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남 화순 운주사(和順 雲住寺) ▶
천불천탑의 불가사의한 신비의 사찰!!!
「 전남 화순(全南 和順) 소개 」
화순군(和順郡)은 대한민국 전라남도 중앙부에 있는 군이다. 동쪽은 순천시·곡성군, 서쪽은 나주시, 남쪽은 보성군·장흥군, 북쪽은 광주광역시·담양군·곡성군과 접한다. 도곡면, 춘양면 일대의 화순 고인돌 유적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군청 소재지는 화순읍이고, 행정구역은 1읍 12면이다.
면적은 787㎢ (전남의 6.6%)로 전라남도내 3번째(해남, 순천)로 넓고, 임야는 도내 2번째(순천) 규모이다.
동단 화순군 북면 송단리 127′12′12″ 35′10′58″ ,서단 화순군 도암면 행산리 126′49′34″ 34′52′04″로 동서간 길이는 32㎞이며, 남단 화순군 청풍면 이만리 126′56′48″ 34′49′18″, 북단 화순군 북면 방리 127′11′10″ 35′12′40″로 남북간 길이는 43㎞이다.
▲ 불사바위에서 내려다본 운주사 일대 전경
마한시대에는 능주, 화순방면에는 평지를 바탕으로 한 여래비리국(如來卑里國), 동복방면에는 벽비리국(辟卑里國)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백제시대에 화순, 능주, 동복의 세개 현(縣)이 독자적인 행정편제를 유지하였는데 넓은 평야를 끼고 있는 이릉부리군(爾陵夫里郡:능주방면), 냇가변에 자리잡은 잉리아현(仍利阿縣:화순방면), 항아리 같은 바위가 있는 두부지현(豆夫只縣:동복방면)으로 나뉘어 있었다.
통일신라시대(757년) 경덕왕이 전국의 지명을 한자화 및 두자로 줄이는 작업을 하면서 이릉부리군(爾陵夫里郡)은 능성군(陵城郡)으로, 잉리아현은 여미현(汝湄縣)으로, 두부지현은 동복현으로 변경되면서 곡성군으로 속하게 되었다. 고려시대인 940년에 이르러 능성현은 한자를 바꾸어 능성현(綾城縣)으로 하고, 여미현은 오늘날의 지명인 화순현(和順縣)으로 개칭하였으며 1018년에는 동복현(同福縣)을 곡성에서 보성군 소속으로 변경하였다. 1143년에 처음으로 중앙에서 능성현에 감무(監務:현재의 군수)라는 행정관이 파견되었으며 이어 충열왕 때인 1280년경 동복오씨 조영(祖英) 혹은 조염(祖琰)국사의 고향이라 하여 동복에도 처음으로 감무가 파견되고 고려말 1390년에 화순에도 감무가 파견되면서 남평현을 겸임하였으니 이때에 이르러 중앙행정이 직접적으로 이곳까지 미치게 되었다.감무관이 파견되기 이전에 이곳은 모두 자치고을로서 토호들에 의한 간접지배를 받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동복현이 있었던 자치고을로는 보령현(保寧縣:현 이서면지역), 대곡현(大谷縣:현 남면지역), 수촌현(水村縣:현 북면 수리부근), 압곡현(鴨谷縣:현 북면 옥리부근) 등으로 나뉘어 있었다.
조선시대에 들어 불과 몇 년 만에 세 현이 폐치분합을 거듭하게 되는데 처음 1396년에는 화순현을 없애고 능성현과 동복감무(화순현 겸임)만을 두었다가 1405년에 능성현, 화순감무(동복겸임), 1407년에 능성현, 복순현(福順縣.동복과 화순 합함), 1413년에 능성현, 화순현(동복겸임), 1416년에는 순성현(順城縣.화순과 능성 합함), 동복현으로 하였다가 다시 1418년에 이르러 세 지역의 통합이 불가하여 능성현, 화순현, 동복현으로 두었다. 1597년 정유재란의 피해가 너무 심하여 화순현의 백성들은 스스로 폐현을 자청 능성현에 합하였고 1611년에 이르러서야 화순현이 복현되기도 하였다. 이 복현을 기념하여 당시 객관앞에 심은 것이 바로 화순군청에 서 있는 은행나무이다. 1632년 인조반정이 있은지 10년후 인조의 모친인 인헌왕후의 관향이라 하여 능성현은 일약 능주목으로 한 등급 올라서게 되었다. 이로서 화순지역에는 능주목, 화순현, 동복현의 세 고을로 이어져 왔는데 1655년 동복현의 객사와 전패가 화재로 불에 타자 잠시 화순현에 합하였다가 다시 1664년 세 현으로 있었고 이 체제는 대한민국시대까지 유지되었다. 1895년 5월 1일 행정구역개편으로 능주군, 화순군, 동복군이 되었으며 대한제국 시대인 1908년 10월 15일에는 화순군을 폐지하여 능주군에 흡수시킴으로써 능주군, 동복군으로 있었다.
