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은 관광명소/세계유산 조선왕릉

세계유산 조선왕릉! 파주 삼릉(坡州 三陵)

왕마구리 2014. 11. 29. 17:14

◀ 세계유산 조선왕릉 파주 삼릉(坡州 三陵) ▶

 

조선왕릉은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2009년 6월 30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519년의 역사를 지닌 조선은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아 조상에 대한 존경과 숭모를 매우 중요한 가치로 여겨8 역대 왕과 왕비의 능을 엄격히 관리하였다. 그리하여 42기의 능 어느 하나도 훼손되거나 인멸되지 않고 모두 제자리에 완전하게 보전되었다.

조선왕릉은 우리의 전통문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600여 년 전의 제례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

 

▷ 조선왕릉의 분포

조선 왕족의 무덤은 모두 119기에 이르며, 이 가운데 능이 42기이고, 원이 13기이며, 묘가 64기이다.

조선 왕족의 무덤은 무덤 주인의 신분에 따라 그 명칭을 달리하는데 능(陵)은 왕과 왕비의 무덤,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빈 또는 왕의 사친의 무덤, 그 외 왕족의 무덤은 일반인의 무덤처럼 묘(墓)라고 한다.

42기의 능 가운데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태조 원비 신의왕후의 능), 후릉(정종과 정안왕후의 능)을 제외한 40기의 능이 남한에 있다.

남한에 위치한 40기의 왕릉 중 강원도 영월에 위치한 장릉(단종의 능)을 제외한 39기의 능이 서울과 경기도 일원에 자리를 하고 있다. 500년이 넘는 한 왕조의 무덤이 이처럼 온전하게 보전되어 있는 것은 세계에 그 유래를 찾기 힘들며 문화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 조선왕릉의 제향

조선왕릉의 가치는 형태적 보존에만 있지 않고, 조선왕릉을 더욱 더 빛나게 하는 것은 600년 넘게 이어져 내려온 조선왕릉의 제례의식이다.

조선은 건국 이래 산릉제례를 엄격하게 지켜왔으며, 1945년 해방 후에는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이 기일에 올리는 제사인 능기신제(陵忌辰祭)의 전통을 이어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매년 왕과 왕비의 제향일에 산릉제례가 엄격하게 행해진다.

▷ 조선왕릉의 구성

조선왕릉은 죽은 자가 머무는 성(聖)의 공간과 산 자가 있는 속(俗)의 공간이 만나는 곳으로 그 공간적 성격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 능침공간 : 왕과 왕비의 봉분(능침, 능상)이 있는 성역 공간

   ** 제향공간 : 죽은 자와 산 자가 함께 하는 영역으로 제사를 지내는 공간(정자각)

 

 

                    ▲ 밖에서 바라본 파주 삼릉 진입공간인 재실 전체 전경(사진 上)

                       재실 안 전경(사진 下)

 

                    ▲ 파주 삼릉 재실 외부(사진 上)

                       파주 삼릉 재실 앞 전경(사진 下左)

 

   ** 진입공간 : 왕릉의 관리와 제례 준비를 위한 공간(재실)

 

 

 

【 방문일자 】2014년 11월 27일(목)

【 관람정보 】

*관람시간 : (매주 월요일 휴관)

                  2월~5월,9월~10월:9시~18시(매표:9시~17시)/6월~10월:9시~18시30분(매표:9시~17시30분)/11월~1월:9시~17시30분(매표:9시~16시30분)

*관람요금 : 어른(19~64세) \1,000

*문의(파주삼릉관리소) : T.031)-941-4208

 

 

                    ▲ 파주 삼릉 입구의 매표소(사진 左)와 역사문화관(사진 右)

 

*교통안내 :

  - 지하철 : 구파발역(3호선) 2번출구에서 버스 #9709번, 9710번, 760번, 30번, 31번 환승-파주삼릉 입구 하차-도보 10분

【 소재지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삼릉로 89

【 파주 삼릉 탐방코스 】매표소→역사문화관→재실→공릉→순릉→영릉→매표소

 

 

【 파주 삼릉 소개 】

*사적 제205호(1970년5월26일 지정)/유네스코 세계유산(2009년6월30일 지정)

조선시대 왕릉군으로, 공릉, 순릉, 영릉의 세 능을 말한다.

