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은 관광명소/명찰을 찾아서

은해사(銀海寺)와 부속 암자들/경북 영천

왕마구리 2008. 9. 14. 18:53

◀ 은해사(銀海寺)와 부속 암자들 ▶

▲ 은해사 경내 전경

 

【 일 정 표 】2008년 9월 8일(월)~9일(화) 1박2일

▷ 첫째날(9월 8일) : 은해사일주문→중암암(14:10~15:15)→백흥암(15:30~15:55)→운부암(16:13~16:45)→은해사(16:58~17:28)→거조암(17:57~18:15)

▷ 둘째날(9월 9일) : 만불사(10:48~12:45)

【 교 통 편 】승용차 이용

【 여 행 기 】

대한불교조계종 전국 교구 본사 탐방의 일환으로 이번에는 조선 31본산, 경북 5대 본산이었으며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25교구 본사 중 제10교구 본사로 자리를 지키고 있고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 팔공산 자락에 가람터를 잡은 교구 본사 중 본존불로 아미타불을 모시는 미타도량으로 유명한 은해사와 그 부속 암자들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해방 전까지만해도 대사찰의 위용을 자랑할 정도로 큰 규모였으나 현재 은해사 본사내에는 19개의 불전과 부속건물만 남아 있어 본사 자체를 둘러 보는데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 않지만, 8개의 부속암자(거조암, 운부암, 백흥암, 중암암, 기기암, 묘봉암, 서운암, 백련암)들이 팔공산 주변으로 본사로부터 멀리 떨어져 위치해 있어 이를 방문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려 전체를 둘러보지는 못하고 국보나 보물급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거나 유명한 설화가 남아 있는 암자 위주로 4곳(중암암, 백흥암, 운부암, 거조암)만 방문을 하였었다.

부속 암자들 중 산내 암자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중암암이 본사에서 4.8km나 떨어져 있으며, 방문한 4곳 중 가장 가까운 암자인 운부암이 2.5km 거리에 위치해 있다. 또한 근래에 와서 은해사 말사로 편입된 거조암은 팔공산 동쪽 기슭에 위치해 있으며 은해사로부터 약 13.2km 떨어져 있어 이동하는데 승용차로 20분 가까이 소요가 되었다.

만약 승용차 출입이 불가능했다면 부속암자를 방문하는 것이 불가능하였을 것이고, 다행이 평일이라 신자나 방문객이 거의 없어 입구에서 차량통행 허가를 받아 부속 암자들을 방문할 수가 있었다. 또한 백흥암은 비구니 스님들의 수도처로 경내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어 있었으나 큰 스님의 허락을 받고 보물 제790호로 지정된 극락전과 잠겨져 있던 극락전 문을 열고 스님의 안내로 출입하여 예불도 올리고 화려하고 정교하게 꾸며진 극락전 내부구조와 보물 제486호로 지정된 불단인 '극락전 수미단'도 직접 확인할 수가 있었었다.

둘째날은 경주와 영천시의 경계에 가까운 만불산 자락에 자리를 잡고 있고 200,000개 이상의 크고 작은 불상들이 모셔져 있는 만불사를 방문하였다. 비록 20여만평의 산사면을 이용하여 최근에 조성된 사찰이지만 다양한 테마 형태로 꾸며진 불전과 불상 등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통사찰이라는 이미지보다는 곳곳에 조성된 극락도량, 부도탑묘, 왕생단, 극락정토원 등으로 불자묘역이라는 강한 인상을 받았다.(만불사는 별도로 소개)

 

『 은해사(銀海寺) 』

□ 개  요

신라 41대 헌덕왕이 즉위한 809년 조카인 애장왕을 폐위시키고 즉위하며 당시 정쟁의 피바람 속에서 숨진 영혼을 달래고 헌덕왕의 참회를 돕고, 나아가 백성의 안녕을 위하여 혜철국사가 현 운부암 가는 길목에 위치한 해안평에 혜안사란 사찰을 창건하였는데 은해사의 시초가 된다.

그 후 혜안사는 고려 원종11년(1270) 홍진국사가 중창하였고, 충렬왕 때(1275)에 원참스님이 중건하였다. 조선 성종16년(1485) 죽청스님과 의찬스님이 묘봉암을 중창하였으나, 인종원년(1545) 큰 화재가 발생하여 사찰이 전소되었다. 이듬해 명종원년(1546) 나라에서 하사한 보조금으로 천교화상이 지금의 장소로 법당을 옮겨 새로 절을 지었다. 이 때 법당과 비석을 건립하여 인종의 태실을 봉하고 은해사라고 이름을 짓게 되었다.

