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별 분류/북한산국립공원

북한산(탕춘대능선)/서울 종로

왕마구리 2008. 12. 1. 12:43

북 한 산 탕춘대능선

높    이

비봉 560m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은평구

 

【 개    관 】

탕춘대란 명칭은 조선 연산군10년(1504) 서울 장의문 밖에 지은 건물 이름이다. 연산군 일기에 따르면 '왕이 장의문 밖 조지서 터에 이궁을 지으려다가 시작도 하지 않고 먼저 탕춘대를 봉우리위에 세웠다. 또 봉우리 밑에 흐르는 물을 가로질러 돌기둥을 세워 횡각을 세우고, 언덕을 따라 긴 회랑을 연이어 짓고 모두 청기와를 이으니 고운 색채가 빛났다. 여러 신하들에게 과시하고자 하여 놀고 구경하기를 명하였다.' 라 적혀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쓰라린 경험을 거울삼아 적을 방비하기 위하여 숙종 때 1718년부터 다음 해까지 농번기를 피하여 석달 동안 도성인 인왕산에서 북한산성까지 5.1km를 연결한 높이 3~4m의 석성을 쌓았는데 이 성이 서울성곽인 탕춘대성이다.

산성 이름은 연산군이 세운 탕춘대(현 세금정초등학교 터)에서 따온 것이다.

【 산행코스 】녹번역/3호선→청솔APT뒤 등산로입구→우수조망명소/전망대→Y자갈림길→우수조망명소/전망대+헬기장→헬기장/전망대→서울성곽/암문→구기동갈림길/이정표→탕춘공원지킴터/옛 탕춘대매표소→비봉탐방지원센터갈림길(일행은 비봉과 승가사를 거쳐 구기분소 방향으로 하산)→금선사/목정굴→비봉탐방지원센터→구기터널입구

【 산행일자 】2008년 11월 29일(토)

【 산행시간 】총 2시간 05분 소요

【 날     씨 】강한 바람을 동반한 맑은 날씨

【 참 석 자 】총 16명(9정맥동우회)

최상태(항법사), 황항중(역곡사부), 김동수(용구동), 이창신, 신무순, 이영례(산녀), 최진해, 유경석(대장), 이성호, 황영규(약산), 서정수, 이기택, 강계금, 황순희, 박광길, 천영면(왕마구리)

【 교 통 편 】대중교통 이용

【 산 행 기 】

 2008년 9월 6일(토) 호남정맥을 마지막으로 9정맥 종주에 참석하였던 가고파산우회 제2기 9정맥종주 20여명의 팀원들이 몇년간의 종주를 함께 하며 다져온 친분과 유대를 강화하고 지속적인 만남의 끈을 이어가기 위하여 동우회를 결성하고 정기적인 모임을 만들자는 취지의 첫 산행이었다.

이 첫 모임이 이루어지도록 역곡사부님 과 용구동님이 유기적으로 연락하며, 팀원들에게 일일이 연락을 취하는 등 많은 수고를 기울여 오늘 첫 모임의 자리가 마련되었으며, 특히 임시 총무를 맡으신 용구동 김동수님이 모임 당일 컬러 산행지도와 9정맥 종주를 하는 동안 몇 년간 촬영한 사진 수 천장을 편집한 CD를 기념품으로 제작, 참석한 9정맥 동우회 회원들에게 나누어 주는 정성과 열의를 보여 주었다.

다시 한 번 더 감사를 드리며, 오늘의 모임이 있도록 수고를 아끼지 않으신 모든 분들과 산행은 함께 하지 않았지만 오늘 집합장소였던 녹번역까지 일부러 나오셔서 찬조를 해 주신 박광길님 그리고 함께 동우회 첫 모임에 참석해 주신 회원 여러분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모두들 산행에 관하여서는 전문가들이시고 매주 전국의 산들을 누비고 다니시느라 바쁘니 매월 만나 뵙지는 못하더라도 2~3개월 단위라도 만남의 시간을 가져 오늘의 만남이 영원히 지속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또한 이번 모임에는 계획된 산행과 개인적 업무로 참석치 못하셨지만 동우회 모임에 관심과 열정을 갖고 계시며 9정맥 중 마지막 정맥인 금남정맥을 종주중인 수지사부 최만규님, 한남정맥을 종주중인 김영길님과 유주열님, 그리고 어슬렁 최원조님 등 다음 모임에는 꼭 뵈을 수 있기를 기대하겠습니다.

