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은 관광명소/영남권

문경새재(聞慶鳥嶺)/경북 문경

왕마구리 2008. 11. 10. 13:02

◀ 문경새재(聞慶鳥嶺) 옛길 트래킹 ▶

 

 

 

▲ 문경새재 옛 과거길을 따라서...

 

【 트래킹일자 】 2008년 11월 2일(일)

【 트래킹코스 】 고사리주차장/충북 괴산군→조령산자연휴양림→조령제3관문(조령관)/충북과 경북의 경계→책바위→동화원→이진터→색시폭포→귀틀집→바위굴과 새재우→조령제2관문(조곡관)→소원성취탑→용추/교귀정→주막→상처난 소나무→조령원터→지름틀바위→KBS촬영장→조령제1관문(주흘관)→주차장/경북 문경시

【 교 통 편 】 45인승 전세버스 이용

<< 갈 때 >> 부천시청앞(05:25)→송내역(05:35~05:50)→부평역-(인천지하철 1호선 환승)→간석오거리역(06:19~06:32)/교원공제앞-(도시외곽순환도로)→조남분기점-(영동고속도로)→여주휴게소/여주분기점(07:45~08:23)-(중부내륙고속도로)→연풍I.C.→고사리주차장(09:30)

<< 올 때 >> 문경새재주차장(17:00)→문경새재I.C.-(중부내륙고속도로)-(갈때의 역순)→부천역(22:20)

※ 인천 삼화산악회 부봉산행팀과 함께 출발하여 산행을 하지 않고 별도로 트래킹을 실시

【 여 행 기 】

백두대간과 신선봉~마역봉 연계산행때 조령3관문을 3~4차례 방문하였었고, 주흘산 산행과 일반 모임 등으로 조령 제1, 2관문을 별도로 몇 차례 방문을 해 보았지만 제3관문에서 제1관문으로 이어지는 문경새재길 전체를 트래킹해 본적이 단 한차례도 없어 이번에 인천 삼화산악회에서 제3관문을 기점으로 부봉을 거쳐 제1관문으로 하산하는 등산코스로 산행을 실시하기에 이에 동참을 하여 문경새재 옛길 트래킹을 실시하기로 하였다.

트래킹 코스는 '한국의 아름다운 길' 로 선정된 곳으로 충북 괴산군 고사리주차장을 출발하여 충북과 경북의 도 경계선인 제3관문에 접근을 하고, 제3관문부터 시작되는 문경새재도립공원 문경새재 옛길인 과거길과 영남대로/새재길을 따라 제1관문까지 산책을 하며 내려가게 되는 코스이다.

전체 산책로 거리는 약 9.2km(색시폭포를 다녀오면 9.8km)이며 각 주요 구간별 거리를 표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각 구간별 거리(이정표 기준) : 고사리주차장-(2km)→제3관문-(1.2km)→동화원-(1.3km)→색시폭포갈림길←(0.3km)→색시폭포-(1.2km)→제2관문-(3km)→제1관문-(0.5km)→주차장/관리사무소

산행팀이 하산하는 시간에 맞추어 새재길 트래킹이 이루어진 관계로 시간적 여유가 충분하여 여유를 가지고 진행을 하여 각 관광지별 이동시간이나 관람시간 등은 별 의미가 없을 것으로 판단되어 기재를 하지 않기로 한다. 여유있게 쉬면서 산책하듯 진행을 하여 총 6시간 후 주차장 인근의 식당가에 도착을 하였고 식당에서 늦은 점심식사와 동동주 한 잔으로 가볍게 뒤풀이를 하고 도사리주차장 출발시간 기준 7시간 후 버스를 타고 문경새재주차장을 빠져 나오며 일정을 마무리하였다.

여행기에서는 트래킹을 하며 찍은 사진과 함께 현지 안내문과 수집한 자료를 일부 참고하여 설명을 겯들여 작성하기로 한다.

