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은 관광명소/명찰을 찾아서

직지사(直指寺)/경북 김천

왕마구리 2008. 10. 8. 14:53

◀ 직지사(直指寺) ▶

▲ 직지사 대웅전과 삼층석탑

 

대한불교 조계종 25개 교구본사 탐방의 하나로 2008년도 들어 경남 합천의 해인사, 경남 양산의 통도사 그리고 경북 영천의 은해사에 이어 네번째로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와 그 부속암자를 찾게 되었다.

직지사에는 다른 교구와는 달리 부속 암자(은선암, 명적암, 백련암, 중암, 북암, 운수암)가 많지 않고, 그 창건연대도 20~30년 정도된 신흥암자들로 역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고 현대식 건물들로 이루어져 있어 3개의 부속 암자(은선암, 명적암, 백련암)만을 방문하고는 직지사 경내를 탐방하는 것으로 일정을 마무리하였었다.

유독 직지사의 부속 암자들이 적은 이유는 은선암 주지스님의 말을 빌리면 "구한말 동학난 때 관군과 일본군으로 이루어진 진압군에 패한 동학도와 일반인들이 직지사 산중의 암자들로 피신을 하게 되었는데, 생계를 위하여 일부가 주변의 주민들이나 추풍령을 넘나드는 여행객이나 상인들에게 폐해를 끼치는 산적화 하게 되었다. 이에 주민들이 그 폐해를 이기지 못하고 국가에 그 근거지로 이용되는 암자들을 폐쇄해 줄 것을 요청해 직지사를 제외한 모든 주변 사찰과 암자를 철거하게 되었다"라고 한다.

또한 직지사도 조선시대 말엽 국운의 쇠퇴와 함께 그 사운을 같이 하여 일제시대 사찰령이 제정되면서 해인사의 말사로 전락하는 위기에 처하기도 했으나, 광복 이후 본산제도가 재편성되면서 본산으로 승격되어 그 사세를 차츰 회복하며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 일 정 표 】2008년 10월 6일(월)

      직지사입구/매표소(12:43)→은선암(13:03~13:35)→명적암(13:50~14;17)→백련암(14:26~14:33)→직지사(14:43~16:28)

【 교 통 편 】승용차 이용

<< 갈 때와 올 때 >> 부천-(도시외곽순환도로)-조남분기점/서서울요금소-(영동고속도로)-신갈분기점-(경부고속도로)-추풍령I.C.-(4번국도)-덕천네거리-(903번지방도)-직지사 : 편도 약 240km

 

【 직지사 소개 】

백두대간의 준령이 남쪽으로 뻗어 내려오다가 그 서쪽 추풍령에서 잠시 머물며 관문을 이루었고, 다시 서남방향으로 웅장한 산세를 유지하며 달려와 충청북도 영동군과 전라북도 무주군, 그리고 경상북도 김천시와 3도경계를 이루는 삼도봉 직전 힘차게 솟아오른 해발 1,111m 높이의 황악산 동남쪽 산자수명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현 행정구역상의 주소는 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 운수리 216번지이다.

예로부터 동국제일가람이라는 말이 전해지는 직지사는 김천에서 12km 떨어져 있으며, 남한의 중심부(추풍령이 경부고속도로 중간점:남북기준 각 214km)에 위치해 직지사가 위치한 곳은 예로부터 길상지지로 전해지고 있다.

직지사가 위치한 황악산은 최상봉인 비로봉과 선유봉, 천룡봉, 운수봉이 있고 조금 내려와서 절경대가 있으며 그 중턱에 부속암자인 운수암이 자리를 잡고 있다. 운수봉에서 2km 정도 올라가면 백운봉, 그 아래로 만경대가 펼쳐진다. 남서로 난 능선에는 망월봉과 신선봉, 그 위로 형제봉이 있으며 형제봉은 백운봉과 마주하며 아름다운 절경을 이루고 있다.

