 따라서 마을 주민에 의한 지질해설도 들을 수 있다.

 

                  ▲ 우도

 

10. 누운 소의 모습. 우도

   우도는 제주도의 79개 부속도서 중 제일 큰 섬이나 제주시에 속하는 4읍 3면 중 가장 작은 면이다.

소가 드러누웠거나 머리를 내민 모습과 같다고 하여 우도라 이름 지었다. 우도 해안에 발달하는 해빈으로는 우도 홍조단괴 해빈과 하고수동 해빈 및 검멀레 해빈이 대표적이다.

                                                                   

                                                                                                                              비양도 ▶

 

11. 협재해수욕장 앞 그림같은 섬. 비양도

   비양도는 원형에 가까운 타운형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유인도 705개 중 394번쨰로 큰 섬이다.

섬 중앙 해발 114.4m의 비양봉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은 해발 약 30m 이하의 완만한 경사를 갖는 용암순상지가 넓게 발달해 있다.

 

                  ▲ 선흘곶자왈

 

12. 희귀식물의 보고. 선흘곶자왈

   선흘곶자왈은 원래 동백나무가 많다 하여 동백동산이란 이름이 붙여졌으나 동백나무 외에도 다양한 희귀식물이 자생하고 있다. 2011년 3월 14일에는 국내에서 15번째로 0.56㎢ 면적이 람사르보호습지에 등록되었다.

 

◀ 성산·오조 지질트레일 ▶

화산, 바다와 사람을 만나 해양문화를 품다!!!

 

 

「 가장 먼저 해가 뜨는 마을! 성산리 」

성산반도에 자리한 마을이다.

반도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이고, 한 면은 뭍에 이어진 땅을 일컷는 것이다. 성산일출봉과 그 아래 펼쳐진 자락으로 이루어진 성산반도는 해류 작용으로 생겨난 모래언덕에 의해 가느다랗게 제주 본섬과 이어져 있다. 성산리는 '섬이면서 섬이 아닌 곳에 자리한 마을'이다.

이곳에 마을이 형성된 시기는 1800년대 초반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사람이 살았던 흔적은 꽤 깊어 보인다. 탐라 시대 전기의 대표적인 유물인 곽지리식 적갈색토기 조각들이 출토되는 것으로 미루어 탐라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바다를 통해 들어오는 외적을 방어하는 전략기지로 자주 활용되었으며, 예나 지금이나 이 마을에서 변함없이 유명한 것은 성산일출봉이다. 영주십경 중 제1경, 해 뜨는 오름으로 이미 잘 알려진 성산일출봉은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되고 세계지질공원 명소가 되면서 그 이름을 더욱 유명해지고 있다.

성산일출봉 덕분에 자연 유산 마을이 된 성산리는 제주의 7대 자연 유산 마을 가운데 면적은 가장 작지만 가장 많은 관광객이 찾아드는 곳이다.

성산일출봉뿐만 아니라 해상교통의 요충지로 꼽히는 성산항이 있어 늘 활기가 넘치는 이 마을에는 840여 가구에 1,900여명의 주민들이 농업과 수산업 그리고 관광업 등에 종사하며 살고 있다.

 

 성산·오조 지질트레일 탐방 중 조망된 성산일출봉 전경 」 

 

 

 

 

 

 

「 가장 먼저 햇살 닿는 마을! 오조리 」

성산 앞바다 일출봉 건너에서 떠오른 해가 햇살을 펴면 가장 먼저 와닿는 마을이며, 성산일출봉에서 서쪽으로 900m 거리에 자리해 있다.

성산일출봉이 넌지시 바라보이고 황근자생지로 알려진 오름 식산봉이 널따란 내수면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어 늘 평화롭고 신비로운 기운이 감도는 마을이다.

오조리 지역에는 1500년대 이전부터 마을이 들어서 있었다고 전해진다. 옛 문헌자료에 의하면 당시 '오조포연대'가 설치돼 있었고, 따라서 연대 운영과 관련된 사람들이 거주하는 마을이 들어서 있었다는 것이다. 그 후의 문헌기록 가운데 김상현의 「남사록」(1601~1602년)에는 "생선을 파는 가게 수십 호가 있는데 겨울과 봄에 와 살고 여름에 떠나간다.", "지금은 저절로 한 마을을 이뤄 겨울에 왔다가 여름에 돌아가는 일은 없다."라고 이원지의 「탐라지」(1653년)에 기록되어 있어 오조리의 옛날을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오래 전부터 배를 잘 만드는 목수들이 많아 온갖 선박들을 제조했던 곳이기도 했고, 해녀들이 배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가 작업하는 '뱃물질'이 유난히 활발한 마을이기도 했다.

현재 성산읍 14개 행정리 가운데 여섯 번째로 인구가 많은 마을로 400여 가구에 1,000여명의 주민들이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고 있다.

 

                  ▲ 오조리 마을 입구에서 뒤돌아본 식산봉과 지나온 데크길

 

【  걷기일자 】 2015년 4월 26일(일)

【  지질트레일코스 】오조해녀의집→조개잡이쉼터→안내광장/식산봉→용천수'족지물'→오조리사무소→'퓨물러스와 재주밭담'해설포인트→전망데크→'철새도래지'해설포인트→해변데크A→해변데크B→터진목·4.3유적지→도로삼거리→일제동굴진지유적지→성산스쿠버앞 방파제→성산일출봉 입구→오정개→시인 이생진시비거리→'우도'해설포인트→성산항입구→'우도·성산항'해설포인트→성산항입구사거리→한도교갑문→오조해녀의집

 

 

 <<참고>>총7.10km

성산일출봉-(0.3km)-오정개-(0.3km)-시인 이생진시비거리-(1.0km)-'성산항·우도'해설포인트-(1.4km)-식산봉-(0.8km)-용천수'족지물'-(1.1km)-'튜물러스·밭담'해설포인트-(0.8km)-'철새도래지'해설포인트-(0.5km)-터진목·4.3유적지-(0.8km)-일제동굴진지유적지-(0.3km)-성산일출봉

 

***성산일출봉 트레킹(1.2km) 포함시 총 8.3km

【 코스거리 】 약 7.10km

【 소요시간 】 총 2시간 32분 소요(휴식:48분+일제동굴진지유적지 탐방 10분 포함)/실제 걷기시간 : 1시간 34분 소요

【 날     씨 】 맑 음

【 코스탐방 】 

세계적으로 가치를 인정받은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이란 브랜드를 활용하여, 제주의 문화원형이라 할 수 있는 지질자원과 농촌마을의 향토색 가득한 역사 문화자원을 접목시켜 만든 걷는 길이 지질트레일이다.