일제 강점기인 1913년 능주군을 화순군으로 개칭하고 동복군과 병존하다가 1914년 3월 1일 동복군 마저 폐지하고 화순군에 편입시킴으로써 오늘날의 골격을 갖추게 되었다.
현재 1읍 12면 1출장소 342행정리로 운영하고 있다.
▲ 불사바위에서 내려다본 운주사 전경
능주면 일대에는 역사적 유적지가 비교적 많은데, 특히 조선 중종 때 개혁 정치를 폈던 조광조가 귀양 와서 죽음을 당한 터와 적려유허추모비가 있다. 동복면에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맑은 물로 유명한 화순적벽이 있다. 그 밖에 남면 벽송리에 고인돌군, 북면 백아산에 천연 동굴이 있다. 천태산에는 비자나무 숲과 수령이 500년이 넘는 나무들이 있다. 관광자원으로는 도암면에 있는 운주사를 비롯해 만연사·쌍봉사·유마사·개천사가 있다.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알려진 운주사에는 석불과 석탑이 많다. 그 밖에 오성산성·예산산성·철옹산성·물염정·화순적벽이 관광지로 알려져 있다. 1995년에는 화순온천과 도곡온천이 개장되었다.
『 탐방한 화순군의 문화재들 』
1 국보 제57호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和順 雙峯寺 澈鑒禪師塔)
2 보물 제170호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비(和順 雙峯寺 澈鑒禪師塔碑)
3 보물 제1726호 화순 쌍봉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和順 雙峰寺 木造地藏菩薩三尊像 및 十王像一括)
4 전라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251호 화순쌍봉사대웅전목조삼존불상(和順雙峰寺大雄殿木造三尊佛像)
5 전라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252호 화순쌍봉사극락전목조아미타여래좌상(和順雙峰寺極樂殿木造阿彌陀如來坐像)
6 전라남도 시도기념물 제247호 화순 쌍봉사(和順 雙峯寺)
7 사적 제312호 화순 운주사지(和順 雲住寺址)
8 보물 제796호 화순 운주사 구층석탑(和順 雲住寺 九層石塔)
9 보물 제797호 화순 운주사 석조불감(和順 雲住寺 石造佛龕)
10 보물 제798호 화순 운주사 원형 다층석탑(和順 雲住寺 圓形 多層石塔)
11 전라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273호 화순운주사와형석조여래불(和順雲住寺臥形石造如來佛)
12 전라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274호 화순운주사광배석불좌상(和順雲住寺光背石佛坐像)
13 전라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275호 화순운주사마애여래좌상(和順雲住寺磨崖如來坐像)
14 전라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276호 화순운주사칠층석탑(和順雲住寺七層石塔)
15 전라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277호 화순운주사쌍교차문칠층석탑(和順雲住寺雙交叉紋七層石塔)
16 전라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278호 화순운주사석조불감앞칠층석탑(和順 雲住寺石造佛龕앞七層石塔)
17 전라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279호 화순운주사거북바위교차문칠층석탑(和順雲住寺거북바위交叉紋七層石塔)
18 전라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280호 화순운주사대웅전앞다층석탑(和順雲住寺大雄殿앞多層石塔)
19 전라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281호 화순운주사칠성바위앞칠층석탑(和順雲住寺七星바위앞七層石塔)
20 전라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282호 화순운주사발형다층석탑(和順雲住寺鉢形多層石塔)
21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56호 화순운주사거북바위오층석탑(和順雲住寺거북바위五層石塔)
22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57호 화순운주사수직문칠층석탑(和順雲住寺垂直紋七層石塔)
23 중요민속문화재 제152호 화순양동호가옥(和順梁東浩家屋)
24 중요민속문화재 제154호 화순양승수가옥(和順梁承壽家屋)