 

♣ ♣ 문경새재 위치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 일원

* 동경 128º 03' 북위 36º 45'

* 면적 : 5.494㎢ (자연보존지역:0.683㎦, 자연환경지구:4.448㎦, 밀집마을지구:0.126㎦, 집단시설지구:0.237㎦)

 

♣ ♣ 문경새재 연혁

-조선초기(태종) : 조령로 개척

-선조27년(1594) : 제2관문(중성 조동문 주서관 조곡관) 설관

-숙종34년(1708) : 제1관문(주흘관 초곡성 동성문 하성문) 설관

                          제3관문(조령관 영성 조령문 상성문) 설관

-조선후기 : 산불됴심비 건립 및 조령산성 증, 개축

-1966년3월22일 : 사적 제147호 지정(문경관문)

-1974년12월10일 : 지방기념물 제18호 지정(주흘산 조령관문 일원)

-1974~1977년 : 3개 관문 보수 및 복원

-1979년5월24일 : 국민관광지 경북 제1호 지정

-1980년4월1일 : 문경새재관리사무소 개소

-1981년6월4일 : 문경새재도립공원 지정

-1982년5월28일 : 문화재보호구역 지정

-1983년4월4일 : 공원개발 기본계획 제72호 고시

-1997년4월27일 : 문경새재박물관 개관

-1997년10월23일 : 경북개도 100주년 타임캡슐 매설

-1999년6월9일 : 교귀정 중창

-1999년7월2일 : 신길원 현감 충렬사 이건

-2000년2월23일 : KBS 촬영장 개장

-2002년6월27일 : 문경새재 야외공연장 개장

-2002년7월7일 : 문경새재 상징문 건립

-2002년12월11일 : 전통삼문 건립

-2004년2월28일 : 선비의 상 건립

 

♣ ♣ 문경새재길의 단풍

 

 

 

 

♣ ♣ 조령산자연휴양림

▲ 조령산자연휴양림 입구

 

고사리주차장을 출발하여 신선봉 등산로 입구를 지나 Y자 갈림길인 조령산자연휴양림 입구에서 일반적으로 좌측의 포장도로를 따라 조령제3관문까지 접근을 하는 것이 보통인데 이 경우 약 1.5km에 달하는 거리를 포장도로만 따라가게 되어 지겨울 뿐만 아니라 산책의 의미를 느낄 수가 없다.

그래서 조령산자연휴양림으로 통하는 우측의 산책로를 따라 진행하는 것이 좋으며, 이 산책로를 따르면 운치있고 낙엽이 덮여 있는 넓은 임도가 조령제3관문까지 이어지게 된다.

주차장을 출발하여 조령산자연휴양림 내로 통하는 산책로를 따르면 약 25분 후에 휴양림 내 이정표(↖3관문 850m,↗3관문 900m)가 설치된 갈림길을 만나게 되는데, 여기서도 일반인들은 좌측의 길로 들어 다시 조령산자연휴양림 입구에서 이어져 온 포장도로로 올라 3관문으로 향하게 되는데, 그럴 경우에도 제대로 조성된 조령산자연휴양림 내의 산책로를 맛보지 못하게 된다.

갈림길에서 우측의 길로 들어 진행하면 오르막길인 넓은 임도가 이어지고, 팔각정자와 사계절 눈썰매장 그리고 산림욕장을 거쳐 조령제3관문 입구에서 고사리주차장에서 이어져 온 포장도로와 만나게 된다.

 

 

▲ 휴양림내 숲속의 집 

 

▲ 산 중턱 임도에 위치한 정자 

 

 

 

 

 

▲ 조령산자연휴양림 내 조령제3관문으로 이어지는 산책로

 

【 문경새재(聞慶鳥嶺) 】

♣ ♣ 문경새재의 유래

백두대간의 조령산과 마역봉(마패봉) 사이에 위치한 이 재는 예로부터 한강과 낙동강유역을 잇는 영남대로상의 가장 높고 험준한 고개로 사회, 문화, 경제의 유통과 국방상의 요충지였다. 새재는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 옛 문헌에 초점(草岾)이라고도 하여 '풀(억새)이 우거진 고개' 또는 하늘재와 이우리재 사이의 '새(사이)재', 새(新)로 된 고개의 '새(新)재' 등의 뜻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뒤에 이곳에 3개(주흘관, 조곡관, 조령관)의 관문(사적 제147호)을 설치하여 국방의 요새로 삼았다. 이곳은 자연경관이 빼어나고 유서 깊은 유적과 설화, 민요 등으로 이름 높은 곳이다. 이곳에는 나그네의 숙소인 원터, 신구 경상도감찰사가 관인을 주고 받았다는 교귀정터만 남아있는 것을 1999년 중창하였고, 옛날에 산불을 막기 위하여 세워진 한글표석 '산불됴심' 비(지방문화재자료 제226호)가 남아있다.

