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은 관광명소/세계유산 조선왕릉

세계유산 조선왕릉! 고양 서삼릉(西三陵)

왕마구리 2012. 5. 20. 00:31

◀ 세계유산 조선왕릉 서삼릉(西三陵) ▶

 

조선왕릉은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2009년 6월 30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519년의 역사를 지닌 조선은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아 조상에 대한 존경과 숭모를 매우 중요한 가치로 여겨 역대 왕과 왕비의 능을 엄격히 관리하였다. 그리하여 42기의 능 어느 하나도 훼손되거나 인멸되지 않고 모두 제자리에 완전하게 보전되었다.

조선왕릉은 우리의 전통문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600여 년 전의 제례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

 

 

 

▷ 조선왕릉의 분포

조선 왕족의 무덤은 모두 119기에 이르며, 이 가운데 능이 42기이고, 원이 13기이며, 묘가 64기이다.

조선 왕족의 무덤은 무덤 주인의 신분에 따라 그 명칭을 달리하는데 능(陵)은 왕과 왕비의 무덤,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빈 또는 왕의 사친의 무덤, 그 외 왕족의 무덤은 일반인의 무덤처럼 묘(墓)라고 한다.

42기의 능 가운데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태조 원비 신의왕후의 능), 후릉(정종과 정안왕후의 능)을 제외한 40기의 능이 남한에 있다.

남한에 위치한 40기의 왕릉 중 강원도 영월에 위치한 장릉(단종의 능)을 제외한 39기의 능이 서울과 경기도 일원에 자리를 하고 있다. 500년이 넘는 한 왕조의 무덤이 이처럼 온전하게 보전되어 있는 것은 세계에 그 유래를 찾기 힘들며 문화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 조선왕릉의 제향

조선왕릉의 가치는 형태적 보존에만 있지 않고, 조선왕릉을 더욱 더 빛나게 하는 것은 600년 넘게 이어져 내려온 조선왕릉의 제례의식이다.

조선은 건국 이래 산릉제례를 엄격하게 지켜왔으며, 1945년 해방 후에는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이 기일에 올리는 제사인 능기신제(陵忌辰祭)의 전통을 이어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매년 왕과 왕비의 제향일에 산릉제례가 엄격하게 행해진다.

▷ 조선왕릉의 구성

조선왕릉은 죽은 자가 머무는 성(聖)의 공간과 산 자가 있는 속(俗)의 공간이 만나는 곳으로 그 공간적 성격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 능침공간 : 왕과 왕비의 봉분(능침, 능상)이 있는 성역 공간

   ** 제향공간 : 죽은 자와 산 자가 함께 하는 영역으로 제사를 지내는 공간(정자각)

   ** 진입공간 : 왕릉의 관리와 제례 준비를 위한 공간(재실)

 

 

【 방문일자 】2012년 4월 28일(토)

【 관람정보 】

*관람시간 : (매주 월요일 휴관)

                  하절기(3월~10월):9시~18시30분(매표:9시~17시30분)/동절기(11월~2월):9시~17시30분(매표:9시~16시30분)

*관람요금 : 어른(19~64세) \1,000

*교통안내 :

  - 지하철 : 삼송역(3호선) 5번출구에서 마을버스 #041번 환승

【 소재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233-126

【 서삼릉 탐방코스 】매표소-효창원&의령원-예릉-희릉-매표소

 

 

 

【 서삼릉 소개 】

*사적 제200호(1970년5월26일 지정)/유네스코 세계유산(2009년6월30일 지정)

*면적:194,331㎡

서삼릉이란 희릉(禧陵), 효릉(孝陵), 예릉(睿陵)을 일컷는 말이다.

희릉은 조선 제11대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의 능이다. 중종32년(1537) 경기도 광주에서 이곳으로 옮겨젔다. 원래는 중종의 정릉을 희능 곁에 썼으나, 명종17년(1562)에 정릉을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 성종의 선릉 곁으로 옮기면서 희릉만 남게 되었다

효릉은 중종의 아들인 제12대 인종의 능으로, 명종 즉위년(1545)에 조성되었다. 그 후 인종의 왕비 인성왕후 박씨가 선조10년(1577) 돌아가시자 나란히 자리한 쌍릉으로 조성되었다.

예릉은 제25대 철종의 능으로, 고종원년(1864)에 조성되었다. 그 후 철종의 왕비 철인왕후 김씨가 고종15년(1878)에 돌아가시자 나란히 자리한 쌍릉으로 조성되었다.

이밖에도 능 경내에는 세자의 원 3기와 역대의 후궁, 대군, 군, 공주 등의 묘 45기가 있다. 그 밖에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의 묘인 회묘, 태실 등이 있다.