1563년 화재로 소실되고 이듬해에 묘진스님이 중건하였으며, 선조22년(1589) 법영대사가 법당을 현재의 자리에 크게 중창하고 사찰의 규모를 확대하는 일대 불사를 이루어 내었다. 그 후 1592년 임진왜란이 있었지만 효종2년(1651) 각 전각들이 단청불사를 시행한 기록으로 보아 왜란을 겪으면서도 큰 피해는 입지 않은 듯 하다. 숙종38년(1712) 은해사를 종친부에 귀속시켰고, 1714년 사찰 입구 일대 땅을 매입하여 소나무를 심었다. 지금 은해사 앞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그때에 심어진 것으로, 300년 가까운 세월동안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소나무들이다.

 

▲ 은해사 입구의 소나무들

 

1761년 천왕문을 세우고 1772년 자암스님이 대웅전 불상을 개금하였으며 도봉스님이 영산전과 시왕전의 불상을 개분하였다. 영조는 세자시절에 이 은해사를 잘 수호하라는 완문을 지어 보낸 일이 있었다. 이것은 영조 등극 후에 어제완문이라 하여 이 절을 수호하는데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게 된다. 하지만 헌종13년(1847) 은해사 창건이래 가장 큰 불이 나 극락전을 제외한 천여칸의 모든 건물이 소실되었다.

그러자 인종의 태실 수호사찰이며 영조의 어제수호완문을 보관하고 있는 사찰인 은해사를 중창하고자 당시 영천군수 김기철이 300궤미의 돈을 박봉에서 털어내 시주했으며, 대구 감영과 한양 왕실의 시주가 계속 답지하였다. 그리하여 수만냥의 재원을 확보, 3년여간의 불사 끝에 헌종15년(1849) 중창불사를 마무리하여 대웅전, 향실, 고간, 설선당, 청풍료, 보화루, 옹호문, 안양전, 동별당, 만월당, 향적각, 공객주 등이 지어졌는데 이 중에서 대웅전, 보화루, 그리고 불광의 삼대 편액이 추사 김정희의 글씨로 채워졌다.

그 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은해사는 말사 39개소, 포교당 5개소, 부속암자 8개소를 관장하고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대본사이다. 1943년까지만 하더라도 은해사의 건물이 35동 245칸에 이르는 대사찰의 위용을 자랑하였지만, 현재 은해사 본사 내에는 19개 건물만이 남아 있다.

사찰의 이름은 불, 보살, 나한 등이 중중무진으로 계신 것처럼 웅장한 모습이 마치 은빛 바다가 춤추는 극락정토와 같다하여 은해사라 불리게 되었으며, 또 은해사 주변에 안개가 끼고 구름이 피어 날 때면 그 광경이 은빛 바다가 물결치는 듯 하다고 해서 은해사라고도 한다.

신라의 진표율사는 "한 길 은색 세계가 마치 바다처럼 겹겹이 펼쳐져 있다(一道銀色世界 如海重重)" 라고 표현한 바가 있다.

은해사는 조선시대 대부분의 산지가람처럼 단탑단금당식(單塔單金堂式)으로 가람배치가 되어 있다. 대웅전 앞에 있던 오층석탑은 최근 보존을 위하여 부도전으로 이전하였다. 대웅전 앞에는 보화루가 있고 보화루 좌우로 심검정과 설선당이 있으며 그 가운데 장방형의 정원이 있는 중정식 가람배치 구조이다. 중정은 장방형이지만 중간부분에 계단을 축대를 만들어 놓아서 보화루로 들어오는 참배객들이 볼 때 정방형에 가깝게 보여서 대웅전이 더 웅장하게 다가오는 느낌을 준다.