2011년 10월 15일 수월봉 지질트레일 개통을 시작으로, 2014년 4월 5일 산방산·용머리해안 지질트레일, 2014년 10월 25일 김녕·월령 지질트레일에 이어 오늘 네번쨰 지질트레일 코스인 성산·오조 지질트레일 길열림 행사를 갖고 정식으로 개통되었다.

 

                  ▲ 성산·오조 지질트레일 길열림 행사장

 

성산·오조 지질트레일은 성산일출봉과 인근 내수면의 뛰어난 경관과 어로·생태·역사·문화를 아우르는 해양문화·생태를 체험할 수 있는 길이다.

성산읍이 품은 마을 가운데 성산일출봉을 끼고있는 성산리와 성산일출봉이 넌지시 바라보이는 마을 오조리에 걸쳐 이어지는 길로 테마는 '불과 물 그리고 바람의 하모니'이다.

그 안에서 '불의 기억(성산일출봉,진지동굴,해안,터진목,4.3유적지)'과 '물의 추억(내수면,오조포구,족지물,식산봉,식산봉주변,모래밭,성산갑문)' 그리고 '바람의 길(성산항,바람언덕,해녀의길,성산마을제단,이생진시비,오정개,우뭇개,우뭇개동산)'로 이어지며 지질과 해양 문화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 낼 것이다. 이 코스를 걷는 내내 성산일출봉이 마치 지켜주는 것처럼 따라 다닌다.

 

                  ▲ 하도어촌계펜션

 

개통 행사장인 '오조 해녀의 집' 부근은 운영중인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 해맞이해안로에 위치한 '하도어촌계 펜션(http://www.hadobada.co.kr/  T.064-783-1994)' 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승용차로 10여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어, 아침 일찍 서둘러 펜션 손님 맞을 준비를 끝내놓고 행사장으로 향한다.

행사장에서 지질트레일 안내도와 책자를 챙기고, 행사가 시작되는 것을 잠시 참관하고 시계 반대방향으로 새로 개장한 성산·오조 지질트레일 탐방을 시작하였다.

 

 

                  ▲ 지질트레일 개통행사장 앞 포토존에서 바라본 성산포 내수면과 성산일출봉(사진 上)

                     식산봉(사진 下)

 

10:10=>'오조해녀의집'부근 행사장/성산항진입도로 '한도교(성산갑문)'입구

     행사장 길 건너 '오조해녀의집' 버스정류장이 있고, '성산·오조 지질트레일' 해설판이 있다.

 

                  ▲ 지질트레일 개통행사장인 오조해녀의집에서 식산봉으로 가는 내수면 탐방로

 

                  ▲ 조개잡이쉼터로 이어지는 시멘트포장 탐방로

                  ▲ 조개잡이쉼터로 이어지는 시멘트포장 탐방로에서 바라본 성산일출봉

 

버스정류장 앞을 지나 인도를 따라 약 70여m를 진행하면, '뚱삼촌연탄구이' 식당 입구 ┫자 갈림길. 좌측의 시멘트 포장 산책로를 따라 가면 조개잡이쉼터에 이르게 된다.

 

 

 

                  ▲ 조개잡이쉼터(사진 上)

                     조개잡이쉼터에서 바라본 성산포 내수면과 성산일출봉(사진 中)

                     조개잡이쉼터의 이정표(사진 下)

 

10:14~10:18=>조개잡이쉼터

     이정표(↑식산봉, 안내광장/↓한도교<성산갑문>, 진입광장)와 '조개잡이쉼터' 푯말이 있다. 좌측 해변가에는 쉼터가 마련되어 있다.

 

 

                  ▲ 조개잡이쉼터에서 식산봉 안내광장으로 이어지는 지질트레일

 

계속되는 해변을 따라 이어지는 길을 따르면 약 5분 후 좌,우로 제주올레 제2코스가 가로지르는 안내광장인 식산봉 입구에 이르게 된다.

 

 

 

                  ▲ 식산봉 안내광장(사진 上)

                     제주올레 2코스가 가로지르는 사거리인 안내광장(사진 中)

                     제주올레 2코스인 좌측 데크길(사진 下)

 

10:23~10:26=>식산봉/안내광장

     제주올레 제2코스 올레길인 우측 식산봉 방향과 좌측 방파제길이 갈라지는 사거리로 이정표(←오조리포구/↑식산봉/↓한도교<성산갑문>, 조개잡이쉼터/→올레2코스)가 설치되어 있다.

또한 좌측 방파제길 입구에는 '식산봉' 제주올레 안내판이 있다.

 

                  ▲ 식산봉 안내광장의 이정표(사진 左)와 제주올레 '식산봉' 안내판

 

♧ 국내 최대 황근 자생지. 식산봉(食山峰)

성산일출봉과 마주한 식산봉은 해발 60여m의 작은 오름으로 바다와 맞닿아 있다. 하지만 작다고 우습게 볼 일이 아니다. 식산봉은 그 주변과 어우러져 뽐내는 아름다운 경치로 '성산10경'의 하나로 꼽힌다.

 

 

식산봉이라는 한자말을 낳은 전설과 함께하는 곳이며, 염습지에서 자라는 희귀식물인 황근의 국내 최대 규모 자생 군락지이기도 한다.

그밖에도 백문동, 청미래덩굴, 율초 등 많은 약초들이 군락을 이루어 곳곳에 분포하고 있다. 또한 칠면박나무, 참식나무, 까마귀쪽나무, 돈나무, 송악, 자금우, 광나무, 마삭줄 등 자생 상록활엽수림이 넓게 분포하는 등 108종의 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식산봉으로 다가서면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목책을 둘러 보호하고 있는 황근이다. 무궁화의 일종인 황근은 1~2m의 키에 잎은 원형 또는 달걀 모양을 하고 있다. 7~8월에 노란색 꽃이 하나씩 잎겨드랑이에 피고 가을에 열매가 익는다.

신기하게 도 종자가 염분에 잘 견디도록 적응해 왓고, 가벼워서 해류를 따라 물에 떠다닐 수 있는데, 그렇게 떠돌다 파도를 만나 육지에 뿌리를 내라는 특성 때문에 '갯부용(갯아욱)'이라고도 불린다.

바닷가에서 서식하는 특이한 황근은 무궁화와 비숫하게 생겨서 예로부터 노랑무궁화라는 뜻의 이름을 갖게 된 황근은 햇볕을 좋아해서 음지에선 꽃을 피우지 않는다. 연노랑색으로 피어서 꽃이 질 무렵이면 처음 붉은색으로 변하며, 가을이면 낙엽을 떨군다.

