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도사(通度寺) 제3편 ▶
▲ 통도사 경내에서 대웅전을 배경으로...(1)
▲ 통도사 경내에서 대웅전을 배경으로...(2)
▲ 통도사 영산전과 극락전 앞 마당의 삼층석탑을 배경으로,,,
【 통도사 개요 】
▲ 통도사 대웅전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로 부처님의 말씀인 팔만대장경을 간직하고 있는 법보 해인사, 보조국사이래 16명의 국사를 배출한 승보 송광사와 더불어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가사를 봉안한 불보로 삼보사찰의 하나이다. 그 중에서도 통도사는 가장 으뜸인 불보를 간직하고 있어 지정한 불지종찰이요 국지대찰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인 사리와 가사를 금강계단에 봉안하고 있어 부처님이 살아 숨쉬고 있는 것과 같기 때문에 구태여 통도사는 부처님의 형상이 필요없어 대웅전에 불상이 없는 사찰로 유명하다.
우리나라 사찰은 각기 나름대로 고유한 성격을 지니면서 불법을 이 땅에 펼치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화엄사상을 표방하는 화엄사찰, 아미타불이나 미륵불의 세계를 그리는 정토사찰, 그리고 관음보살의 대자비를 간구하는 관음도량 등으로 나뉘어지는데 이러한 사찰의 성격이 삼보사찰에서 잘 드러난다 하겠다.
신라 선덕여왕15년(646) 자장율사가 중국 당나라에서 가져온 부처의 사리, 가사, 대장경 등을 금강계단에 봉안하고 창건한 절이다. 이와 같이 불사리와 대장경이 최초로 봉안된 사찰로 당시부터 매우 중요한 절이었으며 이후 신라 율종의 근본도량이면서 신라 승단의 중심지가 되었다.
절의 어원을 살펴보면 디음과 같다.
낙동강과 동해를 끼고 하늘 높이 치솟은 해발 1050m의 영축산 남쪽 기슭에 자리를 잡고 있는데, 영축산이란 원래 부처님 재세시 마가다국 왕사성의 동쪽에 있던 그라드라라는 산이었다, 본래 이 산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한 유명한 곳으로 신선과 독수리가 많이 살고 있기 때문에 영축산이라 불렸던 곳이다.
신라에는 불교가 전래되기 전에 이미 일곱군데의 가람터가 있었다고 전해지며, 오대산과 금강산에는 문수보살과 법기보살이 거주하는 곳이라 하여 우리나라가 불법과 매우 인연이 깊은 땅임을 보여준다. 영축산 통도사에 있는 전각들과 탑, 석등, 이것들과 어우러져 있는 자연, 그 속에서 불법을 꽃피운 위대한 고승들, 어느 하나 불연과 떼 놓을 수 없다. 그래서 이 산의 모양이 불법을 직접 설하신 인도 영축산과 통한다 해서 통도사라 이름했다고 일컬어진다.
또한 승려가 되려는 사람은 모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에서 계를 받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통도사라고 했다고 한다. 이는 사찰의 근본정신을 잘 말해주는 것으로 통도사는 계율의 중심지로서 모든 승려들은 여기에서 계를 받아야 산문에 들어서게 된다.
그리고 모든 진리를 회통하여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는 의미서 통도사라 했는데, 이는 대승불교의 이상인 상구보리하화중생의 의미를 통도라는 응축된 말로 표현한 탁월한 발상이다. 보살은 자기만의 깨달음을 구하는데 있지 않고 깨달음을 향하여 진리의 세계로 나가는 동시에 고통받는 중생들과 함께 대비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
이 절의 창건과 관련하여 자장율사가 이곳 연못에 사는 9마리의 용을 항복시키고 대가람을 이루었는데 1마리의 용만 머물게 하여 이 절을 수호했다는 설화가 있으며 지금도 금강계단 옆에는 구룡지가 상징적으로 남아 있다. 처음에는 금강계단을 중심으로 한 작은 절이었으나, 고려 선종대에 크게 확장되어 금강계단 상부의 석종형 부도를 비롯하여 극락전 앞의 3층석탑 및 배례석, 봉발탑, 국장생표석 등이 건립되었다.
그 후 여러 차례 걸쳐 중수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완전히 불타버리고 선조36년(1603) 송운대사에 의해 재건된 뒤 인조19년(1641) 우운대사가 다시 중건하여 대가람이 되었다.
가람형태는 창건 당시 신라이래의 전통방식에 벗어나 냇물을 따라 동서로 길게 배치된 산지도 평지도 아닌 구릉 형태로서 탑이 자유롭게 배치된 자유식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즉 대웅전(국보 제290호)과 금강계단을 비롯하여 응진전, 명부전 등의 상로전과 관음전, 용화전, 대광명전, 장경각, 황화전, 화엄전 등의 중로전, 그리고 영산전, 극락전, 약사전, 만세루, 영각 등의 하로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가람구조는 금강계단 중심에서 점차 대웅전 중심의 공간배치로 변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건물들은 모두 조선시대 이후에 건립된 것으로 주위에 회랑을 돌리지 않고 삼문을 두어 구분했는데 일주문은 완전히 절의 영역 밖에 있으며, 천왕문과 불이문에 들어서야 각 전각들에 이르게 된다.
중요 문화재는 국장생석표(보물 제74호), 은입사동제향로(보물 제334호), 봉발탑(보물 제471호), 삼층석탑(보물 제1471호), 통도사 동종(보물 제11-6호) 등이 있다. 이밖에 석가여래가사, 자장율사가사, 고려감지금니화엄경, 고려은입사동제향로, 동판천문도, 감로병, 육환철장, 동자상, 청동소탑, 법라, 화엄만다라, 청동요령, 금지법화경, 구룡병풍, 삼장서행노정기 등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많은 유물이 최근에 건립된 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현존하는 통도사 산내 부속 암자는 19개가 있다.