 

은해사와 추사 김정희

조선 영,정조시대 은해사는 영파성규 대사가 주석하면서 화엄종지를 크게 드날리고 있었다. 이 때 추사는 경상감사로 부임한 그 생부 김노경을 따라서 경상도 일원의 명승지를 여행하면서 이 은해사 일대도 들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헌종13년 대화재 뒤 헌종15년에 마무리 지은 불사 때 지어진 건물 중에서 대웅전, 보화루, 불광의 삼대 편액이 김정희의 글씨라서 마치 화엄루각과 같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뒤 고종16년(1879)에 영천군수 이학래가 다시 쓴 '은해사 연혁변'에서는 '문액의 은해사와 불당의 대웅전, 정각의 보화루가 모두 추사 김시랑의 글씨이고 노전을 일로향각이라 했는데 역시 추사의 예서체이다'라고 하였다.

추사 선생은 안동 김씨와의 세도싸움에서 패하여 55세 나던 해 헌종6년(1840) 9월 2일 제주도로 유배되어 9년 세월을 보낸 다음 헌종14년(1848) 방면되어 다음해 봄 64세의 노인으로 다시 서울로 돌아온다. 유배중에 불교에 더욱 깊이 귀의하게 된 추사 선생은 영파대사의 옛 터이며 또 자신의 친 외고조인 영조대왕의 어제 수호완문을 보장하고 있는 인연이 있음을 생각하고 현판과 문액을 기꺼이 써 주기로 작정하였던 것 같다.

이렇듯 거듭되는 인연에 제주도 유배기간 동안 갈고 닦은 기량을 최고로 발휘한 추사의 글씨가 새로 지은 전각들의 편액을 장식함으로써 과연 화엄루각의 장엄을 이루게 되었다. 1851년 추사는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 사건에 연루되어 함경도 북청으로 다시 유배길에 오르게 되는데 불과 2년 남짓의 한양 생활동안에 쓰여진 것으로 추측되는 추사의 글씨가 다섯점이나 은해사에 전해지고 있는 것은 그만큼 은해사와 추사의 인연이 깊기 때문이다.

간송 미술관 최원수 선생은 "무르익을대로 익어 모두가 허술한 듯한데 어디에서도 빈틈을 찾을 수 없다. 둥글둥글 원만한 필획이건만 마치 철근을 구부려 놓은 듯한 힘이 있고 뭉툭뭉툭 아무렇게나 붓을 대고 땐 것 같은데 기수의 법칙에서 벗어난 곳이 없다. 얼핏 결구에 무관심한 듯하지만 필획의 태세 변화와 공간배분이 그렇게 절묘할 수가 없다." 라고 은해사의 글씨를 평하였다.

문 위의 편액인 은해사, 불당의 대웅전, 종각의 보화루, 불광각, 노전의 일로향각 이 다섯점의 추사 글씨는 은해사의 자랑이자 소중한 문화재이다.

▲ 추사 김정희 선생의 친필인 '대웅전' 편액

▲ 추사 김정희 선생의 친필인 '보화루' 편액

 

□ 은해사 본사

▲ 대웅전

 

♣ ♣ 은해사 대웅전(大雄殿)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67호

*소재지: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 479

19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다포식 팔작지붕으로 내부는 우물마루를 깔고 내부기둥에 의지해 불단을 만들었다.

다포식 건물은 대출목이 외출목보다 2출목을 더 설치하였는데 이것은 사찰자리가 평지인 경우 건물 고를 높이기 위해 사용한 방식이다. 천장은 용 및 비천상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였고, 대량위에 걸친 충량머리에는 용머리를 조각하였다.

전체적으로 보아 조선 후기 다포식 건축물로서 지녀야 할 특성들을 잘 유지하고 있다.

▲ 대웅전을 배경으로...

 

 ▲ 은해사 괘불탱

 

♣ ♣ 은해사 괘불탱

*보물 제1270호

이 그림은 조선 영조26년(1750)에 화원 처일, 보총에 의해 그려진 족자그림으로 규격은 10.56m x 4,74m이며, 재질은 견본채색이다.

전체 높이가 11.56m에 달하며 독존도형식의 아미타여래상으로서 화려하면서도 기품있는 단아한 입상이다.

녹색의 머리광배에 붉은 색의 옷을 입고 있으며, 둥근 얼굴에는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어깨선 또한 둥글게 처리되어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이미지를 나타낸다. 화면 중앙부 양쪽의 단화에 배치된 붉은 꽃과 상단 좌우에 배치된 극락조와 천개장식은 불세계의 평화로움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지금까지 조사된 괘불화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내용이다. 또한 화면의 테두리를 녹색으로 구획지어 붉은 원안에 범자를 써 넣은 문양을 반복적으로 표현한 것도 이 괘불화의 특징이다.