왕릉에는 후궁, 왕자, 공주의 무덤을 만들 수 없으나 일제강점기에 멸망한 왕실의 무덤을 집중 관리한다는 이유로 왕실의 무덤을 모아 놓아, 서삼릉의 영역을 공동무덤으로 변형시켜 왕릉으로서의 존엄과 품격을 낮추고자 한 일제의 의도적인 계획에 의한 것이다.

또한 조선왕실의 생명존중사상이 담긴 태실을 일제강점기에 한꺼번에 옮겨지면서 원래의 위엄을 잃고 태비만이 줄지어 선 모습이다.

서삼릉의 전체 면적 중 790,000㎡가 농협중앙회 종우장과 한국마사회 종마장(원당종마공원)으로 사용되고 있어 공개지역인 예릉과 희릉, 비공개지역인 효릉을 양분시켜 놓고 있다.

비공개지역인 효릉은 매월 2,4주 토요일 10시에 한정적으로 관리인의 안내로 제한적으로 개방되고 있다.

2011년 7월 28일 서삼릉에서 '고양 서삼릉'으로 공식 명칭이 변경, 고시되었다.

 

 

               ▲ 의령원과 효창원에서 예릉으로 가는 길

 

◎ 예릉(睿陵)

농부에서 제왕이 된 강화도령 원범!!!

조선 제25대 철종(哲宗)과 그의 비 철인왕후(哲仁王后) 김씨의 능

 

               ▲ 금천교 앞에서 바라본 예릉 전체 전경

 

철종(1831~1863, 재위 1849~1863)은 장조(사도세자)의 증손자이며, 정조의 아우 은언군의 손자, 전계대원군의 셋째 아들이다.

사도세자가 죽고 정조가 세손이 되자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세력들이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 자기들이 위험할 것이라 염려하여 새 왕자를 추대하려는 음모를 꾸몄으나, 그 일이 발각되어 정조의 이복동생인 막내아들 은전군은 자결하고 은언군과 은신군은 제주도로 유배되나, 은신군은 제주도에서 병사하고 은언군은 강화도로 유배지를 옮긴다.

사도세자와 숙빈 임씨 사이에 태어난 은언군 인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큰아들인 상계군 담은 정조3년(1799) 홍국연의 음모로 모반죄로 몰려 강화도로 유배되어 자살하였고, 은언군도 아내 송씨와 큰며느리 신씨가 순조1년(1801) 천주교 신자로 사사되면서 이때 사사되었다.

헌종10년(1844) 은언군의 아들 이광과 은언군의 손자 원경의 신임을 받고 있던 이원덕과 민진용이 원경을 왕으로 추대하여 모의를 꾸미다가 발각되어 모두 능지처참을 당하게 되는 '민진용의 옥'에 연루되어 전계대원군 이광의 첫째아들 원경이 사사되고, 둘째아들 경응과 세째아들 원범만이 살아남는데 이들은 또 다시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천애고아가 된 두 사람은 강화도에서 나무를 하고 농사를 짓는 농사꾼으로 살던 중 5년여가 지난 1849년 6월 6일 헌종이 재위 15년만에 후사없이 승하하자 안동김씨 척족들이 자신들의 군력을 유지하고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하여 왕은 왕에게 후사가 없을 경우 본래 항렬을 따져 동생이나 조카벌이 왕통을 잇게 하는게 원칙으로 이는 종묘에서 선왕에게 제사를 올릴 때 항렬이 높은 이가 항렬이 낮은 이에게 제사를 올리게 해서는 안된다는 법도 때문인데, 이를 무시하고 순조의 비 순원왕후인 대왕대비에 의하여 헌종의 7촌 아저씨벌이 되는 강화도령 원범이 영입되어 19세때 봉영 의식을 행한 뒤 6월 8일 덕완군에 봉해지고 이튿날인 6월 9일 창덕궁 희정단에서 관례를 행한 뒤 인정전에서 조선 제25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나이가 어리고 학문을 연마한 바 없다는 이유로 3년간은 대왕대비인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고, 21세 되던 1851년 9월에는 대왕대비의 근친 김문근의 딸을 왕비로 맞이 하였다. 재위 14년동안 안동김씨의 세도로 인하여 국정을 바로 잡지 못하고 철인왕후 김씨를 포함하여 8명의 부인을 두었으나 유일한 혈육으로는 숙의 범씨와의 사이에 영혜옹주 한 명을 두고1863년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였다.

고종 원년(1864)에 조성되었다.

 

 

철인왕후(1837~1878)는 철종 대에 권력을 마음껏 휘둘렀던 영은부원군 김문근의 딸이자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근친으로 1851년 열다섯의 나이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1858년 원자를 낳았으나 곧 죽었다.

왕비 김씨는 탐욕스러운 그녀의 아버지와는 달리 말수가 적고 즐거움이나 성냄을 얼굴에 잘 나타내지 않는 등 부덕이 높은 것으로 칭송이 자자했다.