통도사는 우리나라 5대총림의 하나로 1972년 승격되었다.
▷ 총림(叢林)
총림의 뜻은 범어 vindhyavana의 번역으로 빈타바나라 음역하여 단림(檀林)이라고도 번역하는데 많은 승려와 속인들이 화합하여 함께 배우기 위해 모인것을 나무가 우거진 수풀에 비유한 것이다. 지금은 승려들의 참선수행 전문도량인 선원(禪院)과 경전 교육기관인 강원(講院), 계율 전문교육기관인 율원(律院)을 모두 갖춘 사찰을 지칭하는 말이다.
우리나라에는 5군데의 총림이 있는데 해인사, 송관사, 통도사, 수덕사, 백양사이다. 총림의 수장은 방장이라고 하고, 모든 승려들은 행장교육을 마치고 사미계를 받으면 강원이나 선원, 율원에 입방 4년간의 교육을 수료해야 비구계를 받을 수 있다.
【 통도사 경내 탐방 】
통도사주차장에서 계류를 가로지르는 삼성반월교를 건너면 정면으로 최근에 건립된 성보박물관이 보이고, 좌측으로 보이는 일주문을 지나면 계류를 끼고 통도사 경내가 시작된다. 성보박물관은 입장료가 \2,000이고 월요일은 휴관을 하는 관계로 입장을 하지 못하고 일주문을 향하며 통도사 경내 탐방을 시작하였다.
지금부터 일주문부터 시작하여 신앙의 정도에 따라 나누어진 하위 영역인 하로전, 중위 영역인 중로전, 그리고 상위 영역인 상로전 등 세 영역으로 구분하여 통도사 경내의 불전과 문화재를 차례로 소개를 하기로 한다.
▲ 삼성반월교
▲ 통도사 일주문
□ 통도사 하로전 내의 불전들
▲ 하로전의 출입문인 통도사 천왕문
♣ 통도사 천왕문(天王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0호
천왕문은 절 안으로 들어올 때 일주문을 지나 통과하는 곳으로, 통도사 전체의 대문이다.
통도사 세 개의 영억 가운데 하위 영역의 출입문에 해당한다. 이곳에는 천상세계에서 가장 낮은 곳에 산다는 사천왕상을 모시고 있다. 사천왕은 부처에 귀의하여 불법을 수호하고 중생들이 부처의 가르침에 따라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피면서 그들을 인도하는 수호신이다. 불교 세계에서 설정한 수미산을 중심으로 동쪽은 지국천왕, 서쪽은 광목천왕, 남쪽은 중장천왕, 북쪽은 다문천왕이 다스린다.
사찰에 천왕문을 세우는 까닭은 사찰을 지킨다는 뜻도 있지만, 출입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수호신들이 절 안의 모든 악귀를 물리치는 맑고 깨끗한 곳이라는 신성한 관념을 갖게 하려는 뜻도 있다.
수미산은 부처가 거처하는 곳이니 수미산을 이 땅에 재현한 곳이 절이라면 천왕문을 통과하는 중생은 이미 부처의 세계에 들어선 셈이다. 이 건물은 고려 충숙왕6년(1337)에 취암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조성 수법으로 미루어 볼 때 현재의 건물은 19세기 이후에 중건된 것으로 보인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이 건물은 장식을 거의 하지 않은 익공계 맞배지붕으로 구성된 단순하고 소박한 구조이다. 다른 사찰의 천왕문과 마찬가지로 이곳 역시 중앙에는 통로를 두고 좌우로는 나무로 만든 네명의 험상궂은 천왕상을 배치하였다.
중앙통로를 통과하는 동안 좌우에서 무서운 수호신이 눈을 부릅뜨고 위협적인 자세로 지켜보고 있으니 이곳을 지나는 사람은 자연히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게 된다.
▲ 통도사 하로전
▲ 영산전
♣ 영산전(靈山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03호
영산은 영축산의 준말로 석가모니가 가장 오랫동안 머물면서 자신의 가르침을 제자들에게 전하던 곳이다. 바로 이 영산을 이 땅에 재현한 것이 영산전이다. 그러므로 이곳을 참배하는 것은 부처가 제자들에게 법화경을 설파한 영산회상에 참석하는 것과 같은 효력이 있다고 한다.
이 영산전은 신앙의 정도에 따라 나누어진 통도사의 세 영역 가운데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하위 영역의 중심불전으로 동서로 양 옆에 약사전과 극락전을 거느리고 있다. 이런 구성은 조선 후기의 불화에서 흔히 삼세불로 표현되었다. 삼세불의 중앙에 자리 잡은 현세의 부처 석가모니불, 왼쪽에 자리 잡은 과거의 부처 약사불, 오른쪽에 자리 잡은 미래 극락세계를 주관하는 아미타불을 말한다.
영산전의 건축연도는 알 수 없으나, 현재의 건물은 숙종30년(1704)에 송곡대사가 중건한 것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사찰의 중심 불전으로는 드물게 소박한 형식의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아마 통도사 전체의 중심 불전인 대웅전과 격을 맞추기 위해 그런 양식으로 꾸민 것으로 짐작된다.