이 그림은 상징적인 화면 구성과 원만한 형태, 유려한 필선, 적절한 색의 조화 등이 매우 돋보이는 18세기 불화 가운데서 걸작으로 평가된다.

 

▲ 보화루

 ▲ 보화루 우측의 설선당

 ▲ 보화루 좌측의 심검당

 ▲ 종각루

 ▲ 은해사 성보박물관

 ▲ 은해사 승가대학원

 ▲ 은해사 본사 부속 건물들(1)

 ▲ 은해사 본사 부속 건물들(2)

 

『 은해사 부속 암자들 』

▲ 은해사에 설치된 부속암자 이정표

 

□ 중암암(中庵庵)

▲ 천왕문인 바위문을 들어서며 바라본 중암암 전경

 

일명 돌구멍 절이라고 불리는 중암암은 삼국을 통일한 김유신 장군이 수련한 곳이다. 세살먹은 어린이가 흔들어도 흥들린다는 건들바위, 만년을 살았다는 만년송, 우리나라에서 제일 깊다는 해우소 등으로 유명하며 기암괴석이 빼어난 명소에 자리를 잡고 있어 경치 역시 자랑인 암자이다.

장군수는 김유신 장군이 열일곱살 때 이곳에서 수련하며 마셨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물맛이 아주 뛰어난 석간수이다.

은해사의 산내 암자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기도처로 본사에서 4.8km 떨어져 있어 차량없이 접근하기에는 먼 편이고 도보로는 약 1시간30분 정도가 소요될 것이다.

중암암의 역사는 정확하게 기록된 것이 없어 알 수 없고, 다만 돌문(천왕문) 밖에 있는 석탑(고려 초기의 작품)을 보아 오래된 암자일거라 추측해 볼 뿐이다.

이 절에는 샘에 얽힌 전설이 하나 있는데, 옛날에 이 샘에서 암자에 계신 스님을 위해 날마다 한 사람 몫의 쌀이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날 돌샘에서 쌀이 나오는 것을 목격한 산적이 욕심이 나서 스님을 죽이고 구멍을 크게 뚫으니 쌀 대신 피가 솟구치면서 돌바람이 불어 산적을 즉사시켰다는 전설이다.

  

▲ 중암암 주차장의 이정표

▲ 중암암 주차장의 팔공산도립공원 탐방로 안내도

▲ 중암암 주차장 근처의 약수터(1)

▲ 중암암 주차장 근처의 약수터(2)

 

약간의 공터인 중암암 주차장에 도착하면 팔공산 도립공원에서 탐방로안내도와 이정표가 있다. 주차장에서 중암암은 200m 떨어져 위치해 있는데 바위길을 따라 진행을 해야 한다. 바위길을 따르면 소운당 건물과 '장군수, 건들바위, 만년송' 안내문을 대하게 되고, 암벽 옆 사면길을 지나면 팔공산 등산로가 갈라지는 삼거리인 중암암 입구에 도착을 하게 된다.

 

 ▲ 중암암 가는 길목에 위치한 소운당

 ▲ 소운당 옆 안내문과 중암암 가는 바위길

 ▲ 중암암 가는 암벽 옆 사면 바위길

 

▲ 중암암 들어가는 석문인 천왕문에서...

▲ 중암암 입구 등산로 갈림길의 이정표

 

♣ ♣ 중암암 해우소

우리나라에서 제일 깊다는 해우소로 깊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설화가 있다.

옛날에 통도사와 해인사, 그리고 돌구멍절(중암암)에서 수행을 하고 계시던 세 분의 도반스님이 한자리에 모여 각자의 절 자랑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제일 먼저 통도사에 계시는 스님이 '우리 절은 법당 문이 어찌나 큰지 한번 열고 닫으면 그 문지도리에서 쇳가루가 1말 3되나 떨어진다'고 하며 은근히 절의 규모를 법당 문 크기에 빗대어 자랑을 하였다. 이어 해인사에서 오신 스님이 '우리 해인사는 스님이 얼마나 많은지 가마솥이 하도 커서 동짓날 팥죽을 쓸 때는 배를 띄어야만 저을 수 있다'고 하며 절의 규모와 큰 솥이 있음을 자랑하였다고 한다.

