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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慶州) 제2편/경북 경주

왕마구리 2008. 6. 17. 11:30

◀ 경주(慶州) 제2편 ▶

▲ 감포항 방파재에서

 

▷ 둘째날(2008년 6월 13일)

감포항을 둘러보고 점심식사를 겸한 늦은 아침을 부둣가에 자리잡은 '명성활어회집'에서 대게와 회덮밥으로 든든하게 먹고 감은사지 삼층석탑과 기림사, 골굴사 등 2개의 사찰 구경을 하였다. 골굴사 입구 전통찻집 '다선방'에서 팥빙수(\5,000)로 더위를 잠시 식히고 45.3km 떨어진 양동마을로 이동하였으며. 양동마을 관광에 이어 반경 5km이내에 몰려있는 정혜사지13층석탑, 독락당 그리고 옥산서원을 마지막으로 1박2일의 여정을 마치고 오후 5시 54분 귀가길에 올랐었다.

하루에 많은 것을 자세하게 구경하는 것 자체도 벅찬데, 감포항에 머문시간이 너무 길어(오전 11시 35분 감포항 출발) 관광시간이 자동적으로 짧아져 어려움이 있었다.

둘째날의 일정은 제2편:감포항~골굴사, 제3편:양동마을~옥산서원으로 나누어 게제를 하기로 한다.

▷ 제2편 : 감포호텔/숙소(09:55)-감포항관광 및 식사(09:55~11:35)-(9km)→감은사지삼층석탑(11:52~12:10)-(13.1km)→기림사(12:26~13:26)-(3.9km)→골굴사(13:33~14:25)-(45.3km)→

▷ 제3편 : 양동마을(15:23~16:40)-(13.2km)→정혜사지13층석탑-(17:00~17:05)-독락당(17:07~17:22)-옥산서원(17:26~17:54)-(361.1km)→부천(23:30)

 

* 제2편 : 감포항관광 및 식사(09:55~11:35)→감은사지삼층석탑(11:52~12:10)→기림사(12:26~13:26)→골굴사(13:33~14:25)

 

09:55~11:35=>감포항

 ▲ 감포항에 정박중인 오징어잡이배들

 

 ▲ 방파재에서 바라본 감포항

 ▲ 방파재 좌측으로 보이는 등대들

 

 ▲ 방파재에서...

 

11:52~12:10=>감은사지삼층석탑

     쌍탑으로 배치되어 있는 감은사지삼층석탑은 현재 문화재청에서 서탑은 보호막을 치고 보수공사중이며, 동탑은 보수공사를 위해 철 구조물을 설치하고 있었다. 서탑의 보수공사는 거의 완료된 상태이며, 동탑의 경우 보수를 하는데 약 2개월 정도가 소요될 것이라 한다.

보수공사중이라 서탑은 전체를 보지 못하였지만 동탑은 철 구조물을 설치하고 있는 중이라 탑의 원형을 보기에는 별 어려움이 없었으며, 철 구조물이 설치되더라도 서탑처럼 보호막을 설치하지 않는다 하니 구경하는데는 별 어려움이 없을 것 같다. 또한 서탑의 보수가 거의 완료된 상태라 머지않아 보호막을 철거하게 되면 쌍탑 모두를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 감은사지삼층석탑

 ▲ 감은사지터

 

 ▲ 보수공사 준비중인 감은사지삼층석탑/동탑

 ▲ 보수공사중인 감은사지삼층석탑/서탑

▲ 보수공사로 보호막이 쳐진 감은사지삼층석탑/서탑

 

♣ ♣ 감은사지삼층석탑

*국보 제112호

*소재지: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55-1

감은사는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한 뒤 왜구의 침략을 막고자 이곳에 절을 세우기 시작하여 신문왕 2년(682)에 완성된 절이다. 감은사에는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유언에 따라 동해의 대왕암에 장사 지닌 뒤 용이 된 부왕이 드나들 수 있도록 금당 밑에 특이한 구조로 된 공간이 만들어져 있다.

금당 앞에 동서로 마주 보고 서 있는 삼층석탑은 높이가 13.4m로 장대하다. 이중 기단위에 몸체돌을 올린 모습으로 처마 밑은 받침이 5단이며, 지붕위는 곡면을 이루어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인다. 1959년 12월 서탑을 해체 보수할 때 3층 몸돌에서 건립 당시 설치하였던 매우 정교하고 귀중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1996년에 동탑을 해체, 보수하였는데 3층 지붕돌의 상면 사리공에서 금동사리함이 발견되었다.

