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은 관광명소/명찰을 찾아서

(경남 합천)우리나라 8경의 하나인 가야산내 암자들! 해인사의 부속암자들

왕마구리 2018. 7. 11. 15:32

◀ 우리나라 8경의 하나인 가야산내 암자들

해인사(海印寺)의 부속암자들 

홍제암, 원당암, 백련암, 희랑대, 국일암, 길상암!

 

경상남도 합천군은 최근 방문한 2008년8월11일~12일 1박2일간의 해인사와 부속 암자(백련암,희랑대,홍제암,길상암) 탐방 이후 정확히 8년만에 다시 찾게 되었다.

이번 탐방은 2박 3일간의 일정으로 다시 찾게 되는 해인사와 가야산 일원의 부속 암자 뿐만 아니라 합천군내 곳곳에 흩어져있는 문화재 탐방을 목적으로 실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해인사내 장경판전 전체를 화재로부터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해 제한관람(기간:2013년1월1일~2016년12월31일까지 4년간)을 실시하여 관람이 불가능하여 아쉬움이 남았다.

'우리나라 8경의 하나인 가야산의 자연경관과 역사의 숨소리가 살아있는 법보사찰! 해인사(海印寺)의 문화재들'에 소개되는 장경판전(국보 제52호)과 장경판전에 보관중인 대장경판(국보 제32호), 고려목판(국보 제206호, 보물 제734호) 등은 2008년 방문 때 촬영한 사진과 문화재청 자료 등을 인용하여 소개하기로 한다.


                   ▲ 해인사 부속암자 배치도

                      ②홍제암 ③원당암 ⑥백련암 ⑧희랑대


『 탐방한 합천군의 문화재들 』

▦ 해인사의 문화재들

사적 제504호 합천 해인사(陜川 海印寺)

명승 제62호 가야산 해인사 일원(伽倻山 海印寺 一圓)

국보 제32호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陜川 海印寺 大藏經板)

국보 제52호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陜川 海印寺 藏經板殿)

국보 제206호 합천 해인사 고려목판(陜川 海印寺 高麗木板)

보물 제264호 합천 해인사 석조여래입상(陜川 海印寺 石造如來立像)

보물 제734호 합천 해인사 고려목판(陜川 海印寺 高麗木板)

보물 제999호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陜川 海印寺 乾漆希朗大師坐像)

보물 제1242호 합천 해인사 길상탑(陜川 海印寺 吉祥塔)

보물 제1273호 해인사 영산회상도(海印寺 靈山會上圖)

보물 제1697호 합천 해인사 감로왕도(陜川 海印寺 甘露王圖)

보물 제1777호 합천 해인사 법보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 및 복장유물(陜川 海印寺 法寶殿 木造毘盧遮那佛坐像 및 腹藏遺物)

보물 제1778호 합천 해인사 법보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 복장전적(陜川 海印寺 法寶殿 木造毘盧遮那佛坐像 腹藏典籍)

보물 제1779호 합천 해인사 대적광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 및 복장유물(陜川 海印寺 大寂光殿 木造毘盧遮那佛坐像 및 腹藏遺物)

보물 제1780호 합천 해인사 대적광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 복장전적(陜川 海印寺 大寂光殿 木造毘盧遮那佛坐像 腹藏典籍)

보물 제1799호 합천 해인사 지장시왕도(陜川 海印寺 地藏十王圖)

보물 제1806호 합천 해인사 내전수함음소 권490 목판(陜川 海印寺 內典隨函音疏 卷四百九十 木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8호 해인사 대적광전 비로자나불삼존상(海印寺 大寂光殿 毘盧舍那佛三尊像)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1호 해인사 법보전 비로자나불좌상(海印寺 法寶殿 毘盧舍那佛坐像)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4호 해인사 삼층석탑<정중탑>(海印寺 三層石塔<庭中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5호 해인사 석등(海印寺 石燈)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6호 해인사 대적광전(海印寺 大寂光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29호 해인사 경학원(海印寺 經學院)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85호 해인사 희랑대 목조 지장보살좌상(海印寺 希郞臺 木造 地藏菩薩坐像)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86호 해인사 삼화상 진영(海印寺 三和尙 眞影)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92호 해인사 용성선사 부도 및 탑비(海印寺 龍城禪師 浮屠 및 塔碑)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54호 해인사 봉황문(海印寺 鳳凰門)

▦ 해인사 부속암자의 문화재들

보물 제518호 합천 해인사 원당암 다층석탑 및 석등(陜川 海印寺 願堂庵 多層石塔 및 石燈)

보물 제1300호 합천 해인사 홍제암(陜川 海印寺 弘濟庵)

보물 제1301호 합천 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탑 및 석장비(陜川 海印寺 弘濟庵 四溟大師塔 및 石藏碑)

▦ 청량사의 문화재들

보물 제253호 합천 청량사 석등(陜川 淸凉寺 石燈)

보물 제265호 합천 청량사 석조여래좌상(陜川 淸凉寺 石造如來坐像)

보물 제266호 합천 청량사 삼층석탑(陜川 淸凉寺 三層石塔)

▦ 영암사지의 문화재들

사적 제131호 합천 영암사지(陜川 靈岩寺址)

보물 제353호 합천 영암사지 쌍사자 석등(陜川 靈岩寺址 雙獅子 石燈)

보물 제480호 합천 영암사지 삼층석탑(陜川 靈岩寺址 三層石塔)

보물 제489호 합천 영암사지 귀부(陜川 靈岩寺址 龜趺)

▦ 합천군의 기타 문화재들

보물 제129호 합천 월광사지 동ㆍ서 삼층석탑(陜川 月光寺址 東ㆍ西 三層石塔)