두 스님의 자랑을 듣고 있던 돌구멍절 스님은 절의 규모 등으로 자랑할게 없자 '우리 절의 뒷간은 그 깊이가 어찌나 깊은지 정월 초하루날 볼일을 보면 섣달 그믐날이라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라고 자랑을 하여 한바탕 웃었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어찌보면 중암암 스님이 제일 큰 허풍으로 도반스님들의 절 자랑을 제압했다고 볼 수 있지만 벼랑 위 바위 속에 만들어진 중암암 해우소가 얼마나 깊은가를 상상해 볼 수 있는 설화이다.

 

 ▲ 벼랑 위 바위 틈새에 만들어진 중암암늬 해우소

 ▲ 해우소 들어가는 입구

▲ 해우소 문

 

중암암 입구 등산로갈림길에서 등산로를 따라 바위 계단길을 잠시 오르면 삼층석탑과 그 뒤로 커다란 바위군락지대가 보이는데 집채만한 바위들이 만들어 놓은 틈새가 바로 유명한 극락굴(화엄굴)이다.

바위틈새 극락굴을 한 번 체험해 볼 생각으로 올라 갔는데 주위의 분위기가 어수선하고 중암암 스님 두 분과 등산객 남자 한 분이서 극락굴 바위 틈새를 연신 들락거리며 동분서주하고 계셨다. 바위굴 입구 널직한 암반 위에는 중년 아주머니 세 분이서 근심어린 얼굴로 앉아 계시는 것으로 보아 사고가 난 모양이었다. 잠시 후 영천소방서 119구조대원들이 6~7명이 올라오시는 것으로 보아 상황이 좋지 않은 것 같았다.

자초지종을 알아본 바 함께 온 아주머니 한 분이 극락굴에 들어가셨다가 무릎이 접힌 상태로 좁은 바위틈새에 끼여 움직이지도 못하고 40여분 동안 굴속에 갇혀있어 스님과 등산객의 도움을 받아 탈출을 시도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어 119구조대에 연락을 하신 것이었다.

영천소방서 119구조대원들이 도착하고 구조대원들이 약 20여분간 다각도로 노력과 고생을 하신 후 바위굴에 끼여 있던 접힌 무릎을 빼 냈다는 소식을 듣고, 구조과정을 지켜보는 바람에 시간을 허비하게 되어 일정때문에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극락굴 체험, 건들바위, 만년송 구경을 포기하고 다음 목적지로 향하였다.

화재진압뿐만 아니라 산속 인명구조까지 다양하게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시는 소방대원 여러분의 노고에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리고, 이번 극락굴 구조작업에 고생하신 영천소방서 119구조대 구조대원 여러분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영천소방서 119구조대원 여러분 화이팅!!!

▲ 증암암 주차장에 주차된 119구조대 차량

 

극락굴에 갇혔다 구조되신 아주머니와 일행은 운부암 구경을 마치고 은해사로 향하다 병원으로 후송된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운부암 입구 호숫가 옆 정자에서 식사를 하고 계시길래 건강에는 문제가 없는지 차를 돌려 몸 상태를 물어보니 일행들이 알아보고 감사하다며 음료수를 권하고 본인도 다행히 아무렇지가 않다고 하셨다. 만약에 극락굴을 방문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항상 조심을 하고 무리하게 들어가는 것은 피해야 할 것 같다.

 

♣ ♣ 중암암 삼층석탑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32호

*소재지: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 산25-1

이 석탑은 고려시대 초기의 삼층석탑으로 탑의 높이는 3m이고, 하층기단 갑석의 폭은 1.46m이다. 다듬질한 긴돌 4개를 결합하여 지대석으로 깔고 그 위에 2층기단과 3층의 탑신부를 올렸다. 형식은 전형적인 통일신라의 삼층석탑 형식을 따르고 있지만 기단부가 강화되었고, 옥개석 낙수면의 경사가 심해지는 등의 특징을 보아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암벽 아래 터를 조성하고 남북선상으로 나직한 축대를 쌓아 마당을 2단으로 구성하고 서쪽에는 법당, 동쪽에는 석탑을 배치하였으며 법당지에서는 법당 창건때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여골문 기와조각이 많이 출토되었다. 석탑에서 20여m 떨어진 곳에는 중암암(돌구멍절)을 비롯하여 극락굴, 삼인암, 건들바위, 만년송, 장군수 등이 있다.