 

▲ 1999년 새롭게 중창된 교귀정

 

▲ 교귀정 안내표석 

 

▲ 교귀정 앞의 이정표 

 

♣ 교귀정(交龜亭)

제1관문과 제2관문 사이에 위치한 정자로 신구 경상관찰사가 관인을 인수인계하던 교인처이다.

성종조에 문경현감 신승명이 건립하였으나 조선 후기에 손실되어 터만 남아 있던 것을 1999년 새롭게 복원하여 현재에 이른 것이다. 경관이 아름답고 용이 하늘로 올랐다는 전설을 지닌 용연이 잘 바라다 보이는 길가에 자리를 잡고 있다.

자연석으로 높지막하게 축대를 쌓아 터를 높이고 길과 나란하게 정자 한 동을 앉힌 다음 앞마당으로 오르내리는 계단을 좌, 우 양쪽에 두었다.

정자는 윗면이 평평한 자연석 초석을 깔고 그 위에 두리기둥을 세워 축조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2익공의 팔작지붕 구조로 지어졌다. 정면 어칸이 270cm이며, 양 퇴칸은 240cm로 어칸이 퇴칸보다 30cm 넓으나, 측면은 210cm로 동일하다. 지면에서 바닥을 높여 우물마루를 깔고 건물의 정면 어칸쪽에 자연석 장대석을 층층히 깔아 4단의 계단을 만들어 정자를 오르내릴 수 있게 하였다.

▲ '산불됴심' 옛 한글 표석

♣ 산불됴심비

이 비는 상초리 산42-8번지에 있다. 교귀정을 지나 제2관문 못미쳐 노변의 오른쪽에 세워져 있다. 다듬지 않은 돌(높이 183cm, 폭 75cm 정도)에 "산불됴심"이라고 한글로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퍽 오래된 조선조 후기의 것으로 추측된다.

정조 때 별장이 잡인의 출입을 단속할 때 역시 관방유지를 위해서는 산불조심이 무엇보다 급선무였고, 일반서민이 잘 알도록 한글 비를 세우지 않았나 생각된다. 자연보호의 시금석이고 '조심'을 고어체인 '됴심'으로 기록한 것으로 보기 드문 한글 비이며 지방문화재 자료 제226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역사에 얽힌 갖가지 전설을 비롯하여 임진왜란과 신립장군, 동학과 의병이 남긴 사담이 골골이 서리어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이 일대를 1974년 지방기념물 제18호, 1981년 도립공원으로 지정, 보호하고 있어 전국에서 관광객이 많이 찾고 있는 곳이다.

 

♣ ♣ 문경새재 개관

우리나라의 큰 산줄기인 백두대간이 태백산, 소백산을 거쳐 경상도와 충청도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죽령을 지나 대미산, 포암산, 주흘산, 희양산, 대야산, 청화산, 속리산으로 이어져 지리산까지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삼국과 고려 때에는 문경 관음리에서 충북 중원군의 수안보로 통하는 큰길인 하늘재(계립령)이 있었고, 문경 각서리에서 괴산군 연풍으로 통하는 소로인 이화령이 1925년 신작로로 개척되어 지금의 국도 3호선이 되었다.

옛날에는 1978~1979년 확장 포장된 이우리재(이화령)와 가은에서 충북 괴산으로 연결된 불한령, 문경시 농암에서 충북 삼송으로 다니던 고모령 등이 있어 신라와 고구려, 신라와 백제의 경계를 이루었다고 전한다.