【 일 정 표 】2015년 6월 29일(월)-30일(화) 1박2일
◈ 첫째날(6/29) : 운주사-조광조선생 유배지
◈ 둘째날(6/30) : 쌍봉사-전통민속마을(양동호&양승수가옥)-학포선생부조묘
이번 전남 화순군 방문의 주 목적은 천불천탑의 운주사와 국보 제 57호 철감선사탑이 있는 쌍봉사 탐방이었다. 먼 거리의 이동이라 많은 곳을 둘러 보기에 어려움이 있을 뿐만 아니라, 운주사의 탐방은 단순한 사찰 탐방이 아니라 주변 산중턱에 위치한 석탑과 석불들을 탐방하게 되므로 많은 시간이 소요되어 첫째날은 운주사의 문화재들을 탐방하고, 숙소로 정한 화순읍내로 이동하는 길목에 위치한 조광조선생 유배지를 둘러보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둘째날은 아침부터 비가 내려 우산을 받쳐들고 화순군내 유일의 국보인 철감선사탑이 있는 쌍봉사를 첫번째 목적지로 정하였고, 인근의 양동호와 양승수가옥, 그리고 학포선생부조묘를 방문하는 것으로화순 탐방의 일정을 마무리하였다.
화순에서 탐방하였던 관광명소들 중 운주사와 쌍봉사는 내가 찾은 관광명소 '명찰을 찾아서'에, 조광조선생 유배지, 전통민속마을(양동호&양승수가옥), 그리고 학포선생부조묘는 '호남권'에 아래와 같이 문화유적이 많은 운주사를 제1,2부로 나누는 등 총 5편으로 나누어 소개를 하기로 한다.
- 불가사의한 신비를 간직한 천불천탑의 고찰! 운주사(雲住寺) 제1부
- 불가사의한 신비를 간직한 천불천탑의 고찰! 운주사(雲住寺) 제2부
- 통일신라시대 창건된 천년고찰! 쌍봉사(雙峯寺)
- 전통민속마을! 양동호&양승수가옥(梁東浩&梁承壽家屋)
- 기묘사화에 연루된 선비들의 삶! 조광조선생 유배지와 학포선생부조묘
『 화순 운주사지(和順 雲住寺址) 소개 』
*사적 제312호(1985년04월15일 지정)
*수량/면적497,090㎡
*소재지:전남 화순군 도암면 용강리 산3번지 외
도선국사가 하룻밤 사이에 천불천탑을 세웠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천불산 다탑봉 운주사는 나지막한 야산 분지에 있는 고려시대의 절터이다. 우리 불교의 깊은 혼이 서린 운주사는 우리나라의 여느 사찰에서는 발견 할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의 불사를 한 불가사의한 신비를 간직하고 있다.
절을 처음 지은 연대는 정확히 알지 못하나, 고려 중기에서 말기까지 매우 번창했던 사찰로 보이며, 15세기 후반에 다시 크게 지어졌다가 정유재란으로 폐찰되었다. 운주사(雲住寺)는 ‘구름이 머무는 곳’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배를 움직인다’는 뜻의 운주사(運舟寺)로 불리기도 한다.
▲ 운주사 경내
운주사는 천불천탑으로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다.
1481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의 기록 ‘운주사 재천불산 사지좌우산척 석불석탑 각일천 우유석실 이석불 상배이좌(雲住寺 在天佛山 寺之左右山脊 石佛石塔 各一千 又有石室 二石佛 相背以坐)라는 유일한 기록이 있다. 이는 ‘운주사는 천불산에 있으며 절 좌우 산에 석불 석탑이 각 일천기씩 있고 두 석불이 서로 등을 대고 앉아있다’는 내용으로 보아 정말 그때까지만 하여도 석불 석탑이 일천기씩이 실존했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또한 조선조 인조 10년(1632)에 발간된 능주읍지에는 ‘운주사 재현남이십오리천불산좌우산협석불석탑 일천우유 석실이석불상배이좌(雲住寺 在縣南二十五里千佛山左右山峽石佛石塔 一千又有 石室二石佛相背而座)’ 운주사는 현의 남쪽 이십오리에 있으며 천불산 좌우 산 협곡에 석불 석탑이 일 천씩 있고 석실에 두 석불이 서로 등을 맞대고 앉아있다는 기록이 있는 걸로 봐서 일천씩의 석불 석탑이 있었던 게 분명하고 그 말미에 금폐(今廢) 라는 추기가 있어 정유재란으로 인해 소실 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 후 조사한 기록을 보면 석탑이 22기, 석불이 213기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석탑 17기, 석불 80여기만 남아있어 역사 속에서 끝없이 유실되어온 뼈아픈 세월을 살아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984년부터 1991년까지 전남대학교 박물관에서 네차례의 발굴조사와 두차례의 학술조사를 하였으나 창건시대와 창건세력, 조성 배경에 대한 구체적인 확증을 밝혀내지 못하여 운주사 천불천탑은 여전히 불가사의한 유적으로 남아있다.
