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은 관광명소/명찰을 찾아서

봉선사(奉先寺)/경기 남양주

왕마구리 2008. 10. 10. 13:11

◀ 봉선사(奉先寺) ▶

▲ 봉선사 경내에서

 

【 일 정 표 】2007년 12월 3일(월)  광릉수목원-봉선사

광릉수목원을 구경하고 인근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를 찾았다. 봉선사는 절 규모 면에서는 여러 차례의 전란으로 건물들이 소실되어 1900년대 들어 새로이 복원하거나 신축을 한 때문인지 다른 교구의 본사보다 작은 편이었고, 주변으로 부속암자들도 거느리고 있지 않아 탐방하는데에는 시간적으로 많이 소요되지 않아 절 입구에 위치한 전통다원에서 차 한잔을 음미하는 여유를 가져 보았다. 문화재적 가치를 지닌 유물들도 거의 찾아 볼 수가 없어 봉선사 하나만을 찾기에는 부족하니 광릉 그리고 광릉수목원을 함께 구경하는 스케줄을 잡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봉선사 절 입구에 도착하면 규모가 크지 않아 그런지 절이 옛 양반집 99칸의 대저택처럼 담을 겸하는 건물들로 둘러싸여 있고 경내로 들어가는 것이 마치 큰 저택에 대문을 열고 들어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서별실 뒷편으로 여러 개의 가마솥이 걸려있는 아궁이와 그 옆으로 가지런히 정돈된 장독대가 인상적이었다.

일주문에는 '운악산 봉선사'라 적혀 있었는데 봉선사 뒷산은 광릉수목원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소리봉(535.9m)인데 운악산이라 적혀 있어 약간은 어아하기 까지 하다. 봉선사 건너 편 세조의 능인 광릉 뒷산이 운악산(270m)이지만 산세의 규모가 보잘것 없고 일반인들에게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아 이를 따라 '운악산 봉선사'라 이름짓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다만 건너 편의 운악산 산줄기가 북진하여 경기도 포천군과 가평군의 경계선 상에 우뚝 솟아있는 경기 5악의 하나인 운악산(945m)까지 이어져 있으니 그 기운이 지능선 줄기를 타고 와 정면으로 받고 있다고 하여 그렇게 부른다면 모르겠지만...

【 봉선사 소개 】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256번지 광릉수목원 옆에 위치해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이다. 고려 광종20년(969) 법인국사 탐문이 운악사로 창건하였으나 조선 세종 때 이전의 7종을 선교양종으로 통합할 때 절이 혁파되었다가 예종원년(1469) 세조의 비 정희왕후 윤씨가 세조의 능침을 이곳으로 옮기며 '광릉'이라 하고 능침을 보호하고 세조의 명복을 비는 자복사로 삼아 89칸 규모로 중창한 뒤 봉선사라 하였다. 당시 봉선사의 현판은 예종이 직접 썼다고 하며, 같은 해 현재 보물 제397호로 지정된 법종을 주조하였다.

명종6년(1551)에 선교양종 중 교종의 수사찰로 지정되어 전국의 승려 및 신도에 대한 교학진흥의 중추적 기관으로 역활을 하다가, 선조25년(1592)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으며 이듬해(1593)에 주지 낭혜가 중창하였다.

인조14년(1636) 병자호란때 다시 사찰이 소실되었던 것을 1637년 주지 계민이 중창하였다. 영조25년(1749) 우점이 중수를 하고, 정조14(1790)에는 나라에서 전국 사찰을 관할하기 위한 5 규정소를 설치할 때 이 절은 함경도 일원의 사찰을 관장하였다.

헌종14년(1848)에는 화주 성암과 월성이 중수하였고, 1902년 도성 안의 원흥사를 수사찰인 대볍산으로 삼았을 때 봉선사는 16개의 중법산 가운데 하나로 지정되어 경기도의 전 사찰을 관장하였다.

1911년 사찰령이 반포되었을때는 31본산의 하나가 되었고, 교종대본산으로 지정되어 교학진흥의 주역을 담당하였다. 또 1926년에는 주지 월초가 대웅전과 요사채를 중수하고 삼성각을 신축하였다. 그러나 6.25동란으로 1951년 3월 6일 법당 등 14동 150칸의 건물이 완전히 소실되는 비운을 겪고 다시 복원 현재에 이르고 있다.