황악산의 3대 계곡은 능여계곡, 내원계곡, 운수계곡이며, 능여계곡에는 옛날 능여대사가 황악산 계곡의 원천을 찾았다는 멱원대를 비롯하여 많은 대와 소가 있고, 두 곳의 폭포와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다. 또한 이곳은 능여천과 법수천의 약수가 있어 더욱 유명하다.

 

직지사는 신라 눌지왕2년(418) 아도화상에 의해 도리사와 함께 개창되었다. 절 이름은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선종의 가르침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며, 일설에는 창건하신 아도화상이 일선군(현 경북 선산의 옛 지명) 냉산에 도리사를 창건하고 멀리 김천의 황악산을 가르키며 저 산 아래도 절을 지을 길상지지가 있다고 하여 직지사라 이름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또한 고려시대 능여화상이 직지사를 중창할 때 자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손으로 측지를 하여 붙여진 이름이란 설도 있다.

아도화상에 의해 창건된 직지사는 신라시대에 2차례의 중수가 이루어졌는데 첫번째는 선덕여왕14년(645) 자장법사에 의헤서이고, 두번째는 경순왕4년(930) 천묵대사에 의해서이다. 자장법사에 의한 중수내용은 기록이 없어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천묵대사 때의 중수사실은 보다 자세히 전해지고 있다.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하기 5년전인 이 때는 신라의 국운이 쇄진하여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변혁기에 이루어진 중수이다. 직지사 사적에 따르면 본사를 중수하고 천묵대사는 금자대장경(金字大藏經)을 서사하여 신라 조정에 헌상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 사실은 현존 유품이 없어 그 내용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금자대장경비가 이를 입증하고 있다.

이는 우리들이 대장경이라 하면 해인사의 고려대장경을 그 대표로 치는데, 이보다 앞선 신라시대에 이미, 그것도 금자대장경을 만들었다는 사적기의 내용이 진실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더구나 이를 접한 경순왕이 어찰로써 점제(경명을 쓰는 것)하였다고 전하니 그 의의는 크다 하겠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에 대한 현품이 전래되지 않아 그간의 사정을 잘 알 수는 없지만 왕조가 바뀐 고려시대 초기에 직지사에 금자대장경이 봉안되었고, 또한 대장당비가 건립되었다.

고려 태조 왕건은 직지사의 고승 능여조사의 도움으로 후백제와의 불리한 싸움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직지사는 국가의 비호를 받았으며, 능여조사의 제자들 역시 대대로 본사를 중흥하였고 광종 원년(950)에는 3월 1일부터 약 50일간 법회를 개설하여 경찬회를 성대히 베풀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이때의 경찬법회는 금자대장경을 다시 필사한 것에 대한 법회인지, 아니면 경순왕이 점제하였던 금자대장경을 신라 조정으로부터 인수하고 대장당을 건립한 낙성연인지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아마도 후자일 가능성이 짙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직지사 금자대장당비를 새겨 북정에 세웠다는 사적기의 내용에서 기인하며, 이의 물적근거는 대동금석서에 실려 있는 직지사 대장당기비의 탁본이며, 이는 왕우군의 집자로 유명하다.

 

조선시대에 들어 정종원년(1339) 정종의 어태를 절의 북봉에 봉안함으로써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어 조선시대에서도 계속 사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조선 중기에는 사명대사가 본사에 출가하여 신묵대사의 제자가 된 것이 유명한데 이로 인하여 직지사는 배불의 그늘 속에서도 사운을 유지할 수 있었다.

30세에 주지가 된 사명대사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구국제민의 선봉에서 큰 공을 세워 그 공로로 직지사는 조선 8대가람의 위치에 놓이게 되었고 300여개의 소속사암을 거느리게 되었다.

 

현재 직지사는 25개 본산의 하나로 제8교구 본사이며, 소속 말사 54개 사찰을 거느리고 있으며, 관할구역은 4개시(김천, 구미, 상주, 문경)와 1개 군(예천군)이다. 이렇게 직지사는 중건과 중수를 거치면서 천 수백년간 법등을 이어오다가 최근 4반세기 동안 창사 이래 최대의 불사를 일으키어 그 면모가 일신되었는데 이는 1958년 주지로 부임한 녹원화상에 의한 중흥불사의 공덕에 힘입은 바라 할 것이다.