이곳이 영남에서 한양으로 통하는 조선시대의 가장 큰길(영남대로, 嶺南大路)이었던 곳이며, 옛날의 유지로는 원터, 교귀정, 봉수터, 성터, 대궐터 등이 잔존하고 있다. 조령로의 번성을 말해 주듯 조령로변의 마애비는 관찰사, 현감 등의 공적을 새겨 놓았으며, 주흘관 뒤에는 선정비, 불망비, 송덕비가 비군을 이루고 있다. 주위의 주흘산, 조령산, 부봉과 각 골짜기마다 동,식물자원이 자연 그대로 보존된 관광명소이다.

 

♣ ♣ 조령산성

1. 축성(築城)

임진왜란 때 신립장군이 충주 달천에서 배수진을 쳤으나 패하자 조령로를 막지 못한 것을 크게 후회하고 방비가 없음을 한탄하였다 한다. 명나라 측에서도 선조가 안주에 파천하여 있을 때 백상루에서 유원외가 선조에게 조령관 설비의 필요성을 역설하게 하였다. 그렇지만 전란에 따른 물자의 결핍으로 인해 중국의 산해관처럼 하자느니 조령만이 천험은 아닌데 다른 곳은 설관하지 않아 되겠느냐는 등 논의만 거듭하게 되었다.

결국 평안감사 이원익, 병사 신집, 우승지 유몽정, 주서 김상설, 검열 조유한 등의 논의로 죽령과 조령에 설관하기 위한 자료수집차 화공 12인을 중국에 파견토록 선조의 지시가 있었으나 파견이 중지되었다.

선조26년 12월 영의정 류성룡이 성에 의지하여 승전한 경험을 들어 조령 설관을 다시 주장하여 선조도 조령 삼관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류성룡은 수문장 신충원의 조령지세와 설관 및 설관 후 파수 계책에 대한 것을 듣고 선조27년(1594) 2월에 상주하게 하였다. 조령은 나라의 문과 같아 충주를 지키자면 조령을 막아야 되고 충주가 함락되면 한강수백리를 자연히 잃게 된다. 충주 사는 수문장 신충원이 조령지세를 잘 알고 있다.

 

조령의 영상에는 잡로가 많아 막기가 힘들고, 영에서 동쪽으로 10리를 내려가면 깎아지른 절벽이 양쪽으로 솟고 그 가운데로 물이 흘러 행인들이 나무를 걸치고 건너야 했다. 이와 같은 곳이 무려 24곳이나 되었다. 또 응암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에 설관하여 적이 이곳에 이를 때 다리를 철거하고 물을 막았다 트면 감히 발붙이기가 어렵고 궁노와 능철화포 등을 쏘면 백여명이 지킬 수 있다. 문경 동쪽에는 구로가 있어 조령의 서쪽에 이르게 되나 백년간 사용치 않아 산림이 울창하고 하늘이 보이지 않아 다니기 어렵고 문경 서쪽에도 소로가 연풍현의 동쪽에 닿으나 워낙 험준하여 여기도 수십인이면 지킬 수 있다. 연풍읍과 수하촌의 땅이 기름지니 승군, 산척 백여인을 얻어 둔전경종하여 군량에 충당하고 화약총포를 얻어 주야로 조련하면 정군을 얻을 수 있으니 농자를 주어 파견하자고 건의하여 선조의 윤허를 받았다.

신충원은 곧 사람을 모아 축성을 하였으니 선조27년 10월의 일이다. 용장에게 수백명을 주어 지킨다면 대병이 쳐들어 온데도 전일같이 유린당하지 않을 것이다. 신충원이 성을 쌓고 난 후 죽령에도 축성케 하면 좋은 성과를 얻을 것 같다는 상계가 있었으나 물력이 부족하여 시작하지 못했다. 비번사에서는 징천인이 축성의 거역을 마쳤다고 포상을 하자고 건의하여 선조의 윤허를 받았다. 논의뿐이던 설관이 수문장에 의하여 완공되자 요새방어를 위하여 용장의 배치 건의가 있었고 비변사에서는 경상좌도에서 방어를 맡으라는 등의 논의가 계속되었다.