((복원내역))

- 1959년 화엄스님이 범종각을 복원

- 1961~1963년 능허, 운경선사가 운하당 복원

- 1967년 오보명일의 시주로 주지실(현 후원) 34평을 벽돌/스레트 건물로 신축

- 1969년 운경스님이 벽돌/스레트 건물인 요사 18평과 동별당 2평을 신축

- 1969~1970년 주지 운허스님과 화주 운경스님의 인권과 정문수행의 시주로 큰법당 30평을 복원

- 1972년 주지 만허스님이 정문수행의 시주로 정중탑 신축

- 1973년 주지 만허스님이 정문수행의 시주로 방적당 복원

- 1977년 주지 월운스님이 정보현행의 시주로 개건당 신축

- 1978년 주지 월운스님이 정보현행의 시주로 다경실 신축

- 1985년 설법전 낙성

- 1990년 동별당 2채를 해체하고 재건축

- 1993년 문창섭 거사를 비롯한 불자들의 협조로 유치원 신축과 개원

- 1993년 국고보조로 현대식 화장실 개축

 

현존하는 당우로는 큰법당, 삼성각, 개건당, 방적당, 운하당, 법종각, 청풍루, 요사채 등이 있으며, 이 가운데 큰법당은 대웅전과 같은 법당으로서 우리나라 최초로 한글 현판을 단 것이며, 법당 사방 벽에는 한글 '법화경'과 한문 '법화경'을 양각한 동판에 새겨놓아 이채롭다.

문화재로는 보물 제397호로 지정된 범종을 비롯하여, 1903년에 그린 칠성탱화, 사찰 입구의 보운당부도 등이 있다. 그리고 큰법당 앞에는 1975년에 운허가 스리랑카에서 모셔온 부처님 사리 1과를 봉안한 5층탑이 있으며, 1981년에는 운허의 부도탑을 세웠다.

이 밖에도 사찰 안에는 '춘원 이광수기념비'가 세워져 있으며, 절 옆에 있는 광릉은 사적 제197호이며, 천연기념물 제11호인 크낙새가 주변 숲에 서식하고 있다.

 

▲ 봉선사 일주문

▲ 옛 대저택을 연상시키는 절 입구 전경

▲ 봉선사 큰법당

조선 예종원년(1469) 초창된 건물로 봉선사의 본전이다. 일반 사찰의 대웅전과 같은 법당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현판을 단 법당이다. 89칸의 절 규모와 함께 서울 이북에서 가장 크다고 전해졌으며 병란으로 전소되어 1637년 계민선사에 의해 재창되었으나 다시 6.25사변으로 소실되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1970년 운허스님이 삼창한 것으로, 운허스님의 유지를 받들어 '큰법당'이라 이름짓게 되었다.

 

▲ 범종각과 봉선사 대종

♧ 봉선사 대종

*보물 제397호

이 종은 임진왜란 이전에 만들어진 몇 안되는 조선 전기의 동종으로 예종원년(1469)애 새조의 명복을 빌기위해 봉선사를 건립할 때 함께 만들어졌다.

이 종은 음통없이 두 마리 용이 용뉴를 만들고 있고 띠 장식대를 한 종신을 갖추고 있어 외래적인 유형에 속한다. 이 종은 음통이 없는 점, 종의 입구가 넓어지고 몸통에 두가닥의 띠를 넣은 점, 조각수법이 통일신라 이후의 범종약식을 따르지 않은 점 등에서 조선시대 범종약식의 선례가 되는 작품이며 조선 전기의 동종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 봉선사 경내의 가마솥 

 

▲ 봉선사 경내의 장독대 

 

▲ 경내에서 기념촬영

▲ 경내 전경

 

【 봉선사와 관련된 인물사전 】

▷ 월초화상(1858~1934)

월초화상은 속명이 거연으로 서울에서 태어나 15세 때 경기도 양주의 봉인사 부도암에서 환웅 환진스님에게 출가하였다. 1892년 남한총섭이 되고, 이듬 해에는 북한총섭이 되어 전국 승군을 총괄하였다. 1894년 갑오경장 때 승군제도가 폐지됨으로서 월초스님이 마지막 총섭이 된 셈이다.

1900년에는 은평구의 수국사를 대규모로 중창하였고, 이후 화계사에 머물면서 개화사상과 신문화에 대한 깊은 관심이 싹터 재래의 불교를 탈피하고 일본의 발달된 포교방식을 받아들여 한국불교를 혁신시켜 근대화하기 위해 이보담, 이동인 등과 뜻을 같이 하여 1902년 이들과 함께 1902년 동대문 밖 원흥사를 창건하여 전국 사찰의 관리서를 두었다.

