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은 관광명소/세계유산 조선왕릉

세계유산 조선왕릉! 영월 장릉(莊陵)

왕마구리 2013. 8. 17. 02:03

이번 탐방은 여름휴가를 맞아 강원도 영월과 충청북도 제천의 유명 관광지를 둘러보기로 하고 2박3일간의 일정으로 탐방을 하였다.

여름 폭염으로 야외활동하기에는 부적함한 날씨에, 장마가 끝나가는 시기인지라 예측할 수 없는 소낙비가 자주 내려 제대로 된 관광지 탐방에는 약간의 어려움이 있었지만 탐방하였던 영월과 제천의 관광지를 총 10편으로 나누어 간략하게 소개를 하기로 한다.

 

- (영월)신비로운 자연의 진풍경! 한반도 지형

- (영월)서강과 어우러진 한 폭의 수묵화! 선돌

- (영월)단종의 슬품을 간직한 육지속의 작은 섬! 청령포

- (영월)세계유산 조선왕릉! 장릉(莊陵)

- (영월)단종의 얼과 혼이 숨쉬는 곳! 단종 관련 유적 : 보덕사&금몽암, 관풍헌&자규루, 충절사&영모전, 금강정&민충사(낙화암)

- (영월)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의 하나! 법흥사

- (영월)신선을 맞이하는 바위! 요선암과 요선정 : 요선정, 무릉리 마애여래좌상

- (제천)삼한시대 축조된 가장 오래된 저수지! 의림지와 제림

- (제천)모전탑의 진수! 장락동 칠층모전석탑

- (제천)제천근교의 유일한 유원지! 탁사정

 

【 일 정 표 】2013년 8월 4일(일)-6일(화) 2박3일

                     ◈ 첫째날(8/4) 오후 : (영월)한반도지형-선돌-장릉-보덕사&금몽암-청령포

                     ◈ 둘째날(8/5) : (영월)관풍헌&자규루-충절사&영모전-금강정&민충사(낙화암)-요선정-법흥사-(제천)의림지(야경)

                     ◈ 세째날(8/6) : (제천)의림지-장락동 칠층모전석탑-탁사정

 

◀ 세계유산 조선왕릉! 장릉(莊陵) 

영월 10경! 조선 6대 단종대왕의 릉

 

 

♧♧ 영월 장릉(寧越 莊陵)

*사적 제196호(1970년05월26일 지정)

*소재지: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단종로 190(영흥리)

*면적:3,495,236㎡

조선 6대 단종대왕(端宗大王 1441~1457, 재위:1452~1455)의 무덤이다.

문종의 원자로서 세종23년(1441) 7월23일 경복궁 자선당에서 탄생하였으며 휘가 홍위(弘暐)이고, 모후는 현덕왕후 권씨이며 모후 권씨는 단종 탄생 익일에 산후병으로 승하하였다. 세종30년(1448) 4월3일 왕세손으로 책봉되었으며, 문종 즉위년(1450) 7월20일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문종2년(1452) 5월14일 문종이 승하함에 이 해 5월18일 경복궁 근정문에서 즉위하였으니 춘추 12세 였다.

문종이 임종에 앞서 단종의 유충함을 염려하여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김종서 등에게 보좌를 유언으로 남겼으나 고명대신 등이 단종 원년(1453) 10월10일 계유정란으로 피살되고 문종의 아우이며 왕숙인 수양대군이 영의정이 되어 군국대사를 좌지우지하였고 수양은 동복제 안평대군이 고명대신과 불궤를 꾀하였다 하여 강화도로 추방하고 단종3년(1455) 윤6월11일 역시 동복제 금성대군을 역모의 죄로 종친, 궁인, 시신과 함께 유배시키자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선양하고 상왕이 되어 수강궁으로 이이하였다.

세조3년(1457) 9월 순흥에 유배되었던 금성대군이 단종비의 아버지 송현수와의 단종복위계책이 발각되자 노산군은 폐서인이 되었고 이 해 10월24일 사사되었으니 춘추 17세였다.