그 분포지역이 얼마 안되고 개체 수가 적기 때문에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 야생식물 2급, 산림청지정 희귀 및 멸종위기식물 보존 우선순위 93위에 각각 등재되었고, 식산봉 황근 자생지와 상록활엽수림은 1995년부터도 지정문화재로 보호되고 있다.

꽃이 예쁘고 단풍도 들기 때문에 관상용으로 애호가들이 늘고 있다. 그래서 제주에서는 황근 자생지 복원 노력이 이어져왔다.

1980년대 농촌진흥원에서 황근을 널리 보급하기 위해 식산봉 황근 가지를 가져다 증식했다. 이후 여미지식물원에서는 서귀포시 법환동 해안의 황근 자생지를 복원하기 위한 사업을 펼치기도 했으며, 근래에는 환경부 산하 국립생물자원관에서 증식한 황근을 서귀포시 표선면 해안도로변에 식재하기도 했다.

식산봉처럼 바닷가의 식생 환경은 다양한 요인에 의해 흔들리기 쉽다. 때문에 이를 잘 살피는 것은 우리네 삶의 환경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헤아리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활짝 핀 노란 황근을 기다리는 것은 우리 삶터가 씩씩하게 숨 쉬고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기도 하다.

 

 

                  ▲ 식산봉 안내광장에서 오조리 마을로 가는 길

                  ▲ 제주올레 2코스와 다시 만나는 '식산봉 황근 자생지 산책로' 안내도가 있는 ┠자 갈림길

 

직진 길을 따르면 '식산봉의 황근 자생지 산책로' 안내도가 있는 ┣자 갈림길(10:29~10:32). 우측 식산봉에서 내려오는 산책로가 제주올레 제2코스 올레길로 올레길과 다시 만나게 되는 곳이다.

 

                  ▲ 오조리마을로 들어가는 데크길이 시작되는 ┪자 갈림길

 

제주올레길과 함께 하는 지질트레일을 따르면 '식산봉·쌍월' 지질트레일 해설판을 지나 '식산봉의 황근자생지 및 상록활엽수림' 안내문이 있는 ┫자 갈림길(10:34).

이곳에서 좌측의 나무데크길을 따라 오조리 마을로 향한다.

 

 

 

 

                  ▲ 오조리마을로 들어가는 데크길

 

데크길이 끝나면 오조마을로 들어서게 되는데 용천수 '족지물'이 자리하고 있다.

 

                  ▲ 오조리마을로 들어가는 데크길에서 뒤돌아본 성산일출봉과 식산봉

 

♧ 제주사람들의 생명수 길어내던 물통들

화산섬인제주에서 물은 매우 귀한 것이다. 강수량이 많아도 완만한 지형경사를 타고 바다로 흘러가 버리거나 토양의 특수성이 높아 쉽게 스며들어 버리기 때문에 때를 가릴 것 없이 물과의 사투를 벌여야 했다. 그 싸움에서 한숨 돌릴 수 있게 해주던 것이 땅속에서 솟아나는 용천수며 빗물이 고여 가두어진 봉천수이다. 주민들은 이를 '물통'이라 부렀고, 제주 전역에 912개의 물통이 있다고 한다.

 

 

오조리에는 물통이 많기로 유명하데, 제주에서 네 번째로 용천수가 풍부한 마을로 12개가 있다. 진모살물, 수전, 주근디물, 엉물, 샛통물, 얼피물 등.

과거 식수는 물론이고 빨래와 목욕 등 일상생활에 두루 사용했으며 소와 말을 먹이기도 했다. 이들 물통들은 마을의 공동 재산이나 다름없었고, 그래서 늘 깨끗이 관리하는게 몸에 배어 있었다. 음용하는 물통은 특히 그랬고, 허드렛일은 물이 흘러내리는 아랫녘에서 했다.

오조양어장을 끼고서는 주근디물과 족지물, 재성물, 엉물 등의 샘이 솟아나고, 식산봉 서북쪽에 위치한 재성물은 과거 목욕탕으로도 사용하였다. 그 샘에는 2~3분도 들어가 있지 못할 정도로 차고 싱싱한 물이 솟았지만 보를 쌓으면서 차츰 변질되어 버렸다고 한다. 더구나 오조리의 샘물에는 소금기가 있어서 음료수로는 부적당한 곳도 많았다. 1970년대 초중반에 이르러 대부분의 농어촌 지역에도 공동수도를 시작으로 가구마다 수도가 들어오면서 물통은 그 쓰임새가 점차 시들해졌다.

지금은 '족지물'을 제외하고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다.

마을에서 해안쪽으로 빠져나오다 보면 대나무와 동백나무 등이 들어차 있는 둔덕 아래로 작은 돌들을 쌓아 둘러쳐놓은 물통이 '족지물'이다.

근래 주로 목욕탕으로 사용했던 족지물은 그 위쪽이 여탕, 아래쪽은 남탕으로 나뉘어 있다. 맨 위쪽은 채소를 씻기도 하고 음용수로도 사용하였다. 주민들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어 주변에 조성된 동네이름도 '족지동네'이다. 예전과 같이 이용이 많지 않지만 여름철 피서지로 지역주민과 관광객들에게 쉼터를 제공하고 있다.

그 옛날 제주사람들은 동네 물통에서 물 한 허벅 길어오는 것이 첫 일과였다. 가뭄이라도 들면 중산간 마을에서는 해안가 용천수 물통을 찾아 먼 길을 다녀야 했다. 어쩌다 마을 어귀에서 만나게 되는 물통에서도 세월의 변화를 엿불 수 있다.

 

                  ▲ 오조리마을 입구인 용천수 '족지물'(현지 주민인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는 도보꾼들)

 

10:39~10:43=>용천수 '족지물'

     '용천수 족지물' 지질트레일 해설판과 '족지물' 표지석 그리고 정자 쉼터와 화장실이 설치되어 있다.

마을길로 들어서 ┳자 삼거리에서 우측 길을 따르고, 다시 왼쪽 돌담에 '제주올레 2코스 ←남은거리 13km' 푯말이 붙어있는 ┳자 삼거리에서 좌측 길을 따라 내려가면 오조리사무소/오조리마을회관 앞에 이르게 된다.

 

                  ▲ 오조리마을회관(사진 左)과 마을회관 옆에 설치된 이정표(사진 右)

                  ▲ 오조리마을에 설치된 성산·오조 지질트레일 안내판

 

10:46~10:50=>오조리마을회관/오조리사무소

     성산·오조 지질트레일 대형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는 쉼터이다. 이곳부터 성산스쿠버앞 방파제/성산일출봉주차장까지(2.7km) 화장실이 없으므로 참고해야 한다.