경주에 있는 삼층석탑으로는 가장 거대하여 옛 신라의 1탑 중심에서 삼국통일 직후 쌍탑으로 변모한 최초의 가람 배치를 보이고 있다.

 

12:26~13:26=>기림사

♣ ♣ 기림사(祇林寺)

기림사는 현재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호암리 419번지에 위치해 있으며, 신라초기 인도 범마라국 사문 광유성인이 창건, 한때 임정사라고도 불렸던 선종의 고찰이다. 광유화상이 부처님의 도량을 마련하여 오백제자를 교화했다는 설화가 전해져 우리나라 설화문학의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그 이후 신라 선덕여왕 12년(643)에 하늘기둥을 깎은 후 다시 승문에 들어간 원효에 의해 임정사는 기림사로 개칭되었다. 그리고 왜구가 동해를 거쳐 서라벌로 침입하는 길목에 놓여 호국사찰의 구실을 해왔다. 고려 고종때 삼국유사를 지으신 보각국사 일연 스님의 노숙인 대선사 각유가 이 절의 주지로 주석해 있었다. 조선 선도 11년(1578)에 축선이 중창하였고, 현종 8년(1668)에 승호가 대웅전을 개와 불사하였으며, 정조 때에는 경주부윤 김광묵이 사재를 털어 크게 중수하였다. 철종 13년(1862)에는 대화재로 113칸의 당우가 소진되었으나, 열성어필(列聖御筆), 도선생안(道先生案), 부선생안(府先生案) 등의 중요한 유물을 보존해 온 까닭에 이듬해 경주부윤 송우화등의 시주를 받아 복원하였으며, 그 뒤 고종 15년(1878) 중수를 거쳐 1905년에 혜훈이 다시 중수하였으며 최근에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함월산 기림사는 19911년 31본산의 하나로 불국사를 비롯한 60여 개의 말사를 감리한 거찰이었다. 그러나 광복이후 교통의 불편과 불국사의 복원으로 그 사세가 상대적으로 위축되어 지금은 거꾸로 불국사의 말사가 되어 있으며 서산대사의 직전을 이은 스님들이 주지로 주석하여 왔다. 한편 왜구가 동해를 거쳐 경주로 림입하는 길목에 위치한 기림사는 임진왜란 때 승군의 지휘본부로 사용하였으며 진남루, 나팔, 목비 등이 남아있어 호국사찰임을 증명해 준다.

풍수로 볼 때 기림사에는 용이 날아오르고 봉황이 춤추듯 뭇봉우리가 둘러싼 가운데 물길이 열려 이루어진 광활한 명당으로 신령스러운 거북이 물을 마시는 영구음수(靈龜飮水)형이다. 절이 위치한 함월산은 석굴암이 있는 토함산과 서로 달을 토해내고 머금는 관계라고 한다.

기림사는 삼세여래를 모신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동쪽으로 약사불과 사천왕, 사리왕탱을 모신 약사전, 서쪽에 관음전, 정광불의 사리각인 삼층전이 있고 남쪽으로 오백나한전, 산신각, 무량수전, 진남루가 있으며 정면에 삼층석탑이 있는 1탑 1금당형의 가람배치를 이루고 있다.

▷ 기림사의 문화재

*소조 비로자나 삼존불상(보물 제958호) : 16세기 불상으로서 중앙에 비로자나불, 좌우에 노사나불과 석가모니불이 배치된 형식으로 대적광전에 봉안

*비로자나불 복장전적(보물 재959호) : 대적광전의 본존불인 비로자나불상 속에 봉안되어 있던 '대반야경' 등 금,은 사경 14권과 조선시대에 만든 불경, 부ㅡ처님 진신사리 4과 등

*건칠보살좌상(보물 제415호) : 진흙으로 속을 만들어 삼베를 감고 종이를 바르고 그 위에 옻칠을 하고 다시 금을 입힌 관세음보살반가상으로 조선조 연산군 7년(1501)에 조성된 우리나라 유일의 보물

 

▲ 대적광전을 배경으로...

 

♣ 대적광전

*보물 제833호

대적광전은 지혜의 빛으로 세상을 비춘다는 비로자나불을 모셔 놓은 법당을 가르킨다. 이 건물은 신라 선덕여왕 12년(643)에 처음 건립된 것으로 전한다. 그 후 조선 인조 7년(1629)에 크세 중수하였다. 또한 정조 17년(1793) 경주부윤 김광묵이 재물을 내서 불사를 일으키고 동종도 조성하였다. 철종 13년(1862)에 큰 불이 나서 경내 113칸의 건물과 동종도 소실되었다. 그러나 대적�전만은 화를 면하였고, 1878년과 1905년에 보수하였다.