외형상으로 보면 영상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평범한 건물이지만 정면의 기둥 간격이 넓어 외관이 위풍당당하다. 이 때문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계신 곳으로도 전혀 손색이 없다. 또한 다포계의 화려한 장식을 사용함으로써 건물의 품격을 한층 높이고 있다. 내부 벽에는 다보탑을 비롯하여 법화경의 여러 내용을 담은 품격 높은 그림이 그려져 있다. 또 석가모니의 생애를 여덟 장면으로 묘사한 팔상도는 1775년(영조51년)에 제작된 것으로 당시 불화의 화풍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 극락전
♣ 극락전(極樂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4호
아미타여래를 봉안하는 극락전은 아미타전이라고도 하며, 또 극락세계에서 영원히 평안한 삶을 누린다 하여 무량수전이라고도 한다. 아미타여래가 다스리는 곳이 서방 극락정토이기 때문에 극락전은 언제나 중심 불전의 서쪽에 위치하며, 참배하는 사람들이 그곳을 향하도록 세워져 있다.
극락정토는 고통이 전혀 없고 즐거움만 있는 이상의 세계이다. 따라서 이 세계를 염원하는 사람은 '나무아비타불'이라는 염불을 외우며 극락에서 우리는 새로운 삶을 기원한다.
우리나라에서 아미타 신앙은 그 어떤 신앙보다 큰 비중을 차지하며, 6,7세기 무렵부터 이미 대중 속에 자리 잡았다. 삼국시대의 치열한 전쟁 속에서 생겨난 수 많은 희생자가 극락으로 갈 것을 바라는 기도가 자연적으로 아미타 신앙으로 귀의하였다고 할 수 있다. 지금도 극락전은 우리나라 사찰에서 대웅전 다음으로 많이 세워진 건물이다. 그만큼 아직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깊은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는 셈이다.
극락전에는 아미타불과 함께 그 좌우에 관음과 대세지 보살을 봉안한다. 이곳 통도사 극락전 역시 마찬가지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된 이 극락전은 고려 공민왕18년(1369)에 창건되었다고 하지만, 현재의 건물은 18세기 초 중건되었다. 이 건물은 통도사의 세 개의 영역 가운데 하위 영역에서 중간 위계에 해당하는 것으로 외관의 평면 구도 역시 그에 맞추어져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극락전은 극락세계를 상징하기 때문에 건물 자체도 화려하고 대웅전에 버금갈 정도로 내부 장식도 많은데 이 극락전 역시 그렇다. 작은 건물임에도 팔각지붕에 받침기둥을 갖추고 있다.
▲ 약사전
♣ 약사전(藥師殿)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7호
이 건물은 동방의 정유리 세계에 있으면서 모든 중생의 질병을 치료하고 재앙을 소멸시키며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의 불성을 닦도록 도와주는 약사여래를 모신 법당이다.
약사여래는 동방세계를 다스리므로 약사전은 언제나 중심 본전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다. 약사여래는 과거 세상에서 약왕이라는 이름의 보살로 임무 수행을 하면서 중생의 아픔과 슬픔을 소멸시키기 위해 12가지의 큰 소원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므로 과거를 상징하는 부처이자 대의왕불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약사 신앙은 삼국시대부터 유행하였는데, 당시 전쟁으로 수 많은 희생자가 속출하자 약사여래는 새로운 구원자로 등장하였다. 신라의 선덕여왕이 병에 걸렸을 때 밀본법사가 '약사경'을 염불하여 병을 낫게 하였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도 국란이 닥쳤을 때마다 약사 도량을 열어 부처의 힘으로 위기를 극복하려고 했을 만큼 약사 신앙이 널리 유행하였다.
이곳 약사전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다포계 맞배집으로 고려 공민왕18년(1369)에 성곡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의 건물은 18세기 이후 중건된 것이다. 건축 구조로 보면 통도사의 세개 영역 가운데 하위 영역의 중심 불전인 영산전과 유사하다. 그러나 영산전과는 위계적 차이가 있다. 우선 건물 규모가 작을 뿐만 아니라, 전면의 기둥 간격도 영산전의 절반에 미치지 못하고 장식 역시 간소하다. 이러한 차이는 중심불인 석가모니불과 약사불의 위계적 차이를 표현하는 건축 수법을 보여준다. 그러나 번잡하지 않으면서도 우아한 장식 솜씨 등이 오히려 건물의 완성도를 높여 주고 있다.
▲ 만세루
♣ 만세루(萬歲樓)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3호
만세루는 본래 법회나 법요식을 거행할 때 사용하던 누각이다. 이 건물의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인조22년(1644)에 영숙화상이 중건하였다고 전한다. 건물의 외형은 정면 5칸, 측면 3칸이지만 기둥이 높고 그 간격이 넓어 실물보다 훨씬 더 크게 보인다. 본래 누각은 바닥이 지면에서 높이 올라간 2층의 다락집으로 기둥만으로 구성하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이다. 그런데 이 건물은 낮은 받침 위에 단층 건물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사면 기둥 사이에 모두 창호를 설치함으로써 오히려 불당과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이들 창호는 제작 수법이나 재질로 보아 근래에 설치된 것으로 보이는데, 바닥을 낮게 만든 이유는 건물을 편리하게 이용하고자 한데 있었을 것이다.
보통 산지에 위치한 절의 누각은 산지 경사로 인해 2층 누각이라 하더라도 절 안의 마당에서는 곧 바로 2층의 누각으로 오르게 설계되어 있다. 그러나 통도사는 평지에 세워진 절이기 때문에 이곳이 2층의 누각이었다면 의식을 거핼할 때 오르내리기에 크게 불편하였을 것이다. 건물의 규모로 보아 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 전국 승단 행정을 총괄하던 으뜸 사찰로서의 위엄과 권위를 잘 나타내는 건물이라 하겠다. 건물은 장식을 별로 하지 않은 익공계 팔작집으로 누각의 일반적인 형태를 따랐다. 정면 중앙에 있는 양기둥 위의 건물 밖으로는 용의 머리를 새기고, 안으로는 물고기 꼬리 모양의 용꼬리를 장식하여 출입구로서의 중심성을 강조한 점이 특이하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만세루'라는 건물의 현판은 6세의 신동이 썼다고 한다.