오조리사무소를 지나자마자 이정표(←오조리포구/↑올레2코스, 고성방면/↓오조해녀의집, 성산고등학교)가 설치되어 있는 ┫자 갈림길. 좌측 오조리포구 방향으로 진행하면 정자 쉼터가 있는 ┣자 갈림길.(10:53)

 

                  ▲ 정자 쉼터가 있는 오조리마을 ┢자 갈림길

 

우측 돌담 마을길을 따르면 ┳자 마을갈림길. 좌측의 시멘트 포장길을 따른다.

 

                  ▲ 제주올레 2코스와 다시 만나는 ┨자 갈림길

 

이정표(←올레2코스/↑광치기해변/↓오조리마을)가 설치된 제주올레 2코스와 다시 만나는 ┫자 갈림길.(10:58) 좌측으로 제주올레 제2코스가 갈라지는 곳이다.

'튜물러스와 제주밭담' 지질트레일 해설판(11:00)를 지나면 좌측 나무데크길인 제주올레 제2코스와 만나게 되는 ┫자 갈림길.(11:03~11:07)

 

 

                  ▲ '튜물러스, 제주밭담' 지질트레일 안내판(사진 上)

                     좌측으로 제주올레 2코스 데크길이 갈라지는 ┨자 갈림길(사진 下)

 

♧ 화산섬의 기록. 튜물러스(tumulus)

제주 해안가 곳곳은 이 섬이 화산섬임을 말해주는 흔적들로 가득하다. 육지 끝자락에서 다시 바다로 뒤틀리며 스며드는 시커먼 암반들로 해안가가 뒤덮혀 있으며, 각 모양을 달리하는 크고 작은 바위덩어리들이 제멋대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갑문 안쪽으로 성산리와 오조리를 잇는 해안에서도 이러한 지형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 가운데 유독 눈길을 끄는 것이 내수면 가장자리 곳곳에 자리한 '튜물러스'이다. 보통 암반이라고 하면 사방 물샐 틈 없이 딴딴한 것을 연상하겠지만, 튜물러스는 마치 작은 동굴마냥 속이 텅 비어있거나 여기저기 틈새가 이어진 모양새를 하고 있다.

화산이 폭발하고 1300℃가 넘는 용암이 흘러내리다 장애물을 만나 굳은 표면을 밀어 올리거나, 굳은 표면속에 갇혀 있던 가스가 팽창하면서 균열을 만들어내게 된다. 그러면 속이 반쯤 비어버린 모양이 생겨나기도 하고 여러 갈래의 V자형 틈이 생겨나게 된다.

튜물러스는 이처럼 앞선 용암류의 표면이 차가운 대기에 의하여 굳기 시작한 이후에도 그 하부에는 천천히 흐르던 용암의 압력이 위로 치오르면서 완만한 구릉형태로 만든 것이다. 이미 굳어진 용암류의 표면은 깨지기 쉽기 때문에 부풀어 오른 중심부는 종종 갈라지게 되고, 이러한 균열은 일반적으로 튜물러스의 길이 방향으로 이어지게 되고 양 옆으로는 보다 적고 불규칙적인 균열이 생겨나게 된다.

그리고 용암은 주로 이런 균열을 통해 밖으로 스미어 나오게 되며, 때때로 속의 용암이 완정히 배출되어 속이 빈채로 남기도 하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용암지형은 중산간지대 곶자왈에서 다양하게 발견된다.

흐르는 용암의 양쪽 가장자리가 찬 공기와 만나면서 빨리 굳어져 만들어진 '용암제방', 흐르는 용암이 나무를 감싼 후 굳어지고 나무는 풍화되어 겉모양만 남아있는 '용암수형', 점성이 큰 마그마가 지표로 올라와 굳어져서 마치 종을 엎어놓은 것과 '용암돔', 그리고 눈사람처럼 준고체 상태의 암괴들이 구르면서 반복적으로 들러붙은 나이테 모양의 '부기용암구' 등 특이한 지질 구조들이 다양하게 분포하고 있다.

 

♧ '돌과 바람의 섬'의 농업을 지켜온, 밭담

돌의 나라, 바람의 땅, 화산섬의 척박한 토양을 지닌 제주섬에서 농사를 짓기란 여간 어려운게 아니었다. 농사를 지으려 밭을 조금만 일궈도 여지없이 돌이 숱하게 튀어 나온다. 화산섬의 화산회토 토양은 찰기가 없고 가벼워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쉽사리 날려버리고, 큰비라도 올라치면 낮은 곳으로 쓸리기 일쑤이다. 그러니 이 섬에서는 밭에 드러나는 돌과 척박한 토양을 어떻게 갈무리하느냐 하는 것이 농사의 관건이었다.

제주 선인들은 밭을 일구다 나온 돌을 한편에 쌓아두었다. 이를 '머들'이라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이런 주변 돌을 밭 가장자리로 옮겨 쌓기 시작했다. 아마도 거친 바람에 이리저리 휩쓸리는 농작물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랬더니 의당 수확이 늘어나, 밭담은 점차 제주섬 밭농업지대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대략 22,000km가 넘는다는 제주의 밭담은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으로 보고 있다. 꾸불꾸불 이어진 밭담의 모양새가 마치 흑룡을 닮았다고 하여 '흑룡만리'라 부르기도 한다. 물론 때에 따라서는 마소의 농경지 침입을 막기 위해 쌓기도 하고, 밭 경계의 표지로 쌓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제주의 농군들은 잘 알고 있다, 그 밭담이 연신 불어대는 바람을 갈무리하여 농작물을 보호하고, 토양의 비산을 막아준다는 것을, 그래서 이 섬에서도 농사가 가능했다는 것을...

2014년 FAO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한 제주밭담은 천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을 큰 바람에도 넘어지지 않고 버텨왔다. 구멍 숭숭 뚫린 밭담은 거센 바람을 약화시킬뿐 아니라 이용한 돌들의 아귀를 서로 맞물려 쌓았기에 쉽사리 무너지지도 않기 때문이다.

성산리와 오조리 같은 해안마을에서는 반농반어의 생업을 이어왔으니, 그 규모는 작을망정 밭담을 쌓을 수밖에 없었고, 오히려 강한 해풍을 막기 위해 밭담을 더 높이 쌓기도 했다. 이러한 제주밭담의 모습은 제주사람들의 지혜와 강인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내기 위한 지혜의 소산이 밭담이다. 또한 밭담의 돌들 서로가 옹골차게 맞물려 있는 모습은 서로 도우며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제주공동체 삶의 여정을 말해주는 듯하다.