 

선조30년(1597) 2월 신충원이 파수관으로 임명되어 응암의 일자성을 쌓고 가운데 문을 세워 고개 밑을 내려다보게 하는 축성이 끝났다. 신충원은 훈련원 주부로 승진하고 조령은 중요 관방으로 방어책임이 분담되었으나 임란이 끝나자 조령 수어에도 관심이 없다가 인조16년 왜구의 동란이 심상치 않아 비국당상에서 조령 등 남관요충의 수호계책이 논의된 적이 있다.

 

축성공사는 문경현감 이중창과 영비 손영대에 의하여 수마석과 잡석소편으로 쌓아 가자되었다. 그러나 숙종38년 5월에 축성상태가 부실하여 무너졌다는 서종태의 보고에 의하여 현감과 영비는 삭탈당하고 논죄되었다. 그 규모는 기록에 따라 다르나 남북 18리 18,509보인가하며, 남북 8리에 둘레 18,509보로도 기록되고 있다. 성이 3곳의 골짜기를 막고 있는데 하나는 고개 정상에 있어 충청, 경상 두 도의 경계를 이루며 조령관이라고 하고, 하나는 응암에 있는데 신충원이 쌓은 옛 성으로서 조동문이라 하며, 하나는 초곡에 있는데 주흘관이라 한다. 위의 세 곳은 모두 홍예문이 있으며 대로를 통하도록 되어 있다. 성내에서는 여러 갈래의 개천이 있고 항상 맑은 물이 흘러간다. 제1,2,3관문은 양쪽 산골짜기에 위치하고 있다. 관문 좌,우의 성벽은 능선을 따라 우회하며 높이 솟은 봉우리 6부 능선쯤에서 끝났다가 다음 골짜기로 이어져 있다.

 

2.설진(設鎭)

주흘관에 있는 조령편람 정묘 1927년 9월에 정규원 문경군수가 지은 현판에 의하면 선조5년에 설진하여 570여명을 배치하였다고 하나 조선실록이나 다른 기록에서는 전혀 설진 기록이 없다. 그러나 조선편람을 개첨한 것이 일제강점기이고 원귀3년이라는 일본연호가 있다. 이는 선조5년부터 설진한 천험의 요새가 임란에 쉽사리 방어치 못했음을 강조하여 조선의 무방비와 일본의 전공을 자랑하기 위한 가증스러운 기록으로 생각된다. 문경현지에 의하면 영조28년(1752)에 설진하였음을 알 수 있다.

 

3,수성(修城)

축성 후 3년이 지난 숙종38년(1712) 5월에 서종태의 보고에 의하면 수마석과 잡석으로 쌓아 성의 과반이 무너졌음을 알 수 있다. 영남어사 여광주에 의하여 수보 논의가 제기되고 국가존망이 달린 막중한 곳이라 경성의 수보규칙에 따르자고 진언되나 시행하지 못했다. 주흘관의 향우측 성벽의 각기에 의하면 별장 이인성이 1721년 개축했다. 그 아래의 각기에는 도석수 송성원, 이영우, 강두정 등이 있으니 앞의 성벽 각기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 개축 시 또는 축성할 때 기여한 도석수로 짐작이 된다. 주흘관 중수기에 의하면 1752년(영조28년), 1772년(영조48년), 1840년(현종6년)에 중수한 기록이 있다.

 

주흘관 향우측 성황사 부근의 각기는 무진년(영조24년/1748, 순조8년/1808) 3월에 별장 오해림 등이 개축한 사실이 기록되어 잇다. 주흘관 향좌측 성벽 각기에서는 고종17년(1880) 별장 신영식 등의 개축사항을 알 수 있으며, 주흘관 향우측 성벽 각기로 고종23년(1886)에도 별장 김순기 등이 개축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성벽에 기록된 몇 자의 글이라 개축한 규모에 대해서는 알 수 없어 아쉽다. 박성호는 1880년에는 감역으로 1886년에는 감관으로 수성에 참여하였다.