산과 들에 흩어져 있는 운주사 70여 구의 불상들은, 수 십 ㎝에서 10m 이상의 거대한 돌부처까지 그 크기가 매우 다양하다. 평면적이면서 토속적인 생김새에 어색하고 균형이 잡히지 않은 신체 구조는 고려시대 지방적인 특색을 잘 보여주고 있다. 불상들은 천불산 각 골짜기 바위너설 야지에 비로자나부처님(부처님의 빛, 광명)을 주불로 하여 여러기가 집단적으로 배치되어있다. 크기도 각각 다르고 얼굴 모양도 각양각색이다. 홀쭉한 얼굴형에 선만으로 단순하게 처리된 눈과 입, 기다란 코, 단순한 법의 자락이 인상적이다. 민간에서는 할아버지부처, 할머니부처, 남편부처, 아내부처, 아들부처, 딸부처, 아기부처라고 불러오기도 했는데, 마치 우리 이웃들의 얼굴을 표현한 듯 소박하고 친근하다. 이러한 불상배치와 불상제작 기법은 다른 곳에서는 그 유형을 찾아볼수 없는 운주사 불상만이 갖는 특별한 가치로 평가받는다.
또한 운주사 석탑들은 그 모양이나 무늬의 표현방식이 매우 독특하여, 3층·5층·7층 등 층수도 다양하다. 둥근 공모양의 원형탑이나 호떡 모양의 돌을 올려놓은 듯한 원판형탑 등 특이한 모양의 탑도 있다. 또한 탑의 표면에 ‘X’, ‘◇’, ‘川’과 같은 기하학 무늬들이 새겨 있어 특이하다. 모두 다른 모양으로 각각 다양한 개성을 나타내고 있다. 연꽃무늬가 밑에 새겨진 넙쩍하고 둥근 옥개석(지붕돌)의 석탑과 동그란 발우형 석탑, 부여정림사지 5층 석탑을 닮은 백제계 석탑, 감포 감은사지 석탑을 닮은 신라계 석탑, 분황사지 전탑(벽돌탑) 양식을 닮은 모전계열 신라식 석탑이 탑신석의 특이한 마름모꼴 교차문양과 함께 두루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운주사 탑들의 재료로 쓰인 돌은 석질이 잘 바스라져서 오히려 화강암질의 강한 대리석보다 더 고도의 기술을 습득한 불모(석공)님이 아니면 제작이 불가능하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 석질로 빚어만든 탑이 이렇게 수많은 세월의 풍상을 버티어 전해져 오는 것을 보면 이곳의 조형자들의 기술이 가히 최고 수준이었다는데는 반론의 여지가 없을 듯 싶다.
운주사 서쪽 산능선에는 거대한 두 분의 와불(미완성석불)이 있어 유명하다. 도선이 천불천탑을 하룻밤에 세울 때 맨 마지막으로 와불을 일으켜 세우려고 했는데, 공사에 싫증난 동자승이 닭이 울었다고 거짓말을 하여 불상을 세우지 못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조상 대대로 사람들은 “이 천번째 와불님이 일어나시는 날 새로운 세상이 온다”는 말을 전해왔다. 아마도 운주사 천불천탑은 우주법계에 계시는 부처님이 강림하시어 하화중생의 대 설법을 통한 불국정토의 이상세계가 열리기를 간절히 염원하는 마음으로 조성한 대불사가 아닐까한다.