보물 제381호 합천 백암리 석등(陜川 伯岩里 石燈)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2호 대동사지 석조여래좌상(大同寺址 石造如來坐像)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9호 함벽루(涵碧樓)

 

【 일 정 표 】2016년 08월 11일(목)-08월 13일(토) 2박3일

                             ◈ 첫째날(08/11) : 월광사지 동·서 삼층석탑-청량사

                             ◈ 둘째날(08/12) : 해인사-해인사 부속암자들(홍제암-원당암-백련암-희랑대-국일암-길상암)-함벽루

                             ◈ 세째날(08/13) : 영암사지-백암리 석등&대동사지 석조여래좌상

 

합천에서의 탐방 명소 소개는 내가 찾은 관광명소 '내가 찾은 명찰'에 '청량사의 문화재들', '해인사의 문화재들', '해인사의 부속암자들' 그리고 '합천 영암사지' 등 4편으로, 나머지 '합천 월광사지 동ㆍ서 삼층석탑'과 '합천 백암리 석등' 등은 '영남권'에 2편으로 나누어 총 6편으로 소개를 한다.

 

- 건립 시기가 다른 2기의 삼층석탑월광사지 동ㆍ서 삼층석탑(陜川 月光寺址 東ㆍ西 三層石塔)

- 최치원이 거주했던 사찰청량사(淸凉寺)의 문화재들

- 우리나라 8경의 하나인 가야산의 자연경관과 역사의 숨소리가 살아있는 법보사찰해인사(海印寺)

- 우리나라 8경의 하나인 가야산내 암자들! 해인사의 부속암자들

- 황매산 남쪽 기슭의 절터!  합천 영암사지(陜川 靈岩寺址)

- 통일신라 중기의 우수한 석등! 합천 백암리 석등(陜川 伯岩里 石燈)



                  ▲ 해인사에서 홍제암과 원당암가는 길 입구


해인사는 우리나라 3대 사찰의 하나로 신라 애장왕 3년(802)에 순응,이정 두 스님이 창건하였으며, 화엄경의 해인삼매에서 연유되어 법보종찰로도 유명하다. 고려 태조는 이 절에 머물렀던 희랑이 후백제 견훤을 뿌리치고 도와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이 절을 고려의 국찰로 삼고 전지 500결을 하사했다.
해인사는 법보종찰이요, 화엄십찰의 하나이다. 최치원의 가야산 해인사선안주원벽기에 의하면 해인사는 순응, 이정 스님에 의하여 신라 애장왕 3년(802)에 창건되었는데, 그때 왕의 조대비 성목태후가 대시주였다고 한다.

'해인'이란 화엄경의 '해인삼매'에서 유래된 것으로 해인사는 화엄사상을 천명하고자 이루어진 도장이다. 해인사를 우리나라 삼보사찰의 하나인 법보사찰이라 부르는 것은 해인사 대장경판전에 고려대장경판인 법보가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 홍제암 입구의 홍제교


해인사에는 부속암자로 원당암을 비롯하여 홍제암, 용탑선원, 백련암, 지족암, 희랑대, 삼선암, 금선암, 약수암, 국일암, 보현암, 금강굴, 길상암, 고운암, 간월암, 청량사 등이 있으며, 이번에 탐방한 암자는 청량사, 홍제암, 원당암, 백련암, 희랑대, 국일암, 길상암 등 이다.

그러나 청량사는 "최치원이 거주했던 사찰청량사(淸凉寺)의 문화재들" 이란 제목으로 별도 소개를 하였으므로, 청량사를 제외한 나머지 6개 부속 암자들을 탐방 순서(홍제암-원당암-백련암-희랑대-국일암-길상암)대로 소개를 한다.




                  ▲ 외부에서 바라본 합천 해인사 홍제암


◈ 합천 해인사 홍제암(陜川 海印寺 弘濟庵)

*보물 제1300호(2000.09.28. 지정)

*소재지: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54, 홍제암(치인리)

해인사에 속해 있는 암자로 임진왜란(1592)과 정유재란 때 승병장으로 큰 공을 세운 사명대사가 수도하다 세상을 떠난 곳이다. ‘홍제암’이라는 이름은 사명대사 입적 후 광해군이 내린 ‘자통홍제존자’라는 시호에서 따왔다. 광해군 6년(1614)에 혜구대사가 사명대사의 초상을 모시기 위해 건립하였으며, 1979년 10월에 해체·보수공사를 실시하였다.




                  ▲ 해인사 홍제암


법당과 생활공간의 기능을 겸한 인법당(因法堂) 형식의 건물 1동으로 되어 있으나 일반적인 인법당과는 달리 사명대사와 관련이 있는 여러 기능의 공간들이 한 곳에 모여있는 특이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기본 평면은 工자형으로 가운데 법당을 중심으로 조사전, 영각, 홍각, 조실, 시자실 등이 있으며, 각각의 공간은 툇마루를 통해 모두 연결되고 있다.


                  ▲ 홍제암 처마 및 공포(사진 左)

                     홍제암 전면 퇴칸(사진 右)


경사진 대지를 이용하여 홍각과 지장전은 돌출된 누각형으로 만들고, 법당 및 다른 공간은 단층의 구조로 만드는 재미있는 공간 배치를 보여준다. 또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윗부분에 구성한 공포의 수법도 각 공간의 위계에 따라 달리 표현하였으며, 기둥과 기둥의 간격인 칸의 크기도 각 공간의 기능에 따라 각기 달리 하였다. 밖으로 노출된 기둥은 둥근기둥을 사용하고 안에 있는 기둥은 사각기둥으로 처리한 점도 특이하다.