1904년 원흥사가 문을 닫게 되자 이곳의 전각 일부와 불상, 탱화 등 불구 일체를 봉선사로 옮겼다. 지금도 남아 있는 칠성탱화와 독성탱화 등은 본래 원흥사에서 조성된 것들이다. 스님은 한국불교의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근대적 교육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1905년 원흥사 자리에 동국대학교 전신인 명진학교를 설립하였다. 1906년에는 봉선사의 교종판사가 된 후 줄곧 봉선사에 머물며 1926년까지 꾸준히 가람을 중수하고 제자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1934년에 집적하니 나이 77세, 법랍 63세이었다. 스님은 한국 근대불교의 선각자였고, 당대 제일의 강백으로서 운허 용하(1892~1980)스님도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 운허스님(1892~1980)

속명은 학수, 법호는 운허이며 법명은 용하이다. 청년기에는 일제의 침략에 당당히 맞선 항일투사, 종교인으로서는 불경의 번역가, 교육자로서는 후학의 양성에 전념한 분이셨다.

평안북도 정주군 출생으로 어린 시절 고향의 회헌재에서 사서를 비롯한 한문고전을 배우고, 1909년 10월부터 1911년 3월까지 평양대성학교에서 2학년까지 수학하였다. 1912년 1월 만주로 건너가 봉천에 있는 한인교포학교 동창학교 교원으로 재직하고, 이해 6월부터 배일단체인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여 배일정신을 고취하였다.

1914년 3월부터는 봉천성 홍유자 흥동학교를 설립해서 교포아동 교육에 전념하였고, 1917년 4월부터는 배달학교를 설립하여 1919년까지 교포아동의 교육을 실시했다. 3.1운동 직후 4월부터 12월까지는 독립군정기관지인 한족신보 사장에 취임하여 신문을 간행하고, 1920년 2월에는 독립운동기관인 광한당을 조직해서 활동했다. 그 뒤 국내단체와의 연계를 위해 비밀리에 잠입했다가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강원도 봉일사로 은신했다.

1921년 5월 경송스님을 은사로 강원도 고성군 유점사에서 득도했으며, 6월부터 12월까지 유점사에서 불교초등과를 이수하고 서기를 맡아보았다.

1924년 동래 범어사에서 사교를 이수했고, 1926년 청담스님과 함께 전국불교학인대회를 서울 안암동 개운사에서 개최하여 학인연맹을 조직했다.

1929년 다시 만주로 건너가 봉천 보성학교의 교장에 취임하였고, 1930년 9월 조선혁명당에 가입하여 조선광복을 위하여 활동했다. 귀국 후 1936년 경기도 봉선사에 홍법강원을 설립하여 후진양성에 노력했다. 해방 후 경기도 교무원장이 되었고, 1946년 4월 광동중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하였으며, 1953년 애국동지원호회에서 '한국독립운동사' 편찬에도 참가를 하였다.

운허스님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춘원 이광수와의 인연이다. 운허스님과 춘원 이광수는 6촌간으로 어린시절 같이 공부하면서 자랐다. 춘원 이광수가 친일변절자의 오명과 아들 봉근의 죽음 등으로 괴로워할 때 '법화경'을 소개해주어 불교의 세계로 인도해 주었으며, 감명을 받은 춘원이 법화행자의 길을 걷도록 조력해 주었다.

불경을 번역하는 것을 평생의 원력으로 삼고 1961년 국내 최초로 불교사전을 편찬했고, 1962년 종교인으로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문화훈장을 받았으며 1964년 동국역경원을 설립 초대원장에 취임하였다. 1978년 동국대학교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0년 11월 18일 봉선사에서 속랍 89세, 법랍 59세로 입적했다.

주요저서로는 '불교사전', "불교의 자비', '불교의 깨묵', 한글금강경', '정토삼부경', '대교지문' 등 다수의 번역 경전물이 있다.

 

▷ 태허스님(운암 김성숙 1898~1969)

평안북도 철산 출신으로 1916년 독립군에 가입하기 위하여 만주에 가려했으나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경기도 용문사 스님인 풍곡신원선사를 만나서 용문사에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으며, 월초 노스님으로부터 받은 법명이 성숙이다.