 

 

                  ▲ 보길이 시작되는 곳에 위치한 데크전망대(사진 上)

                     데크전망대에서 바라본 성산일출봉(사진 下)

 

제주올레 제2코스와 함께 하는 지질트레일 탐방로가 이어지고, 전망데크를 지나면 길게 이어지는 보(洑)길(제방길)이 시작된다. 보(제방)길 좌측은 널따란 수면이 가슴을 탁 트이게 해주고 차분히 가라앉혀주는 내수면이 펼쳐지는데 바다였던 곳이 커다란 호수가 돼버린 것이다. 내수면의 동쪽 뭍은 성산리, 서쪽 뭍은 오조리에 닿아있지만, 동남쪽의 터진목은 1920년대까지만 해도 모래톱 너머로 바닷물이 물때 따라 넘나들곤 했고, 북쪽은 1980년대까지도 바다로 트여 있었다.

터진목이 막아지고 갑문다리((한도교)가 놓이면서 갇히다시피 한 바다가 내수면이 된 것이다.

이곳이 바다였던 시절에는 성산리가 섬으로 고립됐었는데, 터진목과 갑문다리가 본섬과 이어지면서부터는 바다가 내수면으로 고립됐다.

우측으로 양식장이 나타나는데 1900년대 초에는 돌담을 보를 쌓은 '장정의보'와 '정도정보' 등 제주 최초의 양어장이 들어서기도 했고, 그것을 시작으로 1960년대에는 8만여평의 '오조양어장'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 내수면을 따라 이어지는 보길

 

♧ 제주 최초의 양어장, 장정의보와 정도정보

내수면의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쌓은 둑을 말하며, 고기를 가둬잡아 기르기 위해 만든 제주 최초의 양어장이다.

내수면 서쪽으로 기다랗게 갈라놓은 돌담이 지금도 남아 있는데 '장정의보'이다.

정의군수를 지낸 장용건(1869~1928)이 쌓아 만든 보라는 뜻으로, 1907년에 사업을 착수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정도정보'는 정도정이라는 사람이 원형을 이룬 후미진 내수면에 일자형으로 도(渡)를 내어 만든 양어장이다.

이들 둑을 쌓아 만든 양어장은 수문에 대나무발 그물을 설치해서 밀물 때에 들어온 물고기를 나가지 못하게 해서 잡았다고 한다. 염격히 말해서 조수간만의 차를 이용해 어류를 가두어잡는 어로시설이지만, 안에서 기를 수 있기 때문에 양어장이라 할 수 있다.

이들 양어장의 조성은 바다고기의 단순한 채집을 넘어 길러 비축하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발상이었다, 더불어 이곳 내수면에 보를 설치한 정도정과 장용견은 '기르는 어업'의 창시자이며 선구자로 꼽힌다.

이 두 양어장이 계기가 되어 고성리 동남의 기수지대 갈대밭에도 숭어를 기르는 보를 쌓았다고 한다. 장정의보와 정도정보는 어업의 본보기이며, 전진기지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 오조양어장

1962년 10월, 1백년 전의 '정도정보'를 근간으로 공사가 시작되었다.

오조리청년회와 부녀회가 주축이 되어 5.16직후 시작된 국가재건국민운동의 일환으로 대규모 마을양어장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 20만원의 하사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변변한 장비가 없던 시절, 주민들은 맨손으로 식산봉의 흙과 돌을 나르고, 해안가에 산재한 무거운 돌을 꺼내 둑을 쌓고 외벽을 쌓아 1967년 완공하엿다.

길이 182m에 높이 4.5m의 둑이 쌓이고 수문 2개소를 갖춘 26만㎡ 규모의 양어장이 주민들의 피와 땀으로 건설된 것이다. 보리 흉작으로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던 1964년을 빼면 만4년의 시간과 연인원 2,500여 명이 동원된 공사였다.

돌담을 쌓는 방식으로 둑과 석축을 만들어 조성한 오조리양어장은 오랫동안 옛 방식대로 자연산 숭어와 장어, 우럭 등을 키웠느데, 바다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오는 어류 숭어의 습성에 맞쳐 밀물 때는 수문을 열었다가 썰물 때 수문을 닫아 고기를 가두어 길렀다.

예전처럼 대규모는 아니지만 지금도 옛 방식대로 자연산 숭어 등을 키우고 있는 이곳 양어장은 앞으로 다른 고급 어종들도 양식할 계획이다.

 

이곳 내수면은 2014년에 20년만에 갑문을 작동시켜 전국체전 카누경기장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 철새들의 천국, 철새도래지

제주도는 지리적 위치가 철새들의 이동 경로에 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서식지가 분포하고 인위적인 간섭이 적은 곳이다.

현재 제주에서 관찰되고 기록된 조류는 380여종, 우리나라 전체 조류 500여 종의 70%가 넘는 수이다. 철새에게 제주는 최적의 번식지이자 월동지요, 중간 기착지가 되고 있으니, 철새들의 천국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제주도의 대표적인 철새도래지로 꼽히는 성산포만 섭지는 특히 철새들의 겨울나기에 알맞은 곳이다. 더불어 이 일대는 매년 겨울철이 되면 연구가, 생태 사진가, 탐조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괭이갈매기, 재갈매기, 붉은부리갈매기 등의 갈매기류, 천둥오리, 흰빰검둥오리, 원앙 등의 오리류, 왜가리, 백로, 흑로, 해오라기 등의 백로류, 그리고 저어새, 큰고니, 큰기러기, 물수리, 매, 황조롱이 같은 희귀철새 등 매년 수백에서 수천 개체가 찾아든다.

특히 저어새는 전 세계적으로 약 2천개체만이 생존할 정도로 멸종위기종으로, 매년 20여 개체가 성산포만에 찾아오고 있다. 저어새는 주로 남북한 서해안 무인도나 중국 일부 지역에서 번식하고, 제주도를 비롯한 일본 큐슈, 대만 , 홍콩, 중국 남부지역에서 겨울을 난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저어새의 번식지이자 월동지를 지니고 있는 유일한 국가이다.

제주도는 저어새의 번식지로부터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월동지이면서 중간 기착지이기 때문에 저어새의 이동경로를 추적하거나 월동생태를 연구하는데 가장 핵심적인 지역으로 꼽힌다.

 

 

                  ▲ 보길이 끝나는 곳의 철새도래지 갈림길(사진 上)

                     식산봉이 내수면 건너로 조망되는 철새도래지(사진 下)

 

보(제방)길이 끝나는 곳에 '철새도래지' 지질트레일 해설판(11:13~11ㅣ17)과 이정표(↑성산방면, 해변데크/↓올레2코스, 오조리마을/→성산하수처리장)가 설치되어 있다.

좌측으로 성산포를 끼고 해안선을 따르면 '해변데크A', 해변데크B'(11:21)를 차례로 지나 4차선 포장도로와 만나는 터진목에 이르게 된다.