1863년 철종이 서른셋의 젊은 나이로 죽자 명순의 존호를 받고 이듬해 고종이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었다.

1866년 휘성(徽聖)에 이어 정원(正元), 1873년에 다시 수령(粹寧)의 존호를 받아 명순휘성정원수령대비가 되었다.

고종15년(1878) 42세의 나이로 창경궁 양화당에서 승하하였다.

 

능제는 봉분을 난간석으로 연결한 쌍릉이다.

철종 능인 예릉의 참도는 황제로 추존된 후 순종황제 때인 1908년 중국 황제 능의 예에 따라 3도로 다시 조성되었다.

 

 

 

  

               ▲ 예릉의 정자각 : 측면(사진 上)

                                         좌,우 대각선 방향에서 바라본 전경(사진 中)

                                         정면과 용마루의 잡상들(사진 下)

 

               ▲ 예릉의 비각과 비각안에 모셔진 신도비

 

               ▲ 정자각과 능으로 이어지는 참도(사진 左)와 주춧돌만 남아있는 수복방터

 

 

               ▲ 예릉에서 서삼릉 입구로 가는 길(사진 上)

                  예릉에서 희릉가는 길(사진 下)

 

◎ 희릉(禧)

조선 제11대 중종(中宗)의 제1계비(繼妃)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의 능

 

 

                ▲ 입구에서 바라본 희릉 전체 전경(사진 上)

                   희릉의 능침(능산) 공간 모습(사진 下)

 

장경왕후(1491~1515) 윤씨는 파원부원군 영돈녕부사 윤여필의 딸로 1491년 호방현 사제에서 태어나 고모인 월산대군의 부인에 의해 양육되었다.

1506년 중종의 후궁인 숙의로 책봉되었으나 , 정비인 단경왕후 신씨가 폐위되자 1507년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1515년에 세자인 세자인 인종(仁宗)을 낳은 후 산후병으로 인하여 7일만에 25세를 일기로 경복궁 별전에서 승하하였다.

중종32년(1537) 경기도 광주에서 이곳으로 옮겼으며, 원래는 중종의 정릉(靖陵)을 희릉 곁에 썼으나, 명종17년(1562)에 정릉을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 성종의 선릉(宣陵) 곁으로 옮기면서 희릉만 남게 되었다.

소생으로는 인종 외에 효혜공주가 있다.

능제는 봉분에 병풍석이 없고 난간석만 두른 단릉으로 조선 전기의 능제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왕릉의 신도는 강까지 연결되어 있었으나, 모든 왕릉에서 거의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는데 희릉의 경우 아직 남아 있다.

 

 

 

 

 

               ▲ 예릉의 정자각 : 측면(사진 上)

                                         좌,우 대각선 방향에서 바라본 전경(사진 中)

                  정자각과 능으로 이어지는 참도와 정자각의 정면 모습(사진 下)

 

               ▲ 예릉 정자각 용마루의 잡상들

               ▲ 예릉의 능침과 병풍석 

 

 

                ▲ 예릉 능침공간의 문인석과 무인석

 

               ▲ 희릉에 아직 남아있는 정자각 뒷편의 신도

 

 

               ▲ 의령원과 효창원

 

◎ 의령원(懿寧園)

조선 제21대 영조의 아들 장조(사도세자)의 제1자 의소세손의 묘소이다.

의소세손(1750~1752)은 이름은 정이며, 영조26년(1750) 8월 27일에 태어나 영조28년(1752) 3월 4일 3세의 어린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처음에는 서울시 서대문구 북아현동(중앙여고 내)에 있었으나, 1949년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비문의 그씨는 영조의 어필이다.

 

               ▲ 의령원(사진 上)과 효창원(사진 下)

 

◎ 효창원(孝昌園)

조선 제22대 정조의 큰아들 문효세자 묘소이다.

문효세자(1782~1786)는 의빈 성씨의 소생으로 정조6년(1782)에 태어나 정조10년(1786) 5월 11일 5세의 어린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처음에는 서울시 용산구 청파동 효창공원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인 1944년 서삼릉 경내로 이장되었다.

 

 비공개 지역

◎ 효릉(孝)

조선 제12대 인종(仁宗)과 그의 비 인성왕후(仁聖王后) 박씨의 능

인종(1515~1545, 재위 1544~1545)은 중종의 맏아들로 제1계비 장경왕후의 소생이다. 이름은 호, 자는 천윤이다.

1520년 여섯 살의 어린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어 무려 25년간이나 세자로 머물러 있다가 1544년 중종이 승하하자 창경궁 명정전에서 즉위하였다. 그러나 재위 8개월 보름 남짓 왕위에 머물러 있다가 원인 모를 병으로 드러누워 시름시름 않다가 후사도 하나 남겨놓지 않고 경복궁 소침에서 승하하였다. 문정왕후 소생의 이복동생인 명종이 대를 이었다.