▲ 범종루와 통도사 동종
♣ 통도사 동종(銅鐘)
*보물 제11-6호
조선 중기에 승려 사인비구가 만든 종이다. 이 종은 맨 위의 용뉴, 종 몸통의 상대와 하대, 유곽 등을 고루 갖춘 전통적인 범종의 모습이다. 상대에는 위, 아래 두줄로 범자가 배치되었고 유곽안에는 아홉개의 유두가 있는데 중앙의 하나는 특별히 돌출되었다.
종 몸통 가득히 명문이 새겨진 까닭에 유곽 사이의 보살상은 작게 표현되었다. 종으로는 유일하게 팔괘를 돌려 새겨져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종의 명문에는 1686년에 사인비구가 만든 것이 기록되어 있다. 사인비구는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전반까지 약 50여년 동안 경기, 경상지역에서 주로 활동하였던 승려이자 조선을 대표하는 종 만드는 장인으로도 알려져 있다.
▲ 통도사 삼층석탑
♣ 통도사 삼층석탑
*보물 제1471호
극락전 앞에 위치한 이 3층석탑은 잘 다듬은 4개의 큰 돌 위에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 석탑양식인 이중 받침돌로 기단부를 구성하였다. 상층 받침돌의 가장자리에는 각각 모서리 기둥을 새기고 그 사이에 받침기둥을 두어 목조 건물을 모방하였다. 하층 받침돌의 각 면에는 코끼리의 눈을 형상화한 안상을 조각하였다. 이러한 형식은 석탑의 장식기능을 강조하던 통일신라 말기 즉 9세기 이후의 특징으로 이 석탑의 건립연대를 추정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3층의 몸체는 모서리 기둥만 새겨두었을 뿐 별다른 조각이 없다. 4단의 받침돌 위에 올린 지붕돌 역시 당대의 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꼭대기 부분에는 받침을 설치하고 그 위에 여러 장식을 올렸는데 현재 장식 부분은 사라지고 없다. 전체적인 조성방식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말엽이나 고려시대 초엽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 석탑은 1987년에 해체하여 복원하였다. 그 당시 상층 받침대 부분 안에서 조선시대 백자가 발견되었다. 이 탑이 조선시대에 개축되었음을 짐작 할 수 있다. 또 하층 받침돌 아래의 다진 흙속에서는 금동의 소형 불상 2구와 청동 숟가락 등이 발견되었다.
이들 유물은 현재 이곳 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석탑 기단 안에서 발견된 불상과 유물은 탑을 건립하기 전에 땅의 약한 기운을 누르며 땅을 다질 때 묻은 것이거나, 혹은 탑의 건립 과정에서 행하였던 여러 단계의 의식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 통도사 종로전 내의 불전들
▲ 중로전의 출입문인 통도사 불이문
♣ 통도사 불이문(不二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2호
이곳 불이문은 대웅전과 금강계단으로 향하는 마지막 문인 동시에 통도사의 세 개 영역 가운데 중간 영역의 출입구에 해당하는 문이다. 불이란 '진리' 그 자체를 다르게 표현한 말로, 본래 진리란 둘이 아닌 하나라는 뜻이다. 그리하여 일체에 두루 평등한 불교의 진리는 이 문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으며, 이 속에서 참된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 모든 번뇌를 벗게 되기 때문에 이 문을 다른 말로 해탈문이라고 한다.
통도사 불이문은 고려 충렬왕31년(1305)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의 건물이 언제 중건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세부 기법으로 볼 때 조선 중기 이후의 것이라고 생각된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지만 중앙 기둥의 간격이 넓어 훨씬 웅장한 느낌을 준다. 정면에는 벽이 없이 각 칸마다 판문을 설치한 점과 다포계의 팔작지붕을 연출한 점이 천왕문과 다르다. 이것은 아마도 불이문을 경계 삼아 나누어진 중앙 영역과 하위 영역의 위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려고 한 듯 하다. 특히 중앙에 대들보를 쓰지 않고 코끼리와 호랑이가 서로 머리를 받쳐서 지붕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구성 방식이 독특하다. 그리고 지붕도 통도사 건물 중에서 가장 뚜렷하게 배홀림 양식으로 처리하고 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건축 연대는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 관음전
♣ 관음전(觀音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1호
관음전은 관세음보살을 모시는 건물이다. 관음보살은 원만하게 중생의 고뇌를 씻어 주기 때문에 관음보살을 모신 곳을 가르켜 원통전이라고도 한다. 관음보살은 세상을 구하고 생명이 있는 자들에게 이익을 가져다 주기 때문에 아무런 인연이 없는 중생이라도 '관세음보살'을 염송하고, 항상 마음속에 새겨서 공경하고 섬기면 반드시 소원을 성취하게 된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인간 사회에서 널리 신봉되어 우리나라에서도 일찍부터 관음신앙이 유행하였으며, 지금도 보살을 모신 불전 가운데 관음전은 가장 흔하게 눈에 뜨인다. 대체로 관세음보살은 연꽃이나 감로병과 같은 물건을 들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 모양은 본래 깨끗하지만 '욕심, 성냄, 어리석음'의 삼독에 물들어 있는 중생의 마음을 이 감로수로 씻어 준다는 뜻이라고 한다. 여러 형태의 관음보살 중에서 우리나라에서는 경주 석굴암에서 볼 수 있는 열한 개의 얼굴을 가진 십일면관음, 버드나무 가지를 들고 있는 양류관음, 스물일곱개의 얼굴과 천개의 손, 천개의 눈을 가진 천수천안관음 등이 가장 많이 나타나고 있다.
