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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慶州) 제1편/경북 경주

왕마구리 2008. 6. 16. 00:44

◀ 경주(慶州) 제1편 ▶

▲ 첫째날 첨성대 야경을 배경삼아...

 

【 일 정 표 】2008년 6월 12일(목)~13일(금) 1박2일

▷ 첫째날(2008년 6월 12일)

부천출발(06:15)→경주 삼불사주차장/배리석불입상 관광(11:44~12:06)→남산(금오산)산행→포석정(17:05~17:20)→최씨고택(17:45~17:53)→경주향교(18:01~18:15)→보문단지일주/석식(19:25~19:57)→대릉원주차장(20:08~21:50)/야경관광(대릉원/천마총-첨성대-임해전지/안압지-반달성-석빙고-첨성대-대릉원주차장)→감포항(22:40)/1박

▷ 둘째날(2008년 6월 13일)

감포항관광 및 식사(09:55~11:35)-(9km)→감은사지삼층석탑(11:52~12:10)-(13.1km)→기림사(12:26~13:26)-(3.9km)→골굴사(13:33~14:25)-(45.3km)→양동마을(15;23~16:40)-(13.2km)→정혜사지13층석탑(17:00~17:05)-독락당(17:07~17:22)-옥산서원(17:26~17:54)-(361.1km)→부천도착(23:30)

▶ 총 주행거리 : 873km

 

【 교 통 편 】승용차 이용

【 소요경비 】총 \306,140

1. 주유대 : \142,000

2. 주차료 : \3,500 (기림사 \1,500 + 대릉원 \2,000)

3. 입장료 : \7,000

    포석정:\500 + 첨성대:\500 + 대릉원:\1,500 + 안압지:\1,500 + 기림사:\3,000

4. 숙박료(감포호텔) : \40,000

5. 식대 : \64,000

    6/12 조식(고속도로휴게소) : \6,000

    6/12 석식(보문단지/맷돌순두부+손두부) : \12,000

    6/13 조식 겸 중식(감포항 횟집) : \41,000

    6/13 석식(북영천I.C.직전 식당/꽁국수) : \5,000

6. 고속도로통행료 : \29,640

7. 기타 잡비 : \20,000

 

【 여 행 기 】

1박2일간의 산행 및 여행경비로는 많은 비용이 들었으나 누구의 구속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코스를 잡아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그러나 몇 개의 관광지에서는 보수공사(감은사지 및 남산 산행중 석불좌상)와 현재 주민이 거주를 하는 관계(양동마을, 독락당)로 상세하게 관람을 하지 못하였고, 분황사는 입장시간(오후 6시)이 경과하여 입장을 못하였으며 기대를 가지고 실시한 야경관광은 조명이 기대치에 못미쳐 아쉬움이 남았다.

총 경비의 50%가 넘는 비용이 교통비인 점을 감안하면 1박2일이 아니라 2박3일로 계획을 잡아 토함산 산행과 2년 전 비가 내리는 가운데 관광하였던 토함산지구(불국사와 토함산 석굴암), 그리고 보문단지 내 밀레니엄파크와 세계문화엑스포공원을 관공하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이번 여행기에서는 위의 일정표 순서대로 각 관광지에서 찍은 사진과 현지의 안내판에 실린 내용을 위주로 남산 산행이후부터 3편으로 나누어 게재를 하기로 한다.(남산의 관광지는 '100대명산' 산행기 참조)

 

* 제1편 : 교동최씨고택-경주향교-대릉원일대 야경(대릉원+첨성대+안압지+반월성)

* 제2편 : 감포항-감은사지삼층석탑-기림사-골굴사

* 재3편 : 양동마을-정혜사지13층석탑-독락당-옥산서원

 

17:45~17:53=>교동최씨고택

 ▲ 최씨고택 정문

 

 

 

▲ 최씨고택 내부 전경들

 

현재 후손들이 거주를 하고 있어 건물 배치와 내부 구조 등을 세세하게 여기저기 보지 못하고 대문 안쪽에서 사진만 촬영하고 나오는 수박 겉�기식의 관람이 되었다. 대문 입구에 안내문은 있었지만 건물 배치도 등이 빠져 있어 안내문에 함께 그려져 있었더라면 고택관람에 많은 도움이 되고 좋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 ♣ 경주교동최씨고택

*경상북도 중요민속자료 제27호

*소재지: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69

이 기옥은 경주 최씨의 종가로 1700년경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월성을 끼고 흐르는 남천옆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았고 문간채, 사랑채, 안채, 사당, 고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는 99칸이었다고 하는데 사랑채와 별당은 1970년에 불타고 주춧돌만 남았다. 안채는 '口'자 모양이고 대문채는 '一'자 모양이다. 사당은 사랑채와 서당으로 이용된 별당 사이에 배치되어 공간적 깊이를 느끼게 한 특징이 있다. 조선시대 양반집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어 가치가 크다.