 

▲ 중암암 삼층석탑과 옥계석이 사라진 석등

 

♣ ♣ 중암암 극락굴

중암암의 진면목은 역시 좁은 돌구멍이다. 절로 들어가는 석문 조금 앞에 있는 등산로를 따라 계단길을 몇 걸음 올라가면 암자크기에 알맞은 고려시대 3층석탑이 있고, 그 앞에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듯한 옥계석(지붕돌)이 사라진 특이한 모양의 석등이 하나 있다. 길쭉한 사각형 돌기둥 끝에 화창(등불을 넣어 두는 곳)만 만들어 놓았는데 대충 만들어 놓은 듯 하다.

이 중 중요한 것은 석탑과 뒤로 보이는 큼직한 바위가 있는데 그 속에 사각모양의 또 하나의 좁은 돌구멍인 '극락굴'이다.

굴이라 하기보다는 돌 틈이라 해야 올바른 표현일 듯 싶다. 사람 하나 겨우 들어 갈 돌틈이 사각모양으로 이어져 있는데 좁고 어두워서 마음에 욕심이 많거나 허영심으로 몸집을 키운 사람들은 두려워서 첫 발을 선뜻 들여 놓기가 힘이 들지 싶다. 그러나 그 굴을 빠져나오며 느끼는 쾌감은 말 그대로 극락을 다녀온 기분이다.

비좁은 공간에서의 해방감, 극락굴을 한 번 지나고 나면 세상이 달리 보인다. 극락굴을 통과해 본 사람만이 극락굴이라는 이름의 묘미를 알 수 있을 듯 중암암을 가면 이 극락굴을 꼭 지나가 보라고 권하고 싶다.

 

 

 ▲ 중암암 극락굴

▲ 극락굴 주변의 거암들

 

♣ ♣ 중암암 근처의 기타 명소

♣ 장군수 : 천년을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면 옛날 삼국통일의 큰 공을 세운 김유신 장군이 17세쯤 되는 화랑시절 이곳 돌구멍절에서 심신을 단련할 때 즐겨 마신 물이라하여 약수터 또는 장군수라고 옛부터 전해지고 있다.

♣ 건들바위 : 이 바위는 옛 어느날 밤부터 바위에서 울력 소리가 요란하게 나서 크게 놀란 당시 주지스님이 밖으로 나가보니 사람은 보이지 않고 바위가 암자를 곧 덮칠듯이 움직이고 있기에 부처님에게 기원하였더니 그 바위가 제 자리에서 훨씬 윗쪽으로 옮겨져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특히 이곳의 가을풍경이 가희 절경이다.

♣ 만년송 : 중암암에서 서쪽으로 약 200m 쯤 가면 백리는 하늘을 향해 바위틈에 붙이고, 가지는 땅을 향해 자라서 수평으로 길게 굽어져있는 만년송이란 소나무가 있는데 이곳 경관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것으로 그 모습은 가희 일품이다.

 

□ 백흥암(百興庵)

 

▲ 백흥암 전경

 

사기에 의하면 이 절은 국사 혜철이 신라 경문왕원년(861)에 착공하여 873년에 완공하였으며, 절 주위에 잣나무가 많아서 송지사라 하였다고 한다.(스님의 말씀으로는 백지사) 그 뒤 조선 명종원년(1546)에 백흥사로 개칭하였고, 효종2년(1651)에 중건하였으며, 숙종3년(1677)에 중수하였다.

영조6년(1730)에는 보화루를 중건하였고, 철종9년(1858)에는 청봉이 영산전을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절은 한때 수백 명이 수도하였다고 하며, 규모도 암자로서는 매우 큰 편이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극락전(보물 제790호)을 중심으로 영산전, 명부전, 문루, 산신각, 선실, 원주실, 요사 등이 있다. 극락전내에는 보물 제486호로 지정된 극락전 수미단이 있다.

 

▲ 백흥암 주차장의 이정표

▲ 보화루 우측으로 보이는 경내 출입문

 

비구니 스님의 수도 및 참선도량으로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암자라 담 넘어 경내를 기웃거리다가 혹시나 하나 생각에 보화루 우측의 출입문으로 들어 스님에게 극락전을 비롯한 암자내 구경을 할 수 없냐고 청을 넣어보니 흔쾌히 승락을 하시고, 잠겨진 극락전 문까지 열어주신다. 극락전에 들어 예불을 올리고 스님의 안내를 받아 극락전 수미단과 극락전 내부를 관람하는 특혜를 받을 수 있었다.