운주사는 특이한 돌부처와 석탑이 모두 한 절 안에 있다는 점에서 천불천탑에 대한 독특한 신앙을 보여주는 좋은 예로서 우리나라 미술사와 불교사 연구에 중요한 곳이다.
운주사에는 보물로 지정된 3점의 국가지정문화재와 12점의 지방문화재를 포함하여 석탑 17기와 석불 80여기가 남아 있다.
현존하는 유물들을 한 편의 탐방기에 소개하기에는 너무나 방대한 자료라
일주문에서 경내 대웅전까지 평지에 조성된 문화재들을 제1부에,
대웅전 뒷편 북동편 산중턱과 와불이 자리한 서편 산자락을 따라 조성된 '천불천탑 운주사 탐방로'에 자리한 문화재들을 제2부에 소개를 하기로 한다.
또한 소개되는 문화재들은 일주문을 출발하여 탐방한 순서에 따라 서술을 하기로 한다.
◈ 불가사의한 신비를 간직한 천불천탑의 고찰! 운주사(雲住寺) 제2부 ◈
운주사 제1편에서는 일주문을 지나 운주사 경내로 들어가는 길목에 자리한 석탑과 석불들, 그리고 운주사 경내의 전각 및 석탑들을 소개하기로 한다.
3점의 보물인 국가지정문화재와 5점의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그리고 1점의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등 총 9점의 지정문화재와 석불과 석탑 등 미지정 문화재들이 다양하게 분포해 있다.
이곳에서는 탐방 순서대로 소개를 하기로 한다.
【 운주사 문화재 탐방순서 】
운주사 대웅전 옆 이정표-(운주사 북동쪽 산중턱)-삼신각-명당탑&사층석탑-마애여래좌상-불사바위-석불군"마"-미륵전-발형다층석탑(원형구형탑)-운주사 경내-범종각 앞 '천불천탑 운주사 탐방로입구-(운주사 서쪽 산자락)-거북바위 오층석탑 및 칠층석탑-석불군 "바"-시위불-와형석조여래불(와불)-칠성바위앞 칠층석탑-운주사 구층석탑-일주문-운주사 주차장
▲ 운주사 대웅전 옆 이정표(사진 上)
이정표 우측의 대웅전 북동쪽 산중턱에 위치한 석탑과 석불 등 문화재 탐방로 입구(사진 下)
운주사 대웅전 우측 이정표(↓와형석조여래불, 칠성바위/→불사바위, 마애여래좌상, 명당탑, 발형다층석탑, 석불군 "마") 옆으로 산신각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이 길을 따라 잠시 오르면 좌측으로 산신각이 정면으로는 미륵전이 자리를 하고 있다.
▲ 산신각(사진 左)과 미륵전(사진 右)
산신각 우측으로 보이는 산길을 따라 명당탑으로 오르며 운주사 북동쪽 산중턱으로 이어지는 문화재 탐방이 시작된다.
▲ 명당탑가는 탐방로 입구에 설치된 이정표
이곳에서부터 운주사 북동쪽 산자락에 자리한 문화재 탐방이 시작되며, 산신각과 미륵전 사이의 좌측 산길로 들어 명당탑, 마애여래좌상, 불사바위, 석불군 "마" 그리고 발형다층석탑을 차례로 지나 대웅전으로 되돌아 오게 된다.
명당탑으로 오르는 탐방로 입구에 이정표(←불사바위, 명당탑/→발형다층석탑)가 설치되어 있다.
♧ ♧ 명당탑과 4층석탑
▲ 명당탑과 4층석탑
운주사의 주산인 거북이산(영귀산) 머리 정수리에 위치한 탑으로써 넓적한 하대석에 사각형의 기단면석 위에 놓인 둥근 원반형 석탑이다. 운주사의 석질은 이렇게 시루떡처럼 잘 갈라지는 특성이 있어서 특이한 형식의 석탑 제작이 가능했을 것이다. 넓고 둥근 돌을 둥근 탑신을 세운 그 위에 층층이 올려 놓았다. 그러나 옥개석 밑면을 보면 연화무늬가 둥그렇게 새겨져 있다. 지금 남은 탑은 자세히 보면 그 석질이 서로 다른면을 발견할수 있다.
이곳이 천년을 지배할 황제가 태어날 천년 군황지혈이라 하여 명당을 찾는 무리들에 의하여 그 훼손의 정도가 남다르다. 앞의 4층 석탑도 훼손의 정도가 극심하다.