먼저 사찰 주변의 정화를 위하여 사유대지 10,088평과 전답 12,627평 그리고 임야 3,740평을 매입하였고, 사적기에 따라 모든 불전과 당우를 중건, 중수함은 물론 국제회의와 대법회를 위한 본사 최대의 건물인 만덕전을 건립하는 한편 4기의 신라시대 고탑을 이전하였으니 이는 창건이래 최대의 불사이며 일대변혁이 아니라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선조29년(1596) 임진왜란 때 43동의 건물 중 천불전(비로전), 천왕문, 자하문을 제외하고 모두 불에 타 버렸으며, 1602년부터 70여년에 걸쳐 중건불사를 벌여 상당한 규모를 유지하였으나 1805년부터 사세가 기울기 시작하다가 6.25동난과 정화의 물결에 휩쓸려 퇴락하였는데 주지 녹원스님이 부임하여 1966년 이후 대대적인 중창불사를 거행하여 오늘의 대가람을 형성하게 되었다.

현재 직지사에는 쌍탑을 거느리고 있는 대웅전과 규모가 큰 천불전(비로전)을 비롯하여 극락전, 응진전, 명부전, 사명각, 범종각, 일주문, 금강문, 사천왕문, 천불선원과 요사채, 명월료, 청풍료, 설법전, 제하당, 남월료, 만덕정 등 65동의 전각이 있다.

 

▲ 매표소 지나 직지사 가는 길

 

【 직지사의 불전과 문화재들 】

 ♧ ♧ 직지사의 4대문

 

▲ 일주문 

 

▲ 대양문 

 

▲ 금강문 

 

▲ 사천왕문

 

▲ 마지막인 사천왕문을 통과하고 뒤돌아 본 4대문들

▲ 사천왕문을 통과하고 직지사 본전인 대웅전 앞 마당으로 들어서는 관문인 만세루

 

♧ ♧ 직지사 대웅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15호

*소재지: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 운수리 216

대웅전은 석가모니를 모신 건물이다. 직지사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약사불과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다.창건 당시인 신라시대 때의 규모에 대하여서는 알 수가 없지만 고려이후 조선시대 초기 정종때까지는 2층 5칸의 특수한 건물이었던 것으로 추정이 된다. 사적기에는 '대웅대광명전'이라 하였으며 명칭이 특이하였던 것으로 미루어 당시에는 석가모니불과 비로자나불을 동시에 봉안하였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알 수가 없다. 임진왜란 때 화재로 전소되어 선조35년(1602) 사승 인수, 명례 등에 의하여 중창되었고, 이후 인조27년(1649)에 중영이 있었고, 영조11년(1735) 주지 수변화상, 전 주지 설운 종익 그리고 태감화상을 비롯하여 산중 대중의 협력과 시주로 중창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이 중창 불사에 참석한 관계자와 900여명의 시주자 등은 중창 상량문을 통해 그 명단을 알 수가 있는데 1963년 3월 1일~1970년 11월 30일 사이 주지 녹원화상에 의하여 연목 교체와 기와를 번와할 때 확인되었다.

그 후에도 계속하여 대웅전의 주위 석축 및 축대를 새로 조성(1973년 4월 10일~1975년 6월 20일)하고, 연목 교체 및 기와가 번화(1979년 10월 25일~1980년 1월 14일)되었고, 1980년 8월부터 부분적으로 고색금단청을 하였다.

건물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이며, 지붕형식은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직지사의 중심법당답게 크고, 짜임새가 있으며, 높은 천장에 화려하면서 절제된 장식은 종교적인 장엄함이 더한다.

세 분의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내 수미단은 효종2년(1651)에 조성된 것으로 용, 물고기, 개구리, 연꽃 등 여러무늬들을 소박하게 조각하였다. 폭이 9m에 이르는 후불벽 뒤에는 대웅전 중건 당시의 벽화로 구름위에 선인과 용을 탄 관세음보살 그리고 문수동자상이 활달한 필치로 그려져 있다.