그후 1923~1926년 사이에도 제1관문이 수선되었으며, 경진년(1940)에도 제1관문을 중수한 바 있으나 조동문, 조령관의 수성기록은 찾을 수 없다. 조령편람에 의하면 2,3관문은 1907년 의병의 토벌대에 의하여 훼손되었고, 제1관문인 주흘관이 여러 차례 보수로 옛 모습을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다.

 

♣ 조령제3관문(영남제3관)-조령관(鳥嶺關)

▲ 조령제3관문 앞에서...

 

▲ 조령제3관문/괴산방향 

 

▲ 조령제3관문/문경방향 

 

 

새재정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쪽의 적을 막기 위하여 선조 초에 쌓고 숙종34년(1708) 때 중창하였다. 1907년 훼손되어 육축만 남고 불탄 것을 1976년 홍예문 및 석성 135m와 누각을 복원하였다. 누각은 정면이 3칸, 측면이 2칸이며, 협문이 2개 있으며 팔작지붕이다.

홍예문은 높이 4.5m, 폭 3.2m, 길이 1.85m이고 성벽의 높이는 2~3m, 폭 2~3m, 길이는 동측이 400m, 서측이 400m이며, 대문의 높이는 3.9m, 폭 3.56m, 두께 19cm이다.

 

▲ 조령제2관문 가는 길

 

♣ 조령제2관문(영남제2관)-조곡관(鳥谷關)

▲ 조령제2관문

 

▲ 조령제2관문/제1관문 방향에서 본 전경

 

▲ 조령제2관문/제3관문 방향에서 본 전경 

 

 

선조27년(1594)에 충주인 신충원이 축성한 곳으로 중성이라고도 한다. 숙종조에 관방을 설치할 때 옛 성을 개축하였으나 관은 영성(제3관문)과 초곡성(제1관문)에만 설치를 하고 이곳에는 조동문 또는 주서문을 설치하였다.

그후 1907년 훼손되어 1975년에 복원하였다. 이렇게 복원한 문루를 옛 이름 조동문이라 하지 않고 조곡관이라 개칭하였다. 누각은 정면이 3칸, 측면이 2칸이며 좌,우에 협문이 2개 있고 팔작지붕이다. 홍예문은 높이가 3.6m, 길이 5.8m이다. 대문의 높이는 3.6m,폭 3.56m, 두께 11cm이다. 좌,우의 석성 높이는 4.5m, 폭 3.3m, 길이 73m이고, 좌,우 성벽의 높이는 2m, 폭 2~3m, 길이는 동쪽이 400m, 서쪽이 100m이다.

 

♣ 조령제1관문(영남제1관)-주흘관(主屹關)

▲ 조령제1관문 앞에서...

 

 ▲ 조령제1관문/관리사무소 방향에서 본 전경

 

 ▲ 조령제1관문 우측 성벽과 수구문 전경

 

 

남쪽의 적을 막기 위해 숙종34년(1708) 설관하였으며 영남제1관 또는 주흘관이라고 한다. 정면 3칸과 측면 2칸, 협문 2개가 있고 팔작지붕인 홍예문은 높이가 3.6m, 폭 3.4m, 길이 5.4m이며 대문의 높이는 3.6m, 폭 3.56m, 두께 11cm이다. 좌,우의 석성은 높이 4.5m, 폭 3.4m, 길이 188m이고, 부속 성벽은 높이가 1~3m, 폭이 2~4m이다. 길이는 동쪽이 500m, 서쪽이 400m로 개울물을 흘러 보내는 수구문이 있으며 3개의 관문 중 옛 모습을 가장 잘 지니고 있다.

 

♣ ♣ 문경새재의 기타 유적 및 명소

 

♣ 책바위+감투바위+칠성바위

▲ 책바위 주변의 전경

▲ 책바위

 

책바위이야기

엣날 인근에 살던 어느 큰 부자가 자식이 없어 걱정인지라 하늘에 지성을 올려 천신만고 끝에 아들을 얻었으나 자라면서 점점 몸이 허약해서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었다. 몸을 고치고자 수소문 끝에 유명하다는 문경의 도사에게 물으니 "당신의 집터를 둘러 싼 돌담이 아들의 기운을 누르고 있으니 아들이 직접 담을 헐어 그 돌을 문경새재 책바위 뒤에 쌓아 놓고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올린다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오"라고 일렀다.

