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은 관광명소/세계유산 조선왕릉

효심이 살아있는 융건릉

왕마구리 2009. 12. 28. 22:52

◀ 융릉(隆陵) 건릉(健陵) ▶

【 소재지 】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 187-1번지

【 일정표 】 2009년 12월 22일(화)

지난 12월 7일(월) 업무차 지나는 길에 융건릉을 찾았다가 정기휴일(매주 월요일)이라 융릉의 원찰이었던 인근의 용주사만 구경을 하였는데, 이번에 또 다시 지날 기회가 있어 주차장에 도착을 하니 입장 마감시간인 오후 4시30분경이었다.

다행히 입장이 가능하여 비극의 죽음을 당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경기도 양주 매봉산(현 서울시 동대문구 휘경동)에서 이곳 화산으로 옮겨 현륭원이라 하였다가, 장조롤 추존된 후 융릉이라 능호를 높힌 정조대왕의 효심이 깃든 융릉과 사후에도 부모님의 곁에 묻혀 못다한 효를 계속 이어간 정조의 묘인 건릉을 짧은 시간이었지만 둘러 볼 수가 있었다.

 

 

【 융건릉 소개 】

사적 제206호로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조선 제22대 정조의 아버지인 장조(1735~1762)와 그의 비인 현경황후 혜경궁 홍씨(1735~1815)가 묻힌 융릉과 정조(1752~1800)와 효의황후 김씨(1753~1821)가 묻힌 건릉이 있는 곳이다.

 

 

 

  

 

▷ 교통 안내

    *지하철 1호선 병점역 또는 수원역 하차하여 시내버스로 환승

    *병점역후문 : 24번, 34번, 34-1번, 35번, 35-1번, 44번, 50번, 55번 시내버스

    *수원역 : 24번, 46번 시내버스

▷ 관람 안내

    *입장시간 : 하절기(3월~10월) 09:00~17:30(관람 09:00~18:30)/동절기(11월~2월) 09:00~16:30(관람 09:00~17:30)

    *관람 소요시간 : 약 40분~1시간

    *정기 휴일 : 매주 월요일

    *관람 요금

      대인(19세~64세) : \1,000/단체(20인 이상) \800

      소인(7세~18세) : \500/단체(10인 이상) \400

    *관람 문의 : T(031)222-0142

 

 

▲ 건릉가는 길

 

♧ ♧ 건릉(健陵)

 

▲ 건릉

▲ 정면에서 바라본 건릉 전체 전경

▲ 수라간 앞에서 바라본 건릉 전경

 

정조(正朝 1752~1800/재위:1776~1800)와 효의황후(1753~1821) 김씨가 묻힌 곳이다.

정조는 사도세자 장조의 아들로 영조35년(1759)에 세손으로 책봉되어 1762년 장헌세자가 비극의 죽음을 당하자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후에 진종으로 추존)의 후사가 되어 왕통을 이었다.

영조51년(1775) 연로한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하였고, 영조가 승하하자 1776년 왕위에 올랐다.

정조는 아버지 장헌세자가 당쟁에 희생되었기에 왕권을 강화하고 체재를 재정비하기 위하여 영조이래의 기본 정책인 탕평책을 계승하였다.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을 설치하였고 새로운 인재들을 대거 등용하여 새로운 혁신 정책을 펼쳤으며, 임진자, 정유자 등의 새로운 활자를 만들어 '속오례의', '국조보감', '대전통편', '증동국문헌비고' 등의 많은 서적들을 편찬, 간행하였다.

재위기간 동안은 정조의 학문적 소양에 터전한 적극적인 문화 정책의 추진과 선진문화인 중국의 건륭문화의 영향 등으로 문화적인 황금기를 이루어 조선후기 문예부흥기를 이루었다.

재위 24년(1800) 49세로 창경궁에서 승하하였다.

 

 

효의황후는 청원부원군 김시묵의 딸로 영조38년(1762) 세손빈으로 책봉되었으며, 정조가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다. 정조가 돌아가시고 순조(1800)가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었고, 순조21년(1821) 3월 9일 69세를 일기로 창경궁에서 승하하였다. 시효는 효의.