 

▲ 직지사 대웅전

 

▲ 대웅전 편액 

 

▲ 대웅전 앞의 삼층석탑 

 

▲ 대웅전 앞 석등 

 

▲ 대웅전 앞 당간석주 

 

♧ 대웅전 앞 삼층석탑

*보물 제606호

이 두탑은 통일신라 말기(9세기)의 석탑이다. 비로전 앞 삼층석탑과 함께 원래는 경북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의 도천사터에 쓰러져 있던 것인데 1974년 이곳으로 옮겼다.

이 탑들은 대체로 통일신라 삼층석탑의 양식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인 삼층석탑에서 보이는 이중기단이 아니라 단층기단인 것이 특이하다.

기단에는 면마다 안기둥과 귀기둥을 돋음새김하였을 뿐 다른 장식은 없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을 각기 하나의 돌로 만들었는데, 몸돌에는 다른 장식없이 귀기둥 모양만 돋을새김하였다. 지붕돌에는 수평을 이룬 처마선 아래로 1층부터 차례로 5.5.4단의 처마받침을 두었으며, 1층 지붕돌에는 추녀 끝마다 풍경을 달았던 구멍이 뚫려져 있다.

상륜부는 1976년 추정 복원한 것이다. 이 탑들은 단층기단인데다가 1층 몸돌이 유난히 길게 올라가 있어서 시원한 상승감이 돋보인다.

 

♧ 대웅전 삼존불탱화

*보물 제670호

대웅전 수미단 위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동쪽에 약사불과 서쪽에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다. 불상 뒷면에는 각 부처들의 설법 장면을 그린 석가모니후불탱, 약사후불탱, 아미타후불탱 등 3폭의 불화가 걸려 있다.

비단 바탕에 그린 이 불화들은 모두 6m가 넘는 거작으로 영조20년(1744)에 직지사의 세관스님, 신각, 밀기을 비롯한 16명의 화승들이 그린 것이다.

각 폭마다 여래를 중심으로 보살, 나한, 천왕, 신장 등을 배치하였고, 적색, 녹색, 황색을 주조색으로 채색하였다. 짜임새있는 구도, 또 존상표현에 보이는 뛰어난 묘사력, 차분한 색조와 조화로운 배색, 화려하고 섬세한 세부 표현 등이 어우러져 장엄한 불교회화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직지사 삼존불탱화는 작품성과 규모에 있어 18세기 불화를 대표하는 우수한 작품이다.

중앙에 배치된 불화는 석가가 영취산에서 여러 불,보살들에게 설법하는 모습을 그린 영산회상도이고, 왼편에 있는 약사회도는 화면의 중앙에 약합을 든 약사여래가 앉아 있고 그 주위에 8대보살과 사천왕, 12신장 등이 에워싸고 있는 복잡한 구도이다. 오른편의 아미타회상탱화는 중앙에 아미타불을 두고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을 비롯하여 신장상 등이 주위를 둘러싼 구도이다.

 

▲ 대웅전 삼존불탱화 

 

♧ ♧ 관음전(觀音殿)

관음전은 일명 원통전이라고도 하며 관세음보살을 모신 곳이다.

협시로는 남순동자와 해상용왕이 있으나 대부분 후불탱화로 나타낸다. 대승불교가 낳은 수많은 보살중에서 관세음보살 만큼 대중의 신앙대상이 된 보살도 드물다. 모든 중생의 애환을 대자대비로 거두어 주는 관세음보살은 중생의 근기에 맞게 32응신으로 화현하여 중생을 구제한다.

 

▲ 관음전

 

▲ 측면에서 바라본 관음전 

 

▲ 관음전 앞 샘터 

 

♧ ♧ 응진전(應眞殿)

응진전은 고려 태조14년(931) 능여대사가 창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던 것을 효종7년(1656) 관음전으로 중건하였다가 뒤에 응진전으로 개액하였다. 이 건물은 그후 주지 녹원화상에 의하여 중수되었는데 이때는 기와 번와, 단청 및 석조 축대까지 신축(1970년 3월 1일~1971년 11월 30일)되었다.