관음전은 통도사의 세개 영역 가운데 중위 영역에 있는 세 불전 중에서 가장 위계가 낮은 건물로 일직선상의 맨 앞에 위치하고 있다. 통도사 관음전은 영조원년(1725)에 용암대사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그 뒤 여러차례 중수되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정사각형 형태로 다포계 팔작지붕이다. 다포계이기는 하나 보살의 불전이라는 위계에 맞추어 화려한 장식을 하지 않았다. 불전 내부에는 중앙에 등불을 들고 중생들을 부처의 세계로 안내하는 관세음보살을 비롯하여 남쪽으로 구도행각을 하는 선재동자가 반복적으로 그려져 있다.
▲ 용화전
♣ 용화전(龍華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04호
용화전은 미륵불을 봉안한 건물로 미륵불이 출현할 곳이 용화 세계의 용화수 아래라는 데서 이 명칭이 유래되었다. 또 미륵불을 모시기 때문에 미륵전이라고도 부른다.
미륵불은 석가모니가 열반한 후 56억 7천만년 뒤에 이 땅에 출현하여 석가모니가 미처 구제하지 못한 중생을 구제할 부처이다. 이런 연유로 우리나라에서는 미륵불이 희망의 부처로 삼국시대부터 폭 넓게 신앙되었다.
이 용화전은 고려 공민왕18년(1369)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의 건물은 영조원년(1725)에 청성대사에 의해 중건된 것이다.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맞배지붕으로 정면의 중앙기둥 간격이 넓어 직사각형의 평면구조를 띠고 있다.
일반적으로 법당은 측면의 앞쪽 가장자리에 출입문을 두지만, 이 용화전은 특이하게 건물 측면 중앙 칸에 문이 있다. 외부 장식은 정교하거나 화려한 편은 아니지만 중앙 기둥머리에 용머리를 연출하는 방식으로 장식적인 요소를 갖추었다. 내부에는 용머리와 연꽃, 봉황의 머리 등을 조각하여 이상 세계의 하늘을 연출하였다. 아마도 이것은 미래에 미륵불이 다스리는 용과 봉황이 날아 다니고 연꽃이 만발한 풍요롭고 안락한 용화세계를 상징한 듯하다.
▲ 통도사 봉발탑
♣ 통도사 봉발탑(奉鉢塔)
*보물 제471호
간석의 형태나 연판의 양식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봉발탑은 높이 260cm이며 석가모니의 발우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석조물이다. 발우란 스님들이 공양할 때 사용하는 식사용이자 스승이 제자에게 법을 전하는 전법의 상징물이다. 이처럼 미륵불을 모신 용화전 앞에 봉발탑을 모신 것은 석가모니께서 입멸한 후 56억 7천만년 후에 이 땅에 내려와 부처가 되라는 석가모니의 뜻을 받들어 미래에 출현하실 미륵불의 출세를 기다린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넓은 방형의 지대석 위에는 원형의 연꽃무늬가 새겨진 하대석이 놓여 있는데 옆면에 돌린 2줄의 선을 중심으로 아랫부분에 탱주 모양의 기둥을 8개 새겼으며 윗부분에는 4중의 중판복련을 조각하였다. 하대석 위에는 간주와 상대를 설치하였는데, 상대석은 하대석과 마찬가지로 8엽의 양련을 조각하여 서로 마주보게 했으며 윗면에는 3단의 얕은 굄이 있다. 상대석 위에 육중한 뚜껑을 지닌 발우는 그 밑에 굽받침이 새겨졌을 뿐 아무런 장식이 없다. 이 석조물은 불교의 교리를 배경으로 조성된 보기드문 예이며 국내에서 유일하다.
▲ 통도사 석등
♣ 통도사 석등(石燈)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70호
석등은 절 안의 어둠을 밝힐 뿐만 아니라, 빛으로 부처님의 진리를 비춰 줌으로써 온갖 중생을 깨우쳐 선한 길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한 등불 하나하나는 부처님이 계신 수미산과 같고 등을 밝히는 기름은 넓은 바다를 상징한다고 하여 불가의 공양구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고 있다. 그러므로 석등은 언제나 부처님을 상징하는 탑과 함께 법당앞에 배치된다.
이 석등의 제작연대는 불확실하나 조형 양식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고려시대 초엽에 조성된 것으로 짐작된다. 석등은 둥근 형태의 연꽃 받침대 두 개, 그 사이를 연결한 팔각기둥, 그리고 윗부분에는 불을 놓는 화사석과 지붕돌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4개의 커다란 불창이 있는 화사석은 파손된 것을 뒤에 보충해 넣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 때문인지 전체적으로 석등의 조화가 잘 맞지 않는다. 연꽃 받침은 아래로 향한 아래 받침과 위로 향한 위 받침이 있는데 아래로 향한 연꽃받침은 물속의 진흙과 같은 탁한 세상을 상징하고, 위로 향한 연꽃받침은 광명, 청정, 부처, 보살 등의 세계를 상징한다. 두 세계를 연결하는 8각의 돌기둥은 이상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불교의 여덟가지의 올바른 길을 상징한다.
이 석등은 언뜻 보아 4각형의 석등으로 보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흔치 않은 부등변 8각 석등이란 점에서 석등의 변천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 통도사 상로전 내의 불전들
▲ 통도사 대웅전
♣ 통도사 대웅전(大雄殿) 및 금강계단(金剛戒壇)
*국보 제290호
현재 통도사에 남아 있는 여러 건물 가운데 가장 핵심이 되는 영역은 신라 선덕여왕15년(646) 자장율사에 의하여 지어진 대웅전과 금강계단이다.
