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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慶州) 제3편/경북 경주

왕마구리 2008. 6. 18. 14:13

◀ 경주(慶州) 제3편 ▶

▲ 양동마을 심수정을 배경으로...

 

제3편에서는 경주지역 북쪽에 위치한 관광지인 조선시대 상류층 가옥을 포함하여 150여채의 전통가옥들이 보존되어 있는 양동마을과 조선시대 성리학자 문원공 회재 이언적(1491~1553) 선생의 유적지인 독락당과 옥산서원, 그리고 정혜사지13층석탑을 소개하기로 한다.

그러나 양동마을과 독락정은 후손들이 현재 거주를 하고 있어 내부가 공개되지 않아 건물구조 등 세세한 부분까지는 관람을 하지 못하여 아쉬움이 남았다.

 

* 제3편 : 양동마을(15:23~16:40)→정혜사지13층석탑→독락당(17:07~17:54)→옥산서원(17:26~17:54)

 

15:23~16:40=>양동마을

     골굴사주차장을 출발하여 45.3km 떨어진 양동마을에 약 1시간만에 도착을 하였다. 양동마을은 넓은 산 사면과 구릉에 자리를 잡고 있어 전체를 보는데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만 평일인 관계로 관광객이 거의 없고, 비포장 마을길로 승용차 진입이 가능하여 차량을 이용하여 이동하며 관광을 하였다. 그러나 시간관계로 전체를 보지는 못하고 발길이 닿는대로 약 1시간 15분여를 관광하고 다음 목적지인 정혜사지13층석탑으로 이동을 하였다.

 

 ▲ 양동마을 안내도

 

 

▲ 양동마을 전경

 

♣ ♣ 월성양동마을

*중요민속자료 제189호

*소재지: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양동마을은 설장산을 주봉으로 하여 '물(勿)'자 모양으로 뻗어내린 세 구릉과 계곡에 자리를 잡고 있다. 이 마을은 상류층 양반들이 대대로 살아온 곳으로 조선시대 가옥 150여 채가 잘 보존되어 있다. 이 가운데 종가나 큰 기와집은 대체로 높은 곳에 있고 초가집은 비교적 낮은 곳에 있다.

마을 안에는 국보 1점, 보물 4점, 중요민속자료 13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2점, 경상북도 기념물 1점 등이 있다. 이 마을에서는 월성 손씨 입항조인 양민공 적개공신 손소와 청백리인 경절공 우제 손중돈과 성리학자 문헌공 회재 이언적을 비롯하여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 양동 심수정

 

♣ 심수정(心水亭)

*중요민속자료 제83호

이 정자는 농재 이언괄을 추모하여 조선 명종 15년(1560)경에 지어졌다. 농재는 형인 회재 이언적을 대신하여 벼슬을 마다하고 나이든 어머니를 극진히 모셨다. 그 뒤 철종 때에 이 정자가 불타고 1917년경에 다시 지었다고 한다.

양동마을에 여러 정자가 있지만 규모가 가장 크며, 건너 편의 향단과 관련된 것이다. 7칸 대청으로 동쪽과 서쪽에 각각 온돌방을 둔 팔각집이다. 서쪽 방 옆으로는 난간이 있는 누마루를 두어 향단이 있는 북촌 일대를 바라보기 좋게 하였다. 누마루 아래의 기둥은 팔각으로 하였다. 큰 규모의 정자로 필요한 칸 수와 기능을 고루 배려하여 잘 짜여진 구조이다. 이 정자에 딸린 행랑채는 격식있는 소규모의 가옥으로 진실하게 구성되었다.

 

▲ 양동 강학당

 

♣ 강학당(講學堂)

*중요민속자료 제83호

이 건물은 조선 고종7년(1870)에 세운 여강이씨 문중의 서당으로 손씨 문중의 안학정과 쌍벽을 이루고 있다. 대사간을 지낸 지족당 이연상이 학생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이곳에서 보면 건너편 향단과 그 일대가 잘 보인다. 지금 양동마을에는 이씨 문중의 서당 두 채가 있는데, 이는 안계댐을 건설하면서 경산서당을 옮겨왔기 때문이다.