▲ 명당탑(사진 左)와 명당탑 앞 4층석탑(사진 右)
▲ 명당탑 아래 위치한 운주사
운주사가 내려다 보이는 명당탑을 뒤로 하고 잠시 오르면 거대한 암벽에 새겨진 마애여래좌상을 만나게 된다.
♧ ♧ 운주사 마애여래좌상(雲住寺 磨崖如來坐像)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 275호
대웅전에서 북쪽으로 약 40m 떨어져 있는 거대한 바위의 벼랑에 새겨져 있다.
거대한 바위벼랑 암벽의 요철부분을 그대로 살려 부조로 새긴 불상이다. 육계는 두툼하게 솟아있으나 머리와 이마가 거의 없고 희미한 눈썹과 귀는 양각되었으며 귓바퀴까지 음각되었다. 타원형으로 부드럽게 부조된 상호는 눈과 입이 희미하다.
왼쪽 어깨에서 내려오는 음각선의 옷주름과 오른 소매에 사선의 옷 주름이 형수인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운주사 석불의 대부분 수인과 같다. 좌대는 8개의 연꽃무늬가 복련으로 음각되었다. 광배는 수광과 신광의 구분없이 무릎 위쪽까지 음각선문으로 표현하였다. 오랜 풍상에 마모되어 최근에도 바위가 균열되어 떨어지는 등 파손의 정도가 극심하다. 자세히 관찰해보면 마애여래좌상 위에 바위구멍이 뚫어진 걸로 보아 보호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불상을 조형한 이는 이름도 없이 이미 죽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겠으나 그가 추구한 이상은 오늘도 희미하게 남아 우리를 반긴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운주사 석불군 가운데 유일한 마애불이며, 광배와 좌대를 포함한 전체 높이가 5.16m로 규모가 커서 가치가 있다.
▲ 마애여래좌상에서 불사바위로 오르는 길
마애여래좌상을 뒤로 하고 잘 정비된 나무계단과 나무데크길을 따르면 전망바위 처럼 보이는 불사바위에 오르게 되는데, 불사바위 위에 오르면 발 아래로 남쪽 협곡 평지에 조성된 운주사가 펼쳐진다.
▲ 불사바위 위에서 내려다본 운주사 일대
그리고 협곡 좌,우측 산중턱과 협곡 분지에 조성된 석탑들이 조망이 된다.
♧ ♧ 불사바위(공사바위)
영귀산 8부능선 산마루에 놓인 거대한 둥근 바위이다. 위에 오르면 운주사 탑과 불상들 그리고 먼 산들이 한눈에 발아래 굽어 보인다. 바위 이곳 저곳을 움푹 파 인공으로 조성한 자리가 여럿 보인다. 그중 가장 아래 큰 자리가 도선국사가 앉아서 운주사 천불 천탑의 대공사를 관리감독했다 하여 공사바위라 지금도 그렇게 부른다. 작은 자리들은 직급에 따라 제자들이 앉았던 자리라 한다.
이 공사바위는 뜨는 해와 지는 해를 모두 관찰할수 있으며 비가 오면 바위 아래 움푹 패인 의지처가 있어 그곳에 들면 안전하게 지낼수 있다. 수많은 수행스님이나 도인들이 그 자리에 앉아 수행을 했었던 듯 반들반들 닳아져 있다.
이곳에 이 바위 한덩어리가 솟아올라 있는 것도 신비로운데 또 그것을 국가와 민족의 운명과 고난받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사용한 선인들의 혜안과 지혜에 감탄하지 않을수 없다.
불사바위에서 내리막의 산길을 따라 석불군 "마"와 발형다층석탑으로 향한다.
▲ 불사바위에서 석불군 "마"로 이어지는 산길
◈ 석불군 "마" (E)
근엄하게 앉아있는 불상이 아버지처럼 엄숙해 보이고 그 옆에 얼굴이 반쯤 떼어진 작은 불상이 응석받이 아들 부처 같다. 예전에는 기단위의 단위에 모셔져 있었는데 훼손의 정도가 심하여 단도 사라지고 바닥의 판석위에 모셔져 있다. 그리고 아들불상도 제 짝이 아닌 기단석 위에 놓여져 있다. 원래는 아버지 부처 뒤에 앉아 있었는데 그 배치가 어찌되었는지 흐트러진 상태다. 아버지불상 뒤에 움푹 패여 닳아진 부분이 아들 불상이 앉았던 자리인데 잔바람에도 자꾸 들썩거려 신비롭게 파였다한다. 오른쪽의 부부부처도 원래는 어깨를 마주대고 있었는데 떼어 놓았다한다. 득남설화와 관련하여 부부 불상의 코의 파손이 매우 극심하다.