이후 아들은 돌담을 헐고 삼년에 걸쳐 돌을 책바위까지 나르니 허약하던 몸이 어느새 튼튼해졌고 공부도 열심히 하여 결국 장원급제까지 하였다. 이후 이곳을 넘나들던 과거객들이 책바위 앞에서 소원을 빌면 장원급제 한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지금까지도 건강과 장원급제를 기원하는 영험스러운 곳으로 널리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으며, 특히 입시철이면 소원성취를 비는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 책바위 뒷편의 감투바위 

 

▲ 책바위 앞쪽에 놓여있는 칠성바위인 일곱개의 돌들 

 

 

 

♣ 영남대로(금의환향길)

 

 

 

 

▲ 영남대로인 금의환향길/넓은 비포장 차도처럼 편안한 산길

 

♣ 동화원과 이진터

▲ 동화원/부봉갈림길의 이정표

▲ 동화원터

▲ 동화원휴게소 전경

 ▲ 이진터의 이정표

▲ 이진터

 

이진터

임진왜란 때 신립장군이 농민군 제2진을 설치했던 장소이다. 이곳 일대에 허수아비 병사를 세워놓고 충주 탄금대로 이동을 하였는데 허수아비 조선 초병의 머리위에 까마귀가 앉은 것을 보고 왜군이 맘 놓고 새재를 넘었다는 얘기가 전하는 곳이다.

 

♣ 색시폭포

 

 

▲ 색시폭포 가는 길

▲ 색시폭포

 

색시폭포

이진터를 지나 제2관문으로 향하는 영남대로 길목 우측으로 300m 떨어진 계곡에 위치해 있으며 입구에 이정표와 안내문이 설치되어 있다. 가을 가뭄으로 계곡에 물이 말라 폭포수는 구경할 수 없었으나 호기심에 다녀왔다.

 

조령산 줄기와 숲에 가려져 새색시의 수줍은 듯한 모습으로 그 자태를 감추고 있으며 겨울에는 큰 빙벽을 형성하여 장관을 이룬다. 3단의 큰 폭포와 여러 단의 작은 폭포로 이루어진 정상은 평평한 구릉인데 양지쪽에는 다듬은 듯한 큰 암벽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그 끝부분에는 자그마한 동혈이 있으며 건너편 쪽에는 또 하나의 바위가 마주하고 있다.

시민 공모로 색시폭포라 이름 지어졌으며 주변 경관과 잘 어우러져 많은 관광객이 즐겨 찾고 있다.

 

♣ 귀틀집, 소원성취탑 그리고 주막

▲ 귀틀집

▲ 소원성취탑

▲ 주막

 

♣ 바위굴과 새재우

▲ 바위굴

 

바위굴과 새재우 전설

먼 옛날 새재길을 지나던 길손이 갑작스런 소나기를 만나 이 바위밑에 들어오니 마침 과년한 처녀가 이곳에서 비를 피하고 있어 두 남녀가 깊은 인연을 맺고 헤어졌다. 그후 처녀가 아이를 낳아 십수년이 흘러 아이가 성장하니 주변에서 아비없는 자식이라 놀림이 심하므로 어머니에게 아버지의 내력을 물은 즉 자초지정을 이야기하여 주며 아비의 엉덩이에 주먹만한 검은 점이 있다고 하였다.

그후 아이는 아버지를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던 중 어느 깊은 산골에서 세찬 호우를 만나 주막에 들었는데 먼저 들어 있던 중년의 선비가 말하기를 "어허 그 빗줄기가 마치 새재우 같구나" 함으로 아이가 짚이는 바 있어 "새재우"가 무슨 뜻이냐고 물은 즉 어머니와 같은 얘기를 함으로 아이가 자신의 내력을 말하고 확인한 즉 부자지간임을 알게 되어 아버지를 모셔 와 행복하게 살았다고 하며 지금도 청춘남녀가 이곳에 들면 사랑과 인연이 더욱 깊어져 평생을 헤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 상처난 소나무

▲ 상처난 소나무

 

"V"자 모양의 이 상처는 일제말기(1943~1945)에 자원이 부족한 일본군이 한국인을 강제로 동원, 에너지원인 원료로 사용하기 위해 송진을 채취한 자욱으로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그 상처는 아물지 않고 있다.