대문과 담장을 설치하지 않은 'ㄱ'자 건물로 각기 맞배집을 붙인 것이다. 오른쪽 본채에는 2칸의 대청이 있고 그 왼쪽에 온돌 안방, 오른쪽에 온돌 건넌방이 있다. 대청 앞으로 마루방과 경판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다. 대청과 마루방은 여름에, 온돌방은 겨울에 대비한 것이다.

소박하고 간결하게 지어 서당공부에 맞는 구성을 하였다. 동쪽에 있는 행랑채에는 남부지방의 백성들 집으로 하나의 기본형을 이루고 있다.

 

 

▲ 양동 두곡고택

 

♣ 두곡고택

*중요민속자료 제77호

이 가옥은 조선 영조9년(1733)경에 회재 이언적의 6대손인 이식중의 본문가로 세워졌다. 그 후 이희태의 할아버지인 두곡 이조원이 사서 옮겨 그 후손들이 살면서 두곡고택이라 부르게 되었다.

양동 남쪽마을의 대표적인 큰 가옥으로 매우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一'자 모양의 대문채를 들어서면 사랑마당이고 그 왼쪽으로 마구간채가 있다. 건너편에 사랑채, 아랫채, 안채가 '口'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앞면에 대문간채와 마구간채를, 뒷면에 행랑채와 방앗간을 비교적 넓게 배치한 것이 아주 독특한 점이다. 사랑마당에는 산의 경사지를 그대로 두고 과일나무를 심어 작은 동산을 이루고 있다. 부엌뒤의 초가에 있는 디딜 방앗간은 마을에 몇 개 안 남은 것 중의 하나이다.

 

 

▲ 양졸당 대문

▲ 양동 수졸당

 

♣ 수졸당

*중요민속자료 제78호

이 가옥은 회재 이언적의 4째 손자인 수졸당 이의잠이 조선 광해군 8년(1616)에 세운 것이다. 그의 호를 따서 수졸당이라고 하였으며 사랑채는 영조 20년(1744)에 6대손인 대사헌 양한당 이정규가 세운 것이다.

앞쪽에 사랑채와 대문채가 일자로 놓여있고, 그 뒤편에 안채와 아래채가 있어 전체가 앞을 튼 '口'자 모양으로 자리하고 있다. 사랑채는 앞면이 4칸이고, 옆면은 2칸이다. 안채는 'ㄱ'자 모양으로 사랑채 위쪽에서부터 건넌방, 안대청, 안방을 놓고 아래채쪽으로 꺾인 건물에 부엌광, 찬창고, 창고를 배치하였다.

사랑채와 떼어서 사랑채보다 지붕을 낮추어 대문간채를 세운 것은 두 건물의 격에 차이를 둔 특이한 것이다. 사당은 안채 뒤쪽 언덕 위에 동쪽을 향하여 있으며 따로 담장을 쌓아 지었다.

 

▲ 양동 대성헌

 

♣ 대성헌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34호

이 건물은 조선 영조8년(1732)에 물와 이재직의 세째아들 이능단이 분가할 때 지었다. 대성헌이란 성주봉을 마주보고 있다는 뜻이라고 한다.

안채는 'ㄱ'자 모양이고, 사랑채와 행랑채는 '一'자 모양으로 이들 세 건물이 모여서 '口'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안채는 본채 6칸과 옆채 3칸으로 꺾이는 곳에 긴 부엌을 두고 오른쪽에 안방과 대청을 두었다. 사랑채는 앞면 4칸에 옆면 1칸 방으로 대상헌이란 현판이 붙어있는 대청이 2칸이다. 나머지 2칸이 사랑방이고 앞에 반칸 폭의 툇마루를 달았다. 행랑채는 앞면 5칸에 옆면 1칸으로 대문과 방, 가축을 기르는 곳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건물은 모두 소박하고 간결하여 막돌로 쌓은 기단 위에 막돌 주초를 놓고 그 위에 네모 기둥을 세웠다. 모두 홑처마 맞배집으로 사랑채의 대청 앞쪽은 2칸에 8짝 문을 샛기둥없이 달고 4짝씩 접어들어 올리게 하였다.

