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 양 사(白羊寺) ▶
▲ 백암산 백양사 표지석을 배경으로...
【 일 정 표 】2008년 10월 26일(일)
관광버스를 이용하는 여행사 기획상품인 '내장사와 백양사 단풍 관광'을 예약하고 부천역에서 새벽 첫 전철을 타고 서울 2호선 교대역에 오전 6시 40분 경 도착. 자리배정을 받고 7시경 예정대로 첫 목적지인 내장사로 출발하여 휴일임에도 정체나 지체없이 원활한 흐름을 보인 고속도로 덕택에 예정보다 빠른 오전 10시 20분경 내장사입구에 도착을 하였다. 내장사 관광을 마치고 점심식사를 계획하였던 것을 수정하여 먼저 식사를 하기로 하여 여행사에서 제공하는 산채비빔밥으로 이른 점심식사를 마치고 내장사로 향하며 관광일정을 시작하였다. 단풍으로 유명한 2곳의 사찰을 한꺼번에 관광을 하는 빠듯한 일정이지만 이동시간이 예상보다 적게 걸려 약간의 여유가 생겨 관광에는 별 무리가 없었다. (( 관광일정 및 시간표 )) 서울 교대역 출발(07:00)→내장사입구 도착(10:20)→점심식사(10:30~11:10)-(도보)→내장사관광(11:10~14:00)-(차량이동)→백양사관광(15:10~16:30)→서울 교대역 도착/저녁식사(20:20~21:30)→부천도착(22:50) 내장사 : 내장사 주차장/매표소에서 내장사 경내까지 이어지는 경내도로가 환상적인 단풍터널길을 연출하고 있는데 이상기온과 가을 가뭄으로 약 40~50% 정도의 단풍나무들이 각양각색의 색을 띠면서 물들어 있었지만, 물들기가 무섭게 이미 말라버려 제대로 된 단풍을 구경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옛날부터 단풍이 절경을 이루는 내장산을 조선 8경의 하나로 꼽을 정도로 유명한데 이번 관광에서는 붉게 물들며 형형색색을 자랑하는 단풍 대신에 전국에서 몰려 든 수 많은 등산객과 관광객들로 인산인해의 북새통을 이루어 유명 관광지로서의 명성만을 확인하고 돌아오는 것으로 만족을 해야만 했다. 백양사 : 다른 지방의 단풍과는 달리 잎이 작은 애기단풍 군락지로 유명한 곳이다. 그러나 이곳의 단풍은 내장산보다 더 빈약하여 10%도 채 되지 않을 정도로 단풍이 전혀 물들지 않고 푸른색의 잎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단풍관광이라기 보다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8교구 본사인 백양사 탐방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정도였다. 이번 여행은 단풍관광이라는 것도 하나의 목적이었지만 대한불교조계종 제18교구 본사인 백양사와 제24교구 본사인 선운사의 말사인 내장사를 탐방하는 것도 또 다른 관광목적이었다. 그러므로 제대로 된 단풍관광을 즐기지 못하였더라도 또 다른 목적을 달성하였으니 후회는 없는 하루였다. 그러나 시간적 제약이 따른 관계로 백양사의 10여개 부속암자와 내장사에 소속된 서너개의 부속암자를 전혀 탐방해 보지 못하고 돌아오게 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 백양사 소개 】
전라남도 장성군 북하면 약수리 백암산을 배경으로 자리잡은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8교구 본사이다.
백제 무왕33년(632) 여환선사가 백암사로 창건하였으며, 고려 덕종3년(1034) 중연선사가 크게 중창을 하며 '정토사'로 개칭하였고 고려 충정왕2년(1350) 각진국사가 3창하였다. 다시 백양사로 개액한 것은 조선 선조7년(1574) 환양선사가 중건하면서 부터이다. 환양선사가 영천암에서 금강경을 설법하는데 수 많은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으며, 법회가 3일째 되던 날 하얀 양이 내려와 스님의 설법을 듣었으며, 7일간 계속된 법회가 끝나는 날 밤 스님의 꿈에 흰 양이 나타나 '나는 천상에서 죄를 짓고 양으로 변했는데 이제 스님의 설법을 듣고 다시 환생하여 천국으로 가게 되었다'고 절을 하였다 한다. 이튿날 영천암 아래 흰 양이 죽어 있었으며 그 이후 절 이를을 백양사라 고쳐 부르고, 승려의 법명도 '환양'이라 하였다.