 

이번 산행은 3주전 호남정맥 땜방산행을 하면서 접질러진 왼쪽 발목이 아직은 정상이 아니라 산행에 동참은 하였으나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하고 일행과 비봉직전 비봉탐방지원센터 갈림길에서 헤어져 먼저 하산을 실시하였다. 오르막과 평지 산행에는 발목에 별 부담이 없었지만 내리막 구간에서는 아직까지 제대로 발목에 힘을 줄 수가 없고, 바닥이 울퉁불퉁한 산길에서는 걷기가 불편할 정도라 무리를 피하고 끝까지 함께 하였다가 하산길에서 속도가 쳐지면 전체 일정에 한 사람 때문에 차질을 줄 수 있어 먼저 하산을 하게 되었다.

먼저 하산을 실시한 관계로 시간적 여유가 있어 몇 차례 이 코스를 지나 다녔지만 단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던 금선사와 목정굴을 하산길에 구경을 하며 여유있게 하산하여 구기터널 입구에서 일행을 기다리며 대기를 하였다.

 

전체 일행이 도착하여 구기터널 인근의 두부전골 전문 식당인 '옛날민속촌'에서 보쌈, 모듬전 등을 안주삼아 막걸리, 소주, 맥주 등 다양한 주류를 곁들여 뒤풀이 시간을 가졌고, 청국장, 콩비지 등으로 간단하게 점심식사까지 마치고 회의를 겸한 여흥시간을 위해 노래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노래방에서 약 30여분간 동우회 결성에 관하여 발전적인 의견을 나누고, 동우회 회장에 황항중 역곡사부님을, 등반대장에 항법사 최상태님을, 그리고 총무는 여성회원 중에서 선임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이 다수여서 추후에 총무는 회장이 지명하기로 하고 다음 모임까지 임시총무로 왕마구리 천영면을 선임하였다.

회의를 마치고 몇년간 함께 9정맥 종주를 하며 긴 시간을 보냈지만 단 한 차례도 실시치 않았던 여흥시간을 1시간30여분간 진행하여 분위기가 한층 고무되고 화기애애하여 격없는 어울림의 장이 되었다.

오후 4시경 노래방에서의 여흥시간을 마치고 다음 모임을 기약하며 오늘의 일정을 마무리하였다.

금일 모임 회비 정산내역은 산행기 마지막에 게재를 하고, 국립공원이고 등산로가 산책로 수준으로 잘 정비되어 있으며, 갈림길에는 이정표가 설치되어 있어 산행에는 별 어려움이 없어 산행기는 각 구간별 통과시간과 몇 장의 사진을 올리는 것으로 대체를 하기로 한다.

 

▲ 청솔아파트 뒷쪽의 등산로입구 이정표

 

10:25=>청솔아파트 뒷편 산행들머리

 

▲ 은평구 일대 시가지 전경/중앙에 우뚝 솟은 봉우리가 계양산

▲ 좌측의 봉우리가 안산/안산 우측으로 63빌딩이 조망되는데 사진 상으로는 희미하여 구분이 잘 가지 않음.

 

10:35~10:37=>우수조망명소/전망대

 

▲ 산책로 수준의 편안한 능선길

 

10:41=>Y자갈림길(이정표:↖헬기장/↗조망명소)

 

▲ 두번째 조망명소에서 바라본 전경

좌측부터 북악산, 인왕산, 청계산/시가지 중간을 지나는 고가도로가 내부순환도로

 

10:42~10:43=>우수조망명소/전망대+헬기장

 

▲ 소나무숲의 편안한 등산로

▲ 문수봉으로 이어지는 비봉능선

 ▲ 비봉능선과 비봉능선으로 이어지는 우측의 탕춘대능선 전경

 

10:47~10:49=>헬기장/전망대

     정면으로 비봉능선과 족두리봉이, 그리고 비봉능선으로 이어지는 탕춘대 능선길이 시원하게 조망이 된다. 완만하게 좌측으로 철망이 나타나는 안부에 내려섰다 오르면 탕춘대 성벽과 암문이 나타난다.

 

▲ 탕춘대 성벽과 암문

 

11:03=>탕춘대 성벽과 암문

     성벽을 따라 우측으로 진행하면 상명대 쪽으로 능선이 이어지고 이 서울성곽은 홍지문과 자하문을 지나 북악산으로 연결이 된다. 좌측으로는 탕춘대 성벽이 등산로와 함께 이어지고, 족두리봉이 시원하게 조망이 된다. 편안하고 넓은 숲길이 종로구 경계 표석이 설치된 탕춘대공원지킴터까지 계속된다.