건물은 정면이 5칸, 측면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단층 맞배지붕으로 다포식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다.

겉모습은 절의 중심 법당답게 크게 힘차며 안쪽은 비교적 넓은 공간에 정숙하고 위엄 있는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이 건물은 산사의 건물들이 주칸은 좁고 기둥은 높은 성향을 지닌 것과는 구별된다. 견실한 구조와 장엄한 공간구성이 돋보이며 옛 모습을 보존한 조선후기의 대표적 불전 가운데 하나이다.

 

▲ 응진전과 고려삼층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05호)/사진 좌측은 진남루

 

♣ 기림사 응진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14호

이곳은 아라한을 모신 건물로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위치해 있다.

신라 선덕여왕 때에 지어진 것으로 전하지만 조선 후기에 다시 중건한 것으로 추정된다. 정면은 기둥 6개의 5칸이고, 측면은 2칸으로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막돌 장대석을 한단 쌓은 낮은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앞.뒷면에는 둥근 기둥을 하고 화려하게 치장하지 않은 단정한 형태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18세기 조선 후기 건축양식을 갖추고 있으나 부분적으로 조선 중기의 특징을 포함하고 있다. 대체로 수평적 느낌이 강한 단아한 건물이다.

 

 ▲ 대적광전과 약사전, 그리고 고려삼층석탑

▲ 약사전

 

♣ 기림사 약사전

이 건물은 1600년대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 사적기에 대적광전 왼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기술되어 있으며 중건기에는 조선 효종 5년(1654)에 중창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숙종 4년(1678) 약사법당을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전하므로 약사전은 1600년대 이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앝은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건립되었으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지붕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일반적으로 측면에 출입문을 설치하는 것이 통례지만 여기서는 배면에 문을 둔 것이 이색적이다. 전체적으로 겉모습이 부드러우면서 균형이 잘 잡혀있는 건축물이다. 

 

▲ 진남루

 

♣ 진남루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251호

이 건물의 기능이나 용도 및 건립연대는 정확하지 않다. 진남루란 명칭은 '사적기'에 의하면 '무량수전야차유진남루'라 하여 위치에 대한 언급만 있을 뿐이다. 임란 때 기림사가 수군과 승병활동의 근거지로 활용되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추측할 뿐이다.

정면 7칸, 측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보면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이다. 일반적으로 루란 하면 중층건물이나 다락집의 형상을 의미하나 여기서는 일반적인 형태에서 벗어나 있다. 전통 칸으로 우물마루를 깔았고 판벽에 창호를 설치하였으나 현재 사용 용도가 바뀌게 되면서 창호가 개체되어 원형을 알 수 없다. 정면이 긴 건물에서 목조구조의 허약성을 보완하는 구조 수법이 돋보이는 건물이다.

 

▷ 기림사의 전설

기림사에는 많은 전설이 전한다. 그 가운데 이 절에는 천년에 한 번 핀다는 다섯 가지 빛깔의 상서로운 우담바라라는 꽃이 핀다. 또한 예로부터 오정수가 유명하다. 하늘에서 내리는 단 이슬과 같은 물로 차를 끓여 마시면 으뜸이라는 북암의 감로수, 그냥 마셔도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후원의 화정수, 마시면 기개가 커지고 신체가 웅장해져 장군을 낸다는 3층석탑 곁의 장군수, 눈이 맑아진다는 천왕문 앞의 명안수, 물빛이 너무 좋아 까마귀가 쪼았다는 천왕문 안의 오탁수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 가운데 장군수는 조선시대 이곳에서 역적모의가 발각되어 나라에서 삼층석탑을 옮겨 샘의 물줄기를 막아버렸다고도 하고 장군이 날까 두려워 일본이 그랬다는 전설이 함께 전한다.

한편 신라 제31대 신문왕이 감은사 앞바다 대왕암에서 용으로부터 옥대와 만파식적을 만든 대나무를 얻고는 기림사 서쪽 시냇가에 와서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들고 쉬는데 따마침 세자(후의 효소왕)가 와서 "이 옥대의 한쪽 한쪽이 모두 진용입니다"라고 하니, 왕이 "네가 어찌 아느냐"라고 하자 태자가 "옥대의 한쪽을 떼서 물에 넣어 보소서"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왼편 둘째 쪽을 떼서 시냇물에 넣으니 돋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그 땅은 못이 되어 용연이라고 하였다는 전설이 '삼국유사'에 전한다.