                  ▲ 해인사 홍제암 내부


합천 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탑 및 석장비(보물 제1301호)와 영정이 모셔져 있는 홍제암은 여러 기능의 공간이 하나의 건물 안에 모여있는 특이한 형태의 암자로, 각 공간의 위계와 기능에 따라 건물구조나 양식의 수법을 여러 형태로 표현하고 있어 역사적 의의 뿐만 아니라 건축적인 가치가 크다.



                  ▲ 사명대사 석장비가 위치한 홍제암 우측에 자리한 부도전(9기의 부도와 탑비 중 정중앙에 보수공사인 사명대사 석장비)


                  ▲ 사명대사 석장비를 제외한 부도전의 각 4기의 부도탑과 탑비들


♧ ♧ 합천 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탑 및 석장비(陜川 海印寺 弘濟庵 四溟大師塔 및 石藏碑)

*보물 제1301호(2000.09.28. 지정)

*소재지: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54, 홍제암(치인리)



                  ▲ 사명대사 석장비


해인사 홍제암에 있는 사명대사의 탑 및 비(碑)이다. 사명대사는 임진왜란(1592)과 정유재란 때 승병장으로서 큰 공을 세운 승려로, 이곳 홍제암은 사명대사가 수도하다가 세상을 떠난 곳이다.

그러나 홍길동전을 쓴 허균(許筠)이 지은 것이라 전해지는 비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사명대사는 1610년 8월 26일 해인사에서 입적하였고, 11월 20일 문도들이 화장하면서 정주 1구를 얻었는데, 석종을 만들어 그 안에 간직하고 탑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정주 1구’란 말은 아마도 ‘사리’를 특별히 높여 기록하고자 ‘맑은 구슬’이란 의미로 쓴 게 아닐까 보이나, 제대로 쓰려면 사리 1과(舍利 一顆)라 써야 맞다 본다.)

그리고 이 비신의 전서체 첫 머리의 ‘자통홍제존자사명송운대사석장비(慈通弘濟尊者四溟松雲大師石藏碑)’에서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란 광해군이 사명대사가 입적하자 후에 대사의 영정을 모신 영자전에 ‘홍제암(弘濟庵)’이란 편액과 함께 내린 시호이므로 한 부분만을 보고 내린 판단이라 엄격히 말하면 홍제암에서 사명대사가 입적했다는 이야기는 틀린 말이고, 사명대사가 입적한 뒤 그의 영정을 모신 해인사 영자전(靈子殿)에 ‘홍제암(弘濟庵)’이란 편액을 내림으로써 홍제암으로 개칭 된 것으로 보아야 될 것이다.

사명대사 석장비는 대사의 일대기를 기록한 비석으로, 광해군 4년(1612)에 세웠으며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이 비문을 지었다. 일제시대(1943년) 때, 친일파인 해인사 주지 변설호가 합천경찰서장 다케우라(竹浦)에게 홍제암에 있는 석장비의 내용이 문제가 있다고 제보하였는데, 석장비에 1604년 사명대사가 일본을 방문해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대화를 나누던 중 가토가 “조선에 귀중한 보물이 있느냐?”고 물었고, 사명대사가 당당하게 “지금 조선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보물은 바로 당신 목이오”라고 대답했다는 대목이 있다고 알려 비문의 내용이 민족혼을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다 하여 일본인 합천 경찰서장이 네조각으로 깨뜨린 것을 1958년에 다시 접합하여 세웠다. 이 석장비는 현존하는 사명대사비 가운데 가장 먼저 건립되었으며, 문장이 매우 빼어날 뿐 아니라 비문에 대사의 행적이 비교적 소상하게 적혀 있어 역사적인 가치도 높다.

사명대사 석장비의 비신은 일제강점기인 1943년 합천경찰서장 다케우라가 조선인들이 임진왜란에서 많은 공을 세우고 당당하게 협상에 임했던 대사의 당찬 기개를 이어받아 민족의 혼을 불러일으킬 것을 염려해, 파손한 것을 1958년에 복원하였지만 복원할 때의 접합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어 보기엔 흉할 수 있으나 오히려 그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그대로 지녀 후세에 일본인들과 친일파의 만행을 규탄하고 호국의 정신을 고양시키는 역할을 하니, 사명대사는 후세까지 항일의지를 전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 사명대사 석장비 이수


사명당 유정은 그의 스승인 서산대사 휴정(休靜)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친 승병장입니다. 그런 그가 스승인 휴정이 선조가 하사한 벼슬을 고사하고 묘향산으로 들어간 것과는 달리,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란 벼슬을 하사받아 그 소임을 다한 승려이다.

승병장으로 휴정과 활동하던 때엔 가토 기요마사와 4차례의 협상회담을 성공적으로 임했으며,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쿠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와 성공적인 강화를 맺고 1605년 4월에 포로로 잡혀갔던 조선인 3,000여 명을 데리고 귀국했는데, 이때 왜군에 강탈당했던 통도사(通度寺)의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되돌려 받아와서 건봉사(乾鳳寺)에 안치했다고 전한다.

여기에서 석장비의 내용의 사명당이 일본을 방문해 가토 기요마사와 대화를 나누었다는 대목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강화협약에서 나온 이야기를 잘못 표기한 것이 아닌가 싶다. 만약 가토 기요마사와 나눈 대화가 맞다면 난이 끝난 뒤 일본을 찾았을 때 이미 전란 중 4번을 만났던 사이이므로 가토 기요마사가 사명당을 모시고자 청했을 것이라 판단된다.


                  ▲ 사명대사 석장비 비신


사명대사 석장비는 해인사를 찾는 이들은 별로 찾지 않는 위치에 있는데, 해인사 일주문 왼편으로 난 길을 따라 100m 정도 들어가면 홍제교가 있다. 다리 앞엔 동종 모양의 부도탑을 연상케 하는 교각비가 보이는데 아마도 사명대사의 사리탑을 원형으로 한 구성인 듯하다.