 

 

                  ▲ 철새도래지 '해변데크A'

                  ▲ '해변데크A'에서 바라본 철새도래지인 성산포 내수면 일대

 

                  ▲ 내수면을 끼고 이어지는 지질트레일

                  ▲ 해변데크B

 

♧ 이름만 남은, 터진목

일출봉에서 남쪽으로 4km정도 떨어진 곳에'섭지코지'가 있다. 섭지코지는 현무암질 용암대지 의에 모래언덕들이 형성돼 있는 반도형 해안지형이다. 이곳의 모래언덕을 이루고 있는 사구층은 섭지코지로부터 신양리마을을 거쳐 성산일출봉까지 이어져 있다.

'터진목'이라 부르던 성산반도를 섬인 듯 섬이 아닌 곳으로 만든 가느다란 모래톱 길목이 바로 이 사구층이 만들어낸 육계사주이다.

본디 성산리는 제주본섬에 딸린 작은 섬이었다. 그러나 늘 고립된 섬이었던 것은 아니고, 썰물 때면 드러나는 가느다란 모래톱이 본선과 이어주곤했다. 그렇게 물때에 따라 본섬으로 가는 길목이 바닷물로 터지곤 했던 곳이라 해서 '터진 길목' 곡 '터진목'이라 불렀던 것이다.

썰물 때 터진목의 모래톱이 가느다랗게 드러나면, 주민들은 그때를 이용해 마을 안팎을 오갈 수 있었다. 급한 일이 생겼는데 밀물 때라 터진목에 바닷물이 찰랑거리면 뗏목을 이용해 오가거나, 그도 여의치 않으면 어쩔 수 없이 허리께에 차는 바닷물 속을 걸어 다녀야 했다고 한다.

이렇게 사람이 드나들기에 불편하고 경작할 만한 땅은 협소한 데다 일출봉은 너무 가파른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성산반도에 마을이 늦게 들어선 이유를 알 것도 같다.

마을이 이루어진 뒤로도 오랫동안 마을사람들은 그렇게 물때에 맞추어 터진목을 오가며 그낭 섬 속의 섬마을에서 살아왔다.

터진목에 연륙공사가 이루어진 것은 일제강점기 때이다. 그 뒤로 몇 번의 공사를 더 거치고 난 지금은 넓은 도로가 그 자리를 단단하게 잇고 있어, 터진목은 이제 이름만 남은 곳이 되었다.

 

                  ▲ 터진목연안

 

성산성 돌들을 날라다 터진목을 막아...

성산반도와 제주본섬을 잇는 터진목 토목공사는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말 일제의 강행으로 시작되었다.

성산반도애 본디 '성산포'라 불렀던 가장 큰 천연포구는 일출봉 남쪽 해안을 끼고 타원형으로 휘어 도는 해안선에 자리한 '수매밋' 곡 수마포구였다.

성산포는 지리적으로 일본과 아주 가까워 일제가 고기잡이 선단의 정박지이자 제주에서 공출한 물자를 일본으로 실어나르는 항구로 활용하였다. 그런데 제주본섬으로 오가는 유일한 길이었던 '터진목'은 썰물 때에만 드러나는 아스라한 모래톱뿐이었으니, 수시로 드나들 수 있는 든든한 길이 필요했다. 그러나 터진목을 중심으로 한 연륙공사는 시작부터 험난했다고 한다. 낮에 매립해 두면 하룻밤을 넘기지 못하고 바다속으로 쓸려버리곤 했기 때문이다. 터진목을 넘나드는 유난히 드센 바람과 힘찬 밀물에 흙과 나무로 이루어진 매립재가 견디지를 못하였기 때문이다.

매림하기가 무섭게 바닷물에 자꾸만 쓸려가 버리는 바람에 고전하던 연륙공사는 돌을 매립재로 활용하면서 진척을 보이기 시작하였는데, 그 돌이 바로 일출봉 아래에 쌓여 있던 성산성의 돌들이엇다.

마을주민들이 동원되어 성산성의 돌들을 등짐으로 지고 터진목으로 날랐다. 커다란 바윗돌은 소와 말을 동원하고도 모자라 주만들이 다 달려들어 겨우 날랐다고 한다. 일출봉 아래에 성산성이 구축된 것은 임진왜란의 발발로 시국이 한창 어지럽고 불안한 시기였던 1597년의일이다. 당시 성산지역을 일본해군의 침략에 대비한 중요한 방어처로 인식했던 것이다.

그렇게 왜군을 방어할 목적으로 축성된 이 성담이 일제강점기에 단행된 연륙공사로 사라지고 말았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터진목과 4.3 이야기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으로 꼽히는 4.3사건은 그 배경도 원인도 과정도 복잡해서 한 마디로 잘라 말하기가 어렵다. 「제주 4.3사건 진상보고서」는 '제주4.3사건'에 대해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 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 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 도당 무장대가 무장 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 사건으로 희생된 사람은 2만5천~3만 명, 이 사건으로 제주도 내 거의 모든 마을이 피해를 입었다.

지금의 성산리는 오조리에서의 갑문다리 길이나 고성리에서의 터진목길을 이용해 오갈 수 있다. 그러나 4.3 당시의 성산리는 터진목 길만 막아버리면 오갈 수 없는 곳이기도 햇다. 그래서 터진목은 민보단 등 주민들이 유일하게 보초를 서는 곳이기도 했다. 이런 지리적 여건 때문에 성산마을은 1948년 4,3 발발 초기에 무장대의 지서습격이 한 번 있었지만 인명 피해는 없었고, 그 후로도 무장대로부터 이렇다 할 기습을 당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서청', 곧 서북청년단 특별중대의 무자비한 폭력은 계속 이어졌다. 당시 성산주민들은 서청에게 잡혀온 성산지역 사람들이 날마다 고문받는 비명소리를 들으며 치를 떨어야했다. 서청 특별중대는 잡아온 주민들을 혹독하게 고문하다가 대부분 총살했는데, 그 장소가 바로 이 '터진목'과 '우뭇개동산'이었다.

특히 터진목은 성산지역 4.3사건 전체 희생자 450명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200여 명이 집단으로 학살당한 곳이다. 그 뒤 62년의 세월이 지난 2010년 11월 5일에 이르러서야 당시 억울하게 희생당한 성산지역 445명의 넋을 위로하는 '성산읍 4.3희생자 위령비 제막식 및 추모위령제'가 치러졌다.

 

                  ▲ 터진목, 4.3유적지 해설판이 설치된 4차선 포장도로

 

11:22~11:24=>터진목, 4.3유적지

     성산·오조 지질트레일 '터진목, 4.3유적지' 해설판이 설치된 4차선 포장도로와 만나는 ┳자 삼거리이다.