 

 ▲ 주차장에서 기림사로 오르는 숲길

 ▲ 주차장에 위치한 일주문

 ▲ 기림사 천왕문

 ▲ 천왕문 앞에서...

 ▲ 기림사종무소를 겸하는 종루/뒤편 우측의 건물은 진남루

 ▲ 기림사 흙담(1)

 ▲ 기림사 흙담(2)

 ▲ 기림사 흙담(3)

 ▲ 대적광전의 창호 문양(1)

 ▲ 대적광전의 창호 문양(2)

 ▲ 응진전의 창호 문양

 ▲ 진남루의 창호

 ▲ 삼천불전/현대식 불전

▲ 기림사의 부속 건물들

 

13:33~14:25=>골굴사

     골굴사는 산비탈 오름길 도로를 따라 우측에 계단식으로 사찰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으며, 절 맨 위쪽에 위치한 건물인 대적광전 옆 암벽에 석굴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암벽 맨 위에 자리를 잡고 있는 마애여래좌상을 오르는 암벽 길에는 소규모의 굴벙당(산신굴, 신중단, 약사굴, 자장굴 등)들이 있다. 그러나 관음굴은 상당히 큰 규모의 석굴로 석굴암과 같은 형태로 굴 입구에는 기와를 얹은 지붕이 설치되어 있다.

 

♣ ♣ 골굴사(骨屈寺)

현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안동리 산304-1에 위치한 골굴사는 약 1500년 전 인도에서 건너온 광유성인 일행이 함월산 지역에 정착하면서 창건하였으며 이는 불국사보다 약 200년 먼저 창건되었다.

골굴사는 당시 광유스님 일행들이 자국의 사원 양식을 본따서 창건한 전형적인 석굴사원으로 인도의 아잔타석굴, 티벳의 돈황, 중국의 운강석굴처럼 여러 개의 동굴군으로 형성된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석굴사원이다.

조선시대 토함산 산중일기를 쓴 정시한 선생의 기행문에도 당시 골굴사의 모습을 "여러 채의 목조와가로 지어진 전실을 연결하는 화랑이 있고 단청을 한 석굴사원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병풍을 보는 것처럼 아름답다"고 찬탄하였다.

주불인 마애아마타불은 보물 제58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동해안의 문무대왕수둥릉을 향해서 조성되었으며 관음굴, 지장굴, 라한굴, 신중단, 칠성단, 산신당 등의 굴법당들이 있다. 또한 그 옛날 화랑들이 수련하던 심신 수행법인 선무도의 총본산으로 선무도를 전승, 보급하고 있다. 불교무술 및 불교의방 전문지도자 양성을 위한 선무도 대학이 현재 설립중에 있다.

 

 

 ▲ 아래서 바라본 주불인 마애여래좌상이 위치한 암벽과 그 주변의 석굴 법당 전경

  ▲ 주불인 마애여래좌상(정면)

▲ 주불인 마애여래좌상(측면)

 

♣ 월성 골굴암 마애여래좌상

*보물 제581호

*소재지: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동 안동리 304

이 불상은 골굴암의 주존불로 동남쪽을 향한 암벽의 약 4m 높이에 새겨져 있다.

높다란 상투 모양의 머리와 뚜렷한 얼굴, 가는 눈, 작은 입, 좁고 긴 코의 독특한 이목구비와 얼굴 전체에 웃음을 띈 형태 등은 형식화가 진행된 9세기 신라불상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건장하지만 평면화된 신체, 얇게 빚은 듯 계단식으로 평행되게 한 옷 주름, 무릎에서 형식적으로 나타낸 물결 모양의 옷 주름과 겨드랑이 사이에 팔과 몸의 굴곡을 표시한 V자형 무늬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광배는 불꽃무늬를 장식되어 있다. '기림사사직기'에는 골굴암에 열두 굴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 불상은 그 주불인 듯 하며 만든 시기는 9세기경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겸재 정선이 그린 '경주골굴석굴도'에는 목조전실이 묘사되어 있으나 지금은 곳곳에 가구의 흔적만 남아 있다.

 

 

 ▲ 마애여래좌상이 있는 암벽 주변의 소굴들 전경

 ▲ 산신당 안내문

 ▲ 산신당

 ▲ 신중단

 ▲ 관음굴/규모가 큰 석굴의 법전

 ▲ 약사굴

 ▲ 지장굴

 ▲ 골굴사 안내도

 ▲ 주차장 입구의 골굴사 일주문

 ▲ 마애여래좌상이 있는 암벽 입구의 대적광전

 

 ▲ 골굴사의 부속 건물들

▲ 주차장에 위치한 전통찻집인 '다선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