 

▲ 백흥암 극락전

 

♣ ♣ 백흥암 극락전(極樂殿)과 수미단(須彌壇)

*극락전:보물 제790호/수미단:보물 제486

*소재지: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 549

백흥암은 명찰 은해사의 암자로 신라 하대에 창건된 것으로 전해진다.

극락전은 조선 인조21년(1643) 건립하고 그 후 여러차례에 걸쳐 중수한 바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다포식건물로 조선초기 건축양식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어 더욱 중요하며 극락전내 수미단은 뛰어난 조각과 특이한 구성으로 흔하지 않은 불단이라 할 수 있다.

수미단은 절의 법당 정면에 상상의 산인 수미산 형태의 단을 쌓고 그 위에 불상을 모시던 대좌이다.

높이 125cm, 너비 413cm의 조선후기에 만든 불단으로 양쪽면은 5단으로 되어 있으며 각 단도 5등분되어 각각 직사각형 모양을 하고 있다.

제일 위의 단은 안상문을 도드라지게 조각하였고, 제2단은 봉황, 공작, 학, 꿩 등을. 제3단은 용, 어린아이, 물고기, 개구리 등을 매우 섬세하게 조각하였다. 제4단은 코끼리, 사자, 사슴 등을 꽃잎 속에 조각하였고, 제일 아래단의 양쪽 끝에는 도깨비 얼굴을, 가운데 부분은 용을 조각하였다. 각 단에 있는 새나 동물의 배열이 특색있고 조각기법이 매우 우수한 불단으로 조선후기 작품으로 이런 특징을 지닌 불단이 더러 남아 있지만 이 불단은 그 중 대표적인 작품이다.

 

 ▲ 백흥암 보화루 앞에서...

 

 ▲ 보화루 좌측의 백흥암 돌담

 

▲ 돌담 너머로 바라본 백흥암 경내 전경들

 

□ 운부암(蕓浮庵)

▲ 운부암 전경

 

운부암은 성덕왕10년(711) 의상스님이 창건하였다. 천년전 창건할 당시 성스러운 구름이 일어났다고 하여 그렇게 명명되었다는 운부암은 어쩌면 면벽참선(벽을 향하여 앉아서 수도하는 방법) 하는 수도 방법을 통하여 속세의 모든 영욕을 뜬구름에다 비유하고 스스로가 해탈하는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승려들의 계명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그 뒤 관음기도 도량으로 전승되어 오다가 1860년에 화재로 소실되자 옹허스님과 침운스님이 중건하였고, 1900년 보화루를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원통전을 중심으로 왼쪽에 운부난야가 있고, 오른쪽에 우의당이 있으며 앞쪽에는 보화루가 있다. 원통전 안에는 보물 제515호인 청동보살좌상이 있으며, 금동장식의 화려한 이 불상은 신라 말에 혜철국사가 인도에서 해금강으로 들어오는 배 안에서 모셔왔다는 전설이 있다.

이 암자에는 근년에만 하여도 조계종 종정을 역임하신 동산선사와 운봉선사와 같은 고승들이 다녀갔을만큼 매우 유서깊은 수도장임이 분명한 듯 하다.

 

 ▲ 운부암 입구 삼거리갈림길의 이정표

▲ 운부암 입구 삼거리의 저수지

 

운부암의 스님의 설명에 따르면 운부암 절터는 원통전을 중심으로 뒷쪽의 산세가 여자 자궁처럼 포근하게 겹겹히 산줄기들이 둘러싸고 있는 형상이 날개를 펼친 봉황과 같고, 원통전 정면으로 보이는 태실봉은 조선 왕실의 태를 묻은 곳 중의 하나로 명당이라고 한다.

절 뒷편 산 중턱에는 특이하게 생긴 약 1500년된 나무 한그루와 모목은 고사중인데 나무 밑둥으로 새끼나무들이 무성히 가지를 뻗치며 새롭게 자라고 있는 보리수 나무 한그루가 있는데 이 보리수는 자기 희생으로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 한다.