 

                  ▲ 단종릉가는 길

 

단종의 유해는 동강에 흘렀는데 영월호장 엄흥도가 국법을 어기고 어시를 수습하여 발산 동을지 신좌을향(남서에서 북동향)에 밀장하였으며, 중종11년(1516)에 노산묘를 찾으라는 왕명이 있었고, 고노호장 엄수, 양인 지무작, 관노 이말산 등의 진언으로 이해 12월15일 성분하였으나 다시 방치되었고, 중종36년(1541) 당시 영월군수 박충원이 현몽에 따라 노산묘를 찾고 묘소를 수축 봉제하였다.

선조13년(1580) 강원감사 정철의 상계에 따라 상석, 표석, 장명등, 망주석을 세웠다.

임란이후 봉묘치체가 다시 소흘해졌으며 숙종7년(1681) 7월21일 노산군을 노산대군으로 추봉하였고, 숙종24년(1698) 11월6일 추복하여 묘호를 단종으로 하고 종묘 영녕전에 부묘하였으며 릉호를 장릉이라 하였다.

단종이 승하한지 241년만에 변례를 버리고 왕실의 정례를 되찾게 된 것이다.

 

                  ▲ 단종릉

 

((장릉의 주요 상설象設))

곡장은 3면이고 병풍석과 난간석은 세우지 않았다.

숙종24년(1698) 11월 단종의 묘호와 능호를 추복하면서 능상의 석물들은 후릉의 예를 본받아 행하라는 교지에 따른 것이며, 능전에 상석이 1좌가 있고, 그 좌우에 망주석 1쌍이 있다. 그 한 단 아래에 사각옥형 명등석 1좌와 문인석과 마석 각 1쌍이 상면 설치되어 있고 무인석은 없다. 이는 추봉된 경릉이나 정릉의 예에 의한 것이며 사각옥형 명등석은 정릉에 이어 장릉에서 시작된다.

 

                  ▲ 정자각

 

능침 언덕 아래 남측에 정자각이 있으며 정자각은 능침좌향과 같은 방위로 세우는 것이나 장릉은 능침좌향이 서남에서 동북향인데 비해 정자각은 남향으로 건립되었으니 이는 단종이 사사된 후 엄흥도에 의하여 암장되었다가 숙종24년(1698) 추복되고 영조9년(1733)에 정자각을 건립된 것이다.

 

 

 

                  ▲ 제향공간(사진 上)

                     비각과 비각내의 단종비(사진 下)

 

비면에 조선국단종대왕장릉(朝鮮國端宗大王莊陵)이라 썼고 음기가 있으며 영조9년(1733)에 세운 것이다. 정자각 서남방에 영전이 있으며 장릉 봉제시 사용되었고 영천비라고 세워진 비석이 있으며 정조15년(1791)에 세운 것이다.

 

 

                  ▲ 영천(靈泉)

                      장릉 서쪽에 있는 우물로써 정조15년(1791)에 어명으로 영월부사 박기정이 수축하여 한식 때 제정으로 사용하였다.

                      보통 때에는 조금씩 샘물이 솟았으나, 매년 한식 때 제향을 지낼 때면 뮬이 많이 용출되었다. 우물의 깊이는 1.5m 정도이며,

                      하부는 화강석 돌담으로 둥글게 쌓여있고 상부는 정방형이다. 

 

                  ▲ 264인의 위패를 모신 장판옥과 제사를 지내는 제단인 배식단 

                  ▲ 영천 앞의 느릅나무 보호수(수령 370년, 수고 22m, 나무둘레 3.9m)

 

정자각 남측에 홍살문이 잇으며 홍살문 남측에 단종을 위하여 순사한 충신들을 봉제하는 배식단에 봉향되는 충신위 32인, 조사위 198인, 환관군노 28인, 여인위 6인 모두 264인의 위패를 봉안한 배식단사가 있으며 정조15년(1791) 2월 정조의 교지에 따라 당시 영월부사 박기정이 건립한 것이다.

 

                  ▲ 홍살문과 삼도

 

홍살문에서 장릉주차장에 이르는 도로 북편에 재실이 있으며 배식단사와 재실 중간에 엄흥도 정려각이 있다.

 

 

                  ▲ 재실  

                  ▲ 엄흥도 정려각

                     엄흥도의 충절을 알리기 위해 영조2년(1726) 세운 것이다.