♣ 통도사 대웅전(大雄殿)
▲ 대웅전 계단 소매돌
▲ 대웅전의 돌계단
▲ 대웅전 모서리 처마 모습
▲ 대웅전의 기둥 장식과 단청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961년 대웅전을 수리할 때 서까래에서 발견된 묵서명에 의하면 1645년(인조23년) 우운대사에 의하여 중건된 것이라 한다. 건립연대가 확실한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건축으로 지붕의 청동으로 만든 철간을 비롯하여 백자연봉과 무쇠와 청동으로 만든 기와 등은 일반 건축에서 비슷한 예를 찾기 어렵다.
평면구조는 정면 3칸, 측면 5칸으로 측면이 정면보다 긴 장방형의 건물이며 가장 큰 특징은 지붕 모양이 T자형 합각지붕이라는 특이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구조는 정면과 측면의 구분없이 동,서,남 모든 방향이 정면성을 보이는 독특한 방향성이 있으며, 법당 안에 불상이 없는 대신 뒤쪽에 있는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을 예배하고 또 입구로부터 천왕문, 불이문, 탑을 잇는 직선상에 두기 위해 측면에도 합각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따라서 정면인 남쪽에는 금강계단, 동쪽에는 대웅전, 서쪽에는 대방광전, 북쪽에는 적멸보궁이라는 편액이 각각 걸려 있지만 의미는 같다.
지대석 위에 있는 기단의 면석에는 우주와 탱주를 새기고 그 사이에 연꽃무늬가 조각되었으며 돌계단의 층계석과 좌우에도 매우 정교한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이러한 가구식 기단은 창건 당시 신라시대의 석조기단으로 보인다. 기둥은 배흘림이며 기둥 위에는 창방과 평방을 놓고 그 위에 공포를 짜올린 다포계 형식이다, 공포는 외3출목, 내4출목으로 되어 있으나 살미첨자의 끝이 양서로 되어 있어 조선 중기 목조건축의 특징을 보여준다. 정면과 측면에는 빗살무늬와 꽃살무늬로 된 분합문을 달았으며, 뒷면에도 금강계단을 예배하기 위해 벽으로 막지 않고 4분합과 2분합을 설치하였다.
건물의 네 귀퉁이에는 추녀를 받치는 활주를 세웠으며 지붕 기왓골 수막새 끝에 박은 연봉 모양의 와정은 독특하다. 내부바닥은 우물마루이며, 천장은 층단천장으로 국화, 모란 등의 문양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으며 좌우의 끝부분은 우물천정으로 마무리했다. 불단에는 불상이 없는 대신 화려한 문양을 조각했으며 금강계단을 향하여 길게 설치되어 있다.
♣ 통도사 금강계단(金剛戒檀)
▲ 금강계단 편액
▲ 금강계단 전경
계단이란 계를 수여하는 의식이 행해지는 장소로 통도사 창건의 근본 정신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금강계단에 있다.
통도사 대웅전 뒷편에 있는 신라시대 석조계단으로 높이 300cm, 너비 990cm이며 신라 선덕여왕15년(646)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불사리를 경주 황룡사탑, 울산 태화사탑과 함께 봉안한 곳으로 매년 초하루와 보름날에 계를 설하였다고 한다. 현존하는 금강계단은 창건 이후 수 차례 걸쳐 중수되었기 때문에 창건 당시의 정확한 구조는 알 수 없다.
금강계단이란 이름은 이곳에서 받은 계법이 금강과 같이 단단하다는 뜻에서 비롯되었다. '삼국유사 권3 전후소장사리'조에 의하면 사리가 도난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금강계단과 석함 안에는 구렁이와 두꺼비가 있다고 했으나 1235년(고려 고종22년) 김이생과 경석이 군사를 시켜 석종을 들어 보았더니 작은 석함의 유리통 안에 사리 4개가 있었다고 한다. '양산통도사석가여래사리기'에는 1379년(고려 우왕5년) 왜구의 침입으로 주지 월송대사가 불사리를 송경으로 옮겨오자 왕과 왕비가 예를 다하여 공경하여 사리의 분신을 얻었다고 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에는 통도사의 사리가 왜구에 의해 도난 당했는데 백옥거사가 적의 포로로 있다가 사리를 다시 찾아온 이야기는 유명하다. 또한 사명대사 유정은 임진왜란을 피해 사리를 대소 2함에 나누어 금강산에 있는 휴정에게 보냈으나 자장의 뜻을 받들어 1함을 되돌려 보내어 1603년 통도사 계단을 중수한 뒤에 봉안했으며, 나머지 1함은 태백산 살나사(정암사)에 안치했다. 그러나 '건봉사석가치상립탑비'에 의하면 사명대사가 왜구로 부터 다시 찾은 통도사의 사리는 금강산 건봉사와 대구(현 대구시 달성군 옥포면) 용연사 석조계단에 나누어 봉안했다고 한다. 특히 용연사의 경우 통도사의 금강계단을 모방하여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주목된다.
효종3년(1652)에 정인대사를 중심으로 중수되기 시작하여 1705년 성능대사에 의해 크게 중수되었고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구조는 정방형으로 된 2중 석단 위에 석종형 부도가 안치되어 있는데 그 안에는 과립 3매, 불아, 정골지절의 사리가 봉안되어 있다. 석단 네 귀퉁이에는 사천왕상을 배치하고 기단의 상하 면석에는 비천상과 불상, 보살상을 조각했는데 특히 1층 계단의 면석에는 총 32구의 불상, 보살상이 부조되어 있다.