사명대사 석장비 안내엔 ‘부도는 고려의 승탑(僧塔) 형식을 계승하여 3단의 연화대좌(蓮花臺座)와 종모양의 탑신(塔身), 둔중한 지붕돌을 갖추고 있다’라 설명되어 있어, 이 홍제교의 교각비도 그에 따라 사명대사의 유적지인 홍제암과 사명대사 석장비를 만나러 가는 길임을 일러주고자 동종 모양으로 구성했으리라 생각된다.

홍제교를 건너 오른쪽으로 약간 비껴 오르면 참나무 숲 뒤로 홍제암과 부도탑비들이 나타난다.



                  ▲ 사명대사 석장비 귀부 전면(사진 上左)과 거북 꼬리 문양이 아닌 용 꼬리 형상의 문양으로 보이는 후면(사진 上右)

                     사명대사 석장비 귀부 측면 전경(사진 下)


부도전 좌측 옆으로 적당한 높이로 담장을 두른 암자가 보이는데 홍제암(弘濟庵)이며, 바로 이 암자는 해인사에서 입적한 사명대사 유정(1544~1610)을 기려 부도탑과 석비를 세우고 암자를 지어 그의 듯을 후세에 전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사명대사의 스승인 서산대사 휴정은 1604년 1월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앉은 채로 입적했습니다.

이 두 승병장이 치른 전쟁은 임진년인 1592년에 일본이 침략해 일으킨 전쟁으로, 이후 1597년 정유년에 재침략해 일으킨 전쟁과 합쳐 임진왜란이라고 하며, 두 번째 겪은 전쟁만을 별도로 구분하여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 한다. 이 두 번의 전쟁을 모두 겪은 조선은 14대 선조(1567~1608 재위)가 재위한 기간으로 서산대사가 묘향산 원적암에서 입적할 당시엔 선조가 생존해 있었으나, 사명대사가 합천 해인사 원적암에서 입적을 하던 때는 광해군이 실권을 쥐고 있을 때이다.

부도전에 위치하고 있는 석장비는 현존하는 사명대사비 가운데 가장 먼저 건립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이 비는 귀부·비신·이수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으며, 전체 높이는 3.15m 이다.


                  ▲ 보수공사 중인 대사 석장비 후면 전경


영암사지의 돌거북이 바로 이와 같은 형태였으나 비신과 이수가 모두 사라졌으며, 이런한 형태의 석비는 신라시대 당의 영향을 받아 발전시킨 것으로 사명대사 석장비 옆엔 같은 형식의 석비가 더 있다. 사명대사를 기려 세운 석비는 2면에 각을 한 2면비인데, 앞면 윗부분에 전서체(篆書體)로 ‘자통홍제존자사명송운대사석장비(慈通弘濟尊者四溟松雲大師石藏碑)’라 새겨져 있으며, 끝에 ‘만력 40년 12월립(萬曆四十年十二月立)’이라 기록된 점으로 보아 1612년(광해군 4) 12월에 건립된 사명대사의 부도에 딸린 탑비임을 알 수 있다.

사명대사 석장비는 1976년 12월 20일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45호로 지정되었다가 2000년 9월 28일에야 보물 제1301호로 승격하였다.



                  ▲ 사명대사탑

 

홍제암의 북동쪽 약 20m 지점의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사명대사탑은 조선 후기를 대표할 수 있는 거대한 종 모양의 탑으로, 당당한 형태와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다. 기단은 하나의 돌로 2단을 이루었는데, 아랫단은 사각형이고 윗단은 둥근 형태를 보이고 있으며, 그 위에 종 모양의 몸돌을 올려놓은 모습이다.



                  ▲ 사명대사탑 기단의 연꽃무늬


탑의 꼭대기에는 연꽃 봉오리 모양의 보주(寶珠)를 올려 놓았다.

3.9 x 4.2m 크기의 탑구에 건립되어 있다.

사명대사의 탑과 석장비는 본래 하나의 짝을 이루고 있던 것으로, 이러한 형식은 신라시대 이래의 전통이 계승되고 있다는 점에서 학문적인 의의가 있다.




◈ 합천 해인사 원당암(陜川 海印寺 弘濟庵)

원당암은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 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산내 암자로. 원당암은 「해인사 1번지」같은 상징적인 암자이다.

해인사와 형제처럼 역사를 같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 해인사 원당암 전경


법당앞에 보물 518호로 지정받아 보호받고 있는 석탑과 석등에도 암자의 나이테가 새겨져 있다. 신라 애장왕(哀莊王)은 공주의 난치병이 낫자 부처의 가호 (加護)로 여기고 해인사의 창건을 발원한 순응(順應)대사 를 몸소 크게 도와주었다고 한다. 왕은 서라벌을 떠나 가야산에 임시로 작은 집을 지어 절 공사를 독려하고 정사(政事)를 보기까지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의 원당암이다. 암자가 다시 활기를 찾게 된 것은 혜암(慧菴)스님이 머무 른 이후부터였다고 하며, 혜암스님은 현재 해인사의 정신적 지주라고 할수 있는 해인총림방장(1993년~1996년)스님을 지내시고 1999년 4월에 조계종 제10대 종정스님으로 추대되었다. 또한 원당암에서는 스님들과 똑같이 일반인들도 여름과 겨울에 한철씩 안거(安居)에 들어가 수행을 하는 국내 재일의 재자불자 참선도량으로 변모되었다.