백제시대의 고찰로 유구한 역사와 주변의 빼어난 경관으로 이름이 높으며 산내 10여개 암자 중 유서깊은 운문암은 고려시대 때부터 남자들의 정진도량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러나 백양사 창건과 연혁을 전하는 자료가 충분하게 전하지 않은데다 백암사, 정토사 등의 다른 이름으로 존재했던 사찰이기 때문에 그 역사에 관한 몇 가지 자료들을 검토해 보고 넘어가기로 한다.
정도전(1337~1398)이 고려말 우왕3년(1337)에 지었다는 '백암산정토사교루기'의 일부 내용을 보면 이 산은 장성군 북쪽 30리에 있는데 그 이름을 백암이라 하였으며, 암석이 모두 흰 색깔이라서 그렇게 이름하였다 한다. 석벽을 깎아지른 듯 험하고 산봉우리는 중첩하여 맑고 기이하며 웅장한 모습이 실로 이 지역의 명승지가 될 만하므로 신라 때의 어떤 이승이 처음으로 절을 짓고 살면서 이름을 백암사로 하였다.
중국 송나라 경평 연간(423~424)에 이르러 정토선원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그 문도인 중연선사가 이를 이어 전당과 문무, 방장실, 요사 등 80여 칸을 다시 지었다. 중연선사의 문도가 차례로 전해 오다가 일련스님이 그 사찰을 주관하여 처음의 법을 떨어뜨리지 않았다.
1911년 조선총독부가 간행한 '조선사찰사료'에 실린 '백암산정토산교루기'는 백양사의 창건내용을 전하는 가장 오래된 자료이며, 여기서 백양사 창건과 관련한 몇가지 중요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창건은 신라 때 이루어졌고 창건주는 법명을 알 수 없지만 '이승'이라고 표현된 점으로 보아 상당한 이적행을 해온 승려일 것이라는 점이다. 아울러 백양사의 창건 때 이름은 '백암사'였으며, 창건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정토선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는 사실도 확인된다. 또한 창건이후 중연선사와 일린스님에 의해 백양사의 법맥이 계속 이어져 왔음을 살펴볼 수 있다.
물론 정도전이 지은 이 자료의 모든 내용을 있는 그대로 믿어야 할 것인가는 쉽게 단정 지을 수 없다. 특히 백암사에서 정토선원으로 사찰명이 바뀌는 시기가 중국 남송시대인 5세기 초반이라고 서술한 부분은 시기적으로 검토해야 할 대상이다. 이 시기는 신라의 불교 공인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때이며, 더욱이 그 같은 상태에서 신라 스님이 백제 영토에 들어와 사찰을 창건하였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양사의 창건주가 신라 스님이었다는 점, 그리고 백암사와 정토선원이라는 본래의 이름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은 역사적 사실임에 분명하다. 극렬한 배불론자였던 정도전의 '백암산정토사교루기'가 백양사 창건을 전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라는 사실은 무척 흥미로운 일이기도 하다. 또 이 기록은 그대로 전승되어 오다 후대로 내려오면서 그 내용이 좀 더 구체화된다.
정조10년(1786) 환성이 중건하였고 고종1년(1864) 도암이 중건하였으며, 1917년 송만암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만암은 45세부터 백양사 주지직을 맡아 30년 가까이 주석하면서 불사에 전력하는 한편, 강원을 개설하고 중앙불교전문학교장을 겸임하면서 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백양사는 31본간시대의 본산이었으며, 현재 부속말사 26개소를 거느리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43호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32호인 극락보전, 명부전, 칠성각, 진영각,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44호인 사천왕문, 선실, 요사채와 범종, 법고, 목어, 운판 등의 사물을 소장하고 있는 범종각이 있다.