 

▲ 탕춘대 서울성곽 위에서 조망된 족두리봉

▲ 서울성곽 위에서 바라본 비봉능선의 향로봉과 비봉

▲ 탕춘대능선 우측으로 조망된 암봉들

▲ 계속되는 넓고 편안한 등산로

 

11:16=>구기동갈림길/이정표(→구기동 0.9km)

11:18=>탕춘대공원지킴터/옛 탕춘대매표소

     지킴터를 지나면 정면의 바위지대를 우회하는 우회 등산로가 우측으로 나타나고, 내려섰다 오름길을 따르면 비봉능선상의 향로봉을 우회하여 비봉으로 향하는 등산로와 만나게 된다. 축대를 쌓아 만든 공터(옛 집터로 추정)가 나타나고 우측으로 하산로와 좌측으로 비봉가는 오르막이 갈라지는 갈림길에 이르게 되는데 이정표(↑비봉 0.8km/→비봉탐방지원센터 0.8km/↓상면대 2km)가 설치된 비봉탐방지원센터 갈림길이다.

일행들은 비봉방향으로 향하고 혼자서 우측의 하산로를 따라 탈출을 한다.

 

▲ 비봉탐방지원센터 갈림길의 이정표

 

11:33~11:35=>비봉탐방지원센터갈림길

 

  

  

▲ 금선사 입구의 이정표와 안내문

▲ 금선사 일주문

 

▲ 금선사 대적광전

▲ 금선사 연화당(미타전)

♣ ♣ 금선사(金仙寺)

고려말 조선초의 고승 무학 자초(1327~1405) 대사께서 도읍을 정하고자 삼각산을 살피던 중 지금의 금선사터에 삼각산의 정기가 서려있고 부처님이 상주하시며 중생들을 제도하는 듯하여 절을 지으니 바로 금선(부처님)사였다.

창건 이래로 수행자와 기도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명찰이었으나, 일제 압정기에 관리 소홀로 인하여 퇴락하게 되었다. 1949년(불기 2493년) 이를 안타깝게 여긴 도공스님께서 중건하시고, 지금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은 현 주지 법안스님의 노력이며, 목정굴을 1996년 3월에 복원하여 수월관보살을 봉안하였고 전통사찰로 등록하였으며 미타전법당과 추모시설인 연화당, 삼성각, 적묵당을 중수하였다.

부처님이 상주하시는 기도처인 이곳에서 수행하시던 농산스님이 조선의 순조대왕으로 환생하신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 등 기도처로써 여러 영험담이 전해지는 기도도량으로도 유명하다. 유물로는 금선사 신중탱화가 있다.

 

♣ 신중탱화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61호

불법을 수호하는 신중을 그린 것으로, 조선 후기에 가장 대중적으로 유행하던 불화이다.

신중은 석가모니불 이전부터 인도에서 신앙되었던 토속신들로서 부처님의 자비심에 감동되어 불교에 귀의한 후 불법의 유통과 옹호를 맹세한 성중으로 불교 성립 초기에는 부처님의 경전, 그리고 그 법을 설하는 법사를 보호하는 호법신의 역할을 하였다. 불법이 크게 전파되고 이들 호법신들의 역할이 점차 커지면서 국가를 수호하거나 사람들의 재앙을 소멸시켜주는 측면이 강조되기도 하였다.

 

금선사 신중탱화는 광서13년(1887)에 제작된 것으로 인법당에 모셔오던 것이다. 비교적 화기의 내용이 선명하게 남아있어 북한산지역의 불화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생각된다. 화기에는 신중탱이라는 명칭이 등장하는 것은 19세기 초 부터인데, 금선사에 봉안된 신중탱화에서도 '신중탱'의 명칭이 표현되어 있다. 금선사 신중탱화의 전체적인 색조는 붉은 계통이고, 도상은 단순하다. 현재는 표구된 상태로 보관해오고 있다.