 

▲ 절 뒷담 언덕에 보이는 보리수(앞)와 약 1500년된 고목(뒤)

 ▲ 백흥암 원통전

◀ 원통전내에 모셔진 청동보살좌상

♣ ♣ 운부암 청동보살좌상(靑銅菩薩座像)

*보물 제514호

*소재지: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 555

이 청동보살좌상은 크기라던가 형태, 장식면에서 경북지방에 전해오는 조선 태조4년(1395)의 장륙사 건칠보살좌상이나 15세기 후반기작으로 추정되는 대승사와 갑장사 금동보살좌상 등과 유사하다. 즉 아담한 크기의 안정된 자세로 긴 눈꼬리가 올라간 갸름한 얼굴, 가슴, 어깨, 배, 무릎 등 전신의 장엄하고 화려한 영락장식 등은 고려말의 전통적인 보살상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반면 띠 주름식의 삼도(W자의 가슴 아래 띠로 묶은 내의 표현), 양다리에 대칭으로 흘러내린 옷주름 등은 장륙사 상보다는 진전되고 대승사나 갑장사의 보살상보다는 고식이 나타난 조선초기의 화려하고 단엄한 보살상이다.

 

 ▲ 운부암의 운부관야

▲ 운부암의 우의당

 

 ▲ 운부암의 보화루를 배경으로

▲ 운부암 주변의 노송들

 

□ 거조암(居祖庵)

▲ 거조암 영산루

 

거조암은 은해사의 산내 암자로 은해사 본사로 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청통면 치일리 위치한 은해사로 부터 약 13.2km 거리인 청통면 신원리에 위치)

신라 효성왕2년(738) 원참대사가 거조사로 창건한 절로 고려 우왕13년(1375) 혜림법사와 법화화상이 영산전을 건립하여 오백나한을 모신 유서깊고 영험있는 나한 기도도량으로 유명하다. 우리나라 목조건물로 가장 오래된 거조암 영산전은 고려시대의 대표적 건물로서 부석사 무량수전과 조사당, 봉정사 극락전, 예산 수덕사 대웅전 등 4곳뿐이라는 점에서 더욱 귀중한 문화재가 되고 있다. 거조사는 후에 은해사의 말사로 편입되며 거조암으로 불리어지게 되었다.

 

 ▲ 거조암의 영산전(정면)과 삼층석탑

 ▲ 우측에서 바라본 영산전

▲ 좌측에서 영산전을 배경으로...

 

♣ ♣ 거조암 영산전(靈山殿)

*국보 제14호

*소재지: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신원리 622

거조암은 원래 거조사라 하여 신라 효성왕2년(738) 원참조사에 의해 처음 건립되었다고도 하고, 경덕왕 때 건립되었다고도 한다.

근래에 와서 거조사는 은해사의 말사로 편입되어 거조암이라 불리어지고 있다.

거조암은 팔공산 동쪽 기슭에 위치하며, 아미타불이 항상 머문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영산전은 거조암의 본전이며 해체, 보수할 때 발견된 묵서명에 의하면 고려 우왕원년(1375)에 건립되었으며, 이후 여러차례 고쳐 지어졌다 한다. 소박하고 간결한 주심포계 형식으로 정면 7칸, 측면 3칸, 5량구조의 맞배집으로 공토, 보의, 단면, 솟을합장, 포대공 등에서 일부 고식을 볼 수 있다. 형태 및 구성기법에 있어서는 백제계 고려 건축의 흔적을 엿볼 수 있으며, 일반적인 조각수법으로 보아 조선 초기에 고쳐지으면서 많은 부분이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법당 내부에는 526분의 각기 다른 표정의 석조 나한상을 모시고 있다.

 

♣ ♣ 거조암 삼층석탑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04호

이 탑은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 앞에 있으며, 높이 3.15m로 고려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탑의 몸돌과 지붕돌 모두 별석으로 되어 있고, 기단부의 면석 일부와 지대석은 후대에 보수된 것이다. 우리나라 보편적인 탑 구조와 마찬가지로 삼층 기단 면석과 각층 몸돌에는 모서리 기둥이 세워져 있다. 상륜부에는 노반이 남아있으며, 기단에 안기둥 1개를 새긴 점, 덮개돌 상면이 경사진 점, 노반 낙수면이 짧은 점, 추녀가 두껍게 되어 있는 점 등에서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 거조암 산신각

 

 

- 이번 기행에서 함께 방문하였던 '만불사'는 별도로 기재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