응진전에 모셔진 나한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많은 제자들 중 상수제자 16인이다. 이들은 일찍이 말세의 중생에게 복덕을 성취하게 하고 정법으로 인도하겠다는 원을 세운 성자들이다.

따라서 이들은 많은 영험담과 함께 민간에게 신봉되어 나한 신앙을 형성하게 되었다.

 

 ▲ 응진전

 

♧ ♧ 사명각(四溟閣)

사명각은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구한 호국대성 유정(1544~1510) 사명대사의 영탱을 봉안하여 대사의 유덕을 기리는 건물로서 조선 정조11년(1787)에 창건되었다.

대사의 속성은 임씨, 자는 이완이며, 법명은 유정, 법호는 사명 또는 송운이다. 1544년 10월 17일 경남 밀양의 무안면 고나리에서 태어나 15세에는 황악산 아래 유촌 황여헌으로부터 유학을 수학하더니 곧 황악산 직지사로 출가하여 주지 신묵화상의 제자가 되었다. 18세가 되던 명종6년(1561)에는 선과에 합격하고 30세인 선조6년(1573)에는 직지사의 주지가 되었으며, 49세되는 선조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큰 공을 세웠다.

특히 적의 진중에 여러 차례 드나들며 왜적을 설득하여 백성들의 화를 면하게 하더니 선조37년(1604)에는 61세의 몸으로 일본에 건너가 억류되었던 포로 3000여명을 데리고 귀국하므로 선조는 가의대부로 삼아 어마를 하사하는 등 대우가 극진하였다.

광해군2년(1610) 67세를 일기로 가야산 해인사에서 입적하니 시호는 자통홍제존자라 하였다.

 

▲ 사명각

 

♧ ♧ 직지사 비로전(毘盧殿)

일명 천불전이라 하는 이 건물은 고려 태조의 지원으로 능여대사와 그의 제자 신흥, 해안 등에 의하여 초창되었다. 직지사 내에서 병화를 모면한 3동의 건물 중 하나로 현종2년(1661) 인계대사가 중창하였고, 숙종8년(1702) 정행대사 등의 중수와 함께 1899년의 중수를 거쳐 1975년 주지 녹원화상이 중건하였다.

정면 7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양식이며 총 51평이다.

천불상은 고려시대 속리산의 경잠대사에 의하여 조성된 것으로 전한다. 비로전 앞에는 수령 500년된 측백나무와 1974년 대웅전 앞 삼층석탑 2기와 함께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 도천사터에서 옮겨 온 통일신라 시대의 삼층석탑이 있다.

 

▲ 비로전 앞에서 기념촬영

 

♧ 비로전 내 천불상(千佛像)

고려시대 속리산의 경잠스님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전해지는 천불상은 많은 전설을 가지고 있으며 그 모습이 각기 다르다. 불상의 재료는 경주 특산인 옥돌을 사용했는데 그 모습은 사방의 모든 부처님을 모셔 놓은 듯 장엄하다.

천불전 내 비로자나불 뒤로 서 있는 발가벗은 동자상이 있는데 참배자가 법당에 들어가 참배할 때 첫 눈에 이 동자상이 들어오면 옥동자를 낳는다는 전설이 있다.

 

▲ 비로잔 내의 천불상/중앙에 서있는 동자상이 보인다.

 

♧ 직지사 비로전 앞 삼층석탑

*보물 제607호

이 석탑은 통일신라 말기(9세기)의 석탑으로 대웅전 앞에 서있는 2기의 삼층석탑과 함께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 도천사터에 있던 3기의 석탑 중 하나이다.

1974년 이곳으로 옮겨왔으며, 1976년 상층부를 추정, 복원하였다. 이 탑은 대웅전 앞 삼층석탑과 크기나 양식, 세부가 모두 같다. 이렇게 모든 면에서 동일한 3기의 석탑이 한 곳에 서 있는 경우는 그 밖의 예가 남아 있지 않아서 매우 특이한 경우에 속한다. 또한 이 탑은 삼층석탑이면서도 이중기단이 아닌 단층기단 석탑으로서 이러한 예는 문경, 상주, 선산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것으로 보아 이 지방의 특색으로 이해가 된다.