이밖에도 대웅전 뒤편의 팔정도를 상징한 팔층탑에는 석가모니의 진신사리 3과가 안치되어 있으며, 부도전에는 백양사에서 배출, 주석하였던 휴정, 유정, 모운, 태능, 범해 등 18승려의 사리와 유골을 모신 석종 모양의 탑과 비가 있다. 이 중 소요대사부도는 백양사 재흥에 힘쓴 태능의 유업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한 탑으로 용이 구름을 감고 하늘로 올라가는듯한 조각이 되어 있고, 좌대에는 연잎들이 조각되어 있다. 이 부도는 석종형으로서 상대, 유곽, 하대 등에 양각으로 섬세하게 조각되었으며 기단은 복련으로 덮은 위에 2단의 몰딩을 두어 종신으로 올려놓은 모습이다. 1974년 12월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56호로 지정되었다.
백양사의 사내 암자로는 약사암과 영천굴, 1351년 창건한 청류암, 1981년에 지은 수도도량 물외암, 천진암 등이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부터 있어온 운문암 등 많은 암자들이 6.25때 불타버렸다. 이중 운문암은 6.25전까지만 해도 백양사 8개 암자 중 대표암자였으며, 백양사 뒤 계곡을 끼고 3.5km 위에 위치해 있다.
고려 때 각진이 창건하였다는 운문암은 백양사 수도도량 중 전망이 가장 좋은 곳에 있으며, 조선시대에 신승 진묵의 일화가 전해지는 있다. 진묵이 임진왜란 직전 이 암자에서 차를 달이는 소임을 맡고 있었는데, 어느 날 전체 대중이 차를 달이는 운문암 중을 조사로 모시라는 현몽을 한 뒤 진묵을 조실로 앉혔다. 어느 날 진묵은 "내가 올 때까지는 이 불상을 도금하지 말라"라는 말을 남기고 자취를 감추었는데 지금도 그 불상은 거뭇한 그늘색을 띤 채 진묵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백양사 오른쪽 계곡 상부에 있는 국제기는 천신에게 제사를 올리던 곳으로 호남일대에 재난이 있을 때에는 나라의 명을 받아 이곳에서 천제를 올렸다. 그 유래는 조선시대 영조 때 호남지방에 대 유행병이 나돌아 호남감사가 영조에게 상소를 올리자 영지를 택하여 크게 기도를 드리라고 하였으므로, 이곳 바위에다 '국제기'를 음각하여 새기고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영천굴은 20평 남짓한 천연석굴로 단칸의 영천암이 있는 곳이다. 굴 속의 바위틈에서 샘이 솟아나오는데 이를 영천이라 한다. 장마 때나 가뭄 때나 항상 일정한 물이 흐르는 이 샘에는 옛날 한 사람이 먹을 만큼의 쌀이 나왔는데 하루는 어떤 손님이 와서 더 많이 나오라고 작대기로 쑤셨더니 그 뒤로는 쌀이 나오지 않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백양십이경의 하나인 일광정에서는 해마다 사월초파일에 불가의 시련법식이 거행되며, 백양사 뒤의 학바위는 고려때부터 조선 중종때까지 천제를 지낸 곳이라 한다. 절 일대의 비자나무는 천연기념물 제153호로 지정되어 있고, 약 3만그루가 밀집하고 있어 춘백양추내장의 칭호를 얻고 있다.
이밖에도 백암산의 학봉, 상왕봉, 사자봉, 가인봉 등의 절경과 설경 등이 어울려 백양사 일대는 예로부터 조선팔경의 하나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 쌍계루
♣ 쌍계루
고려 충정왕(1330)때 교루(현 쌍계루)를 초창하였으며, 고려 공민왕19년(1370) 여름 폭우로 교루가 파괴되어 우왕3년(1377) 파손된 교루를 청수스님이 중수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정도전이 '백암산정토사교루기'를 지었다.
우왕7년(1381) 묵은 이색이 교루의 이름을 '쌍계루'로 바꾸고 '백암산정토사쌍계루기'를 지었다.