                   ▲ 주차장에서 바라본 원당암과 원당암 입구

                   ▲ 해인사 원당암 입구


♧ ♧ 합천 해인사 원당암 다층석탑 및 석등(陜川 海印寺 願堂庵 多層石塔 및 石燈)

*보물 제518호(1970.06.24. 지정)

*소재지: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41-22 (치인리)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는 호국신앙의 요람인 해인사의 원당암 안에 있는 다층(多層) 석탑이다. 탑신(塔身)을 점판암으로 만든 청석탑(靑石塔)으로, 점판암은 벼루를 만드는데 주로 사용되는 석재이다.



                  ▲ 원당암 보광전 앞에 있는 다층석탑과 석등


땅과 맞닿아 탑의 토대가 되는 바닥돌은 화강암을 이용하여 3단으로 쌓았으며, 그 위에 탑신을 받치는 기단(基壇)과 지붕돌은 점판암으로 구성하였다. 기단은 1단으로 밑면에는 돌아가며 연꽃무늬를 장식하였고, 윗면은 네 모서리에 대리석 돌기둥을 세웠으며, 맨윗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다.



                  ▲ 몸돌은 사라지고 10층의 지붕돌남 남아있는 원당암 다층석탑 탑신(사진 上)

                     원당암 다층석탑의 3단의 바닥돌(사진 下)


탑신의 몸돌은 남아있지 않고 지붕돌만 10층이 쌓여 있다. 지붕돌은 경사진 4면이 매우 평평하고 얇으며 밑면엔 낮은 3단의 받침이 새겨져 있고 처마는 네 귀퉁이에 이르러 위로 살짝 들려 올라갔다. 탑의 꼭대기에는 화강암으로 만든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이 낮게 있고, 그 위로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 모양의 장식)만이 높직하게 남아 있다.

청석탑은 대체로 고려시대에 본격적으로 유행하게 되지만 이 석탑은 신라 말에 만들어져 청석탑의 선구라 할 수 있다.

석등은 탑의 옆에 있으며, 탑과 거의 동일한 시대의 작품이다. 땅과 맞닿은 6각형의 바닥돌 위에 아래받침돌과 중간받침돌, 지붕돌로 이루어졌는데, 아래받침돌과 지붕돌이 점판암으로 되어 있고 다른 부재는 화강암이다. 현재는 지붕돌 밑의 불을 밝히던 부분인 화사석(火舍石)이 남아 있지 않다.



                   ▲ 원당암 석등의 중간받침돌(간주석) 위와 아래에 세겨진 '上'과 '下' 글자


중간받침돌은 가늘고 긴 편으로 아래위에 상(上)·하(下)의 글자가 움푹하게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6각형으로 윗면은 편평하며, 머리장식은 원기둥 모양의 돌 하나가 얹혀있을 뿐이다.



                   ▲ 해인사 가는 도로 중간에 부속암자(백련암, 희랑대, 국일암)가는 갈림길(사진 上)

                      갈림길 입구의 이정표와 표지석(사진 下)


◈ 합천 해인사 백련암(陜川 海印寺 白蓮庵)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산내암자이다. 해인사 일주문에서 걸어서 약 30분 거리에 있다. 창건자 및 창건연대는 미상이며, 1605년(선조 38)에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제자 소암(昭庵)이 중창하였다. 전설에는 임진왜란 당시 소암이 해인사를 수호하였는데, 왜병들이 소암의 명성을 듣고 해인사 앞의 산마루턱에서 넘겨보았을 뿐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 해인사 백련암 경내 전경




                   ▲ 주차장에서 바라본 백련암 입구 주변 전경


지금도 왜병들이 엿보았다는 산마루를 왜규치(倭窺峙)라 부른다. 그 뒤 환적(幻寂)이 이 절에서 수도하였다. 환적은 암자의 동쪽에 토굴을 파서 환적대(幻寂臺)라 이름 짓고, 그 곳에서 오래 좌선하다가 입적하였다고 한다.

늘 한 마리의 호랑이와 벗하였는데 그 호랑이가 제자를 해치자 산신(山神)에게 명하여 다시는 가야산 안으로는 호랑이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그 뒤 가야산 일대에서는 호랑이의 피해를 받는 사람이 없었다고 전한다. 문하에는 풍계(楓溪)·명등(明登)이 있으며, 특히 시문에 능하여 『유완록(遊翫錄)』·『문집(文集)』 등을 남겼는데 그 각판의 일부가 백련암에 간직되어 있다.



                   ▲ 해인사 백련암 주차장에서 경내로 오르는 두 갈래의 길


현존하는 당우로는 원통전(圓通殿)과 영자당(影子堂) 및 요사(寮舍)가 있는데, 영자당에는 환적·통엽(通嘩)·활해(濶海)·인파(仁坡)·신해(信海)·춘계(春溪)·대송(對松)·월파(月波)·침운(枕雲)·나은(懶隱) 등의 초상화가 봉안되어 있다. 또한 원통전은 1687년(숙종 13) 환적이 신축하였고 뒤에 응해(應海)가 중건하였다.


                   ▲ 기암으로 둘러싸인 백련암

                   ▲ 뜰안의 불면석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백련암


해인사의 암자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며, 기이한 바위의 경치와 탁 트인 전망은 가야산의 제1경승지로 손꼽힌다. 암자 좌우로 용각대(龍角臺)·절상대(絶相臺)·환적대·신선대(神仙臺) 등의 기암이 있고, 뜰 안의 불면석(佛面石)은 천연의 한 덩이 거암(巨岩)으로서 마치 불면과 같다고 하여 이러한 이름이 붙여졌다.