 

공릉(恭陵)

조선 제8대 예종의 원비인 장순왕후(1445~1461)의 능이다.

 

 

장순왕후는 세조 때의 공신 상당부원군 한명회의 딸로 세조6년(1460) 세자빈으로 책봉되어 1461년 원손 인성대군을 낳고 산후병을 앓다가 17세 어린 나이로 승하하였다.

 

 

처음에 왕후릉이 아닌 세자빈 무덤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병풍석, 난간석, 망주석은 없다. 다만 양석과 둘레석을 둘러 무덤을 보호하게 하였다. 문인석의 옷주름 등이 조선 초기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서툴게 만들어졌다.

 

 

                    ▲ 공릉의 꺾여진 참도(사진 上)

                       정자각의 아름답고 선명한 무늬가 남아있는 신계(사진 下)

 

공릉은 1층, 2층의 구분이 없으며, 무덤 아래에 있는 붉은 문(홍살문)에서 무덤에 이르는 참도가 원래는 직선으로 만들어진 것이 일반적인 예이나 이곳은 지형 조건에 의해서 중간지역이 꺾여 있는데, 이러한 예는 강원도 영월에 조성된 단종의 능인 장릉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또한 정자각의 신계에는 무늬가 아름답고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이 특징이다.

 

 

                    ▲ 공릉의 정자각(사진 上)

                       정자각의 측면(사진 下左)과 지붕위의 군상들(사진 下右)

 

*세조8년(1462) 장순왕후 안장, 세자빈묘로 조성

*성종1년(1470) 공릉으로 지정

*제향일 : 매년 10월 세째 일요일

 

 

                    ▲ 공릉의 비각과 비

 

순릉(順陵)

조선 제9대 성종의 원비 공혜왕후(1456~1474)의 능이다.

 

 

공혜왕후는 세조 때의 공신 상당부원군 한명회의 딸로 공릉에 안치된 장순왕후와 친자매 사이이다.

세조13년(1467) 12세의 나이로 자을산군(성종)과 가례를 올려 천안군 부인이 되었다. 1469년 성종이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5년 뒤 성종5년(1474) 19세의 나이로 자녀없이 승하했다.

 

                    ▲ 순릉의 능침 공간 

 

 

                    ▲ 순릉의 정자각(사진 上)

                       정자각의 측면(사진 下左)과 신계(사진 下右)

 

무덤 밑 둘레에는 12칸의 난간석이 둘러져 있고 양석, 호석, 망주석 등의 석물이 서 있다. 난간석에 표현된 작은 기둥은 건원릉과 태종의 헌릉을 본받은 것으로 조성 당시부터 파주 삼릉 중에서 유일하게 왕릉으로 만들어져 조선 초기 무덤에 쓰인 석물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 순릉의 수복방(사진 左)과 수라간(사진 右)

 

*성종5년(1474) 공혜왕후 안장, 순릉 조성

*제향일 : 매년 5월9일(양력)

 

 

                    ▲ 순릉의 비각(사진 左)과 비(사진 右)

 

 

『아버지의 권력욕에 2대에 걸쳐 왕후가 된 한명회의 딸들』

파주 삼릉 중 공릉과 순릉은 친 자매의 능묘이다.

세조 때의 일등공신 한명회는 첫째딸을 예종에게 시집보내고 둘째딸을 성종에게 시집보냈는데, 이들이 바로 장순왕후와 공혜왕후로 친자매이자 시숙모와 조카며느리가 되는 기묘한 관계를 이루고 있다.