포장도로 좌측 인도를 따르게 되어 있다. 길 건너 우측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4.3유적지 위치해 있지만 다음 제주올레 제2코스 탐방 때 방문하기로 하다.

 

                  ▲ 도로건너 Y자 갈림길에서 우측 성산일출봉 방향의 도로 따라서...

 

포장도로를 잠시 따르면 도로표지판(↖성산항/↗성산일출봉)이 있는 도로삼거리.(11:27)

 

 

                  ▲ 수마포구 직전 성산일출봉이 조망되는 해안가의 제주올레길 표시(사진 上)

                     성산일출봉으로 이어지는 해안을 따라서...(사진 下)

 

우측으로 횡단보도를 건너 성산일출봉 방향으로 약 100여m를 따르다 '성산해촌' 식당 직전 우측으로 들어가면 바닷가에 제주올레 표시와 '간세' 안내석이 설치되어 있다. 좌측 해안 방파제길을 따라 성산일출봉을 바라보며 진행하면 수마포구에 이르게 되는데, 일제동굴진지 유적지 입구이다.

 

♧ 아픔의 역사현장, 일제동굴진지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일제는 일본 본토 사수의 최후 보루로 제주도를 설정하고 섬 전체를 요새화하였다. 7만5천여 명에 이르는 일본군 대병력이 진주하고 제주 전역에 수많은 군사시설이 구축되는 등 제주도는 하나의 거대한 전쟁기지를 방불케하였다.

 

 

                  ▲ 일제동굴진지가 있는 성산일출봉 해벽(사진 上)

                     일제동굴진지 입구(사진 下)

일본군은 연합군과 최후의 일전을 준비하기 위해 제주 전역에 수많은 동굴진지를 구축했는데, 일출봉 해안가에 뚫어진 동굴진지 역시 바로 그때의 흔적이다. 당시일본군이 구사한 특공작전은 항공특공과 해산특공, 모두 비행기나 고속정 등에 폭탄을 실은 채 함정에 돌진하는 자살공격이었다.

당시 일출봉은 일본해군의 자살특공기지였고, 이곳의 동굴진지는 폭약을 실은 특공소형선을 감쳐놓기 위한 비밀기지였다.

일제는 해안가의 동굴진지 구축을 위해 다른 지방, 특히 전남지방 광산노동자들을 강제로 동원하였다. 일출봉에는 1945년 1월 전남 광양 광산의 광부들을 3차례에 걸쳐 8백명 이상을 동원했다고 한다. 동굴진지 공사는 구멍을 뚫고 다이너마이트를 집어넣어 폭파시킨 뒤 곡괭이로 다듬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는데 6개월만에 끝마쳤다고 한다.

 

 

                  ▲ 내부가 개방된 일제동굴진지 입구(사진 上)

                     일제동굴진지 내부 전경(사진 下)

 

그리고 도로를 뽑고 굴착과정에서 나온 동멩이 등을 손수레에 실어 나르는 작업에는 성산 주민들이 동원되어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일출봉 해안에서 확인된 동굴진지는 콘크리트 벙커형으로 구축된 2곳, 입구가 세 군데인 갱도 1곳, 직선형으로 뚫린 갱도 15곳 등 모두 18곳이다.

총 길이가 514m로 제주도 내 특공기지 가운데 가장 긴 규모이다. 특히 입구가 세 군데인 갱도의 길이는 125m에 이른다고 한다.

동굴진지는 일제의 침략상을 보여주는 아픔의 역사현장이다. 이곳 '제주일출 봉해안 일제동굴진지'는 2006년 12월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311호로 지정되었다.

 

11:36~11:46=>일제동굴진지 유적지

     입구에 '아픈 역사 현장 일제돌굴진지' 지질트레일 해설판이 설치된 수마포구로 내려가 방파제 아래 해변을 따라 일제동굴진지를 탐방해 보고, 방파제길로 되돌아 와 성산일출봉 주차장으로 향한다.

 

 

                  ▲ 성산일출봉 주차장의 표지석과 입구인 매표소 (사진 上)

                     성산일출봉 주차장 끝 오정개로 넘어가는 길 입구(사진 下)

 

11:50~11:54=>성산일출봉 입구/주차장

       성산일출봉 매표소 입구 좌측 주차장 끝에서 성산일출봉을 우측에 멀리 두고 야생화 꽃길을 잠시 오르내리면 성산리어촌계 '잠녀' 해녀공연장이 있는 오정개에 이르게 된다.

 

 

 

                  ▲ 성산일출봉 주차장에서 오정개로 넘어가는 야생화길 (사진 上)

                     성산리어촌계 해녀공연장이 있는 오정개로 내려가는 계단길(사진 中)

                     오정개로 넘어가 뒤돌아본 성산일출봉 전경(사진 下)

    

♧ 천연방파제를 앞세운 포구. 오정개

성산일출봉 바로 동쪽과 동북쪽 일대의 개를 일찍이 '위양개'라 부르고 한자표기로 '위양포(渭陽浦)'로 표기했다.

이곳은 지금 '오정개'와 '우뭇개'라 하는 곳이다. 이 일대는 19세기 말까지 옛 지도에 위양포로 표기했다가 일제강점기 초반부터 성산 바로 남쪽에 있는 개를 성산포라 했다.

 

 

                  ▲ 오정개 (사진 上)

                     공연 준비중인 해녀들(사진 下)

 

이 성산포는 지금 '수메밋(수멧개, 수마포)'일대를 이른다. 그런데 지금은 성산리와 오조리 사이의 개를 막아서 부두를 만들고 항구를 만들어 성산항이라 하는데, 이곳이 성산포가 되어 버렸다. 일제강점기까지는 이 성산항 어귀와 그 안쪽을 '오졸개'라 하여 오조포라 했다.

성산일출봉 북쪽에 연해서 우뭇개가 있고 그 다음 포구를 '오정개'라 한다. '거꿈베기'와 '구젱이며들코지' 사이 후미진 곳에 있는 포구이다. 안쪽을 '안오정개'라 하고, 바깥쪽을 '베낏오정개'는 '작은오정개'라고도 한다.

오정개는 성산리 중심지에서 정오 방향에 있는 개라는데서 붙인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어떤 이는 '오정'은 '옷·읒(바다가마우지)'과 관련된 말로 보기도 한다. '가마우지'는 '가마오디>가마오지'의 과정을 거쳐서 변한 말인데, 이 '오디>오지'와 관련된 것이 제주어 '옺>옷'으로 보는 것이다.