최씨집안이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서 이곳 교동으로 이주하여 정착한 것은 조선 중기무렵이다. 여기에서 12대 동안 만석지기 재산을 지켰고, 학문에도 힘써 9대에 걸쳐 진사를 배출하였다고 한다.

*독립유공자 최준선생 생가

문파 최준(1884~1970)선생은 이른바 9대진사 12대 만석의 마지막 부자로 이곳 교촌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영남의 대지주로서 조선국권회복단과 대한광복회에 군자금을 제공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원하였으며, 특히 대한광복회에서 재무를 맡아 총사령관 박상진 의사와 더불어 항일운동을 전개하다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심한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또 이곳 사랑채에서 백산 안희제(1885~1943) 선생과 함께 백산상회 설립을 결의하고 대표에 취임하여 비밀리에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 백범 김구 선생에게 거액의 군자금을 보내는 등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공적을 남겼다. 이밖에 선생은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해 문화사업에도 관심을 기울여 1920년에 경주고적보존회를 설립하고 1932년 정인보 선생 등과 '동경통지'를 편찬하는 등 신라문화의 유산을 지키고 널리 알리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해방 직후 선생은 나라를 이끌어 나갈 인재를 길러야 한다며 모든 재산을 기증하여 계림대학과 대구대학을 설립하니, 곧 오늘의 영남대학교 전신이다.

정부는 선생의 공적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제 애국애족의 일념으로 일생을 항일운동에 헌신한 선생의 숭고한 정신과 실천적 삶을 여기 기록하고 길이 후세의 귀감으로 삼고자 한다.

 

18:01~18:15=>경주향교

▲ 경주향교 출입문

 ▲ 대성전

 ▲ 명륜당

 ▲ 명륜당과 우측의 동재

 ▲ 동재 우측으로 보이는 경주향교 출입문

▲ 동재 뒤쪽의 담

 

♣ ♣ 경주향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1호

*소재지: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경주향교는 본래 신라 신문왕 2년(682)에 창설된 국학(지금의 국립대학)이 있던 곳이며, 고려시대에는 향학으로, 조선시대에는 역시 향교로 이어져 지방 교육 기관으로서의 구실을 해 왔다.

대성전과 동무, 서무는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받드는 곳이며, 강당인 명륜당과 학생들의 거처인 동재, 서재는 강학을 하는 곳이다.

경주향교가 처음 지어진 시기는 잘 알 수 없으나, 조선 성종 23년(1492)에 성균관을 본따 중수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선조 33년(1600)에 대성전과 전사청을 중건하고 선조 37년(1604)에 동무, 서무를 광해군 6년(1614)에 명륜당과 동재, 서재를 중건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20:08~21:50=>대릉원↔임해전지/안압지(야경관광)

     대릉원주차장(주차료:\2,000)에 주차를 하고, 대릉원(입장료:\1,500)을 먼저 관광을 하였다. 몇 개의 고분들이 있는 공원으로 천마총 고분이 발굴 당시의 유물들을 일부 전시하여 개방되어 있다.

대릉원을 빠져 나와 주차장을 가로 질러 도로를 건너면 '세계유산 경주역사유적지구'란 표지석이 있고, 산책로 우측으로 몇 기의 고분과 계림의 나무 숲이 보인다. 대릉원주차장에서 약 300m 떨어진 거리에 위치해 있는 첨성대가 야간의 조명 아래 멀리서도 한 눈에 들어온다.

첨성대 앞에는 삼거리가 있는데 직진은 안압지 방향이고, 우측은 반월성과 계림을 거쳐 경주향교까지 연결되는 산책로이다. 물론 우측의 산책로를 이용하여 반월성과 석빙고를 거쳐 안압지로 갈 수 있으나 이 산책로는 안압지를 구경하고 대릉원주차장으로 되돌아 올 때 이용하였다. 첨성대(입장료:\500)를 잠시 둘러보고 산책로를 따라 계속 진행하면 우측으로는 낮은 구릉지대를 형성하고 있는 반월성이 보이고 반월성 내에 석빙고가 있다.

♣ 석빙고

보물 제66호로 길이 19m, 너비 6m, 높이 5.45m의 1000여개의 돌을 쌓아 만등 직사각형의 석실이다. 조선 영조 14년(1738)에 만든 얼음창고로 처음에는 현재의 위치에서 서쪽으로 약 100여m 떨어진 곳에 처음 만들었다가(옛터가 있음) 3년 후 영조 17년(1741)에 현재 위치로 옮겼다.

산책로가 끝나고 도로가 나오면 우측으로는 반월성 산책로가 있으며 도로 건너에 안압지가 있다. 도로 건너 우측으로 안압지 철제 담을 따르면 주차장과 안압지 입구가 나타난다.

안압지(입장료:\1,500) 내부에는 3개의 전각과 연못인 안압지가 복원되어 있으며 경주에서 야경이 아름다운 관광지로 꼽히는 곳이다. 시간적 여유만 있었더라면 주간에도 방문하여 주야의 모습을 비교하였더라면 금상첨화였을텐데 아쉬움이 남았다.