석종부도는 연화대좌 위에 놓여 있고 앞면에는 향로를, 좌우에는 비천상을 양각했는데 조각수법이 부드러운 편이다. 석단 주위에는 석조 난간과 석문이 있으나 모두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 금강계단은 몇 차례의 중수를 거쳤지만 창건 당시 석조물로서 부처의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사리를 정암사, 건봉사, 용연사에도 나누어 봉안했다는 점에서 불사리 봉안사찰의 원류가 되는 가장 오래된 불교 성지라 할 수 있다.
▷ 불사리(佛舍利)의 정신
불사리는 일종의 석가모니 부처님의 유신이지만, 다른 말로는 신령스러운 뼈 또는 신령스러운 구슬이라고 한다. 그것은 흔히들 삼학의 결정체라고 일컫는다. 그 가운데에서 계율의 철저한 실천이야말로 사리의 참된 정신이라 할 수 있다. 비단 그것은 소승적 의미에서의 단순한 금계뿐만 아니라 대승적 보살계의 실천적, 적극적인 중생 구제의 길을 내포하고 있다.
자장은 당나라에서 귀국하자 황룡사에서 7일 낮과 밤 동안 보살계본을 강설했다 한다. 그 보살계의 핵심은 삼취정계로서 섭률의계, 섭선법계, 섭종생계를 말한다. 섭률의계란 악한 짓을 하지 말라는 금계적 조항이고, 섭선법계와 섭종생계는 중생들의 고통을 덜어 주고 중생들을 이익케 하는 적극적인 자비와 보시의 정신이 깔려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그 자비와 보시를 실천적으로 보여 주신 분이다.
곧 석존이 전생에 보살이었을 때에 일곱 마리의 새끼를 낳은 호랑이 가족이 굶어 죽으려 하자 스스로 몸을 보시하여 그 굶주린 어미 호랑이를 살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뼈를 거두어 칠보탑을 쌓았는데 그 뼈가 바로 사리가 되었다. 이 얘기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설화에 담긴 내용인데 사리의 종교적인 정신을 잘 말해준다.
이는 사리가 계, 정, 혜 삼학의 결정체라 하겠지만 더 깊은 의미로는 육바라밀의 실천에서 결과하는 보살 정신의 응결된 표현이며, 바로 보살계의 결정체임을 보여 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대승불교가 흥기할 때 일반 재가 제자들은 불탑을 쌓아 거기에 사리를 모시고 경배드렸으며, 이러한 전통이 이어져 사리를 모신 불탑 숭배가 보편화 되었다. 특히 금강계단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탑과 단을 쌓아 승려들에게 계를 주는 계단의 역활을 하였으며 많은 사람의 숭배 대상이 되었다.
▷ 적멸보궁(寂滅寶宮)
석가모니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전각을 말한다. 보궁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후 최초의 적멸도량회를 열었던 중인도 마가다국 가야성의 남쪽 보리수 아래 금강좌에서 비롯된다.
화엄경에 따르면 깨달음을 얻은 부처는 처음 7일 동안 시방세계 불보살들에게 화엄경을 설법하기 위한 해인삼매의 선정에 들었다 한다. 이때 부처 주위에 많은 보살들이 모여 부처의 덕을 칭송하였고, 부처는 법신인 비로자나불과 한몸이 되었다. 따라서 적멸보궁은 본래 두두룩한 언덕 모양의 계단을 쌓고 불사리를 봉안함으로써 부처가 항상 그곳에서 적멸의 법을 법계에 설하고 있음을 상징하던 곳이다.
진신사리는 부처와 동일체로, 부처열반 후 불상이 조성될 때 까지 가장 진지하고 경건한 숭배 대상이 되었으며 불상이 만들어진 후에도 소흘하게 취급되지 않았다, 오늘날 한국에서 적멸보궁의 편액을 붙인 전각은 본래 진신사리의 예배 장소로 마련된 절집이었다.
처음에는 사리를 모신 계단을 향해 마당에서 예배하던 것이 편의에 따라 전각을 짓게 되었으며, 그 전각은 법당이 아니라 예배 장소로 건립되었기 때문에 불상을 따로 안치하지 않았다. 다만 진신사리가 봉안된 쪽으로 예배 행위를 위한 불단을 마련하였다.
한국에는 신라 승려 자장이 당나라에서 돌아올 때 가져온 부처의 사리와 정골을 나누어 봉안한 5대 적멸보궁이 있다.
양산 통도사, 강원도 오대산 중대의 월정사, 설악산의 봉정암, 태백산 정암사, 사자산 법흥사 적멸보궁이 그것이다.
** 통도사 : 금강계단에 진신사리를 봉안해 계율 근본도량 불보종찰이 되었는데, 부처가 안치되어야 할 대웅전에는 불상이 없고 불당 내부에 동서로 길게 불단만 놓여 있다. 또 불상이 안치되어 있어야 할 자리는 창으로 훤히 뚫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 월정사 적멸보궁(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8호) : 불사리를 안치한 정확한 장소를 알 수 없고, 다만 전각 뒤쪽의 작은 언덕에 부처의 정골사리를 모셨다는 기록이 있는 세존진신탑묘가 상징적으로 서 있을 뿐이다.
** 설악산 봉정암 : 부처의 불사리를 안치한 석가사리탑(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1호)이 있는데, 뇌사리를 안치하였다 하여 불뇌보탑이라고도 한다.
** 태백산 정암사 적멸보궁(강원도 유형문화재 제 32호) : 다른 네곳과 달리 임진왜란 때 유정이 왜적의 노략질을 피해 통도사의 진신사리를 나누어 보관한 곳으로 산 위에 수마노탑(보물 410호)이 있다.
** 사자산 법흥사 : 진신사리가 안치된 보탑과 자장이 도를 닦았다는 토굴이 있다.
이들 5대 적멸보궁은 불교도들의 순례지이자 기도처로서 가장 신성한 장소로 신봉된다. 그 밖에 대구광역시 달성군 의 비슬산 용연사, 경상남도 사천시 다솔사 등에도 적멸보궁이 있다.