이후 한국전쟁 전란으로 1950년 소실된 것을 1985년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백양사 경내 입구(사천왕문 진입하기 전) 호수가에 백암산 암봉을 배경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 백양사 사천왕문
♣ 백양사 사천왕문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44호
*소재지:전라남도 장성군 북하면 약수리 26
이 건물은 백양사의 정문으로 익공식과 주심포식을 병용한 절충식으로 정문 어간은 사찰통문이며, 좌우 협간은 사천왕상을 안치하였다. 문의 오른쪽에는 지국천왕과 증장천왕, 왼쪽에는 광목천왕과 다문천왕이 봉안되어 있다. 사천왕은 인도의 재래신으로 수미산에 거주하면서 동서남북의 사천국을 다스리는 왕들로 모든 악귀와 잡신을 억압하여 정법도량을 수호하는 존엄한 위력을 과시하기도 한다.
구례 화엄사와 장흥 보림사의 사천왕문과 함께 사찰 문화재로서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1917년 대웅전의 중축과 함께 건립되었으며 1945년 천왕상을 개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백양사 대웅전
♣ 백양사 대웅전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43호
대웅전은 석가모니를 주불로 모신 건물이다. 지금의 대웅전은 1917년 송만암대종사가 다섯번째 다시 지은 것이다.
높직한 장대석으로 다듬은 3단의 기단에 원형주춧돌을 놓았으며 기둥은 다섯 칸 모두 아래가 넓은 민흘림의 둥근 기둥을 세웠다. 내부 천장은 속의 나무재료가 보이지 않게 한 우물천장이고 화려한 단청이 아직도 선명하다.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옆에서 볼때 'A'자 모양)이다.
내부에는 석가여래삼존불과 1979년 보각행이 조성하여 새로 모신 10척 높이의 불상, 그 왼편에 용두관음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대웅전내 오른쪽으로 바늘귀를 꿰는 모습, 등을 긁는 모습 등 해학적인 모습을 한 나한상 16체가 봉안되어 있다.
▲ 극락보전
♣ 극락보전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32호
극락보전은 불교의 이상향인 서방극락정토를 묘사한 건물이다. 이 건물은 단층 맞배지붕(앞면이 '人'자 형인 지붕형태)으로 기둥과 기둥사이에도 포가 올려진 화려한 다포집이다. 우물천장으로 양쪽 벽면에는 단색으로 된 벽화가 담담한 처리로 그려져 있다. 건평 50㎥에 세워진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백양사 내 건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현재의 극락보전은 4번째로 다시 지은 것이다. 선조7년(1574)에 환웅선사가 조성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환웅선사는 조선말기의 스님이므로 이는 극락전이 다시 지어진 시기와 일치하지 않으므로 환웅이 아닌 환양선사가 조성한 것이 맞을 것 같다.
1973년 단청하였으며 1976년 보수를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비교적 고건축양식의 원형을 그대로 지니고 있어 귀중하고 가치있는 건물로 평가되고 있다.
▲ '만암대종사 고불총림도장' 표석
▲고불총림 수도도량 내부 전경
♣ 이 뭣고 란?
불교에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선을 참구하는데 의제로 하는 것을 화두라 하고 화두는 천칠백가지가 있다.
그중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본래면목(本來面目) 시심마(是甚磨)라는 것이 있는데 이 뜻은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전에 나의 '참'모습은 무엇인가 라는 의제를 의심하기 위하여 '이뭣고'하며 골똘히 참구하면 본래면목 卽(즉) 眞我(참나)를 깨달어 생사를 해탈하게 된다.
▲ 백양사 칠성전과 진영각
▲ 범종루
▲ 백양사 경내의 보호수 표석과 보호수
▲ 백양사 경내의 멋진 소나무와 어우러진 단풍
▲ 백양사 진입도로에서 바라본 백양사 전경
▲ 백양사 진입도로 주변 전경
♣ 쌍계루 호수 주변의 전경들
♣ 백양사 일주문
▲ 주차창 입구에 설치된 백양사 일주문(2001년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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