▲ 석불군 "마" 앞에 산책나온 산토끼 한 마리(사진 上)
발형다층석탑(사진 下)
대웅전에서 경내를 가로 질러 범종각 옆을 빠져 나가면 '천불천탑 운주사 탐방로' 안내도가 있는 운주사 서쪽 산자락의 문화재들 탐방로 입구가 있다.
계단길을 오르면 거북바위 오층석탑을 시작으로 서쪽 산자락의 탐방이 시작되는데, 거북바위 칠층석탑, 석불군 "바", 시위불, 와불, 칠성바위 앞 칠층석탑 등을 차례로 거쳐 운주사 입구의 구층석탑으로 내려서게 되며 운주사 탐방은 끝이 나게 된다.
▲ 운주사 서쪽 산자락 탐방로 입구의 안내도(사진 上)
서쪽 산자락 탐방로 입구(사진 下)
▲ 거북바위로 오르는 계단길
♧ ♧ 운주사 거북바위 오층석탑(雲住寺 거북바위 五層石塔)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56호
거북바위라 불리는 거대한 암반위에 1매의 방형 판석을 지대석으로 삼고 탑신부를 세웠다.
초층 탑신은 4매 판석을 짜 맞추었는데 각 면의 귀퉁이에 우주가 정연하게 각출되었다. 옥개석의 중급받침은 뚜렷하며 삼면에 탑신괴임이 생략되었다.
상륜부는 복발형의 부재가 안치되고, 그 위에 보주가 연결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치석의 기법이다. 각 부재의 비례가 안정된 탑으로 제작시기는 고려시대로 보인다.
전체 높이는 5.57m이다.
▲ 거북바위 위에 세워진 오층석탑과 칠층석탑
♧ ♧ 운주사 거북바위 교차문 칠층석탑(雲住寺 거북바위 交叉紋 七層石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79호
거북바위라 불리는 다소 경사진 암반을 완만하게 다듬어 기단부없이 지대석으로 삼고 그 위에 탑신부를 세웟다.
1층 탑신은 4매의 판석으로 이루어졌는데 각 면의 모서리에 우주가 모각되고 면석 중앙으로 보조 우주가 하나씩 얕게 표출되었다. 2층에서 7층까지 탑신 4매에 X자문이 새겨져 있고 옥개석 상면의 우동마루가 두툼하게 튀어 나오는 등 한국 석탑에서는 매우 희귀한 사례에 속한 탑이다.
이러한 기법은 모두 건축적인 요소에서 비롯된 것임을 암시한 것이며, 고려시대에 나타난 백제계 석탑의 특징으로 전체 높이는 7.17m이다.
▲ 오층&칠층석탑과 석불군 "바"가 있는 거북바위 일대(사진 上)
7층석탑을 지나 뒤돌아본 거북바위(사진 下)
거북바위 위에 위치한 칠층석탑을 지나 계단길을 내려가면 좌측 거북 머리 형상 아래 바위굴에 석불군 "바"가 자리를 하고 있다.
◈ 석불군 "바" (F)
운주사 불상 제작에 사용한 석질로 도달할수 있는 가장 최고의 작품이라 할만하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불상의 둥근 얼굴 선과 눈과 코가 매우 총명한 인상을 준다. 법의 자락도 수려한 곡선으로 한껏 예술적인 멋을 자랑하고 있다. 그렇다고 불상의 얼굴이 위압감을 주거나 권위적이지는 않는다. 법의 자락도 화려하지 않고 수수하고 소박한 수준이다. 이렇듯 운주사의 불상들은 친근미를 근본으로 제작된 듯 싶다. 위의 바위너설도 낙수를 피하려는 듯 의도된 제작 기법이 엿보인다. 거기에서 채석된 돌은 불상의 재료로 바로 사용하였다. 얼굴 모습이 이웃들을 닮아 친근하다. 민간에서는 이 불상들을 보고 할아버지, 할머니, 큰 아들 내외, 손자손녀들이 평화로운 한때를 보내고 있는 대가족군상들의 모습이라고 하기도 한다.