 

♣ KBS드라마 '왕건' 촬영장소

▲ 촬영장소 안내문

▲ 촬영장소였던 계곡의 넓은 암반

KBS 대하드라마 '왕건'의 '궁예 최후의 장면'을 촬영했던 장소이다.

 

♣ 조령원터

▲ 조령원터 입구

 

▲ 조령원터 안의 움막 

 

▲ 조령원터 석축 돌담 

 

 

조령원터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 447-1번지 일대의 문경새재 제1관문에서 제2관문으로 향하는 해발 290m 지점의 영남대로변에 위치해 있으며 제1관문으로부터 1.3km 떨어진 지점에 있다.

전체 면적은 1,980㎥(600평)이며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돌담은 너비 2.8m~3m, 높이 2.9m내외이고, 동쪽 57.5m, 서쪽 53m, 남쪽 57.5m, 북쪽 37.7m의 대칭변 길이가 모두 다른 남북으로 길게 쌓여진 장방형이다. 서쪽 돌담 중간에 문지가 남아 있는데 돌담을 성벽의 육축모양으로 마무리하고 그 사이에 2개의 방형석주를 문설주로 세웠다.

고려와 조선조 공용으로 출장가는 관리들의 숙식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공익시설이었으며 조선 후기부터는 일반 나그네들에게도 편의를 제공해 주었다 한다.

조령원 이외에도 2관문과 3관문 사이에 이화원, 신혜원 등이 설치되어 새재를 넘나들던 나그네들의 숙박시설로서 큰 몫을 해 왔고, 호서, 영남지역 상인들의 중요한 물물교역 장소로서 성시를 이루었던 곳이기도 했던 장소였으나 지금은 초라한 터만 남아있다.

1977년과 1997년 2차례의 조령원터 조사에서 모두 4개소의 건물지, 온돌유구 흔적, 성격불명의 석열 등이 노출되었으며 4개소의 건물지는 현존하는 돌 담장과 불합리한 배치로 노출되어 모두가 동시대의 유구로 보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이 조사의 목적이 조령원터 내부의 온돌유구와 건물지에 대한 정비 또는 복원을 시행하기 위함이었으나 건물터가 2개층에서 발견되는 등 예상외로 교란이 심하여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존재하였던 건물지의 배치상태와 규모, 특징 등을 명확히 밝히지 못하였고 시대를 달리하는 건물유구가 중복된 상태로 노출됨에 따라 정비대상 유구의 선정에서부터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상단의 건물지에서 고려시대의 온돌유지와 부엌시설 일부가 드러났고, 와편, 토기편, 자기편, 어망추, 철제화살촉, 마구류 등이 출토되었다.

 

2000년 KBS 대하드라마 '왕건'의 촬영장으로 이용되었던 곳으로 궁예가 원대한 꿈을 품고 새달사에서 하산하여 백성으로부터 민심을 얻어 장군으로 추대되어 사용한 산채 장소이며, 현재 조령원터 내부에 세워져 있는 움막이 당시 촬영시 세웠던 세트이다.

 

♣ 지름틀바위

 

지름틀바위

기름을 짜는 틀을 닮았다고 붙여진 이름으로, 지름은 기름의 경상도 방언이다.

 

♣ KBS 촬영장 전경

새재길을 따라 제1관문으로 향하다 우측에 조성된 KBS촬영장을 조망해 보았다. 옛날에 한 차례 입장을 해 관람을 한 적이 있고, 현재 별도로 촬영장 관람료를 받고 있어 내부 관람은 포기하였다.

 

 

▲ 영남대로인 새재길을 따르며 조망한 KBS촬영장

 

♣ 집단시설지구

▲ 집단시설지구 입구에 설치된 '사과축제' 대형아치

▲ 집단시설지구 식당가 주변의 은행나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