우뭇개 북쪽 바닷가와 오정개 사이에 '곰달렝이'와 '옷더', '거끔베기' 등이 있다. 곰달랭이는 곰(고래)이 들어와서 노는 달랭이(자그만한 밭)라는데서 붙인 것이라 하기도 하고, 감(경계)이 되는 돌렝이라는 데서 붙인 것이라고도 한다.

오정개 오른쪽에는 동쪽 바다로 뻗어나간 덕(바위언덕)이 있는데, 이를 '옷덕'이라 한다. 오리새끼들이 많이 날아와 앉아서 노는 '덕'이라는데서 붙여진 이름인데 '큰옷덕'과 '작은옷덕'이 있다.

오정개는 옷덕이라는 큰 바위를 거느리고 있기 때문에 포구로서 더욱 안성맞춤이다. 이 '옷덕'이 자리하고 있어 옛 문헌에는 이곳을 '암포(巖浦)'라고 적고 있기도 하다. 오정개는 수심이 얕고 바닥도 '빌레'로 이루어져 있지만, 옷덕이라는 천연방파제가 있기에 포구 기능을 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오정개 언덕에서는 해녀들이 잡아 올린 소라, 해삼 등 해산물을 맛볼 수 있다. 성산일출봉의 장관과 아담한 오정개가 어우러지는 풍경 속에서 싱싱한 해산물을 해녀들의 입담과 함께 즐겨보는 것도 이곳의 매력 가운데 하나이다.

 

오정개가 품고 있는 동물골격화석

성산일출봉은 바다 속에서 터져 솟아오른 화산체이다.

'하늘이 내린 최고의 걸작품'이라는 일출봉은 왕관처럼 분화구를 애워싸고 있는 99봉의 기묘한 모양새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풍수상으로 제주의 미래에 밝은 기운을 안겨주는 상징의 하나이다.

일출봉은 제주도 동부 해안선의 성산반도를 구성하고 있는 화산체로서 분화구의 원형이 잘 보전되어 있다. 그런 만큼 그 주변 지대도 그만큼이나 독특한 지형과 지질을 지니고 있는게 분명하다. 7~5쳔년 전에 생겨났으니 당시 원지형이나 생물상을 품고 있는지를 알 수 없다. 일출봉의 형성 당시 수백미터 높이의 분수처럼 솟구친 화산재와 화산력드이 화구 주변에 한 겹씩 쌓이며 다른 화산에서는 보기 어려운 뚜렷한 층리를 만들었고, 시간을 두고 그 주변에 독특한 지질을 만들어 갔기 떄문이다.

일출봉의 북동쪽 기슭에는 두 개의 자연포구가 형성되어 있다.

'우뭇개'와 '오정개'라고 하며, 그 지질상을 살피다가 동물골격 화석을 발견한 곳이기도 하다.

우뭇개는 일출봉 응회암의 부스리기로 이루어진 검은 모래사장이며, 오정개는 붉은 송이층이 드러나 있다. 오정개 앞 해안에는 분화구 주변에서 형성되는 타원형의 공급암맥이 바다 속에 만들어져 있다. 오정개 주변에 분포되어 있는 송이층과 용암류를 유출시킨 분화구와 관련된 것이라고 한다. 당시의 화산분화구는 일출봉 북쪽 기슭으로 지금 야외음악당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오정개 해안 북쪽으로는 요암으로 형성된 해안단애가 발달되어 있다. 이 용암류 단위 사이에는 20cm 두께의 스코리아 퇴적층이 끼워져 있고, 이 송이층에서 새 골격과 사슴 이빨 화석이 나왔다. 단성화산으로부터 용암이 유출되면서 당시 이곳에 살고 있던 새와 사슴을 품어 버렸던 것이다.

이 동물골격화석의 발견은 제주도에서 이곳이 유일하다. 앞으로 용암에 대한 연대가 세세히 밝켜진다면 화산활동과 수반되어 최소 수천~수만 년 전 당시의 동물상과 환경을 규명할 수 있는 자료가 될 수도 있다.

 

11:58~12:11=>오정개

     12시에 바닷가에서 펼쳐지는 해녀 공연을 잠시 관람하고 해안길을 따라 가면 '시인 이생진 시비거리' 지질트레일 해설판, 제주올레 표시와 '간세' 안내석이 있는 소공원으로 조성된 시비거리가 나타난다.

그러나 이 길은 행사 당일만 개방되는 정식코스이며, 2015년 9월까지는 오정개를 지나 임시코스인 '한도로'를 따라 성산항입구 사거리로 진행하여야 한다. 행사를 위해 정식코스를 일시 개방한 후 다시 트레일길을 재정비할 모양이다.

시비공원에서 100여m 떨어진 곳에는 '성산마을 제단'이 자리하고 있다.

 

 

                  ▲ 시인 이생진 시비거리

 

12:16~12:19=>시인 이생진 시비거리

     우도가 정면으로 조망되는 트레일길을 따르면 '우도' 지질트레일 해설판(12:26).

 

                  ▲ '우도' 지질트레일 해설판 앞에서 바라본 우도 전경

 

 

                  ▲ 우도가 조망되는 지질트레일 길따라서...

 

편안하게 내려가는 트레일길을 따르면 성산항 입구(12:30).

 

 

                  ▲ 성산항

 

좌측 시맨트길을 따르면 '우도·성산항' 지질트레일 해설판(12:32)을 지나 성산항 진입도로 4차선 포장도로와 만나게 되는 ┳자 삼거리(12:33)이다.

좌측으로 꺾어 4차선 포장도로 인도를 따라 한도교 갑문이 있는 성산항 입구 사거리로 향한다.

 

                  ▲ 성산항입구 사거리

 

12:36=>성산항입구 사거리

     사거리에서 우측 횡단보도를 건너 한도교 갑문이 설치된 방파제길을 따라 바다를 건너 '성산·오조 지질트레일' 길 열림 행사장이었던 오조해녀의집 입구로 원점회귀를 하며, 탐방을 마무리한다.

 

                  ▲ 한도교 갑문

                  ▲ 한도교 갑문 밖 우측 바닷가 항구 전경

 

12:42=>오조해녀의집/'성산·오조 지질트레일' 길열림 행사장

     약 2시간 30여분의 탐방이었지만, 사진촬영과 주변 풍경 감상 등의 시간을 절약한다면 약 1시간30분~2시간이면 탐방이 가능한 코스이며, 정상까지 올랐다 되돌아 내려오는 성산일출봉 트레킹 1.2km를 포함한다면 약 2시간30분~3시간 정도가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는 코스이다.

성산일출봉만 관광 목적으로 탐방하지 말고 지질트레일 코스와 함께 한다면 더 뜻 깊은 관광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트레킹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