안압지 관광을 마치고 대릉원주차장으로 되돌아가는 코스는 반월성을 따라 첨성대로 향하는 산책로를 택하였다. 밤 늦은 시간이라 계림을 보지 못하고 대릉원주차장에서 차량을 회수하여 35.1km 떨어져 있는 감포항으로 향하며 첫날 일정을 마무리하였다.

 

♣ ♣ 경주동부사적지대

*사적 제161호

*소재지:경상북도 황남동 104-1

이 일대는 동서로는 안압지에서부터 교동까지 남북으로는 월성 남쪽의 남천에서 현재 고분공원 앞 첨성대에 이르는 광대한 사적지대이다.

신라 왕경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월성, 안압지, 첨성대, 계림 등의 중요한 사적이 많을 뿐만 아니라 내물왕릉을 비롯한 수십 기의 고 신라고분이 완전한 형태로 밀집되어 있는 곳이다. 또한 이곳 지하에는 봉토가 없어진 많은 고분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지역은 경주에서도 신라의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 고분군

▲ 천마총 입구

 

♣ ♣ 경주 황남리고분군

*사적 제40호

*소재지:경상북도 경주시 황남동 53

경주시내 황남동 일대에 분포되어 있는 신라 초기의 무덤들로 일부는 대릉원 구역안에 있다. 일제강점기에 붙여진 일련번호 90~114, 151~155인 원형으로 흙을 쌓아올린 30여기의 무덤이다. 큰 무덤은 돌무지 덧널무덤이고 주변에는 봉분이 없어진 작은 무덤이 있다.

대릉원 안에는 전 미추왕릉을 비롯하여 천마총과 황남대총 등이 있다.

1973년에 발굴 조사된 천마총은 지름 47m, 높이 12.7m로 금관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이 나왔다. 당시 천마도가 그려진 말안장 드리개가 출토되었다. 때문에 '천마총'이라 이름하여 내부를 공개하고 있다.

또한 1973년부터 1975년까지 발굴 조사된 황남대총은 남북길이 120m, 동서길이 80m, 높이 23m의 거대한 쌍무덤으로 남쪽 무덤에서는 금동관과 남자의 뼈 일부 및 많은 유물이 나왔다. 북쪽 무덤에서도 금관과 '부인대'라는 글씨가 있는 은팔찌 등 많은 유물이 나왔다. 남쪽 무덤의 주인은 남자, 북쪽 무덤의 주인은 여자로, 부부의 무덤을 붙여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야간조명을 받은 첨성대

 

♣ ♣ 첨성대

*국보 제31호

*소재지: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839-1

이 첨성대는 신라 선덕여왕(재위632~647) 때 만들어진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 관측대이다.

화강석을 가공하여 조성한 기단위에 재단의 석단을 원통형의 곡선으로 쌓아 올리고, 그 위에 장대석을 우물정자(井) 형으로 축조하여 정상부에서 천문을 살피도록 시설되어 있다. 정남쪽의 석단에는 아래로부터 제13단과 제15단 사이에 네모난 출입구가 있어 내부로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고, 이 출구 아랫부분 양쪽에는 사다리를 걸쳐 오르내리도록 되어 있다. 이 곳을 통해 꼭대기까지 올라가 하늘을 관측했던 것으로 보인다.

규모는 밑면의 지름이 5.17m, 높이가 9.4m이며 지대석 한변의 길이는 5.35m이다. 신라시대의 석조물로 직선과 곡선이 잘 어우러진 안정감 있는 건축물이다.

 

 ▲ 안압지에서...

 

 

 

 

▲ 임해전지/안압지의 야경

 

♣ ♣ 경주 임해전지

*사적 제18호

*소재지: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26-1

이곳은 통일신라시대 별궁안에 있던 것으로 그 안에는 임해전을 비롯한 여러 부속건물과 정원이 있었다.

신라 문무왕 14년(674)에 궁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귀한 새와 기이한 동물들을 길렀다. 임해전은 931년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다는 등의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군신들의 연회나 귀빈 접대 장소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못 이름은 원래 월지였는데 조선시대에 폐허가 된 이곳에 기러기와 오리가 날아들어 안압지라 부르게 되었다.

1975년 준설을 겸한 발굴조사에서 신라때 축조되었던 안압지의 모습은 거의 확인하였고, 임해전터에서 출토된 보상화문전에 새겨진 기년명으로 궁궐의 축조연대를 확인 할 수 있었다. 임해전은 별궁에 속해 있던 건물이지만 그 비중이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이며, 안압지는 신라 원지를 대표하는 유적지이다.

 

22:35=>감초항/감포호텔(숙박)

     동해 일출과 새벽 부두에서 벌어지는 어시장 경매를 볼 계획으로 멀리 감포항을 숙소로 정하였으나 새벽부터 강행군을 한터라 피곤하여 아침 일찍 일어나게 될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일. 바다가 조망되는 방을 숙소로 정하고 첫째날 여정을 마무리하고 내일을 기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