▲ 응진전
♣ 응진전(應眞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6호
응진전은 나한전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이 건물에 부처님의 16제자를 봉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한은 범어로 '아라하트(Arahat)' 라고 한다. 그것은 중생의 공양에 응할 만큼 수행이 있다는 뜻의 '응공(應供)', 진리에 따라 남을 깨우친다는 뜻의 '응진(應眞)', 더 배울 것이 없다는 뜻의 '무학(無學)'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나한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고 증진과 수행을 거듭하여 아집과 번뇌를 끊어 죽고 사는 것을 초월한 성자를 말한다. 나한을 모신 불전으로는 응진전과 오백나한전이 있다.
일반적으로 응진전에는 중심불과 그 협시불인 미륵 및 제화갈라 보살상과 함께 16나한을 모시고 있다. 16나한은 이미 성자의 위치에 오른 수 많은 나한 중에서도 부처님의 열반 후 중생에게 그 복덕을 성취하게 하고 올바른 법으로 인도하겠다는 바람을 가진 성자들이다. 이들은 일찌기 많은 영험담을 통해 민간에게 신봉되어 나한산앙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을 한 이 건물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부처의 제자인 16나한이 주신이다. 그러므로 응진전은 통도사의 세개 영역 가운데 상위 영역의 중심불전인 대웅전 옆에 위치하여 부처님을 보좌하고 있다.
이 건물은 숙종3년(1677)에 지섬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는데, 이 후 여러 차례 중수하였다. 응진전은 상위 영역에서는 대웅전 다음가는 위계의 불전이지만 부처를 모시는 다른 불전보다는 그 위계가 낮다. 따라서 이 영역내의 다른 불전에 비해서 건물의 규모도 작고 장식도 화려하지 않다.
▲ 명부전
♣ 명부전(冥府展)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5호
명부란 저승, 곧 지옥을 말한다. 따라서 명부전은 저승을 이 땅에 재현한 불전인 셈이다. 불교에서는 명부는 지장보살이 다스리므로 명부전을 지장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 명부는 염라대왕을 비롯한 10대왕이 지장보살을 보좌하여 저승세계를 다스리므로 시왕전이라고도 한다.
이곳 명부전 역시 중앙에는 지장보살상을 모시고, 좌우에 각각 다섯명의 시왕 그림을 안치하였다. 명부전의 신앙 중심인 지장보살은 석가가 열반에 든 다음. 미래에 미륵불이 나타날 때까지 자신은 부처가 되는 것을 미루고 천상에서 지옥까지의 여섯 세계를 왕래하며 모든 중생을 교화하는 대자대비한 보살이다. 그렇기 때문에 명부전은 조상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도량으로 널리 이용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지장신앙이 삼국시대 이래로 널리 유행하였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음력 7월 15일 백중일에 이곳을 찾아 죽은 사람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고 있다. 특히 지장보살은 죽은 사람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49제 때 절대적인 권능을 가지는 보살로 알려져 있다.
이 건물은 고려 공민왕18년(1369)에 창건되어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쳤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화재로 불탄 것을 고종25년(1888)에 중건하였는데, 현재의 건물은 그 때의 것이다. 명부전은 통도사의 세개의 영역 가운데 상위 영역내에서 가장 위계가 낮은 건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된 이 명부전은 상위 불전인 응진전보다 크고, 화려한 다포계 팔각지붕 형태의 건물이다. 아마 조선 후기의 중건 과정에서 원래의 형태가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 기타 통도사의 불전
▲ 대웅전 앞마당에서 바라본 석탑 뒤편의 세존비각과 개산조당
▲ 삼성각
▲ 세존비각
▲ 개산조당
▲ 통도사 종무소 근처의 법당들
통도사와 부속 암자의 탐방을 마치고 인근에 위치한 오리민속,골동품 & 미술,공예박물관을 방문하였다. 통도사주차장에서 약 4.6km 정도 떨어진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고 관장이 민속공예품을 십수년간 수집하다가 오리를 주제로 다양하고 독창적인 민속, 골동품과 세계 여러나라의 오리 공예품들을 별도로 정리하여 박물관을 개장한 체험학습의 테마공간이라 호기심에 찾아가 보았다.
별도의 입장료는 없고, 조용하고 운치있는 산자락에 위치해 있고 카페를 겸하고 있어 한 잔의 커피나 음료를 마시며 체험프로그램과 박물관 관람을 할 수 있는 휴식공간으로 적격의 장소였다.(1층은 카페, 2층은 전시장)
19:41~20:18=>오리박물관
▲ 오리박물관 전경
▲ 오리박물관 입간판
▲ 박물관 내부 전경
* 소재지 :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삼수리 392번지(T.055-389-1311)
* 개관시간 : 10:00AM~10:00PM(연중무휴)
* 소개글(오리관장)
오리박물관은 전통 민속품과 골동품을 오랜기간동안 수집해온 주인장이 예로부터 우리에게 가장 친근한 동물 가운데 하나인 오리를 주제로 지난 십수년간 민속품, 골동품 및 세계 여러나라의 미술, 공예품 3,000여점을 수집하여 전시해 놓은 테마박물관입니다.
이곳에서 관람객들은 상상을 넘어서는 다양하고 창의적인 소재와 기법의 작품들을 만나면서, 놀라움과 만족감을 맛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 체험프로그램 :
- 오리탁본 만들기
- 오리와 관련된 악기체험
-오리종이접기
-오리친구랑 사진찍기
-오리그림 그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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