                   ▲ 해인사 백련암 고심원

                   ▲ 해인사 백련암 고심원내에 모셔진 성철스님상


예로부터 고승들이 많이 배출된 유명한 수도처로서, 고승들이 즐겨 수행처로 삼아 오던 이곳은 역대로 산중 어른들이 주석해 왔다. 곧, 소암대사를 비롯하여 환적,풍계, 성봉, 인파대사와 같은 스님들이 일찍이 주석하였고, 몇해 전 해인총림의 방장 성철스님께서 입적하기 전까지 주석하였다.


                   ▲ 해인사 백련암 정념당과 불면석

                   ▲ 해인사 백련암 경내 출입문

                   ▲ 해인사 백련암 축대위에 쌓은 담장


현재 이곳에는 원통전과 영자당을 위시한 요사채 몇 동이 조촐하게 서 있고 축대를 새로 쌓고 기도터를 새로이 신축하여 도량이 일신되었다. 현재 전국에서 유일하게 ‘아비라 기도회’가 1년에 네 차례 백련암에서 열린다. 이 기도회는 성불을 위한 모임으로서 범어로 된 기도문을 외운다.



◈ 합천 해인사 희랑대(陜川 海印寺 希郞臺) 
희랑대는 그 암자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희랑조사가 머물던 곳으로서, 자연이 이루어낸 기기묘묘한 지형과 빼어난 경치로 말미암아 일찍이 금강산의 보덕굴에 비유되곤 했다. 희랑대는 이곳의 삼성전에 모셔진 독성님은 그 영험이 불가사의하다고 해서 기도처로 퍽 유명한데, 이를테면 이곳에서 기도하여 부자가 되었다거나 하는 따위의 여러 영험 설화를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이 암자는 특히 일반 신도들에게 친근하다.


                   ▲ 해인사 희랑대 전경


♧ ♧ 해인사 희랑대 목조 지장보살좌상(海印寺 希郞臺 木造 地藏菩薩坐像)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85호(2009.08.06. 지정)

*소재지:경상남도 합천군 해인사길 122(가야면 치인리)

해인사 희랑대 주지실에 봉안되어 있으며, 도금의 박락이나 훼손된 곳 없이 양호한 상태이다. 불상 좌대는 15개의 못으로 돌아가며 고정해 당시 좌대의 고정기법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좌대밑면에는 주서로 제작연대 및 원래의 봉안사찰, 시주자, 제작자 등을 기록해 두었는데 시주자나 화원의 이름 중 일부가 박락되어 확인이 어려웠다.
불상의 특징을 보면 높이 30cm의 소형 목조상이며, 방형의 얼굴에 민머리를 한 지장보살상이다. 신체에 비해 머리가 큰 일반적인 조선후기 불상의 특징을 따르고 있다. 전체적으로 균형 잡힌 비례를 보이지만 어깨가 다소 빈약하고 무릎이 높은 편이며, 상의 규모에 비해 두 손이 크게 조성되었다.
얼굴은 이마가 넓은 방형이며, 콧대로부터 얼굴의 옆선까지 길게 그은 눈, 삼각형의 오똑한 콧날, 앞으로 돌출된 입이 특징이며, 미소가 없는 인상은 다소 침울해 보인다.
수인은 아미타인으로 오른손은 가슴 앞으로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대었으며, 왼손은 무릎에 대어 같은 손가락을 결하였다.
오른쪽 어깨에는 편삼을 걸치고 그 위에 양어깨 특히 오른쪽 어깨를 살짝 걸쳐 내리는 변형통식의 대의를 입었으며, 편삼 옷자락은 배 밑에서 대의 밖으로 내어 전체적으로 ‘W’자처럼 보이는 조선후기 불상의 일반적인 특징을 다르고 있다. 뒷면은 왼쪽 어깨로 흘러내린 대의 자락을 단순하게 처리하였으며, 편평하고 밋밋한 가슴 밑으로 수평의 승각기와 발목아래의 군의자락은 대칭을 이루며 양측으로 정리되었다.
좌대 아래에 적힌 명문을 통해 1677년(강희16년)에 불영산 쌍계사의 법당에 있는 삼존불상을 중수하면서 더불어 지장보살상 일구를 새로 조성하여 인동의 가섭암에 이안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가섭암의 사찰이름만 있을 뿐 자세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불상을 모셔온 인동은 현재 칠곡 근처이며, 시주자는 인동 장씨 장□익으로 이 지역에 살았던 인물에 의해 지장상이 발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불상을 조성한 화원은 글씨의 일부가 지워져 정확하지 않으나 ‘自珪’라는 인물인 것으로 추정된다. 자규는 1655년부터 1677년까지의 활동이 확인되었으며, 경남과 경북을 중심으로 활동한 화승으로 알려져 있다.
민머리의 지장보살상은 신체의 비례, 방형의 얼굴, 변형통견식의 착의법등 17세기에 유행했던 보편적인 특징을 보이고 있다. 전체적으로 단순하면서도 정리된 옷주름이 특징적이며 옆으로 유난히 긴 눈과 앞으로 살짝 튀어 나온 입은 독특하다.
이 불상은 좌대 밑면에 쓰여진 묵서 기록을 통해 1677년에 제작되었음과 경상북도 인동현 가섭암에 모셔졌던 불상임을 알 수 있다. 인동현은 동국여지승람기록에도 보이듯이 불영산 쌍계사와 매우 가까운 지역이며, 인근 인동에 살던 인물이 시주하여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조성화원으로 추정되는 자규는 경상남·북도 지방에서 활동한 인물로 보조화승의 활동과 중수화원으로 전할 뿐 수화원으로 불상을 조성한 사례가 밝혀진 바 없었기에, 해인사 희랑대 불상이 그의 작품이라고 한다면 그의 작풍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로써 중요한 불상이다.
따라서 이 목조지장보살상은 제작지, 당시의 봉안처, 정확한 제작연대가 확실히 밝혀진 조선후기 불교조각이며, 경상도 지역의 불상특징을 파악할 수 있는 작품이다.