용문사에서 2년쯤 생활하다가 봉선사로 옮겨서 불교교리 공부를 헀다. 당시 봉선사에 출입이 잦았던 손병희와 불교계 인사인 김법린, 한용운 등과 친분을 쌓았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봉선사 스님들과 함께 부평리 일대에 시위운동을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루었다.

1922년 승려의 신분으로 사회주의사상단체인 조선무산자 동맹과 조선노동공제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일본의 탄압이 심해지자 승려 5명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여 북경 민국대학에 입학하여 정치학과 경제학을 공부했다. 또한 고려유학생회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일했으며, 장건상, 김봉환 등과 더불어 혁명단체인 '창일당'을 조직했고, '혁명'이란 기관지를 발행하여 사회운동의 분열을 반대했다.

단재 신채호, 유우근의 추천으로 조선의열단에 가입하여 항일테러운동을 지도하기도 했으며, 1926년 북경정부로부터 추방되어 광동으로 가서 중국 사회주의 혁명의 중요한 사건인 공동코뮨에도 참가했다. 광동코뮨의 실패 이후 상해로 돌아와 중국문화 총동맹과 작가연맹에도 가입하여 중국공산당과 연합하여 항일운동을 계속하였으며 주은래의 중매로 중국의 여성공산당원인 두영초와 혼인했다.

1936년 중국각지의 동지를 모아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조직했고,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동맹, 조선민족혁명당 등을 통합하여 조선민족전선연맹을 조직했다. 1938년에는 약산 김봉원과 함께 조선의용대를 조직하고 지도위원 겸 정치부장을 겸임했다. 194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단결을 강화하기 위해 민족전선연맹을 해체하고 임시정부와 통합하면서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취임했다. 해방 후 좌우합작을 주창하며 몽양 여운형과 함께 근로인민당을 조직하고 중앙위원에 뽑혔다.

그후 해방정국에서 좌우합작운동을 펼치는 중요한 몫을 담당하였으며, 6.25때 서울에 남았다가 공산당 부역혐의로 옥고를 치루었고, 1955년 조봉암 등과 접촉하여 진보당 추진위원회에도 관여했다. 5.16 이후에 이른바 통일사회당 사건으로 다시 옥고를 치루게 되었다.

운암의 일생은 젊어서는 항일무장투쟁으로 일관했고, 해방 후에는 반 이승만정권 운동과 좌우합작 및 통일운동을, 5.16 이후에는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길을 걸었다. 만년에는 가난과 궁핍으로 말미암아 크게 고통받았는데, 친지들의 주선으로 방 한 칸을 마련하고는 '피우정'이라 이름했다. 봉선사의 '피우정'도 여기에서 그 이름이 유래한다.

 

▷ 서해 최학송

남북한 문학사를 통틀어 '조선의 고리끼'라고 격찬받는 최서해(본명 최학송)는 1901년 함경북도 성진군에서 태어나 31세라는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할 때까지 가난과 고생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극한적인 궁핍과 간도 유랑 등으로 얻어진 삶의 체험을 바탕으로 문학적 형상화에 성공하여 서해는 1920년대 문학사에 한 획을 장식했다. 식민시대 일제의 통치기에 신음하는 민중의 고통을 그림으로써 사회의 부조리를 폭로했던 것이다.

그 당시 문단을 이끌어 나가던 사람들은 주로 고등교육을 받고 외국유학까지 다녀왔던 지식인 작가 위주였는데. 이들은 '개벽'과 '폐허'등의 동인지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개인의 낭만적 애상이나 비관적 허무로 가득 찬 인물들을 작품속에 투영하였다.

서해는 이런 경향의 작가군들과는 다르게 자신의 생생한 삶의 체험을 바탕으로 궁핍의 현실을 고발하고 사회모순을 폭로했기 때문에 항일의식과 사회변혁 의식을 고취시키기에 충분했다. 그의 이런 작품세계는 신경향파 문학의 대표적 성과물로 크게 각광을 받았다.

그의 출세작이자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탈출기'에서는 민중의 가난이 단지 본인의 무능과 나태함으로 인해 초래된 것이 아니라 사회제도의 모순에서 기인함을 인식하고 새로운 사상이 움트는 단체에 가입함으로써 변혁의지를 드러내기도 한다.