 

▲ 비로전 앞 삼층석탑

 

  

 

♧ ♧ 직지사 청풍료(淸風寮)

청풍료는 주지 녹원화상이 1966년 4월 1일~1971년 11월 30일 긴 공사기간을 거켜 신축한 건물로 팔작지붕이면서 귀틀을 낸 'ㄱ자형'이다. 본래는 7칸이었으나 현재는 정면 9칸, 측면 5칸의 금단청 건물이며 총 면적은 92.76평이다.

이 건물은 현재 직지사의 성보유물전시관인 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 청풍료

 

♧ 청풍료 앞 삼층석탑

*보물 제1186호

이 탑은 통일신라 말기(9세기)의 석탑으로 원래는 구미시 선산읍 원동 낙동강변 강락사터로 전해지는 절터에 무너져 있던 것이다. 1968년 경북 선산군 군청 앞 뜰에 옮겼다가 1980년 다시 이곳으로 옮겼으며, 이때 상륜부를 추정, 복원하였다.

기단이 단층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전형적인 통일신라 삼층석탑의 양식을 고루 갖추고 있다. 기단은 한면을 두 장의 돌로 짜맞추었는데 안기둥과 귀기둥을 돋을새김 했을 뿐 별 다른 장식은 없다. 탑신을 이루는 몸돌과 지붕돌은 각기 하나의 돌로 만들었다. 몸돌에는 다른 장식없이 귀기둥만 돋을새김 하였으며, 지붕돌에는 수평을 이룬 처마선 아래로 5단의 처마받침을 두었다.

1층 몸돌의 높이가 2,3층에 비하여 성큼하게 높으면서도 지붕돌의 두께와 폭이 알맞아 단층기단의 탑이면서도 차분한 안정감과 경쾌한 균형감을 가지고 있다.

 

▲ 청풍료 앞 삼층석탑

 

♧ ♧ 약사전(藥師殿)

약사전은 동방유리광정토를 표출시킨 법당으로 약사여래가 봉안되어 있다. 아미타신앙이 사후의 신앙을 기본으로 하는 반면 약사여래신앙은 현실적 이익을 바탕으로 한다. 따라서 약사여래는 인간을 질병으로부터 보호하여 줄 뿐만 아니라 죽음을 물리치는 힘을 갖고 있는 부처로 대중의 신앙대상이 되었다. 왼손에는 약사여래의 특징적 모습인 약함을 들고 있다.

 

▲ 약사전

 

♧ 약사전내 석조약사여래좌상(石造藥師如來坐像)

*보물 제319호

 

 

 

 

 

 

 

 

 

 

 

 

 

 

 

 

 

 

 

 

 

 

 

 

 

 

 

 

 

광배와 불상을 하나의 돌로 만들었다. 불상의 머리는 민머리이고 정수리 부근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표현되었다.

 

얼굴은 마모가 심해 세부 표현을 자세히 살필 수 없지만, 둥글고 풍만한 인상이다.

옷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고 있는데, 옷에는 평행 계단식의 무딘 옷주름이 표현되어 있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이 아래를 향하고 있고, 왼손에는 약항아리를 들고 있어서 이 불상이 약사여래상임을 알 수가 있다.

 

부처의 몸에서 나온 빛을 형상화한 광배는 폭이 넓어 맵시있는 모양은 아니지만 덩클무늬와 불꽃무늬를 새겨 장식하였다.

 

전반적으로 세부표현이 둔감해졌으며, 광배의 무늬도 세련미가 줄어든 점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의 양식을 계승한 약사여래좌상으로 볼 수 있다.

 

이 불상은 현재 성보박물관에 모셔져 있으며, 상시 전시하고 있다.