                   ▲ 해인사 국일암(사진 上)

                      국일암 지장전(사진 下)

 

◈ 합천 해인사 국일암(陜川 海印寺 弘濟庵) 

국일암의 창건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고 다만 중건한 기록만이 있는데 부휴대사의 문하인 벽암 각성대사가 이곳에서 오래 주석하면서 인조 15년 곧 서기 1637년에 중건하였다고 전한다. 벽암스님은 일찍이 글씨와 군법에 능통한 스님으로, 조선조 인조임금 때에 남한산성을 축성한 공적으로 인조임금으로부터 원조국일대선사라는 시호를 받았는데, 국일암이라는 이름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그 뒤에 정인스님이 해방 전후에 두차례에 걸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에는 부휴스님, 고한스님, 벽암스님의 부도들이 모셔져 있다.


♧ ♧ 합천 해인사 국일암 구품도(陜川 海印寺 國一庵 九品圖)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23호(2012년07월26일 지정)

*소재지: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18-68 국일암



고종22년(1885)에 제작된 세로 191㎝, 가로 228㎝ 크기의 비단 바탕에 채색된 조선시대 후기의 영산회상도이다, 석가불의 영취산 설법 장면을 그린 것으로 조선시대 영산회상도 중 가장 많은 수의 성중이 등장하는 불화이다. 여러 층의 단을 쌓고 불보살과 제자, 아라한, 천과 성군 등이 위계에 따라 아래에서부터 차례대로 무리를 이루었고, 단 바깥에 낮은 담을 둘러 불보살을 호위하는 신중들을 배치하였다.

조선시대 영산회상도를 통틀어 가장 많은 종류와 수의 성중들이 등장하였다. 단을 여러 층으로 쌓았으며 단의 바깥에는 낮은 담을 둘렀다. 단 아래와 담 바깥에는 불보살을 외호하는 신중들이 자리했고, 단 위와 담 안쪽에 불보살과 제자, 아라한, 천과 성군 등이 자리하였다. 아래에서부터 위계에 맞게 차례대로 무리를 이루었다.

가장 높은 자리에 편단우견에 항마촉지인을 한 석가모니불이 청련 위에 가부좌를 하고 있고, 양쪽에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협시하여 앉아있다. 신광 좌우에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을, 그 양쪽으로 가섭과 아난을 자리하였다. 불단 아래에는 보살들이 모두 청사자를 타고 있다. 그 밑에는 아라한들이 경전을 보며 서로 이야기하고 있고 입구 양쪽에는 마혜수라와 아수라가 서있다. 이들 양쪽엔 범천과 제석천이 합장하였고 그 양쪽으로 신중들이 담을 에워쌓다.

색감은 붉은 색이 주가 되고 녹색이 보조색으로 쓰였다. 19세기 후반에 많이 쓰이기 시작한 청색은 절제되었다.

조선시대 영산회상도의 형식에서 벗어나 있어 지금까지 구품도로 잘못 이해하였다. 19세기 말에 해인사 불화를 많이 그렸던 수룡기전(水龍琪銓), 금운긍율(錦雲肯律), 수인(修仁), 병홍(炳洪), 경우(敬祐), 두명(斗明) 등이 새로운 영산회상도를 창안하였다. 조선시대 영산회상도가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성중을 그린 작품으로, 영산회상도 발달 양식에서 종점에 다다른 작품이다. 영산회상도와 함께 신중도도 그려졌다.

 

♧ ♧ 합천 해인사 국일암 신중도(陜川 海印寺 國一庵 神衆圖)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24호(2012년07월26일 지정)

*소재지: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18-68 국일암

고종22년(1885)에 제작된 세로 105㎝, 가로 117㎝의 비단에 채색된 불화이다,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신들, 즉 신중(神衆)을 그린 불화로 전각을 수호하는 기능을 한다.


합장을 한 범천이 가운데 서 있고 지물을 든 제석천이 향우측에 앉아 있다. 향좌측에는 겨드랑이에 삼지창을 끼고 합장을 한 위태천이 오른쪽을 향해 서있다. 제석천만 앉은 모습으로 한 것은 조선시대 신중도 가운데 가장 먼저 등장했던 제석천도의 형식을 따왔기 때문이다.

한편 범천, 제석천이 나란히 오면 범천이 향우측, 제석천이 향좌측에 와야 하지만, 위태천까지 셋이 나란히 나오니 제일 위인 범천을 가운데에 둔 것으로 봐야 한다. 원래 제석천은 모란꽃을 드는 것이 전형인데, 여기서는 막대기 같은 것으로 변형되었다. 이는 지물의 양식화 현상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이들 두 천은 같은 상호와 관, 천의를 입고 있다.

이들 천 아래에는 성군과 신중들이 자리하였다. 제석천 앞에 쟁반에 해과 월을 든 일천자, 월천자 등이 자리하였다. 붉은 색과 녹색을 주로 하였으며 청색의 사용도 눈에 띤다. 특히 뒤 배경을 모두 청색으로 칠하였다.

19세기 후반 다른 신중도와 비교해서 성중의 숫자가 많지 않아 구성이 답답하지 않다. 그리고 범천과 제석천만 정면을 향하고, 나머지는 모두 좌우를 쳐다보고 있어서 시선 방향에서는 기존 신중도 전통을 충실히 이은 작품이기도 하다.