 

 ▲ 무첨당 대문

 

 

 

▲ 무첨당

 

♣ 무첨당

*보물 제411호

이 집은 조선중기의 성리학자이며 문신이었던 회재 이언적(1491~1553) 선생의 종가 별당으로 세운 건물이다.

이 집은 상류주택에 속해있는 사랑채의 연장건물로 손님접대, 휴식, 책 읽기 등 여러 용도로 쓰이던 곳이다. 마을 서북쪽 산등성에 남향하여 있다. 우측에는 사랑채, 안채, 행랑채로 이루어진 '口'자형 본채가 있고, 그 뒤편 높은 곳에 사당이 있다. 이 건물에는 'ㄱ'자형 평면에 온돌방, 대청, 누마루를 두었으며, 둥근 기둥과 네모 기둥을 함께 쓴 것이 특징이다.

은퇴한 주인이 여생을 즐기는 별당으로 난간, 초식 등을 화려하게 꾸몄을 뿐만 아니라 공간의 확장 등 다목적의 들문을 적절히 시설하여 건물의 기능을 한껏 살린 뛰어난 집이다. 소박하면서도 세련된 솜씨를 보여주고 있으며 별당 건축의 기능에 충실하게 지은 건축물이다.

 

 

 

▲ 향단

 

♣ 향단

*보물 제412호

이 건물은 조선시대 성리학자 회재 이언적(1491~1553)이 경상감사로 있을 때, 모친의 병간호를 하도록 중종이 지어준 집이다.

두 곳에 뜰을 두고 안채, 사랑채, 행랑채를 붙여 전체가 '興'가 모양을 이루어 독특한 평면형태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사가로서 건물 전체에 둥근 기둥을 사용하여 상류층 주택의 격식을 갖추었다. 원래 99칸이었다고 전하나 일부는 불타 없어지고 현재 50여 칸이 보존되고 있다. 이 건물은 마을 전체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띠는 위치와 모습에서 상류주택의 일반적 격식에서 조금 벗어난 면도 가지고 있으며, 주생활의 합리화를 도모한 우수한 건물이다.

 

17:00~17:05=>정혜사지13층석탑

 

▲ 정혜사지13층석탑

 

♣ ♣ 정혜사지13층석탑

*국보 제40호

*소재지: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1654

이 석탑은 흙으로 쌓은 1단의 기단 위에 5.9m 높이로 13층의 몸돌을 올린 모습이다.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중에서는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이다.

1층 탑 몸돌이 거대한데 비해 2층부터는 몸돌과 지붕돌 모두가 급격히 작아져서 2층 이상은 마치 1층탑 위에 덧붙여진 머리장식처럼 보인다. 탑의 1층 몸체에는 높이 131cm, 폭 166cm인 모서리 기둥이 있고 중앙에는 불상을 모시는 감실이 있다. 2층부터는 너비와 높이가 갑작스럽게 줄어들었으며 몸체틀과 지붕돌이 같은 돌로 만들어져 있어 그 양식이 특이하다.

지붕은 경사가 느린데 모서리는 볼록하고 처마층급 받침은 3단이다. 석탑 주변에는 주춧돌과 기왓장들이 흩어져 있고 정혜사지라 전한다.

통일신라시대 9세기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되며 13층이라는 보기드문 층수에 기단부 역시 일반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당시의 석탑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17:07~17:22=>독락당

 

 

 ▲ 독락당

 ▲ 독락당 흙담

 ▲ 독락당 대문

▲ 출입금지 안내문

 

♣ ♣ 독락당

*보물 제413호

*소재지: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1600-1

이 건물은 옥산서원 뒤편에 있으며 회재 이언적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지는 사랑채이다. 조선 중종27년(1532)에 세웠으며 알명 옥산정자라고도 한다.

낮은 단위에 세워진 정면 4컨, 측면 2칸의 이 건물은 옆면에서 볼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각지붕이다. 대청은 3칸 2칸이고 나머지는 칸을 막아 1칸 2칸 온돌방으로 하였다. 건물은 둥근 기둥을 세우고 대청 천장은 뼈대가 모두 노출된 연등천장이다. 이 건물 옆쪽 담장에는 좁은 나무로 살을 대어 만든 창을 달아서 대청에서 살창을 통해 앞 계곡의 냇물을 바라보게 하였다. 이는 아주 특별한 공간구성이며, 뒤쪽의 계정 또한 자연에 융화시키고자 한 의도를 잘 드러내 주고 있다.