 

 

♧ ♧ 기타 부속 건물들

 

▲ 대웅전 좌측에 위치한 범종각

▲ 비로전 우측의 명부전

▲ 비로전과 마주보고 있는 황악루

▲ 안양루와 천불선원

▲ 부속암자(은선암, 명적암, 백련암) 가는 길목에서 바라본 만덕전

만덕전은 일명 불교연수회관이며, 주지 녹원화상에 의하여 1991년 6월 11일~1994년 6월 30일까지 공사기간을 거쳐 건립된 직지사 최대의 건물이다. 형태는 'ㄷ자형'으로서 83칸의 주심포 겹처마 팔작지붕이며, 총 361.54평의 거대한 건물이다. 외부는 완전 목조건물이고, 내부 중량의 일부는 철근 콘크리트로 들보를 구성하였으나 완전 목재로 치자되었다. 기와는 동기와로 제작된 근래 보기 힘든 특수 양식의 건물이다.

 

▲ 남월료와 만덕전 전경

▲ 남월료

남월료는 직지사의 강당 건물로 주지 녹원화상에 의해 2층으로 신축되었다. 1층은 공사의 대중이 거처토록 한 일종의 후원 건물이고, 2층은 강원 학인들을 위한 강당이다. 1,2층이 모두 정면 11칸, 측면 6칸의 팔작지붕으로 총 232.2평이다. 현재는 직지사 승가대학(강원)으로 사용중이다.

 

▲ 법화궁(일명 설법전)

불법의 선양과 불자들의 수련을 위해 마련한 건물로서 일명 설법전이라고도 한다. 설법전은 혜창화상이 중건중에 있었으나 주지 녹원화상에 의하여 1987년 3월~1992년 6월 20일에 걸쳐 3층으로 신축한 건물이다. 각 층 11칸, 측면은 1,2층이 3칸, 3층은 2칸의 팔작지붕으로 총 294.51평의 거대한 복합 건물이다.

본사의 공간 활용에 의하여 각 층 다른 기능으로 건립된 건물로 1층 전관은 식당, 2층 전관은 빈객 접대를 위한 11개의 방사를 시설했고, 3층은 전체 설법전으로 구성되었다.

 

♧ 기타 직지사의 풍경

 

 

 

 

【 직지사의 부속 암자들 】

직지사의 부속 암자들은 몇 개 되지 않는데 최근에 20~30년내에 건립되어 선조들의 옛 정취를 느끼기에는 다소 미흡하고, 역사적 의미나 문화재적 가치를 지닌 암자도 없으며 규모도 단출하여 계획을 바꾸어 3곳의 암자만을 둘러 보고 직지사 본사를 탐방하였다.

직지사의 부속암자들도 다른 교구 본사의 경우처럼 산중 깊숙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어 매표소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걸어서 가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암자들로 이어지는 길은 황악산 등산로와 함께 하고 있지만 시멘트 포장이 되어 있어 차량으로 이동하는데에는 별 어려움이 없다.

평일인 관계로 매표소에서 관리인에게 암자들을 방문하기 위해서라고 양해를 구하고 차량출입 허가를 받을 수가 있어 별 어려움없이 부속 암자들을 탐방할 수가 있었지만 주말이나 휴일에는 등산객과 직지사를 참배하는 신도나 관광객들이 붐빌 경우, 일반인이 차량 출입 허가를 받기가 쉽지는 않을 것 같다.

 

은선암

부속암자인 은선암을 찾았을 때 많은 차량들이 은선암 경내 마당에 주차를 해 있어 오늘 무슨 행사가 있는지 어아해 하며 경내를 둘러 보고, 요사채 앞 커다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거북형상이 조각된 장독 항아리 형태의 우물이 신기하여 한참을 구경하고 있으니 은선암을 찾은 신자들을 배웅하고 계시던 주지스님이 다가와 우물(상부 대리석의 중량이 4,5톤, 하부 받침대의 중량이 5톤)을 만들 때의 경위와 직지사 부속암자들이 다른 교구 본사들에 비해 적은 이유 등 내용들을 설명해 주셨다. 그리고 오늘 한국무용의 대가였으며 한국무용 발전과 보급에 지대한 공헌을 하신 고 한영숙님(1920.2.2.~1990.10.8.)의 기일을 맞아 님의 부군과 제자들이 그의 명복을 비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왔다가 제를 마치고 모두 떠나는 중이라고 부연 설명까지 해 주셨고, 또한 기일 제를 올릴 때 준비하였던 약밥을 은선암 보살님이 출출할 때 먹으라며 챙겨 주신다.