국일암 구품도와 같은 해, 같은 스님인 수룡기전(水龍琪銓), 금운긍율(錦雲肯律), 수인(修仁), 병홍(炳洪), 경우(敬祐), 두명(斗明)들에 의해 그려진 신중도이다. 정월 12일에 봉안하였다. 시주자는 평양외성에 거주하는 최씨 여성이다. 기전이 그린 1882년(고종 19) 범어사 신중도와 비교하면, 성중이 대폭 줄었다. 이는 국일암 신중도가 범어사 신중도 크기의 반으로 줄었기 때문이다.

 

♧ ♧ 해인사 국일암 벽암선사 진영(海印寺 國一庵 碧巖禪師 眞影)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87호

*소재지: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18-68 (치인리)



18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비단에 채색된 세로 119.5cm, 가로 83.4cm 크기인 이 진영은 화면 왼쪽 윗 부분에 아래로 길게 ‘사국일도대선사벽암존자지진상(賜國一都大禪師碧巖尊者之眞相)’이라고 제명이 쓰여진 것처럼 벽암선사(碧巖禪師, 1575∼1660)의 진영이다. 벽암은 1588년(선조 12)에 출가하여 부휴선수(浮休善修)를 만나 공부하였다. 임진왜란 중인 1593년(선조 26)에는 사명당 유정의 천거를 받아 승병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 뒤 판선교도총섭(判禪敎都摠攝)으로 봉은사 주지를 겸하였고, 1624년(인조 2)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으로서 남한산성을 3년 만에 완공하였다. 이 공으로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라는 존호를 받게 되었다. 병자호란 때도 항마군(降魔軍) 승병장을 맡았으며, 그 후 송광사, 해인사, 백운사, 상선암, 보개산, 묘향산, 속리산 등으로 옮겨 다니며 교화 활동을 펼치다 화엄사로 돌아와 1660년(현종 1)에 입적하였다.

부분적으로 보채한 흔적과 화면에 약간의 결락이 있긴 하지만,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향좌측 상단에는 주색 바탕의 화제란을 마련하고 황색으로 ‘사국일도대선사 벽암존자지진상(賜國一都大禪師碧巖尊者之眞相)’이라 적었고, 배면에 묵서가 남아 있다.

벽암존자는 세로가 다소 긴 화면이다. 배경은 의좌상(倚坐像)의 진영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화문석(花紋席)으로 바닥과 벽을 구분하여 공간 구성을 하였다. 그 중앙에 주인공인 벽암존자가 오른쪽을 향하여 의자에 앉아 있는 좌안7분면의 전형적인 전신의자상이며 패널형식이며 바닥에 족좌대를 밟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왼손은 불자(拂子)를 쥐고 어깨에 기대고 있으며, 오른손은 무릎 위에 내려 엄지와 검지를 들어 변화를 주고 있다. 얼굴과 피부는 짙은 갈색으로 칠하였고 머리카락과 모근은 담묵(淡墨)으로 바림한 후, 먹과 호분으로 세점을 찍어 표현했다. 복식은 다갈색이 섞인 녹색 장삼에 녹청의 조(條)가 표현된 주색가사를 걸치고 있다.

장삼에는 전체적으로 모란문을 시문하였는데, 매우 특이한 사례이다. 의자 등받이는 홍색 법피가 덮여 있는데, 운보문과 고리 형태의 원형 그리고 방형 무늬를 표현하였고, 법피 가장자리에는 백색 바탕에 화문으로 장식하여 변화를 주었다. 특히 배경으로 하단에 화문석(花紋席)을 깔아 바닥과 벽으로 2단 구분한 것은 대체로 바닥 좌상에서 볼 수 있는 공간 구성으로, 의좌상에서는 보기 드문 사례이다. 상단의 녹청 벽면에는 운보문(雲寶紋)을 베풀었다. 의자는 오른쪽으로 향해 있는데, 사선을 이루며 앉아 있는 인물의 자세와 달리 앞뒤 다리 길이의 차이를 두지 않고 원근법에 다소 어긋나게 모두 똑같은 수평선상에 둠으로써 표현의 미숙함이 보인다.

이 작품은 인물 및 대상물의 묘사가 경직되고 사실성이 떨어진다는 점에서 18세기 후반 고승 진영의 양식적 특징을 볼 수 있다. 또한 이 진영은 화면 중앙에 앉아있는 모습의 벽암존자를 단독 배치한 진영으로, 대각선 구도를 보여 정적인 화면에 운동감을 부여하였다. 근엄하면서도 녹색 돋을 선을 사용하여 옷 주름과 문양을 표현하였으며, 왼쪽 어깨에 매듭을 지어 걸친 선홍색 가사에는 금색 문양이 화려하다.

벽암존자의 진영은 19세기 경 고승 진영이 정형화되기 이전의 양식으로 돋을 기법을 활용한 선묘 처리나 방형의 금박시문기법, 무릎 위에 놓은 손 표현 등에서 19세기 경의 고승 진영과도 비교되는 매우 독특한 표현 기법을 보여준다. 즉 18세기 후반의 고승 진영의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연구 자료적 가치가 크다.




                   ▲ 해인사 길상암 전경


 ◈ 합천 해인사 길상암(陜川 海印寺 弘濟庵) 

길상암은 해인사 동구에서 한 1 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으며, 백화담을 위시하여 자연 경관이 아름답기로 이름나다. 1972년에 영암 대종사께서 창건한 이 암자에는 부처님 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 있다.


 ▲ 해인사 길상암 오르는 나무데크 계단길

▼해인사 길상암의 문수전(사진 左)과 적멸보궁가는 산길 입구에 위치한 나한전(右), 그리고 종각과 삼성각


                   ▲ 해인사 길상암 나한전 옆 적멸보궁가는 길 입구(사진 上)

                      적멸보궁가는 산속 돌계단길(사진 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