생모 장경왕후가 산후병으로 7일만에 승하하여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 윤씨의 손에서 자랐으며, 성품이 조용하고 형제간에 돈독한 우애, 지극한 효성과 금욕적인 생활 등으로 당시 사람들은 그를 성군이라 일컬었다.

3세 때부터 글을 읽을 정도로 총명하여 1522년 여덟 살의 나이로 성균관에 들어가 매일 세 차례씩 글을 읽었다. 게다가 철저한 금욕 생활을 하여 동궁에 머물 당시에는 옷을 화려하게 입은 궁녀는 모두 내쫓았으며, 일체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아 도학 사상에 깊이 매료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성품은 계모 문정왕후의 표독하고 사악한 성격을 방치하는 요소로 작용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단축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명종 즉위년(1545)에 조성되었다.

 

인성왕후(1514~1577)는 금성부원군 박용의 딸이다. 1524년 11세의 나이로 세자빈에 책봉되고, 1544년 인종 즉위와 더불어 왕비가 되었다.

슬하에 자녀가 없었으며, 인종 사후 32년을 더 살다가 선조10년(1577) 64세의 일기로 경복궁에서 승하하였다.

 

인종의 봉분에는 병풍석이 둘러져 있으나 인성왕후 봉분에는 병풍석이 생략되어 간략하며, 능제는 난간석으로 두 봉분을 연결한 쌍릉이다.

 

◎ 소경원(昭慶園)

조선 제16대 인조의 맏아들 소현세자의 묘소이다.

소현세자(1612~1645)는 인열왕후 한씨의 소생이다. 1625년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세자빈은 민회빈 강씨이다. 세자는 정묘호란(1627)때 전주로 내려가 남도 민심을 수습하였고, 병자호란(1636)이 일어나자 1637년 동생 봉림대군 및 대신들과 함께 청나라 심양에 인질로 잡혀갔다. 심양에 머무르는 동안에는 단순한 인질이 아닌 조선을 대표하는 외교적 재량권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이로인해 친청적인 인물로 보여 세자로는 부적격자로 보였다.

소현세자는 서양문물에 심취하여 천주교 신부인 아담 샬 등과 친교를 맺고 그를 통하여 서양의 천문학과 수학 등을 배우기도 하였다.

1645년 2월에 9년간의 인질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였으나 당시 조정에서의 반청친명정책으로 인해 박대를 받았다. 그해 4월 갑자기 병으로 4일만에 급사하였다.

인조실록에는 시신의 구혈에서 출혈하고 있었으며 진흑으로 변해 있었다고 하여 독살 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 태실

태실이란 왕실에서 아기가 태어 났을 때 그 태반과 탯줄을 묻는 석실을 말한다.

태실을 모실 곳은 풍수지리상의 길지를 골랐으며, 태실을 모신 후에는 이를 보호하기 위하여 여러 명의 관리인을 두었다.

조선 왕실에서 산모가 출산하면 탯줄과 태반은 길일을 택해 깨끗하게 씻은 다음 미리 만들어 둔 태항아리에 넣었다. 작은 항아리 바닥에는 동전을 넣은 후 그 위에 태를 놓고 항아리 입구를 기름종이로 덮은 다음, 태항아리를 큰 항아리에 넣어 태실까지 봉송했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아기에게 영양을 공급하고 안락하게 감싸주는 역할을 하던 탯줄과 태반을 정성껏 모셨던 조선 왕실에서 당시 왕실의 생명존중사상을 엿볼 수 있다.

일제에 의해 이곳으로 옮겨진 54기의 태실은 역대 왕의 태실 19기와 왕자의 태실 35기로 이루어져 있다. 1996년 3월 문화재관리국의 발굴조사에서 조선 역대 왕 태비석군 가운데 17기의 하부 구조를 조사한 결과 가짜인 것으로 확인되었는데,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경우 외호는 도굴로 인해 파괴되었고 내호는 일제시대때 만든 질그릇인 것을 비롯해 중종까지 모두 9기의 태호는 대부분 일제시대 때 만등 백자 또는 질그릇으로 판명됐다.

세종대왕과 중종은 내호가 아예 발견되지 않는 등 조선 태조부터 11대 중종까지 역대 왕의 태항아리(태호)가 대부분 일제에 의해 가짜로 바꿔치기 당한 것으로 드러났다.

 

 

 

 

                ▲ 종마공원 : 안내문(사진 上)

                                   서삼릉 옆 종마공원 입구와 개방안내(사진 中)

                    농협중앙회 종우장 초지(사진 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