매년 은선암에서는 고 한영숙님의 기일 때를 맞추어 제자들이 내려와 제를 올린다고 한다. 88올림픽 폐막식 마지막 공연으로 살풀이춤을 추어 세계에 한국무용을 알렸던 님이시고 그 춤이 생애 마지막 춤이 되었다고 한다. 우연히 은선암을 찾았을 때 님의 이름을 대하게 되어 그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인지라 늦게나마 그의 명복을 빌며 그의 생애를 우선 각략하게 되돌아 본다.

 

한영숙(韓英淑, 1920.2.2.~1990.10.8)

호는 벽사(碧史).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제40호 학무 기·예능보유자. 민속춤의 대가인 한성준(韓成俊)의 손녀이며, 아버지는 한희종이다. 9세에 홍성 갈미보통학교를 중퇴하고, 11세에 큰할아버지인 한성준을 따라 서울에 올라와서 13세부터 춤을 배웠다. 조선음악무용연구소에서 양금과 해금을 익혔으며, 승무·검무·살풀이춤·바라춤·태평무·한량춤·학춤 등을 배웠다. 1935년 7월 부민관에서 무용발표회를 가졌으며, 이후 일본 공연, 만주·북지 일대 순회공연, 황해도·평안도·함경도 등지의 순회공연을 다녔다. 1942년 한성준이 죽은 후 예술단체에 들어가 일본을 비롯한 만주지방과 전국순회공연을 가졌다. 1944년 황병렬(아코디언 연주자)과 결혼했다. 1946년 한영숙고전무용연구소를 설립해 후진을 양성했으며, 한국국악예술학교(지금의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서라벌예술대학·이화여자대학교·서울예술고등학교·서울예술전문대학·서울시립무용단·수도여자사범대학 등에서 후학을 지도했다. 그외 국가사절단으로서 일본 오사카[大阪] 엑스포 70 때 한국관에 출연, 1972년 삿포로[札幌]동계 올림픽 대회 민속예술단으로 참가, 뮌헨 하계 올림픽 대회 민속예술단 참가, 1975년 8·15 30주년 기념 일본 순회공연 및 오키나와[冲繩] 해양박람회 내셔널데이 공연 등에 참가해 국위 선양을 했으며, 1988년 서울 올림픽 대회 폐막식 공연에서 살풀이춤을 추어 한국춤의 진수를 세계만방에 알렸다. 1967년 서울특별시 문화상, 1970년 서울신문사 제3회 문화상, 1970년 국민포상 대통령상, 1971년 제3회 문화예술상, 1973년 훈장 동백장, 1980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등을 수상했다. 그의 승무·학춤·태평무·살풀이춤은 마치 매·란·국·죽(梅蘭菊竹) 사군자의 품격과 멋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 은선암 입구 갈림길의 이정표

 

▲ 은선암의 우물 

 

▲ 은선암으로 오르는 시멘트 길

▲ 은선암 경내로 들어서는 문 

▲ 은선암 본전(정면) 

▲ 측면에서 바라본 은선망 본전 

▲ 은선암 본전 좌측 숲속에 위치한 산신각 

▲ 은선암 요사채

 

▷ 명적암

▲ 주차장에서 명적암가는 길에 화정루를 배경으로

▲ 명적암 전체 전경 

▲ 명적암 본전과 석탑, 그리고 석등 

▲ 명적암 화정루 전경(사진 상:입구에서 바라본 전경/사진 하:경내에서 바라본 전경) 

 

▲ 명적암 입구의 이정표석 

 

▲ 주차장에서 명적암 가는 길 

 

 ▲ 명적암 가는 도로가에 설치된 '황악산 등산안내도'

 

▷ 백련암

 

▲ 백련암 입구의 이정표 

 

▲ 백련암 부속 건물 전경 

 

▲ 주차장에서 바라본 백련암 전경 

▲ 백련암 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