 

▲ 독락당 경청재

 

♣ 경청재

본 고택은 1601년(선조34년) 3월 12일 회재 이언적 선생의 손자 휘, 준과 순 두 형제가 옥산별업을 봉수하기 위해 화의문을 작성하면서 세운 집이다.

선생은 1538년(중종33년) 3월에 청맥리에 가좌되었다. 청백은 공경지심에서 나온다 하여 후손들이 본 집을 경청재라 이름하였는데 1900년이후 머슴들이 사용하기도 하였다.

"화의문약설"

계정과 독락당은 우리 선조 고 문헌공 회재선생의 별서이고 이의 유택에는 우리 부모(휘:전인, 호:잠계)의 혈성이 가득하다. 단우와 담장을 수호하기 위해 우리 형제가 약간의 토지를 출현하였다.

후손들 가운데 혹 궁벽하여 토지에 대해 다투는 일이 있으면 불효로써 논단할 것이다.

 

17:26~17:54=>옥산서원

 

 

 

 

 

 

▲ 옥산서원

 

♣ ♣ 옥산서원

이 서원은 조선시대의 성리학자 회재 이언적(1491~1553) 선생을 제향하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조선 선조5년(1572)에 설립되었으며 그 이듬해에 임금이 서원이름을 내렸다. 경내에는 사당인 체인묘, 강당인 구인당, 기숙사인 동재(민구재)와 서재(압수재), 무변루, 역락문, 어서각, 장서각인 청분각과 회재선생 신도비가 있다. 건물 곳곳에는 아계 이산해, 석봉 한호, 추사 김정희 등의 명필이 쓴 현판들이 있다. 이 서원은 조선 후기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제외된 47개 서원 중 하나로, 각 건물들의 공간적 배치방법이 돋보인다. 옥산서원 북쪽으로 약 700m 떨어진 곳에 회재의 별장이자 서재였던 독락당이 있다.

 

▲ 이언적신도비가 모셔진 비각

 

♣ 문헌공 회재 이언적신도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76-1호

*소재지: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7번지

문헌공 회재 이언적(1491~1553)은 조선 중종, 명종대를 대표하는 성리학자이자 사림파 관료로 동방오선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는 주자의 주리론에 근본을 두면서 당시 성리학의 거두였던 주한보와 무극태극논쟁을 통하여 이선기후설과 이기불상잡설을 강조하였다. 이는 조선조 성리학사에서 최초의 본격적인 논쟁으로 평가되었으며, 그의 이우위설은 이후 퇴계 이황에 의해 계승, 발전되어 영남학파 성리학의 선구가 되었다.

이 신도비는 1577년 대학사 회재 이언적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후학들이 뜻을 모아 건립한 것이다. 비문은 호남의 거유였던 고봉 기대승이 짓고 아계 이산해가 썼다. 한편 이 신도비는 건립 당시에 옥산서원 앞 계류옆에 있었으나 훼손을 막기 위하여 서원 안으로 옮겨졌다.

비 전체 높이는 320cm이며, 비신의 높이는 204cm이다.

 

 

▲ 옥산서원 앞 계류

 

이상 옥산서원 소개를 마지막으로 1박2일간의 경주 남산 산행과 관광지 탐방을 마치기로 한다. 1박2일이라는 짧은 여정동안 약 873km를 이동하며 많은 것을 관람하려고 하였으나, 이번 여행에서 잡은 일부 관광지(교동최씨고택, 양동마을, 독락당)가 개인 소유로 후손들이 실제 살고 있어 내부를 정확하게 보고 관찰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그리고 경주에서 대릉원~안압지코스 야경관광 또한 기대를 가지고 실시하였으나 조명시설 등이 생각보다는 화려하지 않았고, 미비해 기대에 미치지 못하여 저녁 공원산책 수준에 머물러 버렸다.

다음에 다시 경주를 찾게 된다면 이번 여행에서 보지 못하였던 관광지를 사전에 자료 등을 더 철저히 조사하고 관광코스를 잡아 체계적이고 실속있는 여행이 되도록 준비를 철저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여행기를 마무리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