그는 1924년 10월 춘원 이광수의 권유로 봉선사에 와서 머리를 깎았고 행자수업을 받았는데, 이 작품은 바로 이 시기에 쓰여졌던 것이다. 그는 봉선사에 와서 불도에 정진하면서 문학을 새롭게 다지고 일신하는 계기를 가졌으며, '탈출기'를 비롯한 초기작품들인 '고국', '매월', 십삼원', '박돌의 죽음' 등이 봉선사에서 집필되거나 구상되었다. 봉선사는 서해문학의 주요한 작품들이 되었던 산실이었던 것이다.

 

▷ 춘원 이광수

이광수는 한국 신문학의 개척자로 '무정', '유정, '꿈' 등 역작을 남겼다. 특히 '무정'은 한국최초의 근대소설로서 초창기의 신문학을 결산해 놓은 시대적인 거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광수를 말할 때 반드시 언급하고 넘어가야 하는 사람은 육촌지간인 운허스님이다.

운허스님은 이광수의 젊은 시절의 경쟁자이자 노년기의 정신적 의지처였기 때문이다.

춘원은 어린시절 매우 불우했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가세가 기울어 친척집에 살면서 가난과 설움을 깊숙히 체험했다. 친척들 중 비교적 경제적으로 부유했던 재당숙집에서 생활했는데, 이 재당숙집안의 외아들이 바로 이학수, 훗날의 운허스님이었다.

이때의 기억을 회상하며 춘원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 있다.

"나는 조그마한 이야기책을 지어서 큰 누나에게 보였으나 칭찬은 듣지 못하였고, 또 내 삼종제(운허스님)와 함께 노래와 고풍한시를 짓기를 내기했으나 언제나 내가 졌다. 백이는 무엇에나 나보다 재주가 승하였다. 그러나 백을 대할 때에 제일 부러운 것은 그의 꾸며짐없이 쭉 펴진 천진낭만한 성품이었다."

1921년 이광수는 상해 독립신문의 사장겸 편집국장을 사임하고 귀국한 뒤, 본격적 친일 노선을 걷기 시작한다. '민족개조론'을 일으켜 민족진영에서 소외되고 변절자라는 비난에 직면하던 시점, 이광수는 참으로 우연히 이학수와 재회를 한다. 1923년 8월 금강산 여행중이었던 춘원은 유점사에서 뜻밖에 승려가 되어 있는 자신의 육촌 윤허스님을 상봉하게 된다. 윤허스님은 변절자의 낙인과 차남 봉근의 죽음 등으로 번민하는 춘원에게 몸소 '법화경' 한 절을 져다주며 법화경의 세계로 이끌어 준다. 그 뒤로 춘원은 불교의 세계에 심취하여 스스로를 '법화행자'라 부르게 되었다.

1945년 경기도 사능에 칩거해 있던 춘원에게 그의 말대로 청천벽력처럼 다가온 해방의 소식을 전해주었던 것도 운허스님이었다. 친일변절자로 낙인이 찍힌 춘원에게 해방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고, 서울에서 '이광수 타도'라는 구호가 나붙고 이광수는 어디론가 피신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춘원은 운허스님이 계시는 봉선사로 입산하게 된다. 운허스님은 독립운동가로 활동했으므로 해방이후 크게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춘원의 입산을 위해 운허스님은 봉선사 절 담 옆에 방 하나를 마련해 주었다. 방 앞에는 추사체로 '다경향'이라는 액자가 걸려 있었으므로, 운허스님은 그 방을 다경향실이라 이름해 주었다.(이 집은 헐리고 신축한 다경향실이 있다.) 여기서 춘원은 법화경을 탐독하며 죄인의 심경으로 돌베게를 베고 살았다. 그 때문에 입이 삐뚤어져 물리치료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지만, 이 돌베게의 이미지는 진지한 내면의 고백을 쏱아내어 '돌베게'라는 수필집으로 엮어진다.

그리고 춘원은 그 해 겨울 봉선사를 떠나 다시 사능으로 되돌아 간다. 1946년 운허스님의 주선으로 광동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하였는데, 그 때 그가 지은 교가는 현재까지 애용되고 있다.

6.25사변이 나자 서울 자택에 잠시 갔다가 북한군에게 납치된 뒤로 소식을 모르는 터에 1975년 주요한 선생을 비롯한 동지들이 그의 연고와 깊은 봉선사에 기념비를 세우면 좋겠다고 제의하였는데, 운허스님께서 허락하여서 그의 기념비가 봉선사 어귀에 서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