 

▲ 홍살문

▲ 건릉의 정자각

 

▲ 건릉의 신도비각 

 

▲ 건릉의 수라간 

 

건릉은 합장릉으로 동,서,북 삼면의 곡장에 병풍석을 두루지 않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다른 상설 내용은 융릉의 예를 따랐다.

석물은 난간석 바깥으로 석호와 석양을 각각 4기씩 배치하여 봉분을 호위하고 있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 망주석과 장명등, 문인석과 무인석, 석마들을 배치하였다. 또한 제향을 지내는 정(丁)자 모양을 한 정자각, 정자각 뒤로 제향 후 축문을 태워 묻는 사각형의 석함인 예감, 비를 안치하는 비각, 제물을 준비하는 수라간, 제향 후 축문을 태워 바라보는 곳인 망료위 등의 부속시설이 있다.

신문,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는 신도와 어도로 구분하였고 정자각 그 아랫단 왼편까지 넓게 박석을 깔았다. 신문 밖으로 능의 수호, 관리를 위한 재실이 있다.

 

 

▲ 건릉 입구의 융릉갈림길 전경과 이정표

 

▲ 건릉에서 융릉가는 길

 

▲ 건릉에서 융릉가는 길목의 사거리 전경과 이정표

▲ 사거리 우측의 정문으로 향하는 소나무숲길

▲ 사거리 좌측의 산책로

 

▲ 융릉가는 길

 

♧ ♧ 융릉(隆陵)

 

▲ 융릉

▲ 정면에서 바라본 융릉 전체 전경

 

융릉은 조선 제22대 정조의 아버지인 장조(1735~1762)와 그의 비인 현경황후(1735~1815) 홍씨가 묻힌 곳이다.

영조25년(1749) 부왕을 대신하여 서정을 하면서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는 노론들과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 숙의 문씨 등의 무고에 의해 영조의 미움을 사 영조38년(1762) 뒤주 속에 갇혀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영조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의미로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고, 묘호를 수은묘라 하였다.

그의 아들 정조가 즉위하자, 장헌으로 추존되었다가 광무3년(1899)에 다시 장조로 추존되었다. 장조의 무덤은 경기도 양주 배봉산(현재의 서울시 동대문구 휘경동) 아래에 있었는데 정조가 수원 화산으로 옮기면서 현릉원이라고 하였고, 장조로 추존된 뒤 능호를 융릉으로 높였다.

 

 

헌경왕후는 영의정 홍봉한의 딸로 영조20년(1744)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장조가 세상을 떠난 뒤 혜빈, 정조 즉위년애 궁호를 혜경으로 올렸고, 순조15년(1815)에 81세로 창경궁에서 돌아가셨다.

남편의 참사를 중심으로 자신의 한 많은 일생을 자서전적인 사소설체로 적은 '한중록'을 남겨 궁중문학의 효시가 되었다.

 

▲ 홍살문

▲ 정자각

 

 ▲ 융릉의 신도비각

 

▲ 융릉의 수라간 

 

융릉은 합장릉으로 동,서,북 3면에 곡장을 두루고, 봉분은 모란과 연화문을 새긴 병풍석을 둘렀는데 난간석은 생략되었다. 그러나 방위 표시를 위해 병풍석 위에 꽃봉우리 모양의 인석에 문자를 새겨 넣었다. 봉분 바깥으로 석호와 석양을 각각 2기씩 배치하여 봉분을 호위하고 있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 망주석과 장명등, 문인석과 무인석, 석마들을 배치하였는데, 추존 왕릉임에도 무인석까지 배치한 점이 중요하다. 또한 제향을 지내는 정(丁)자 모양을 한 정자각, 정자각 뒤로 제향 후 축문을 태워 묻는 사각형의 석함인 예감, 비를 안치하는 비각, 제물을 준비하는 수라간, 제향 후 축문을 태워 바라보는 곳인 망료위 등의 부속시설이 있다.

신문에서 정자각까지는 두 사람이 걸을 폭의 신도와 어도로 구분하였고, 정자각 그 아랫단 왼편까지 넓게 박석을 깔았다. 융릉은 능 조영에 정성을 들인 정조의 효심을 볼 수 있다.

 

▲ 융릉 입구 가을철 경방기간 동안 출입이 통제된 산책로

▲ 산책로 입구의 이정표

▲ 융릉 입구의 돌다리에서...

▲ 융릉에서 정문으로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