수양대군을 보좌한 최고의 책사로 계유정란을 성공시켜 일등공신에 오른 한명회는 세조의 총애로 조정을 장악하고 정난에 가담했던 인물들과 친인척관계를 맺어 권력의 기반을 다졌다. 이 과정에서 큰 딸을 예종비로, 나중에는 작은 딸을 성종비로 만들어 딸들을 2대에 걸쳐 왕후로 삼게 했고, 세조의 총애를 받던 신숙주와도 인척관계를 맺고 권람과도 사돈 관계를 맺었다.

그는 세조이래 예종, 성종조까지 공신들과 고관요직을 독점하다시피했으며, 엄청난 부를 획득했고 노년에는 부원군 자격으로 정사에 참여, 대단한 권세를 누리다가 73세로 세상을 떠났다. 한명회는 노년에 한가로이 갈매기와 벗하며 살고 싶다고 자신의 호를 붙여 '압구정'이라는 정자를 지었으나, 세상 사람들은 압구정을 가리켜 자연과 벗하는 곳이 아니라 권력과 벅하는 곳이라고 조롱했으며, 그가 죽은 후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 사건에 관여하였다 하여 관을 파내고 시체를 들어내 다시 죽이는 형별인 부관참시를 당하는 등 수모를 당했다.

 

영릉(永陵)

조선 제21대 영조의 맏아들 추존 진종(1719~1728)과 효순소황후(1715~1751)의 쌍릉이다.

 

 

 

진종은 영조1년(1725) 7세의 나이에 왕세자(효장세자)로 책봉되고 영조3년(1727) 가례를 올렸으나 10세에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효장세자의 이복동생 사도세자를 왕세자로 삼았으나, 영조38년(1762) 사도세자를 폐위하고 당시 그의 아들 정조인 세손을 효장세자의 양자로 삼아 입적시켰다. 당쟁이 휩싸여 사도세자가 영조의 명으로 뒤주에 갇혀 죽고 그의 아들 정조가 즉위한 후 진종으로 추존되었다.

효순소황후는 풍릉부원군 조문명의 딸로, 영조3년(1727) 9월27일 세자빈(효순현빈)으로 책봉되었고, 진종이 죽고 난 뒤 37세까지 홀로 살다가 소생없이 승하하였다.

정조가 즉위한 후 진종과 함께 효순현빈은 효순왕후로 추존되었고, 1908년 데한제국 황제인 순종에 의해 황제와 황후로 다시 한 번 추존되었다.

 

 

왕릉과 비릉은 쌍릉으로 처음에 왕자묘로 조성되었기 때문에 병풍석과 난간석은 세우지 않았으나, 석상을 앞에 두었다. 장명등은 중간에 배치하였으며 무덤 밑둘레에 양석과 호석을 둘러 무덤을 보호하게 하였다.

 

                    ▲ 영릉의 전각들이 있는 제향공간과 그 뒷편의 능침공간

 

                    ▲ 영릉의 정자각 측면(사진 上)과 신계(사진 下)

 

무덤 아래의 정자각은 영조의 명에 의해서 옛날 방식으로 세웠다. 특이한 점은 두 채의 비각에 세 개의 비가 세워져 있는데 이는 효장세자의 왕자묘를 조성하며 세운 비각가 비, 그리고 왕과 왕후로 추존된 후 세운 비각과 비가 있기 때문이다. 3개의 비석에는 추존 과정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 영릉의 효장세자 사후 조성되었던 왕자묘 때의 비각과 비

 

 

                    ▲ 영릉의 왕(左)과 황제(右)로 추존된 후 세워진 두개의 비(사진 上)

                       두개의 비가 보관된 비각(사진 下)

 

*영조5년(1729) 효장세자 안장, 세자묘로 조성

*영조28년(1752) 효순왕후 안장

*정조원년(1776) 진종과 효순왕후로 추존, 영릉으로 지정

*융희2년(1908) 진종소황제와 효순소황후로 추존

*제향일 : 매년 9월19일(양력)

 

                    ▲ 순릉가는 산책로

                    ▲ 산책로 주변의 쉼터

                    ▲ 영릉가는 산책로

 

 

                    ▲ 영릉에서 매표소로 가는 산책로