                     충신 엄흥도가 관풍헌에서 1457년10월24일 조정에서 내려진 사약을 받고 승하하여 그 옥체가 강물에 버려지자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어명에도 불구하고 가족과 함께 단종의 시신을 암장하여 충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순조33년(1833)에 공조판서로 추증되었고, 고종13년(1876)에 충의공이란 시호를 받았다.

 

영조2년(1726) 엄흥도를 정려하고 정조16년(1792)에 정려비와 비각을 영월읍 영흥리에 세웠는데 영월 도시계획도로에 편입되어 1969년 5월 이곳에 이건되었으며, 주차장 북쪽에 낙촌비각과 낙촌기적비가 있다. 낙촌은 문경공 박충원의 호로서 박충원이 중종36년(1541) 영월군수로 부임하여 현몽으로 노산묘를 찾아 수축 봉제한 사적을 기록하였으며 1973년 4월 박충원의 후손들이 세운 것이다. 낙촌비각 동남쪽에 배견정이 있으며 정조16년(1792)에 영월부사 박기정이 건립한 것이다.

 

 

 

                   ▲ 낙촌비각

                  ▲ 배견정

 

능역내에 능제에 의하여 정하여진 것 외에 배식단사, 정려비, 기적비, 정자가 있는 곳은 장릉 뿐이며 왕위를 찬탈당하고 사사된 단종과 관련된 것들이다.

 

 

 

 

 

 

 

 

 

 

 

 

 

 

 

 

 

 

 

 

 

 

 

 

 

조선왕릉 망주석 중 유일하게 세호가 없다.

 

봉분 좌우에 세우는 기둥인 망주석에 조각하는 세호는 처음엔 별 다른 형태를 갖지 못하다가  점차 동물의 형상을 갖추게 되었다.

그 의미와 용도에 관해서는 특별히 정립된 이론은 없다.

영월 장릉의 망주석은 조선 왕릉 중 세호가 없는 유일한 것이다.

 

 

 

 

 

 

 

 

 

 

참도가 'ㄱ'자로 꺾여 있어 독특하다.

 

참도란 왼쪽은 신의 길인 신도, 오른쪽 낮은 길은 임금이 다니는 어도로 이루어져 있다.

영월 장릉은 처음부터 왕릉으로 택지된 곳에 조성된 능이 아니기 때문에 여느 조선왕릉의 구조와 다른 점이 많다.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참도는 일반적으로 일자형으로 조성되는데 반해 영월 장릉은 'ㄱ'자형으로 꺾여 있다.

 

 

 

<< 세계유산 조선왕릉 >>

조선왕릉은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2009년 6월30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제되었다.

519년의 역사를 지닌 조선은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았다. 조상에 대한 존경과 숭모를 매우 중요한 가치로 여긴 조선은 역대 왕과 왕비의 능을 엄격히 관리했다. 그리하여 42기 능 어느 하나도 훼손되거나 인멸되지 않고 모두 제자리에 완전하게 보존되었다.

조선왕릉은 우리의 전통문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600영 년의 제례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

조선 왕족의 무덤은 모두 119기에 이르며, 이 가운데 능이 42기이고, 원이 13기, 묘가 64기이다.

조선 왕족의 무덤은 무덤 주인의 신분에 따라 그 명칭을 달리하는데, 능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말하며, 원은 왕세자와 왕세자비 또는 왕의 사친의 무덤을 말하고 그 외 왕족의 무덤은 일반인의 무덤처럼 묘라고 한다.

42기의 능 가운데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태조 원비 신의왕후의 능), 후른(정종과 정안왕후의 능)을 제외한 40기의 능이 남한에 있다.

500년이 넘는 한 왕조의 무덤이 이처럼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것은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기 힘들며 문화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조선왕릉의 구성은 죽은 자가 머무는 성(聖)의 공간과 산 자가 있는 속(俗)의 공간이 만나는 곳으로 그 공간적 성격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 능침공간 : 왕과 왕비의 봉분(능침, 능상)이 있는 성역 공간

- 제향공간 : 죽은 자와 산 자가 함께 하는 영역으로 제사를 지내는 공간

- 진입공간 : 왕릉의 관리와 제례준비를 위한 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