석불군 앞 와불과 칠성바위 데크 갈림길에서 우측의 나무데크 계단길을 따라 와불로 올라 갔다가 되돌아 내려와 칠성바위로 향하면 된다.
롸불로 오르는 길목 우측 바위에 납작한 형상의 석불 입상이 1기 서 있는데 와불을 보좌하는 시위불이다.
▲ 와불과 칠성바위갈림길(사진 左)
갈림길의 이정표(사진 右)
◈ 시위불
와불아래 시위불로 불리는 석불 입상이 있는데 운주사 일대의 석불 중 가장 전형적이며 특히 운주사와 관련된 설화의 중심부분이기도 하다.
와불을 중심으로 주불이 비로자나 부처님이고 좌협시불이 석가모니불, 우협시불이 노사나불이다
▲ 와형석조여래불(와불)전망대
♧ ♧ 운주사 와형석조여래불(雲住寺 臥形石造如來佛, 와불)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73호
세계에서 하나뿐인 유일한 형태의 와불이다. 이는 열반상(부처님이 옆으로 비스듬이 누운 상)과는 다르게 좌불(앉은 모습)과 입상(선 모습)으로 자연석 위에 조각된 채로 누워있다. 이렇게 좌불과 입상의 형태로 누워있는 부처님은 세계에서 하나뿐이라는 것이다. 이 부처님은 좌불 12.7미터, 입상 10.26미터의 대단히 큰 불상이다. 나침반을 갖다대면 거의 정확히 남북으로 향하고 있어 이 천번째 부처님이 일어나면 곤륜산의 정기를 이 민족이 받아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지상 최대의 나라가 된다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운주사의 좌불은 비로자나부처님이고 옆에 입상은 석가모니불이다. 그리고 이 두 분을 지키는듯 아래 서있는 노사나불(머슴부처, 시위불, 상좌불)도 옆에서 떼어내 세운 것이 분명하다. 그러기에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한 삼불 신앙의 형태로서 떼어서 어딘가에 세우려 했던 것인데 과연 어디다 세우려했을까에 대한 의문과 더불어 역사의 기록에서 이런 대단위 불사가 사라진 까닭을 생각해 보면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 와불에서 칠성바위가는 길
◈ 칠성바위
북두칠성은 농사의 풍요, 생명의 관장, 죽은 영혼이 돌아가는 별로 믿었다한다. 원시시대 고인돌 관뚜껑, 고구려 장군총, 무용총 무덤안의 천상도 북쪽에도 북두칠성이 정확히 찍혀져 있다. 민가의 할머니들이 장독대에 정한수를 떠놓고 새벽에 기원을 드릴 때 북쪽 하늘에 뜨는 별이 바로 북두칠성이다. 불교에서도 우리 민간 신앙을 받아들여 삼신각 혹은 칠성각을 짓고 거기에다 모셔놓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의 민속신앙들을 수용해 내어 불교가 우리화 되어온 과정을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직접 북두칠성의 별을 표현하여 제작한 예는 어디에도 없다.
♧ ♧ 운주사 칠성바위앞 칠층석탑(雲住寺 七星바위앞 七層石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81호
운주사 서쪽 산록의 칠성바위라 불리는 곳의 큰 암반 위에 서 있는 탑이다.
지대석이나 기단부 등의 별다른 시설없이 자연 암반위에 탑신부만을 건립하였다. 탑신석 각 면에는 양쪽 귀퉁이에서 넓직한 우주가 두드러지게 모각되어 약간은 둔중한 느낌이 든다.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뚜렷하며 상면에 탑신괴임이 삭제되었다. 대체적으로 각층 옥개석은 추녀와 처마가 직선이고, 네 귀퉁이에 반전이 나타나며 낙수면도 평박한 편이다. 7층 옥개석 정상에는 1석으로 조성된 상륜부가 얹혀져 있다.
전체 높이는 7m이고 제작시기는 고려시대이다.
▲ 칠성바위에서 내려가는 길
▲ 주차장으로 가는 길에 만나게 되는 다양한 형태의 석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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