 

금선사 신중탱은 상단에는 제석천이, 하단에는 위태천이 중앙에 배치되어 있다. 제석이 위치한 천부가 축소되고, 하단에 위태천이 중앙에 모셔져 강조되고 있다. 또한 주목되는 점은 위태천을 중심으로 한 천룡부에서 팔부중 이외에 산신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19세기 신중탱에서는 일반적으로 산신과 조왕신이 짝을 이루어 묘사되지만 금선사 신중탱에서는 산신과 호법신장이 짝을 이루고 있다. 산신과 조왕신과 같은 토속신의 등장은 19세기 이후에 보이는 특징이다. 이것은 신중신앙이 대중화되면서 민간신앙이 신중신앙과 결합한 사례를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18세기에 보였던 천룡탱화와는 달리 팔부중 대신 이들 토속신이 위태천(천룡)의 협시로 등장하는 것은 민간신앙이 조선후기 불교에 수용되어 점차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고, 신중탱화의 도상 역시 변모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금선사 신중탱은 이러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지방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전에 만전을 기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11:54~12:05=>금선사

 

▲ 금선사 목정굴 전경

  

  

▲ 목정굴 입구 표석

▲ 목정굴 내부 전경

 

12:09~12:14=>목정굴

 

♣ 금선사 목정굴(木精窟)

금선사 절 바로 아래 위치한 천연의 기도처로 창건이래 많은 수행자와 기도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창건이래 이곳에서 수행하던 농산스님께서 조선의 순조대왕으로 환생하신 이야기 등 많은 영험담이 전해져오고 있는 곳이다.

 

조선 정조 때 숭유억불 정책으로 인하여 불교의 폐해가 극심하던 중 대구 팔공산의 파계사에 주석하시던 용파스님은 정조를 알현하고 불교에 대한 극심한 폐단이 있음을 아뢰니, 정조는 이의 시정을 약속하면서 왕실의 대를 이을 왕자를 잉태하기 위한 기도를 부탁하였다. 정조는 슬하에 세지가 없어 고심하던 중이었다. 마침내 그에게 세자탄강을 위한 기도를 명하게 되었다. 용파스님은 이를 수락하고 금선사에서 정진하시던 농산스님에게 전후 사정을 말씀드렸고, 두분 스님은 수락산 내원암과 삼각산 금선사에서 각자 기도에 들어가셨다. 농산스님은 바로 이곳 목정굴에서 300일간 관음기도를 올린 것이다.

기도가 익어갈 무렵 용파스님이 선정에 들어 살펴보니 왕자의 몸을 받아 태어날만한 이가 농산스님 밖에 없는지라 농산스님에게 왕자로 환생할 것을 아뢰니, 농산스님께서 이를 수락하시고 수빈 박씨의 꿈에 현몽하시어 환생의 뜻을 밝히시고는 기도를 마치고 상서로운 징후를 보이고 열반에 들었다.

이때 왕실에 발신을 알 수 없는 봉서 하나가 올라 왔는데 '경술 6월 18일 세자탄강' 이라 적고 있었다.

 

과연 순조는 바로 이 날 태어났다. 이 날 서북쪽으로부터 맑고 붉은 서기가 왕실에 닿아 산실을 휘감고 있었다. 사람을 놓아 그 진원을 추정하게 하니 그곳은 다름 아닌 목정굴이었다. 굴 안에서 좌탈한 채로 앉아 있는 농산스님의 탈신 뿐이었으나 서기는 여전히 그의 정수리로부터 산실로 흘러 들고 있었다. 농산스님의 입적과 순조로의 환생을 목도한 정조는 내소사에 명하여 목정굴위에 절을 크게 중창하게 하였으니 곧 금선사이다.

내원암 사적에 두 분 스님 사이에 오고 간 서신이 남아있어 이 이야기를 전한다. 지금도 금선사에는 순조의 탄신제를 모시고 있다.

 

▲ 비봉탐방지원센터

 

12:16=>비봉탐방지원센터

12:30=>구기터널입구

 

(( 9정맥동우회 첫 모임 회비 정산내역-2008년11월29일- ))

항   목

수  입

지  출

비  고

기본회비 \20,000 x 14명

\280,000

 

산행을 마치고 뒤풀이 참석자 14명 

특별찬조 : 박광길 \30,000

             최상태 \20,000(노래방)

             최진해 \10,000(노래방)

             천영면 \10,000(노래방)

\70,000

 

 

뒤풀이비용 '옛날민속촌'

 

\200,000

 

노래방

 

\55,000

 

맥주, 소주 및 안주(노래방)

 

\25,400

 

차기이월금액

 

\69,600

 

합     계

\350,000

\35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